낸시 드류
- 감독
- 앤드류 플레밍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엠마 로버츠, 크레이그 겔리스, 리치 쿠퍼, 맥스 티에리엇, 에이미 브루크너, 케이 파너베이커, 클리프 베미스, 테이트 도노반, 데이빗 도티, 로라 해링, 모니카 파커, 캐롤라인 애런, 마샬 벨, 다니엘라 모넷, 켈리 비츠
처음 본 슬래셔 영화는, 중학교 때 국도극장에서 본 < 13일의 금요일 >이었다. < 오멘 >과 < 엑소시스트 > 아니면 < 월하의 공동묘지 > 등 이미 보았던 공포영화에서는 귀신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등장했다. <13일의 금요일>은 달랐다. 분명히 사람인 누군가가 정글칼이나 도끼 같은 것으로 마구 난도질한다. 액션영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도가 심했다. 섬뜩했다. 물론 1편에는 제이슨이 나오지 않는다. 어린 제이슨이 나오기는 하지만 회상이고, 꿈이다. 그러니까 사이코패스가 대량살인을 벌이는 액션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2편으로 이어지며 진짜 제이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제이슨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된다. 번개를 맞아 무덤에서 되살아나고, 물속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죽지 않는 불로불사의 존재. 슬래셔 영화의 원조라 할 존 카펜터의 < 할로윈 >에 나오는 살인마 마이크 마이어스는 처음부터 악마였다. 존 카펜터는 마이어스가 순수한 악의 존재라고 말했다. 그를 쫓는 사람들은, 그의 가족조차도 어느 순간 알게 된다. 트라우마나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님을. <할로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알프레드 히치콕의 < 사이코 >는 현실에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 학대를 받다가, 어머니가 죽은 후 자신의 내부에 어머니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비극. 그가 왜 ‘사이코’가 되었는지는 최근에 만들어진 드라마 < 베이츠 모텔 >에서 상세하게 그려낸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는 왜 어머니를 무서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어머니를 부활시킬 수밖에 없었는지를. 80년대의 슬래셔 영화는 섬뜩했다. 대량 살인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무서우면서도 상쾌했다. 속편이 거듭되며 무섭다기보다는 즐기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제이슨 그리고 많이 다르지만 <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는 점점 스타가 되어 갔다. 제이슨의 하키 마스크, 프레디의 줄무늬 셔츠와 손에 달린 칼을 보는 것만으로도 환호성을 지르게 된다. 아무리 무서운 것도 익숙해지면, 그 정체를 충분히 알고 나면 친숙해진다. < 링 >의 사다코마저도 이제는, 어떤 속편에 나와도 그저 코믹하게만 여겨진다. 캐릭터는 소중하지만 공포영화의 캐릭터는 거듭될수록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 점에서 샘 레이미의 < 이블 데드 >가 2편에서부터 코믹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지금 드라마 <애쉬 대 이블 데드>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다. 웃으며 즐기는 과거의 향수. 그것이야말로 컬트의 미덕이다. < 더 파이널 걸스 >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80년대 슬래셔 영화에 혹한 적이 한 번은 있어야 한다. 그 때 열광했던 것이 지금은 창피한 일일지라도, 어렸을 때에 슬래셔 영화를 즐겨 보았다면 <더 파이널 걸스>는 보는 내내 낄낄거릴 수 있는 영화다. 맥스의 엄마인 아만다는 80년대 인기 슬래셔 영화 <캠프 블러드배스>에 출연했던 배우다. 하지만 공포영화에서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대체로 그렇듯 잘 풀리지는 않았다. 진지한 배역을 맡고 싶지만 누구나 그녀를 스크림 퀸으로 기억한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맥스는 한참을 방황하다가 겨우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친구 오빠의 간절한 부탁으로 <캠프 블러드배스>의 상영회에 참석하게 된다. 컬트영화의 상영회가 그렇듯이, 등장인물이 술을 마시면 함께 마시고, 함께 라이터를 켜고, 이상한 행동을 따라 하며 웃는 사이에 사고가 생긴다. 화재가 나고 비상구로 나갈 수 없었던 맥스와 친구들은 스크린을 찢고 뒤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들이 나온 곳은 다름 아닌 영화 <캠프 블러드배스> 안이었다. 