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트 라이브 프리미엄 - 새소년
- 감독
- 다니엘전, 맹수진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새소년
10편의 리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다. ‘여성’ ‘역사’ ‘일상에서 비켜난 삶’ 등 몇몇 개념이 떠오르지만 전체 리스트를 다 아우르지는 못한다. 다시 한번, 나 자신은 과연 이 영화들의 무엇에 끌렸나 질문한 끝에 이 리스트의 최대 공약수를 “존엄을 지키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고군분투” 정도로 정리해 본다. 이 리스트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삶의 궁지에 몰린 평범한 사람들이다. 침범당한 삶, 위기에 빠진 삶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 속에서 이들의 존재 가치가 드러난다.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저마다 다르고 그들은 오직 자신의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골몰할 뿐이지만 그러한 고군분투 속에서 빛나는 삶에 대한 애착과 위로의 힘은 매우 크다. 타인의 인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인간으로서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발신한다. 마닐라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가게를 운영하면서 마약을 거래하는 로사를 윤리적인 인간이라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마’ 로사 >(브릴얀테 멘도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억척스럽게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호한 얼굴에서, 부패한 공권력이 지배하는 거친 뒷골목에서 생존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강렬한 생의 에너지에서 우리는 순간이나마 숭고미마저 느끼게 된다. 라브 디아즈의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는 헤수스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필리핀의 어두운 과거와 비타협적으로 치열하게 싸워온 거장의 신작에서 여성혁명가 헤수스는 총살당한 혁명 영웅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산속을 헤맨다.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역사의 격변기를 호명하면서 영화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의 의미를 필리핀의 현재로 확장시킨다. 필리핀 민중에게 호소하는 감독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고 직설적인 울림이 있다. 클레버 멘도사 필루의 두 번째 장편 < 아쿠아리우스 >는 아름다운 노년 여성의 눈을 통해 개발과 보존, 기억과 망각이라는 사회정치적 이슈를 서정적이고 파워풀하게 그려낸다. 기억의 의미, 추억과 공간의 관계, 아카이브로서의 공간이라는 테마를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로 멋지게 풀어낸 이 영화의 중심에도 섬세하고 강인한 여성이 자리 잡고 있다. < 화염의 바다 >는 근래 유럽 다큐멘터리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난민 문제를 다룬 영화다.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관문인 람페두사를 배경으로 참혹한 난민 구조 현장과 섬 소년의 일상을 느슨하게 교차시킨 이 영화는, 아름다운 섬의 나른하고 잔잔한 일상이야말로 목숨 걸고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 소망했던 삶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어쩌면 “바다에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섬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미 난민 문제에 대한 모든 해법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 붉은 거북 >은 무인도에 난파되어 평생 외로움과 싸우다 늙어버린 남자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오직 이미지의 힘만으로 고립된 남자의 외로움, 절대고독을 재현한 이 영화는 마음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뒤늦게 덮친 쓰나미처럼 내 마음을 어지럽게 휘저어 놓는다. 재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때로 침묵이 무엇보다 강렬한 언어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다. 짐 자무쉬의 < 패터슨 >은 단조로운 삶이 반복되는 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주일을 그린다. 매일 반복되는 그의 일상은 집-버스-집-동네 주점으로 이어지는 단순한 동선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에도 변화는 있고 그러한 변화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크다. 가장 큰 활력소인 시를 통째로 잃어버리고 실의에 빠진 어느 날, 그는 거리에서 만난 일본인에게 자신을 “시 쓰는 버스 기사”라고 소개한다. 시인이 아닌 시 쓰는 버스 기사. 평범한 삶의 특별함을 절제된 연출과 여백으로 보여주는 짐 자무쉬의 단단한 연출은 오즈 야스지로를 떠오르게 한다. 올해의 가장 뛰어난 영화라 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하게 될 작품은 안제이 바이다의 < 애프터이미지 >이다. 이 영화는 토론토에서 처음 보고 부산에서 다시 한번 보았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감독의 부고를 들었다. 또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울린다. 2차대전의 상처와 폴란드의 역사적 경험을 어루만지면서 폴란드의 역동적 변화와 공명해온 감독의 이력답게 <애프터이미지> 역시 스탈린 체제하의 폴란드라는 역사의 어두운 시기로 걸어 들어간다. 