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싱글맘
- 감독
- 문정현, 이민희, 오은정, 이숙애
- 제작년도
- 2006
하라 카즈오 감독이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선배 감독들로부터 배웠다”고.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신작 <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했던 말이다. < 극사적 에로스 >(1974), <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1987) 등을 제작한 일본의 대표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대담은 이렇게 시작했다. 올해 72살인 그는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영화를 제작했고, 이 대담을 준비하며 다시 보게 된 그의 전 작품들과 최신작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 대한 나의 단상을 기술하려한다. 수년 전, 외국의 여러 감독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하라 카즈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중 한 감독이 그의 영화 <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를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하라 감독은 여전히 오쿠자키 겐조 같은 사람을 수년째 찾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음으로 이 말에 반응했다. 추측컨대 당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물 중심의 영화만을 제작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이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등장인물에 큰 비중을 두거나 혹은 이에 크게 의존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배경으로, 주체적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 극사적 에로스 >(1974)의 주인공 미유키가 그랬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며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지는가 하면, 전쟁의 굶주림 당시 인육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처벌한 상관을 찾아가는 <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1987)의 오쿠자키 겐조는 다큐멘터리영화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주인공일 것이다. 요즘은, 같은 인물을 보인다 하더라도 마치 제작자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는 전제, 혹은 그러한 태도를 견지한 채 시적인 혹은 에세이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하고 이를 통해 어떤 정서를 전달하려는 영화들이 다수를 이룬다. 특정 등장인물을 통한 이야기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형태의 영화들이 다수이다. 그리고 이 폐쇄적인 혹은 경직됨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의 묘사가 그 인물과 분리된 채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흐름이라면 하라 카즈오 감독의 인물들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과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더불어 그가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은 촌스럽거나 혹은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서사구조로 읽히기 쉽다. 그래서인지 주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나에게 하라 카즈오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큰 질문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상의 이야기를 위해서 대상을 대상화하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식으로 영화의 대상들과 관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이야기의 소재나, 문제의식,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재현방식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과연 내 이야기를 위해 대상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대변자 역할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 기록영화 감독은 결국 인물들의 이야기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는가?’ 등의 고민들은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등장인물의 대상화 문제는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고 싶은 문제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지루하고 재미없다. 나는 그 지루함을 날려버릴 만한 인물을 찍고 싶다” 재미없는 일본에는 뭔가 충격이 필요하다, 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을 선택하고 그려낸다. 먼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의 카메라, 카메라 뒤의 그, 그리고 카메라가 가지는 권위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찍고 찍히는 사이의 대등한 관계, 혹은 찍고 찍힌다는 계약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동지적 관계가 아닌 계약관계에 있는 이들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탐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일본 사회, 혹은 이를 지탱하고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폭력적인 상황들과 부조리함을 영화의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는 이 주적을 정면으로 향해있지 않다. 오히려 이 주적과 치열한 갈등 관계에 있는 등장인물들을 대면한 채 제작자와 계약관계에 있는 그들의 내부 모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누구나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불확실한 무엇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부 모순의 실체를 추적해가는 과정에, 인물들과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결국 감독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불확정적이고 심지어 모호하기까지 한 하라 카즈오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들을 정의하는 공간과 시간의 현재화된 사회적 문제가 큰 질문으로 다가오게 된다. 영화를 제작하다 보면 여러 질문들과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메시지를 잘(?) 숨겨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다. 나에게 창작이란 바로 이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위해 등장인물이나 사건/상황을 정면 돌파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매우 수줍거나 수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 <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는다. 러닝타임인 3시간 30분 내내 시종일관 과감하게 정면 돌파다. 영화는 고도의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석면의 유해함을 숨기고 무책임함으로 일관했던 일본 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오사카 센난 지역 석면 피해자들에 대한 11년의 투쟁기록이다. 보통이라면 피해자들의 아픔과 현실을 그리고 이 싸움의 절심함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국가권력의 폭력을 논리적으로 추적/고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각각의 인물들에 집요하게 집중한다. 처음으로는 이 싸움을 대하는 각 개인의 생애사가 들려진다. 이어서 이 싸움을 대하는 피해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을 한다.