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문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8
- 출연
- 신영균, 문희, 박병호, 전계현, 박암, 사미자, 정애란, 안인숙, 김병휘, 김웅, 김경란, 조천금, 최준, 임생출, 박달
애초 작성한 리스트에는 23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10편만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를 제외해야 했다. 2014년의 영화로 선택한 < 보이후드 >의 리뷰에 앞서 전체 리스트를 수정 공개함을 알려 드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23편 2014년의 영화 보이후드 Boyhood ,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다섯 편의 장르영화 나를 찾아줘 Gone Girl , 데이비드 핀처, 2014 더 홈스맨 The Homesman , 토미 리 존스, 2014 다크 밸리 Das Finstere Tal ,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 마틴 스콜세지, 2013 콜드 인 줄라이 Cold in July , 짐 미클, 2014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 두 편의 영화 더 로버 The Rover , 데이비드 미쇼드, 2014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4 다섯 편의 아트하우스 더 원더스 Le meraviglie , 알리체 로바허, 2014 도원경 Jauja , 리산드로 알론조, 2014 실스 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 올리비에 아싸야스,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 장 뤽 고다르, 2014 에덴 Eden , 미아 한센 로브, 2014 두 편의 다큐멘터리 야만의 땅 Pays Barbare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위로공단 , 임흥순 , 2014 두 편의 한국 드라마 절경 , 남근학 , 2014 한여름의 판타지아 , 장건재 , 2014 여섯 편의,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 호스 머니 Cavalo Dinheiro , 페드로 코스타, 2014 사랑스러운 자매 Die Geliebten Schwestern , 도미닉 그라프, 2014 프랑스 공주 La Princesa de Francia ,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아프리오리 Mula sa kung ano ang noon , 라브 디아즈, 2014 신이 되기는 힘들다 Trudno Byt Bogom , 알렉세이 게르만, 2014 위플래쉬 Whiplash , 데미언 차젤, 2014 (링클레이터는 < 스쿨 오브 락 >의 개봉 후에 아역 배우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도중 그 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보낸 하나의 좋은 챕터가 곧 가장 좋은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곁에 머무는데, 나는 그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완성된 것이 아닌 경험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부모의 이혼으로 메이슨과 누나 사만다는 엄마와 함께 산다.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서 일한다고 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엄마는 공부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친정이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때마침 아빠도 근처로 거처를 옮긴 차였다. 이후 12년 동안의 시간 흐름을 담은 < 보이후드 >는 제목 그대로 메이슨의 소년기이자 누나 사만다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의 기록이다. 촬영은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감탄을 불러낼 만하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비포 연작’을 통해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그리고 < 스쿨 오브 락 >(2003)이나 < 배드 뉴스 베어즈 >(2005) 같은 장르영화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보이후드>가 뜬금없는 작업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실 영화가 12년 정도의 시간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무조건 열광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앱티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지나도록 ‘업(Up) 연작’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소년의 성장을 20년 넘게 극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또 어떤가. 그래서 <보이후드>에서 우선 관심이 갔던 것도, 시간 속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감독의 태도였다.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된 ‘업 연작’은 매번 유명한 문구 - ‘7살 때까지 아이를 맡겨 달라. 그러면 인간을 보여주겠다’ - 로 문을 연다. 이 문구를 살짝 바꾸면 곧 < 보이후드 >의 모토가 된다. ‘7살짜리 꼬마를 맡겨 달라. 그러면 소년 시절을 보여주겠다.’ <보이후드>를 본 평자들은 누구나 ‘업 연작’의 영향을 이야기하며, 링클레이터 또한 인터뷰에서 앱티드의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2012년의 <56 업>까지 매 7년마다 한 편씩의 영화로 발표된 ‘업 연작’은 현실의 인물에서 ‘가족, 친구, 애정, 교육, 계급, 타자, 빈부, 정치, 기회, 종교, 도덕, 꿈’을 읽어내 영국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대한 실험장으로 발전한 ‘업 시리즈’의 감동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신비롭게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삶의 전개 방향이야말로 다큐멘터리로서 ‘업 시리즈’가 드러낸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보이후드>의 주인공 엘라 콜트레인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6살 아이였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12년 사이에도 배우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이후드>는 콜트레인과 직업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며 찍은 반 다큐의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는 매해 소년에게 일어난 변화를 영화에 반영했음은 물론 콜트레인이 직접 소년기의 대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업 연작’이 시간의 경과 위로 사회와 문화의 지도를 그리려 한 작품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얼굴 그리기에 더 치중한 작품이다. 