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생들
- 감독
- 린 신
- 제작년도
- 2009
1967년 <청춘극장>(강대진)과 검열의 체계화 검열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때는 검열에서 위반사항이 발견되지 않을 때이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역설의 증거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이 1965년 이후 왜색에 대한 검열은 강화되었음에도 1967년 <청춘극장> 검열에서는 왜색 문제가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제작자가 미리 검열 기준을 의식하여 검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왜색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이 영화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별 문제 없이 검열을 통과한다. 그런데 1967년 <청춘극장> 검열 과정을 들여다보면 왜색의 사전 삭제와 같이 제작자로 하여금 미리 자체 검열을 통해 제한사항을 최소화하게 만들도록 검열이 체계적으로 강고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영화법 제2차 개정(1966년 8월3일 개정)과 시행(1967년 4월4일 시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제도의 변화가 보다 잘 드러나기도 한다. 1966년 6월29일에 <청춘극장>의 제작신고서가 공보부 1) 영화과에 제출된다. 1966년 3월4일에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고, 별첨되어 있는 공연권취득증명서가 3월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제작사는 3월부터 이 영화의 제작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7월7일에 공보부에서는 영화제작사인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시나리오와 전속출연자 활용각서를 첨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를 제작사에 보낸다. 8월3일자로 개정된 영화법 에 의해 시나리오 검열은 법제화되는 반면 전속제는 폐지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요구는 과도기적인 중복으로 보인다. 제작사는 영화법이 개정되고 난 10월이 되어서야 공보부에서 요구한 보완서류를 제출한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2월6일에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시정사항 없음’으로 시나리오 검열 의견서가 기안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행정 절차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림 1) <영화제작신고서> (그림 2) <극영화 제작신고에 따르는 미비서류 보완 통보> (그림 3) <극영화 시나리오 내용 검토> 2차 영화법 개정 이후 신규영화허가신청서에 구비해야 하는 서류는 영화시나리오를 비롯해 납세완납증명서, 자립저축필증, 동시상영문화영화복사수속필증 등 13가지로 보다 복잡해졌다. 이를 통해 보건대 개정된 영화법의 시행은 1967년 4월3일이라고 하나 제출 서류에 대한 관리가 보다 엄격해짐으로써 실제로는 이미 개정된 영화법에 준하는 행정 검열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공보부 측의 미비서류를 제출해달라는 요청과 그에 따른 제작사의 보완 제출이 있은 끝에 1966년 12월29일자로 <영화검열합격증>이 발부된다. (그림 4) <신규 영화상영허가신청서(구비서류목록)>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와 별첨 <영화검열합격증> 위 서류에 의하면 <청춘극장>은 “원작인 『청춘극장』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무렵, 우리나라 젊은 학도 백영민, 장일수, 신성호 등은 각자 풍운의 꿈을 안고 항일투사로 일본유학생으로 또는 국내에서 애국활동을 하던 청춘상을 그린 극영화”로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1959년의 것(“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에 비해 항일운동과 애국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이 백영민이 학병으로 출전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군가를 단축하라는 것이었는데, 이는 강화된 왜색 검열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항일 애국주의의 강화와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영화에 대한 미성년자 관람 심사에서는 보다 많은 제한이 이루어졌다. 우선 등급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가 되었는데, 그에 비례하여 겁탈 장면, 캬바레에서 무희가 춤추는 장면, 영민이와 유경의 정사가 암시되는 장면, 임신을 알리는 대사 등 주로 성적인 장면들이 삭제 대상이 되었다. 1965년 <춘몽>을 둘러싼 음화 논란 이후 공안에 가려져 있던 외설이 검열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부상한다. <청춘극장>의 관람 등급 심사에서 제한된 내용은 성적인 표현에서도 검열이 보다 엄혹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6) <영화 미성년자 관람심사 결과 통보> 1975년 <청춘극장>(변장호)과 무너지는 검열 1975년 <청춘극장>은 사회가 유신체제로 이행되고 제4차 영화법 개정(1973년 2월16일)이 이루어진 이후, 게다가 긴급조치 이후에 제작된 영화다. 제4차 영화법 개정의 골자는 영화 표현 영역에서 유신체제의 기조를 관철하는 것이었으므로 표현의 자유는 더욱 통제되고 억압되었다. 통제와 억압의 강도는 긴급조치 이후에 나날이 심해졌으며, 그에 따라 영화 검열기준 또한 강고해졌다. 1975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75년 <청춘극장>에 대한 시나리오 검열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 이전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등장이다. 예륜은 1970년부터 극영화 시나리오 검열을 전담한 기관이다. 제작사는 우선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을 거친 뒤에야 검열 담당 부처(공보부, 문화공보부 등)에 제작신고를 할 수 있었다. 이에 1975년 <청춘극장>의 시나리오 검열도 ‘예륜’에서 수행한 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75년 6월17일자로 시나리오 검열을 예륜에 신청하고, 예륜은 6월20일에 검열을 수행하여 공보부에 보고한 것이다.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는 이 영화의 내용이 “꼬마 신랑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동창생이었다.