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 감독
- 캐서린 킨
- 제작년도
- 1997
류승완 감독의 < 다찌마와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2008)라는 제목이 박노식 감독의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1976)에서 온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미처 몰랐지만 이명세 감독의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98)와 최호 감독의 < 사생결단 >(2006)도 각각 과거 독고성 , 장동휘 주연, 이신명 감독의 < 인정사정 볼 것 없다 >(1965)와 이두용 감독의 < 사생결단 >(1975)이 있음도 알게 됐다. 그렇게 재미삼아 찾다보니 나홍진 감독의 < 추격자 >(2007) 이전 김수용 감독의 반공영화 < 추격자 >(1969)와 김선경 감독의 ‘짝퉁’ 합작 액션영화 < 추격자 >(1979)도 발견하게 됐다. 사실 류승완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적 자의식이 새겨진 제목 모방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무척 흥미로웠다. 같은 제목 다른 영화 포스터들 그러면서 다소 덜 알려진 B무비 감독 김선경 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특히 < 추격자 >는 사운드트랙 ‘Run and Run’은 물론 올리비아 핫세가 다소 육감적으로 등장하여, 올드팬들에게는 지금도 굉장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탈리아 B무비 < 섬머타임 킬러 >(1972)의 주인공 크리스 미첨(로버트 미첨의 아들)이 출연한 영화이기도 하다. 소련에 있는 한 한국 과학자가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고, 미국 CIA 요원(크리스 미첨)이 그의 망명을 돕는다는 내용의 첩보액션영화였다. 멋진 태권 액션을 선보인 권부길이 크리스 미첨의 태권도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캐스팅이 이뤄졌고, 재미교포가 제작자였기에 한미 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선경 은 < 잘 살아다오 내 딸들아 >(1972)로 데뷔했는데 이형표 , 최영철 , 김시현 , 고영남 , 이혁수 , 김정용 감독의 경우처럼 장르를 가리지 않았던 한국 장르영화 감독 계보에 포함시킬 만한 인물이다. 조감독으로는 김시현 감독의 < 필살의 검 >(1969)에 참여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로는 만주를 배경으로 한 항일 액션영화 < 빌리쟝 >(1974)을 시작으로 < 흑룡 >(1975), < 밀명객 >(1976), < 흑룡강 >(1976), < 금호문 >(1977), < 무림대협 >(1978), < 노명검 >(1980), < 산동반점 >(1982), < 산동여자물장수 >(1983) 등 주로 권격 액션영화나 한홍합작 액션영화들을 만들었다. 가공할 뱀떼가 등장하는, 아마도 실제 동원한 뱀 숫자만으로 기네스북에 올라도 될 법한 동물 공포영화 < 인사대전 >(1983)도 떠오른다. 김선경 감독, < 밀명객 >, < 흑룡강 > 주로 트렌드에 편승한 액션영화들을 만들긴 했지만, 그의 영화들은 나름의 선 굵은 액션 연출과 이야기 전개로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특히 호쾌한 발차기가 일품이었던 액션배우 왕호가 주연을 맡은 < 밀명객 >과 < 흑룡강 >이 그러했으며, 이를 통해 왕호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로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영화제를 통한 필름 상영이 아닌 VOD나 DVD로 감상 가능한 김선경 의 액션영화는 < 특명 >(1976)과 < 산동여자물장수 >(1983) 정도다. 최근 TV 드라마를 통해 다시 주목받은 캐릭터 ‘각시탈’이 최초로 등장했던, ‘권격영화의 결산시대가 왔다’는 당당한 카피와 함께 김추련 이 각시탈로 출연한 < 각시탈 철면객 >(1978)도 그의 영화다. 영상자료원에 DVD가 있는 것으로 검색되지만, 영상자료실에서 재생해본 결과 왕우가 등장하는 엉뚱한 액션영화였다(자료원 담당자 분께서는 꼭 참고해주시길). 라호용 의 첫등장과 한참 후의 얼굴 공개 김선경 감독의 영화들 중 베스트 서너 손가락으로 꼽긴 아쉽지만, 어쨌건 < 특명 >은 그의 전체적인 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던져준다. 용( 라호룡 )은 독립군인 아버지 황대인을 잃고 한 도사 밑에서 자랐는데, 이제 그는 독립군의 지령을 받아 아버지가 목숨을 잃으며 탈취당한 불상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현주( 김정란 )가 자신의 정혼자였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 라호룡은 김선경 감독이 야심적으로 발굴한 배우로, 액션을 시작하기에 앞서 목을 쭉 빼고 자세를 낮춘 포즈가 독특하다. 하지만 역시 액션스타도 ‘얼굴’이 중요해서인지 <특명> 이후 그의 별다른 활약상을 들어본 적 없어 안타깝다. 현주를 연기한 김정란은 태권도 3단으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진출해 < 여신탐 >(1976)을 찍기도 했으며 성룡이 한국에서 촬영한 < 사학비권 >(1978), < 오룡대협 >(1978) 등에 출연했다. <여신탐>에서는 홍콩경시청의 요청으로 홍콩으로 파견된 한국 여경이었다. 당시 ‘한 액션’했던 대표 여배우 중 하나였으며 < 애권 >(1980)에서는 사부(배수천)의 애권 연마를 도운 화류계 여자였다. 기본적으로 ‘불상’을 ‘금괴’로 바꾸면, < 특명 > 역시 당시 전세계적인 트렌드라 해도 과언이 아닌 셀지오 레오네의 < 황야의 무법자 >(1964), 그러니까 이만희 의 < 쇠사슬을 끊어라 >(1971)나 < 용호대련 >(1974) 등 이두용 감독의 태권액션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스파게티 웨스턴’의 변형에 가깝다. 가짜 불상이 판 치고, 서로 다른 세력들이 주인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암투를 벌인다. 영화 속 누군가의 대사처럼, “불상을 노리는 사람이 많지만 불상이 하나뿐이라는 게 비극”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영화에서, 흑장미를 협박하며 “5분 안에 나타나지 않으면 흑장미가 똥장미가 될 줄 알아라!”