폴란드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표 작가인 스트르제민스키의 삶을 통해 스탈린 체제 하에서 예술에 가해진 억압에 대해 고발하는 이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스탈린의 예술 테제가 어떻게 예술의 숨통을 끊어놓고 예술을 프로파간다로 전락시켰는지 보여준다.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사물의 이미지가 망막에 남아있는 잔상 효과를 뜻하는 ‘애프터이미지 afterimage’는 스트르제민스키에게서 시각적 의식이 작용하는 특정한 메카니즘이자 역사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오프닝 신은 영화의 방향을 예시하는 복선으로 기능한다. 스트르제민스키가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이 새빨갛게 물든다. 거대한 붉은 천에 그려진 스탈린 초상화가 건물에 걸리면서 그의 작업실 전체를 가려버린 것이다. 붉게 물든 작업실은 스탈린의 소비에트 이데올로기가 폴란드 예술가의 삶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예술은 이념이 아닌 형태(form)라고 굳게 믿는 그에게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강요는 예술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의 강요 앞에 자신의 예술관을 꺾지 않던 그는 직장을 잃고 예술가조합에서 추방되며 살던 집에서 쫓겨난다. 동료 예술가인 아내 코브로와 헤어져 평생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예술관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예술은 그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가치였던 것이다. 배고픔에 굶주려 빈 접시를 하염없이 핥아대면서도 체제 이데올로기의 겁박에 순응하지 않았던 이 고집 센 예술가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 소식을 들은 그는 아내의 무덤 앞에 파란 물을 들인 꽃을 바친다. 아내가 아름다운 푸른 눈을 가졌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붉게 물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횡행하던 체제에 저항하듯이 푸른 꽃을 예술가 아내의 무덤에 바치던 예술가 역시 쓸쓸하게 죽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예술 형식을 중시한 폴란드의 대표 전위예술가이자 자신의 우상이었던 스트르제민스키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안제이 바이다 감독이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술의 비개성화를 주장하면서 대중의 미적 기준을 향상시키려 했던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 작업을 고려할 때 감독이 채택한 고전적 리얼리즘 양식은 조금은 의외다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영화가 스트르제민스키의 예술보다는 시대와 불화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는데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안제이 바이다 역시 역사가 되었다.
대한민국 입시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보도물은 수없이 많다. 그만큼 대입이란 이슈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 모순과 갈등을 응축한 중요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수능 시험일은 한국사회의 일상이 잠정적으로 중단 내지 조정되는 시간이다. 군부대도, 경찰서도, 민간기업도, 하물며 항공 운항조차도 입시를 위해 각자 일상의 스케쥴을 조정한다. 원활한 입시 진행을 위해 민관이 동원되는 상황을 국민들은 기꺼이 이해한다. 참으로 이해할 듯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저 대학 시험일 뿐인데! 힘들어 죽겠다고 모두들 아우성을 치는 데도 나아질 기미 없이 수십 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입’이라는 사건은 대한민국 모두가 연루된 거대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대학 입시 하나에 대한민국 전체가 울고불고 요동치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더더욱 낯설고 기괴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스타일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것은 교육 관련 다큐들이 진즉에 지적해온 문제점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대한 미로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집단적 악몽의 곤혹스러움 자체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범죄 드라마적 서스펜스와 초현실주의적 악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헤어날 수 없는 음모론적 세계의 폐소공포증을 선사한다. 이러한 세계-시스템 속으로 절대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지만 자신 역시 예외일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관객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스멀스멀한 불안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관객들이 체험하는 낯선 감정의 실체다. 시스템 밖으로 탈출하기 위한 소수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부분 순응하고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개미지옥. 영화가 조여오는 묵직함은 관객 역시 그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현실논리만으로 대한민국 ‘입시’라는 관문을 헤쳐 나가기는 버겁기 짝이 없다. 그래서 대입이라는 필생의 통과의례에는 수험생을 둔 가족을 비롯해서 사회 전체가 가담하는 준 종교적 제의가 따라붙는다. 