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
- 감독
- 이재의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이규준, 최윤라, 김예다, 이상민
93세의 할머니가 어느 날 자살을 시도한다. 수면제를 먹고 누운 할머니의 화장대에는 장례비로 쓰라며 전 재산 30만 원이 놓여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가까운 이들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 삶을 붙잡지 못할 정도로 가벼웠던 것일까, 하고 자책하게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에 커서 이제 30대가 된 감독은 할머니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서울에서 전라도 화순까지 ‘할머니의 먼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할머니의 일상은 죽음보다 삶과 가깝다. 먼 길 온 손녀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고, 뻔히 따로 먹을 것을 아는 큰아들의 식사를 차리고, 마당 한켠 작은 텃밭을 가꾼다. 늦잠을 자다 카메라를 들고나온 감독은 마당에서 잔디를 고르고 있는 할머니를 본다. 집에선 엄마가 뭐라고 해서 그렇게 늦게까지 못 누워있지, 하며 웃는 할머니의 모습은 감독을 여유 있는 품으로 키워준 바로 그 모습이다. 그런 할머니는 왜 죽으려고 했을까. 감독의 물음에 할머니는 그저 ‘성가신게’ 하고 말할 뿐이다. 감독의 방문으로 안정을 찾으시던 할머니는 큰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삶의 기력을 조금씩 잃어간다. 속이 꽉 막혀 들어가지 않는 밥 대신 죽은 아들이 좋아하던 술을 마시고, 누워서 잠을 청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감독은 할머니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어 영양제를 놓아드린다. 더 이상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할머니가 스스로 떠나지 않도록 자주 가서 들여다 뵙는 것뿐. 살날이 많이 남은 젊은 손녀는 죽음밖에는 남지 않은 성가신 삶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때로 다큐멘터리의 윤리와 부딪히기도 한다. 어느 순간 주인공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 할머니의 먼 집 >은 할머니의 자살시도로 시작하고, 때로 노골적인 죽음의 바람이 드러나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묫자리를 옮기고 온 가족이 모여 제사를 지낸 다음 해 질 녘 산 아래를 내려오며, 할머니는 말한다. 오늘 밤에라도 여기 오게 되면 좋겠다고. 자식들도 웃으며 말한다. 묫자리 잘해놨으니 언제 와도 편히 계실 수 있다고. 감독의 어머니는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것보다 돌아가셔서 땅에 묻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이라고 한다. 자식들이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이미 긴 노년에 접어들어, 할머니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종일관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죽음을 기다리는 불편함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굉장히 밝고 사랑스럽다. 할머니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손녀도, 같이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눠 먹고 낮잠을 자는 두 사람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다 놓고 소박한 파티를 하는 모습도, 관객들에게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장면들이다. 영화 내내 할머니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감독의 간절한 마음이 스크린 너머까지 전해져온다. “참말로 올해는 꼭 죽어야제. 그 맴 밖엔 없어. 통 죽을 맴 밖엔” “할머니, 죽으면 나도 못 본데 괜찮애?” “요만치나 컸응게 괜찮애야” “안 괜찮애, 나는” < 할머니의 먼 집 > 중에서 < 할머니의 먼 집 >의 영문 제목은 Dear Grandma 이다. 이 절절한 러브레터는 감독의 할머니에게만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겨우내 찬 기운을 피해 창고에 들어가 있던 화분들을 꺼내 물을 주고, 손녀와 함께 저수지 산책을 하며 할머니는 말한다. “인자 가자, 깐닥깐닥 구경 잘했다. 어디 먼디 구경 온 것 맹이로.” 할머니의 남은 생이 손녀와의 산책처럼 즐겁길, < 할머니의 먼 집 >이라는 ‘홈비디오 다큐멘터리’가 할머니의 새로운 봄맞이가 되길 바라본다.