영화가 끝나야만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맥스와 친구들은 살인마인 빌리 머피를 유인하여 잡을 방법을 고안한다. 그 와중에 맥스는 엄마가 연기하는 낸시가 죽지 않을 방법을 생각한다. 맥스와 친구들은 영화 속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세계는 모든 것이 예정된 대로다. 하지만 즉흥 연기가 가능하듯 시나리오를 따르면서도 다른 결말은 가능하다. 80년대 슬래셔 영화를 제대로 패러디하면서도 새로운 경지에 이른 웨스 크레이븐의 < 스크림 >이 그랬듯이. 하지만 맥스와 친구들은 웨스 크레이븐이 결코 아니었고, 그들의 어설픈 계획은 어긋나기만 한다. 게다가 회상이 시작되면 그들도 함께 흑백의 과거로 돌아가야 하고, 중요한 장면에서는 갑자기 모든 동작이 슬로우 모션이 된다. 사실 아만다는 슬래셔영화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파이널 걸스가 아니다. 아만다가 연기하는 영화 속의 낸시는 처음에 죽어버린다. 게다가 진짜 파이널 걸스였던 폴라는 엉뚱한 짓을 하다가 맥스와 친구들의 눈앞에서 요절해버린다. 맥스는 파이널 걸이 아닌 엄마를 살리기 위해 절대로 섹스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이미 죽어버린 ‘파이널 걸’ 대신 처녀인 자신이 살아남기로 한다. < 스크림 >이 보여준 것처럼, 파이널 걸스가 동료와 함께 살아남는 것도 가능해졌으니까.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코미디처럼 보이는 슬래셔 영화의 공식을 가지고 노는 < 더 파이널 걸스 >는 추억에 기댄 유희다. 기억 속의 슬래셔 영화를 가지고 온갖 농담을 던져보는 코미디 영화. 전혀 무섭지 않고, 즐겁고 유쾌하다. 단 80년대 슬래셔 영화에 얼마큼의 애정을 갖고 있는지 비례해서 즐거움과 유쾌함의 강도가 높아지는 영화다.
여행의 출발지는 1939년이다. 1917년에 시작되어 1966년까지 이어진 존 포드의 영화 이력의 중간쯤에 해당된다. 물론 첫 작품에서 출발해 연대기 순으로 살펴보는 것이 무난하고 합리적인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망설여졌다. 향후의 모든 코스가 정해져 있는 여행은 뭔가 지루하지 않을까. 더 중요하게는 그 길은 우리가 경계하려 하는 진화론적 관점, 체계에의 유혹을 피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 기착지를 알 수 없는 무작위의 여행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1939년이라는 연도를 떠올리게 되었다. 왜 1939년인가. 단순한 이유 하나는 이 해에 세 편의 존 포드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중 두 편이 존 포드의 10 베스트 목록을 작성한다면 도저히 뺄 수 없는 걸작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중 한편은 ‘고전적’ 서부극의 완성이며, 다른 한편은 비교(秘敎)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표현주의적’ 영화다. 한 해에 한 감독이 이 두 영화를 연이어 만들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그 영화는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또 다른 한편은 < 모호크족의 북소리 >다) 이 두 편만으로도 존 포드는 영화사의 만신전에 등재될 자격이 있다. 1939년은 존 포드의 이력에서도 특별한 해라고 말할 수 있다. 존 포드, 1939년의 세 영화들 태그 갤러거는 약간 다른 의미로 1939년~1941년을 ‘영예의 시기’(prestige period)라고 불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7편의 영화는 모두 10개의 오스카상을 받았고(주로 < 분노의 포도 >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 덕이긴 하지만) 34번 후보에 올랐다. 뉴욕 비평가협회는 3년 연속 그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다. 존 포드는 명실상부한 할리우드 최고 감독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이 시기가 특별하다면 그것은 < 역마차 >와 < 젊은 날의 링컨 >이 이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존 포드를 만날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건 어떤 야유나 비하의 뜻도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라도, ‘나’라는 단독자와의 만남에는 때가 있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20대 후반이었지만, 그를 ‘만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3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다른 이유 하나는, 최근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 변호인 >이 75년 전에 만들어진 < 젊은 날의 링컨 >을 바로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영화들이, 만든 이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것과 유사한 선택을 한 과거의 영화들과의 대화 자리에 초대된다. 