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티 런드리
- 감독
- 윌리엄 웹
- 제작년도
- 1987
- 출연
- 레이 맥클로스키, Robbie Rist, 프랭키 발리, 서니 보노
용산지역에는 상설극장이 아닌 가설 형태로 극장이 처음 들어섰다. 가장 먼저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용산무동연희장(龍山舞童演戱場)인데, 용산의 넓은 빈터에 천막을 두른 가설 형태의 연희장이었다. 이 같은 가설 형태의 연희장은 극장이 존재하지 않던 조선에 근대식 상설 연희장이 설립되는 데까지 중간적인 위치를 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료] 용산좌 신년 광고(《조선신문》, 1913.01.01) 용산에 가장 먼저 들어선 상설극장은 용산좌다. 1906년 말 용산 영정(榮町)에서 개관했다. 현재 용산 원동교회 근처에 있었으며, 개관 당시 좌주는 사사베 모쿠자에몬(笹部杢左衛門)이었다. 1911년 5월에는 다케모토(竹本水朝) 일좌(一座)가 조루리의 일종인 오사카 여성 기타유(大阪娘義太夫)를 공연했고, 1912년 2월에는 나카무라 카시쿠(中村かしく) 일좌가 나니와부시를 연극(芝居)으로 상연했다. 1913년 신년 광고를 보면, 당시의 흥행주는 아시자와 쓰야(蘆澤つや)라고 한다. 일본의 전통 연희를 주로 상연하던 용산좌는 1917년 개성좌(開盛座)로 개칭되었다. 개성좌의 흥행주는 계약에 따라 자주 바뀐 듯하다. 예컨대 1924년 1월 5일자 《조선신문》에 게재된 개성좌의 광고를 보면 “용산 영정 개성좌 하타다흥업부(畑田興業部)”라고 기록된바, 당시 개성좌는 하타다 흥업부가 관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성좌는 소규모 흥행 회사들이 일정 기간 대관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성좌와 같은 작은 극장은 공연에 대한 기록보다는 사건 사고로 신문 지면에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해 보자. 7日 午前 한 時頃에 市內 元町 3丁目 開盛座 2層에서 불이 이러나 一時 騷動을 하얏스나 卽時 鎭火되얏다는데 原因은 화로불에서 불이 붓흔 것이라 하며 損害는 약 6圓假量이라더라. 1 11월 7일 오전 1시경에 개성좌 2층에서 화롯불에서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하여 일시 소동이 일어났으나 금방 진화되었다는 기사이다. 또 다른 기사는 배우가 되고자 개성좌에 들어간 한 여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그 어머니가 용산경찰서에 신고한 사건을 보도한다. 이것도 인용해 보자. 시내 죽첨뎡 이뎡목 이십륙번디(市內 竹添町 二六) 최성녀(崔姓女)의 둘째딸 박뎡옥(朴貞玉)은 금년 열여섯 살 되는 어엽분 소녀인바 배우 되기가 소원이여서 자긔 어머니의 승락으로 구룡산에 잇는 개성좌(開城座) 2 라는 연극단에 드럿든바 다닌 지 몃칠 되지도 안어서 지난 이일부터는 집에도 도라오지 안코 전긔 연극단에도 나오지 안음으로 그의 어머니는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해 본 결과 연극을 가릿킨 하고 시고가티 부터단이든 전긔 개성좌의 남자 배우 백운옥(白雲玉)(23)이란 자가 유인하여 가지고 시내 주교뎡 모처(市內 舟橋町 某處)에 은거하였다는 말을 듯고 지난 삽아일에 룡산경찰서(龍山警察署)에 호출하여 동 서에서는 그날로 백운옥이란 자를 인치한바 백운옥은 사실을 자백하엿다 하며 엄중히 설유한 후에 내여 보내리라더라. 