라는 식의 언어유희도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특명>은 이두용 감독의 영화들처럼 만주 독립군들이 가죽점퍼에 나팔바지를 입고 화려한 발차기를 구사하는 ‘무술 레지스탕스 영화’라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다. 수원화성 표현주의, 아수라 백작, 꺽기도 스타일 수원 화성을 무대로 펼쳐지는 후반부 심야의 추격 결투신은 거의 표현주의적인 명장면이다. 불상을 찾으러 나타난 아수라 백작 스타일의 선글래스 쓴 금발 남자를 비롯해, 성곽 이곳저곳에서 총을 겨누고 뛰어내리며 옥죄어오는 악당들의 위압감도 좋다. 그런 가운데 주인공은 느닷없이 <개그콘서트>의 ‘꺾기도’ 스타일로 느닷없이 ‘대’자로 드러누우며 적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이후 현주가 자신의 오래전 정혼자임을 알게 된 순간 찾아오는 황당한 연애장면들(사이좋게 자전거 타고 가다가 괜히 쓰러지는 그런) 만큼이나 당황스럽지만, 어쨌거나 설득력은 있다. 실력도 없는 사람이 비현실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니까. 나중에 다나까( 박동룡 )의 본거지를 습격할 때의 활력도 좋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쫓고 쫓기는 가운데 느닷없이 ‘쌍부채’ 액션을 펼치고, 급기야 모터사이클에서 뛰어올라 악당( 권일수 )에게 날아 차기를 후려갈기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이때도 멈춘 오토바이의 돌아가는 굉음은 멈추지 않는다. 승부는 끝났으되 관객의 감각은 여전히 열려있다는 액션영화 연출의 장인적 감각인 것. 그렇게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고서야 주인공이 사실은 멀쩡하고 의협심 강한 ‘태권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요즘 사람들이 래프팅 하러 많이 가는 동강 혹은 한탄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끝으로, 그때서야 영화 제목이기도 한 ‘특명’을 받들어 떠난다. 그러니까 영화는 주인공이 비로소 ‘특명’을 받기 전까지의 이야기인 것. 한 송이 특명을 받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안타깝게도 인용하고 보니, 영화의 정서와 반대로 서정주 시인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의 한 구절일세). 라호 룡 김정란 감독: 김선경 각본: 최영철
.... 요란한 총성과 함께 출동하는 사이도 카와 기마헌병대들이 심야의 장안 거리를 뒤흔든다. 1920년대, 사이도 총독의 폭살미수사건으로 투옥된 강우규 의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이성우 선생 지도하에 조직된 학생 독립단이 서대문 형무소를 폭파한 독립밀사에서 취재한 민족수난사의 한 페이지. 조국에 발붙일 길 없이 만주로 망명하는 학생 일단들의 처절한 레지스탕스가 액션 푸레이로 전개된다. 핍박받은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러브 로맨스를 겻들여 엮은 활극이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민족애와 저항의지들이 쓰라린 회상을 되살린다. 이야기는 서울을 탈출한 학생단들이 산줄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기까지, 이들을 쫓는 이리떼와도 같은 일본 헌병대들과 그들의 주구(走狗)들과의 산악혈전이 이 영화를 피로 물들인다. 리얼한 박력감을 주는 총격전과 설상(雪上)에서 전개되는 스키전이 색다른 취향. 중간에서 템포가 처지고 설명조의 컷트 구성은 미숙하지만 신인 임권택 감독은 소지를 보인다. 이러한 액션 드라마에는 특히 시간 계산과 숨 쉬는 요령이 필요. 오락도 겸하여 청소년들의 역사교재로 해롭지 않다. 동아일보, 1962년 2월 5일자. (이 글에서 현재의 표기법과 다른 것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나는 임권택 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가 막 개봉했을 때 한국을 느껴보고 싶다. 박정희가 일으킨 5월 16일 쿠데타가 막 성공한 이듬해. 그해 1월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고, 그 해 3월에는 윤보선씨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증권 파동이 일어나고 그해 6월 화폐단위가 ‘환’에서 (지금의) ‘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통과시킨 다음 박정희 씨가 대통령 출마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런 다음 이듬해 10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대통령직에 당선하였다) 임권택은 여러 차례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때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그해 1월 20일에 처음으로 영화법이 발효되었다. 한국영화사에 차례로 걸작이 도착하였다. 1960년에 김기영 의 < 하녀 >가, 그리고 그 이듬해 유현목 의 < 오발탄 >이 만들어졌다. 두 편의 거의 결정적인 영화. 두 편 사이에 놓여있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불안정한 긴장. 한국영화 속에서 비로소 시작된 형식의 기호들. 같은 해 이만희 가 < 주마등 >으로 데뷔하였다. 그때 한국영화의 중심에는 제국이라고 불러야 할 신필름이 있었고 신상옥 은 한국영화의 황제였다. 그는 이미 예술적으로 절정에 올랐으며 (< 꿈 >(1955년), < 어느 여대생의 고백 >(1958년), < 지옥화 >(1958년),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1961년)) 대중적으로도 성공하였다. (< 로맨스 빠빠 >(1960년), < 상록수 >(1961년)). 그리고 그해 < 연산군 >을 찍었다. 이 영화는 한국 사극영화의 거대한 모델이 되었다. 나는 조금만 더 1962년의 한국영화들을 호명하고 싶다. 그해 한국영화의 풍경. 