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엔 항상 푸른별이 있었다
- 감독
- 박정현
- 제작년도
- 2005
명치좌는 1936년 10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명치정에 세운 최신식 영화관으로 해방 후 시공관으로 사용되었다. 명치좌가 자리한 곳은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에서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을 지나 명동성당과 중앙관(중앙극장)으로 이어지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한 가운데 있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인데 그 초입에는 1909년 설립된 낭화관이라는 작은 극장이, 명치좌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는 1922년에 들어선 활동사진전용관 중앙관이 있었고, 명치좌에서 본정 방향으로는 1915년 설립된 닛카츠 영화의 개봉관인 희락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치좌를 세운 인물은 명치정 마루빌딩(丸ビル)의 경영자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원적이 나가사키현(長崎縣)인 그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카페와 마루빌딩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5월 마루빌딩의 한 모퉁이 부지 100평을 14만 5천원에 매수한 후 이곳에 영화관 설립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쇼치쿠 영화의 경성 흥행권을 획득하기로 하고 만주 관동군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石橋一郞)를 통해 도쿄영화계에 접근했다.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를 통해 쇼치쿠의 중역들과 쇼치쿠 흥행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쇼치쿠의 기도 시로우(城戶四郞) 소장, 시노야마(篠山) 차장, 이노우에(井上) 오사카지점장, 시라이 신타로(白井信太郞) 상담역 등을 움직여 이시바시 료스케가 쇼치쿠 흥행권을 얻을 수 있게 힘썼다. 기존 쇼치쿠 흥행권을 가지고 있던 송죽좌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쇼치쿠 측에 부율 조정을 제의한 상태에서 미쓰코시 뒤편에 극장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율 조정을 요구한 도쿠나가의 행동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던 쇼치쿠의 중역들은 미쓰코시 뒤편 보다는 명치정 한가운데 극장을 설립하는 편이 경쟁회사인 닛카츠의 영화를 상영하는 희락관을 견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시바시 료스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결국 1935년 7월 13일 도쿠나가가 쇼치쿠 상영권을 포기하자, 이시바시 료스케는 7월 23일 도쿄로 건너가 28일 쇼치쿠 영화에 대한 선만봉절 계약을 체결했다. 이시바시는 아직 극장을 설립하기 전이라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쇼치쿠영화를 낭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이로써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낭화관이 1935년 9월부터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극장을 신축하기 위해 용산 개성좌의 흥행권을 인수받아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성좌가 자리했던 용산 지역이 아닌 본정서 관내에 영화관 설립을 신청하였기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정서에서는 경성의 영화관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치좌의 신축을 허가해 주었다. 명치좌는 대지 505평에 건평 856평, 총공사비 536,000원을 들여 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 영화극장이었다. 다마타(玉田)건축사무소의 설계와 미키(三木)합명회사의 청부로 1935년 11월 공사에 착수, 1936년 10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자료] 명치좌 개관 광고(《경성일보》, 1936.10.07) 1936년 10월 7일 개관한 명치좌의 개관 프로그램은 쇼치쿠 오후나(大船)촬영소에서 제작한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 주연의 <여성 대 남성>(女性 對 男性)과 쇼치쿠 교토촬영소에서 제작한 하야시 죠지로(林長二郞) 주연의 <춤추는 명군>(踊る明君)이었다. 