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던가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허장강, 박근형, 양광남, 박지훈, 윤영주, 김신재, 방수일, 이인옥, 신미나, 용일화, 이해룡, 최희영, 전숙, 변대일, 이예민, 주상호, 최준, 장정국, 박동룡, 박종설, 박희숙, 김웅, 이예성, 추봉, 임해림, 김기범, 김기종, 장인한, 주일몽, 김용학, 최석, 석인수, 이승열, 태일, 양춘, 박병기, 권일정, 김승남, 조학자, 오세장, 지방열, 성규, 손전
1. 1973년 싱가폴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영화제를 참관하고 돌아온 신상옥은 위기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하면 재생할 길이 없다”고 일갈한다. 1) 그에 따르면 “몇 년 전만해도 일본영화와 함께 정상을 달렸던 한국영화”가 “전근대적인 작품으로 관객으로부터 유리되는 인상은 참으로 영화산업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한국을 제외한 9개 출품국의 영화들이 한결같이 “액션과 섹스물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된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출품한 작품은 기복이 없는 너무나 평범한 작품”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오늘의 관객은 평범하고 짜증이 나는 영화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 표현을 보려는데 있는데 우리 여건은 이러한 것들을 제작하는데 너무나 많은 제약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빠른 시일 내에 해외 진출의 돌파구를 열어줘야 한다”고 강변한다. 신상옥 이라는,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산업의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공인된 국제통이 전하는 이 진단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표현을 보려”는 “오늘의 관객”이라는 범주.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적어도 이들이 1960년대 신필름의 기틀을 다지는 기폭제가 되었던 영화 < 성춘향 >(1961)이 구성해냈던 관객들, <연산군> 시리즈(1961-1962)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 달기 >(1964), < 대폭군 >(1966)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터클 시대극이 소구했던 그 관객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한국영화 산업은 주지하다시피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여러 위기의 원인 중 가장 먼저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지역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TV의 급격한 보급에 따른 절대 관객수의 감소였다. 1969년 절정에 달했던 영화관객수는 1972년에 이르면 2/3 수준으로 급감했으며, 1975년에는 전성기의 1/10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신상옥의 언급이 있던 1973년 TV 수상기 보급대수는 100만대를 돌파했다. 이와 같은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화관객의 감소라는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관객구성체라고 할만한 것이 완전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따라 영화의 위상 또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장년 관객이 TV로 대거 이동한 이후 이 자리를 채운 것은 젊은 관객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파는 도시 저임금 노동자라는 새로운 관객층을 급부상시켰으며, 서울과 같은 도시 내부의 공간 재편은 이 관객들이 점유하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표현을 보려”는 “오늘의 관객”이란 바로 이러한 관객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홍콩-일본을 잇는 강력한 커넥션의 구축자이자(아시아영화제는 바로 신상옥이 이 국제적 커넥션을 만들어냈던 중요한 장이었다), 동시대 누구보다 민감한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던 신상옥은 영화의 위상 변화를 절감하고 있었다. 두 번째, 그런데 이 위상의 변화, 더 정확히 말하면 관객의 변화에 따른 이 위상 변화란 일국 레벨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영화는 액션과 섹스물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전언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한국영화가 얼마나 시대에 뒤처져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액션과 섹스’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국경을 넘어선 공통의 관객이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경을 넘어선 공통의 관객. 유신시대 한국이라는 이 극도로 폐쇄적인 장소에서조차도 이 공통 관객의 형상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는 이 연재에서도 다룬 적 있는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무협영화, 쿵푸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1973년의 이소룡 붐을 극적인 전기로 삼아 지역을 막론한 장사치들의 이합집산으로 만들어진 소위 홍콩식 권격영화들의 광범위한 유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례, 어떻게 여기에 섹스가 결합되는가. 