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 감독
- 변영주
- 제작년도
- 1993
1993년 여름의 나를 사로잡은 질문은 그것이었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는가? ‘충격적인 컬트’라는 수식어와 함께 심야 시간대 KBS2에서 방영되었던 데이빗 린치의 <트윈 픽스> 1화 오프닝은, 그때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의 내가 돌이켜보건대, 지금까지 내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이 드라마는 1화 첫 장면부터 ‘시체를 던진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학교 축제에서 여왕으로 선정될 만큼 트윈픽스 마을의 최고 미인으로 꼽히던 고등학생 로라 파머가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차가운 강물 속에 몇 시간 동안 떠다녀서인지, 그의 피부는 잿빛으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도 생기를 잃은 채 푸르죽죽했다. 젊음과 아름다움이 그대로 ‘박제’된 시체가 주는 불편한 매혹. 또래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부유한 가족의 외동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았으며 심지어 봉사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누구에게나 칭찬을 듣던 밝고 화사한 소녀 로라 파머가 시체로 발견된 뒤, FBI 요원 데일 쿠퍼가 전담 수사관으로 트윈 픽스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비밀이 하나씩 드러난다. 한낮의 햇살 같던 로라에게 실은 암흑 같은 어두움이 스며들어 있었고, ‘공인된’ 남자 친구는 한명이었지만 다수의 남성들이 로라 주변에 존재했다. 심지어 마약과 매매춘, 새디스트의 고문이라는 엄청난 단어들이 FBI 요원의 입술에 오르내린다. 트윈 픽스는 어떤 곳인가. 침엽수림이 우거지고, 큰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새들이 평화롭게 우짖으며, 미국 최고로 맛있는 체리 파이와 뜨거운 커피를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영업 중이고, 새롭게 유입된 사람은 거의 없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지내는 그런 마을이다. 따스한 세피아 톤 화면 속에서, 서로 마주치면 미소와 덕담을 주고받은 마을 사람들의 과장되게 따뜻한 관계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나오미 왓츠가 처음 할리우드에 도착하여 노부부와 주고받는 밝고 희망차고 부자연스러운 연기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대화가 끝나고 뒤돌아서면 그 사람의 얼굴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표정이 떠오른다. 웃음기가 가신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거나, 음험하고 차갑고 비열한 표정은 시청자들만 볼 수 있는 일종의 ‘방백’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누가 로라 파머를 죽였냐고? 모두에게 혐의가 있고,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으며, 모두가 떳떳하지 않다. 심지어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인물로 제시되는 데일 쿠퍼마저도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종의 변화를 겪는다. 종국엔 가장 무시무시한 표정이 그의 얼굴 위에 얼어붙는다. 애거사 크리스티로 대표되는 고전 미스터리의 익숙한 전제이지만, 드라마로 이런 이야기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누군가 살해당했고, 모두가 수상하고, 모두가 그 죽음에 책임이 있다. 겉으로는 그토록 아름답고 아늑해 보이는 마을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과 부패와 심지어 악마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린치의 <블루 벨벳>의 유명한 오프닝 신처럼, 장미꽃 아래 떨어져 있던 사람의 잘린 귀 같은 그런 세계. 그리고 <트윈 픽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육체관계로 얽혀 있는데, 문제는 이 모두가 치정 혹은 제도적으로 용인받지 못할 관계라는 것이다. 배우자 몰래 저지르는 불륜이라든가, 죽은 친구의 연인과 사랑에 빠진다든가, 재산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은 관계라든가.... 그들은 우울한 현실과 복잡한 삶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연애를 선택했고, 그 말로는 당연히 모두 처참하다. 배신과 기만, 거짓된 정체성의 폭로. 이별과 살인과 자살. 이 복잡한 치정 관계들은 로라 파머 사건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지만, 중요한 단서로 작동하면서 정교한 추리를 완성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진 않는다(시리즈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데일 쿠퍼는 추리하지 않는다. 그는 ‘계시’를 받는다). 로라 파머의 죽음 이후 연루된 이들의 사소한 비밀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거나, 당사자가 그 폭로를 막기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서면서 연쇄적으로 다른 사건들이 터지는 식이다. 즉 확실한 인과관계 없이 충동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주요 플롯을 이룬다. 그런 면에서 <트윈 픽스>는 일일드라마적 전통(내지는 미국의 소프 오페라, <가이딩 라이트>라든가 <제너럴 호스피털> 같은 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쓰기 한 작품) 1) 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물론 회가 거듭할수록 악령과 명상, 신비로운 체험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장르는 오컬트 스릴러의 색깔이 상당히 진해지지만 말이다. 