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의 길을 걸었던 민족의 불운을 되돌아보는 광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수난’, ‘형극’과 같은 국가의 위기를 상기시키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시국과 결부하여 생각할 때”라는 전제 하에 “비록 일제 때 있었던 학병 강제 동원 등[이라 하더라도] 일반에게 전쟁기피증과 반전사상을 주입시키는 악영향을 주지 않도록 세심 유의”하라는 의견이 첫 번째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는 남북한 모두 정권 유지를 위한 이념이 강화되며 남북한 관계가 경색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고조시켜 사회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한편 언제든지 국민을 전쟁에 강제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 검열에서 항일정신의 구현을 영화의 미덕으로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전쟁이라 하더라도 반전의식을 고취시켜서는 안된다는 모순적인 제한조치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7)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그림 8) <종합의견 보충설명 및 부분시정사항> 예륜의 시나리오 검열 단계를 통과한 제작사는 제작에 착수하겠다는 신고서를 1975년 7월1일자로 문화공보부에 제출한다. 문화공보부에서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개작하라고 7월7일자로 제작사에 통보한다. 이에 7월12일 제작사는 문화공보부의 개작 요구에 따라 충실히 수정하겠다는 보고서와 함께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한다.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는 개작된 시나리오에 대한 내용을 검토하여 상부에 보고하면서 제작사에 수리 통보를 한다. 이때 “본 작품은 제작과정에서 사계 권위자의 고중을 받아 시대적 배경으로 뚜렷이 하여 전쟁기피증 및 반전사상과 대일 굴욕감정이 유발되지 않도록 특히 유의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에 대한 적대의식은 고양하되 염전(厭戰)의식은 지양하라는 지침이 다시금 강조된다. (그림 9)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통보> (그림 10) <국산극영화 “청춘극장” 대본 개작 보고의 건> (그림 11) <극영화 “청춘극장” 제작신고 수리 통보>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18일에 제작사는 방대한 제작규모에 비해 제작시일이 촉박하여 시나리오 검열에서 시정이 요구된 사항을 다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사죄하는 내용의 각서와 경위서를 제출한다. 이에 대한 별다른 조치 없이 이튿날인 9월19일에 이 영화는 검열에 합격한다. 이는 늘어나는 제한조치에 비해 그것을 위반했을 시의 조치는 의외로 탄력적이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대목이다. 영화 검열 의견서에서는 “백영민과 장일수, 신성호는 학교 동창생으로서 이들이 일제 치하에 겪는 수난을 묘사하여 식민지 치하의 형극을 걸었던 민족의 수난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라고 하면서도 또 다시 꽤 많은 제한사항을 통보하고 있다. ‘학생이 선생에게 대드는 장면’, ‘대통령 모독’, ‘성적인 표현’ 등이 주로 제한되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제한사항은 중학생 이상 관람할 수 있게 한 관람 등급과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12)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3) <영화검열 의견서> 1975년 <청춘극장>에서는 그 이전에 없었던 예고편에 대한 검열까지 이루어진다. 본편이 검열에 합격한 지 일주일 뒤인 9월25일에 제작사는 <예고편 검열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에도 납세증명서가 첨부된다. 그리고 9월27일에 예고편 검열 합격이 통보된다. 여기에서도 주요인물의 별칭에 해당하는 ‘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삭제하라는 제한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림 14) <예고편 영화검열 신청서> (그림 15) <국산 영화 예고편 “청춘극장” 검열합격> (그림 16) <청춘극장 예고편 검열대본> 중 마지막 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75년 <청춘극장>은 대본 검열에서부터 예고편 검열에 이르기까지 보다 많은 검열 단계를 거치며 또 그만큼 많은 시정을 명령받았다. 한 마디로 1959년, 1967년보다 매우 엄격한 제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이나 ‘장군’과 같이 군부와 관련된 표현에 대해서는 히스테릭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민한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에 대해 대단히 엄격했음이 드러난다. 설사 그것이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 학생과 일본인 선생의 관계라 하더라도 ‘하극상’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사항들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위계적이고 경직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경직성은 ‘왜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일본 복색이 드러나서는 안 되는 것은 물론 일본어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설사 일본인이라 하더라도 일본어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규제되었던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가 강화되며 그 일환으로 국가 주도로 국어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규제가 더욱 강화된다. 한편 “동경 가면 예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표현도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삭제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당시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발전한 일본은 영화 표현에서 경계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과하다고밖에 할 수 없어서 이러한 조치를 통해 오히려 당시 정권의 불안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검열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때는 오히려 검열 과정에서 제한 사항이 없을 때라고 말했다. 반대로 검열에서 제한 조치가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검열의 기준이 제작 과정에 관철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1975년에 이르면 시나리오가 예륜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반려되는 비율이 80%에 이르게 된다. 이미 1960년대 말부터 국가의 영화 통제는 영화산업과 회복할 수 없는 괴리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유신체제 이후 그 괴리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리고 1975년 이후에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게 된다. 금지하고 제한해도 검열에서 문제가 될 영화가 계속 기획되었다는 것은 검열이 무너지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975년 <청춘극장>은 바로 그러한 변곡점에 놓인 영화였다. 1) 영화 검열 업무는 1961년 10월2일 이후 문교부에서 공보부로 이관된다.
