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명
- 감독
- 김대철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김지은, 박혜진, 문예은, 최창준, 이정비, 이다혜, 김미경
1937년 벽두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아등(我等)의 서(書)」 1 라는 제목으로 실린 공개서한은 식민지 조선 대중의 자본주의적 욕망과 문화적 욕구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자료로서 그동안 자주 언급돼 왔다. 이제는 너무 익숙한 제목과 내용이지만, 이 공개서한을 다른 맥락과 겹쳐 읽는 것으로 이 글의 서두를 열고자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공개서한에 연명한 이들은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 기생 오은희, 한성권번 기생 최옥진,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ᄲᅡ- <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 여우(女優) 오도실, 동양극장 여우 최선화”이다. 한 명의 남성과 일곱 명의 여성. 일곱 여성들의 직업은 마담, 기생, 여급, 여배우로 그들은 모두 근대 도시의 유흥과 여가에 종사한다. 공개서한의 수신자는 부임 3개월째를 맞는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이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도발적인 제목과는 달리 “미쓰하시 경무국장 각하여”라며 공손한 어투로 시작된 서한은, ‘댄스홀’이 문명 도시를 가늠하는 상징적인 기준이며 ‘댄스’가 얼마나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인지를 극도의 존칭과 경어를 사용하며 조목조목 설득한다. 여기서 경무국장에 대한 존경과 자신들에 대한 겸양은 다소 과도할 정도인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이 공개서한은 경무국장에게 보내는 진지한 호소라기보다 경무국장에게 ‘댄스홀’ 허가를 요청하되 그 결과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의미 없는 메시지’임을 과시하는 ‘넌센스(nonsense)’다. 식민 도시 경성에서 벌어진 이 ‘넌센스’는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 누구도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수신자인 ‘미쓰하시 경무국장’조차 이 공손한 서한에 공식적으로 화를 내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경성의 모든 풍속에 대하여 취체의 책임이 있는 경무국장으로서, 그는 통제의 대상인 공개서한의 발신자들―끽다점, 권번, 바, 레코드, 흥행업 종사자들―과 《삼천리》의 독자들이 구성하는 공감 속에서 기실 유머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미쓰하시는 원래, 1936년 8월 조선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 총독이 소위 ‘동아 정국’, 그러니까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한 정간된 상황에서 경무국장으로 임명한 인물이었다. 일본의 청년 장교들이 천황의 친정을 명분으로 쿠테타를 일으켰던 5.15 사건 이후 점차 짙어졌던 군국주의 기운이 조선에도 여파를 미치던 시점에서, 경무국장에게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내용의 서한을, 그것도 경성에서 술과 노래와 음악과 연기를 업으로 하는 이들이 보낸다는 것 자체가 당돌한 일이리라. 그렇다면 이 넌센스는 그저 의미 없는 농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이들이 놓인 권력의 위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긴장을 돌발적으로 노출한 사건일 수 있다. “만주사변 직후에 우가키 전(前) 총독은 서울 있는 신문 기자를 향하여 국가 비상시에 딴스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만주사변은 모다 이제는 평정하게 되고 평화의 기상이 세상에 차고 있지 않읍니까”라는 호소는 일본과 조선에서 ‘비상시(非常時)’라는 말이 다시 유행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도쿄에서도 댄스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던 터에, 식민지의 도시 경성에 댄스홀이 허가될 리 없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근 8년간은 ‘전쟁의 시대’이자 ‘총동원의 시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삼천리 방방곡곡에 ‘총동원 체제’가 가동되고 ‘비상시’가 장기화됨으로써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인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1937년 벽두 ‘댄스홀을 허하라’는 이 느닷없는 호소문의 넌센스는 ‘비상시의 상시화’라는 상황적 아이러니에 대한 예보, 비상시의 일상에서 수도 없이 발생하는 ‘의미의 과잉’과 ‘무의미의 의미’에 대한 예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시가 아니다’라는 이 단순한 의미의 ‘비상시(非常時)’는, 1937년 이후 보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전시기(戰時期)’나 ‘전환기(轉換期)’, ‘신체제(新體制)’ 등과 계열을 이루게 된다.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미 유행했던 ‘전환기(轉換期)’라는 표현이 어떤 혼란이나 불안을 내포한 것이었다면, 1940년 제2차 고노에(近衛)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걸었던 ‘신체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전시체제에서의 선명한 수행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비상시’는 이러한 ‘전환기’의 불안과 ‘신체제’의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동시에, 통치 주체로 하여금 전시에 발생하는 그 어떠한 제도적 폭력과 비합리성도 정당화하면서 아무런 기약 없이 정상화를 유예할 수 있게 하는 주문과 같았다. ‘비상시가 상시화’되고 사회의 전분야가 전시체제로 재편되는 가운데, 식민지 조선의 각 주체들은 지역별(도시와 농산어촌), 직능별(노동자, 농민, 지식인, 문인 등등), 젠더별(‘청년’, ‘소국민’, ‘총후부인’ 등)로 자신이 어떻게 ‘봉공(奉公)’하고 ‘보국(報國)’하는지를 전시했다. 주체들의 이러한 자기 전시 혹은 자기 증명은 전시체제 속에서 ‘진술적인(constative)’ 언어들이 ‘수행적인(performative)’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과 겹쳐지기도 한다. 