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개
- 감독
- 박종호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정훈희, 신성일, 이낙훈, 김희갑, 황정순, 양훈, 최봉, 지방열, 조석근, 박동룡, 전숙, 김승남, 김경란, 손전, 이영호, 라경남, 박명운, 한명환
[사진]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 현장에서 최은희와 신상옥 속눈썹이 긴 열여덟 살의 가출 최은희는 1926년 11월 20일 1 경기도 광주읍 초월면 묵고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영환은 구한말의 군인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서울로 이사한 후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수줍음을 탄 그녀의 본명은 경순(慶順)이다. 속눈썹이 길고 눈이 큰 편인 그녀는 말이 없는 대신 고집이 세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식의 공부를 위해 도시로 보낼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지가 서울로 바뀌어 수구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다행히 광희공립심상소학교(광희초등학교 전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소학교 때부터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극장 주변을 자주 기웃거렸고 공연 포스터를 보면 친구들에게 장차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녀가 종로 6가에 있던 경성기예고등학교(京城技藝高)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방공 연습을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연극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 월북)의 소개로 마침 <칭기즈칸>을 준비 중인 극단 ‘아랑(阿狼)’(대표 황철)의 의상을 거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승낙 없는 결행이었다. 1943년 열 여덟 살 때였다.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하며 시름을 달래던 그녀에게 기회가 온 것은 대전 공연 때였다. 문정복이 한번 해보라며 무대로 올려 세운 것이다. 비록 하녀라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극의 반전을 돕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날 공연한 작품이 ‘아랑’의 단골 레퍼토리인 신파극 <청춘극장>(임선규 작)이었다. 그 시대에는 연구생으로 들어가면 일단 선배의 화장가방부터 챙기는 일을 해야 했다 (최은희, 『고백』 ‘패기의 수업시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38쪽). [사진] 극단 아랑 시절 최은희 그녀는 지방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문화계가 정비에 들어간 가운데 토월회가 부활하자 그녀는 신극을 표방하는 이 극단에 참여했다. 이때 무성영화 시절의 복혜숙, 서월영과 일제강점기의 김소영, 김일해, 최운봉과 같은 배우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분들을 보자 영화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어릴 때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문예봉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의 몇 장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극은 무대를 떠나는 순간 존재 가치가 없어지지만 스크린은 그 폭과 생명력에 있어 무한하지 않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영화계 진출이 당면 과제로 다가왔다. 이 무렵 토월회 연극에 함께 출연 했던 최운봉이 제 상대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영화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최은희는 이렇게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1947년)와 인연이 닿게 되었다. 험준한 길, 분단의 희생양 그녀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영화배우로 변신한 촬영기사 김학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사귄 지 얼마 안 된 1947년 가을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스물 한 살인 신부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서른세 살로 재혼이었다. 김학성은 무성 영화시대의 여배우 김연실(金蓮實, 납북)의 동생으로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니다가 복싱선수를 거쳐 영화 <성황당>(1939)의 카메라를 잡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6년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전쟁 때문이었다.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 남산동에 살고 있던 이들은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다. 김학성은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었으나 최은희는 북한군에게 끌려가 위문공연을 강요당했다. 죽을 고비를 겪은 끝에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부역’한 일로 국군에게 붙들려 조사받는 곤욕을 치렀다. 그녀는 종군 뉴스영화 촬영 중에 입은 중상으로 병상에 누운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광복동 ‘녹원(綠苑)다방’ 얼굴 마담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신상옥이었다. 