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화의 도망자
- 감독
- 임영동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조지 청, 강대위, 정동, 폴 추, 하가구, 고비, 관지림, 유덕화, 오의장, 앤디 추, 황백문, 빅터 웡, 오천련
나는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있다. 새벽부터 감질나게 내리던 비가 차창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창 밖으로는 처음 보지만 익숙한 시골 풍경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흘러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지방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칠 때 즈음이면, 아마 추측하건대 나는 또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편 영화 배급이라는 것은 나에게 항상 이런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독립영화계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소할 이 직업은,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도 모호했지만, 곧 십오년 경력을 달성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떤 일인지 딱 정리하기엔 애매하다. 그래서 십여년 전부터 나는 이 직업을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가라고,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 이상한 합리화 같지만, 실제로 나는 이 생각이 꽤 그럴싸하다고 여겨왔다. 인디(이럴 수가 심지어 이름도 ‘인디’잖아!)의 직업은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고고학자이다. 그의 일상은 학교의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상의 다른 한편으론, 놀랍고 신기한 보물을 찾아 전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삶 또한 존재한다. 단편 영화 배급이란 직업도 지루한 일상과 두근거리는 모험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업무 자체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수많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서류 작업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기 위해 세상을 누비는 모험의 시간이 항상 같이 따라 붙는다. 인디는 시리즈 몇 편에서인가 그런 말을 했었다. 고고학은 도서관의 책 속이 아닌,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마찬가지다. 배급은 결코 서류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도, 창작자도, 관객도 그들 모두는 서류와 모니터 밖에 있는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 정말 좋아해서 배급을 하게 된 한 영화가 모니터 속 서류와 파일로만 존재하다가… 마침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될 때- 관객들이 그 영화를 나처럼 좋아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멋진 순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제, 경상도 해안 도시 어딘가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며 방금 쓴 문장을 되뇌자, 나는 몇 개의 과거 속에 남아있는 행복한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씁쓸한 기억의 흔적이 함께 어렴풋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몇 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한 감독의 새 단편 영화를 배급하게 되었다. 그는 유독 GV(관객과의 대화)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초청된 모든 영화제의 GV 시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또 체크했으며, 입고 갈 의상과 그 날의 질의응답을 거듭 준비하곤 했다. 나는 그의 열띤 모습이 좀 의아했다. 나는 그에게, 이전 영화로 이미 꽤 많은 GV를 하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전 영화는 그 해 가장 주목받고, 또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는 그 영화로 GV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이전 작품은 2020년, 팬데믹 시대의 영화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느낌으로 팬데믹 시기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굉장히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그 기억은 점점 뿌옇게 흐려져가고 있다. 언젠가는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과 땀이 찬 마스크의 축축한, 기분 나쁜 감촉만이 기억 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의 기억에 대한 이 이상한 감각은 단편 영화들이 겪었던 이상하고, 때론 의심스러웠던 수많은 일들의 기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처음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아니 처음 나의 현실을 덮쳐 왔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느 영화제 스태프들과 배급사 담당자들 간의 미팅 자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뉴스의 해외 단신에 나오던 새로운 역병은, 조금씩 뉴스의 메인 꼭지로 다뤄지는 빈도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 날의 미팅도,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안전한 영화제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미팅 장소로 향하는 나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평소와 같은 열띤 흥분이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이메일과 동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영은 취소되었다. 