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태
- 감독
- 최주현
- 제작년도
- 2000
사진: 정기성 맨몸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좋다. 불필요한 수사도 허세도 없이 알몸으로 돌진해 오는 영화가 좋다. 그런 영화들은 대개 허망하지 않다. 표층과 심층의 분리도 없고 잔망스러운 기교도 없다. 잔꾀를 부린 요사스러운 이미지로 결국은 뻔한 메시지를 전하며 맥 빠지게 하지 않고, 메시지에만 복무하거나 고결한 영화인 척하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대단한 사유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찍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풍경을 지겹게 비추지도 않는다. 이는 물론 영화가 아니라 내가 영화에 다가서서 느끼는 감상에 가깝다. 그러나 실상 무엇이 무엇에게 다가선다고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만난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영화비평이란 영화와 내가 만난 후기와도 같아진다. 나름의 고된 노동으로 생산했으나 세상에 별 이로운 가치를 남기지 않는 생각들의 언어. 오래도록 불편했던 질문 중 하나는 ‘비평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글쟁이 동료들과 대화 나눌 때면 비평가의 역할이 화두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가져야 할 듯해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일말의 사명감이라도 생길까 싶어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고 싶어 날뛴 결과가 내 비평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적든 많든 독자가 있는 지면에 자기 욕망에 못 이겨 쓴 글이 실릴 자격이 있을까? 원고료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찌 되었든 노동력을 들이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욕을 하든 공감하든 누군가 한 명은 내 글을 보며 반응하고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리라고 뻔뻔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하자면 글에 반응하는 이가 꼭 한 명은 있어야 한다. 편집진이든 독자든 단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면을 얻을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제발 한 명은 있어라, 하는 마음이 든다. 일인칭으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서 내용이 반가워 평소 조심스럽게 쓰곤 하는 ‘나’란 말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내 이야기에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자의 문제만은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을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꼬장꼬장하게 쓸 생각이다. 글은 쓰는 모든 사람은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더군다나 고료를 받고 글을 쓰는 이에게 그건 의무 사항이다. 실상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원고를 작성하는 평론가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이는 자격 상실이라고 본다. 적어도 고료를 받고 쓰는 이로서는 그렇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 모든 것에 관한 견해는 각기 다르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어떤 영화에 대한 견해가 한결같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떠드는 일이다. 다만 말로만 떠들면 흩어지고 마니까 정제된 언어로, 글로 남기는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지지 선언도 하고 공을 들여 비판도 하는 것이다. 고루한 이야기를 길게도 했다. 하지만 지루해질지라도 이야기의 과정이 필요할 듯했다. 결코 이 코너의 이름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지만, 비평의 안위에 대해 질문하거나 걱정하는 일을 기피한다. 간혹 ‘비평의 위기’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순조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새로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사에서나 예술계에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잔존의 싹을 제거하려 하거나 흔적을 지우려 드는 일은 지속되어 왔다. 새로운 아버지를 받들려고 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시도도 언제나 있어 왔다. 이는 언제 어느 때고 저마다의 문제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보통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공격받는다. 그런데 심한 개인주의자의 나쁜 전형인 나로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세상엔, 특히 영화계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을까.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인데 왜 신경을 쓰는 걸까. 아니 애초에 진짜 혈육도 감당하기 힘든데 굳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또 두려는 걸까. 