신상옥 의 < 열녀문 >은 그가 끝내 거기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미조구치 겐지와 같은 예술적 비전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다. 여인들의 숨결과도 같은 카메라의 선. 사건과 동선의 넘쳐나는 힘으로 가득 찬 건축 안의 구조들. 그때 집은 풍경과 뒤섞여버린다. 그 안에서 무엇보다도 비극. 그리고 다시 비극. 박상호 는 < 산색시 >를 만들었다. 한국영화사가 종종 잊어버린 이름들. 조긍하 의 < 아까시아 꽃잎 필 때 >. 최훈 의 < 양귀비 >. 누군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무언가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유현목 의 < 아낌없이 주련다 >. 그런 다음 이만희 의 < 다이알 112를 돌려라 >. 지금 막 시작한 임권택으로부터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이름. 충무로에서 마주쳤을 때마다 아마도 느꼈을 감정들, 그리고 인상.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들었다. 임권택 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찍고 있었을 때 이만희는 같은 영화사인 한흥영화사에서 <다이알 112를 돌려라>를 찍고 있었다. 같은 사무실. 같은 영화사. 우연의 일치.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만희가 힛치콕에게 끌리는 동안 임권택은 그 이름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 특히 < 싸이코 >. 그 대신 존 포드와 빌리 와일더,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의 수준에 이르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이만희가 안토니오니의 영화에서 배우는 동안 임권택은 펠리니에게 이끌렸다. 아직 한국영화는 세계영화사의 시간 바깥에 놓여있었다. 부산에 피난 가서 보았던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경험을 가진 세대를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해방과 함께 한반도에 도착한 다음 한국전쟁을 거쳐 나머지 절반을 문화적으로 점령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와 만나서 비로소 보게 된 1950년대 할리우드의 마지막 고전영화들로부터의 배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누벨바그 영화들은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 다만 < 네 멋대로 해라 >가 개봉하고 그 영화는 그 어떤 한국영화 감독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 히로시마 내 사랑 >을 보지 못했다. 브레송의 <저항>은 개봉했지만 베르히만을 보지 못했다. 안토니오니의 <정사>는 개봉했지만 펠리니의 < 달콤한 인생 >은 보지 못했다. 그해 임권택 자신이 유일하게 스승이라고 부른 정창화 는 사극 < 칠공주 >를 연출하였다. 임권택은 그의 아래서 1956년 < 장화홍련전 > 제작부 일을 한 다음 이듬해 < 풍운의 궁전 >에서 소품부를 거쳐 58년 < 비련의 섬 >으로 연출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1960년 < 햇빛 쏟아지는 벌판 >에서 조감독이 되었다. 그 후 네 편의 영화를 더 조감독을 한 다음 < 장희빈 >을 끝으로 데뷔작을 만들었다. 그는 정창화 이외의 다른 감독 아래서 연출부를 해본 적이 없다. 임권택 의 시작. 가장 첫 번째 영화. 말하자면 임권택이라는 좌표의 원점.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한흥영화사의 여덟 번째 영화이다. 한흥영화사는 액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 영화사에서 정창화가 영화를 만드는 동안 조감독 임권택을 눈 여겨 본 다음 그에게 데뷔작을 맡겼다. 말하자면 주어진 선택. 임권택은 “아마도 연출부 생활을 꽤 똘똘하게 하고 자신이 만든 예고편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이 시기의 한국영화는 대부분 흑백촬영의 시네마스코프였으며, <두만강아 잘 있거라>도 역시 그러하다. 시나리오와 촬영, 그리고 배우 모두 영화사가 결정하였다. “내가 데뷔 감독이니까 경험 많은 촬영이랑 스타 배우들을 붙여준 거지요. 주연인 김석훈 씨는 정창화 감독 연출부할 때부터 잘 알던 배우였구요” 종종 임권택은 자신이 영화를 연출하는 모든 방법을 정창화에게서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가 연출부를 하는 동안 정창화는 전쟁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영화를 아무리 여러 번 만들어도 자기가 만들어보지 않은 장르의 현장에서는 낯선 이방인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임권택의 첫 영화이자 동시에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전쟁영화이다. 물론 이 말은 다소 조심스럽게 꺼내들어야 한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라기보다는 액션활극이며, 그 중에서도 말과 총격전이 이어지는 웨스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니고 있다. 구태여 이름을 붙이자면 독립군 액션활극. 이 범주에 속한 영화들이 1960년대 말 이탈리아 스파게티 웨스턴과 만나면서 ‘만주 웨스턴’으로 잡종 장르가 되었지만 1962년은 셀지오 레오네가 이 장르의 첫 번째 영화인 < 황야의 무법자 >를 만들기 전의 일이다. 나는 아직 이 영화들을 서부극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 황야의 독수리 >를 설명할 때 임권택은 그 영화를 ‘사실상 서부극’이라고 불렀다) 혹은 독립군들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은 아직 서부극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장르의 공간으로서의 만주. 불가능한 장르의 장소로서의 만주.