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가 하면, 석면 피해 당사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던 가해자이기도 하며, 다소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투쟁지도부의 모습, 과격시위를 반대하며 법과 원칙을 지키자는 변호사들, 형식적인 정부의 사과를 눈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까지,,, 생동하며 충돌하는 내부의 이야기가 긴 투쟁의 역사와 함께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이는 11년의 투쟁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을 자극하고 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쟁을 불사하는가 하면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논쟁유발자로서의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런 영화적 장치를 통해 고통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들이 왜 이러한 내, 외부의 갈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 등, 그 근원의 질문을 갖게 되고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던 일본의 석면 기계들이 한국에 들어와 같은 방식으로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고 현재 인도네시아로 넘어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자본과 국가 시스템의 역겨움에 분노하게 된다. 인물 중심의 영화가 지엽적이고 뻔할 것이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그 영화가 인물 중심의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물의 깊이에 다가갈 용기, 다시 말해 세상을 논쟁하고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주류질서를 부정하며 절대 진리라 여겨지는 세상의 많은 현상과 사유방식을 부정했을 때 만들어지는 존재의 모호함, 이는 새로운 질문들의 시작이 된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과 그 다양함, 그리고 그 심연의 ‘희,노.애.락’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그려낸 하라 카즈오 감독의 영화가 이를 증명해줬다. 부산국제영화제 대담을 준비하면서 큰 기대를 가지고 20여 가지 이상의 질문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채 1시간가량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청년의 에너지를 넘어서는 기운이자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영화제작 스타일을 신뢰하고 강하게 애정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과의 만남은, 현실 제작환경의 어려움과 삶의 비루함 앞에서 언제나 모종의 타협을 생각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12년째 기록하고 있다는 감독님의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에 대한 다음 이야기가 더더욱 기다려진다.
간혹 극영화 감독들을 만나면 반복해서 듣는 소리가 있다. “제가 어떻게 다큐를 하겠어요?”, “다큐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 생각해요. 저는 절대 못 해요”, “죽기 전에 꼭 인생의 다큐 한 편 만들 거예요” 등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하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다큐멘터리 영화 혹은 다큐 제작에 대한 커다란 사회적 의미 그리고 제작에 임하는 작가윤리를 의식하는 듯하다. 마치 다큐를 만드는 사람은 거짓말도 못 할 것 같은 사람, 사회적 정의로 가득 차 있거나 이를 위해 기록 대상과 함께할 수 있다는 신념과 성실함이 필요조건인 것처럼 생각되는 듯도 하다 이런 대화는 “항상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이야기로 끝이 나곤 하는데, 그리고 나면 “나는 다큐하기에 괜찮은 사람인가? 이건 뭐지?”,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매번 ‘하, 그렇지 않은데’, 하며 부끄러워진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다. 타 예술 장르와 다르게 다큐멘터리에는 왜 이런 정치적 올바름, 역사의 정의와 진보에 대한 작가의 신념, 피사체에 대한 시선이나 태도 등 도덕 혹은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그리고 작업, 작가 윤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해 본다. 2017년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된 김성은 감독의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위의 고민에 어떤 답들을 제시하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감독은 연출 의도에서 “방문자에서 연대자로 그리고 이주민으로 변해온 내 시선이 반영된 영상을 기록하려 했고 그것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라고 말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저항의 시간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강정마을 주민들과 이 투쟁에 함께하는 활동가들의 삶과 기억들을 성찰, 기록해내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다른 한 축으로는 제주 4.3사건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땅 인민들에 대한 국가폭력의 역사-늘 그렇듯이 어느 투쟁지역에서나 국가권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의 논리를 폭력적으로 관철시킨다-를 기술해낸다. 매번 절망과 희망 없음을 확인하면서도 또 함께 일어나 서로 의지하며 일상의 평범한 권리를 위해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이에 감독은 “어떤 폭력이나 각자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깨려고 할 때,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지만 이걸 이겨나가는 힘 하나하나, 한순간 한순간이 바로 평화다”,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을 지켜냈다. 그들은 정당했다”, 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도 없는 시간, 역사 속에서 잊힐, 하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간,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복원해야 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스물다섯번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많이 아팠을 시간과 사람과 자연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으며 한판 위령굿을 보내는 듯도 하다. 현장이다. 이와 같은 감독의 성찰과 깊은 사유는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우게 되는, 대상들의 구체적인 삶의 역사와 그 언어에 기인할 것이다. 제작, 작가윤리라 함은 정형화된 특정 의식 혹은 갖춰진 어떤 시선이나 태도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경험하게 될 세계의 윤리, 그리고 그 충돌에서 생겨날 긴장이자 진동일 것이다. 현장에서 함께 하는 다양한 삶의 이해들이 감독의 질문이 되고, 이러한 감독의 질문들을 통해 영화적 진실을 함께 찾아가는 그 긴 여정 어딘가에 기록의 의미가 위치할 것이다. 영화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그래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어떤 특정 유형의 사람들만 다큐를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계를 대면할 작은 용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안을 수 있다면, 끊임없이 나를 분열시키고 되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다큐멘터리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생명과 평화에 대해, 그리고 함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적 시간을 거치고 나서 나와 우리 이웃의 부조리함을 내 안으로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큰 성취가 있는 영화이다.