물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간의 안이한 생각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혁명적인 선언이 없이는 활동의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싫어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내에선 아니라 할지라도)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이론을 마치 새로이 발견하거나 정립한 이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평문에 적용하거나 한참 전에 유행이 몰아쳤던 유형의 영화가 마치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처럼 추앙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을 지켜보자면 이건 발전이 아니라 도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빌자면 도태되었던 건 나였던 모양이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유행을 탄다. 옷과 마찬가지로 이론에도 유행이 있고, 비평의 유형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는 이론 비평이 일었으나 천편일률적이라며 텍스트 비평에 힘이 실렸고, 이후에는 또 텍스트 비평보다 테마 비평이나 이론 비평에 관심이 쏠린 지 한참 되었다. 그 사이, 가까이 지내는 후배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속한 평론가협회 회원들은 도태되었단다. 거칠게 요약하면 텍스트 비평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협회 평론가들 모두가 텍스트 비평만 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비평문을 쓴다. 그럼에도 그런 인식이 생기는 이유는 확실히 특정 이론을 접목하는 글보다 작품 분석을 기본으로 하는 비평문이 많이 나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태된 평론가라는 후배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충격받았다. 도태되었다는 말보다 그 말이 후배에게서 스스로 인정하듯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그 말을 들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성이 없는 글이라 할 수 없고, 이론에 대해 빽빽이 열거하거나 레퍼런스를 줄줄이 나열한 글이 지적이거나 비평에 맞는 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비평해야 하는 영화 이야기보다 자신이 인용한 문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에 더 몰두하는 글을 보면 혹은 그런 글들이 더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기꺼이 도태되고 실패한 평론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지면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혹할 말한 주제로 기획을 잘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업계 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어서 결국 지면 싸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엄청난 팬을 모은 몇 영화들에 어떠한 흥미도 비평 의지도 일지 않아 원고를 거절하면서 때를 놓쳐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글을 너무 못 썼던 적도 많다. 말하자면 능력은 부족한데 오만했다고 할까. 그런데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인용하려고 발췌해 놓은 문구들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쓰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완전히 확신이 있어 책임질 수 있지 않는 한 함부로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해선 안 된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여러모로 무능력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절대는 이유는 모종의 오기가 생겨 이런 유형의 평론가도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싶어서이고 (반복할수록 화가 나 이 말을 한 후배들의 입을 가만두고 싶지 않고 선배였다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만)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평론가에게도 그만의 의지가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시네필이나 평론가들이 즐겨 사용하거나 좋아하거나 혹하는 단어들이 있다. 물질성, 물질적, 즉물적, 육체성, 신체, 유령, 운동성, 운동감, 생동감, 리듬 등등. 근간에 유행하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어쨌든 이외에도 많다. 나는 한때 ‘유령’이라는 단어 혹은 ‘물질성’이라는 단어가 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난무하는 것 같아 불편하게 여긴 적은 있으나, 평론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몸을 ‘신체’로 쓰느냐 ‘육체’로 쓰느냐에 따라 글을 조금 이론적으로 발전시킬지 감각과 감정에 몰두해 쓸지에 관한 방향성이 달라지기에, 모든 글은 저마다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종 유형 혹은 계파를 나누는 행위를 즐기지만 세부에서 파생되는 힘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어떤 유형의 비평문을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중요하다. 