작년부터 왓챠를 통해 <트윈 픽스> 시즌 1, 2를 다시 본 다음 가장 최근작인 (25년 만에 돌아온) 시즌 3의 초반까지 챙겨보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데이빗 린치가 이끄는 대로 넋을 놓고 따라가며 그 낯선 세계의 토끼 굴을 탐험했다면, 이후의 무수한 자칭 타칭 ‘포스트 <트윈 픽스>’들까지 충분히 경험했던 2021년의 관람자로서 새롭게 느낀 점은 <트윈 픽스>가 얼마나 느슨한 이야기였나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마크 프로스트가 로라 파머 살인 사건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은 실제 사건이 있다. 스무 살의 헤이즐 드루(Hazel Drew)는 1908년 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수사 기법이라는 게 전혀 확립되지 않은 20세기 초의 그 살인 사건은, 남자들과 쉽게 어울렸고 낯선 사람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예쁜 아가씨의 죽음을 둘러싼 수상쩍은 호기심과 무성한 소문과 함께, 이 남자 혹은 저 남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모호한 가능성만 여럿 남긴 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마크 프로스트가 헤이즐 드루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꼬마 시절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준 일종의 유령 이야기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할머니는 꼬마들이 밤에 집 밖으로 나가 놀면 안 된다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미제로 끝났던 헤이즐 사건을 다소 무시무시하게 각색하며 초자연적인 무언가와 섞어서 마크 프로스트에게 들려주었다고 했다. 프로스트에게는 그 비극적인 사건의 주인공 헤이즐에 대한 상상이 뇌리 어딘가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고, 결국 수십 년 뒤 헤이즐은 로라 파머로 재탄생했다. 2) 그리고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의 이야기가 재탄생한 1990년 전후의 시기는 어떨까. 인터넷 등의 각종 통신 수단이 발달하기 직전이었던,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 이전의 시기다. 비밀은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고 이중생활이 얼마든지 가능했으며 심지어 악마가 인간 세계에 끼어드는 것도 가능했던 시기다. 그래서 프로스트와 린치는 그 모호한 상황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확한 전개라든가 캐릭터의 일관성 같은 요소들은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유연상 작용처럼 드라마를 만들었는데, 그런 헐거운 흐름과 자유로운 리듬이 전형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익숙했던 당시 시청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 같다.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여 정확하게 짜놓은 세계 속에서 편안하게 누워 감상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구전 설화를 듣는 것처럼, 화자가 말하던 도중에 갑자기 잊어버리고 다른 주제로 휙 건너가는 것처럼 다소 맥락 없고 뒤죽박죽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쩌면 눈으로 본다기보다 귀로 듣는 옛 이야기의 부활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드라마 내내 과잉처럼 쓰이는 바달라멘티의 음악 역시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다시 큰 그림을 보자. 데이빗 린치는 드라마 <트윈 픽스> 이후 영화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1992년)를 재차 만들었다(웨이브와 구글 플레이 무비즈에서 대여 혹은 구매로 볼 수 있다). 이는 시즌 1의 프리퀄로서, 드라마에서는 늘 누군가의 회상 신이나 대사를 통해서만 언급되던 로라 파머가 처음으로 주인공으로 극 전체를 장악하며 살아 움직인다. 드라마에선 ‘냉혹한 미녀’처럼 그려지던 로라 파머가 영화에선 좀더 순진하고 따뜻하고 가련한 인물로 재해석되었음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빗 린치의 딸이자 영화감독 겸 작가인 제니퍼 린치는 소설 <로라 파머의 비밀 일기(The Secret Diary of Laura Palmer)>를 썼다. 이것은 로라 파머가 생전에 썼던 비밀일기장의 내용을 상상하여 완성한 책이다. 1990년의 드라마 시즌 1과 시즌 2사이에 출간된 스핀오프다. 당시 22살이던 제니퍼 린치는 데이빗 린치와 마크 프로스트로부터 로라 파머에 대해 처음 듣고 자신이 그 인물과 대단히 가깝다고 느꼈으며, 마치 ‘자동기술’을 하듯이 즉각적으로 이 소설을 써내려갔다고 밝혔다. 3) 헐거운 ‘트윈 픽스’ 세계관에서 작가와 감독이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혹은 않았던) 빈 공간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을 때, 시청자들이 의외로 그 여백에 열렬히 반응하며 새로운 디테일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을 때, 감독은 별개의 영화와 그리고 25년만의 새로운 시리즈로 그에 응답했다. 감독의 딸이자 또다른 크리에이터는 거기서 파생된 로라의 일기라는 새로운 픽션을 완성했다. <트윈 픽스> 시즌 1이 시작될 무렵에는 미처 계획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주석이 지속적으로 덧붙여지면서, 트윈 픽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도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드라마 시즌 1~3, 독자적인 장편 영화와 장편 소설까지, 이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팬픽션 혹은 유니버스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어쩌면 유니버스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확고하게 대중적인 무언가로 정착되기 이전의 초창기 버전의 형태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트윈 픽스> 제작진마저 데일 쿠퍼처럼 트윈 픽스의 세계에 갇혀 버린 건 아닐까? <트윈 픽스> 시즌 3의 2화에서, 외팔이 남자는 데일 쿠퍼에게 묻는다. “이건 미래인가요? 