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백주년 다큐멘터리 - 러시아
- 감독
- 세르게이 세리아노브
- 제작년도
- 1995
올해 초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의 ‘외국어 영화상’ 부문은 3파전이었다. 먼저 웃은 영화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가져간 러시아 영화 < 리바이어던 >이었다. 그리고 오스카의 승자는 폴란드에서 온 < 이다 >였다. 그렇다면 두 영화와 경합을 벌였지만 ‘강력한 후보’로 만족해야 했던 나머지 한 편은 어떤 영화였을까? 바로 < 텐저린즈: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이하 <텐저린즈>)다. 에스토니아의 자쟈 우루샤제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1992년 조지아(그루지야) 지역의 내전을 배경으로, 전쟁의 본질을 묻는다. 그렇다고 철학적이거나 심각한 질문은 아니다. <텐저린즈>는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에피소드에 가까울 만큼 간단한 구조다. 여기서 감독은 그 단순성 속에, 마치 실화 같은 사실성을 부여한다. 전쟁 초기의 분쟁 지역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바로 <텐저린즈>다. 먼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몇 가지 역사적 사실과 지리학적 상식들. 이 영화는 1992년에 조지아에서 발생한 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할 즈음, 수많은 민족 국가들이 생겨났다. 흑해 연안의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위치한 조지아도 그러한 나라들 중 하나다. 하지만 조지아 내부에도 민족 문제가 있었으니, 지도에 녹색으로 표기된 압하스, 보라색의 남오세티야, 그리고 왼쪽 구석의 아자리아가 조지아로부터 분리되길 원했던 것(이 지역들은 현재 사실상의 독립 국가인 자치 공화국인 상황이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압하스 전쟁(1992~93)이며, 이때 러시아는 압하스와 연합하여 조지아와 대결했다. 조지아 지역 지도.(출처: 위키피디아) 한편 압하스 지역엔 에스토니아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다. 에스토니아는 러시아와 핀란드 사이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작은 국가. 20세기 들어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에 드디어 독립한 국가다. 19세기에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에스토니아 사람들 중 일부가 코카서스 산맥 근처로 이주한 적이 있었는데(2,500킬로미터 이상 가야 하는 먼 길이다), 조지아의 압하스 지역도 그런 지역 중 하나. < 텐저린즈 >의 주인공 이보(렘비트 울프삭)도 에스토니아계로, 압하스에서 목수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때 조지아 정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전쟁이 일어나니,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 마을은 순식간에 텅 비고, 이보와 마르구스(엘모 뉘가넨)만 남는다. 마르구스는 텐저린(‘작은 오렌지’인데 ‘귤’로 이해하면 될 듯. 영화에선 ‘만다린’이라고 부른다) 농장 주인. 수확을 앞둔 농장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고, 목수인 이보는 탠저린을 담을 나무 상자를 만든다. 영화는 두 명의 군인이 이보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아메드(조르지 나카시제)와 이브라힘(카카 아레바제). 다소 무례한 그들은, 이보가 건네는 빵을 들고 사라진다. 잠시 후, 마르구스의 농장 근처에서 총격전이 일어난다. 압하스 군과 조지아 군의 충돌이 있었던 것. 이보는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군인들 중에서, 방금 자신에게서 빵을 얻어 갔던 아메드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준다. 그리고 죽은 병사들을 매장하려던 중, 한 사람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니코(미샤 메스키)라는 군인이었고, 머리에 파편이 박히긴 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이보는 니코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이때부터 < 텐저린즈 >는 < 웰컴 투 동막골 >( 박광현 , 2005)을 연상시킨다. 아메드는 압하스 군, 니코는 조지아 군이었던 것. 큰 덩치만큼이나 거친 아메드는 상처가 아물어 거동할 수 있으면 니코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소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니코도 만만치 않게 맞받아친다. 식탁을 가운데 놓고 유치한 설전을 벌이는 두 명의 환자 혹은 군인. 이보는 그들의 적개심을 경계하며, “내 집에선 아무도 죽일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터를 배경으로, 적과 아군을 넘어 다 같은 ‘인간’이며 생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걸 역설하는, 휴머니즘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의 사연을 듣다 보면 전쟁이라는 거대한 부조리극이 다가온다. 압하스 군에 속해 있긴 하지만, 아메드는 체첸 출신의 용병이다. 그는 단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고, 조지아 사람들과는 그 어떤 원한이나 관계도 없다. 니코는 연극배우였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군인이 된 사람이다. 게다가 그들을 거둬들이는 이보는 압하스도, 조지아도 아닌 에스토니아 사람이다. 그의 이웃인 마르구스는 전쟁과 상관없이 “저 아름다운 탠저린들”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까워서 에스토니아로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이다. 