그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극단 ‘신협’ 소속인 최은희가 무대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 뛰어들어 병원으로 옮겨 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사건 이후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유부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무명 영화인에게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화답했다. [사진] 1960년 경 최은희와 신상옥 부부 그사이 신상옥은 <악야>(1952)로 데뷔했다. 그리고 16밀리 문화영화 <코리아>(1954)에 그녀를 출연시켰다. 그녀는 주로 신필름의 영화에 무상으로 출연했지만 회사의 운영을 돕기 위해 다른 제작사의 영화에도 나갔다. 그의 출연작 1백 20여 편 가운데 30여 편을 제외하고는 자회사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 세 편이 그녀가 연출한 작품이다. 그러나 1975년 오수미를 주연으로 기용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검열 위반’ 사건으로 신필름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신 감독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사진] <코리아>(1954)에서의 최은희와 김동원 결국 1976년 여름 신상옥과 23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이 부진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던 78년 1월22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고 만다. 이런 사태 아래서 1983년 3월7일 김정일이 초대한 연회장에 갔다가 신상옥과 극적으로 재회, 그동안 소원했던 감정을 풀게 된다. 이후 <탈출기>(1981년), <소금>(1985년> 등 10여 편을 같이 만든 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단행하고 1999년 10년이 넘는 미국 망명생활 끝에 영구 귀국길에 오른다. [사진]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북 기사 [사진] 북한에서 연출한 영화 <소금>의 한 장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녀의 기구한 삶은 자신이 연기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분단 한국의 최대 희생자이자 황금기 한국영화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던 최은희는 아흔 한 살에 이른 2018년 4월 16일 <어머니와 아들>(이유섭, 1976)의 출연을 끝으로 짧지 않은 투병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1. 생년관련, 그동안 그녀의 생년월일에 대해 『한국연극무용영화사전』(예술원, 1985)과 『여성영화인 사전』(소도 발행, 2001)은 1928년 11월 20일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최은희는 자전적 저술인 『고백』(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에서 1930년 생으로 기재,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1913년생인 김학성에 대해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사람” (51쪽)이라고 했으니 1926년이 맞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영화 프로듀서란 무슨 일을 하는가’ 라는 주제의 칼럼을 써주지 않겠느냐는 원고 청탁을 갑작스럽게, 사무실 옆 테라스에서 받았다. 영화 프로듀서의 역할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 많고,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글의 반응이 좋다며 편집자는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역에 있지도 않은 데다 PD로서의 경험이 많지 않아 이런 글을 쓸 깜냥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거절하다 그럼에도 마음을 바꾸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도 영화계 지망생 또는 시네필들에게 많은 문의가 왔었고, 내가 이 글에서 주로 언급하고자 하는 한 편의 영화, < 소셜포비아 >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특이한 시작과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소견이 나를 지배한 이유에서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영화 제작은 사실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①시나리오 ②사람들(감독, 배우, 스태프) ③예산 ④시간 이렇게 네 가지의 희소한 자원만 있으면 영화를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영화를 ‘찍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물론 모든 영화인들은 영화를 ‘영화’처럼 만들려고 하니까 당연히 쉽지 않은 작업이 되는 결과에 봉착한다. 위 네 가지를 숫자 표기까지 하며 언급한 까닭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 제작에서 중요함의 우선순위를 강제로 나열하기 위해서지만, 사실 각각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져 있어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 프로듀서는 업무에 따른 역할과 책임에 따라 세부적으로 나뉜다. 영화의 제작 케이스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그 종류에는 프로듀서, 기획 프로듀서, 라인 프로듀서(Lin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실장이라고도 불린다), 이그지큐티브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 우리나라에선 제작자 또는 대표님이라고 불린다) 등이 일반적이다. 