개관 이후 명치좌는 경성의 조선인, 일본인 관객 모두를 휩쓸었다. 1940년 신년 3일간 관객 집계를 보면 명치좌가 1만 6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2위인 희락관의 9천 8백명과는 큰 차이로 관객수를 압도했다. 명치좌가 약진하면서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주도하게 된 이시바시 료스케는 전통적으로 서양영화를 즐겨 보는 조선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1939년에는 박정현이 운영하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명치좌 체인 안에 넣었다. 1907년 개관 이후 조선인의 손으로만 운영되었던 단성사가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조선 흥행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인수된 단성사는 명치좌의 2번관으로 전락하여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기억해야할 부분은 명치좌와 같은 대형 토키영화관이 들어서고 남촌의 대형 영화관에 조선인 관객들이 몰리면서, 지역과 언어에 의해 구분되던 종래의 극장문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바시 료스케가 단성사를 인수 한 후 명치좌는 단성사가 이름을 바꾼 대륙극장과 더불어 조선영화를 다수 개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치좌를 통해 개봉된 주요 조선영화만도 1939년 <애련송>, <국경>, <새출발>, 1940년 <수업료>, 1941년 <반도의 봄>, <그대와 나> 등이 있었다. [자료] 명치좌에서 개봉된 최인규 연출의 <국경>(《매일신보》, 1939.05.19) 개관 이후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좌우했던 명치좌는 8·15해방 후 적산극장으로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된다.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화관이다 보니 이를 불하받아 운영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 미군정의 인맥을 가진 김동성이 적산 관리인이 되어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관이 조선영화흥행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보니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극장을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의 각종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던 부민관을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면서, 시민회관이 없었던 서울시는 국제극장을 인수하여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서울을 대신해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국가기관을 대신할 건물을 물색할 때 국립극장으로 활용되던 과거 부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자 국립극장은 시공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회관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옮겨온 국립극장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새롭게 시민회관을 신축하고 과거 시공관을 오롯이 국립극장으로만 이용하기로 정리하면서 해결된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의 시민회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건물은 4.19이후 완공되었는데 우남회관이란 이름 대신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된다. 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전까지 시공관 건물은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된다. 명동예술회관은 본래 영화관 건물이라 연극 공연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1961년 연극공연에 걸맞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진 후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국립극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명칭도 명동국립극장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10월 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10여 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해온 명동예술회관은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사용된다. 