신상옥의 1976년 영화 < 여수 407호 >/< 속 여수 407호 >는 한 시기의 가장 마이너하지만 동시에 ‘초국적’으로 소비되었던 한 장르의 ‘지역적’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장르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여감방 영화, WiP(Women in Prison)로 불리웠던 영화인데, 간단히 말해 남자 간수들과 여자 죄수들로 구성된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의 ‘진정한’ 볼거리는 (문자 그대로) 헐벗은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라고 할만한 것이다. 감옥이라는 이 절대적 위계의 공간은 집단 누드, SM, 윤간, 레즈비언 성애까지 ‘자유자재’의 성적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효율적인 공간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제스 프랑코, 잭 힐, 게리 드 레온 같은 이름들이 ‘악명’을 떨치고 있던 이 장르를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처음으로, 가장 창조적인 방식으로 흡수해온 것은 일본이었다. 1972년 일본에서 <The Big Doll House>(잭 힐)가 <잔혹여형무소>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어 인기를 모았다. 이미 포르노액션이라는 섹스와 폭력이 결합된 장르를 열정적으로 실험중이던 도에이는 재빨리 시노하라 토오루의 만화 『사소리』의 영화화를 서둘렀고, 그 결과 만들어진 <여수 701호-사소리>(이토 슌야)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는 곧 시리즈로 이어졌으며(<여수 사소리-제41잡거방>(1972), <여수 사소리-짐승의 방>(1973)), 주인공 카지 메이코(梶芽衣子)는 일약 도에이의 간판 여성스타로 등극하였다. 이 영화는 남자의 배신, 강간, 감옥 수용, 탈출, 복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여감방 영화 스토리를 변주하지만 또한 남자로부터의 배신이라는 사적인 원념으로부터 시작하여 체제에 대한 원념으로 나아가며(이 남자는 경시청 간부이고 여타의 ‘남자들’ 또한 모두 국가 권력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맺고 있는 자들이다) 격렬한 젠더대립과 체제 전복에의 의지로 충만해 있다. 그럼으로 <사소리>는 여감방영화라는 공통 장르에 기대는 동시에 우먼 리브(women’s liberation)와 국가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이라는 일본의 포스트 68적 주제를 정확히 반영해낸다. 두 번째로 이 지역에서 등장한 WiP 영화는 1973년 홍콩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 여집중영 女集中營 >(퀘이치훙)이었다. 일본군 수용소에서 ‘다채로운’ 인종의 여성 수감자들이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성적, 육체적 착취에 신음하는 이 영화는 곧 아시안 WiP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에서 역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2. 1973년, 신상옥이 세계적 동시성을 호소했던 그해 말 신프로덕션은 ‘합작’ 타이틀을 내걸고 가장 뻔뻔스럽고, 가장 노골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갖게 될 한 편의 영화를 시장에 내놓았다. < 여감방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한 <여집중영>은 1974년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네 편의 영화 중 한편으로 기록되었다.(참고로 말하자면 1974년의 최대 히트작은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은 갱신한 < 별들의 고향 >(50만)이었으며, 나머지 두 편은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한 < 증언 >과 < 아내들의 행진 >이었다. 당시의 한 신문기사는 국책영화 <증언>과 <아내들의 행진>을 제외한다면 10만을 넘은 한국영화는 <별들의 고향>과 <여감방>에 불과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한국어 더빙을 거친 <여집중영>은 정말로 극적으로 ‘한국영화’ <여감방>으로 탈바꿈하였다. 당시 한국 개봉 버전을 유추할 수 있는 심의대본(영상자료원 소장)에 따르면 이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 독립군 김대만은 죽기 직전 ‘조선인’ 아내 정숙에게 군자금의 은닉장소를 알려준다. 정숙은 기독교 병원의 백인 여간호사들과 함께 일본군이 세운 여자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이곳은 상시적인 능욕과 때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문, 잔학한 일본인 여장교에 의한 레즈비언 강간을 포함한 집단윤간이 횡행하는 장소이다.(이 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가, 이 영화를 포함한 여감방 영화들이 진정 보여주고 싶어하는 볼거리라는 점에 주의하자.) 여자들은 살기 위해 탈출을 꿈꾸고, 위장 일본군 장교로서 은밀히 작전을 수행중인 ‘박대령’이 그녀들을 돕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위의 설정을 믿을만하게 만들어줄 어떤 장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집중영>→<여감방>으로의 이동이 진정 흥미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먼저 이 영화의 ‘조선인’ 등장인물이라고 설정된 자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중국인’으로서의 그들의 표식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중국 복장의 이들은 중국 가옥에서 살고 있다. 한국-홍콩 합작 프로젝트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얼마나 ‘한국영화’로의 전이에 무심했는가는 배우 로례의 존재로부터도 확인가능하다. 