예컨대, ‘나는 총후부인이다’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진술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참과 거짓의 판단과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총후부인 되기’를 선언하는 것으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고 수행하는 실천을 동반하게 된다. ‘봉공(奉公)’이라는 말이 함축하듯이, 이때의 ‘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며 ‘나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비상시의 ‘국민(國民)’이라면 심지어 먹고, 마시고, 입고, 잠자는 것까지 일상의 매순간을 국가와 연관지어야 하며 ‘비국민(非國民)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공중(公衆) 앞에서 과잉된 언어와 제스추어로 자기를 전시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사회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의 원인이 ‘비상시’로 수렴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의 문제도 ‘비상시’라는 말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한 ‘비상시’의 일상 속에서 이 수행적 언어들이 갖는 동원의 효과는 어디까지였을까. 전쟁이 장기화되고 비상시가 더 이상 비상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것이 시국(時局)과 연관되어 있는 한편으로 그 시국의 긴장감은 둔화되어 버린 순간, ‘신체제’니 ‘봉공’이니 ‘보국’이니 하는 말이 어떤 감흥도 없이 상투어처럼 내뱉어지는 순간, 이러한 순간순간들에 ‘비상시’는 필연적으로 ‘의미의 과잉’이나 ‘무의미의 의미’를 낳는 것이 아닐까. 전시체제하 개개인의 신체가 일상적으로 국가적 의례와 결부되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국가와 결속시키는 그 순간순간들에서, 의미의 충만을 넘어선 과잉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전도(顚倒)를 초래하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는 가장 ‘숭고한 것’이 가장 ‘통속적인 것’이 되고 ‘비속한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 뒤집히는 상황이다. 그림1. 「극장에 늘어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준다면」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2쪽 그림2. 「악극단」 출처: 《신시대》1941년 5월호, 180쪽 중일전쟁 발발 이후 식민 도시 경성의 극장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어트랙션(attraction)’은 ‘비상시’가 초래한 넌센스의 상황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메인 프로그램에 부수적으로 편성된 쇼를 일컫던 어트랙션은, 당시 경성에서 연극이나 영화와 거의 맞먹을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여 때로는 연극과 영화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1930년대를 지나며 담론화되었던 ‘도시=소비/농촌=생산’의 이분법적 구획이 전시체제기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한편에서 도시에 집중되었던 극장을 농산어촌, 공장, 광산 등의 생산지대로 확산시키는 ‘이동극장’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숙(自肅)’과 ‘내핍(耐乏)’이 강조되는 사회적 분위기라고 해서 전쟁 전에 이미 팽창해 있었던 문화적 욕구들이 경성의 극장가에서 아주 사그라진 것도 아니었다. 중일전쟁의 영향으로 서양영화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던 시기 프로그램의 공백을 메워가던 악극과 어트랙션이 전쟁의 장기화와 더불어 점차 프로그램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된 상황, 그리고 그 버라이어티 쇼가 반서구 정책에 의해 부정되었던 ‘재즈(Jazz)’나 ‘양풍(洋風)’을 풍부하게 접속할 수 있는 장소로서 위치된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근대의 극장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 있었지만, 철저하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경무국장에게 보내는 我等의 書」《삼천리》1937년 1월, 162~166쪽. ‘친일’과 ‘반일’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시기의 다채로운 풍경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김진송의 저서―『현대성의 형성: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현실문화, 1999)―가 이 공개서한의 제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은 상징적이다. 2) 이 공개서한은 일본의 시인 사토 하치로(サトウ・ハチロー, 1903-1973)가 만주사변을 전후한 시점에서 발표했던 ‘넌센스’들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소설가, 수필가, 동요 작사가 등으로도 활동한 사토는 방탕과 기행을 일삼았다고 전해지는데, 단편집 『아사쿠사(浅草)』(素人社, 1931)는 특유의 넌센스가 넘치는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 「경시청감에게 드리는 글(警視総監に与ふるの書)」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바, 어쩌면 이서구는 공개서한의 제목을 구상하며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토 하치로의 넌센스와 관련한 아이디어는 미리엄 실버버그의 『에로틱 그로테스크 넌센스―근대 일본의 대중문화』(강진석·강현정·서미석 옮김, 현실문화, 2014)에서 얻었다. * 상단사진 1.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댄스홀을 허하라」기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雙Q生「[거리의 수첩] 애트랙슌론(論)」《조선일보》1940년 6월 27일자, 4면. 흥행업자들에게 있어서 일 년 중 네 절기에 있어서 여름 같이 또 싫은 『씨-즌』은 없다. 우선 더워서 사람이 안 들어오니까 짐이고 낭패다. 그러나 그렇다고 여름철만 어떻게 극장 문을 닫아버리고 그야말로 무슨 학교나 그런 곳 같이 ‘하기휴가’를 할래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위 요즘에 하나의 유행 같이 횡행하고 있는 『애트랙슌』인 것이다. 지금 서울서 우리가 『써-비스』 받고 있는 『애트랙슌』이란 얼른 말하자면 영화를 보고 또 거기다가 덤으로 노래나 춤을 공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애트랙슌』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의에 견주어보아서라도 어디까지나 가볍고 명랑하고 즐거워야 한다. 한다가 아니라 했으면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저 우리들로서는 뭐가 무엇인지 이해키 어려운 것을 가져다가 그저 아쉬운 대로 『애트랙슌』이란 딱지만 붙여 내놓는다면 이거야말로 『애트랙슌』으로서는 낙제하지 않을 수 없을 비참한 『애트랙슌』이다. 그야 사람에 따라서는 그 사람의 취미나 교양에 따라서 영화보다도 『애트랙슌』에 끌리어 단순히 그것만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러한 관객이 하나라도 는다면 느는 그대로 극장으로서는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여튼 이 점에서 영화상설관은 연극상연단체나 극장보다는 유리하고 편리하다. 