영화제는 온라인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내가 맞이한 세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대면”, “뉴노멀”. “새로운 세상이 온다”. “기존에 알던 우리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단편 영화들에 있어서는 유독 모진 시기였다. 이렇게 말하자면- 더 힘든 사람들,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영역도 있다고 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단편 영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모질었다. 강력한 방역 조치와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그토록 많던 상영과 행사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것들은 아주 간단하게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영화제와 상영회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상영했다. 창작자들이 서로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메타버스’의 이상하고 어색한 사교 활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과 단체들이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결정들이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온라인 상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수도 있겠지. 미래에는 극장이 사라질지도 몰라. 분명 그런 생각은 팬데믹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변화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이 너무나 빨리 우리 앞에 현실로 닥쳐왔었다. 팬데믹 시대, 나의 일은 두배 세배의 모니터 앞 서류 작업으로 변질되었다. 일의 양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 일에 ’모험’의 두근거림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상’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서류 작업을 하고 어떤 좋은 영화를 영화제에 진출시켜도, 나는 내 노력의 결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시기 내가 배급했던 영화들은 많은 경우, 온라인 상영 결산 서류의 숫자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온라인 상영과 가상 공간에서의 행사들. 그것들은 오프라인에 있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기회인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많이 달랐다. 조회수는 꽤 자주 처참했고, 아바타 대화는 종종 무의미했다. 그리고 불과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팬데믹의 공포가 옅어져 가고, 답답한 마스크를 더 이상 매일 쓰지 않아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다. 우리의 미래인 양 얘기했던 그 수많은 변화들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져갔다. 영화제의 온라인 상영은 이제 단편 영화를 제외하곤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왜 단편영화들만 온라인 상영을 계속 하는지는 나의 소소한 의문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틈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NFT나 메타버스는 이제 사람들의 우스개소리로, 누군가의 실패한 주식 테마주로만 기억된다. 나도 이제 다시 도시에서 도시로, 산과 바다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는다. 나의 일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그 시기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은 남겨졌다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단편 영화와, 그 작품의 창작자들은 아직도 그 망각 속에 남아있다. 팬데믹 시기, 그들의 단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들에게 나는 무척 안쓰럽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일생 일대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해나갈 응원일 수도 있었을 순간들을- 그들은 누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응당 따라 왔어야 할 보상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며 그런 보상들이, 그 크기와 화려함의 정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꽤 만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새로운 인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작은 상영관에 모여 앉은 관객들은 어쩌면 그들이 새로 좋아하게 될 어떤 영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GV에 집착하는 그 감독도 내일 있을 또다른 영화제 때문에 조금 상기된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엔 꽤 신경 쓴 정장을 챙겨 둔 모양이다. 그는 다행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고, 두번째 기회를 잡아냈다. 나는 그의 행운이 정말 기쁘다. 하지만 팬데믹의 기억 속에, 누군가는 끝내 남겨져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내가 2년 전에 먼저 보고는 진짜 친한 친구들 아니면 알려주지 않았던 작품이다. 