3 16세 처녀를 배우 시켜준다며 유인하여 가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개성좌의 남자 배우가 조선인인 것을 보면 이 즈음에는 조선인 극단이 개성좌를 대관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가 천연두에 걸려 극장을 비롯해 그 일대를 소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고, 개성좌에서 흥행하던 흥행사와 시내의 도박꾼들이 미생정(弥生町) 유곽에서 도박을 하다 일망타진당한 사건도 기록이 있다. 구용산에 자리했던 개성좌는 사건 사고로 먼저 기억되는 공간으로 1940년대 초반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 사쿠라좌의 1916년 신년광고(《경성일보》, 1916.01.05) 구용산에 용산좌와 그 후신인 개성좌가 있었다면, 용산역 정면의 신용산에도 극장이 있었다. 시마무라 호게쓰(島村抱月)가 이끄는 일본의 신극 단체인 예술좌(藝術座)가 1915년 11월 공연했던 장소가 용산의 사쿠라좌였다. 한자로는 ‘櫻座’ 혹은 ‘佐久良座’라고 표기한다. 사쿠라좌는 1910년 5월 건물을 낙성하고 8월부터 본격적인 흥행을 시작했다.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던 시기로, 개관 당시의 좌주는 야마네 효스케(山根兵助)였다. 아래의 기사는 사쿠라좌에서 흥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내용이다. 龍山 新市街 山下町 에 建築 中 이던 大劇場 櫻座 ᄂᆞᆫ 內部 의 設備 ᄀᆞ 旣 히 完成 되얏슴으로써 來月 上旬 부터 日本 大阪 一等 俳優 ᄅᆞᆯ 招聘 하야 演劇 을 開始 하기로 目下 交涉 中 인 同座 ᄂᆞᆫ 前 朝鮮日之出新聞社 記者 ᄅᆞᆯ 聘 하야 顧問 으로 定 하고 諸般 의 改善 을 謨 한다더ᄅᆞ 4 조선 내 일본어 신문인 조선일지출신문사(朝鮮日之出新聞社)에 근무했던 기자를 고문으로 하여 문을 연 사쿠라좌는 연극 등 무대 공연을 주로 흥행했으나, 1915년 무렵 용광관(龍光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전문적으로 상영하게 된다. 용광관은 1917년 1월 현재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닛다연예부에서는 용관관 관리를 위해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를 출장원으로 파견했다. 용광관은 훗날 이름을 용산극장으로 바뀌었다. 용산에서 경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경룡관(京龍館)은 경성 외곽의 극장 중 가장 오랫동안 존속한 영화관이었다. 1920년 12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를 비롯해 이시즈카 가네키치(石塚謙吉), 다니구치 가메타로(谷口龜太郞) 등 경성의 일본인 유지들이 경성과 용산 사이 과거 연병장 자리에 활동사진관 설립을 출원, 주식을 발행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자본금 20만원에 불입금 5만원 규모의 주식회사 경룡관을 조직했다. 그리고 1921년 7월 19일 활동사진관 경룡관을 개관했다. 경성부 한강통 3번지 14에 자리한 경룡관은 활동사진, 기타 흥업에 관계된 일체의 사업 및 부대사업을 목적으로 했다. 주식회사 경룡관의 주요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대표 이시하라 이소지로와 이사 이시즈카 가네키치, 다니구치 가메타로 외에도 다테야마 가쓰요시(立山勝喜), 우에다 헤이자부로(上田兵三郞), 마에카와 도요지로(前川豊次郞), 진나이 시게키치(陳內茂吉) 등 이사진과 감사 도이 가즈요시(土井一義), 가네코 도요조(兼古禮藏) 등이 있었다. 5 주식회사 경룡관은 1923년 주식회사 성남연예(城南演藝)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관 직후 경룡관은 닛카쓰 연맹에 가맹하고 닛카쓰의 영화들을 주로 