영화는 종파를 초월해 아이들의 입시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범종교계의 기도와 제의 장면들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수시로 교차시킨다. 목사와 승려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대입 성공을 기원하고, 부모들은 정성을 모아 삼보일배를 하고 눈물로 기도한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색감과 사운드를 통해 재현된 이 이미지들은 그 익숙함을 잃고 한없이 낯설고 기괴한 풍경으로 변모한다. 영화는 수능 시험일이라는 시간을 D- day, 즉 심판의 날로 설정하고 그 심판의 날에 맞춰 모든 일상을 셋업한 아이들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집단적 기원의 장을 기괴한 색감과 소리로 표현한다. ‘SKY’는 이러한 집단적, 종교적 열망을 상징하는 주술적이고 중의적인 기표이다. 학생도 부모도 모두가 ‘SKY’라는 허상을 향해 기약 없는 줄달음을 칠 때, 그들의 불안함을 어루만지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다. 과거 공자나 예수, 부처와 같은 신과 성인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 스타 강사들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불안한 고3들을 SKY라는 낙원으로 이끄는 사제 역할을 자처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된 현실과 괴리된 공자의 말씀이 종종 현실의 부조리를 도드라지게 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유발할 때, 영화는 이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 대입이라는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신흥 교주 내지는 사제가 되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영화에 사용된 사운드는 이 영화의 기괴한 낯섦-이화효과(異化效果)를 극대화하는 증폭기 역할을 한다. 필립 글래스고의 음울한 음악이 시종일관 영화 전체에 불안함과 어두운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우면서 관객의 무의식에 파고들던 에롤 모리스의 작품 <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 처럼, 이 영화 음악 역시 영화의 분위기, 톤을 주조하면서 전반적인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이 영화의 스태프 상당수는 외국인들로 이루어졌다. 최우영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벨기에 출신의 스티븐 두트 감독을 비롯한 다수의 외국인 스태프들, 그들의 시선은 한국사회의 풍경을 한층 더 낯설게 보면서 영화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입시 광풍은 도처에서 질병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지만, 나 역시 저 대열(SKY)에 합류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분열적 욕망으로 인해 해결 불가능한 무한 반복의 폐쇄회로를 맴돌고 있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힘은 사회적 질병을 명료한 언어로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우리 욕망의 맹목성을 무의식의 언어로 파고들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영화의 소재가 충분히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 끝없이 달리는 욕망의 맹목성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이 경주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우리를 사로잡는 근본적 두려움이자 좌절감이다. 지옥이란 그런 것이다. 이 영화는 ‘대학입시’라는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욕망의 지옥을 그려낸다. 그 지옥의 낯설고도 강렬한 인상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영화 앞에 멈추어 그 지옥의 불구덩이를 응시하게 된다.
1. 올해 내가 꼽은 열한 편의 리스트를 살펴보니 한국영화가 1편, 아시아 영화 3편, 남미영화 1편, 유럽영화가 6편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유럽영화가 많은 반면 북미 영화는 단 한편도 포함되지 않았다. 유럽영화 중에서는 < 아페림! Aferim! > <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 Chuck Norris vs Communism > 등 루마니아 영화가 2편이나 포함되었다. 지극히 사사로운 방식으로 리스트에 올린 3편의 아시아 거장들의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영화의 관계를 해석하고 풀어가는데 유독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깊은 공감을 느낀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거나 친숙하다고 말할 수 없는 무협영화에서조차 그러한 감정을 느꼈으니 거기에는 아마도 단순히 개별 감독과 작품과의 교감을 넘어선 ‘아시아’라는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공유하는 감정과 경험치들이 어떤 식으로든 녹아있기 때문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 택시 >는 20년간 일체의 영화촬영과 인터뷰, 해외출국을 금지당한, 말하자면 예술인으로서 사형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는 거장의 영화적 열정과 혼이 경외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영화이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무릎을 꺾을 만한 상황에서도 파나히 감독은 쉽사리 성마른 분노와 좌절을 표출하지 않는다. 그라고 왜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내면의 분노를 자신의 나라, 사람들을 향한 깊이를 측량하기 어려운 애정과 에너지로 승화시킨다. 