아니면 과거인가요?” 과거에서 상상한 미래라고 해야 할까. *** 1) 아래 아티클에 따르면, 각본가 마크 프로스트는 극중극 형태로 등장하는 <사랑의 초대(Invitation to Love)>를 소프 오페라의 노골적인 패러디로 작심하고 썼다고 한다. https://www.dazeddigital.com/film-tv/article/40177/1/invitation-to-love-soap-within-twin-peaks-david-lynch 2)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4336146/The-real-life-murder-Sand-Lake-NY-inspired-Twin-Peaks.html 3)https://en.wikipedia.org/wiki/The_Secret_Diary_of_Laura_Palmer
< 예라이샹 >이라는 영화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조세영( 신성일 )이 긴급하게 도피하고 있다. 4.19. 혁명의 시간이다. 세영은 난희( 문정숙 )의 집으로 들어간다. 난희는 세영을 모르지만 당시의 정치적 저항에 공감하는 그녀는 오른손을 다친 세영을 의사를 불러 와 치료해준다. 이러한 도입부는 정치적 긴급 상황이 로맨스의 조건이 되는 다른 해방 이후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예컨대 대표적인 포스트 해방 영화 < 자유만세 >(1946)도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일제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지하공작을 하던 전창근이 어느 날 일경에게 쫓기다가 총을 맞고 급한 김에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 숨게 되었다. 간호원인 그 집 딸 황려희가 그를 숨겨주어 위기에서 구출된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을 느꼈지만 전창근은 조국광복에 바친 몸이기에 미처 사랑도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일경에게 발각된다. 악착같은 일경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조국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어간다.” 배경은 이렇듯 1960년의 4.19이고, 세영과 난희의 만남도 혁명의 시간 속에서 배태되었으나 < 예라이샹 >이 사회와 개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물론 매우 다르다. 우선 세영과 난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기보다 난희는 세영을 극진하게 간호하고, 세영은 난희에 감사와 애정을 가지게 된다. 위의 < 자유만세 >와는 달리 세영은 난희를 조국을 위해 외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계층적 위치가 일차로 문제로 등장한다. 난희는 바 (bar)걸이고 세영은 명문 법대 4학년이라 고시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계층의 문제가 내러티브의 쟁투 지점은 아니다. 솜씨 좋은 감독이자 흥행사인 정창화 가 조각해내는 긴급 상황 속의 남녀, 세영과 난희에겐 풀어야 할 다른 숙제가 있다. 그것은 이 혁명의 시간과 어긋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상해에서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이다. 이 상해의 시간과 현재 (1960)의 시간의 중첩이 일어나는 시점은 영화가 공개되는 1966년쯤이다. 그 사이 1961.5.16이 있었으나 영화는 그 사건을 부재시킨다. 동시대적 이벤트를 서사의 의식 안에 매립하고, < 예라이샹 >은 과거 상해 조직 세계의 어떤 치명적 문제를, 현재에 간섭하는 역사의 트라우마로 삼고 예의 바걸과 재즈 밴드를 클럽에 소재시켜 ‘Moritat’을 연주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는 역사와 한 시기(period)를 전면화하는 형식과 이별하고, 가정과 세계의 변증법인 멜로드라마와도 작별하여 필름 누아르의 뒤틀린 어법과 미장센으로 우리를 이끈다. 밤의 거리, 밤의 여자인 팜므파탈, 성적 도착, 남성적 힘과 권력의 간극, 폭력의 법, 방관하거나 지나치게 참견하는 국가의 법, 음모, 돈의 어지러운 누빔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필름 누아르 말이다. 그래서 <예라이샹>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독립 운동가로서 그리고 문예활동가로서 살아가던 사람들보다는, 당시 가난에 못 이겨 매매춘과 아편 판매를 하던 유민들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오히려 <상해에서 온 여인>과 같은 1948년 오손 웰즈의 필름 누아르를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웨스턴을 참조한 대륙 활극, 액션 장르, 한홍 합작을 열었던 장르 영화의 대가의 참조체계를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필름 누아르가 불려옴으로써 영화는 상해의 밤과 더불어 미국의 밤을 서울의 밤거리에 이중인화시킨다. 역사적 파편과 당대 긴급성의 선택적 배치 (4.19의 현존과 5.16의 부재), 장르적 관행이 <예라이샹>을 이질적으로 횡단하고 있다. 이것이 기묘한 복합성을 이루는 야래향의 “리좀” 들이다. 야래향의 향기 따위는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들이 걸출한 장르 영화 감독이 만든 대중 영화의 데칼코마니적 비/재현 안에서 표출된다. 리좀들이 만들어내는 지도 그리기 (cartography)는 해결되지 않은 도착적인 근대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행위자의 연속적 수행에 의해 재연되며 재앙과 비극이 재생산된다. 가까운 5.16을 오히려 부재시키고, 상해를 소환하는 문제는 잠깐 괄호 속에 넣고, 기묘한 시간의 중첩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 예라이샹 >이라는 제목 자체가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 <夜?