사실 그들은 모두 그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서로 죽이려 하고, 이보와 마르구스는 그들을 살리려 한다. 만약 여기서 멈추었다면 < 텐저린즈 >는 전쟁의 허망함 혹은 부질없음 정도를 설파하는 반전 영화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자쟈 우루샤제 감독은 전쟁이 비극이면서 동시에 ‘관계’라고 생각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적’이라는 악연을 맺게 되지만, 그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만나면서, 놀랍게도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보의 집에 들이닥친 압하스 군은 아메드를 조지아 군으로 오해한다. 아메드는 자신이 체첸 출신의 용병임을 증명하려 하지만, 압하스 군 장교는 아메드를 죽이려 한다. 이때 침대 밑의 총을 꺼내 든 니코는 아메드를 살리기 위해 압하스 군을 공격하고, 아메드도 니코의 엄호 아래 (자신의 아군인!) 압하스 군을 공격한다. 오로지 ‘적과 아군’으로 나뉘는 전쟁터의 이분법적 논리가 무너지는 이 장면은, <텐저린즈>가 도달하려 했던 순간이다. 영화는 비극이다. 전쟁 통에 팔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텐저린을 모두 수확하고 싶어했던 농부 마르구스는 압하스 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니코도 총격전 중에 목숨을 잃는다. 살아남은 이보와 아메드. 이보는 나무 상자를 만들던 일터에서 두 사람의 관을 만들고, 아메드와 함께 땅에 묻는다. 니코를 묻는 곳은 이보의 아들이 묻힌 무덤 곁. 그의 아들은 자신들의 땅을 지키겠다고 압하스 군에 자원 입대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전쟁도 아니”라는 이보의 만류도 소용 없었던 것. 그는 헛된 죽음을 한 아들 곁에, 역시 헛된 죽음을 한 조지아 군의 병사 니코를 묻는다. < 텐저린즈 >가 특히 울림을 주는 건, 한국 (IPTV) 개봉시 부제였던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에 요약되듯, 전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 때문이다. 특히 분단 체제를 사는 우리에게, 이 영화는 교훈을 준다. 남과 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늘어가는 전쟁의 소문 속에서 공포를 느껴야 하는 우리들. 하지만 그 전쟁은,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의 것도 아니며 그들이 일으킨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린 서로를 미워해야 하고, 잘 알지 못하는 그들을 비난해야 한다. 전쟁보다 더 두려운 건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맹목적인 증오이며, <텐저린즈>는 전쟁이라는 적대 관계에 의해 유린되는 인간 관계와 무의미하게 파괴되는 생명을 보여준다.
혹시 ‘푸시 라이엇 Pussy Riot’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2012년 2월 21일, 모스크바 구세주 대성당 제단에서는 컬러풀한 스키마스크를 뒤집어쓴 여성들의 느닷없는 공연이 시작된다. 이들은 공연 시작 30초 만에 체포되고 급기야 ‘종교적 증오심에 사로잡혀 성스러운 성당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죄명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 상상을 초월한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러시아 여성 펑크록밴드 ‘푸시 라이엇’이다. 이들의 공연은 30초 만에 중단되었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퍼져 나갔고 급기야 이 사건은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 되었다. 성당의 제단에서 그녀들은 무엇을 노래하고자 했을까? 그녀들이 부른 짧은 노래의 가사는 “성모 마리아님, 페미니스트가 되어주시고 푸틴을 거둬주소서.”였다. 나날이 공고화되는 푸틴 독재체제는 2011년 선거에서 집권당인 통합러시아당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러시아 시민들의 대대적인 정치 민주화 시위를 불러왔다. 별다른 공통점 없어 보이는 여성들로 결성된 게릴라 밴드 ‘푸시 라이엇’의 노래 역시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정치적으로는 퇴행상태에 놓인 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요구가 분출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녀들이 항변하듯이 그녀들은 절대 신성모독을 의도하지 않았다. 다른 많은 러시아 시민들처럼 그녀들이 원한 것은 오직 자유였다. 정치적 자유. 예술의 자유. 성의 자유. 나날이 축소되어 가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간에 대해 펑크록이라는 아나키적 음악을 통해 푸틴 체제에 저항하고 민주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출한 것이 그녀들이 취한 행동의 전부다. 그러나 이곳은 러시아다. 그것도 권위주의 독재정권과 보수적인 러시아 정교회가 결탁한 러시아이다. 그녀들의 행위는 여성이 제단에 올라가는 것을 절대 금지하는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법에 대한 도전이었고 이는 정치와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러시아에서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올해 초, 그녀들의 음악을 통한 싸움과 재판투쟁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선댄스영화제에 초청되어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마이크 러너, 막심 포즈도롭킨 감독의 < 푸시 라이엇 : 펑크프레이어 >이었다. 그리고 한 해가 가기 전에 그녀들을 다룬 또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다. 그게 바로 오늘 소개할 영화, 러시아 영화집단 ‘Gogol`s Wives Production’이 제작한 < 푸시 대 푸틴 Pussy Versus Putin >이다. 