영화사의 정전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여전히 살아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영화들과 대화하고 긴장하고 불화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비밀을 하나씩 펼쳐 보인다. 물론 영화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위대한 예술이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아마도 그것의 영원한 동시대성에 있을 것이다. 오늘 말하려는 영화는 < 젊은 날의 링컨 >이다. 이 영화는 2013년의 한국영화 < 변호인 >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의 취사선택과 극적 디테일의 가미를 거쳐 하나의 영화적 허구를 구성했다. 나는 평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동시대인으로서 <변호인>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다른 지면에 썼다. (「씨네21」 942호 참조). 여기선 <변호인>의 표준적 선택에 비추어 <젊은 날의 링컨>의 특별한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두 영화는 외견상 공통점이 꽤 있다. 이는 주로 두 영화가 다루는 실제 인물의 공통점에서 비롯된다. 링컨과 노무현은 모두 서민의 아들로 태어나 내세울 만한 학력을 얻지 못했으며, 개인적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변호사를 거쳐 유명 정치인 및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자신의 국민들에게 단순한 존경 이상의 특별한 감정적 애호(혹은 격렬한 거부)의 대상이었으며,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 젊은 날의 링컨 >과 <변호인>은 많은 공통점을 지닌 두 인물의 변호사 시절, 그것도 그들이 변호를 담당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기획의 유사성도 있다. 하지만 유사성은 여기까지다. < 변호인 >은 영웅설화의 오래된 표준 양식을 따른다. 여기서 영웅은 도덕적 진리의 예시자다. 갈등은 오직 그 진리를 실천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놓여있을 뿐, 진리 자체는 이미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다. 해당 인물의 전기적 사실들은 이 진리를 기준으로 취사선택된다. 존 포드가 말년에 만든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하라.”는 이 양식의 적절한 요약이다. 전설에 부합되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호인>의 선택이다. 네 아들 (1928) < 젊은 날의 링컨 >은 불가사의한 영화다. 앞에서 ‘표현주의적’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이 영화엔 F. W. 무르나우에게 영감을 얻은 < 네 아들 >(1928)이나 < 사형집행인의 집 >(1928)과는 달리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이 표면에 드러나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전영화의 규칙과도 거의 무관하다. 어떤 범주화도 난감해지는 괴이한 영화가 뜻하지 않은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영웅설화를 구성하는 극적 사건과 결단의 행위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사건과 행위에 포섭되지 않는 일화와 농담들, 표정과 몸짓들, 기운과 예감들, 그리고 빛과 음영과 풍경들로 가득하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이 잉여들이다. 반복해서 보면, 이 영화는 선형적으로 전개되기를 끝없이 망설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달리 말하면, 잉여들이 살아 움직이며 극적 사건들의 전개를 끝없이 교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고전영화와 모던영화가 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은밀한 교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링컨의 주의회 선거 연설 교전의 한 가운데 젊은 날의 링컨, 정확히 말하면 헨리 폰다라는 배우의 육체가 있다. 그는 긴 다리와 팔을 허공에 느리게 휘저으며 망설이듯 움직인다.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하다. 1832년 일리노이 주 샐럼 지역에서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보이는 동료에 의해 주의회 선거 후보로 소개된다. 