사랑하는 자의 분노란 이런 것이라는 것. <택시>를 보면서 이란 당국이 제아무리 거장의 입에 재갈을 채우고 예술혼을 꺾으려 해도 그들은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한 경외감은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협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장르적 쾌감을 모조리 제거해버린 이 정적이고 불친절한 무협영화에서 관객이 따라가야 하는 것은 활극의 동적인 쾌감이 아니라 주인공 섭은낭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내적 고뇌이다. 4:3 화면은 일찌감치 스펙터클에 대한 기대감을 접게 만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몸속에 쌓여가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다. 단단하기 짝이 없는 거장의 영화적 고집에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젖어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매우 부드럽고 달콤하며 쉬운 영화이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에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의 전작들에서부터 영화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감독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깊이 전이되어 왔던 관객으로서, 한층 경쾌해진 그녀의 이번 고백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파트리시오 구즈만 감독의 < 자개단추 Pearl Button >는 2010년 작품 <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 Nostalgia for the Light >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전반부를 보면서 구즈만 감독도 늙었구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쇠꼬챙이처럼 꼿꼿한 자세로 불의에 맞서고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를 관찰하던 감독들이 나이가 들어 둥글둥글하고 원만해진 태도로 세상과의 화해를 설파할 때, 세상은 이런 영화들에 대해 종종 ‘노인의 지혜’ ‘현자의 깨달음’이라는 두루뭉술한 헌사를 바치곤 했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초반부에 카메라가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천체를 관측할 때, 이 감독도 우주의 법칙 운운하며 역사와 인생의 포용을 이야기하려는구나, 라고 속단했다. 그러나 완전히 틀렸다. 그의 시선이 우주와 자연을 경유해 인간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극대에서 극소로, 우주의 역사와 땅의 역사를 연결하며 결국은 훨씬 깊고 넓어진 시야로 아물지 않은 인간과 역사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로 돌아왔을 때,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영화의 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에서 우주를 향하던 시선은 <자개단추>에서는 생명의 기원인 물, 바다로 향한다. 칠레의 땅과 바다, 원시 부족의 삶과 물방울 속에 새겨진 역사의 흔적을 밟으며 우리는 다시 유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로 돌아온다. 개인적으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에 비해 <자개단추>의 성취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멈추지 않는 거장의 거대한 조망의 노력과 시야의 확보, 영화적 성취에 경의를 표한다. 이번 리스트에 올린 유럽의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 가운데 지적인 발견의 즐거움까지 주는 영화들이다.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쌓아온 노부부의 신뢰와 애정이 우연한 계기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져가는 과정을 잔인하도록 섬세하고 냉랭하게 보여주는 심리극 < 45년 후 45 Years >를 제외하면 < 코베인: 몽타주 오브 헥 Cobain: Montage of Heck > <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 > < 수메 - 혁명의 사운드 Sume - The Sound of a Revolution > < 아페림! >은 매끄러운 영화적 만듦새 속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지의 영역에 접근해 다양한 층위에 대한 발견의 즐거움을 주는 영화들이었다. <수메, 혁명의 사운드>는 그린란드에 대해서라면 기껏해야 < 북극의 나누크 >가 알려준 것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나의 일천함을 비웃으며, 그린란드 최초의 록밴드를 통해 그들의 역사와 현재, 음악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알려주었고, <척 노리스 vs 공산주의>와 <아페림!> < 의미의 창조 The Creation of Meaning > 역시 유사한 체험을 주었다.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화들이기도 해서 기회가 된다면 일견을 추천하고 싶은 작품들이다. 이 글에서는 2015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각본상) 수상작인 라드 주드 감독의 <아페림!>에 대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2. < 아페림! >은 루마니아 지방 귀족의 아내와 정사를 벌이고 도망간 집시 노예를 잡아오라는 영주의 명령을 받고 노예를 찾아 나선 순사 코스탄틴과 그의 아들 이오니타의 여정을 다룬 로드무비이자 루마니아 판 수정주의 웨스턴이다. 영화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집시 노예제도는 14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 중엽 폐지된 제도라 하는데, 공산당 집권 시기에 이 제도에 관한 기록은 루마니아의 공식 역사에서 삭제된다. 