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집
- 감독
- 양병간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구윤희, 양병간
벤 휘틀리 감독이 한국에서 ‘유통’된 경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였다. 첫 소개는 2010년이었고, 그가 3만 달러로 8일 만에 만든 첫 장편 <다운 테라스>(2009)가 한국 관객과 만났다. 범죄 영화와 코미디가 뒤섞인, 영국 인디펜던트 코미디의 수작이었다. 두 번째 소개된 영화가, 바로 오늘 소개할 < 킬 리스트 >(2011)로 2011년 영화제 때 소개되었다. 2013년 17회 때 초청된 < 관광객들 >(2012)은 벤 휘틀리의 영화들 중 그나마 많이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부천 초이스 부문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앨리스 로우)를 수상했고, 이후 부가 시장에선 < 살인을 부르는 관광객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2014년엔 <필드 인 잉글랜드>(2013)로 다시 한 번 특유의 블랙 코미디를 선보였다. 호러 마니아가 아니라면 모두 낯선 제목들이겠지만, 벤 휘틀리는 현재 영국에서 가장 각광 받는 장르영화 감독 중 한 명이다. 호러, 스릴러, 범죄 영화, 코미디 등 ‘쎈’ 장르들 사이를 오가고 그 장르들을 결합하고 해체하면서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실소를 자아내는 풍경이며 동시에 끔찍한 지옥도이고 출구를 알 수 없는 악몽이다. 특히 < 킬 리스트 >는 장르라는 장치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그의 범상치 않은 재주를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다운 테라스> < 킬 리스트 > < 관광객들 > 영화가 시작되면 자막과 함께 음산한 음악이 흐르고, 원과 십자가와 삼각형으로 이뤄진 알 수 없는 의미의 기호가 그려진다. 아무래도 < 블레어 윗치 >(1999) 같은 호러나 < 조디악 >(2007) 같은 연쇄 살인마 스릴러가 이어지지 않을까 싶지만 싶지만… 영화의 첫 신은,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부부싸움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 하나. < 킬 리스트 >를 볼 땐, 이러한 갑작스러운 흐름에 절대 당황해선 안 된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제이(닐 매스켈)은 8개월째 실업 상태다. 사설 경호원으로 전쟁 중인 이라크에 있었고, 몇 년 전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스웨덴 여군이었던 아내 셸(미안나 버링)과 전쟁을 벌인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은, 7살 된 아들 샘(해리 심슨)이다. 갤(마이클 스마일리)은 제이와 함께 이라크와 키예프에 있었던 절친이다. 그는 새로 생긴 여자친구 피오나(엠마 프라이어)와 함께 제이의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다. 피오나는 인사과에서 해고를 담당하는 직원이다. 조촐한 파티는 주인집 부부의 말다툼에서 제이의 ‘깽판’으로 이어지지만, 이내 그들은 냉정을 되찾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갑자기 ‘블루스 타임’을 갖기도 한다. 이때 피오나는 제이의 집 화장실 유리 뒤에, 영화 도입부 자막에 나온 바로 그 기호를 그려 넣는다. 영화의 리얼했던 톤은 잠시 주술적이고 초현실적인 톤으로 바뀐다. 이후 영화는 제이와 갤이 맡게 된 임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들은 다소 수상한 의뢰인(스트루안 로저)에게 거액의 청부 살인 제안을 받는다. 첫 타깃은 신부(개리스 턴리). 솜씨를 보니 제이와 갤은 과거에도 이런 쪽 일을 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능숙하고 깔끔하다. 표식 두 번째 타깃은 어느 사서(마크 켐프너)다. 제이와 갤은 그 사서가 드나드는 창고를 뒤지다가, 그가 포르노그래피와 끔찍한 스너프 필름을 유통한다는 걸 알게 된다. 