김태일 , 주로미 감독의 < 올 리브 올리브 >는 팔레스타인의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야 했던 1세대의 이야기가, 인티파다(민중봉기)와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2, 3세대의 이야기가 그들의 일상생활과 함께 들려진다. ‘민중의 세계사’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거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민중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역점을 둔다. 1948년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들의 땅에서 쫓겨나기 시작한 시점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분쟁의 시작이 아주 먼 과거의 일처럼 생각된다. 마치 우리의 한국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의 역사가 태곳적 일처럼 느껴지듯 말이다. 게다가 이 폭압의 역사가 팔레스타인 인민들에게는 일상의 비극일진데, 마치 내가 이 이슈를 기사나 뉴스로 접했을 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내 조부모, 부모, 혹은 내가 경험했던 동시대의 이야기가 먼 시간의 일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본질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그 표면의 이슈들만 주입하는 부르주아 미디어에 익숙해진 우리는 대규모 전투와 학살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자살폭탄 현장에서의 절규나 어린 난민의 슬픈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한 그들의 고통에 무감해진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치 매김 할 수 없는 올리브 나무를 베는 행위보다는 누군가 극적으로 총에 맞아 죽고, 슬퍼하고 절규하는 이미지에 분노하려 나를 준비시킨다. 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미지들에 피로해진 우리의 감각들은 결국 평범한 인민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특별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한다. 비이성적이고 명백한 부조리함 앞에 “알아, 그렇지만 나도 힘들어, 항상 그랬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고 그 안에서 듣지 않으려 귀를 닫고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결국 전쟁과 가난에 죽어가는 사람들, 폭압 자본의 고된 노동에 고통스러워하는 인민들과 목숨을 걸고 경계를 넘어서는 수많은 난민들은 내 지각에서 멀어지고 남의 일이 된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현재하는 이야기들을 과거 오래전부터 있었던, 내가 어찌해도 바뀌지 않는 무엇으로 자리 잡게 한다. 그래서인지 1999년 가자지구에서의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2009년 이스라엘 야파(텔아비브)에서 “자기 땅을 들어와 보지 않는 한 아무것도 알 수 없을 것”이라 웅변하던 팔레스타인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만남도 나에게는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선물 받았던 팔레스타인 음악 CD는 여전히 내가 즐겨듣는 음악이며 소장품 중 가장 소중한 선물임에도 말이다. 대상 없는 평화를 이야기하며 실체 없는 자유를 외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시간과의 단절, 기억과의 단절에 대해 생각해 본다. 땅이다. 삶의 근간이 되는 땅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이들은 땅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자신들의 터전에서 이유 없이 쫓겨났을 때도, 근거 없이 매일 매일 그 점령지를 넓혀가고 있는 이 폭력적인 상황에도 돌아가고 싶고 지키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땅이다. 높이 8m 총길이 720km의 폭력적인 장벽에도 이들이 지키고 싶은 것은 대대로 노동하며 살아왔던 이 땅이다. 지붕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야 하는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언젠가는 평화롭게 숨 쉬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땅이다. 단절된 시간과 기억들을 품고 있는 지켜져야 할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이 지켜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영화 < 올 리브 올리브 >는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우리의 ‘무관심’으로 지금도 파괴되고 있는 땅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다. 대항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각 개인들의 삶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공명하기 위해 우리 안 고단함의 실체를 인정하고 치열한 성찰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내 안팎의 신화를 해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들음을 통해 지워졌던 시간들과 기억들을 복원해야 한다. 영화 < 올 리브 올리브 >는 들어주는 영화다. 이 영화적 실천이 내 주위의 ‘점령’들을 직시하게 한다. 듣고 공감하며 함께 하는 것, 우리가 이 땅의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시작이다. 결국 기억에 대한 싸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