香 yelai xi?ng>( 문근영 이 < 댄서의 순정 >에서 번안해 불렀던)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영화는 지리적 상상력의 배후를 서울의 클럽 풍경을 매개해 중국 상해로 끌고 간다. 서울의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명곡 ‘Moritat’는 “미국의 밤”으로의 접속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과 같은 전치적 중첩은 위에서 이야기한 필름 누아르 인용과 더불어, 동시대적 한국 영화의 지형에서 보면 정창화 감독 자신이 성취한 “대륙 활극”과도 접속한다. 대륙을 전면적으로 배경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만희의 대륙 활극이 엮어내는 비대칭적 “역사적 쌍” (강점기의 민족주의와 박정희 체제의 국가주의라는 다른 시대적 요구들을 배치해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 쇠사슬을 끊어라 >)을 이 영화에 소급 적용해보면 상해의 1930년대와 남한의 1960년대가 어둠의 세계로 겹쳐지고, 거기에 재즈와 댄스가 있는 클럽 문화로 불야성을 이루는 미국의 밤이 삼중 노출된다. 밤에 도착하는 꽃향기라는 야래향을 빌어 말하자면, 밤들이 도착한다. 상해와 남한의 혁명의 어둠 , 그리고 미국의 밤. 다문화라면 다문화이고, 한국 영화가 불러오는 세계라면 세계인데 거기에 역사성과 정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정치가 표준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은어”, 필름 누아르를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다른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은어는 성적 변이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비밀을 말하기 위한 방식이다. 은어와 더불어 방언이 있다. 필름 누아르의 번역으로서의 방언인 코리안 누아르는 선취된 근대의 밤인 상해를 아메리칸 필름 누아르의 형식으로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혼자 칵테일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난희( 문정숙 )의 미디엄 숏으로 거기에 제작 등 크레딧이 올라간다. 팜므파탈이 소개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걸과 엘리트 남자 대학생의 결합은 사실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다. 난희와 세영, 두 사람 모두에게 부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국이 어수선하기도 하여 세영의 지도교수도 별달리 이들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는 오히려 예의 “상해” 커넥션에서 발생한다. 난희의 단골고객들인 박사장 ( 최남현 )과 허상무( 허장강 )은 난희에게 도착적인 관계를 강요한 사람들인데, 4.19로 가정교사를 하던 집이 불타버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세영은 박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설상가상 박사장과 허상무는 상해에서 난희의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박사장은 어머니를 겁탈해 딸까지 낳았는데 가정교사로 들어간 세영을 흠모하는 박사장의 큰딸이 바로 박사장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난희의 이복자매다. 물론 난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해에서 아버지의 옛 친구가 “중공”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돌아와 이 비밀을 알려주는데, 그는 박과 허에게 살해당한다. 난희는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박사장을 죽여 복수한다. 그녀는 감옥에 갇히고 세영과 난희의 이복 자매가 그녀를 찾아온다. 복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복수를 통한 정의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허망한 정서가 만연하지만 젊은 세대의 패배는 아니다. 팜므파탈적 여성의 소란한 출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4.19를 거친 새로운 젊은 남성 엘리트가 처한 어떤 국면, 함정, 유혹, 필요 등을 포착한다. 그가 법대생이라는 것은 우연한 설정만은 아니다. 법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목도하고 관계하게 된 상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폭력적 (불)법의 존속. 난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고, 체험하게 하지만, 몸으로 그 사태를 받아치고 끊어내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세대, 5.16은 괄호 부호 속에 여전히 은밀하게 숨어 있고 어머니 대신 팜므파탈적 여성이 과거의 매듭을 끊고 간다. 5.16의 텍스트 속 은닉과 더불어 구조화된 부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나 참조다. 필름 느와르, 재즈의 문화적 형식을 빌어 미국적 모더니티는 텍스트의 형식으로 통합되어 있고, 상해는 두 명의 악당 에이전시를 통해 불려오나 한국 근대사에서 상해가 놓여있는 자리, 맥락은 일제 강점기이나 이 텍스트에는 그런 컨텍스트적 의식이 없다. 증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언급했듯이 대륙활극, 한홍합작 등을 이루어낸 감독의 지정학적 역사 판타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나이트 클럽이 끝날 때를 기다려 난희를 찾아온 세영과 밤길을 걸어갈 때 난희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전 이들은 고통을 겪었다. 세영의 표정을 살피며 난희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거리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계속 걷는다. 표정과 언어와 발걸음, 카메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정동을 미묘하고 가슴 저리게 전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드문 장면이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어두운 골목길에서 움직이며 전달할 수 있는 여성의 자리, 여배우 문정숙 의 탁월한 연기의 성취는, 순간적이나마 “세계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 (아리프 딜릭) 읽는 하이데거의 월딩의 새로운 자리이며 열림이다.