동료가 네거티브 연설을 열심히 하는 동안 프레임 안에선 보이지 않던 링컨이 다음 장면에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걸어나와 소박한 연단에 선다. 기댈 곳을 잠시 잃은 것처럼 보이던 오른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연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에 실린 느리고 아주 짧은 연설. “...저는 전국은행(national bank)과 내부 증진 시스템과 테러 방지를 지지합니다. 이것이 저의 가치관이자 정치이론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의 소유자인지 잘 알 수 없을뿐더러, 그가 정말 정치가의 야심이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이후로도 그가 망설이듯 움직일 때, 그가 가려는 곳에 가기를 정말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잘 알 수 없다. 그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언가가 그를 이끄는데 그것이 무언지 그도 모르고 그를 보는 우리도 알 수 없다. 한때 사랑한 여인 앤의 묘비 앞에서 그는 나뭇가지를 세워놓고 혼자 중얼거린다. “내 쪽으로 넘어지면 마을에 남고, 네 쪽으로 넘어지면 법 쪽으로 갈게” 나뭇가지는 묘비 쪽으로 넘어진다. 다시 혼잣말. “네 쪽으로 넘어졌으니 법을 공부할게” 그리고 자문한다. “내가 네 쪽으로 살짝 민 걸까?” 수수께끼와도 같은 마지막 말을 기억해두면 좋겠다. 나뭇가지의 움직임에 그의 의지가 정말 작용한 걸까. 이 질문은 대답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의문문으로만 남겨져야 한다. 이 인물에게 운명과 의지는 식별 불가능하다. 헨리 폰다라는 육체의 망설임과 움직임은 식별 불가능하다. 우리는 편리하게 운명의 편에 풍경과 시간을 두고, 의지의 편에 각성과 결단의 행위를 둠으로써 일련의 대립항 다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이 영화의 영원한 내적 교전을 도해(圖解)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의 도해야말로 이 영화의 아름다움과 가장 멀어지는 길이다. 식별 불가능한 것은 식별 불가능한 것이다. 이 동어반복이 차라리 그 아름다움에 가까울 것이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그것은 오프닝 크레딧 직후에 등장하는 시다. 젊은 링컨의 표현을 빌리면 “적게 말하고 많이 일하는” 어머니의 사무치는 물음들. 낸시 행크스가 귀신이 되어 사랑하던 아들을 찾으면서 내 아들 어디 있소? 그가 무슨 일을 했소? 내 아들에 대해 아시오? 키는 많이 컸나요? 재미있게 살았나요? 읽는 법은 배웠나요? 그가 마을로 갔나요? 그의 이름을 아나요? 성공했나요? 라고 물을 것이다 - 로즈마리 베넷 (낸시 행크스는 링컨의 어머니이며 그가 9살 때 죽었다) 혹은 이 시가 쓰인 화면 뒤에 어른거리는 나뭇잎 그림자이다. 혹은 그가 앤과 거닐던 강물이다. 어쩌면 강물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것은 귀신이 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말이며(극 중의 링컨은 이 시를 보지 못했고 보았다 해도 이것은 시인의 상상된 말이므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옛 연인의 육체다. 극 중 등장인물의 말을 빌리면 젊은 링컨은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듯 강물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초반에 등장한다. 봄빛 가득한 강둑에서 빨강머리 처녀 앤은 링컨에게 법 공부를 권하며, 링컨은 그녀에게 구애의 말을 전하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떠난다. 미묘한 엇갈림. 강물이 그들 뒤로 고요히 흐른다. 그녀가 떠나자 링컨은 조약돌을 강물에 던지고, 강물에는 작은 동심원이 인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장면은 적막하고 충격적이다. 강물에는 험상궂은 얼음이 떠다니며 들판에는 눈이 덮여있다. 털모자를 뒤집어쓴 링컨은 꽃을 들고 앤의 묘비를 찾는다. 그 사이에 5년이 지났고 그녀는 죽은 것이다. 존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잔혹하고 아름다운 몽타주다. 링컨이 돌을 던진 행위와 얼음투성이로 변한 강물 그리고 앤의 죽음 사이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돌을 던진다는 우발적이고 사소한 행위 ‘바로 다음에’ 그 행위에 대답하듯 가혹한 일들이 벌어진다. 영화에서 무언가가 ‘바로 다음에’ 그 장소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엄중하며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그것은 벌어졌으며 되돌릴 수 없다. 