상영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곳카쓰(國活) 직영으로 바뀌었고, 1923년 5월부터는 각종 연희물을 상연하며 경룡좌(京龍座)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다. 1924년 1월에는 중앙관(中央館)과 공영 형태로 마키노키네마(マキノキネマ) 직영관이 되어 마키노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1년 10월 3일, 경룡좌는 극장을 새롭게 정비하고 이름을 성남극장이라 바꾸었다. 1943년 당시 성남극장은 홍계 계통의 극장으로 객석은 총 750석 규모였으며, 흥행주는 우에다 도모요시(上田友義)였다. 해방 후에도 존속하던 성남극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서면서 영화 관람 문화가 크게 변하던 2003년 폐관하게 된다. *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 “개성좌에 소화(開盛座에 小火)”, 《매일신보》, 1928.11.08. 2) 원문의 "개성좌(開城座)"는 개성좌(開盛座)의 오기로 추정된다. 3) "여우 견습 유인(女優見習誘引)", 《중외일보》, 1930.01.15. 4) “사쿠라좌의 무대 개시(櫻座의 舞臺開始)”, 《국민신보》, 1910.08.19. 5) 『朝鮮銀行會社要錄』, 中村資良, 東亞經濟時報社, 1921년판, 232쪽. * [사진] 1921년 개관한 경룡관 외관(《경성일보》, 1921.07.20) [자료] " 小野 小林 兩 判事 龍山 方面 에 出動, 룡산극장에 생긴 사건 殺人 事件 檢證次 로", 《동아일보》, 1930.11.09 금 八 일 경성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소야 ( 小野 ), 소림 ( 小林 ) 량 판사는 동부 서긔 통역을 대동하고 목하 공판 진행 중의 피고 매원진웅 ( 梅原辰雄 ) 에 대한 상해치사 ( 傷害致死 ) 사건의 검증 ( 檢證 ) 을 하기 위하야 시내 룡산 ( 龍山 ) 방면에 출장하얏는데 사건은 금년 봄 룡산극장 ( 龍山劇場 ) 에서 대소롭지 안흔 일로 피고 조선 사람과 말다틈을 하다가 그를 ᄯᅡ려 죽게 한 것이라는 바 검증 여하에 ᄯᅡᆯ하서는 피고의 범죄 소위가 살인죄로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야 매우 주목된다고 한다 . [자료] " 京城 에 天然痘 發生, 龍山 開盛座 에서 興行師 가 發病 ", 《매일신보》, 1938.03.29. 선만 각지를 순회 중에 잇든 『 만사이 』 사 림정웅 ( 萬歲師 林靜雄 )(44) 일행 八 명은 지난 十二 일 입성하야 부내 영정 ( 榮町 ) 개성좌 ( 開盛座 ) 에서 흥행 중이엇섯는데 지난 卄一 일 밤 림정웅은 별안간 몸에 열이 올라 시름 へ 알코 잇섯슴으로 무슨 병인지를 몰르고 잇든 중 卄八 일 오후 령시 三十 분경 부 위생과 ( 府衛生課 ) 의사가 출장 진단한 결과 의외에도 진성 천연두 ( 眞性 天然痘 ) 로 판명되어 동 좌 일대는 잠시 동안 대소동을 이르키엇는데 부 위생과에서는 즉시 룡산서 ( 龍山署 ) 와 협력하여 가지고 동 환자를 순화병원 ( 順化病院 ) 으로 옴기고 좌원 ( 座員 ) 八 명의 다니든 곳과 개성좌 원정 ( 元町 ) 一 정목 영정 ( 榮町 ) 일대와 그 부근 전부를 대소독하는 한편 이튼날 卄九 일 오전 十 시부터는 영정 ( 榮町 ) 원정 ( 元町 ) 一 정목 경정 ( 京町 ) 대도정 ( 大島町 ) 일부의 거주자 약 三 천여명을 원정 소학교 강당 ( 小學校 講堂 ) 으로 소집하여 가지고 임시 종두를 행하기로 되였다 . 그리고 림정웅은 황군위문 ( 皇軍慰問 ) 차로 룡산 육군병원 ( 陸軍病院 ) 에서 출연한 일이 잇섰고 그 외 연병정 ( 練兵町 ) 에서도 二 , 三 일간 유숙한 일이 잇섯슴으로 이곳까지도 전부 대소독을 하여 예방에 노력을 하고 잇는데 아직ᄭᅡ지 발병자는 림정웅밧게 업다고 한다 .