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반드시 그 곳에 가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에서 그냥 끝난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그들은 아직 역사 바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직도 살아있는 신체적 기억으로서의 역사 안의 멜랑꼴리. 해방이라는 단절.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라는 한반도 전체의 경험. 그러나 1962년은 1945년으로부터 고작 17년밖에 떨어져있지 않은 시간이다. 이때 나는 독립군이라는 역사 속의 ‘실재하는’ 인물들이 한국전쟁 이후 근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1962년의 남한 대중들에게 어떤 ‘상상적’ 이미지로 남았을까, 를 상상해본다. 두 개의 상상 사이의 거리.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뉴멘트 벨리의 카우보이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잃어버린 조국. 대의명분이라는 비전. 그들은 누구보다도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때 1962년의 관객들은 만주에 가기 위해서 반드시 북한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불구가 되어버린 국토. 헤어진 사람들. 헤어진 시간, 저 너머. 고향이라는 호명. 그러나 지금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2시간 17분이지만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는 1시간 38분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 속에서 사라진 39분. 물론 이 슬픔은 이 영화만의 비극은 아니다. 시나리오가 남아있긴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보는 것은 오히려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이 시나리오 대부분을 고쳐가면서 찍었어요. 그때는 모두들 그렇게 만들었어요. 급하게 시나리오가 나왔고, 그런 다음 감독과 어떤 의논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내가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작가는 이미 다른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예요. 던져 놓으면 알아서 찍어야 하는 거지요. 그때부터 나는 시나리오를 고쳐가면서 찍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나는 슬픈 마음을 안고 단지 이 영화를 느껴본 다음 남은 프린트만으로 이 영화의 기분을 막연하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영우와 경애 민사장과 경애 첫 영화를 보았을 때 나의 첫 인상. 내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처음 보았을 때 난처해진 것은 단지 ‘사라진 39분’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일부는 아마도 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황하고도 끝없는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연속적으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기구 절창한 이야기를 금방 요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들을 잘 기억하실 것. 그런 다음 이야기의 선을 유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그 줄을 놓칠 때 이 영화의 질서들과 규칙들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이중으로 나눈 다음 다시 거기서 몇 개의 가닥으로 나뉘어 나간 사건들의 연쇄 망. 이야기는 두 개의 선을 따라간다. 하나는 영우의 선이다. 그는 독립군이었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홀어머니를 둔 학생이다. 그에게는 경애라는 애인이 있다. 경애는 일본군에게 독립군을 밀고하는 민사장이라는 삼촌과 살고 있다. 경애는 영우의 아이를 임신한 지 2개월이다. 그는 지금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한 다음 독립군에게 합류하기 위해 떠나야 한다. 창환과 연화 연화와 현구 영우와 창환 다른 하나는 창환의 선이다. 창환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멀리 떠나있지만 서대문 형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돌아온다. 창환에게는 연화라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 연화에게는 현구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도 역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다. 연화는 요정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녀에게 일본군 대장인 와까노가 한눈에 보고 반해서 치근덕거리기 시작한다. 영우와 창환이 같은 독립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금방 이 두 개의 선이 하나로 모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일단 하나로 모은 다음 이들이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두만강에서 합류하기 위해서 다시 둘로 나뉘어서 두 개의 선으로 황해도 구월산을 지나 두만강으로 향하게 된다. 이때 이야기는 거기서 둘로 뻗어나가는 대신 다시 경애와 연화의 선으로 분리되어 나온다. 영우의 선으로부터 빠져나온 다음 바깥으로 이어진 선. 경애가 영우에게 빌려온 책 속에 있었던 사진을 훔쳐서 밀고한 민사장 때문에 동료와 어머니가 체포되자 영우는 경애가 배신했다고 오해하고 이별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를 받은 경애는 민사장의 돈을 훔쳐서 영우를 찾아 나선다. 다음, 창환의 선으로부터 이어진 선. 