이후 이 건물은 경매에 붙여져 낙찰가에 따라서는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관광부가 2002년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하기로 결정, 2004년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건물을 공연장에 맞게 다시 수리하여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명동국립극장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08.20. 명치정 환락가에 대화 ( 大火 ), 작야 ( 昨夜 ), 전반소 ( 全半燒 ) 십사호 ( 十四戶 ), 손해 삼만원 십구 일 오후 십 시 십 분쯤 부내 명치정 ( 明治町 ) 이정목 오십사번지 전중심길 ( 田中甚吉 ) 의 목제 이층집에서 불이 나서 불길은 삽시간에 그 집을 다 태우고 옆집으로 올마부터 강본 ( 岡本 ), 지전 ( 池田 ), 최 ( 崔 ) 의 집과 편산 ( 片山 ) 려관 석광 ( 石光 ) 『 아파 - 트 』 추강어망 ( 秋岡魚網 ) 점의 창고 , 명치좌 『 ᄲᅩ - 이 』 방 등 팔호를 전소시키고 불길은 다시 그칠 줄을 모르고 좌등 ( 佐藤 ) 빙수점 , 추강어망점 , 북곡 ( 北谷 ) 양산점 , 연희 ( 延禧 ) 식당 등 육호를 반소시킨 후에 소방대와 부근 가정방화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활동에 의하여 열시 사십분쯤 진화하엿다 . 손해는 약 삼만원 가량이라고 하는데 불탄 집들은 통틀어서 집주인인 명치좌에서 일만 오천원의 보험에 들엇고 가장 집물은 제각기 보험에 든 사람도 안든 사람도 잇슴으로 자세치 안타 . 화재원인은 목하 본정서에서 조사 중인데 불난 곳이 환락가 ( 歡樂街 ) 의 중심지엿음으로 부근 일대는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구경꾼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웟다 . 그런데 불난 바로 엽힌 명치좌에서는 마침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이었는데 손님들은 불난 것을 몰낫기 ᄯᅢ문에 다행히 큰일은 업섯스나 불을 ᄭᅳ든 경성소방조 소방원 관춘웅 ( 關春雄 )( 三二 ) 은 전치 ○ 주일가량의 타박상을 입엇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40.02.09. 구경열 ( 熱 ) 은 40 도 이상 , 정원초과와 위생 , 풍기 상 나뻐 , 입장요금까지 통제 요사히 본정서 ( 本町署 ) 관내에 잇는 영화극장으로 명치좌 ( 明治座 ) 를 비롯하여 기타 극장에서는 일반의 관극열 ( 觀劇熱 ) 이 고조됨을 기화로 하여 부당한 고급 요금을 증수함은 물론 정원 ( 定員 ) 이상의 사람을 입장시켜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초만원을 일우어 관극 목적을 다 할 수 없음은 물논 위생 상 또는 풍기 상 조치 못한 점이 만허 경기도 경찰부 보안게에서는 그대로 방임할 수 없다 하여 미구에 입장요금의 통제는 물논 정원 이상의 입장을 엄금할 방침이라 한다 . 특히 요사히 비와 눈이 오지 안허 각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야 총후 물자 확보정책에 반하는 사실이 속출하는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무리한 관객 수용과 입장자 초과가 화재발생의 위험성도 잇는 만큼 방화의 필요와 기타 재해 , 풍기 , 위생 각 점을 생각해서 단호한 방침을 세우기로 확정하엿다 한다 . 본정서 좌등 보안주임 담 ( 本町署 佐藤 保安主任 談 )= 극장에서 입장요금을 올리는 것은 이제부터 절대로 허가하지 안흘 방침이다 . 영화렬이 팽창한 것을 기화로 해서 입장료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업자들로서 반성해야 될 점이다 . 정원 이상의 입장에 대하여서도 풍기 , 재해방지 등 필요에서 도경찰부의 지시가 잇는대로 단호히 통제할 방침이다 . 운운 [ 자료 ] 《 매일신보 》 1941.07.25. 명치좌 기구 확충 , 송죽 ·SY 계 제휴강화 시국 하 영화의 사명이 점차 중대하여서 기 ( 其 )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고 있는 이ᄯᅢ 시내 명치좌에서는 이에 상반 ( 相伴 ) 한 기구 확충과 내용 강화를 꾀하여 종래는 단지 송죽의 봉절관인 관계엿든 것을 다시 확대하야 긴밀한 제휴 강화의 계약을 맷고 금후는 종전의 배가한 비약을 ᄭᅬ하리라고 한다 . 이리하여 금후 명치좌에서는 전 ( 全 ) 송죽계의 『 애트랙슌 』 은 물론 S·Y 계의 양화 상영도 일층 확장하기로 되어 그 약진은 자못 주목된다 . 松竹○ 의 책임자는 神戶 松竹座 지배인 大矢 ○ 信 씨로 결정되어 근간 부임하기로 되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0.15. 『 반도의 봄 』 내월 ( 來月 ) 명치좌 봉절 명보영화의 이색편 . 신인 이병일 감독 작품 『 반도의 봄 』 은 그간 봉절권 획득의 문제로 봉절관이 결정되지 못하고 잇든바 송죽과 타협되여 내월 중순경 경성 명치좌에서 상영키로 되엇는데 송죽계로 전국 봉절하게 되리라고 한다 .( 사진은 그 한 장면 )