긴 세월에 걸쳐 콜트레인이라는 배우와 메이슨이라는 인물이 은연중에 작가처럼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의 성장을 연대순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 보이후드 >는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트뤼포는 앙투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어린 장 피에르 레오를 선택했고,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영화 - < 400번의 구타 >(1959), < 앙투안과 콜레트 >(1962), < 훔친 키스 >(1968), < 부부의 거처 >(1970), < 사랑의 도피 >(1979) - 가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트뤼포 자신이 말했듯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드라마이며, 그러한 성격은 <보이후드>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지향점과 어느 정도 상치되는 부분이다. 꼭 그 점이 아니어도 나는 <보이후드>와 비교되어야 할 작품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 나의 작은 연인들 >(1974)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의 딱한 형편은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할머니와 살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게 된 소년이며, <나의 작은 연인들>도 소년 다니엘이 성장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단, 외스타슈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보이후드>와 상반되게)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극 중 소년의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시키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인상을 강화한다.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나의 작은 연인들>을 굳이 불러내 비교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장면 때문이다. 다니엘은 한 소녀와 노변 풀밭에 누워 있다. 곧 어른이 돼 순수의 시대와 작별을 고할 소년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이 장면은 <보이후드>의 첫 쇼트 - 여섯 살 메이슨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흡사 링클레이터는 고통스럽고 아픈 소년 시절을 보낸 다이넬의 시간을 돌려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른 태도로 새롭게 쓰려는 듯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다. 자신을 포함해 당신들도 소년 시절의 통증을 겪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극에 뛰어들어 아파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링클레이터 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자연미’다. 장르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그만의 소품을 찍을 때다. < 비포 미드나잇 >(2013)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라. 영어에 ‘Don’t make a scene(야단법석을 떨지 마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달라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매년 사나흘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여 15분 분량의 촬영을 거듭한 < 보이후드 >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업영화로서 너무 심심해 보일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어느 십 대 소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한 장면을 손질하지 않고 내놓는 것, 그 이상을 영화는 욕심 내지 않는다. 지금 장면이 어떤 해에 벌어진 일인지 구분해 밝히지 않기에, 흐르는 음악과 열중하는 게임과 구경 간 스포츠 경기와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대충 어느 정도 지점의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실수를 하는데도 숨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을 강조하기도 한다. 부모를 비롯한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소년이 겪을 성싶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게 다인 것 같은데 <보이후드>는 시간의 에센스를 놓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의 얼굴 덕분이다. 그냥 몸이 커지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는 게 다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흘린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메이슨의 얼굴에 자국을 남긴다. 16살 생일을 맞는 해에 메이슨의 얼굴은 밉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했던 콜트레인은 무슨 일인지 잔뜩 우울한 표정과 지저분한 얼굴로 메이슨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터인데, 링클레이터는 일부러 예쁘게 분장하지 않았고, 콜트레인도 통과 중인 시기가 입혀준 표정을 거짓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 보이후드 >를 찍는 과정이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상영시간이 165분인 영화가 대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에서 막을 내릴까. 