일단 ‘박대령’으로 기술되어 있는 그는 이미 한국 영화시장에 <금연자>(한국 개봉제목: 심야의 결투 )와 <용호투>(한국 개봉제목: 용호의 결투 ), 그리고 < 철인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익히 알려진 홍콩배우였다. 이 이야기는 이 영화의 표면으로부터 그 어떤 ‘한국성’ 혹은 ‘한국성’의 위장 따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본격화되기 시작한 소위 ‘위장합작’ 영화들의 거개가 그러한 것처럼 이 영화 또한 몇몇 한국인 배우들의 존재로 아슬아슬한 합작의 암묵적인 최저 조건에 부합하려고 한다.(이 영화에는 고상미, 나하영 등의 한국인 여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러나 반라의 학대받는 여성들의 육체 중 하나로 기입되어 있을 뿐인 그녀들의 국적이 한국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여집중영>→<여감방>이 한국영화로의 전이에 이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명하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여기에 무심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간악한 일본군이라는 적이며, 이 공동의 적 앞에서 벌거벗은 채 학대받는 여성들은 하나로 묶인다. 심지어 백인 여성들 또한 오로지 벌거벗은 육체로 다채로운 육체적, 성적 학대를 견디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인종적 위계 혹은 차이도 없이 학대받는 ‘아시안’ 여성들과 하나가 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간악한 일본군이라는 적또한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설정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한국과 홍콩 양쪽의 공통된 민족적 공분일 터이지만, 생사여탈권을 쥔 이 절대악의 형상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익숙한 것이다. 이를테면 70년대식 WiP 영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러브 캠프 7 Love Camp 7>(1969)은 나치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사 Ilsa> 시리즈로 대표되는 1970년대 내내 이어질 나치 수용소 배경의 WiP 영화, 이름하여 나치 익스플로이테이션의 효시가 될 이 영화는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여성 유태인 박사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잠입한 연합군 여성요원을 중심으로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들이 겪는 능욕과 고문, 집단윤간, 새디스틱한 레즈비언 섹스를 그리고 있다. 요컨대, 이 영화들에서 배경이란 다채로운 방식으로 학대받는 여성들이라는 진정한 볼거리를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물론 이 볼거리는 국제적으로 순환하는 동시에 각각의 지역적 맥락이 부여하는 노골적인 성적 판타지와 결합한다. <여집중영>→<여감방>의 최대 볼거리가 기독교 병원의 간호사들로 설정된 백인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능욕이라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뻔뻔스러운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채로운 육체적,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된 이 벌거벗은 백인 여성들의 존재가 아시안 남성들에게 가져다주었을 노골적인 인종적, 젠더적 쾌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3. 어쨌든 <여감방>의 성공은 아마도 이 시기 신상옥을 가장 고무시켰던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기에서 홍콩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공통 관객’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여감방>의 히트 이후 신상옥은 곧바로 신프로덕션 제작의 < 혼혈아 쥬리 >를 일본인 감독을 초청해서 완성, ‘여감방 시리즈 제2탄’으로 개봉했으며, 그 스스로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를 만들었다. <여수 407호> 시리즈는 ‘액션과 섹스’라는 공유 트랜드에 대한 신상옥의 확신이 어떤 형태를 얻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만주국의 수도 신경. 간호사 강희는 의사 하윤과 약혼한 사이이다. 어느날 밤 그들의 병원에 강희의 오빠 동민이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실려온다. 마침 강희가 일본군을 따돌리기 위해 나간 사이 유격대원인 동민은 금궤가 묻힌 장소를 하윤에게 알려주고 죽는다. 강희와 하윤은 부상당한 다른 유격대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산에 오르고, 하윤은 강희에게 관동군 군의에게 가서 약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약을 구해 돌아오자 유격대는 일본군에게 일망타진당한 상태. 강희 또한 어느날 밤 쳐들어온 네 명의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 중 한명을 가위로 내리꽂은 강희는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강제노역과 여자들에 대한 학대가(왜인지 이 학대받는 여죄수들 중에는 금발의 백인 여죄수도 끼어 있다) 만연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조선인 소장만이 여죄수들에게 온정적이지만, 이곳의 실권은 일본인 부소장 가토가 쥐고 있다. 가토의 노골적인 성적 착취를 견뎌내는 강희에게는 이곳에 같이 들어온 춘자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 상대이다. 