제이는 이상한 정의감을 발휘해, 사서를 필요 이상으로 참혹하게 살해하고 창고로 들어가 타깃이 아닌 사람들도 죽인다. 그렇게 1차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제이와 갤은 더 이상 일을 맡지 않으려 하지만 헤어나올 수 없는 덫에 빠진 신세다. 그들에겐 어느 하원의원이 세 번째 타깃으로 주어진다. 하원의원이 살고 있는 거대한 저택이 보이는 숲에 야영을 하며 잠복 중인 제이와 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지푸라기로 만든 가면을 쓴 그들은 마치 비밀스러운 종교의식을 치르는 듯하다. 제물이 된 소녀는 교수형을 당하는 것처럼 목이 매달린다. 이때 제이는 갑자기 나서서 그들에게 총을 쏘고, 삽시간에 제이와 갤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 와중에 갤은 죽고 제이는 가까스로 살아난다. 아내와 아들 곁으로 돌아온 제이. 하지만 그들은 그곳까지 따라왔고, 제이에게 섬뜩한 의식의 일부가 되기를 권한다. 벤 휘틀리 감독은 < 킬 리스트 >에 여러 장치를 만들어놓았지만 설명해주진 않는다. 만약 < 샤이닝 >(1980)이나 < 에일리언 >(1979)처럼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는 것’이 좋은 호러의 조건이라면, 그 목록에 <킬 리스트>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킬 리스트>는 수많은 질문을 만들어낸다. 청부 살인의 의뢰인과 갤의 여자친구 피오나가 속해 있는 그 이상한 집단의 정체는 무엇일까? 의뢰인이 죽여 달라고 부탁한 신부와 사서와 하원의원(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사이의 공통점이나 관련성은 있는 걸까? 제이와 갤은 과연 키예프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의뢰인이 그때의 일을 약점으로 잡는 걸까? 피오나는 왜 제이의 집 유리 뒷면에 그 기호를 그린 걸까? 신부는 왜 죽기 전에 미소 짓고, 사서는 왜 제이에게 고맙다고 하는 걸까? 혹시 그들도 이상한 집단의 일원인 걸까? 의뢰인은 왜 제이의 손에 칼로 상처를 내 피의 맹세를 한 걸까? 제이의 몸에 생긴 피부병은 무슨 징조일까? 왜 의사는 제이에게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걸까? 의뢰인은 무슨 의미로 제이와 갤이 ‘톱니들’ 같은 존재라고 하는 걸까? 그리고 제이의 살인 욕구는 어떤 이유로 점점 강하게 되살아나는 걸까? 영화 속에 던져진 수많은 단서들과 질문들. < 킬 리스트 >는 관객이 각자의 이론으로 이해해야 하는 영화다. 만약 의뢰인이 자본가를 상징한다면(게다가 피오나는 해고 담당 직원이다) <킬 리스트>는 두 명의 실업자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 죽이는 일에 고용된다는 스토리가 된다. 호러에 중점을 둔다면 제이는 피의 맹세를 함으로써 광기에 감염된 것이고, 그 결과 마지막에 처참한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피오나가 그린 기호는 죽음의 주술과도 같은 것이다. 혹은 제이와 갤이 과거에 이라크와, 특히 키예프에서 핏빛 살육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국 안에서 저지르는 짓들은 부메랑처럼 돌아온 죽음의 향연인 셈이다. 이런 해석들은 모두 틀릴 수도, 혹은 모두 맞을 수도 있다. 결국 관객은 범죄 영화와 오컬트 호러와 스릴러가 뒤엉킨 미로 속에서 낯선 체험을 하게 되며, 영화를 다 본 후에 “나는 혹시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건 아닐까”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다. 망치 살인 장면에선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향을 감지하게 하지만, 제이와 갤의 관계나 대화에선 영국 하층민들이 등장하는 켄 로치 영화를 떠올리게도 만드는 영화 < 킬 리스트 >. 벤 휘틀리 감독은 마치 닥터 프랑켄슈타인처럼, 접합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로 붙여내는 기묘한 재능을 보여준다. <킬 리스트>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기에 무서운 영화이며, 장르영화를 보면서 체험할 수 있는 극한의 악몽이기도 하다.