임권택 감독의 < 화장 > 개봉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반세기 전에 만든 초기작 한 편을 소개한다. 이대엽 (얼마 전에 사망한 전 성남시장 말이다)과 구봉서 가 주연한 < 남자는 안팔려 >. 그렇다고 이 1963년 작 영화와 <화장>을 연결하는 예술적인 일관성 따위를 찾을 생각은 말기 바란다. 60년대 초 임권택은 말 그대로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그가 이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도 낮다. 무엇보다 지금 소개할 시나리오 요약에서 임권택을 찾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이 시나리오의 각본가는 곽일로. 아직 임권택은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일을 해서 만든 작품을 우린 볼 수 없다.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그 상상의 결과물과 실제 임권택의 영화는 아무 관계도 없다. 제목과 캐스팅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여장 남자가 소재인 코미디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IMDb로 달려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가 언제 영화인지 검색하고 싶을 것이다. 거기까지 갈 필요 없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1959년 작이다. 뻔뻔스러운 모방작이고 그건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긴 <뜨거운 것이 좋아> 역시 프랑스 코미디 <사랑의 팡파레Fanfaren der Liebe>(1951)와 그 영화의 독일판 리메이크를 모방한 영화이니 이 모방의 사슬은 더 길어질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 남자는 안 팔려 >와는 달리 빌리 와일더는 판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대엽 은 병칠이고 구봉서 는 칠복이다. 병칠은 배우가 되고 싶고, 칠복은 무용수가 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서울에서 백수로 놀면서 직장을 찾으러 다니는 중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응모하려던 회사에서 딱지를 맞는데, 알고 봤더니 여자 직원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순전히 자기네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인데도 그들은 세상이 여자판이라고 자기네는 희생자라고 우기고 다닌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그래도 그들은 취직이 된다. 간판을 걷어차려다 날아간 칠복의 신발이 달리는 삼륜차에 떨어지고 그들은 그걸 찾으러 대소동을 벌이는데, 그들을 눈여겨 본 자칭 사장이란 사람이 그들을 운전사와 조수로 고용한 것이다. 그 소동 중 칠복은 악보를 들고 걷던 남옥이라는 여자와 충돌하게 되고 첫눈에 반한다. 아, 그리고 병칠은 이미 영애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그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 큰 백만장자와 연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는 두 남자 주인공에게 여장을 시키려는 준비과정이다. 알고 봤더니 사장은 수상쩍은 범죄자였고, 사장을 노리던 다른 범죄자들에 의해 칠복과 병칠은 사장의 돈을 털리고 만다. 둘은 경찰에 신고하지만 사장은 사라졌고 아무도 그들이 취직했다는 말을 안 믿는다. 우연히 둘과 마주친 사장은 여성국극단 속으로 숨었다가 변장해 빠져나가고 사장을 찾아 들어온 둘은 거기 취직하려다 남자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남자라서 안 팔린다는 핑계가 또 생겼다. 둘은 여자로 변장한다. 그 모습이 어땠는지는 포스터가 있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림만 보면 꿈에 나올까봐 두렵다. 하지만 구봉서 의 여자 연기는 꽤 그럴싸했을 가능성이 높고 어떤 스타일이었을지 상상도 간다. 구봉서가 여장연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0년 작인 < 남자와 기생 >에서 그는 여장을 하고 기생일을 하는 실직자로 나온다. 이 영화에서 < 뜨거운 것이 좋아 >보다 설득력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여성국극단의 설정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여성악단은 그냥 무난한 핑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여성국극단 설정은 거의 완벽하다. 여자들만이 있어야 할 핑계로도 좋지만 구봉서 처럼 생긴 여자가 바로 그런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발탁될 수 있는 핑계로는 그냥 완벽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나리오는 이 국극단 설정을 그리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이 뒤로도 영화는 < 뜨거운 것이 좋아 >의 길을 따른다. 예상했겠지만 남옥은 이 극단의 단원이라 칠복은 여장한 미쓰리와 남자인 칠복의 이중생활을 하면서 남옥과 만난다. 한참의 소동 끝에 사장과 강도는 모두 체포되고 둘의 여장은 폭로된다. 