업무가 구분되어 있지만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영화 프로듀서라고 부르는 사람은 제작자(일반적으로 제작사 대표)에게 제작 권한을 위임받은 1인 또는 다수의 프로듀서로서, 영화의 기획 시점부터 개봉까지 영화 제작과정을 총괄한다. 일반적 상업영화 기준으로 제작사와 시나리오, 감독, 배우 정도가 윤곽이 잡히게 되면 투자를 받거나, 거꾸로 투자를 받아 그를 통해 감독, 배우가 정해지는 등 유동적인 시스템 속에서, 투자 이후부터 개봉까지 시나리오 탈고와 캐스팅, 스태핑, 예산, 스케줄, 제작 진행, 후반 작업, 개봉까지 영화 제작 전반의 과정을 진행... ...역시 재미가 없다(사실 나도 잘 모른다). 프로듀서의 역할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 등은 영화 관련 서적과 인터뷰, 인터넷에 정보가 무더기로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대신하여 내가 PD로 참여했던 < 소셜포비아 >의 제작 과정을 제작기 형식으로 전하도록 하겠다. 2013년 여름 어느 날, 이전부터 여러 작업을 함께 해왔던 이성중 촬영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에 선발되어 < 소셜포비아 >라는 장편을 준비 중인데 프로듀서가 필요하단다. 일반적으로는 프로듀서가 촬영감독을 섭외하는데 이 영화는 학교에서 제작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학생인 감독과 촬영감독이 프로듀서를 찾았던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프로듀서를 하기에는 나의 경험이 스스로 염려되었거니와 당시 막 < 타짜-신의 손 >의 제작팀에 들어갔기에 그의 부탁을 고사했다. 그러나 <소셜포비아> 라는 제목이 주는 기묘한 매력 때문인지 시나리오를 읽고 싶은 마음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연속이었다. 결국 시나리오를 받아 단숨에 읽어보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거칠고 어수룩한 초고였지만 영화의 소재와 스타일, 인물들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이 영화 만들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구가 용솟음쳤고 바로 감독과 미팅을 잡았다. 종각역 어느 카페에서 홍석재 감독과 이성중 촬영감독과 나는 70페이지가량 되는 초고를 놓고 둘러앉았다. 홍석재 감독은 당시 단편영화 < 킵 콰이어트Keep Quiet >로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므로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이런 ‘덕력’ 가득한 시나리오를 쓰는 오타쿠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한 마음이 매우 컸다. 기대와는 다르게 꽃사슴같이 예쁜 외모는 나의 편협한 시각을 반성하게 만들었지만 당시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오타쿠 영화감독 꼴이라 나름 안심하기도 했다. 미팅을 주선한 이성중 촬영감독은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로 무척이나 아날로그 한 감성을 소유한 심성 탓인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근래의 디지털 문화와 과도하게 그 문화에 쏠려버린 인물들의 심리 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는데, 때문에서인지 홍석재 감독은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과 문화에 대해 나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첫 만남은 시나리오 얘기보다는 시덥지않은 인터넷, 게임, 만화책 얘기만 실컷 하다가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악수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다. 나에겐 전도유망한 젊은 감독과, 20살 때부터 영화를 시작해 당시 영화 경력이 14년에 이르는 베테랑 촬영감독과, 지금 생각해도 너무 적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일금 육천만 원의 예산과, 다듬어지지 않아 아직 돌덩이 같은 시나리오와, 준비 기간과 촬영 기간을 포함한 5개월의 시간과, 동료 영화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아이폰이 있었다. 예산이 적은 것 빼곤 꽤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주승(왼쪽) 변요한 류준열 감사하게도 꽤 괜찮았던 캐스팅이었다는 평을 들었지만 최종 캐스팅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감독은 주연 중 ‘용민’ 역에 이주승 배우를 콕 집어 캐스팅 의사를 밝혔는데 나를 비롯한 제작진 모두가 동의했다. 가장 중요한 주연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신뢰할 수 있고 반짝이는 배우가 붙어주어 성공적인 시작이었다. 캐스팅이란 배우의 섭외뿐 아니라 제작진 안에서의 합의 과정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상기하자. ‘지웅’역을 위해 꽤 많은 오디션과 배우 미팅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캐스팅 보드 맨 위에 있던 변요한 배우로 최종 낙점됐다. 당시 < 들개 >( 김정훈 , 2014)가 동경영화제에 초청되어 일본에 가 있던 변요한과 전화로 미팅을 잡고, 귀국하자마자 지체 없이 만났다. 주연배우들의 미팅 이후 계약까지, 캐스팅이 수월했던 건(눈물 나는 계약금의 설득은 수월하지 않았다) 시나리오의 공이 컸다. 극 중 처음부터 끝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건을 진행하는 ‘현피 멤버’는 그 수가 무려 일곱이었는데, 배우 한 명을 볼 때 어느 역할 하나를 콕 집어 캐스팅하려고 하기보다는 여러 캐스트 중 어디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유로운 캐스팅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류준열 배우를 ‘BJ양게’ 역으로 만나게 되었다(원래 류준열은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봤었다). 