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정벌레
- 감독
- 김은희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윤미경, 김경익, 이응재, 마정필, 채세라, 이영란, 김정난, 한영식, 손성일, 안철호, 김지현, 권무희, 윤명오, 성희준, 서지현, 심창민, 천동오, 배수경, 안형준, 정응준, 양동탁, 김주영, 송재훈, 유상현, 백현주, 이선정, 김민정, 옥주영, 최유리, 최지은
1. 이 영화는 단 한 명의 인물만 등장하는 영화다.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해역에 위치한 세이블 섬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환경보호 활동가 조이 루커스가 그 주인공이다.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시절 이 작은 모래섬의 흑백 사진을 보고 매료된 루커스는 1974년 세이블 섬의 바다표범을 연구하는 팀에 자원해 현장 보조원 겸 요리사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후 유실되어가는 사구를 복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섬과 육지를 오가다, 1982년부터는 아예 거처를 옮겨 대부분의 시간을 섬에서 보내게 된다. 루커스는 섬의 생활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동료들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혼자 남아 세이블 섬의 거주자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루커스의 일상은 여러가지 반복적인 일들로 채워져 있다. 파도에 쓸려온 해양쓰레기를 수집해 분류하고, 동물의 똥에 든 이물질의 성분을 분석하고, 죽은 말의 발굽이나 곤충의 표본을 채집해 박물관에 보내기도 한다. 섬에는 500여 마리의 야생마가 서식하고 있는데, 루커스는 야생마들을 구분하려고 공책에다 말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 그려 넣고 보니 얼굴이 모두 달랐다. 이름 없는 야생마들이지만, 이들은 루커스의 공책 속에서 하나하나 고유한 개체로 호명된다. 공들여 관찰하고 기록한 덕분에, 섬의 말이 없어지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가 있다. 어느 구역으로 이동했는지, 왜 이동했는지도. 성큼성큼 거닐며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는 루커스의 행동은 마치 손바닥 속을 헤아리듯 섬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이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연, 무모한 도전들로 이루어진 낮, 낮이 물러간 뒤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외로운 밤, 고립을 자처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을 삶의 또 다른 부분들. 그러나 영화는 그 모든 과정에 대한 회고 또한 생략한다. 조이 루커스는 그저 과거의 어느 날 섬에 당도했고, 섬에 적응하며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내가 첫 문단에 쓴 내용들도 대부분 나중에 구글링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다. 사실 카메라가 호기심을 가지고 비추는 것은 인물의 생애나 환경보전의 당위적 서사보다는 섬의 현재를 이루고 있는 순간들, 루커스의 손이 빚어내는 일상의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햇살 좋은 날 창문에 걸어 놓은, 쓰레기 조각들로 만든 예쁜 모빌 같은 것. 2.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쓰레기에 관한 영화다. 세이블 섬의 해안으로는 매일 수많은 쓰레기가 파도에 실려온다. 루커스는 해변에 나가 수거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려 종류별, 소재별, 브랜드별, 색깔별로 분류한다. 루커스가 수행하는 연구는 북대서양에 떠 있는 이 외딴 섬의 느리고 미세한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해안가로 밀려오는 자본주의적 삶의 파편들을 관찰하고 집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무풍선에 인쇄된 이름과 문구, 깡통과 플라스틱 뚜껑 따위에 달린 라벨, 각종 파티 및 행사의 흔적과 평범한 가정의 소비 품목들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색깔과 소재가 유행하고 있고, 어떤 단어가 지갑을 열게 만들며, 무엇이 사람들을 즐겁게 또는 슬프게 만드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해줄 것이다. 