반대로 극단이나 연극만을 상연하는 극장은 그야말로 선전 『발류-』(value)가 찬란한 『애트랙슌』이 없이는 이 여름 한철을 무난히, 다시 말하면 결손 없이 돌파하기는 힘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화상설관에서는 『애트랙슌』이라는 미명 아래 값싼 오락물을 질서 없이 덤 주듯 한다면 이 역시 단순히 『애트랙슌』만을 보러 가지 않는 우리로서는 할 이야기가 과연 많을 줄 안다. 그것은 불평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항의도 될 수 있다. 2. 요시무라 고도 * 씨 담(談)「전시(戰時)의 생활 이대로 좋을까④ / 극장 앞에 늘어선 풍경 아메리카풍의 재즈와 레뷰 환영은 국민의 수치」《매일신보》1942년 1월 21일자, 4면. 생활에서 영미 양풍을 쫓아내자 총후를 명랑케 하는 수단으로서 건전한 오락을 건설하는 것은 국민을 위하여 국가에서 대단히 생각해온 바입니다. 시국과 관련하여 그처럼 건전 오락이 특별히 문제가 된 것은 지금까지의 오락이 건전치 못했던 때문이올시다. 그럼 지금까지의 오락이 왜 건전치를 못했나 하면 그것은 그 오락이란 것이 근대의 그 개인주의와 향락주의의 소산으로서 대개가 국민의 생활과 떠나서 순전히 향락적인 것으로 퇴폐해 갔기 때문이올시다. 만일 그 오락이 무슨 생활과 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도시의 유한(遊閑)한 젊은 남녀의 소비적인 향락 취미 생활에 뿌리를 박고 있었을 뿐일 겝니다. 그러니까 국민의 전체 생활로 보면 아무 관계없는 오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락이 저급해지고 타락이 된 데는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아 온 여러분의 오락 취미가 그렇게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네가 자기의 취미를 돌아보면 잘 아실 겝니다. 극장에서 그 아메리카 풍의 재즈라든가 경박한 레뷰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극장 앞마다 장사의 진을 치고 젊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서 몰려섰는 풍경은 이 시국에서 가장 보기 창피스러운 풍경의 하나인 줄 생각합니다. 이번 대동아의 전쟁이 되면서부터 당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통제를 하고 지도도 해서 일반 악극 단체에서도 많이 자숙해져서 이른바 악극에서 아메리카의 요소를 뽑아버리려는 노력도 있고 해서 퍽 색채가 달랐지만 근본 문제는 그 문제보다도 여러분 자신들의 오락에 대한 취미문제올시다. 여러분의 오락 취미로선 아직도 그런 아메리카의 경박한 향락적인 레뷰나 재즈를 좋아하는 경향이 마음에 남아 있다고 하면 이것은 국민으로서의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요, 또 자신네의 오락의 취미로서도 여간 부끄러운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면에서 영미의 요소를 조사해가지고 청산해 버려야 할 이때에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부분인 오락의 취미에 아직도 미국 같은 곳의 저급한 오락을 환영하는 경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것은 당국이나 지도 측에서 노력하고 지도할 점도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여러분 자신이 자진해서 깨닫고 오락에 대한 건전한 취미를 길러 가시기를 바랍니다. [강조는 원문]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동했던 박영희(1901∼?)의 창씨명.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은 부재했고 식민지배의 역사적 책임은 온전히 제기되지도 못한 채 ‘경제난 해결’이라는 미명으로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에 협상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태평양 냉전 질서 아래서 종용된 화해였고 굴복이었다. 그 결과 국민적 반발은 극에 달했고, 1964년 4월에는 박정희 정권을 탄생시킨 ‘민족적 민주주의’가 기만적인 구호였음을 폭로하는 ‘화형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6.3 학생운동으로 확대된 시민적 저항은 결국 위수령과 계엄령이 발동되면서 진압되었는데, 협정이 체결된 7차 한일회담은 그와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열린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한일협정은 ‘굴욕외교’, ‘구걸협상’으로 표상되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이 가질법한 분노와 울분이 투영된 현실인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는 신(新) 식민지적 종속 관계를 예기하는 모종의 불안과 두려움도 함께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지점은 일본에 대한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정서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잉여, 혹은 복합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식적인 민족 서사의 문법과 달리 대중문화를 매개로 사적영역에서 작동하는 일본에 대한 정서는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 역사를 안고 있는 민족의 근본적인 비극은 헤게모니를 지닌 식민국의 문화적 감성을 향수(享受/鄕愁)하게 된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은 이러한 대중의 부인된(disavowed) 욕망을 기민하게 포착해냈다. 거리의 가판대를 메운 ‘왜색잡지’와 다방에서 들려오는 일본 대중가요는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일본을 우선 알고 거기에 대처할 민족적 주체성 확립해야 한다”는 논리는 “노도처럼 밀려들어와 우리의 말초신경을 간지럽히는” 1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 금기와 선망이 착종된 양가감정의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영화계에서는 한일친선과 문화교류 문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된다. 물론, 일본영화 수입과 한일 합작영화에 기대를 거는 측은 외국영화 수입업자들이었다. 방화제작자들은 일본과의 합작영화는 미끼일 뿐이며, 이를 통해 일본 자본이 국내 영화제작계에 유입되면 한국영화는 일본의 영화산업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편, 정책당국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국민감정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 정서에 기대어 일본대중문화에 대한 통제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1965년에 내려진 <동백 아가씨> 방송금지 조치는 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수입업자의 입장에서는 일본영화 수입이 개방되면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이 분명했기에 자신들의 뜻을 인적교류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했다. <잊지 못할 모정(Typhon sur Nagasaki, 1957)>를 수입 배급했던 세기상사는 누구보다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행위 주체였다. ‘한국영화’ 최초로 일본배우가 캐스팅되어 논란이 되었던 <총독의 딸>(1965)은 세기상사가 제작한 영화로 제작단계에서부터 공보부와 마찰을 빚었다.