의지와 행위가 개입할 수 없는 장대하고 고요한 흐름, 우리가 보통 운명 혹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압도적 표정이 그 순간 섬광처럼 스쳐 간다. 어쩔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그 거대한 역량 앞에서 젊은 링컨은 지금 나뭇가지로 운명과 의지의 식별 불가능성을 유희하고 있다. 헨리 폰다의 육체는 망설이듯 움직이고 < 젊은 날의 링컨 >은 주춤거리듯 진행한다. 그 망설임과 주춤거림의 시간 사이로, 어머니의 들리지 않는 음성, 앤의 그림자, 강물의 침묵과 변덕의 아름다운 흐름, 그리고 경박한 유머, 덧없지만 생동하는 행위들과 몸짓들이 활동하고, 영웅설화적 사건과 진리의 발화들과 행위들, 숭고한 소명과 고결한 의지가 그들과 몸을 섞고 수시로 서로 자리를 바꾸며 소란스럽고 더럽고 아름답고 고요한 음악이 된다. 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젊은 링컨의 용기와 지혜만큼이나 그의 반칙(줄다리기 시합에서의)과 야비한 유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의 링컨>은 소명과 의지의 송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훼손하거나 따돌리는 오점과 얼룩들의 난장이며, 그들 모두를 응시하는 어머니의 음성과 죽음과 풍경의 노래다. 그들의 소란스런 화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전설은 진리의 언명에 순종하는 정태(靜態)의 구조이지만, <젊은 날의 링컨>은 흐르고 번잡하고 활동하는 삶의 시학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 젊은 날의 링컨 >을 보고 뭔가 써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런 영화는 권위 있는 최종적 견해라는 걸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전문가도 보지 못한 걸 당신이 볼 수 있으며 어떤 전문가도 쓰지 못한 것을 쓸 수 있다. 태그 갤러거는 「JOHN FORD-The Man and His Movies」(1986)을 2006년에 고쳐 쓰면서 “<젊은 날의 링컨>을 지금까지 50번 넘게 봤지만, 아직도 새롭게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미학적 시대적 범주화도 초라하게 만드는 < 젊은 날의 링컨 >을 말하면서 산만한 도취가 아니라 뭔가 정리된 언어들로 끝맺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번잡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몇 마디 말을 덧붙여보자. 지난 회에 서부극에는 인물의 사적 시간, 역사적 시간, 풍경의 시간이 교차하며, 그것은 존 포드의 영화에서 잘 구현된다고 썼다. 그리고 존 포드의 비서부극조차 서부극적이라고도 썼다. 나는 비서부극인 <젊은 날의 링컨>에 대한 위에서의 어수선한 찬미만으로 이 말들이 약간은 설명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앞으로 다른 존 포드의 영화를 말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물론 여기서 역사적 시간은 여전히 애매한 말이며, 나는 어느 정도 수사학적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포기하긴 힘들다. 역사적 시간은 우리에게 이미 구현되고 알려진 시간이지만, 역사적 사실들을 다루는 영화 속의 인물들에게 그 시간은 거의 운명과 유사한 무게의 그림자가 된다. 우리는 알지만 그는 아직 모르고 있는 어떤 종말을 향해 그는 걸어간다. 알고 있는 우리 앞에 모르는 그가 걸어간다. 전기 영화에서 그리고 서부극처럼 역사적 소재를 극화한 허구의 서사에서 역사적 시간은 우리의 지식과 영웅의 무지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것은 불안한 공기처럼 인물을 감싼 채 떠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 젊은 날의 링컨 >의 마지막 장면처럼 이를 아름답게 시각화한 다른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는 사건을 훌륭하게 영웅적으로 해결했는데도 웃지 않는다. 젊은 링컨이 구름 낀 언덕을 천천히 걸어가 프레임에서 빠져나가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두운 표정, 먹구름과 비가 미래의 비극에 대한 암시라는 수사학적 해석은 명쾌하지만, 이 장면의 물질성을 말하진 못한다. 그것은 미래의 암시 이전에 지금 걸어가고 있는 그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의 곁에서 흐르는 이미지다. 역사가 기입된 허구 안에서 역사적 시간은 텍스트 밖이 아니라 내부에서 활동하는 이미지다. <젊은 날의 링컨>은 역사적 시간의 이미지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 시간이 꽤 되었고, 요즘 뭐하고 사냐는 질문을 받는 빈도도 그만큼 늘어가던 차에, 그럴 때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는 뭔가 숨기고 있는 듯 애매한 대답을 하기에도 지겹고 한심스러워서, 친구들 몇 명과 일주일 정도 매일 만나 한 시간 조금 넘는 분량의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편집은 벌써 끝났지만, 전부터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며 느릿느릿 진행되던 두 번째 장편영화의 준비에 들어가느라 후반 작업에 손도 대지 못한지 어느덧 반년. 