수백 년 지속된 인종차별제도의 유산이 현재에도 루마니아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중요한 사건이 공식 역사에서 사라짐으로써 현대 루마니아인들은 대안적인 역사 연구나 아카이브 등의 제한된 정보를 통해서만 근근이 사라진 과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감독은 시끌벅적한 하이브리드 장르의 외피를 빌어 사라진 과거의 이미지를 희미하게나마 복원하고자 한다. 엔딩 자막에 나와 있듯이 이 영화의 몇몇 내레이션과 대사는 역사적 기록에 기반하고 있다. 사라진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독 자신이 19세기와 친숙해질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감독은 영화 내내 수없이 인용되는 민간전승 문화와 루마니아, 외국 작가들의 문학을 선택한다.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멘탈리티의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최대한 그 시대의 언어에 가깝게 다가가 익숙해지고자 했고 그 결과를 영화 속에 녹여낸다. 그러나 감독은 과거를 재현하는 어떠한 시도도 궁극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영화를 35mm 흑백 와이드로 촬영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 영화가 역사에 대한 주관적이고 인공적인 재연물(re-enactment)”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가 재연(re-enactment)한 역사 역시 그의 역사적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순사 코스탄틴은 감독의 비전을 대행하는 페르소나이자 관찰자이다. 1835년 루마니아 남부 지역 왈라키아를 출발해서 중부 유럽 카르파티아 산맥 등 루마니아의 수려한 자연을 통과하면서 코스탄틴 부자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종차별주의, 노예제, 계급차별, 여성의 열악한 지위 등 당대 루마니아의 여러 문제들과 조우한다. 코스탄틴은 구시대와 근대 사회의 문지방에 위치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스스로 구시대의 편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자신 역시 한 발을 구시대에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뱉어내는 말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슬랭들이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을 드러낸다. 한편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낡은 지식을 비웃고, ‘법의 준수’를 강조하며 잡혀 온 노예에 대해 잘못한 만큼만 처벌해달라고 영주에게 부탁할 만큼 근대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패트릭 갬블러는 이러한 코스탄틴 캐릭터에 대해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와 돈키호테 사이”의 인물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코스탄틴 부자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영화는 루마니아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의 기원을 희극적이면서도 날카롭게 탐구해 나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모든 민족, 인종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들에 대한 편견을 쉼 없이 나열하는 신부의 모습일 것이다. 각 민족에 대한 그의 장광설은 집시에서 유대인까지 모든 민족과 종교를 총망라하는 백과사전적 편견의 보고라 할 만하다. 모든 인종이 다 모인 유럽의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했을 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다. 결과적으로 코스탄틴 부자의 여행은 구시대의 가치에 대한 회의와 코스탄틴의 정체성의 위기를 야기한다. 코스탄틴은 몸의 절반을 구시대에 담가온 인물이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삶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죄 없는 노예를 풀어주자는 아들의 부탁에 영주에게 죽음 아닌 다른 적절한 처벌을 부탁하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약속이 무색하게도 귀족의 복수는 경악스러울 만큼 살벌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다. 그의 폭정은 노예뿐 아니라 마을의 주민들, 심지어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잔인한 처벌 후에 영주의 성을 나서는 코스탄틴의 풀 죽은 모습은 어딘가 측은하다. 변명이라도 하듯이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힘내. 신은 벌레 하나도 돌보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대로 사는 거야.” 그것은 변명 같기도 하고 체념 같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선인장이 흔들리는 루마니아의 광활하고 텅 빈 평원으로 들어왔던 처음 모습처럼, 이제 두 사람은 임무를 마치고 공동체를 떠나는 황야의 사나이처럼 석양을 향해 사라져 간다. 영웅의 소명을 마치고 퇴장하는 웨스턴의 주인공들처럼 그들 역시 무대를 떠나지만 무대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의 제목인 ‘아페림’은 ‘브라보’라는 뜻의 루마니아어이다. 코스탄틴이 노예를 잡아왔을 때 영주는 ‘아페림!’이라고 외친다. 코스탄틴 부자의 여행은 구체제의 질서가 얼마나 완고하게 지속되는지, 진보와 변화는 얼마나 느리게 진행되는지 보여주었다. ‘아페림’이라는 감탄사는 과거를 향한 아이러니한 수사일 뿐 아니라 그 과거의 영향 아래 있는 현재 루마니아 사회에 대한 역설적 논평이기도 할 것이다. 희극과 비극을 오가는 이 영화가 미래를 향해 어느 정도 문을 열어놓았는지, 코스탄틴 부자는 어디를 향해 떠나갔는지는 관객이 직접 판단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