물론 그 해답을 알고 있으면 매번 끙끙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할 수 있을지 고민했더니 결코 좋은 글은 나오지 못했어도 가슴은 시원하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이렇게 제멋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원고청탁서에는 이런 요청이 있었다. “국내 영화 비평계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한국(고전)영화 1~2편에 대한 비평을 곁들”이라는 (정확히는 코너 설명이지만) 요청이었고, 밑줄까지 그어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어떤 구체적인 영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코너를 즐겨보는 이라면 왜 아직도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이유는 서두에 있다. 알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비평이 실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혹은 나의 재능과 능력이 모자라서 뿐만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사진: 정기성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 임권택 감독의 < 개벽 >(1991)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영화에 대해 결코 길게 말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말을 할수록 이 영화와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처음엔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이덕화 )의 긴 이야기를 거의 도주의 형태로 보여주는 영화의 군더더기 없고 강력한 형식에 홀딱 반했다. 그런데 그보다 영화를 볼수록 사무치는 감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욱 끌렸고, 그 앞에서 나의 언어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해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도 해월의 육체성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슬픔이라고만 하기에는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감정, 그러나 결코 눅눅하거나 무겁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무치는 감정 혹은 그 감정에 진동을 주는 무언가가 해월이 있는 풍경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을 풀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리고 한참 후 KMDb에서 임권택 감독에 관한 자료를 찾다 정성일 평론가와 허문영 평론가의 대담을 보았고 그 대담 속에서 영화가 주는 인상에 가장 근접한 표현을 찾았다. 허문영 평론가는 <개벽>을 두 번째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고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 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이상 <개벽>이 안기는 느낌에 관해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말은 임권택 감독 영화의 풍경에 조금 더 다가갈 모종의 영감을 준다. 사진: 정기성 이는 대담의 일부이긴 하지만 포괄해 말하면 좋은 비평문은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나 혹은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는 않을 테다. 허무한 자문자답도 역량에 어울리지도 않는 반성 또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혹시나 기회가 되어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관해 길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또 머리 쥐어뜯으며 말들을 쥐어짤 것이다. 그게 나의 비평이 조금이나마 안녕해지는 길이다. 홍은미(영화평론가) l 2018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필로》, 《씨네21》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써왔고 현재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작고한 김수용 감독의 < 야행 >은 1974년 제작됐으나 사전검열과 영화법 4차 개정에 따른 제작사의 등록취소 문제로 1977년이 돼서야 개봉했다. <야행>은 김수용 감독의 전작 < 안개 >(1967)와 공통점이 많다. 두 영화 모두 김승옥 원작에 윤정희와 신성일이 주연을 맡았다. 두 영화는 급변하는 20세기 모던한 서울에서 삶의 방향을 잃은 주인공이 고향을 방문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구조를 갖고 있다. 두 영화의 주인공 모두 서울에서 중산층 이상의 계급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동시에 예정된 권태로운 삶에 무의미함을 느낀다. 두 주인공의 방황은 자의식적인 내레이션, 플래시백, 꿈과 환상의 장면으로 표현된다. 