서양화가 청구(靑駒) 이마동(1906-1981)은 1932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와 1933년 7월부터 동아일보에 출근했다. 미술 분야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지만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것이 그의 주 업무였다. 그러던 1935년 여름, 이마동은 서울 시내 곳곳을 직접 돌아보고 풍경을 스케치해 '서울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1회부터 4회까지는 동아일보사 옥상에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바라본 서울을 스케치했다. 옥상을 내려와 그린 다섯 번째 서울풍경은 종로 네거리였는데 "종로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현존한 유일의 기념물"이자 "침묵의 종(鐘)으로서 이 서울의 몸부림을 응시" 1 하는 보신각을 스케치했다. 그다음 연재에서는 "점쟁이, 관상쟁이, 천냥만냥꾼들이 긴긴 여름날에도 해 기우는 줄 모르고 권태에 찌들은 푸념을 허구한 세월을 두고 하고 있는" 2 탑동공원(파고다공원)을, 이어서 7회차에서는 동관 네거리 풍경을 스케치했다. 이 동관 네거리 스케치에는 다음과 같은 경안(耿岸) 서항석의 감상이 덧붙여져 있다. 경성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는 이른바 ‘대경성(大京城)’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그때, 도시 생활자의 머릿속에서 경성은 이미 ‘대경성’이 돼 있는 듯 하다. 서울이 변하여 대경성(大京城)이 되고 대경성이 나눠져 남촌(南村), 북촌(北村)이 된 오늘 북촌의 번화처(繁華處)로는 종로 네거리가 첫째요, 거기 따르려는 것이 동관 네거리다. 십자로에 가로는 전차, 세로는 버스, 제법 교통도 빈번한 편이다. 그러나 여기는 종로 네거리와는 딴 냄새가 있다. 북향하여 바라보면 좌편으로는 명월관을 앞세우고 돈의동 일대의 색주가굴이 유위(有爲)한 청년의 고혈을 기다리고 있고, 우편으로는 단성사가 신장(新粧)을 말쑥이 하고 나앉아 외국영화 봉절관은 나뿐이오, 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저 혼자 바쁘다. 말하자면 여기가 북촌의 환락경(歡樂境)이다. 저기 서있는 망대야. 너는 서울을 화재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이 언저리에서 심연에 빠지는 자들을 또한 감시해 주어야하겠다. 아차, 내가 발 앞을 보고 잔소리하기에 저기 어마어마한 돈화문이 그 옛날을 잊은 듯이 입을 닫힌 채 말없이 서있는 그 심정을 모른 체 했구나. 3 동아일보 사옥에서 시작하여 종로의 보신각과 탑동공원을 지나 동관 네거리까지, 이마동의 북촌 스케치들은 오늘날 독자들의 눈에 그저 고요하고 적막하게 보인다. ‘작은 도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제국의 화려한 스펙터클이 펼쳐지는 남촌에 비해, 조선인들의 북촌 거리는 소박하다.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고, 전봇대가 늘어서고, 전차와 버스가 다니는 풍경 속에 조선왕조의 건축물이 조용히 서 있고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이마동의 스케치에 글을 보탠 동아일보 기자들의 감상에는 북촌 거리가 ‘번화한 풍경’으로 공들여 서술되지만, 종로 네거리 다음으로 북촌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동관 네거리가 서항석은 오히려 맘에 들지 않는 듯하다. 요릿집과 색주가와 극장으로 시끄럽고 요란한 이 뒷골목의 ‘환락경’은 재능 있는 젊은이들조차 ‘심연(深淵)’에 들게 하는 것이다. 그때 서항석의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 대로, 동관 네거리에는 돈화문(창덕궁 정문)이 지키고 서있다. 보신각이 자리 잡은 종로 네거리처럼, 돈화문이 자리한 동관 네거리 역시 민족이라는 정체성 집단과 조선인을 매개하는 ‘기억의 터’임을, 서항석은 대경성 사업으로 한창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번쯤 되새겨보았을지 모른다. 이마동이 스케치한 연작의 제목이 환기시키는 것은 그러한 기억의 장소들, ‘경성’과는 다른 ‘서울’의 풍경이었으리라. 다시 말해 이마동의 「서울풍경」은 도시 개발과 근대화가 진행되던 당시의 '경성'을 스케치의 여백 너머에서 읽게끔 두고, 현재 발 딛고 생활하고 있는 '서울'을 기억이 공간화되는 장소로 바꿔놓는다. 신축한 3층 건물에 RCA 발성영화 영사기를 들여놓고 토키라는 시대적 변화에 드디어 발을 맞춰가기 시작한 단성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큰 어려움에 봉착한다. 