그러던 어느날 옛 동료 하연이 이곳에 새로 수감된다. 강희는 하연으로부터 하윤이 오빠를 죽이고, 혼자 금궤를 독차지하기 위해 일본군과 밀통하여 유격대를 몰살시켰으며, 이제 그 모든 일을 도왔던 하연마저 만철 총재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복수를 결심한 강희는 호시탐탐 감옥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남자의 배신-강간-감금-탈출-복수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구조는 WiP 영화의 한 전형이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사소리> 시리즈의 반복이다.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가(이 두 영화는 주인공 강희 역을 맡은 홍콩배우 엽영지와 가토 부소장 역의 장패산의 스케쥴 때문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다) 신상옥이 <사소리>를 강력하게 참조하고 있음은 <속 여수 407호>에서 <사소리>의 화재 장면이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적극적인 참조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여수 407호>에서는 <사소리> 시리즈의 저 격렬한 젠더 대립과 체제전복적인 폭력이 거의, 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영화의 배경이 식민지 시기이며, 그럼으로써 <여집중영>이 그러한 것처럼 절대악으로서의 일본, 일본인이라는 설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설정의 결과 적은 민족적으로 ‘외재화’되고, 체제전복의 폭력적 열망은 사라진다. 아직 오지도 않은 ‘국가’를 어떻게 ‘전복’할 수 있겠는가. 여자를 배신한 남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본과 내통한 자, 독립군을 밀고한 자, ‘밀정’이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악당인 이유이다. 이 악당을 제외한다면 ‘한국인’ 남성들은 정말로 세심하게 그들의 윤리적 지위를 보호받는다. 그들은 정의로운 독립군이거나, 나라가 없음을 통탄하는 인정많은 조선인 소장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이 조선인 소장일 것이다.(의미심장하게도 그를 따르는 유일한 부하는 중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는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그가 전혀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 조선인 소장은 공정한 ‘법’에 기대어 이 여감방을 정의롭게 운영하고 싶어하나 법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 가토 때문에 빈번히 좌절에 이른다. 그는 내러티브의 전개상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캐릭터의 존재 이유를 내러티브 내에서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 이유는 1976년 한국이라는 영화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긴급조치의 시대에 등장한 이 공정한 공권력에 대한 기대, 그러나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 형상은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1970년대의 한국이라는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이 존재는 마치 동시대의 한국 액션영화가 태권도라는 애매한 기표로 위장하고, 반일/반공의 서사들로 최소한의 정당화 기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런 류의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최소한의 장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는 곧 홍콩에서 <老虎嶺女子監獄 1, 2>로 공개되었으며, <Girls in the Tiger Cage>/<Revenge in the Tiger Cage>라는 제목의 ‘언컷’ 버전으로 전세계에 유통되었다. 이 유통과정까지를 포함한다면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는 섹스와 폭력(종종 이 둘의 결합)이 낳은 전지구적인 영화 네트워크 속에 어떻게 한국산 영화가 개입해들어갔는지는 보여주는 유감없는 사례이다. 4. 1970년대 한국에서 만들어진 <여수 407호>가, <사소리> 시리즈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 성정치와 전혀 무관한 지점에서 성립되고 있었다면, 30년 만에 한국에서(즉, 1990년대를 통과한 이후의 한국에서) <사소리> 시리즈에 대한 어떤 응답과 마주하는 것은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박찬욱 의 < 친절한 금자씨 >(2005)는 아마도 WiP 영화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여기에 대한 가장 진지한 장르적 성찰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네필’ 박찬욱은 <사소리> 시리즈를 경유함으로써, 이 장르가 보여준 성정치를 말 그대로 동시대적 차원에서 구현해내었다. 동시에 공통장르로서의 WiP를 창조적으로 전유해온 이 사례는 한국영화가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해나갔는가에 관한 하나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 1) 「亞洲영화제를 보고, “邦畵제작에 새 돌파구를”」, 『경향신문』, 197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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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 기생충 >(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 리피피 >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 본 얼티메이텀 >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 흐트러지다 >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 웬디와 루시 >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