‘청춘대로망’ <청춘극장> 1) <청춘극장>은 김내성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내성의 『청춘극장』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3년에 걸쳐 5권으로 출간되어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1990년대까지도 역대 가장 재미있는 대중소설 중 하나로 회자되었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이 소설은 영화화만 세 번 되었는데, 2) 세 편의 영화 또한 모두 크게 흥행했다. 한편 영화 <청춘극장>은 공모를 통해 주연 여배우를 발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와 19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주역이었던 윤정희와 정윤희가 각각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을 통해 데뷔하였다. 영화 <청춘극장>은 1959년, 1967년, 1975년에 제작되었다. 원작소설은 1939년 2월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1939년 2월부터 1943년까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1967년과 1975년 영화이고,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1959년 영화가 성공했기에 이후 영화들이 리메이크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시대 배경 설정은 1959년 영화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이다. 원작에서는 해방과 함께 귀환한 주인공 백영민이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해방 전인 1943년 시점에서 마무리함으로써 해방을 희망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고 원작의 부담스러운 결말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화 <청춘극장>은 원작이 보여준 해방기의 비극성은 은닉한 채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과 모험을 집약한 ‘청춘대로망’이 되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크게 로맨스와 청년들의 모험으로 구성된다. 우선 로맨스는 지주의 아들로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다니는 ‘백영민’과 그의 고향집에 있는 정혼자 ‘운옥’, 그리고 백영민이 일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유경’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청년들의 모험은 전문학교 동창생 관계인 삼총사, 즉 법관을 꿈꾸는 ‘백영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장일수’, 문학청년 ‘신성호’의 역정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에 삼총사의 동창이면서 친일파로 살아가는 ‘최달근’과, 백영민을 짝사랑하는 기생 ‘춘심’, 그의 오빠이자 운옥을 노리는 밀정 ‘준길’, 그리고 백영민의 은사이면서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태평양전쟁 막판에 참전하는 일본인 지식인 ‘야마모토’ 등이 이야기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조선, 일본, 중국에 걸쳐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는 백영민을 가운데 둔 두 여성과 두 청년의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여준다. 1975년 <청춘극장>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정체성을 집약해준다. 장일수 군의 예언대로 우리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중국에 걸쳐서 펼쳐졌던 우리들의 청춘대로망도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되어 대륙으로는 길이 끊긴 채 실질적으로는 섬이 되어 버린 남한에서 광활한 땅, 즉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에 걸친 사랑과 모험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 시기라 하더라도 낭만적인 상상계로 구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대중의 호응은 이 영화가 보여준 상상계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3) 위쪽부터 1959년,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의 포스터. 1959년 영화에서는 김진규, 황정순, 김지미가, 1967년 영화에서는 신성일, 고은아, 윤정희가, 1975년 영화에서는 신영일, 김창숙, 정윤희가 각각 백영민, 허운옥, 오유경 역을 맡았다. 세 편의 <청춘극장>은 낭만적이고 파란만장한 서사에서 주인공을 맡은 스타들의 면모와 그에 따른 각 편의 변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로움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8년에 한번 꼴로 제작되면서 달라지는 검열제도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에 동일한 원작, 유사한 서사로 리메이크된 세 편의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를 비교해보면 각 시기 검열의 변화가 한눈에 포착된다.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현전하지 않으나 다행히 검열서류는 남아있어서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1959년 <청춘극장>(홍성기)과 왜색의 문제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서류에는 상영허가신청서, 작자승낙서, 작곡자승낙서, 검열위원위촉의 건, 검열의견서, 그리고 대본이 첨부되어 있다. 