남촌에 화려한 외관의 명치좌와 약초극장이 들어서면서 더 이상 "외국영화 봉절권은 나뿐이오"라고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객들은 더 좋은 설비와 안락한 편의시설을 갖춘 극장에서 최신의 명화를 감상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토키 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극장'이라는 구획은 이전만큼의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채권자와의 분쟁으로 이미 안팎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단성사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외국영화 필름 임대료가 폭등하자 신작 상영도 힘들어졌다. 일본의 배급 체인과 손잡지 못한 채 필름 수급에 난항을 거듭하면서, "값싼 모더니즘, 아메리카니즘의 수입 선전"에 바쁘다는 서항석의 비아냥은 차라리 그리운 것이 된다. 사진1. 토키 극장으로 개축한 단성사 출처: 『조선과 건축』 1935년 2월호 사진2. 남촌에 신축 개장한 명치좌 출처: 『조선과 건축』 1936년 12월호 조선극장이 화재로 전소(1936)된 이래 북촌 유일의 개봉관이었던 단성사는, 결국 1939년 명치좌 관주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인수된다. 쇼치쿠 체인의 제2봉절관으로서 '대륙극장'이라는 새 이름과 함께 30여 년의 단성사 역사도 시대의 저편으로 기울어 간다. 제 기능을 잃은 보신각과 돈화문을 보며 조선왕조를 떠올리듯, 대륙극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북촌의 밤을 지키는 단성사도 누군가에게 '기억의 터'가 되었으리라. 1)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5)」《동아일보》 1935년 7월 2일자, 석간 3면 2) 이마동 그림·양산(凉山) 신남철 글,「서울풍경 (6)」《동아일보》 1935년 7월 7일자, 석간 3면 3) 이마동 그림·경안 서항석 글,「서울풍경 (7)」《동아일보》 1935년 7월 9일자, 석간 3면 상단 그림 1. 동관 네거리 출처: 이마동, 「서울 풍경」 연작 중에서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백암동인(白岩洞人), 「경성 북촌 극장가 성쇠기」『비판』1938년 10월호, 74~76쪽. 지금이나 조금 오래 전이나 사십만 부민 때나 칠십만 부민 때나 경성의 소위 북촌에 극장이라는 것은 늘은 것은 없고 오히려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이면 기생퇴물 같이 얼굴이 시퍼러둥둥한 헌 건물의 우미관과 싸움투성이의 단성사라는 것이 있고, 조선의 흥행극장이나마라도 기업적으로 연극단체를 조직해놓고 통제적으로 극장을 경영하는 동양극장이 새 깃발을 들고 나온 것뿐이다. 우리들이 무엇이나 지나간 것을 너무 캐고 비판한들 돌아오는 그 문제만큼은 신통할 것 없으니 조선극장, 단성사에 대해서는 현재가 너무 비참하니 윤곽만 잠시 말하고 동양극장에 대하여 아는 데까지 써보기로 하자. 조선극장이 처음 세워지기는 현재 불탄 자욱만 남은 인사정 [필자 주: 仁寺町, 인사동] 인데 내지인 조천(早川)이란 사람이 세워놓고 얼마하다 이태진(李泰鎭)에게 넘어가고 그 후 김찬영에게 그리고 현재 제일극장의 관주인 미나토(ミナト)에게 팔려 넘겼었는데, 물론 그 사이에 현철, 신용희, 김조성 등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추잡한 문제를 일으킨 적도 많고 또 어느 때는 양화(洋畫) 제일봉절(第一封切)로 경성에서 내로라 하고 행세한 적도 있었으나 그나마라도 지금 극장이나 있고 무엇을 한다면은 우리가 무엇이라고 문제라도 붙여보겠으나 세상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아느니만큼 가정적으로도 불행한 일청년(一靑年)의 성냥불 장난으로 다 타버리고 땅덩어리만 남아 겨울에는 가련하게도 스케이트 장, 그렇지 않으면 시골로 다니는 곡마단 부스러기가 와서 지나가는 행인의 고개를 기웃거리게 할 뿐이요, 우미관이래야 5전 입장료를 받을 때를 최고로 지금은 경성 내에서 제일 더러운 집으로 소위 “겡가도리" [필자 주: 喧嘩どり, 싸움꾼이라는 의미] 의 소굴이던 우미관패의 잔해가 그저 남아있는 것 같고, 제일극장이래야 그 역 우미관류이며, 오직 북촌에서 문제되어 때로는 서로 경영상 혹은 영업상으로 경쟁도 하고 흥행방식을 때때로 꾀하는 것도 결국 동양극장과 단성사뿐이다. 단성사라면 조선사람의 머리에는 아직까지도 머리에 인상이 깊은 것은 고(故) 박승필 씨가 처음 시작해서 중간에 그 분이 돌아가고 박정현 씨가 맡아 하게 되고 그 후의 여러 가지 추문, 소문 등이 많았어도 경영체는 늘 박씨의 일파에서 해온 것으로 북촌에서 조선사람의 극장 경영은 오직 이 하나뿐이었고, 무성영화 시대의 조선영화는 거의 다 단성사에서 봉절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극장을 신축하고 최신 RCA 영사기를 배치하여 한때는 전 경성(全京城)의 양화 봉절관으로 수위를 점령했던 것도 지금에는 옛 꿈, 갖은 비화(悲話), 애화(哀話)만 자아내고 있을 뿐이다. 