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촬영을 진행했고, 결국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있다고 하여 정책당국이 일본문화를 전적으로 배척할 수는 없었다. 일본과의 수교를 맺은 박정희 정부로서는 자유아시아의 우방이자 이웃으로서 일본과의 친선과 우호를 강조해야 했기에 한편으로는 교류의 방식과 정도를 제시해야 했다 2 . 이와 같이 일관된 원칙이 작동될 수 없는 틈으로 일본영화계와의 교류를 시도하려는 기획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제작의 측면에서는 일본과의 인적 교류와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해나갔다면, 외화수입의 측면에서는 일본인 배우가 출연한 서구 영화를 수입 상영함으로써 일본을 금지하는 제도적 기준을 완화시키려 노력했다. 일본영화에 대한 문화적 금기의 핵심은 배우였다. “제작신고에는 일본에서 필요한 장면만 찍겠다”고 로케이션 촬영 승인을 받은 뒤 현지에서 일본 배우를 출연시킴에 따라 촬영중지를 통보 받은 <고안>(최무룡, 1966) 3 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의 공보부의 입장은 “로케와 일본인의 기술지도는 무방하나 일본배우의 출연은 아직 허가할 수 없다” 4 는 것이었다. 일본 배우의 출연은 외국영화를 수입하는 데도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1965년 MGM에서 제작한 <8월15야(夜)의 찻집(The Teahouse Of The August Moon, 1956)>의 경우,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에 출연하여 국제적인 인지를 얻은 교 마치코(京マチ子)를 비롯하여 다수의 일본 배우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수입추천을 승인 받지 못했다. 이후 세기상사는 진정서를 제출하며 지속적인 민원을 통해 수입 및 상영 허가를 취득하게 된다.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인데, 심의 서류에는 세기상사가 자신들의 기획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일수교의 논리와 검열행정의 내적인 일관성 그리고 상영보류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거론하여 행정당국을 압박하는 정황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브 샴피(Yves Ciampi)가 연출한 <잊지 못할 모정>은 1957년에 제작된 영화로 나가사키의 조선소에서 일하는 선박 기사 말샤크(Jean Marais)와 노리코(기시 게이코, 岸 惠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어 왜색시비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영화를 수입한 뒤 1966년에 상영 허가 신청을 접수한다. 1966년 시점에서 외화 수입과 상영 과정은 크게 1.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절차, 2. 상영허가 승인 절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하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소장 중인 <잊지 못할 모정>의 심의 서류를 중심으로 수입과 상영 과정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1. 외국영화수입추천허가 1962년 1월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영화업자는 외국영화를 수입‧상영하기 위해서 공보부에 ‘외국영화 수입추천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승인을 얻어야 했다. 영화 시장에서 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고, 이들 영화가 야기하는 사상과 풍속의 문제 또한 컸기에 영화검열 행정에서 외화수입을 통제, 관리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1956년 문교부에서 영화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우수영화 포상제도로 외국영화수입 쿼터를 배정하면서 정부는 보다 효율적으로 외화 관리를 할 수 있었는데, 5.16 이후 검열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외국영화에 대한 ‘수입추천허가절차’가 신설되었다 5 . 이는 수입된 외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는 의미가 있으나 수입업자들은 사전검열의 형태로 ‘수입추천허가’를 받아야 했다 6 . 수입추천을 받기 위해 영화수업업체는 영화 제명 및 원제, 제작주체, 필름종별 및 규격, 권수, 판권대금과 같은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를 담은 ‘허가신청서’를 비롯하여, 영화의 원문 대본 1통과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 요청 서류들을 구비하여 공보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절차가 제한과 통제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국영화 수입과정은 외환관리법을 비롯하여 통관절차에 따른 관계 법령을 준수해야 했기에, 공보부는 상공부, 서울세관, 외환은행과 긴밀히 협력하며 통상에 필요한 절차를 일원화하여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검열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근본적으로 통치 합리성을 제고하려는 국가 이성의 산물인 만큼, 개별 텍스트에 대한 검열과정은 일반 행정업무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입추천단계와 관련된 서류들은 아래와 같다. 1) 외국영화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제출(1964.9.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허가신청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1964년 9월 10일 공보부에게 영화수입추천 허가를 위한 신청서를 제출한다. 신청인은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 유성엽이며,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1964.9.14.)하여 공보부의 승인을 받았다.(1964,9.15.) 신청서에는 영화의 제작 정보만이 아니라 종별(천연색, 와이드스크린)과 규격(35mm, 12권, 3편) 및 판권대금(US $4,000)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영화필름과 원문 대본 1통(번역문 포함), 국문 대본 3통 그리고 수입면장 및 기타자료를 첨부했음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리버티상사와 체결한 계약서 사본과 영문으로 된 전신(cable), 그리고 외화수입쿼터 배정서와 각서가 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전신을 통해서는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라이센스 기한은 10년이며 신용장 개설 은행 정보를 비롯한 결제 기한(1964.9.30.)