1990년에 출판된 하일지의 소설을 각색한 장선우 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은 공항 출구의 자동문이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R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곳은 R이 공부하러 갔던 프랑스가 아니라 원래 살았던 한국이다. R은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겠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한국에서 럭셔리한 나라로 통하는 프랑스에서 무려 박사학위까지 받은 R이지만 그의 현실은 럭셔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농사를 지어온 부모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고, 여동생들은 공장에 다닌다. 아이 둘을 낳은 그의 아내는 교양 따위와는 담을 쌓은 여자이며 이혼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R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의 현실을 가리워 줄 판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R이 '메흐드'라고 불어로 욕을 할 때, 현실을 외면하려는 그의 심리 상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그것은 프랑스에서 3년 반을 같이 살았던 J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J와 한국에서의 J는 동일한 J가 아니다. 한국에서 교수가 되려는 여자가 불륜관계를 지속한다는 건 사회적인 성공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년 만에 한국에서 만난 그들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부잣집 딸 J는 R의 유학경비를 부담하고 섹스를 허락했고, 가난한 R은 J가 박사학위를 따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들의 교환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프랑스 박사에 문학평론가가 된 J에게 R이 교환가치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R은 J에게 섹스만을 원하는데, J는 R이 원하는 걸 섹스만 빼고 다 해준다. R에게 J와의 섹스는 판타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일 터인데, 그의 욕망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간신히 기회를 잡았을 때는 잘 되지 않기까지 한다. 경마장을 계속 돌고 도는 말들처럼, 그들이 섹스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점점 더 나빠진다. J는 말한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줄 아세요?' 이 영화에서 R과 J의 장면만큼이나 흥미로운 대목은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십자가로 뒤덮힌 서울의 밤은 공동묘지 같고, 대낮의 거리에는 멸공을 외치는 자동차가 질주한다. 사람들은 술에 쩔어 비틀거리고, 한가로웠던 산책은 고된 노동이 된다. 집사고 애 키우다 인생을 낭비하는 그런 곳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살 만한 곳이기는 커녕 일종의 지옥이다. R은 J에게 3천만 원을 요구하고, 협박하고, 매매춘까지 제안하면서 지옥을 견디게 할 불가능한 판타지에 끝까지 매달린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치사하고 야비한 면모를 드러낼 뿐이다. 그는 J에게 그 가짜들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실재를 보지는 못한다. 결국 J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이 나고, R은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차창 밖으로 남루한 차림의 두 여인을 보게 된다. 그가 감전당한 듯 그들에게서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볼 때, 영화의 첫 장면이 반복되고 버스의 창문으로 R의 눈물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판타지를 포기하고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이 장면은 < 태백산맥 >에서 송화의 굿거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이나 < 바보선언 >에서 동철과 육덕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춤추는 장면 또는 <장마>에서 엄마가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는 장면과 함께 볼 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포스트모던 소설로 평가받는 원작에서 장선우 는 ''''''''''''''''진정성''''''''''''''''의 순간을 발견해낸다. 적어도 이 장면만큼은 원작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없었다면 < 경마장 가는 길 >은 남녀관계의 실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한국사회의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한 영화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또는 본격적인 속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진정성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즐거움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