권태로움을 깨고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규범적인 중산층의 삶에서는 꺼내놓을 수 없었던 성적 환상의 실현이 된다. <안개>는 윤기준(신성일)이라는 부잣집 딸과 결혼해 제약회사 전무 자리를 꿰찬 남자의 시점으로, <야행>은 은행에서 일하며 이제 막 신축한 강남 반포 아파트에 살고 있는 현주(윤정희)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두 영화 모두에서 도시와 농어촌인 고향의 대비, 도시에서의 경쟁적인 삶과 신분상승의 욕망, 중산층 정상성에의 압박,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 같은 국가적 트라우마의 영향이 희미한 배경으로 처리된다.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와 도시화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쟁점들은 그 원인과 효과가 날카롭게 파헤쳐지기 보다는 개인의 방황을 정당화하는 동기 정도로 차용된다. <안개>와 <야행>은 공통점이 많지만 동시에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점도 두드러진다. <안개>에서 윤기준이 무진에서 잠깐 만나는 젊은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을 포함해 아내, 옛 애인, 술집작부 등 여성 인물들은 그의 남성적 수치심, 혼란, 열패감, 권태로움을 반영하거나 보상하는 정형화된 약호들로 기능한다. 무진에서 서울로 가고 싶어했으나 금방 마음이 바뀐 하인숙을 이해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반면 <야행>의 현주(윤정희)의 방황하는 행동은 단순한 변덕이나 모순보다는 도시 신흥 중산층 여성의 내적 풍경으로 이해된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예술 영화를 표방했던 영화와 마찬가지로 <야행>의 현주(윤정희)는 도시 생활의 최첨단에 있다. 그리고 그 최신의 세련됨은 자본주의의 숙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 된 반포주공아파트에 산다. 영화는 도시화와 더불어 지루함과 혼란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고속도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 고속버스 터미널, 서울의 빌딩을 오프닝의 설정 쇼트로 보여준다. 지방에 있는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은행에 취직하고 이제는 숙련된 직장인으로 일하는 현주처럼, 서울 역시 어느 정도의 도시화와 근대화가 숙성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설정 쇼트에 이어 영화는 은행의 일상 업무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이제 인프라를 쌓고 직접적인 노동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서 돈이 돈을 버는 금융자본이 중요해지고 지대수입을 통해 부를 증식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부의 증식은 계층 격차를 벌어지게 만든다.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강조라도 하듯 현금과 금고를 클로즈업 몽타주로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정치의 개입이든 경쟁에서의 도태든 탈락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동방상사의 사장이 오래된 부잣집에서 부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과 남자 주인공인 박대리(신성일)가 동방상사를 부도처리하는 장면이 바쁘고 역동적으로 교차편집 되는 와중에 안경을 쓴 현주는 돈다발을 응시한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남자들이 몰입해 일을 하는 동안 거리를 두고 약간은 지루하게 응시하는 현주의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는 여성인 현주의 관점에서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다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조금은 뒤늦게 밝힌다. 현주 역시 도시 자본주의를 충분히 누리고 있지만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는 현주가 결혼을 통해 규범적인 중산층 가족을 이루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묘사한다. 동료와 상사는 ‘노처녀’ 현주가 자기보다 어린 여직원이 결혼을 하는 것에 질투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 실제로 젊은 여직원들은 뒤에서 현주를 욕하고, 남직원들과 남자 상사들은 대놓고 그녀를 동정하며 비웃는다. 아무리 ‘안경만 벗으면 미인인’ 현주라도 나이가 들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그녀를 대한다. 현주도 여기에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불만은 훨씬 더 모호하고 복잡하다. 신식 강남 아파트에서 동거를 하고 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는 박대리에 대한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현주 역시 그와 정말로 결혼을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결혼은 그저 그의 욕망을 찾기 위한 여정을 추진하는 기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현주는 과거로 돌아간다. 휴가를 받고 고향에 내려간 현주의 회상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첫사랑은 베트남전에서 죽고 만다. 