이 명시되어 있다. 공보부에서 외환은행 기관장에게 보낸 배정서에는 외화수입권을 배정받은 대한영화주식회사의 외화수입업무를 세기상사가 대행한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잊지 못할 모정> 수입 추천 신청 단계에서 세기상사가 제출한 각서 수입추천 단계에서 눈에 띄는 것이 각서인데, 총 두 종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세기상사 대표이사 이기동의 이름으로 공보부에 보내는 것으로서, 각서에는 “영화의 왜색 및 감독의 사상관계나 기타 귀부의 심사 기준에 저촉되는 경우에는 하시든지”(언제든지) 공보부의 지시대로 따르겠다 내용을 담고 있다. 수기로 작성된 다른 종류의 각서는 모두 2통인데, 모두 한국영화주식회사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으로서, “필름이 도착 즉시 실사고사를 받을 것”이며 “고사규정에 저촉되거나 상영이 불허가 되는 경우에는” “신용장 개설을 비롯한 제반 책임을 본인이 부담”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후 상영 허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참조해볼 때, 책임을 소재를 정하는 각서가 강력한 구속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기타자료에는 수기로 작성한 영화 해설과 스토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일한 양식의 서류가 3부인 점을 미루어보아, 외화수입 절차를 담당하는 주무부처인 상공부와 서울세관 그리고 외환은행에게 각각 보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담은 해설인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악의 결산>으로 발란서의 제일선 감독으로 각광을 받은 바 있는 “이브 샴피” 감독이 처음으로 시도한 동양색체가 짙은 감명 깊은 명화 이다. 이 영화제작을 위해 제작기간 2년, 구상에 3년, 광대한 오픈 세트 등 영화사상 공전의 스케일의 획기적 거작이다. 특기할 것은 일본 나가사키시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세트를 건조했다는 사실이다. 출연인 너무나 유명한 불란서의 일급 배우 “장 마레-”와 상대역인 세기의 미녀 “다니엘 다류-”, 조연엔 일본의 인기 여우 “기시 게이코”가 각각 출연하여 초연을 보여주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영화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일본인 여성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에서 드러나는 ‘일본색체’는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수입사는 이를 “동양색체”로 설명하고 있는데,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나가사키’도 사실 “일본 나가사키를 방불케 하는 광대한 오픈 세트”라는 점을 강조하며 이 영화가 프랑스 감독과 배우가 주축을 이룬 작품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수입대행사인 세기상사는 서류심사만으로 수입 추천을 승인해야 하는 행정절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영화 <잊지 못할 모정> 수입추천 통지 본 영화는 불란서 파테시네마 델라필름사가 1956년도 제작한 작품으로서 선박소에 근무하는 우수한 청년 기사 말사크는 친구의 소개로 '노리'라는 처녀를 알게 되어 사랑하는 중 우연히 그의 옛 애인 후란스와즈가 나타나 고민하게 된다. 말사크는 후란스와즈를 잊기 위해 출장을 떠난다. 돌아오는 날 밤, 나가사끼엔 심한 태풍이 불어 ‘노리’를 염려하며 그녀를 찾았으나 건물에 깔려 이미 숨을 거두고 이러한 사실을 본 후란스와즈는 그를 단념하고 나가사끼를 떠난다는 내용.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영화사에서 제출한 자료를 토대로 공보부에서는 유관 부처로 협조 공문을 보내는데, 참고 항목으로 부기된 내용에서는 영화에서 기시 게이코가 분한 노리코의 이름이 ‘노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세기상사가 제출한 자료에 근거한 것인데, ‘노리코’의 이름을 ‘노리’로 명명함으로써 왜색 시비를 비켜가고자 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관계기관에 수입추천 서류를 발송한 다음날인 1964년 10월 2일, 공보부에서는 한국영화주식회사 유성엽 앞으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건에 대해 관계 기관에서 추천을 하였다는 공문을 보낸다. 본편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승인 절차가 완료된 후, 1964년 12월 11일 대한영화사는 예고편 통관을 위한 품의서를 공보부에 제출한다. 예고편은 총 10권으로 한 편당 1권임을 감안해볼 때, 10편의 예고편이 들어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보부는 12월 22일자로 서울세관에 협조공문을 제출하면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수입추천 허가절차가 마무리된다. 2. 상영허가 승인 절차 1966년 1월 6일, 세기영화사는 수입한 영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한다. 영화가 수입된 절차가 완료된 시기가 1964년 12월 22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영화가 수입된 지 1년이 지난 시점까지 상영허가는 신청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론컨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일협정을 둘러싼 시민적 저항이 극에 달했기에 상황의 변화를 지켜봤던 것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협정 체결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가늠해보고자 논란이 될 만한 영화를 수입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영화 수입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주식회사라기보다 세기상사라 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세기상사는 12월 9일자로 외국영화 수입추천 명의변경 신청서를 양도증 사본과 함께 공보부에 제출한다. 이로써 세기상사는 수입대행업무가 아닌 영화를 수입, 배급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상영허가를 둘러싸고 공보부와 세기상사는 마찰을 빚게 된다. 공보부의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에 비판적인 민족주의 정서가 반정부적인 방향으로 표출되는 데 대한 부담감으로 영화 상영을 보류할 필요성이 있었다. 반면 세기상사의 입장에서는 공보부의 수입추천허가에 의해 수입된 영화를 공보부가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차의 합리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판단이 가능했다. 