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1950: 마을로 간 전쟁
- 감독
- 구자환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조계룡, 위복환
< 액트 오브 킬링 >은 20세기 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정권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1965년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베르너 헤어조그와 에롤 모리스가 executive producer를 맡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2013년 한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다큐멘터리였다.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대개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인터뷰와 기록화면을 교차시켜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학살자들이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증언하고 나아가 아예 학살을 천연덕스럽게 영화로 ‘재연 re-enact’한 경악스러운 영화다. 학살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무용담 이야기하듯이 자신들의 행위를 떠드는 것도 놀랍지만 증언에 그치지 않고 아예 환상적인 뮤지컬 영화로 학살을 재연하는 것을 보면 충격을 넘어 거의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대중의 보편적인 역사인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들의 의식과 행동은 역사와 책임, 실재와 허구, 현실과 상상 혹은 초현실의 경계에 관한 우리들의 인식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면서 현실 감각을 무너트리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한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 위기 속에서 수하르토는 권력을 잃었지만 그가 실권한 지 20년이 가까워지도록 아직까지 백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은 나라가 인도네시아이다. 이런 나라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영화는 1965년 학살 생존자들의 거주 지역인 메단 지역 외곽에서 감독이 플랜테이션 노조를 건립하려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메단 지역은 < 액트 오브 킬링 >의 주인공인 학살자 안와르 콩고가 과거에 극장을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노조 건립을 위해 열성적인 노동자들이 정작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과거 학살의 공포스런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던 트라우마 적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말도 발설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만들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해자들이 증언을 꺼리는 상황에서 영화의 물꼬를 튼 것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에게 그 사건에 대해 묻는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들이 바로 학살의 피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학살에 대해 묻고 그것을 영화화하라. 놀랍게도 학살자들은 마을 생활을 촬영하고 싶다는 감독의 말을 순진하게 믿었고 영화 작업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웃지 못할 것은 그들이 감독을 믿은 이유가 감독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영화 속 한 인물이 말하듯이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이라는 원죄를 통해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근래에는 동티모르에서 독재자를 지원한 미국 국적의 감독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편일 것이라는 ‘우직한(?)’ 믿음이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참으로 난감한 신뢰 관계를 형성시킨 것이다. 감독에 의하면 학살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드러내놓고 판단하지 않는 한, 그는 학살자들의 내면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그 자신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를 지닌 유태계 출신의 감독으로서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유대인 대학살에 책임 있는 나치 장교들이 승리자의 관점에서 홀로코스트를 판타스틱하게 자랑하는 것을 영화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독에게 얼마나 고통스런 체험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안와르 콩고’는 카메라의 주요한 관찰 대상이자 감독과 매우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대상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선 피사체이자 감독의 창조적인 조력자이다. 살인 갱단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 나라에서 그는 과거 자신이 탐닉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살해 방법을 고안했다고 증언하고 다양한 할리우드 장르 스타일을 인용해 ‘학살 뮤지컬’을 연출한다. 이 영화는 매우 잔혹하면서 동시에 판타스틱하다. 영화의 이러한 충돌하는 정서와 이질적인 감각은 당연히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안와르 콩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다수가 참여한 이 영화에서, 현실에서 가해자였던 이들이 피해자 역할에 몰입되어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가해자들은 상황극을 수행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에 전이된 것인가? 안와르 콩고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하면서 구토하는 엔딩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와 폭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진심으로 난감해진다. 이 영화는 무엇을 질문하는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방 폭력을 낳기도 하고 반대로 폭력을 성찰하게도 하는 영화의 힘에 대해 말해야 할까? 현실과 영화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학살자들이 만든 ‘영화 속 영화’와 그것을 기록하는 감독이 만든 영화의 관계는? 학살, 혹은 집단적 폭력에 대해 두 개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 서로를 비추는가? 그러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이 강화되는 순간이 있다. 과거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을 재연하던 안와르 콩고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끝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바로 뒤에 우리는 집에 돌아와 어린 조카를 불러 자신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TV로 함께 시청하는 안와르 콩고를 보게 된다. 