그녀의 아파트가 자신의 첫사랑이 묻혀 있는 현충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최신식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그 자본주의적 현대성은 전쟁이라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대가로 사들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국가가 오염되어 있는 것처럼, 결혼은 이제 중산층이라는 계층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현주의 욕망은 급작스럽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알레고리가 된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과시하는 김수용 감독답게 영화는 그 알레고리를 끊임없이 개인의 성적인 방황과 모던한 아파트의 스펙터클로 재치환 한다. 1974년 제작된 영화는 1973년 처음 공급된 당시 반포주공아파트의 실내 구조와 창밖 전망을 스펙터클화 한다. 영화 속 아파트는 은밀하게 섹스를 하는 에로틱하고 모던한 공간이자, 창밖으로 대단지 내 다른 아파트만 보이고 허허벌판인 황폐하고 삭막한 신도시 공간으로 묘사된다. 아파트 근처에는 베트남 전쟁 중 죽은 옛 연인이 묻혀있는 국립현충원이 있다. 현주는 현충원의 헌병 앞에서 스타킹을 올리며 유혹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이 장면은 강남개발과 베트남 참전이 모두 국가 주도의 근대화 프로젝트 영향 하에 있음을 은유하는 동시에, 신흥 중산층에 진입했지만 결혼 같은 규범은 원치 않는 여성의 욕망을 드러낸다. 지난 50년간 강남 중상층 욕망의 상징이 되어온 반포주공아파트는 2023년 재건축 진행으로 사라졌지만, <야행>은 그 욕망의 시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기억한다. 박대리는 뒤늦게 현주에게 결혼을 하자고 하지만, 자신을 성적 도구로만 여기는 그에게 현주는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현주는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성적 방황의 여정을 시작한다. 근대화, 도시화, 자본주의의 숙성을 통과하는 여성의 혼란스러움은 성적 불만족으로 환원된다. 서울로 돌아온 현주는 은행이 내려다보이는 다방에 앉아 박대리와 나눈 대화를 복기한다. 그리고 박대리가 했던 대사를 돌려준다. 박대리는 “우린 안 해?”라고 묻고 현주는 “시시해, 결혼식 같은 건”라고 답한다. 낯선 남자와 총질하는 환상이 삽입되면서 이제 현주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은유화 한다. 남은 휴가를 보내던 현주는 도심의 육교 위에서 느닷없이 수갑이 채워져 여관방으로 끌려가 강제로 관계를 맺고, 이때 첫사랑과의 첫날밤 장면까지 교차되며 그녀의 환상은 극에 달한다. 이 장면은 여성 시점의 강간 판타지를 위험하게 보여준다. 아파트에 갇혀 사는 중산층 여성의 권태로움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불만족을 성적환상으로 대치한 현주는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환상은 환상일 뿐 그녀의 일상은 다시 반복된다. 하지만 박대리와 결혼하는 안일함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주의 눈치를 보는 박대리에게 단호하게 ‘휴가는 끝났다’는 쪽지를 보내고, 자신을 성희롱하는 남자고객을 뒤에서 욕하며 퇴근하는 현주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성적 대상화하는 남자들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특히 나이에 따라 여성들의 가치를 매기는 가부장적 결혼제도로는 걸어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현충원을 지나 양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아파트 사이의 소실점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을 점프컷으로 보여준다. <야행>은 중산층이라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결혼이라는 규범을 거부하는 자본주의 근대 도시 여성의 얼굴을 보여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흥행사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가 황금정 제63통 7호에 세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전용관으로 1910년 2월 18일 개관했다. 《국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경성고등연예관은 1909년 10월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다음해인 1910년 2월까지 개관이 연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처음 자리한 ‘황금정 제63통 7호’는 원래 남부(南部) 조동(棗洞), 즉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여기 농상공부(農商工部) 건너편, 지금의 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다가 1911년 9월, 맞은편인 황금정 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 모 증권회사빌딩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나 1912년 6월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영업을 중단, 개축하여 1912년 9월 16일 영업을 재개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설립자 가네하라 긴조는 태국에서 와타나베 토모요리(渡邊智賴)라는 사람 밑에서 활동사진업을 했는데, 조선에 건너와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우고 와타나베가 운영하던 ‘K다이아몬드’ 회사 배급작을 들여와 상영했다. 