왜냐하면 내가 리메이크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리메이크할만한 작품이면 오히려 더 알려서 영화 자체의 지명도를 올려야 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 텐데, 이 영화는 숨겨야만 했다. 이유는 너무나 강력한 반전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 사상 반전이 강력한 작품들은 많다. < 식스 센스 >나 < 유쥬얼 서스펙트 >는 물론 좀 과거로 가 보면 < 혹성 탈출 > 등이 떠오르는데, 그런 반열에 들어갈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다. 평이한 가족 코미디 영화일 뿐이지만 어마어마하게 눈물 폭탄을 던질 수 있는 대반전을 지니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글을 읽으실 분들에게는 그 반전의 힘이 좀 약해질 수 있겠다. 미안하지만 이 영화의 반전은 ‘반전이 있다’는 정보를 가진 상태로 관람했을 때의 효과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반전을 잊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는 뻔뻔한 제안을 해 본다. 이 영화는 멕시코 작품이고, 스페인어가 주로 사용되는데 주 배경은 미국이다. 2013년 미국 개봉 당시 5천만 달러 이상의 박스 오피스 성적을 거둬 스페인어 영화 역사상 미국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결코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 수 없을 것만 같은 외모를 지닌 한 남자가 온갖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고, 여성들은 그에게 결혼을 원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이 남자의 이름은 그야말로 로맨틱한 뉘앙스의 발렌틴. 어쨌든 발렌틴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또한 자신도 그런 여성들과의 관계를 신나게 즐기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하나의 과장에 의한 코미디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한 여인이 침대 위에서 두 여인 사이에 누워 있던 발렌틴을 찾아온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말이다. 이쯤 되면 < 과속 스캔들 >도 떠오르고 <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도 떠오르고 온갖 내가 모르는 내 아이가 내 눈앞에 나타나는 수많은 가족/혹은 섹스 코미디가 떠오르는데,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아이 엄마는 택시비를 내러 가겠다고 한 이후 기약이 없고, 발렌틴은 아이를 떠맡게 된다. 이런 경우 보통 아이를 어쩔 수 없이 떠맡아 기르는 한 남자의 분투기가 펼쳐질 텐데 발렌틴은 가열차게 아이를 거부하며 미국으로 간 아이 엄마를 찾아 아이를 돌려주기 위한 여행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를 데리고 여행하는 로드 무비로 전개돼야 할 텐데 여행은 싱겁게도 짧게 끝나고 LA에 도착하고 만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이미 뉴욕으로 떠나 버렸고 발렌틴은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 땅에서 아이와 함께 덩그러니 남게 된다. 그러던 중 발렌틴의 놀라운 재능 하나가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스턴트맨의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딱 맞췄는지 그 자리에 스턴트맨 매니저가 있었고 발렌틴은 할리우드에서 매우 잘 나가는 스턴트맨이 된다. 그러면서 수입이 생겨 아이를 키우며 살게 된다. 아이의 이름은 매기. 태어나서 한 번도 아이를 돌본 적이 없는 싱글 대디 발렌틴은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건지 아닌지 무조건 아이를 행복하게만 만들어 주려고 애쓴다. 엄마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온갖 환상적인 일을 하는 모험가로 소개됐고, 발렌틴은 매기에게 세상은 온갖 판타지로 가득 찬 곳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발렌틴이 친구의 병원에서 ‘치유가 되지 않는다’는 불치병 판정을 듣게 된다. 아, 그 유명한 시한부 드라마가 펼쳐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뉴욕에서 변호사로 화려하게 변신한 아이 엄마가 자신의 여성 연인과 함께 나타나 매기를 도로 찾아가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마치 < 아이 엠 샘 >처럼 아이를 놓고 서로 데려가겠다는 법정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쯤 되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게 되는데, 후반부의 정서는 다분히 여성 혐오에 기대고 있어 만약 누군가 리메이크를 한다면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수정해야 하겠다. 이후에 펼쳐지는 반전은 계속 잊고 보시는 게 좋겠는데 또 이야기를 해 버렸네. 죄송. 제목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국 개봉 제목은 < 사랑해, 매기 >, 제목을 짓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1초 만에 반사적으로 만든 후 아무 생각 없이 내놓은 듯한 느낌의 무취 무미 무감각한 제목이다. 미국 개봉 제목, 그러니까 영문 제목은 < Instructions Not Included > 번역하자면 ‘사용설명서 없음’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되기 전에 매체 혹은 인터넷에서 돌던 제목은 <사용설명서 없는 선물>이었다. 발렌틴에게 처음 매기가 도착했을 때의 느낌을 제목화 한 것이다. 그렇다면 멕시코 개봉 당시의 스페인어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 No Se Aceptan Devoluciones >다. 구글 번역기의 영험한 힘을 빌려 우리말로 옮기면 ‘환불 불가’라는 간단한 어구가 뜬다. 이쯤에서 제목의 태도들을 한 번 살펴볼까. 멕시코의 원제는 반전을 절대 들키지 않고 관객들을 완벽하게 속이겠다는 마케팅실의 굳은 의지가 엿보인다. ‘거추장스러운 딸을 맞이하게 된 발렌틴’이라는 초반부의 플롯에 집중하게 만드는 제목이다. 