동일한 소재의 영화가 한 해에 두 편이나 나왔다는 것은 이 사건이 그만큼 러시아 사회를 격렬하게 뒤흔들어 놓은 엄청난 스캔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푸시 대 푸틴>에서는 <푸시 라이엇 : 펑크프레이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그녀들의 게릴라 공연 모습을 다채롭게 볼 수 있다. 공연을 시작하면 이내 경찰이 다가와 제지하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영화의 초반, 그녀들이 버스 지붕에 올라가 공연을 하다가 경찰에 끌려가는 장면에서 깃털 자루가 터져 사방에 깃털이 흩날리는 장면은 가히 장 비고의 < 품행제로 >의 환상적인 베개 싸움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스크린 전체를 뒤덮은 깃털은 현재의 생생한 기록인 다큐멘터리 장르에 더없이 환상적이면서도 시적인 특질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이 여성들이 펑크록이라는 음악 장르를 통해 호소하려는 자유를 향한 아나키적 욕망의 정서를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푸시 라이엇 사건을 계기로 정치와 종교 양쪽으로 갈라져 격렬하게 대립하는 러시아 사회의 현재와 그 속에서 계속해서 제2, 제3의 푸시 라이엇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판결을 받고 호송버스를 타고 가는 그녀들을 향한 시민들의 박수는 자유에 대한 러시아 시민들의 의지 표명이며 푸시 라이엇의 용기있는 행동을 지지하는 카메라의 태도를 반영한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도 불사하며 저항하는 그녀들을 위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중에는 자신의 노래와 퍼포먼스로 신성 모독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마돈나도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콘서트에서 푸시 라이엇 의상을 입고 ‘라이크 어 버진’을 부르면서 그녀들을 응원하는 마돈나의 모습은 영화가 선사하는 또 다른 재미이다.
나는 항상 애니메이션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예술가가 될 거야’ 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물론 아직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해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니메이션 작업이 예술 작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틀림없다고 알려주는 작품들이 있는데 그중에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유리 노르슈테인의 < 안갯속의 고슴도치 >이다.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대학 3학년 때, 애니메이션을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나서였다. 그동안은 일본과 미국 애니메이션만 봐 왔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형식의 이 작품을 보고는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이건 마치 <밤비>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섞어 놓은 것 같은 놀라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어느 작품이나 훌륭하지만 나는 안갯속의 고슴도치 >를 특히 좋아한다. 주인공 고슴도치는 내가 본 디즈니나 픽사의 어떤 주인공보다도 귀엽다. 게다가 동화를 설명해 주는 러시아 아저씨의 목소리는 나를 북유럽 환타지의 세계로 인도해 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종이를 오려서 만드는 ‘컷 아웃 애니메이션’으로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이 작품은 지금과 같은 디지털 방식이 아닌 필름 카메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암실에서 한 프레임씩 조명과 사투를 벌이며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마 유리 노르슈테인과 조수이기도 한 그의 부인이 캄캄한 촬영실에서 작은 20~30개의 팔다리를 바꿔 붙이며 몇 달을 촬영하고 다시 촬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입체감과 안개, 조명, 그리고 아련한 느낌들이란. 종이로 만들어진 귀여운 고슴도치가 진짜 물로 된 것 같은 강을 건너며, 어떻게 만들어냈는지 모르겠는 안갯속의 숲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작품은 모든 장면이 너무나도 아름답다. 숲과 안개와 빛들. 러시아 영화의 위대한 장점들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귀엽기까지 한 마술 같은 작품. 아! 이것이 진정 예술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1979년 < 이야기 속의 이야기 >를 끝으로 본격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고 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국영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소유즈 멀티 필름’이 문을 닫으면서 작품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 차기작인 고골리의 소설이 원작인 <외투>는 십 몇 년 넘게 제작비 부족과 여러 가지 문제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외투>가 진정 만들어지기를 고대한다. 만약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이 예술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작품이 하나 추가 될 것이 분명하다. 못 보신 분들은 꼭 보기 바란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집은 국내에 나와 있는데다 너무나 싸게 구매할 수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 < 케르제네츠 전투 >와 < 이야기 속의 이야기 >도 훌륭한 작품이다. 유리 노르슈테인의 작품은 버릴 작품이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