와타나베는 태국의 초기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태국에 일본식 흥행 문화가 정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나 가네하라처럼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태국에서의 흥행 경험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조선의 활동사진 흥행업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개관 직후 경성고등연예관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의 단편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사이사이 간단한 무용 등의 여흥이 곁들여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프로그램의 교체 주기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개관 이후 1910년 5월까지는 월 2회(매월 1일, 15일) 교체되었고 6월부터는 월 3회(매월 1일, 11일, 21일) 교체됐다. 1912년 3월 1일부터 1913년 3월 말까지는 다시 월 2회(매월 1일, 15일)가 되었으나, 경쟁 영화관들이 1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기 시작하자 1913년 4월부터 폐관되는 9월까지는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자료]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광고(《황성신문》, 1910.02.18)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태국의 영화회사 K다이아몬드가 배급한 것이었다. K다이아몬드는 1910년 쭐랄롱꼰 국왕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등 태국의 왕실 행사를 담은 실사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를 따라 경성고등연예관 또한 조직을 정비하고 환등 및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경성고등연예관의 신축 이전을 앞두고 조선에 건너온 가네하라는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을 위해 가네하라상회를 신설, 산하에 연예부, 사진부, 판매부를 두었다. 연예부에서는 경성고등연예관과 활동사진순업대를 운영하고 사진부에서는 환등과 활동사진을 제작하며 판매부에서는 활동사진 필름이나 환등 기계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1912년 9월 16일 재개관을 맞아 촬영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등과 활동사진 제작에 나선다. 더 나아가 1913년 2월에는 여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전기응용 방식을 대신할 키네오라마(キネオラマ)를 설치했다. 키네오라마는 일출(日出), 석립(夕立, 소나기), 석효(夕燒, 저녁노을), 명월(明月)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1913년 전후로 대정관을 위시하여 우미관, 황금관 등 세 곳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자 경성고등연예관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1913년 4월 1일을 기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대대적인 혁신을 선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구(新舊) 일본극을 더하여 매주 프로그램을 바꾼다. 둘째, 입장료를 저렴하게 개정한다. 셋째, 도쿄에서 변사 후지모토 류코(藤本龍光)를 초빙하여 다나카 아사히유(田中旭湯)와 함께 활동사진 설명을 맡겨 변사 진용을 강화한다. 다섯째, 관객의 대우를 한층 새롭게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유인하려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꾸겠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용관으로 전환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음에도 경성고등연예관은 치열한 상설관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결국 1913년 9월 1일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건물과 흥행권은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타 고이치(新田耕市)에게 매각되었으며,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은 제2대정관이라 이름이 바뀌어 1913년 10월 31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제2대정관 개관 광고에는 주임 변사 이마이 요시카(今井芳香), 차석 변사 와타나베 마쓰카제(渡邊松風)라 기록되었다. [자료] 제2대정관 개관 광고(≪조선신문≫, 1913.10.30) 제2대정관이 개관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은 제1대정관(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세 곳이 된 반면 아직 조선인 상설관은 우미관 한 곳뿐이었다. 닛타 고이치는 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3개관이 6~7만 명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을 나누는 것보다는, 하야가와연예부의 필름을 제공받아 20만 명의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정관을 조선인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14년 6월, 제2대정관의 유일한 조선인 변사였던 김덕경(金悳經)을 변사장에 임명하고, 설명 주임 이병조(李丙祚), 차석 최병룡(崔炳龍) 등의 변사진을 꾸려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한다. 