연화는 일본군 헌병대장 와까노로부터 정보를 얻으려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자 동생 현구와 남편 창환을 찾아서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 네 개의 선. 그러나 이들 선 사이의 관계를 다시 복잡하게 뒤섞는 것은 와까노의 앞잡이 노릇을 민사장이 하고 있고, 민사장은 경애를 뒤쫓으면 독립군들의 활동 본거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따라나설 때이다. 마치 수직으로 이어진 선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것처럼 그들 사이를 가로지는 선. 그러나 이 선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예민하게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거미줄이 그런 것처럼 무언가 하나가 그 줄을 건드리면 중심에 있는 거미에게 전달되어 신속하고 재빠르게 쇼트의 시스템 전체가 활동을 시작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이들 선 사이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의 선이 활동하는 동안 우리는 다른 선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거미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많은 인물들을 어떻게 일제히 작동시킬 수 있을까. 이 사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공명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임권택 은 이야기 안에서 방법을 찾는 대신 인물들이 속한 상황을 잘게 부순 다음 그들 사이를 교차 평행편집으로 연결해나가기 시작했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영화 전체가 마치 유일하게 거대한 교차 평행 편집이 활동하는 기계처럼 보일 정도이다. 종종 이것이 반복적으로 연결되고 둘 사이의 평행이 시간적으로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지만 이 모든 선들이 하나의 장소, 두만강으로 수렴되기 시작할 때 이 씬들 사이에 놓여있는 칸막이는 점점 좁혀져오기 시작한다. 물론 시네마스코프는 쇼트를 교차하기에 유리한 프레임이 아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쇼트 대신 씬이 교차 평행편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교차는 서로 직접적인 대신 서로 다른 단위의 집합들이 오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우는 경애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으며, 창환은 연화와 씬 안에서 만날 때에만 그들 사이의 감정을 교환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멀리 있는 동안 그들 자신을 전달할 어떤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 평행편집은 항상 이 모든 씬이 이야기 전체의 부분 집합이며, 나머지를 상실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교차는 교집합이 아니다. 이때 잃어버린 상실을 찾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한’ 이야기가 항상 이미 선택되어진 인물들 사이로 옮겨 다닌다. 씬 사이에 이루어진 칸막이. 교차 평행편집은 언제나 이야기 안에서 분배의 계산법에 따른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임권택의 연출은 이 계산법에 있다. 그는 어떻게 계산을 하는가. 그 계산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그 안에서 분배는 올바로 되어있는가. 이때 시간은 이야기 속의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이때 이들이 그러는 동안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충하고, 다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로 뻗어나간다. 그런 다음 재빨리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하나는 마치 그 사이에 그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종종 이 계산은 지나치게 단순할 때도 있고, 때로는 셈을 망설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영우가 산에서 길을 잃은 다음 산골지기 노인과 그 딸에게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 딸이 영우에게 이끌리기 시작할 때. 말하자면 거기서 뻗어나간 또 다른 선. 이때 원래의 이야기를 다시 작동시키기 위해서 이 씬 안으로 경애가 뛰어 들어오는 것은 이 얼마나 기계적인가. 도식적인 설명. 두만강에 가기 위해서 다시 교차 평행편집을 작동시켜야만 한다. 여기서 멈추면 반대편 창환의 씬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권택은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에서 자기 영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설명이 임권택의 영화가 오로지 구성의 리듬 안에 자리한 교환 장치만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이 영화의 가장 부자연스러운 장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어쩌면 모든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성립시키는 순간영화는 아름다워진다. 힛치콕의 < 새 >에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새의 시선들. 구로사와 아키라의 <거미둥지의 성>에서 안개 속을 걸어오는 숲.