다음은 4차에 걸친 상영허가 신청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1) 제1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제출(1966.1.6.) 1966년 1월 6일 세기상사는 공보부에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에는 수입신청허가 시와 동일하게 영화에 대한 제반 정보와 영화필름, 대본 및 별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시세완납증명서를 비롯하여 필름 입고증, 문화영화수속필증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는 1966년 12월 2차 영화법 개정이 이루어지기 이전 시점이어서 62년 영화법의 시행령을 따르는데, 문화영화수속필증은 일반 극영화 상영 시 문화영화의 의무상영 조항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점은 <고래>라는 제명의 문화영화의 제작사가 세기상사주식회사라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문화영화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보영화 차원을 넘어 계몽성을 핵심적인 속성으로 갖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아우르는 역사적 개념인데, 문화영화의 의무상영이 제도화되면서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민간회사가 생겨나기도 했다 7 . (2) 외국영화 상영허가 보류(1966.1.11.) <잊지 못할 모정>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 통보 서류 발신: 공보부 장관 수신: 세기상사주식회사 우기동 제목: 외국영화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보류통보 위하가 66.1.10자로 제출한 외국영화 <잊지 못할 모정>의 상영허가 신청은 동 영화를 심사 결과 당부 방침에 의하여 상영허가가 보류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끝. 부내 참고: 본 영화는 왜색이 농후한 영화임 . 세기상사는 상영허가 신청 당시 연소자 관람 신청서도 함께 제출했는데, 이를 통해 볼 때, 수입 추천까지 받은 영화가 상영보류 통보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3) 중앙정보부에서의 재심의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의견 통보 검열서류에는 없지만, 1월 11일자로 상영보류를 통보받은 세기영화사는 재심을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위 서류에서 알 수 있듯이, 1966년 1월 29일 중앙정보부에서는 “65년 1월 12일(66년의 오기)”자로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해 재심을 진행하였다. 중앙정보부가 심의에 참여하여 의견서를 보내는 경우는 일반적인 절차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즉, 공보부가 당시의 정세를 고려하여 정무적인 판단을 내림에 있어 중앙정보부의 의견을 요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4) 외국영화 상영보류 최종 통보(1966.3.28.) 중앙정보부는 해당 영화가 “보안상 지장이 없음으로 공보부 장관이 적의 판단 조치”할 것을 주문하는데, 공보부에서는 1966년 3월 28일자로 세기상사에게 다시 한 번 상영보류 통보를 내린다. 이유는 1차와 동일하다. 2) 제2차 시도 (1) 진정서 제출(1966.3.29.) <잊지 못할 모정> 수입 관련 세기상사가 공보부 장관에게 보낸 진정서 첫 페이지 진정서 수신: 공보부장관 귀하/ 제목: 진정서 귀부의 1966년 3월 28일 자 공보영 1733.2~2959에 의한 외국영화 상영허가신청에 대한 불허가 통보는 감사히 복송하였읍니다. 취송(就悚)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귀부의 정책상 이유로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통보취지에 대하여는 폐사(弊社)로서도 타의 없이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폐사로서 본건 "잊지 못할 모정"에 관하여 국내상영예정하에 (1) 서기 1964년 10월 2일 자로 귀부의 수입추천을 받고 (2) 동시에 신용장을 개설하고 (3) 서기 1966년 1월 6일 자로 통관절차를 필하여 서기 1966년 1월 10일 자로 귀부에 상영허가신청에 이르기까지 막중한 자금을 투입하여 동 필름은 완전 국내물품으로 되어 있는 즉 상영치 않으면 안 될 불가피한 고충에 직면하고 있는 실상 을 보살펴 주시고 더욱 본건과 견연(牽連)지어서 기왕 국내에서 상영한 바 있는 소위 왜색영화의 경우를 대조적인 면에서 돌이켜보시더라도 국교정상화 이전에 있어 한 때 한일 간의 격앙된 국민감정에 아무런 자극됨이 없이 (1) <흑선>, <전장과 영원히>, <8.15의 찻집>, <해병에 동경에 가다>, <벽안의 나비 부인>, <카이강의 다리>, <원한의 도곡리 철교> 등을 상영한 선례 를 상기하시와 보살펴주시고, 특히 본건 "잊지 못할 모정"의 경우는 문화교류의 성과면에서 보더라도 음악 및 미술과 문학 등이 불란서의 문화적 지반을 기조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원자폭탄 세례를 받은 일본 장기(인용자: 나가사키) 등을 배경으로 하여 본 영화를 제작함에 이른 불일 간 국민감정의 순화는 목하 한일 국교정상화가 실현된 차제에 있어 무형의 정책적 PR에 도움이 되는 좋은 하나의 선도적 동인이 됨에 족할 것이며 , 더욱 한일국교 정상화의 당면한 중요 과정에 비추어보더라도 한일 간 문화교류의 계단적인(인용자: 단계적인의 오기) 일책으로써 이상 진정들인 수단에 정황을 현찰하시와 본건 영화 "잊지 못할 모정"이 상영되도록 허가하여 주시압기 바라옵고 자이 진정서를 올리나이다. 세기상사주식회사 대표이사 우기동 (강조 및 밑줄은 인용자) 2번에 걸친 상영보류 통보를 받은 세기상사는 대표이사의 이름으로 공보부 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한다. 진정의 핵심은 공보부가 고시한 행정 절차에 따라 수입추천을 받아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고, 일본인이 출연하거나 참여한 영화가 상영된 선례가 이미 있고,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시점에 해당 영화가 정책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홍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4.4.) 공보부는 1966년 3월 30일자로 제출된 진정서에 대해서 1966년 3월 28일에 통보한 바와 같이 당분간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간략하게 통보한다. 세기상사가 상영불허가 판단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짚은 것과 대조적으로, 공보부에서는 별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고 당분간 허락할 수 없다는 말만 반복한 것이다. 3) 제3차 시도 (1) 외국영화 산영허가 신청 사유서(1966.8.4.) 세기상사는 공보부의 보류 통보를 일단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동보가 제작한 작품으로 특히 감독 및 기타 기술진영 전원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 제작된 동경 올림픽 영화가 상영허가”를 받게 되자 세기상사는 다시금 상영허가를 신청한다. 