단성사가 오늘날 이렇게 쇠퇴하게 된 제일의 원인은 물론 가급적 현대적 설비를 해놓은 명치좌, 약초극장 등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2류 극장으로 아니 떨어질 수 없었지만, 결국 단성사를 오늘날 비경(悲境)에 빠지게 한 것은 신무대 때문이요, 지엽적으로 조그마한 문제를 든다면 내부의 추잡한 문제를 들 수 있으나, 그것은 그만두고라도 단성사를 신축할 때에 그 설계의 빈약함을 지금 또 탓을 아니 할 수 없다. 일지사변 [필자 주:日支事變, 중일전쟁] 이 나기 전까지도 조선극장이 그 뒤터를 더 사서 늘여서 크게 지려다가 옆집에서 땅을 아니 파니까 할 수 없이 그냥 그 터로 4계(階)로 짓는다고 했고 구(舊) 종로서 터에 모(某)가 극장을 짓는다는 둥 또는 공평정 [필자 주:公平町, 공평동] 공설시장 비스듬히 건너편 광장에 내지(內地)의 재벌이 나와 극장을 짓는다는 소문의 소문이 돌아다녔으나 북지(北支)의 총소리 한방으로 그런 말은 꼬리를 없애버리고 오직 현재는 숨넘어가는 어린애와 같은 운명에 있는 단성사와 조선 흥행극계에 무적함대와 같이 돌진해가는 동양극장이 있을 뿐이다. 동양극장이 처음 개관식을 하기는 소화(昭和) 10년 가을인 모양인데 지금은 고인이 된 홍순언 씨가 극장 명의 관계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 씨와 형식상으로 손을 잡고 실상의 극장의 경영은 한때 조선문단에 너무나 거탄적 존재이며 신문연재소설의 왕좌격이던 최독견 씨를 지배인으로 맞아들인 홍순언 씨의 두뇌의 명석함을 가히 짐작할 바니, 최독견 씨가 동양극장의 모든 일을 맡아가지고 오늘날까지 일하여 왔는데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연극은 기업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조선에서 뚜렷이 보여준 이가 최씨이며 배우들도 연극으로 생활을 안정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넣어준 것도 최씨이니 현재 동극 [필자 주: 東劇, 동양극장의 줄임말] 에서 매월 월급을 먹고 있는 사람이 이백여 명이요, 배우들도 전부 매월 최저 사십오 원에서 최고 백여 원의 월급을 받고들 있다. 동극이 처음 탄생할 때에 큰 공로를 한 분이 현재 동극 문예부에 있는 이운방 씨인데, 그 분의 알선으로 청춘좌라는 것이 조직되었는데, 그의 멤버는 대개 토월회의 후신이라고 할 만한 송영, 서월영, 박제행 씨 등이 중요한 멤버이었다. 이 청춘좌는 주로 동양극장에서 경성 손님을 상대로 하려고 조직한 것이니 그 다음 지방순회극단을 조직하여야 하겠으므로 동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하였다. 그리고 또 새로운 시험으로 조선에서도 손님을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극단을 조직해보겠다는 것이 주점(主點)으로 희극좌라는 것을 또 조직해서 수차 흥행을 하여보았으나 아직 조선에서는 일러(그렇다면 오늘의 조선의 연극팬은 눈물을 즐겨하는 모양이다.) 결국 실패하고 동극좌와 희극좌와 합병을 시킨 것이 결국은 금일의 호화선이라는 것인 게, 결국 동양극장의 달러 상(箱)은 청춘좌이다. 그러면 오늘날 연극을 궤도에 잡아 올리고 통제와 기업적 조직 아래에서 연극흥행을 해나가며 배우의 이상과 출세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오늘의 동양극장이라면 그것을 운전해온 사람이 즉 최독견 씨이다. 조선의 연극흥행에 있어서 그의 공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금년 봄에 들어가 동양극장에서는 이중흥행을 하여 낮에는 영화를 2회 상영하고 야간에만 평상대로 연극을 상연하는데 이것이야 재래의 연극 주야 2회 상연으로 인한 배우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피로에 완전히 구해냈다고 볼 수 있으며, 극장 경영상이나 연극의 질적 향상이나 사회적 문제로 보더라도 배우들의 보건을 위하여 크게 기뻐할 바다. 그런데 그 극장의 설계가 얼뜬 보기에는 객석을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으나 실은 무대에 돈을 더 들이고 연구를 하여 조선에서는 처음 보는 회전무대라는 것을 만들어왔다. 이렇게 비약과 진전이 있는 데는 물론 여러 가지의 문제가 없을 수 없어, 혹은 청춘좌의 일부 배우가 탈퇴를 하여 중앙무대라는 것을 조직해서 중간극이니 무엇이니 해봤으나 결국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금년 5월 1일 동양극장은 여러 가지 풍문 속에서 극계의 성공아 최독견 씨의 손에 경영일체가 넘어가고 말았다. 과거의 동양극장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현재의 동극의 전권을 장악한 최씨의 수완을 크게 기대하여도 좋을 것이나 벌써 들리는 말에는 조선영화 배급계의 오소리티 [authority] 인 이창용 씨와 같이 경성촬영소를 매수하여 조선영화제작도 한다 하니 불행과 비운만 거듭하던 조선흥행계에서 기린아 최독견 씨의 앞날의 원대한 성공을 빌며 붓을 놓는다.