음울했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짧은 메모 중에는, 혁명을 추동하는 것은 계급이 아니라 세대일지도 모른다는 글이 있다. 물론 이 말은 논쟁적일 수 있다. 계급은 명확하고 특정한 주체를 구분하지만, 세대는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그러나 간혹 혁명의 역사 속에서 세대라는 구분과 표현은 매혹적이고 주체적으로 표방된 바 있다. 프랑스의 필립 갸렐과 장 으스타슈를 배출했던 68혁명이 그랬고, 제3영화를 실천했던 중남미의 60-70년대가 그랬다. 불현듯 ‘혁명과 세대’라는 거창한 개념들이 떠오른 것은 최근 20대 젊은 영화감독들,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무수한 독립영화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경향성 때문이다. 이 경향성을 구성하는 주요 키워드에는 주로 ‘곤경’과 ‘무력감’이 포함되고, ‘우리’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와 ‘개인’이 중요하며, 열려 있는 공공의 장소보다는 우울하고 암울한, 내가 기거하는 골방과 뒷골목들이 빈번하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성이 다소 이상해 보이는 것은 분명 이들이 세상의 어떤 부조리함을 담고는 있지만 그것에 분노하거나 그 부조리를 생산하는 사회나 시대를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함을 하나의 영화적 유머로 빚어내거나 개인화하는 방식들 때문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부터 주목받고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까지 초청된 소상민 감독의 < 나는 곤경에 처했다 > 역시 이러한 코드 아래 놓여있는 작품이다. 나이 서른을 목전에 둔 있는 선우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가작으로 당선한 시인이지만 이후에도 딱히 시를 쓰거나 다른 노동은 하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연인 유나와는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빈번한 이별과 화해를 반복하고 있다. 선우가 기대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은 절친한 대학 선배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은 그는 경제적으로 성우가 기댈만한 좋은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으나 성실한 유나와 시인인 선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종종 충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나는 선우를 아버지에게 선보이고자 점심 약속을 잡지만, 전날 선배와 술판을 벌인 선우는 늦잠을 자다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곤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유나에게 발각되고 결국 또 다시 이별을 통보받는다. 항상 이별을 당해야만 유나에게 절실해지는 선우는 또 다시 그녀를 잡기위한 행동을 시작한다. < 나는 곤경에 처했다 >는 자칭 시인이지만, 지리멸렬한 일상에 빠져 허우적대다 간혹 술독에 빠져 온갖 진상 짓을 해대는 한 20대 백수의 청춘백서다. 무언가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더욱 곤경으로 몰아가는 남자의 영화적 상황들은 소위 ‘일상적 리얼리티’라 불리는 대사와 행위를 통해 구성되고, 일정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의 그 부조리한 상황과 성격에 대해 유머와 쾌락을 느낀다. 분명 이 영화에는 잘난 척 하지 않으며, 현실의 무력감을 전달하는 생생한 질감 같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한 것은 이 영화가 20대 청년의 곤경을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는 많은 20대 청년들이 공감할만한 사회적 이슈들을 전제로 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비정규직과 실업자, 사회적 성취와 실패, 부와 빈곤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파생되는 남녀간의 연애와 결혼까지 말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러한 상황들에 대해 푸념하거나 무력감에 빠질지언정 그것에 대해 사회적인 방식으로 비판하거나 돌파하려는 의지나 의식 자체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 속 선우는 시인이지만 단 한 번도 시에 대해, 혹은 시인이라는 직함에 대해, 시인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무랑태수 같은 삶의 면죄부로 쓸 뿐이다. 오히려 선우가 몰두하는 것은 비루한 연애와 쉽게 무릎 꿇는 비굴한 사죄들뿐이며, 그것은 희극적으로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수사는 종종 홍상수 감독의 표면과 비교된다. 얼핏 이 영화의 캐릭터와 상황들은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적 요소와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홍상수 영화의 캐릭터와 플롯들은 마치 체스판 위의 말들처럼 전체 영화적 구조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반면 지금 독립 단편 혹은 장편 영화들 속에서 가장 흔히 발견하게 되는 이러한 일상적 부조리함과 유머에 관한 영화들은 그러한 구조나 의미를 배제한 채, 매 순간의 유머와 쾌락에 안주한다. < 나는 곤경에 처했다 >는 분명 최근 독립 장편 영화들 중에서 돋보이는 이야기 진술의 힘과 대사력을 지닌 영화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곤경에 처했다>의 가장 큰 장점과 한계는 모두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곤경에 대한 태도 말이다. 그저 쾌락할 것인가, 넘어 설 것인가? 난 후자를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