마치 한편의 명화를 감상하듯이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손자와 함께 시청하는 안와르 콩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눈물이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반응인지, 극에 몰입된 메소드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불과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집단적 폭력과 광기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한 사회가 생산한 정치적 광기와 폭력의 편재성. 극악한 참극을 겪고도 어느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상황의 난감함. 죄의식이라는 감정이 집단적으로 괄호 쳐진 상황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모호함이 우리를 불편하다 못해 불쾌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가 진정으로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것 즉 그들이 우리와 다른 차원의 괴물이나 사이코패스, 미개한 부류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을 괴물이나 사이코패스 취급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 우리의 야만성과 광기, 폭력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기 기만적 의지에 불과하다. < 액트 오브 킬링 >의 피해자들이 과거에 대해 발설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우리는 근래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똑같이 목격한다. 구자환 감독의 < 레드 툼 >에서 국민보도연맹 학살의 희생자들은 왜 아직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우리 사회가 과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초현실적이고 괴물스럽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불현듯 든 의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초반. 이승만 정권은 (비공식적으로) 대략 30-45만 명으로 추정되는 남한 사회의 양민들을 무차별적이고 불법적으로 ‘학살’했다. 정부와 경찰에 의해 자행된 이 학살극은 이른바 ‘보도연맹 사건’으로 불리고 있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한 진상규명이나 그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조차 행해지지 않고 있다. 학살의 시발점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의 주도로 만들어진 ‘국민보도연맹’으로부터 촉발됐다. 해방 이후 정통성의 부재를 지닌 이승만 정권은 반공-우익-친일 세력을 중심으로 좌파척결에 나섰고, 그 빌미로 이른바 좌파 전향 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한다. 이에 따라 지방의 공무원, 경찰, 토호 세력 등은 자신의 부락을 중심으로 보도연맹에 가입시킬 좌성향 양민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좌성향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부락마다 내려진 인원할당제에 의해 무지랭이 농민, 아낙, 어린 소년 소녀까지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이 과정에서 마을 토호 세력이나 우익 세력들의 걸림돌이 되었던 독립운동 세력, 지식인들, 그리고 토호세력과 사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양민들까지도 상당수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간다) 그리고 이윽고 1950년 초, 전쟁 발발 시 남한 내 좌파성향의 북한 동조를 척결해야 한다고 판단한 남한 정부는 보도연맹에 이름이 올라간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명령이었음에도 그 어떤 법적 절차나 명분도 없었으며, 이들 대부분 마을 뒷산, 앞바다 등으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총살당하거나 산채로 밧줄에 묶여 바다로 내던져졌다. 그리고 그 시신은 수습조차 불가하였다. 지난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우수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영화 < 레드 툼 >( 구자환 )은 그 비극의 역사를 추적한다. 영화의 제목 ‘Red Tomb'''''''' 은 이른바 ‘빨갱이 무덤’을 일컫는다. 아침 댓바람에 혹은 한낮 일하던 논밭에서 또 더러는 한밤 어둠 속, 문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쫓아갔던 많은 이들이 피투성이 주검이 되어 뒷산에 널브러져 방치되어도 그 유가족은 그들을 차마 수습조차 하지 못하고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그들의 시신들은 그대로 은폐되거나 감추어져 이른바 빨갱이 무덤을 이루었다. < 레드 툼 >은 그 학살의 현장들을 증언한다. 이제는 팔순 혹은 구순이 된 마을 노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지금껏 차마 발설하지 못했던 그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어느 역사 보고서에도 기록되지 못했을 그 기억의 증언들, 혹은 울분의 토로들 속에서 어느 노인은 지금도 몸서리치며 ‘무섭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날이 다시 오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라고 그는 말한다. 영화 속 팔순의 할머니는 20대 청춘에 끌려간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죽은 것도 확신할 수 없다며 제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할머니의 옷장에는 아직도 남편의 삼베옷이 보관돼 있다. 그러던 중 마을 뒷산에서 보도연맹 학살로 살해된 유골들이 반세기가 지나 발견된다. 그제서야 남편의 완전한 주검을 마주하게 된 할머니는 통곡하며 “아이고 산천도 무심하고, 부락민도 무심하다…”라며 통곡한다. < 레드 툼 >은 반세기 전 역사를 파헤치지만 우리는 놀랍게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를 상기하게 된다. 보도연맹 사건이 아직도 제대로 된 역사적 처벌이나 평가를 못 받아서이기도 하거니와, 그 끔찍한 권력과 폭력, ‘적대’를 기반으로 하는 그 통치의 테크놀로지가 평범했던 사람들에게 너무도 잔혹하게 작동되었음을 새삼 일깨우기 때문이다. ‘좌파’라는 용어조차 이해하지 못하던 마을 부락민들이 권력과 친일 토호들에 야합하여 이웃 주민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학살할 수 있는 그 야만은 물론이고, 이후 그 폭력의 희생자들이 또다시 가해질 폭력에 침묵하며 평생을 죄인으로 순응하게 만들었던 그 부조리의 역사란, 비단 보도연맹 사건에서 뿐만이 아니라, 제주도 4.3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산 마산에서(부마항쟁), 신군부의 80년 광주에서, 그리고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권력의 테크놀로지로 작동하고 있는 현재의 역사적 지평 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독립 다큐멘터리 진영에서 조명되고 있는 역사적 상기의 작품들은 꽤 흥미롭고 중요하다. 특히 이 작품들은 모두 그것을 겪어낸 사람들의 ‘증언’에 기반을 둔다는 점에서 보다 강렬하다. 쓰이지 않은 역사, 구술의 역사, 목격자들의 역사. 이러한 증언의 기록들은 현재의 공간들, 평범한 마을 뒷산과 바다가 원통한 주검의 역사적 현장. 그 평범성의 공간 아래 은폐된 비극의 역사를 상기한다. 상기는 우리의 일상을 역사적 공간으로 일깨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 폭력이 되풀이 될까봐 무섭다던 어느 노인의 공포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에 관한 정치적 실천에 대해 기술하면서 지나간 과거의 것을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도대체 어떠했던가를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역사철학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