단성사는, 연예계를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교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선 사업을 할 목적으로 지명근(池明根), 박태일(朴太一), 주수영(朱壽榮) 등의 한성 상인들이 발기하여 1907년 파조교(罷朝橋) 인근에 세운 극장이다. 개관 초기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신파극을 연행하는 데 적절치 못할 정도로 무대가 좁아서 임시로 내부를 수리하기 위해 영업을 정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경영 미숙과 전황(錢荒)으로 인한 곤란으로 단성사의 경영자와 소유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단성사는 경영 상태 정상화를 위해 파노라마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전기호접무(電氣胡蝶舞), 환등, 활동사진 등이 공연되었다. 1913년 안재묵(安在黙)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획득하며 대대적인 신축을 단행한다. 1914년 1월에 신축 낙성된 단성사는 총 건축비 1만 1천 원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서양식으로 장식했고 내부는 일본식 극장 구조를 따랐다. 정원 1,000명 규모의 객석은 1, 2등석(2층 객석 및 박스석)에 다다미를 깔아 신을 벗고 입장하도록 했고, 1층의 하등석에는 장의자를 깔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호화롭게 신축한 단성사는 1915년 2월 18일 화재를 당해 벽만 남은 채 소실되었다. 상등석 옆방에서 차를 팔던 안성범(安聖範)이 연극이 파한 후 화롯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는데, 이것이 다다미에 옮겨 붙어 극장 전체를 태운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안성범은 안재묵의 아버지로, 결국 실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 2. 화재 직후 단성사(《매일신보》 1915년 2월 19일자, 3면) 김연영(金然永)에게 돈을 빌려 극장을 신축했던 안재묵은 이 화재로 파산, 단성사의 소유권은 채권자 김연영에게 넘어갔다. 김연영은 내부를 수리하여 1915년 5월 단성사를 재개장했으나, 그 시설은 화재 전보다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 김연영은 황금유원의 소유주인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에게 단성사를 매각한다. 다무라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朴承弼)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단성사의 관객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는 데는 조선인 경영자가 적합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성사의 활동사진관 전용 허가를 신청한 지 수개월 만인 1918년 6월, 드디어 경기도 경무부로부터 허가 지령이 떨어진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부적절하다며 신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허가를 내주었다. 박승필은 1918년 8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창립 9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1만 원의 예산을 들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단성사를 개축한다. 사진 3.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지어진 단성사(《매일신보》 1918년 12월 21일자, 3면)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단성사는 수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일본의 영화회사 텐카츠(天活, 天然色活動写真株式会社)와 특약을 맺어 필름을 확보했으며, 조선인 변사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서상호(徐相昊)를 변사주임으로 한 5~6인의 변사진을 구성했다. 또한 활동사진관 운영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성고등연예관과 우미관에서 실무를 맡아 왔던 영사기사 박정현(朴晶鉉)과 손을 잡았다. 박정현은 1918년 단성사로 건너와 지배인(감독)으로서 실무를 책임졌으며, 박승필 사후에는 직접 단성사를 이끌었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경영이 곤란하던 양대 신파 극단, 즉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를 후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이 두 극단은 단성사 전속 극단 역할을 수행하며, 서울 공연과 지방 순회를 번갈아 공연했다. 이와 관련한 박승필의 회고를 인용해 보자. “ 신극운동을 발뎐식키려 틈틈이 배우 량성에 주력하엿스니 한 비극 ( 悲劇 ) 과 검극 ( 劍劇 ) 으로 장안에 일흠을 치든 림성구 ( 林聖九 ) 며 말 잘하고 모험극 ( 冒險劇 ) 잘하기로 유명하든 김도산 ( 金陶山 ) 가튼 명배우도 모다 박씨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 세상에는 림성구라면 모르는 안악네가 업고 김도산이라면 모르는 청년이 업지만은 그들의 배후에 박승필 씨가 잇슴을 아는 사람은 적엇슬 것이다 . 이와 가티 박씨는 구극과는 새이가 멀어지고 신극에만 주력하게 되엿다 . 라서 신극흥행 ( 新劇興行 ) 을 서울에서만 치지 안코 전 조선적으로 진출하려 림성구 군을 중심으로 혁신단 ( 革新團 ) 을 조직케 하고 김도산 군을 중심으로 신극좌 ( 新劇座 ) 를 조직케 하야 혁신단과 신극좌가 서로 교체하여 지방을 순회하게 하엿다 .” 1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한 직후 단성사는 텐카츠로부터 키네오라마 [필자 주: 특수 기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환영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 기술을 도입하여 장치하고, 1919년 5월부터 변사들을 출연시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옥(殺獄) 사건을 소재로 <탐라의 사몽(詐夢)>이라는 변사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곧 변사극보다는 전문 신파 극단에 의한 전기응용신파극 [필자 주: 전기(電氣) 장치를 동원하여 효과를 내는 무대극 ] 이 나으리라 판단, 신극좌와 혁신단로 하여금 전기응용극을 만들기로 하여 우선 신극좌의 좌장 김도산을 일본에 보내 키네오라마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리고 흩어진 혁신단도 재조직하여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전기응용극을 시작하도록 한다.