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를 본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되었던 1962년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두만강을 앞에 둔 눈 내린 계곡에서의 총격전 스펙터클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용인 스키장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영화가 아직 녹음실에 있을 때 기사에 따르면 “5백여 스키여를 동원했고, 5만 여발의 뇌관을 소비하는 등, 폭발사고로 엑스트라들의 치료비만도 1백만 환이 넘었다는 화제의 영화가 15일 촬영을 끝내고 목하 녹음중인 바”(조선일보 1962년 1월 18일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의 장면을 보면 5백 명에 이르는 스키 부대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른 기사에서는 치료비가 2백만 환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런 문제를 따져 물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이 장면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차라리 더욱 더) 현재의 프린트로는 불가능하다. 이 시퀀스 전체에 이르는 대부분의 프린트가 손상되었으며, 일부 디지털 복원된 장면들은 현재 스틸 사진으로 대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완전히 사라진 장면들이 있으며,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장면은 전체의 구성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이 장면은 아름답다. 내가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그냥 그게 첫 인상이었다. 갑자기 영화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온 것처럼 완전히 다른 환경의 장소 속으로 들어간다. 영우와 창환, 경애, 연화, 심지어 민 사장조차 종종 그들은 숲에서 길을 잃기도 하였다. 미로에 가까운 이야기의 선.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들로 갇힌 것만 같은 가로막길. 끈질기게 일본군 헌병대의 추적이 이어지고 그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연화의 동생이 총상 당할 때 문득 떠오르는 질문. 결국 이렇게 모두들 죽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선이 끊어져버린 것만 같은 중단. 무엇보다도 어둠과 그림자, 실내 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이어지던 거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교차 평행편집. 그런데 마치 이야기의 침점처럼 두만강으로 모이자 이제 교환 장치의 작동은 멈추었다. 그런 다음 산은 눈부실 정도로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흑백화면이 주는 전체를 차지하는 하얀 색과 부분적인 검은 색. 우리는 이 장면이 시작하기 전 눈 오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미 산과 강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다. 아니, 차라리 여기를 눈이라는 대지로 이루어진 땅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마치 이 씬을 보는 순간 어떤 공간 이동이 벌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물론 이 장면이 말이 안 된다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조차 이 장면을 부정한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장면을 눈 위에서 벌어지는 스키 부대의 액션 때문에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설원에서의 전투장면에는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 영화에 등장했던 그 모든 인물들이 모두 죽기 위해서 마치 이 장면으로 모여든 것만 같은 인상을 줄 정도이다. 악인도, 선인도, 우리 편도, 저들도, 아니, 이들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살아남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전멸의 테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은 임권택 의 영화에서 이 전멸의 테마를 반복해서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의 이 장면은 두 번의 전투로 나누어져 있다. 독립군들은 일본군에게 쫓기면서 전투를 하지만 이들이 위기에 빠진 순간 산 저편에서 어디선가 갑자기 스키부대가 나타나 이들을 물리친다. 산 전경을 보여주는 롱 쇼트. 프레임을 가득 메우는 스키 부대. 아래서 위로 올라오는 일본군 헌병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스키 부대. 두 개의 힘의 충돌. 이 힘의 운동 방향은 이미 이 전투의 승패를 가늠 짓는다. 이들은 승리의 만세를 부른다. 그들이 얻은 승리. 하지만 잠깐 동안의 기쁨에 찬 만세. 뒤 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더 많은 일본군 헌병대가 이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한다. 두 번의 반복적인 어디선가. 그러나 반대의 방향, 더 많은 숫자의 군인들. 거의 화면 아래를 모두 채우다시피 한 숫자. 승리의 화면은 갑자기 여기서 균형을 잃고 이 승리를 불길하게 만든다. 영화의 약속. 여기에는 어떤 중재의 가능성도 없으며, 반전의 기회도 없을 것이다. 이때 이 전투는 가망 없는 전멸로 이끌린다. 이제 남은 건 필사적인 총격전뿐이다. 일단 먼저 준 다음 다시 뺏어가는 승리. 이들은 여기서 서로 죽이고 죽어간다. 우리들을 이끌었던 하나의 선 영우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때 하나의 선은 거기서 끝날 것이다. 그 대신 거기서 이어지는 경애의 선이 희미하게 남는다. 가까스로 여기에 도착한 연화도 총에 맞아 죽는다, 이제 창환의 선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때 여기까지 가까스로 온 연화(와 창환)의 어린 아들의 선이 그들 사이를 겨우 이어간다. 