그렇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마무리될 거라고 본다. 주연을 맡았던 남자배우가 하반기에 입대할 예정이라 그 전에 후시녹음 분량을 끝내야 하고, 무엇보다 이번 영화엔 그의 대사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진짜 문제라면,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국 아틀란타 조지아 출신의 여자배우가 내게 전화 한 통 없이, ‘아빠가 화를 내며 빨리 집에 돌아오라고 소리쳤다’는 페이스북 메시지 한 줄 달랑 남기고 이역만리 고향 아틀란타 조지아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겠지만, 이것 역시 며칠 책상에 엎드려서 고민하다 보면 해결방안이 떠오를 것이다. 떠오르겠지? 떠올라야 한다. 꼭. 그러니까 당시엔 통장에 잔고도 좀 있겠다, 맘 잡고 새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단편영화 하나 찍어볼 생각으로 촬영감독 친구에게 카메라 들고 일주일쯤 지방에 놀러 갔다 오자고 꾀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학교 입학할 때 심사받으려고 만들었던, 귀엽지만 저질스러운 만듦새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어볼 작정이었고, 그즈음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제작지원도 알차게 받아서 결국 6회차에 모든 촬영을 마무리했다. 이제껏 어둡고 기이하면서, 소수의 관객들에게 변태적으로 아부하는 영화만 주로 찍어오다가 이처럼 가볍고 발랄한 필-굿-로맨틱코미디를 만들고 있자니, 아침에 촬영현장에 가는 일도 예전만큼 괴롭거나 죽을 맛이 들지 않아서 좋았고, 게다가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비교적 수월하고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진행되는 과정을 거의 최초로 경험하다 보니, 앞으로 영화 작업을 계속할지 말지 진지하게 재고해봐야겠다는 지난 과거의 결심이 충동적이었을 거라는 의심도 해보게 되었다. 후반 작업을 제대로 끝내놓고 할 소리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만으로도 이번 영화는 무척이나 좋은 경험이었고 만족스런 작업이었다고 자평해본다. 영화의 재미가 이와 비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 돈 케어. 사실상 이렇게 좋은 기분의 영화 만들기 놀이를 내게 선사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난 2년간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나와 영화제작 워크숍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새 영화작업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아서 의기소침했던 지난 시간 동안, 하루 평균 너 댓 시간씩 산책이나 하고 자전거만 타고 다녔던 나에게, 그들은 거의 유일하게 뭔가 유의미한 재미를 주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나로 하여금 이번 영화 작업을 충동적으로나마 하게 만든 자극을 주어서 결국엔 만족스러운 자평의 시간을 가지게 한, 직접적인 동기를 준 한 친구와 그(여자감독이지만 편의상 ‘그’로 호칭한다)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워크숍 당시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수강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수료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시나리오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얼마 후에 있을 다양성영화제작지원 공모를 통해서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진심으로 떠들어댔다. 감독은 미대를 갓 졸업하고 개인작업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던 예쁘장하고 털털한 성격의 친구였는데, 영화연출도 그 작업의 맥락으로 조금씩 소박하게 해보던 차였다. 물론 그에게도 이번 영화는 지역 영화제작 워크숍 대부분의 수강생들처럼 거의 처음 써보는 시나리오였고, 연출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예술적인 호기심이 남다른 친구였기에 이후 제작지원 공모에 선정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고, 결국 한여름 땡볕에 미친 듯이 땀 흘리고 변덕스런 장맛비를 한숨과 함께 통과하면서 마침내 한 편의 영화를 무사히 찍어냈다. 