평범한 영화였다면 메이슨이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보이후드>로 인해 유명해진 인디그룹 ‘패밀리 오브 더 이어’가 부른 <히어로>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큰사람이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요. 나를 놓아줘요’라는 가사가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장면과 썩 어울려 이 정도면 엔딩으로 훌륭하다 싶었다. 끝없이 뻗은 텍사스의 도로를 보며 누구나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링클레이터는 그런 감상을 빚을 생각이 없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음악으로 ‘콜드플레이’의 <옐로>가 흐른다. 노래의 가사는 ‘별을 바라봐, 별은 너와 너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어’이다. 소년이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나는 대낮인데 설마 별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또는 내 생각과 달리 소년이 자신만의 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년이 보는 것은 화면 바깥에 놓인 무엇이었다. 곧 누군가 소년을 부르고 소년은 극 중 현실로 돌아온다. 이어 12년의 시간을 산다. 내성적인 소년은 사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제 소년은 하늘이 아닌 자기 앞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조금 슬픈 얼굴의 여섯 살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띤 열여덟 살 청년으로 컸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이슨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메이슨에 해당하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펼쳐진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보이후드>는 시간을 과거에 흘러간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매 순간이자 현실이라고 <보이후드>는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소년기를 향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의 소년기 혹은 삶의 한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있었던 거다. 메이슨의 알싸한 성장통이 나의 것인 양 내 몸이 반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강릉씨네마떼끄 90년대 중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한국의 모든 씨네마떼끄들이 그러했겠지만 강릉씨네마떼끄의 꿈도 전용관을 갖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큰 스크린에서 여럿이 함께보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강릉씨네마떼끄의 목표였지만 현실은 그런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많이 부족하기만 했다. 찾아오기도 힘든 4층건물 꼭대기에 이십명 앉기에도 비좁고, 앞사람 머리에 가려 자막도 잘 안보이는 좁은 상영관이 우리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우리는 영화를 함께 봤고, 정동진독립영화제를 준비했고, 독립영화를 강릉시민에게 줄기차게 소개해왔다. 씨네마떼끄의 좁은 상영관에서 < 파업전야 >를, 단오문화관을 빌려 < 우리학교 >를, 대학 소극장을 빌려 < 고갈 >을, 미디어센터를 빌려 < 혜화,동 >을 상영해왔다. 신영극장 1996년 창립 이후로, 16년 넘게 지역에서 씨네마떼끄 활동을 하고, 독립영화를 소개하면서 느꼈던 점은 안정적이면서도 접근성이 좋은 공간의 필요였다. 그러다가 2011년 10월, < 돼지의 왕 > 강릉개봉을 추진하는데 기존에 섭외해오던 몇몇 공간들의 장소섭외가 잘 안되서 고민하던 와중에 이빨이 아파서 치과를 갔다. 물론, <돼지의 왕> 개봉공간 섭외의 고민 때문에 치통이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주로 가던 그 치과는 3층이었고, 4층엔 강릉의 대표적인 극장이었으나 그당시엔 폐관중이었던 신영극장이 있었다. 순간이었다. 정말. 그 순간, ‘한번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마음에 4층으로 갔고,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있는 신영극장을 만나고야 말았다.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묘한 느낌이 왔다. 옛날에 자주 와서 영화보던 공간이었지만 문닫은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게 신기했고, 여기서 우리가 영화를 상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관리사무소로 가서 문의를 했다. 얼마냐고. 그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돈이 없었고, 그러니 돈을 만들어야 했고, 돈으로 해결해야하는걸 직접 해결했다. 일단, 건물 임대보증금을 준비해야 해서 [나는 주인이다]라는 보증금마련 후원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목돈을 후원한 분들의 이름을 좌석에 새겨주는 프로젝트였는데 ‘이게 될까?’싶기도 했지만 놀랍게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200석의 좌석을 모두 후원받았다. 배우이자 감독인 유지태님이 선뜻 홍보모델도 해주셨고, 이런 쪽에는 늘 아낌없이 주는 배우 권해효님 등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다. 결정적으로 공무원노조 강릉시지부같은 강릉의 수많은 시민사회문화단체들과 강릉시민들이 흔쾌히 참여해주셔서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릉씨네마떼끄가 주최하는 정동진독립영화제의 예전 표어중에 ‘핸드메이드 영화제’라는게 있었다. 스크린부터 모깃불까지 모든걸 직접 만든다는 뜻의 문구였는데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도 ‘핸드메이드 극장’이 되버렸다.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걸 재정이 불안하다보니 극장 스탭들과 강릉씨네마떼끄 회원들이 직접 해결했다. 극장 간판도 우리가 직접 달고, 티켓박스도 MDF를 사서 직접 자르고, 붙여 만들었다. 극장 내부의 방염흡음시설도 우리가 직접 붙였다. 