당시 제2대정관에서는 일본인 상설관에서 상영하던 방식대로 여러 명의 변사들이 출연하여 마치 오늘날의 성우와 같이 각자 주어진 배역을 맡아 스크린 속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뿐 아니라 여변사 강경옥(康鏡玉)과 소년변사 이병호(李丙浩)를 두어 여자 배역과 아이역의 연기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영화 속 어떤 배역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하는 변사를 연극변사 혹은 성색(聲色)변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조선인 상설관은 활동사진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타이틀을 읽어주는 역할의 소위 설명변사가 독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대정관의 연극변사 제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듯 보인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닛타연예부는 대정관의 경쟁 상대인 황금관을 견제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필름을 제공받던 우미관을 공략하여 하야가와연예부 대신 제2대정관의 필름을 함께 사용하는 동시에 제2대정관을 일본인 전용관으로 되돌리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915년 4월 제2대정관은 조선인 상설관에서 다시 일본인 상설관으로 전환되어 세계관(世界館)이라고 이름까지 바꾼다. 특약에 따라 제2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연예부는 우미관으로부터 매달 2백원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며, 우미관은 세계관과 같은 필름을 매월 5백 원의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닛다연예부에서 운영하던 세계관은 경성 서쪽의 일본인들을 주요한 관객으로 삼을 수 있었고, 닛다연예부의 필름을 공급받는 우미관은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조선인 상설관이라는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관은 폐관한다. 1915년 9월 20일 본정 한복판에 유락관(有樂館)이 들어서면서 활동사진 흥행 권리를 유락관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제2대정관, 세계관으로 이어진 영화관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권리만 유락관으로 옮겨갔다. 경성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은 훗날 영화관과 상관없는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99~134쪽. [사진](상단). 경성고등연예관 외관(《국민신보(國民新報)》, 1909년 10월 5일자.) [자료] 《황성신문》, 1910.02.20. 世界 苐一 活動冩真 開館 ● 本舘新築落成 에 就 야 二月 十八日(陰曆 正月 九日) 로 開館 ● 二月 二十日(陰曆 正月 十一日 午后 六時 브터 年中無休 로 一般 顧客 의 觀覽 에 供 ● 本館 의 寫眞 은 佛國 파데 會社 의 最新 器機 를 使用 고 每週 輸入 世界 各國 의 最 히 壯觀 에 極 山水 의 風景、人事 의 現象 은 勿論、滑稽、奇術 及 世界 有名 의 諸般 珍事 를 映寫 야 一般 活動寫眞界 에셔 斷 히 企及 키 能 치 못 것을 明言 ● 本館 은 寫眞 의 外 에 日本 美人 의 花 와 如 電氣踊 을 間間 히 行 고 且 韓國 妓生 의 舞踏 를 加 야 錦上添花 의 觀覽 이 有 ● 本舘 의 建築 宏壯 은 內部 의 完全、 장 篩 의 美麗、待遇 의 懇篤、衛生 設備 의 整然 이 模範的 演藝舘 이 될 것을 一般 에게 誇張 ● 本館 의 擔任 技師 靑森縣人 中村初太郞 이니 活動寫眞業 의 本邦 創業 以來 로 吉澤商店 及 파데 會社 에 技師 兼 敎授 의 任 에 在 야 精巧 老鍊 의 技術 이 有 야 斯界 의 錚錚 의 評 이 有 바 其 映寫 의 巧妙 本館 의 壯談 바요 ● 高尙 고 優美 活動寫眞 은 敎育 又 家庭 의 一時 娛樂 이 此 에 優 것이 無 니 開舘 後 陸續 御來覽 심을 深 히 希望 入場料 四等 金拾錢 三等 金貳拾錢 二等 金參拾錢 一等 金伍拾錢 特等 金一圓 每日 午後 六時 開舘 但 五人 以上 組合 觀覽者 에게 一割引 十人 은 二割引 京城黃金町(農商工部通) (南部東洞) 京城高等演藝舘 [자료] 《황성신문》, 1910.04.10. ● 銀甁 下賜 大皇帝 陛下 게 셔 去七日 에 高等演藝館 에 活動寫眞 을 招入 御覽 심은 已報 어니와 該 館主 日本人 宮田伊助 에게 銀製 花甁 一個 를 下賜 셧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1.08.11. ● 金原商會 의 新設 目下 黃金町 三番地 에 新築 落成 은 九月頃 인 故 로 卽時 開業 다 向者 에 館主 金原 氏 가 來鮮 야 營業 의 方針 을 變更 고 京城高等演藝館 은 仝會 의 演藝部 가 되야 今後 에 大改良 을 加 고 昔年 東京 에셔 郵便局長 으로 勤務 던 成淸 氏 를 招 야 演藝部 로 敎育的 活動寫眞 으로써 全道 에 巡業 케 며 又 寫眞部長 에 工山 氏 招聘 며 又 東京 三越吳服店 의 寫眞部 에 在 야 技術 이 卓越 大庭 氏 超 야 一般 寫眞 의 撮形 은 勿論 고 活動畵 及 幻灯 도 製作 케 며 販賣部 活動寫眞畵 及 幻燈器械 外 에 日鮮人 의 實用品 도 薄利 로써 販賣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4.06.03. ● 第二大正館 新面目 ▲ 구리 뎨이대졍관에셔 ▲ ▲ 슌젼 죠션인을 위 활동 ▲ 이왕 , 구리개 고등연예관을 , 뎨일대졍관에셔 사드린 후 , 일홈을 뎨이대졍관 ( 第二大正館 ) 으로 곳치고 , 활동사진을 영샤 즁이더니 , 시셰의 요구를 응 여 , 오 날 지 , 디인의 경영으로 , 디인 변 ( 辯士 ) 지 두고 , 뎐업 던 것을 , 일톄 페지 고 , 죠션사 으로 야곰 , 사진 셜명을 계 야 , 죠션인 젼문 ( 專門 ) 으로 뎡 고 , 참신 긔발 , 셰게 인졍 풍속 등 , 여러 가지 사진을 가져다가 , 오 밤부터 , 시작 다 오 밤부터 흘 동안은 , 입장료 ( 入場料 ) 를 특별히 감 야 , 웃층은 평균 십젼으로 , 아 층은 , 평균 오젼으로 다 며 , 젼덕경 ( 全德經 ) 최병룡 ( 崔炳龍 ) 두 변 의 류챵 쾌활 설명이 , 잇슬 터이라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