물론 그들을 여기까지 쫓아온 일본 헌병대 대장 와까노도 죽는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조차 우리는 무언가 해결되었다는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넓은 설원의 계곡을 가득 메우는 것은 시체들뿐이다. 너무 많이 죽어서 이제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경이 된다. 이때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이들의 전멸에 어울리는 이미지이다. 이 절망적인 액션의 스펙터클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간들의 피 흘리는 전투에 대해서 그저 무심한 자연의 하얀 눈이다. 그리고 흑백화면 위로 펼쳐진 더 하얀 색으로 화창한 하늘. 우리가 거기서 보는 것은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립군의 승리도 없고, 일본 헌병대의 야만에 대한 분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이야기의 선이 일제히 중단되어버렸다는 망연자실한 순간의 장면을 마주할 뿐이다. 여기서 임권택은 자기가 이제까지 이끌고 온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다시피 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단. 이제 살아남은 사람은 네 명 뿐이다. 창환과 경애, 그리고 창환의 어린 아들. 그런 다음 독립군 중의 그 누군가. 나는 현재 남아있는 프린트만으로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영화중의 그 어떤 선을 타고서 여기에 온 인물이 아니다. 시체들이 펼쳐진 스펙터클의 풍경. 이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표면만을 건드리고 싶다. 임권택은 거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 속에서 그런데 왜 눈 쌓인 이 계곡의 오후는 이렇게 아름답지, 라고 내게 묻는 것만 같다. 그 풍경의 오류는 오로지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뿐이다.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 수 없는 검은 점. 나는 이 스펙터클의 풍경을 볼 때마다 자꾸만 기하학적인 도면을 보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물론 임권택 이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거기서 본 것은 말레비치의 하얀 바탕 위의 검은 점이다. 그때 이제까지 그가 만든 영화들이 돌아서서 이 장면을 본 다음 물어보는 것만 같다. 혹시 그 검은 점들은 당신이 멀리서 바라보는 역사 안의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하기도 싫은) 실재 속에 남겨진 블랙홀들은 아닌가요. 그 검은 점들은 계속해서 돌아오고 또 돌아올 것이다. 임권택은 지금 막 첫 번째 영화를 만들었다. 그 해 1962년. (계속) 1962년 99분 흑백 2.35 감독 임권택 제작 한흥영화사 각본 유한철 각색 정진우 촬영 최호진 음악 박춘석 미술 원제래 편집 김희수 김석훈 영우 황해 창환 문정숙 연화 엄앵란 경애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동체나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비장한 남성들에 매혹되곤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난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영화광도 아니었고 심지어 관심도 없었지만, 그러한 남성들에 대한 첫 번째 매혹에 대한 기억은 영화였다. 언제쯤이었을까? 아마 내가 열 살 즈음이었을까? TV에서 방영되는 < 새벽의 7인 >을 보았다. 레지스탕스라는 어려운 용어는 물론이고 나치나 유태인이 뭔지도 몰랐을 그 시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치에 포위된 두 명의 청년이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자, 나치는 지하실로 물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그 물이 거의 천장까지 차오르자 이 두 청년은 서로를 끌어안고 각자의 머리에 총을 겨눠 자살을 하고만다. 이 숨막히는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이 살아남기를 정말이지 간절히 소망했다. 그들이 투항하기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최대한 머리를 지하천장 가까이 치켜들면 익사하지 않으리라는 응원을 열심히 했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정규 수업은 거의 출석하지 않았고, 사회과학 동아리였던 세미나에 더 열중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가져온 <칠레에 관한 모든 기억>을 보게 됐다. 내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한 첫 번째 영화였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자 살바로드 아옌데의 혁명과 이에 대한 피노체트 반혁명(쿠데타), 그리고 민중 학살에 관한 작품이었다. 공군 전투기가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채 스무명이 안 되는 동지들과 달랑 권총 한 자루 들고 저항하는 아옌데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의 육성 라디오 메시지는 내 넋이 다 나갈 정도로 소름끼쳤다. 비장한 남성들에 대한 매혹은 자연스레 운동으로 연결됐고, 그 다음은 영화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도 ‘다큐멘터리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다큐멘터리 진영에 기웃거렸다. 대학 4학년 즈음에 벌어진 노동계 총파업때(노동법 날치기 통과 반대 투쟁) 학교 영화패 선배를 쫓아 명동 향린교회에 꾸려진 ‘총파업공동영상제작단’을 찾아가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아주 사소한 심부름을 하면서도 뿌듯해 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는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꾸린 이론분과에 참여했다. 