그러다보니 정작 중요한걸 놓치고 가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지만 ‘우리가 직접 만든 극장’이라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신영에서 신영으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전신인 신영극장은 강릉의 시내중심가에 위치한 극장이다. 1960년대부터 강릉시민들에게 사랑받아온 극장이었고, 가장 큰 극장이었다.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에는 ‘신영극장에서 보자’라는 강릉시민들의 약속장소이기도 한 일종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극장 문을 닫은지 꽤 됐지만 아직도 건물 앞 버스정류장 이름도 신영극장이다. 비록 기술발전과 영화관람문화의 변화에 밀려 사라졌던 극장이지만 그 극장에 담겨있는 수수함과 강릉사람들이 갖고 있는 추억을 버리기 싫었다. 그래서 ‘신영’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거다. 사실, 강릉에서는 “신영극장”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우리가 이름을 뭐라고 붙이든 상관없이 ‘강릉사람들은 한동안은 그냥 신영극장이라고 부를거 같아서‘라는 이유도 조금은 있다. 개관 8개월여 가까이 극장 개관을 준비하면서 온갖 난관을 넘어왔다. 이런저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릉씨네마떼끄 회원, 강릉시민들 그리고 전국의 독립영화인들 도움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개관은 했다. 그러나 극장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만은 않은거같다. 물론, 우리는 열심히 할거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들은 발에 채일정도로 언제나 주변에 널려있다. 독립영화나 규모가 작은 영화들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는 한국영화산업의 현실 덕분에 극장의 내일에 대한 걱정은 늘 가득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강릉씨네마떼끄가 우리지역에서 영화제를 하고, 상영회를 해오면서 만났던 강릉의 관객들을 믿는다. 씨네마떼끄의 아버지라 불리는 씨네마떼끄 프랑세즈의 초대관장 앙리 랑글루아가 이야기했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는 없다. 오직 봐야할 영화만이 있다” 우리 극장의 비전이 바로 그 말에 담겨있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의 구분은 아마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형 멀티플렉스에서 상영하면 돈빨로 밀어붙이는 나쁜영화고, 예술영화관에서 하면 좋은 영화라는 구분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지금은 좋은 영화, 나쁜 영화의 구분 이전에 더 심각하면서도 더 원초적인 구분이 있다. 바로 “볼 수 있는 영화와 볼 수 없는 영화”다. 독립영화만 해도 1년에 60편 이상의 장편이 만들어지는데 그중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영화가 몇편이나 될까? 어렵게 어렵게 준비해서 극장개봉을 한다해도 그 영화를 내가 사는 동네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는 관객은 몇 명이나 될까? 영화를 볼 수 있다는걸 행운이라고 표현해야 하는 시절인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판단할 기본적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목표는 ‘볼 수 없는 영화의 소멸’이다. 더 이상 < 두 개의 문 >을 보기위해 멀티플렉스 극장을 대관하지 않아도 되도록, < 레드마리아 >를 보기위해 강릉인권영화제가 열리는 12월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 줄탁동시 >를 보기위해서 서울독립영화제 순회상영회가 강릉을 찾기를 학수고대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영화 한편 안본다고 해서 인생 망가지지 않는다. 영화를 본다는건 그야말로 삶의 질을 풍부히 하는건데 지금까지는 < 말하는 건축가 > 한 편을 보기위해 개인과 지역사회가 감내해야 하는 경제적, 사회적 기회비용이 너무나 컸다. “내가 보고싶은 영화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쉽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목표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작 스크린 한개짜리 극장에서 뭘 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 모퉁이만 돌면 햇빛이 쨍하게 비추고 있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개관 이후 조금씩 조금씩 극장을 찾는 관객들도 늘어가고 있다. 신영에서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관람하고 있는 단골관객들도 생겨나고 있다. 적극적으로 개봉요청이 들어오기도 하고, 홍보부족을 꼬집는 질책을 관객에게 듣기도 한다. 지금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의 상황이 그리 희망적이진 않지만 희망이 보이기는 한다. 그래서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은 강릉의 관객들을 믿고, 또한 관객들에게 신뢰를 줄 것이다. 그리고 강릉의 관객들과 함께 달려볼 것이다. 모퉁이를 돌아서.
한국영화계에서 영화작가를 논할 때, 편애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가영화를 거론하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작가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멜로드라마 작품보다 사회성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을 영화작가로 대접하겠다는 한국영화비평계의 편향성이다. 정진우 는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작가''로 < 초우 >(1966년) 이후 멜로애정물에 애착을 갖고 있는 영화작가이다. 정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무너진 인간적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광범위하다. 어쨋든 사랑타령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작가로서의 홀대는 영화비평계의 편견에 있다. 