얼마 전 나는 김지혜 환경과학연구자의 논문 「해양쓰레기와 함께 세계 짓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 고독의 지리학 >이 내게 남긴 파문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최근의 해양쓰레기 연구는 해양쓰레기에 대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없애야 할 문제적 사물 혹은 단순한 골칫거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삶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인류세 이후의 이 ‘얽혀 있는 삶’ 속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들과 작든 크든 혼종의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에 해양쓰레기가 특정 지역의 문제일 수 없듯이, 세이블이라는 작은 영토 위에서도 생명체들은 잎맥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식물 모두가 플라스틱 쓰레기, 유출된 석유, 침식작용과 같은 지형의 변화와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이 루커스도 이제 그 일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섬에 흘러 들어왔다가 섬과 함께 나이가 들어 어느새 할머니가 된 그의 머리칼은 바람에 나부끼는 섬의 억새와 똑같은 은빛이다. 어떤 장면들은 아무 대사도 없이 그저 이 은빛의 일렁임과 반짝임만을 담고 있다. 바람과 태양은 섬 안의 모든 것에 공평한 손길을 준다. 화면이 한 컷 한 컷 넘어갈 때마다 섬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태계라는 사실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죽은 말의 몸 위로 바람이 분다. 루커스가 그 사체를 해변에 묻어준다. 그러면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그 풀을 또 다른 말이 뜯어먹는다. 영화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드러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을 들리게 하는 데에 공을 들인다. 딱정벌레가 걸어가는 소리.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 평소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지만 사실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던 그 소리들이 ‘영화음악’의 지위를 부여받고 무대에 오른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소리를 작곡한 것은 달팽이라는, 그 귀엽고도 엄연한 사실. 카메라는 섬 위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소중하게 담는다. 그러니 이 영화에 한 사람만 등장한다는 말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 해초, 달팽이, 회색 바다표범, 수달, 박쥐, 야생마, 야생마의 똥, 잔디, 언덕, 해안의 모래알, 어둠이 내리면 검은 모래 장판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들, 그리고 삶과 죽음, 모든 것의 순환을 품고 있는, 언젠가는 그 자신도 흔적으로 돌아갈 모래섬. 이들 모두가 이 섬의 주인이고, 따라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 인류학자 메리 더글라스는 오물을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라 불렀다고 한다. 쓰레기란 그 형태와 성질이 그대로이더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함께여야 할 존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순간부터 쓰레기로 규정되는, 이질적인 상태의 사물인 것이다. 그런데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조이 루커스 역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한 존재다. 멀쩡한 대학 시간 강사 일까지 그만두고 혈혈단신 섬으로 들어가 평생을 모래 위의 동식물들과 함께 보낸다는 게 평범한 삶의 경로는 아닐 테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지난해 본 영화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에 관한 영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던 것 같다. 사로잡힌 사람. 무언가에 천착하다 못해 그 대상에 자신의 삶이 거의 겹쳐지다시피 한 사람. 이를테면 얼어붙은 설산으로 돌진하다 실종된 사람(알피니스트: 마크-앙드레 르클렉), 또는 폭발하는 용암을 쫓아다니다 화산재에 뒤덮여 죽은 사람(불 속의 연인: 카티아와 모리스 크래프트를 위한 진혼곡). 