반려 이유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영화 상영허가를 보류했다면, ‘동경 올림픽 영화’ 또한 개봉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진정에 대한 회신(1966.9.12.) 공보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다시금 진정 내용에 대해 불가 통보를 한다. 다만, 달라진 점은 “당부정책 상” 허가할 수 없다는 부분을 수정하여 “당부정책이 변경될 때가지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화 상영 허가를 보류한 것은 기관의 정책적 일관성에 의해서라기보다 당시의 정무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세기상사의 입장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제4차 시도 (1)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서 두 번의 진정이 묵살되지 세기상사는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를 다시금 신청하게 된다. 서류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 작성일은 1966년 8월 3일이나, 이를 접수한 시점은 9월 14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두 번째 진정을 통해 해법을 찾으려 했던 시도가 어그러지자 행정 당국의 비일관적인 처사를 비판하는 ‘신청사유서’와 함께 상영허가 절차를 새롭게 밟음으로써 공보부를 압박하는 전략으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2) 외국영화 상영허가 신청에 대한 회신(1966.10.10.) <잊지 못할 모정> 수입에 대한 방침을 밝힌 공보부 내부 메모 반복된 진정과 신청사유서를 통해 공보부의 행정적 실책을 지목함으로써 공보부는 그에 대한 해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1966년 10월 10일자로 세기상사로 통보된 상영허가 보류 판정은 이전과는 달리 그 이유가 상세히 부가되어 있다. 판정이 핵심 이유를 요약한 메모의 내용을 보면 해당 영화가 “불란서 제작이라고 하나 일본 가요(歌謠), 민속(民俗), 무용(舞踊) 등이 처음서 끝까지 강하게 나타나 일부분을 삭제(削除)할 수도 없는 영화이므로 한일 영화교류가 시작(始作)될 때까지 상영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제5차 시도 1966년 12월 20일, 세기상사는 다시금 <잊지 못할 모정>에 대한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해당 서류 또한 앞서와 동일하게 8월 3일에 작성된 것이지만, 접수는 4개월 뒤인 12월 20일이 이루어졌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으나, 세기상사는 별도의 진정서나 사유서 없이 영화의 상영허가를 신청하는데, 공보부에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이를 승인한다. 공보부의 <잊지 못할 모정> 상영 허가 통보 서류 결국 5번째 상영허가 신청을 낸 끝에 공보부에서는 해당 영화에 대한 상영허가를 통보한다. 그러나 내부결재 문서에는 국내상영이 무방하다고 판단한 근거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지 해당 영화의 줄거리만을 요약해놓았다. 다만 실사 검열을 통해 화면 6개처, 녹음 9개처를 삭제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공보부가 문제 삼았던 ‘왜색시비’는 정책 당국의 입장에서는 정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영화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던 만큼 일본에 대한 서구의 이국적 취향을 충족시킬 요소들이 과도하여 왜색이 매우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세기상사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영화를 개봉하였는데, 심의 서류를 토대로 이를 재구성해 볼 때 검열 당국과 시장 주체들 사이의 권력 관계가 일방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민족의 자주성(4) - 영화, 음악」, 《경향신문》, 1965.12.22. 2. 이화진, 「‘65년 체제’의 시각 정치와 <총독의 딸>」, 『한국근대문학연구』 18(1), 2017, 282-283쪽. - 이 논문은 한일협정이 체결된 ‘65년 체제’ 아래서 일본을 특정한 방식으로 (비)가시화하는 시각장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극장에 상영된 적도 없이 영화사의 서술로부터 배제된 <총독의 딸>의 제작 과정과 심의 단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3. 서울방송국 연속극 <동경 나그네>의 영화화한 작품으로 최무룡이 제작 및 감독을 맡았으나, 결국 촬영이 무산되어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 여파로 최무룡은 김지미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4. 「TBC의 〈동경 나그네〉 일본 현지 촬영 중지령」, 《중앙일보》 1966.12.03. 5. 우수영화 제작에 대한 포상으로 외국영화수입쿼터 배분과 영화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조준형, 「지배하는 국가와 교활한 시장」, 이순진, 이승희 편, 『한국영화와 민주주의』, 선인, 2011, 311-346쪽 참조. 6. 수입추천허가신청 단계에서 제한을 두는 경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심의 서류 해제」(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7. 1960년대 문화영화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는 조준형, 「문화영화의 제도화 과정: 1960~70년대 영화법과 관련 정책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 75~114쪽 참조.
누군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일은 늘 조심스럽다. 비평이라는 미명 아래 일종의 권력을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때론 작품에 대한 평가가 평론이나 리뷰를 넘어서, 심사라는 제도적 행위일 때는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평가 잣대를 들이대면서 여러 창작물에 서열을 매기고, 거기에 따라 제한된 보상이나 특권을 배분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그러면서도 야심 차게) 만들었던 작품이 심사의 문턱을 넘지 못한 일을 숱하게 경험했던 나 자신의 트라우마도 한몫 거든다. 그리고 심사의 임무를 맡다 보면 관객으로서 온전히 작품을 즐길 기회를 날려 먹고 만다. 작년 인디애니페스트에서도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협회 소속의 동료들과 함께 KIAFA 특별상 수상작을 선정해야 했다. 관객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지만, 반대급부로 발견의 희열에 들뜨기도 했다. 희열이 너무나 강렬해서인지, 선정을 마친 직후 작성한 ‘심사의 변’은 A4 두 장 분량이었다. 