그러나 정진우 의 영화작가정신은 작품세계는 물론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그의 노력에서 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한국 영화작가로서 정진우의 작품평가가 인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실천력은 치열하였고 그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섬개구리 만세 >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의 매스콤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진우는 인도영화보다 기술적으로 뒤진 한국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동시녹음만이 한국영화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 율곡과 신사임당 >(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후 기술의 세계화에서 내용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그는 < 심봤다 >(1979년) 등 일련의 향토물로 한국영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작품에만 승부를 걸지않았다. UIP파동 이후 미국메이저회사에 대항하여 한국영화 공급과 배급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네마 콤플렉스 <시네하우스>를 건립하였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멀티콤플렉스 극장은 한국영화 세계화의 경쟁력을 고취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정진우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맥을 이어 온 최인규 의 문하생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여 1963년 < 외아들 >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창립하기 전까지 무려 27편의 작품을 연출하였고 197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까지 계산하면 99편에 이르렀다. 여기에 타영화사에서 의뢰받아서 연출한 30작품을 합하면 무려 129편의 한국영화를 혼자서 만들고 제작하였다. 척박한 한국영화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한국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정진우 는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에서 부친 정원모 鄭元謨와 모친 황을순 黃乙順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포와 강화에서 36년간을 교육에 종사해 온 그 일대에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다. 정진우는 고향에서 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포중학교와 농사에 대한 야심으로 김포농고에 진학하여 축산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참가하게 된 학생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낙농의 꿈과 먼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 법대를 진학한 것은 연극영화학과가 없었던 당시 연극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중앙대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연극부 써클에서 활동하며 연극부 회원인 최무룡 선배의 소개로 영화계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58년 박상호 의 < 장미는 슬프다 >에서 강범구 촬영기사의 조수로서 였다. 그는 촬영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열악한 한국영화계의 제작여건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정진우 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 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5세에 < 외아들 >을 연출해서 한국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해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고 제작해 온 감독으로서도 기억되어야 한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공감은 1985년 그를 ''한국영화인협회''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의 주체인 영화인의 복지향상을 증진하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의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관주도로 거행되었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협회 주관하에 영화인 손으로 영화제를 치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정진우 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63년 < 외아들 >로 데뷔한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 활동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진우 는 영화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이 시기에 자기 중심적인 인간드라마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영화 < 외아들 >은 정진우 의 자서전적인 영화임을 짐작케 한다. 정진우의 성장배경에서 들어나듯이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정진우의 청소년 시절은 농촌에서 어머니와 농사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집을 떠나 온 이후 <외아들>로 감독 데뷰하기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경험한 인생공부는 인간의 이중적 심성인 선악의 갈등을 체험케 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을 극복한 참 인간상의 표현으로 표출되었다. <외아들>의 주인공은 정진우의 이념으로 그려지고, 그의 이념으로 채워진 작품세계는 정진우의 현실적 삶에서 원동력을 얻어 그 중심에 자리잡은 정진우의 작가정신인 주제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정진우 를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작품으로서 < 초우 >는 그의 초기영화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소재와 영화적 기법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가 눈에 띄게 신선하여 그 당시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졌다. <초우>는 현실성이 부족한 인물묘사로 단점이 들어나기도 하였지만 영상기교의 놀라운 일면과 일상적인 규격 속에서 탈피해 보려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였다. 