빙벽, 설산, 파도, 용암, 번개에 대한 제어할 수 없는 매혹은 사실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나 대단히 위용 넘치는 경관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세이블 섬에서도 나는 비슷한 종류의 이끌림을 느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죽음이라고 하는, 언어로 내뱉고 나면 너무나 간단해지고 마는, 우리 삶에 내재한 비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침식작용 같은 것을, 짐작건대 루커스는 섬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홀리듯이, 혹은 저항하듯이, 그 세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을 것이다. 영화에서 두 개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비 또한 인상적이다. 해안 가까이에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 순환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나타나는 인공물질과 분해 불가능한 플라스틱들이 있다면, 섬 안쪽에는 시간의 비질을 고스란히 받으며 천천히 소멸해가는 사물이 있다. 루커스가 정착 초기에 나무를 잘라 짓고 그 안에서 살았던 옛집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낡고 거의 무너져내려 지금은 뼈대만 남은 쇠락한 풍경이 되었다. 폐허를 훑는 카메라의 시선에 몇 줄기의 바람이 걸린다. 텅 빈 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은 말없는 증언자, ‘문명’이라는 세계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이따금 상기시켜주는 존재 같다. 세이블 섬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영화란 그런 것 아닐까? 언젠가는 소멸할 무언가를 붙잡아 기록하겠다는 환상. 그 진심. 4. 그래서 다시 쓰자면, 이 영화는 시선에 관한 영화다. <고독의 지리학>을 한평생 환경 보존에 헌신한 여성의 이야기로 읽으면 영화는 아주 건전한 두 시간짜리 자연(혹은 인물) 다큐멘터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매혹당한 두 인간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편이 더 좋다. 그러면 이 고요한 산책과도 같은 시간 속에 소리없이 들끓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또한 보인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는 루커스의 앞모습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최대한 조용히 뒤를 따를 뿐 앞지르거나 섣불리 말을 걸어 돌려세우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정면으로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순간이 있다. 루커스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누군가의 캠코더로 촬영된 과거의 한 순간이다. 모래가 유실되어가는 섬을 지켜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발언을 하던 젊은 루커스는 인터뷰어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잠시 카메라를 응시하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이 섬을 사랑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장면이 있다. <고독의 지리학>이 전주영화제에서 국내 첫 상영되었을 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젊은 여성의 얼굴이 스크린에 떴다. 재클린 밀스 감독이 보내온 인사 영상이었다. 감독은 말했다. “이 영화는 정말 애정으로 만든 작업입니다.” 두 개의 하릴없는 고백을 지구 반대편에서 수십 명이 컴컴한 동굴에 모여 앉아 지켜보고 있는 광경. 그건 확실히 조금 이상한 감동이었다. 재클린 밀스 감독은 네 살 때 뉴스를 보고 루커스와 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들을 담은 영화를 일평생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볼 때마다 매혹 그 자체만이 아니라, 매혹당한 사람에게 매혹당한, 기록자의 생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부지런히 쫓고 수집하고 잘라서 정성스레 이어붙이는 작업에 대해서. 직접 돌진하는 대신에, 몇 겹의 렌즈와 필터와 녹음기를 경유해 이 불가해한 세상을 대면하고 이해하려 하는 삶의 한 방식과 태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앞에 선 한 무리의 ‘우리’에 대해서. 여기에 이르면 <고독의 지리학>이라는 난해한 제목도 모종의 설득력을 얻는다. 고독은 외따로 떨어진 홀로의 감각이고 전혀 지리적인 것이 아니지만, 그 감각과 조우한 영화는 필연적으로 어딘가로 향한다. 섬을 구석구석 훑고, 섬을 한 바퀴 돌고, 이윽고 섬을 떠나, 스크린의 표면을 뚫고, 영화의 바깥으로 기나긴 별자리를 만든다. 그 허구의 지표 위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은 별자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점들은 이상하게도 전혀 고독하지가 않은 것이다.