사장은 위폐범임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파격적이었던 원본, < 뜨거운 것이 좋아 >와는 달리 < 남자는 안팔려 >의 결말은 심심할 정도로 교훈적이고 무난하다. 너무 무난해서 신기할 지경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그들을 주연으로 삼겠다는 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과수원을 하겠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이 스스로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결말을 읽고 있으면 여장만 해도 방송금지를 먹었던 옛날을 회상하며 ‘창작의 자유’가 있는 <개그 콘서트>의 후배들을 부러워하던 구봉서 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 중국은 과거와 달리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문화소비도 커졌고 영화시장도 세계적 수준으로 커졌다. 애니메이션 시장과 투자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정받을 만한 좋은 작품은 안타깝게도 드물다. 스타일에서도 미국과 일본 것이 혼재되어 방향 없는 정체 모를 것들이 많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뿌리가 있을까 싶은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현존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중 세계 9번째 작품을 내놓았던 애니메이션 강국이었다. 가장 먼저 아시아 애니메이션의 여명을 밝힌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최초로 장편을 선보인 것이다. 이 기록을 보유한 작품이 바로 중국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 철선공주 >다. 완 라이밍과 그의 형제들이 제작을 이끌었다. 해외의 선진문물이 상해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1920년대, 미국의 디즈니나 플라이셔 사의 단편 만화영화들도 함께 유입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을 ‘가통(?通)’라 불렀다. 영어 카툰(Cartoon)의 중국식 한자표기다. 중국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매력을 느꼈다. 화가를 꿈꾸던 완 라이밍도 그랬다. 그래서 동생 셋과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짧은 애니메이션을 실험했다. 그렇게 1926년 <화실대소동>이란 중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발표, 중국 가통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 철선공주 >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와중에 기획되었다. 완 라이밍은 상해사변을 피해 각지를 떠돌다가 상해로 돌아와 신화연합전업공사에서 장편을 구상한다. 1940년 초 디즈니의 <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한 영향이 컸다. 완 라이밍은 중국의 문화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야기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삼차파초선’이다. 화염산을 무대로 손오공 일행과 우마왕의 대결을 그린 부분이다. 무엇보다 철선공주란 여성도 나오니 백설공주와 대비해 동양의 여성미를 보여주기에 적격이라 싶었다. 처음 시도한 장편이다 보니 애니메이터 인력도 턱 없이 부족했고 스케줄도 지연되었다. 그에 따라 제작비도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때문에 한동안 제작이 멈추는 위기도 겪었다. 다행히 한 재단의 도움으로 재개해 제작에 착수한 지 18개월 만인 1941년 11월에 마침내 완성, 상해 3대 극장에서 일반 개봉을 하게 된다. < 철선공주 >는 로토스코핑 기술에 의한 실사의 움직임을 더해 당시로써는 훌륭한 영상을 선보였다. 때문에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고도 상해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았다는 호평까지 받았다. 전시 중의 중국인들에게 자국의 애니메이션은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일본이 상해를 점령한 후에도 인기몰이는 이어졌다. 요괴 우마왕의 반사경이 일본을 상징하는 태양이 아니냐는 추측 속에 중국인들은 <철선공주>를 관람하고 항전의식을 고취시켰다. 1942년에는 일본에도 수출되어 상영되었다. 당시 중국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먼저 제작했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일본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어린 시절 < 철선공주 >를 보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꿈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철선공주>로 중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화려하고 의미도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