청춘영화 <초우>는 흑백 영상의 밀도를 높힌 작가의 의욕으로 정진우 스타일을 구축하여 그의 영화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년)과 <동춘>(1970년)을 계기로 중견 감독으로 부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진우 는 역사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모색하였다. 역사의식에 눈을 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피력하였고 < 국경의 밤 >(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 동백꽃 피고지고 >(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맺힌 마움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정진우 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하였다. 셋째, < 심봤다 > 등 향토물로 동시녹음과 영화기술의 세계화에 매진하여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로 개화하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멜로애정물이나 민족의 비극사를 떠나 더 원류적인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정진우 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로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년)는 정진우의 연출 기량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 시작은 원시종교 무속을 내세운 < 석화촌 >(1972년)에서 시작하여 < 심봤다 >(1979년)부터 정진우의 향토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포착하기 위해 토속적인 경향을 띤 영화로 스케일보다는 깊이있는 내면을 탐색하려는 노력이 드러난 정진우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필름이다.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정진우 는 진화된 주제의식과 영화기술력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주장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향한 주제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김진명 원작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1994년)는 그 첫 시도로서 내용상으로는 ''침략자는 예고가 없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토아래 강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는 의지를 과시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기술상으로는 시각적인 특수효과와 동시녹음으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매진하였으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정진우의 이상을 실천하기엔 그의 끈질긴 실천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우 의 영화작가 정신은 우리사회의 사랑의 부재를 극복한 사랑의 쟁취를 통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화적 현실로 표현된 정진우의 영상은 그의 영화작가적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정진우의 집념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0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외아들 로 감독 데뷔 1967년 감독협회 창립 (부회장) 1969년 (주)우진필름 설립(대표이사)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 초대 제작 상임이사 문교부 교육의 날-< 섬개구리 만세 > 국민 훈장 수여 1981년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수석 부회장 한국영화 자율정화 위원장 1985년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한국영화 복지재단 설립(원장)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원장 / 한국예술총연합회 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 수상 1999~ 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원장 ㅇ 정진우 감독 작품 1962 외아들 1964 배신 , 국경 아닌 국경선 , 목마른 나무들 1965 밀회 , 난의 비가 , 가을에 온 여인 , 무정의 40계단 1966 초연 , 8240KLO , 초우 , 하숙생 , 악인시대 1967 밀월 , 하얀까마귀 , 4월이 가면 , 춘희 , 폭로 , 정부마농 , 구름 , 별아 내가슴에 1968 파란 이별의 글씨 , 미로 , 여여여 1969 국경의 밤 , 황진이의 첫사랑 , 청춘 , 차라리 남이라면 , 항구무정 , 동백꽃 피고지고 ,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동춘 1971 풋사랑 1973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5 애종 , 초연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9 심봤다 , 가시를 삼킨 장미 1980 바다로 간 목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 자녀목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 ,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ㅇ 수상 경력 초우 -서울대학생 최악 영화상 동춘 -제7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석화촌 -제9회 청룡상 최우수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 -제10회 청룡상 감독상/베를린 영화제 최초 본선 경쟁부문 진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제10회 대종상 계몽 및 우수작품상/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청년감독상 율곡과 신사임당 -제17회 대종상 특별상(한국영화 최초 동시녹음 작품) 심봤다 -제18회 대종상 감독상/ 한국영화 기자상 작품상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제19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자녀목 -제23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동경국제영화제 '세계영화 베스트30'선정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춘사영화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