미국 개봉제목 역시 비슷하다. ‘인생에 없던 딸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어쩔 줄 몰라 하는 발렌틴’의 이야기로 영화를 설명한다. 그에 비해 <사랑해 매기>는 그야말로 장사를 포기한 제목이다. 제목 그 자체의 무 취향은 둘째 치고, 발렌틴의 매기에 대한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뒷부분의 드라마에 기대를 가지고 집중하게 한다. 이 영화는 주로 ‘영화 개봉 전 누구나 접하게 되는 초반부 스토리라인에 기대를 가지고 들어와 후반부 예상을 뒤엎는 전개에 놀라고 반전에 낚여 눈물 흘리는 관객’들을 타깃으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그렇게도 저주받은 이유는 개봉 제목이 한몫한다는 이야기다. 할리우드에서의 대성공을 뒤로하고, 이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도 많이 알려졌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 Demain tout commence >(내일 모든 것이 시작된다)라는 제목으로 올해 리메이크돼 며칠 전에 개봉했다. <언터쳐블: 1%의 우정>의 오마 사이가 주인공을 맡았다니 흥행이 기대된다. 아무래도 후반부의 여성 혐오적 부분이 프랑스 관객들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혹은 그 부분을 어떻게 수정했는지가 성공 여부의 관건이 될 것 같다. 한국에서도 어느 영화사에서 리메이크를 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던데, 나를 감독으로 채용하진 않을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 매튜 반다이크는 미국인으로 리비아 내전에 참가해 싸운 유명인사다. 혁명군의 복장으로 남의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이 백인 남자의 모습은 세계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영화는 일차적으로는 그의 여정을 담고 있다. 매튜 반다이크라는 남자가 자아를 찾고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여행을 떠나 리비아 혁명에 가담하게 되는 모험은 그 자체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카메라를 향한 일기체의 설명, 자신의 무용담에 대한 인증샷 등, 셀프 여행기의 전형적이고 익숙한 형식으로 우리는 그가 여행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혁명군이 되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그가 찍은 푸티지를 영화로 완성시킨 마샬 커리 감독은 그의 혹독한 성장기이자 치열한 투쟁의 기록 영상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본다. 누구든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현장성 있는 거친 카메라는 영상을 찍은 이의 기록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세계의 혁명은 이제 수많은 카메라로 기록된다. 휴대와 조작이 간편한 카메라를 일컫는 용어인 < 포인트 앤 슛 >을 제목으로 한 영화는 포인트 앤 슛 카메라의 보급이 만들어낸 현상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매튜가 카메라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이 가진 호신용 무기와 방탄조끼를 보여주는 심약해 보이는 금발의 백인 남자의 모습은 앞으로 보게 될 혁명군 매튜의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작정하고 카메라와 함께 내전 중의 리비아로 날아간 이 사람을 좀 더 분석적인 태도로 바라보게 만든다. 감독은 매튜 반다이크의 인터뷰를 촬영하여 그것을 축으로 매튜의 푸티지를 편집했다. 인터뷰 도중 나타나는 계속 손을 씻는 그의 강박신경증은 감독이 택한 의미심장한 인물 묘사의 각도를 보여준다. 뉴스에서 보도한 매튜는 두건을 쓴 민주투사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찍은 영상 안에서 매튜는 그의 리비아행 뒤에는 정치적 동기에 앞서 여행 중 만난 친구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혁명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위험한 투쟁을 함께한 과정이 어땠는지를 보여준다. 미국에서 뉴스로 접한 리비아 사태는 그에게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소식이었고 그것이 그를 ‘남의 나라’의 민주화 투쟁에 자신의 일처럼 뛰어들게 만든다. 친구가 없던 그는 혁명의 현장성을 자신과 그들의 관계 맺는 모습을 중심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그 영상으로 완성한 마샬 커리의 영화는 어린 시절 어드벤쳐 영화의 주인공을 보고 꿈꾸었던 모험가 영화감독이라는 그의 소년적인 여정의 동기, 이제는 매우 정치적이 된 매튜 안에 계속 남아있는 심약한 강박증 환자의 모습, 그리고 그의 ‘비현실적인’ 행보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적잖이 당혹스러운 것이었다는 것까지 보여준다. 한 청년의 성장기이자 치열한 혁명의 기록이었던 푸티지는 이제 그 기록의 행위 자체와 주체를 바라보는 메타텍스트가 된다. 영화의 시작 부분과 말미에는 모니터를 통해 리비아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매튜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영화가 담고자 한 우리 시대에 팽배한 매체의 매개행위, 그리고 그를 통해 형성된 자아 인식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다. 그의 여정 전체는 성인 남자(manhood)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지금 그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민주투사이자 영화감독이다. 그의 이 새로운 정체성은 정확히 그가 꿈꾸던 것이자 그가 전에 갖지 못했던 지극히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것이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인 “그래서 진정한 남자가 되기 위한 이 훈련이 성공적이었나?”라는 감독의 목소리와 매튜의 반응은 이 시대의 ‘포인트 앤 슛’ 문화가 만들어낸 매개된 정체성의 허와 실에 대한 감독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