화창한 날이거나 무더운 날이었던 것 같다. 평소에 극장 나들이를 즐겨 하시지도 않았던 어머니가 왜 그날 극장에 가셨고 여러 영화중에서도 왜 그 무서운 영화를 혼자 골라 보신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직은 그런 영화를 볼 나이도 아니었을 여섯 살 혹은 일곱 살짜리 아들을 함께 데리고 간 것을 보면 우연히 보았건 의도적으로 보았건 극장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당신께서도 적잖이 무서웠던 건 아니었을까 짐작될 뿐이다. 그날에 대해서 훗날 물었을 때 어머니는 잘 알지 못하셨다. 하지만 나는 평생을 잊지 못했다. 그날 느낀 극장에서의 공포감을.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과 몇몇 장면은 잊히지를 않았다. 그것이 내 기억에 존재하는 나의 생애 첫 번째 영화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제목은 떠오르질 않았으니 답답한 일이었다. 그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0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회고전에서였다. 유년의 기억이 돌아와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박윤교 의 < 망령의 곡 >(1980)이었다. 대를 이어내려는 가부장적 재벌가의 강요로 젊은 새 며느리(점례)가 아이를 낳은 다음 세상을 떠나게 되고, 한 맺힌 그녀가 가문에 복수를 감행한다는 내용은 무섭지만 실은 상투적이다. 박윤교 는 ‘며느리’와 ‘한’만 있으면 공포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내는 감독이었으니 그의 영화 인생 후반에 속하는 이 영화의 내용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다. 또렷이 기억하는데 내게 공포의 근원지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실은 다른 두 가지였다. 점례의 관 위에 덮인 붉은 천, 그러니까 점례의 괴기한 출몰이 아니라 그녀가 죽어서 그 안에 있다는 걸 상상하게 하는 그 붉은 천이 참으로 두려웠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에 관한 나의 첫 번째 인식이었음은 훗날 돌이켜본 다음에야 알게 됐다. 영화 속 돌산의 풍경과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볼 때의 공포감은 그 관의 붉은 천 보다 더 강력했다. 죽기 전 며느리 점례는 마지막 소원으로 말하기를 제발 자신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그 부탁만 지켜졌어도 점례는 여귀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회장의 지시를 받고 점례의 관을 옮기던 회사쪽의 직원들은 그녀의 관을 그냥 회사 소유의 개발부지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매장해버린다. 점례가 여귀가 되어 돌아오자 직원들은 그녀의 관을 다시 찾으려 하는데 그 관이 묻힌 위치를 알 길이 없다. 이미 땅은 개발의 초입에 들어서 전부 파헤쳐져 있고 사방에는 돌과 붉은 흙만 널려 있을 뿐이다. 직원 한 명이 점례의 관을 찾으러 그 돌산을 헤매다가 하필이면 발파 장소에 이르러 다이너마이트의 폭파와 함께 몸이 산산조각 나던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끔찍했다. 유년 시절에는 그 장면이 이유 없이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너무 의미심장하여 음산하다. < 망령의 곡 >의 한은 양지 바른 곳에 소박하게 묻히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황폐한 돌산 그 아래 묻힌 자의 한이다. <망령의 곡>의 여귀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 때문에 찾아왔다. 개발 독재 안에서만 가능했던 그 돌산의 살풍경은 오래도록 잊기 힘든 것이었다. 다른 방식으로 박윤교 와 < 망령의 곡 >에 관하여 조금 더 덧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망령의 곡>이 박윤교의 가장 큰 흥행작 중 한 편인 것은 알려져 있다(그러니 극장에 잘 가지 않던 가난한 아기엄마까지도 극장으로 불러들였을 것이다). 몇 장면에서 두드러지는 어딘가 투박하지만 단호한 플래시백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플래시백의 경험치를 놓고 역으로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어떤 장면 효과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와 무속과 기독교를 고루 개입시키는 전략 및 저예산 공포영화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한 셋트와 로케이션의 활용도 말할 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장르영화의 노림수를 넘어서는 진짜 죽음의 기운이 어느 때부터인가 감돈다. 그것이 전적으로 의도적이고 능숙한 연출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할 길 없는 시대적 반영에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어처구니없이 강력하고 위태롭고 돌이킬 수 없는 전멸적인 결과로서 도처에 널린 죽음의 기운들. 그 기운들이 <망령의 곡>에 떠돈다. 인과응보에 해당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러므로 사족에 불과하다. 박윤교 의 < 망령의 곡 >이 비범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망령의 곡>은 마치 마리오 바바의 어떤 저예산 B급 공포영화가 그러하듯이 영화 내내 조악하다가 한 순간 심연의 무엇을 길어 올리는 경험을 전한다. 그것이 나의 미숙한 유년의 기억에 빚진 착각일지라도 나는 그 조악함이 불러들인 음산함에 원초적 힘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참으로 일찍이 죽음에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이 영화를 내 생애 첫 번째 영화 혹은 나의 첫 번째 길티 플레저로서의 걸작이라고 말해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