1. 카프카의 「변신」은 시각 예술로 변환하기가 다소 까다로운 작품이다. 벌레라는 존재의 구체성이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순간 서사는 평면적이고 납작해지기 때문이다. 다양한 층위를 함의하는 대신 그저 ‘어느 날, 한 불우한 남자가 벌레로 변신해버렸다’는 식의 기이한 이야깃거리에 그치게 된다. 1977년 작 <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The Metamorphosis of Mr Samsa >에서 캐롤라인 리프는 그 난점을 비껴간다. 「변신」의 특정 국면을 소실점 삼아 원작의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재배열했고 그로 인해 사실상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어버렸다. 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정제해 「변신」을 감정적인 상황 부조리극으로 변주한다. 주어진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고, 그 이후의 여백에 캐롤라인 리프가 채우는 것들이 더 중요해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작품은 카프카 적이다. 흑백의 절제된 화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 형태감, 바람 한 번 불면 흩날려 사라질 모래라는 재료의 물성은 원작 「변신」의 근간 정서를 자극한다. 눈앞의 현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말이다. 샌드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은 카프카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와 일말의 유머를 살려낼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빠른 화면 전환을 용이하게 구사하도록 만들어준다. 도입부에서 그레고르가 침대에서 뒤뚱거리다가 떨어지자 시점샷이 되었다가 어느새 다시 그레고르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이동한 장면을 예시로 들 수 있겠다. 계속해서 나오는 이런 장면들은 시점과 소실점이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이탈하거나 부유해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2. 인간을 벌레로 비하하는 멸칭은 인류가 벌레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 순간 이래로 계속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래도 2010년대 중반의 한국만큼 유달리 벌레의 비유가 일상화된 현상은 전례가 없는 듯하다. 국내 각계각층에 달라붙은 ‘○○충’이란 단어가 어찌나 자주 쓰이는지 이제는 ‘~충’ 접미사가 낯설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서로가 서로를 벌레로 보는 사회라면 어떤 사회여야 할까. 새삼 벌레에 대해 생각해본다. 벌레는 주어진 자극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며 생존 본능에만 충실한 생물이다. 자극과 신경 반사만으로 구성된 삶이다. 그것은 앞날을 예측하고 과거를 반성해 현재를 조정하는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인간으로 치자면, 고도의 추상적 사고는 고사하고 주어지는 현재만으로도 팍팍한 삶이다. 인간이 의식주를 확보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성 유지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크게 유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현재 한국에서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건을 얻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헬조선’과 ''○○충''이 비슷한 시기 유행한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두 단어를 통해 어떤 희미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악조건 속에서 아등바등하며 고통받는 벌레 같은 삶들의 지옥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하는 미덕은 복합적인 인간성보다는 대체 가능한 단순 기능성이다. 원작 소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바로 그 요구에 적응하는 충실한 일꾼이다. 그의 직업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외판원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대규모로 탄생할 수 있는 직업이다. 무엇보다 그 일은 그레고르 잠자라는 개인의 인간성과 무관하다. 「변신」은 스스로 소모품이 된 일개미 같은 인간들이 실제 벌레와 다를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지금 여기의 우리’ 쪽으로 약간 바꿔보면 어떨까. ‘헬조선’에 사는 우리가 벌레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3. 다시 캐롤라인 리프의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 속 그레고르는 기본적으로 딱정벌레의 모습이지만, 관객 입장에서 동그란 눈과 부들거리는 다리로 기호화된다. 상대적으로 귀여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외양이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그레고르는 실제 벌레의 모습에 가깝게 묘사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완전히 벌레가 되었음을 깨달은 그는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고르의 얼굴은 소름 끼치도록 이입할 수 없는 벌레의 그것이다. 그때 한순간이지만 그레고르의 귀가 보인다. 인간의 귀다. 상대적으로 단단한 물성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귀만 유독 유동적인 형태 변화를 보이며 화면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혹을 준다. 그레고르는 미동도 없이 음악에 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간적 신체 기관이 퇴화하고 음악 역시 소음에 불과해진 걸까. 샌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유동성은 모든 장면을 확정되지 않는 판단 유보적 상태로 머무르게 한다. 관객은 확신할 수 없다. 더욱이 원작의 비참한 결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원작에서 그레고르는 동생의 연주를 열렬히 감상하며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인간성을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일벌레였던 그레고르가 진짜 벌레가 되자 오히려 이전에 딱히 챙겨 듣지도 않았을 연주를 갈구하는 역전이다. 예술의 향유를 인간성의 상징으로 그려내는 이 대목에서 감독이 작품에 대한 실마리를 얻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캐롤라인 리프는 인간성에 대한 원작의 고찰을 약간 비틀어서 질문한다. 벌레가 되어도, 혹은 벌레가 된 지금, 연주를 들을 만한 감각 기관이 남아 있을까? 추상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그게 뭐든 간에 어떤 예술을 향유할 여력이 있는가?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성일 수도 있다.