‘청춘대로망’ <청춘극장> 1) <청춘극장>은 김내성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내성의 『청춘극장』은 1949년부터 1952년까지 3년에 걸쳐 5권으로 출간되어 당대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물론 1990년대까지도 역대 가장 재미있는 대중소설 중 하나로 회자되었다. 그 인기를 증명하듯 이 소설은 영화화만 세 번 되었는데, 2) 세 편의 영화 또한 모두 크게 흥행했다. 한편 영화 <청춘극장>은 공모를 통해 주연 여배우를 발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와 1970~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의 주역이었던 윤정희와 정윤희가 각각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을 통해 데뷔하였다. 영화 <청춘극장>은 1959년, 1967년, 1975년에 제작되었다. 원작소설은 1939년 2월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 8월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과 달리 영화는 1939년 2월부터 1943년까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영화는 1967년과 1975년 영화이고,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다만 1959년 영화가 성공했기에 이후 영화들이 리메이크될 수 있었음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시대 배경 설정은 1959년 영화에서부터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원작의 비극적 결말이다. 원작에서는 해방과 함께 귀환한 주인공 백영민이 결국 자살하고 만다. 영화에서는 해방 전인 1943년 시점에서 마무리함으로써 해방을 희망으로만 표현할 수 있었고 원작의 부담스러운 결말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화 <청춘극장>은 원작이 보여준 해방기의 비극성은 은닉한 채 식민지시기를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과 모험을 집약한 ‘청춘대로망’이 되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크게 로맨스와 청년들의 모험으로 구성된다. 우선 로맨스는 지주의 아들로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다니는 ‘백영민’과 그의 고향집에 있는 정혼자 ‘운옥’, 그리고 백영민이 일본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는 ‘유경’의 삼각관계로 이루어진다. 청년들의 모험은 전문학교 동창생 관계인 삼총사, 즉 법관을 꿈꾸는 ‘백영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장일수’, 문학청년 ‘신성호’의 역정을 통해 전개된다. 여기에 삼총사의 동창이면서 친일파로 살아가는 ‘최달근’과, 백영민을 짝사랑하는 기생 ‘춘심’, 그의 오빠이자 운옥을 노리는 밀정 ‘준길’, 그리고 백영민의 은사이면서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다가 태평양전쟁 막판에 참전하는 일본인 지식인 ‘야마모토’ 등이 이야기를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인물들이 조선, 일본, 중국에 걸쳐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 영화는 백영민을 가운데 둔 두 여성과 두 청년의 파란만장한 청춘을 보여준다. 1975년 <청춘극장>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이러한 영화의 정체성을 집약해준다. 장일수 군의 예언대로 우리는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전쟁의 불길 속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와 중국에 걸쳐서 펼쳐졌던 우리들의 청춘대로망도 일단 그 막을 내렸다. 해방 이후에는 분단이 되어 대륙으로는 길이 끊긴 채 실질적으로는 섬이 되어 버린 남한에서 광활한 땅, 즉 한반도, 일본열도, 중국에 걸친 사랑과 모험의 세계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 시기라 하더라도 낭만적인 상상계로 구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수십 년에 걸친 대중의 호응은 이 영화가 보여준 상상계의 유효성을 지속적으로 증명했다. (그림 1) (그림 2) (그림 3) 위쪽부터 1959년, 1967년, 1975년 <청춘극장>의 포스터. 1959년 영화에서는 김진규, 황정순, 김지미가, 1967년 영화에서는 신성일, 고은아, 윤정희가, 1975년 영화에서는 신영일, 김창숙, 정윤희가 각각 백영민, 허운옥, 오유경 역을 맡았다. 세 편의 <청춘극장>은 낭만적이고 파란만장한 서사에서 주인공을 맡은 스타들의 면모와 그에 따른 각 편의 변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러한 흥미로움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영화가 8년에 한번 꼴로 제작되면서 달라지는 검열제도의 적용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에 동일한 원작, 유사한 서사로 리메이크된 세 편의 <청춘극장>의 검열 서류를 비교해보면 각 시기 검열의 변화가 한눈에 포착된다. (1959년 영화는 시나리오조차 현전하지 않으나 다행히 검열서류는 남아있어서 이러한 고찰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1959년 <청춘극장>(홍성기)과 왜색의 문제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서류에는 상영허가신청서, 작자승낙서, 작곡자승낙서, 검열위원위촉의 건, 검열의견서, 그리고 대본이 첨부되어 있다. 