사전 시나리오 검열이 명문화되어 체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1966년 제2차 영화법 개정부터이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않았을 뿐 시나리오 검열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검열은 문교부에서 주관하였으며 검열위원으로는 내무부 치안국장, 서울지방 검찰청, 국방부 정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이 위촉되었다. 검열의 주관 부처와 참여 기관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기본적으로 치안, 교육, 안보에 관련된 기관은 계속 검열에 개입하게 된다.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59년 3월1일에 문교부에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했고, 3월2일에 검열위원이 위촉되었다. 위촉된 각 기관의 검열위원들은 문교부 검열실에 모여 검열 회의를 진행하고 각 기관별로 검열의견서를 따로 작성하였는데. 검열의견서는 3월2일부터 3월4일 사이에 제출되었다. 그리고 <청춘극장>은 3월4일에 바로 상영이 ‘무제한 허가’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승만 정부에서 승인한 ‘무제한 허가’는 무효가 된 것으로 보인다. 3년 후인 1962년 2월22일에 <청춘극장>의 재상영허가신청서가 공보부에 제출되고, 3월20일에 재상영허가 결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가기간은 1962년 3월20일부터 1963년 3월19일까지 1년간이었다. 이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립영화제작소 3) 에서 제작한 문화영화 <국토방위 이상 없다>가 재상영허가의 조건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4)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위원 위촉의 건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의 건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은 왜색의 문제였다. [그림 5]를 보면 검열자들이 이 영화를 “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이라고 요약하여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화면 중 일본복색에 관하여는 국정회의에서 논의하였고 차관님께 보고하였음.”이라는 참고 사항을 말미에 달고 있다. 식민지시기를 재현하는 영화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일본복색’이 국정회의에서까지 논의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왜색’ 문제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대하게 취급되었는가를 말해준다. 해방 이후 ‘일본’과 관련된 남한의 정책은 1960년 4.19와 1965년 한일수교,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 공포를 기점으로 변화한다. 4.19 직후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일 문화교류에 대한 기대 심리 속에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접근이나 일본에 대한 재현이 잠시나마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1961)이다. 이 영화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이 일본 여성을 사랑하면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의 전통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비하면 1959년 <청춘극장>은 불과 1년 전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왜색에 대한 비교적 자유로운 재현은 1965년 한일협정 이전까지만 허용된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왜색’에 대한 검열이 오히려 강화되는데 이는 반공주의 강화와 연관된다. 한일수교로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 유치에 성공한 박정희 정부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한다. 그리고 영화계에도 ‘반공영화에 대한 포상’이라는 당근과 ‘용공에 대한 엄격한 제재’라는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정책을 편다. 1965년을 전후로 하여 일본은 북송선 문제로 남북한의 대결을 격화시키는 데 매개가 된 국가였기 때문에 한일수교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반공주의 차원에서 볼 때 용공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에서 재현하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재현이 한일수교 이후에 오히려 과거 식민지 시대로 집중되고 일본이 ‘적’과 ‘악’으로만 재현되며 북한과 유사한 표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1) <청춘극장>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졸고, 「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의 표상」, 『한국극예술연구』 44집, 한국극예술학회, 2014, 123-130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청춘극장>은 KBS 22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1993년 10월23일~1994년 1월2일에 방송되기도 했다. 3) 국립영화제작소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 공보처에 설치되어 뉴스,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을 만드는 부서로 존속했다. 그런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에 개정된 정부조직법 규정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 및 선전을 위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게 된다.