장건재 감독의 < 잠 못 드는 밤 >은 결혼 2년 차 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멸치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과 요가 강사를 하는 아내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됐는지 설명해주지 않지만, 두 사람의 연애와 결혼이 ‘우리 주변의 그 누구’ 혹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당히 선량하고, 상식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며, 어딘가 여려 보이는 두 사람은 말 그대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젊은 부부이다. 영화는 그 두 남녀가 자그마한 집에서 함께 먹고, 씻고, 자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본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간다. 풀벌레 소리, 비빔국수, 맥주, 적당히 나온 남자의 배, 조용하고 평안한 섹스, 잃어버린 자전거, 별똥별. 더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여름밤에 두 남녀는 자신들의 삶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 응시는, 표면적으론 일상에서의 현실적인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출산과 육아에 대한 갈등, 부모님께 더 잘해야 한다는 근심 어린 다짐, 미래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 그러나 그 대화 사이의 짧은 침묵, 순간의 시선, 둘 사이를 흐르는 공기, 그리고 그들이 꾸는 꿈속에서, 안온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왠지 모를 불안이 함께 느껴진다. 그들은 일상의 평안과 가늠할 수 없는 불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남녀가 만나 함께 살고, 아이를 낳고, 여생을 함께하는 것에 잠재해 있는 어떤 불안의 요소들. 영화를 보며 그 불안의 요소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단순히 출산과 육아에 따라오는 현실적인 문제와 두 사람 사이의 관계 변화가 그 불안 요소의 전부일까. 영화는 그 현실적 문제에 대한 끈을 놓고 있진 않지만, 그게 전부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영화를 본 후, 조금은 개인적이고 엉뚱한 연상들이 떠올랐다. 이십 대 초반의 시절, 꽃이 피고 잎사귀가 열리는 화창한 봄날에 느꼈던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들. 논리적인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더 이상 바랄 것 없던 젊음과 무미한 일상의 공간에서 느껴지던 은근한 불안감이 그 시절을 지배했던 것 같다. 인생의 정점이라는 건, 떨어질 일만 남은 추락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가장 자주 듣던 노래 중의 하나가 산울림의 ‘비닐 장판의 딱정벌레’였다. 화창한 봄날,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김창완의 무미건조한 읊조림을 듣곤 했다. ‘비닐 장판의 딱정벌레, 어디로 가는지 알까 아마 모를 거야. 먹이 찾아 제 짝 찾아 제 발걸음도 잊은 채 평생 헤맬 거야. 그리곤 죽어 흔적도 없이 슬퍼하지 않으면서... 아, 딱정벌레 한 마리 기어가네.’ 노래 속에 나오는 딱정벌레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한없이 우울해졌다가, 그 체념이 주는 행복감에 허탈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왜 봄날의 불안과 이 노래가 떠올랐는진 모르겠다. 영화 속 아내가 나쁜 꿈을 꾸며 흘렸던 눈물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일까. 어쨌건 이 모든 건, < 잠 못 드는 밤 >을 보며 자연스레 배어 나온 개인적인 마음의 잔상들이다. < 잠 못 드는 밤 >은 여백이 많은 영화다. 그만큼 여러 층위로 읽혀질 풍부한 요소들이 많다. 누군가에겐 젊은 부부의 현실적 고민이 담긴 이야기로, 누군가에겐 두 남녀의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누군가에겐 삶을 흔드는 정체 모를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로 느껴질 것이다. 그 무엇을 느끼든, 영화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을 맡긴 채 두 남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차곡히 쌓일 것이다. 그 덩어리들을 숨죽여 응시한다면, 삶에 관한 비밀의 한 조각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