감독과 나는 BJ양게 역의 캐스팅을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는데, 시나리오 수정을 위해 감금시켜놓은 감독 대신(결국 시나리오는 탈고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연출부가 진행한 오디션의 영상을 돌려보던 나는 류준열 배우의 BJ방송 진행 연기 영상을 보고 바로 감독에게 추천했고, 오디션 영상을 본 감독은 박수를 쳤다. 써놓고 보니 너무 순조로운 것 같지만 말 못할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하는 인물들의 영화를 만드느라 촬영 이전부터 노량진에 수십 번을 갔다. 실제 노량진에서 경찰시험을 준비했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컵밥을 먹었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져버린 노량진 육교를 수십 번 건너고, 500명의 학생이 한 강의실에 들어가서 수업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부는 카메라와 함께 담요를 뒤집어쓰고 강의실 구석구석에 숨어 세 시간 동안 경찰학 강의를 들었다. 노량진이라서 좋았던 것은 3천 원으로 뷔페식 식사와 과일에 라면까지 마음대로 끓여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이었는데, 많은 제작진들이 좋아해서 다행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 단가가 나올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세 군데가 넘는 경찰서에 협조를 구해 촬영을 하다 어느 한 곳에서는 쫓겨나기도 했고, 옥탑방에서 자살 신을 찍다가 경찰에 신고가 들어와 영화촬영을 설명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예산이다. 매일 아침은 김밥이고, 현장에 간식은커녕 물 외에 다른 음료도 없었다. 배우, 스태프들 모두와 계약을 하긴 했지만, 계약서상 금액을 보면 허탈한 웃음이 났다. 발전차를 쓰지 못해 그 무거운 발전기를 모든 회차에 들고 다녔고, 가게에서 전기를 빌려다 길바닥에서 분장을 하고, 의상 실장은 배우, 스태프들의 옷을 빌리기 위해 그들의 빈곤한 옷장을 털었다(인물들의 설정이 고시생이어서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지만 손난로를 추가로 살 돈이 없어서 ‘영하 10도 이하인 회차에만 손난로를 준다는 기준을 세워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다 울컥했다. 촬영 중 대기할 공간이 없어 24시간 맥도날드에서 밤을 새우다 쫓겨나고, 깎고 깎아서 세트에 들어갔지만 시간을 초과해 촬영 종료한 척 문을 잠그고 세트장 직원 몰래 조용히 찍다가 쫓겨날 뻔했다. 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 예산이 1억 가까이 늘었다는 말을 듣고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뭔가 억울했다. <소셜포비아> 촬영현장 영화는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한 쇼트의 탑에서 엔드까지, 시각적, 청각적인 표현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다. 각자의 분야에서 논의와 고성이 오가고, 서로 기대고 도와가며 영화를 만든다. 프로듀서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영화의 완성까지 이끌어 가는 스태프인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예산을 이유로 너무나 척박한 환경을 제공해 우리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원형 탈모, 간헐적 혈변이 익숙해지는 때가 되니 영화의 촬영이 끝났다. 몇 번의 추가촬영까지 진행하고 후반 작업이 시작되었다. 서교동 한국영화아카데미 3과 1/2층에 가면 맥(Mac) 몇 대가 놓여있는 매우 좁은 편집실이 있는데, 각자 자리의 구획을 나누기 위한 파티션이 철창으로 되어있어서(거짓말이 아니다.) 몇몇 감독들이 마치 유치장과 같은 곳에서 감금당해 편집하는듯한 기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몇 개월간의 감금(편집)과 후반 작업이 끝나고 영화는 완성되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프리미어 상영을 했다. 모든 상영이 매진됐고, 박수가 나왔다. 두 개의 상을 수상했고 잡지와 매체에 < 소셜포비아 >가 소개되었으며, 우리는 계속 트위터를 새로고침 했다. 홍석재 감독은 단편 영화들을 만들 때부터 영화제에 초청되어 수상하면 상을 꼭 두 개를 탔는데, 이쯤 되면 영화계의 홍진호, 또는 영화계의 용개라고 불려야 할 것 같다. 몇 번의 국내외 영화제를 다녀오고 해가 넘어가서 개봉을 하게 되었다. <소셜포비아>를 만들 당시 나는 우리 배우들에게 “수퍼스타가 될거야” 란 말을 습관적으로 말했는데, 그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다. 배우들이 수퍼스타가 된 덕분에 <소셜포비아>는 독립영화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많은 상영관을 가지고 개봉했다. 저예산 독립영화였고, 배우들은 무명이었고 감독을 포함한 많은 헤드 스태프들이 장편 데뷔하는 작품이었다. 척박하고 궁핍했고 추웠지만 우리는 치열했다. < 소셜포비아 >의 프로듀서로서 부족하고 아쉬운 점은 너무 많았다. 프로듀서로 참여해 큰 즐거움이 한가지 있다면 처음 기대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에 대해 논하고 비평하며 현실 사회를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 감독과 촬영감독과 함께 논했던,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의도했던 대로 말이다. 또 한 가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스타가 되었고, 감독은 계약했고,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조명감독은 또 다른 장편을 만들었다. 막내는 < 옥자 > 제작팀에 들어가서 브래드 피트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담당으로 일하고 있다. 담당자로서 마지막 한 마디. 우리의 영화유산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의 기증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