영화사에서 < 로맨스그레이 >(1963, 임희재 극본, 신상옥 연출)는 3년 전의 < 로맨스 빠빠 >(1960)년부터 시작한 1960년대 초의 가족멜로드라마, 특히 ‘김승호 영화’라고 통칭되는 아버지 중심의 가족멜로드라마의 한 작품으로 포함되어 서술된다. 그래서 제목 작명과 코미디라는 설정, 연출자인 신상옥 감독, 아버지 역의 주연배우 김승호 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은 흔히 <로맨스 빠빠>의 아류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나, < 로맨스그레이 >를 < 로맨스 빠빠 >의 뒤편에만 밀어 넣어 두기에는 좀 아깝다. 작품의 얼개가 <로맨스 빠빠>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일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초를 살짝 벗어난 지점에서 엿보이는 변화가 주목할 만하기 때문이다. < 로맨스 빠빠 >와 < 로맨스그레이 >는 모두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방송극 <로맨스그레이>는 1962년 임희재 작, 민구 연출의 문화방송 라디오드라마로,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 방송되던 주말드라마였다. <로맨스 빠빠>에 비해 <로맨스그레이>가 훨씬 복잡하고 튼튼한 얼개를 지니고 있는 까닭은 라디오드라마의 원작이 각기 다른 콘셉트의 작품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대본이 남아있지 않아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드라마 <로맨스 빠빠>는 회별로 에피소드가 완결되는 이른바 시추에이션드라마임에 비해, <로맨스그레이>는 리메이크 영화나 드라마 시간대 편성 등을 미루어 볼때 줄거리가 이어지는 연속극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로맨스 빠빠>가 갈등의 진행보다는 서울 중산층의 일상생활을 펼쳐놓는 것에 치중하는 것에 비해, <로맨스그레이>는 처음부터 품격 있는 교수 아버지의 불륜이라는 극적 갈등을 설정하고 이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양 있는 부인에 대졸자 자녀까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도시 부유층인 교수는 바걸 만자와 딴 살림까지 차릴 정도로 심각한 외도에 푹 빠져 있다. 여기에 김사장과 가정교사 출신의 애첩 보영의 외도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얽혀 있다. 만자와 보영은 친구 사이이고, 보영은 교수의 장남이 대학시절 연정을 느꼈던 동창생 사이, 교수 부인과 김사장 부인은 같은 사교 모임 멤버이다. 만자는 아파트를 얻겠다며 교수를 졸라 얻어낸 돈을 전 남편인 건달에게 뜯긴 후, 김사장이 보영을 위해 얻어준 아파트를 교수와의 밀회 때마다 자신의 아파트인 양 빌려 쓰기로 약속한다. 방 하나를 두고 각기 다른 커플이 정사 약속을 한다는 설정은, 잘 짜인 구성의 재미로 밀고 나가는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적인 설정 중의 하나이다. 김사장 부인이 사교모임에서 남편의 외도를 하소연한 것을 계기로, 그 사교모임은 리더인 교수 부인을 앞세워 보영의 아파트로 쳐들어가 살림을 부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교수와 만자의 불륜이 들통 난다. 남편의 외도가 아내의 잘못이라고 큰소리쳤던 교수 부인은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인 교수를 데리고 나가 한강에서 함께 자살하자고 물에 빠뜨리고, 이를 안 자녀들이 따라와 상황을 수습함으로써 가정의 갈등은 해결된다. 아주 잘 짜인 구성에, 심심치 않은 만큼 잘 배치된 코믹한 장면들이 빛나는데, 이는 인물들의 형상화가 아주 선명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맏며느리나 맏딸 분위기를 도맡았던 신필름의 간판 여배우 최은희가, 진한 화장에 입가의 점까지 찍고 야한 속치마 바람으로 드세게 설쳐대는 바걸을 연기했는데, 최은희의 연기력과 더불어 숨겨진 관능성과 매력이 넘쳐흐른다. < 로맨스 빠빠 >에 비해 덜 건전한 것도 이 작품의 특성으로 주목해 봐야할 지점이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을 전후한 시기,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서양적 근대성에 대한 낙관성이, 민주적 근대성을 체화한 한국 중산층 가정의 형상을 통해 나타난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포용력 있고 어머니는 현모양처이며 자녀들은 독립적이며 발랄하니, 늙어가는 아버지에게 닥친 위기쯤이야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를 연 4?19와 5?16의 사회적 충격이 조금 가라앉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까지, 이런 낙관성과 건전함이 늘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딸 같은 여자들을 애첩으로 거느리는 예전 버릇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 것이니, 건전함에 대한 강박이 사라진 후 이를 포착한 현실적 작품이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주목할 만한 것은 아내 인물형의 변화이다. 교수 부인의 설교에서 나타나듯 1960년대는, 한편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들을 가정에 묶어두는 사회적 노력이 경주되었던 시대인 동시에, 이미 1950년대의 ‘미국바람’을 통해 욕망을 확인한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나마 주도권을 차지하고 싶어 하며 ‘엄처’ 노릇을 노골화하는 시대였다. 콧수염 깎는 일까지 엄처의 눈치를 보는 교수, 첩살림을 때려 부수러 몰려다니는 중년 아내들의 사교모임 등은, 1960년대 < 로맨스 빠빠 >의 건전함으로부터 조금씩 일탈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던 이 시대의 흔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