사전 시나리오 검열이 명문화되어 체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1966년 제2차 영화법 개정부터이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않았을 뿐 시나리오 검열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기 검열은 문교부에서 주관하였으며 검열위원으로는 내무부 치안국장, 서울지방 검찰청, 국방부 정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이 위촉되었다. 검열의 주관 부처와 참여 기관은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기본적으로 치안, 교육, 안보에 관련된 기관은 계속 검열에 개입하게 된다. <청춘극장>의 제작사는 1959년 3월1일에 문교부에 상영허가신청서를 제출했고, 3월2일에 검열위원이 위촉되었다. 위촉된 각 기관의 검열위원들은 문교부 검열실에 모여 검열 회의를 진행하고 각 기관별로 검열의견서를 따로 작성하였는데. 검열의견서는 3월2일부터 3월4일 사이에 제출되었다. 그리고 <청춘극장>은 3월4일에 바로 상영이 ‘무제한 허가’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승만 정부에서 승인한 ‘무제한 허가’는 무효가 된 것으로 보인다. 3년 후인 1962년 2월22일에 <청춘극장>의 재상영허가신청서가 공보부에 제출되고, 3월20일에 재상영허가 결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허가기간은 1962년 3월20일부터 1963년 3월19일까지 1년간이었다. 이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국립영화제작소 3) 에서 제작한 문화영화 <국토방위 이상 없다>가 재상영허가의 조건으로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림 4) 국산영화 <청춘극장> 검열위원 위촉의 건 (그림 5) 국산영화 <청춘극장> 상영허가의 건 1959년 <청춘극장>의 검열에서 유일한 제한사항은 왜색의 문제였다. [그림 5]를 보면 검열자들이 이 영화를 “가혹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한국청년들과 여성들의 활약상과 이들 젊은이들의 애정 문제를 묘사한 내용”이라고 요약하여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화면 중 일본복색에 관하여는 국정회의에서 논의하였고 차관님께 보고하였음.”이라는 참고 사항을 말미에 달고 있다. 식민지시기를 재현하는 영화에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일본복색’이 국정회의에서까지 논의되었다는 기록은 당시 ‘왜색’ 문제가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대하게 취급되었는가를 말해준다. 해방 이후 ‘일본’과 관련된 남한의 정책은 1960년 4.19와 1965년 한일수교,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 공포를 기점으로 변화한다. 4.19 직후에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한일 문화교류에 대한 기대 심리 속에서 식민지 경험에 대한 접근이나 일본에 대한 재현이 잠시나마 다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1961)이다. 이 영화에서는 학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이 일본 여성을 사랑하면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음식을 먹으며 일본의 전통 음악과 춤을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비하면 1959년 <청춘극장>은 불과 1년 전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왜색에 대한 비교적 자유로운 재현은 1965년 한일협정 이전까지만 허용된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왜색’에 대한 검열이 오히려 강화되는데 이는 반공주의 강화와 연관된다. 한일수교로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자 유치에 성공한 박정희 정부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한다. 그리고 영화계에도 ‘반공영화에 대한 포상’이라는 당근과 ‘용공에 대한 엄격한 제재’라는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정책을 편다. 1965년을 전후로 하여 일본은 북송선 문제로 남북한의 대결을 격화시키는 데 매개가 된 국가였기 때문에 한일수교가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반공주의 차원에서 볼 때 용공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에서 재현하기에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재현이 한일수교 이후에 오히려 과거 식민지 시대로 집중되고 일본이 ‘적’과 ‘악’으로만 재현되며 북한과 유사한 표상을 지니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었다. 1967년 <청춘극장>은 바로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1) <청춘극장>에 대한 정보와 분석은 졸고, 「남한영화에 나타난 태평양전쟁의 표상」, 『한국극예술연구』 44집, 한국극예술학회, 2014, 123-130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청춘극장>은 KBS 22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1993년 10월23일~1994년 1월2일에 방송되기도 했다. 3) 국립영화제작소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에 공보처에 설치되어 뉴스, 기록영화, 문화영화 등을 만드는 부서로 존속했다. 그런데 5.16 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6월에 개정된 정부조직법 규정에 따라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 및 선전을 위한 기관으로 새롭게 발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