영화제 측에서는 ‘평소에 그런 성실성을 발휘할 것이지’라는 속내를 애써 감추면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 ‘4줄로 줄여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기왕에 마련한 원문은 나중에 더 나은 지면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판단하건대, 지금 이 애니메이션 리뷰 섹션이 제일 적합할 것 같아서 싣고자 한다. 때론 리뷰나 비평이 영화제 심사평의 말투로 쓰이는 것도 일종의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는 방편일 테다. “KIAFA 특별상은 한국독립애니메이션 협회 회원들이 선정한 상입니다. 협회 회원들이 특별한 위치에서 간택한 상이 아니라, 독립애니메이션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작품에 경의와 감사를 표하는 상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특별상 작품은 올해 독립애니메이션이 어떠한 모습인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독립애니메이션은 그것이 놓인 현실 속에서 반응하고, 이전까지 독립애니메이션이 성취해낸 것들로부터 한 발짝 더 내딛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불안은 지속되고, 불만은 쌓이며, 지치기도 하고, 혼란과 혼돈 속에서 잠시 방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혹은 잊고 있던 것을 환기시켜주는 작품이 있다면, 마땅히 협회 회원들은 그 작품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회원들을 대표한 심사위원들이 수상 후보작들을 꼽을 때, 서로가 내세운 작품들은 저마다 달랐습니다. 심사위원들이 지닌 기준과 미덕들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불일치는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독립애니메이션 협회에 소속된 창작자들이 다양한 가치와 취향을 견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이러한 차이를 저마다 정당한 근거와 신념을 가지고 기꺼이 상대방을 설득하고 있다는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심사 위원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너무도 수월하게 특별상 수상작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심사위원들은 무척이나 따뜻한 행복감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기분은 우리가 상영관에서 그 작품을 보고 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이었을 겁니다. 이 작품은 애정에 대한 회복을 다룹니다. 처음에는 좋았으나, 어느 순간 도망치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워하는, 그래서 다시 좋아하게 되었을 때는 그 이전보다 한껏 성숙해진 성장을 다룹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를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 이미 겪어봤던, 자연스러운 기억의 한자락이니까요. 그렇다고 이 작품이 과거로 퇴행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창작을 하는 이들의 현재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애니메이션 창작자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창작의 과정이 너무나 힘겹기 때문에 늘 도망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금 힘들어하는 창작자의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며, 잠시 애니메이션에서 떠나 있는 동료들에게 ‘언제든 돌아와도 돼’라는 안부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도 인사를 건넵니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그들이 혹여 애니메이션 자체에, 또는 한국의 애니메이션에, 또는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에 실망했다거나 낯섦음을 느꼈다면, 그러한 선입견과 편견을 잠시 접고,’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두근거림과 설렘을 다시 떠올려보면 어떨까?’라며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 작품에게 KIAFA 특별상을 수여하는 이유는 단지 스토리와 메시지 때문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꽤나 중요한 미적 탐색과 성취 또한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미지와 활자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작품의 형식 속으로 끌어들여 애니메이션의 표현 언어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미지와 활자가 움직임과 시간 속에서 만나는 일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때부터 현재의 모션툰이나 모션그래픽 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시도되었지만 여러모로 만족스럽지는 못했으며, 특히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 보자면 여전히 서툴고 어색할 뿐이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이미지와 만나는 활자는 그저 대사를 전달하는 표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활자는 자체로 멋진 형태를 보여주고, 대화 속 감정과 분위기를 담아내며, 작품의 흐름과 호흡을 조절합니다. 이미지와 활자의 만남은 무엇보다 우리가 처음으로 글과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접했던 바로 그 순간, 즉 그림책을 마주한 기억을 소환합니다. 그때 우리는 더듬거리며 글을 익혔고, 그림 속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림책이라는 텍스트는 한번 소비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닳고 닳을 때까지 늘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던 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림책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어떻게 해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작품 덕분에 그동안 잊고 있던 기본들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늘 초심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초심이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이 작품 덕에 독립애니메이션 협회의 창작자들은 다시 작업대 앞에 앉을 수 있을 테고, 고단함에 묻혀버렸던 설렘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볍게, 경쾌하게, 즐겁게… 그렇게 프레임 하나하나의 무게가 덜어진다면, 우리는 비로소 창작의 맛을 제대로 느낄 것입니다. 깨달음을 주신 감독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