선배들에게 거창하게 내 포부를 드러내진 못했으나, 나 홀로 각종 다큐멘터리 이론 책들과 논문들을 읽으며(주고 다큐멘터리의 형식주의 관련 논문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결정적으로 ‘운동’ 혹은 ‘다큐멘터리’와 멀어진 것은 영화에 대한 매혹과 지식이 더 커져가면서였다. 얼마 후 ‘씨네21’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이후 다시 ‘영화는 예술이며, 감독은 작가다’를 죽어라 외쳐대는 KINO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됐다. 그 즈음 우연히 만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이론분과 선배는 내게 농담처럼 ‘배신자’라고 했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쓰리기도 했다. 몇 년 전 모 영상위원회의 ‘독립영화 DVD 제작지원’ 분야 심사에 참여했다. 이번에 < 오월애 >를 연출하신 김태일 감독님 역시 심사에 참여하셨다. 난 그때 심사장에서 그분께 했던 내 질문을 아직도 후회한다. “요즘 다큐멘터리들은 왜 이리 나이브한가요? 형식에 대한 고민들이 없는 것 같아요” 당시 나는 취지와 메시지에는 공감하나 만듦새와 형식이 너무도 불만이었던 한 작품에 대한 선정 여부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질문은 걸작과 작가에 경도된 지금의 영화취향에서 가능한 질문이었고, 한국에서 독립다큐멘터리를 한다는 것이 수반하는 무수한 싸움과 한계들을 외면한 질문이었다. 얼마 전 지인과 < 오월애 >를 보러갔다. 관객은 우리뿐이었다. 덕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큰소리로 토론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초반부 시민군이었던 남자가 뱉어내는 내래이션은 묘하게도 내 가슴을 쳤다. “30년 동안 기억의 감옥으로부터 한번도 자유로운 적 없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몸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소름끼쳤다. 망각에 대한 죄의식, 도청에 대한 논쟁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학살과 위정자들. 그 모든 공포들을 상기시키는 작품이었다. 며칠 후, 모 영화과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중 < 오월애 >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오월애>의 나이브함이 아쉽다 했다. 정말로 이 작품이 나이브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그 용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알 것 같다. 30년이 지나도록 미완인 역사, 그것도 망각 속에 봉인되려는 역사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나 해석을 제공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증언자들의 진술이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선택된 인물들은 당시 광주를 상상하기엔 다소 느슨해 보인다. 이 영화엔 여백이 많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나이브함이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오월애>의 미덕으로 간직하려 한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걸작과 작가주의에 경도된 나의 영화적 취향을 너머, 지난 시기 운동과 다큐에 대한 매혹과 열정을 일깨운 작품이다. 80년 광주는 조직화나 체계화된 운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억업받고 빈곤했던 시민들의 삶의 몸부림이었다. 이후 진행된 약간의 민주화니 보상이니, 역사적 재평가니 하는 것들도 어쩌면 지식인인양 하는 자들 혹은 정치인들의 포장되고 왜곡된 언술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 오월애 >의 힘은 당시 광주에, 그날 그곳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기층민중의 역사를 지식인들이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역사를 그들 스스로 발언하게 하고, 그들을 역사적 주역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있다. 영웅화된 몇몇 열사가 아니라, 그곳에서 이름조차 없이 죽어간 무수한 목숨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힘겨운 기억들. 구두닦이, 식당주인, 노점상, 과일행상, 고등학생... <오월애>는 그들의 투쟁과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상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작품인 것이다.(광주나 칠레를 비롯하여 잔혹한 학살을 경험한 희생자들은 이후 수십년 동안 발언을 금지 당한다. 발언 그 자체가 고통이거니와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또 다른 억압과 처벌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내 유년기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 속 비장한 남성들, 레지스탕스에서부터 아옌데까지. 그러나 <오월애>는 그 비장한 영웅들의 현실 속 주체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운동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오월애>의 사람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어떤 압도적 형식미학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월애>는 ‘저항’과 기층민중의 힘을 믿는 작품이다. 그래서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