그 과정에 나의 시어머니스러운 잔소리가 끼친, 좋거나 나쁜 영향도 분명히 있었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막 남자친구와 헤어진 듯한 여자가 있다. 매일 아침, 소주병과 라면 냄비가 머리맡에 굴러다니는 걸 보면 후유증이 좀 심각한 것 같고.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냄새 푹푹 풍기면서 현관 마당 앞 고추 모종에 비몽사몽 물을 주고 있는데, 아, 글쎄, 간밤에 누가 고추 모종을 후벼 파서 훔쳐갔지 뭔가. 어머! 충격을 받은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아서 그 볼품없는 고추 모종을 굳이 훔쳐갔을 만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기필코 짜기 시작한다. 그 중엔 옆집에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귀찮게 하는 복학생 선배도 있고, 파지 주워가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재미로 사시는 듯한 할머니도 있고, 길고양이에 집착하며 돌아다니는 꼬마도 있고... 마치 소녀 탐정 낸시 드류처럼 사라진 고추 모종을 찾기 위해 용의자들을 추적하면서 하루 내내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결국 고추를 찾는지 못 찾는지는 스포일러라 말 못하겠지만, 도난당한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 귀엽고 소박한 추리극의 플롯 뒤에는 이 영화의 고통스런 진짜 이야기가 숨어있다. 내가 짐작하는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고추 모종을 버리려고 애쓰는 여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고추 모종 따위가 뭔데?’라고 묻겠지? 여기서 힌트는, 그것이 열심히 잘 키워보자고 옛 남자친구와 같이 손 붙잡고 사러 갔던 고추 모종이었다는 거다. 근래 이 친구 또래의 연출자들이 만들어 영화제에 주로 내놓는 단편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깜짝 놀랄 만큼 밋밋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창적일 정도로 느껴진다. 어떤 놀라운 테크닉이나 도발적인 테마, 자신감 넘치는 연출로 주목받으려는 시도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내 의견 따위를 말하자면, 차라리 그런 시크한 태도야말로 진짜로 주목받아야 마땅한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소박하고 사소해 보이는 소재에 그윽하게 심어놓는 인간적인 감정들이야말로 제대로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으며, 그래서 나는 그 영화에 ‘유기농 청춘 로맨스’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요즘의 내겐 이런 태도의 영화야말로 감독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을 느끼게 만들며 그래서 결국 영화 또한 뭔가 고유한 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난 아직 그 영화의 완성본을 못 본 상황이라서 그의 영화가 ‘고유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뚜렷한 영화적 장점이 있다고 당장 말할 순 없다. 들리는 이야기론,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제 초청실적이 저조하다고 하니 시나리오의 좋은 부분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잘 옮겨지진 않았거나, 그저 밋밋하고 사소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 그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친구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트릭이나 가식 없이 사람과 세상을 보는 그만의 소박하고 털털한 자세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만, 거기서 좀 더 그윽해지길, 그래서 그 사소해 보이는 세계 속에 진짜 이야기를 지금보다 좀 더 그윽하게 숨겨놓을 수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기회도 그만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이건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 들여다보면서 ‘나는 네가 누구 충고 부터하기 전에 자기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이면서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전거 타는 시간 좀 줄이고 자주 영화 만들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