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던 신극좌와 혁신단은 전기응용극에서 더 나아가 차례로 연쇄극을 제작한다. 첫 작품은 신극좌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이어 <형사의 고심(刑事苦心)>과 <시우정(是友情)>이 만들어진다. 사진 4. 연쇄극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3면) 1919년 10월 27일부터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원래 5일만 상연하기로 했으나 큰 인기에 힘입어 11월 18일까지 무려 25일이나 계속 상연되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싼 가격에 상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 연쇄극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연쇄극의 황금기를 지나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자 단성사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를 초빙하여 <장화홍련전>(1924)을 직접 제작한다. 나아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이 조직되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영화인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토키영화의 상영이 본격화되자 단성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1930년 설날을 맞아 조선 최초로 토키영화를 상영했고, 나아가 토키영화관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더불어 신무대라는 전속 극단을 두어 연극 공연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이어갔다. 1931년 1월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한다. 전술한 대로, 이후에는 박정현이 운영자가 되어 단성사를 이끌게 된다. 박정현은 토키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할 수 있도록 단성사 신축을 결정한다. 1934년 신축된 단성사는 650석 규모로 이전보다 객석이 대폭 줄었으나, 토키 상영용 영사기를 비롯하여 냉난방 시설과 각종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축 후 단성사는 지속적으로 경영난에 봉착한다. 단성사 보다 조금 늦게 신축된 약초극장, 명치좌, 황금좌 등은 단성사보다 객석도 많았고 시설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실시되자,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단성사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사이의 프로그램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서양영화의 대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단성사의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연극 극장으로 전환 등 자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외화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영난도 가속되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박정현 등의 단성사 운영진은 결국 파산했으며, 1939년 그 운영권이 명치좌를 운영하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간다. 이시바시는 단성사를 명치좌의 2번관으로 두었으며 이름도 대륙극장이라 바꾸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는 줄곧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존재하다가 2001년 철거, 2005년 멀티플렉스로 재건축된다. 그러나 이 역시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고, 2015년 영안모자가 인수하여 현재 단성골드쥬얼리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8) / (2) 흥행계의 노장 박승필 씨」《중외일보》1929년 11월 2일자, 조간 3면 참고문헌 이순진,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 사진 1(글 상단). 토키영화관으로 신축된 단성사 [자료] "신축 낙성한 단성사", 《매일신보》, 1914.01.17. 경셩 즁부 동구안에 잇 , 연극쟝 단셩샤를 헐고 , 로 짓 다 은 , 이젼에 여러 번 , 긔 한바 , 작년 七 월에 , 역 를 시작 야 , 임의 집 건츅은 다 맛치고 , 구력 안에 부 슈졍 지 , 젼혀 맛칠 터이라 간 수가 , 일 륙십팔 간에 , 무 가 삼십이 간이오 , 관람쟈의 뎡원이 , 일쳔 명이오 , 뎐긔 등이 , 합 일 오십 오 , 안은 일본 졔도 , 밧갓 졍면은 , 셔양 졔도인 일이등셕은 젼부 다다미를 랏고 , 하등셕도 쟝교의에 , 안져 보게 되얏스며 기타 여러 가지 구죠와 쟝식이 , 조션의 연극쟝으로 젼도에 뎨일이 되겟스며 , 구력 졍월 초하로날브터 , 기 의 연쥬회로 , 첫 번 무 를 연다더라 , 총 건츅비 일만 일천 원 [자료] "단성사가 팔려", 《매일신보》, 1917.02.18. 경셩에 다만 한아 잇 조션인 측의 연극쟝이라 동구안 단셩샤 그 소유주인 김연영 ( 金然永 ) 으로브터 황금뎡 거 황금관 쥬인 뎐촌 모의게 팔쳔오 원의 가 으로 도되야 십륙일에 금젼 여슈 지 맛추엇 댱 에 연극댱은 활동사진 젼문으로 곳쳐서 조선인 관람자를 흡슈 기로 위주 야 죵 이것을 경영 우미관과 경 을 리라더라 . [자료] "단성사의 개축, 활동사진을 한다", 《매일신보》, 1918.06.21. 됴션의 연극장 즁 한아 되 동구 안 단셩샤 작년 봄에 황금관 쥬인 뎐촌이란 사 이 팔쳔오 원에 가지고 활동사진을 영 기 위 야 광무 박승필 씨에게 경영쟈의 권리를 위임 야 그 일홈으로 당국에 쳥원 고 허가되기를 긔다리던바 다소 년 월을 지 여 지나간 십삼일부로 경긔도 경무부로부터 소관 경찰셔에 허가 지령이 왓슴으로 죵로경찰셔에서 십 일 활동 진의 흥 주 되 박승필 씨를 불너다가 신긔 셔댱으로부터 장 쥬의 건에 야 세히 일너준 후 그 지령을 주엇다 지금의 단셩사 집으로 영사 적소가 못됨으로 확댱 기 위 야 일만 원의 예산으로 그 안을 모다 헐고 다시 지은 후 오 구월부터 시작되리라 목하 설계가 맛치 로 곳 역 에 착수 다 이 뒤부터 신구파 연 극장은 아죠 업셔진 모양이라더라 . [자료]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매일신보》, 1918.12.21. 동구안 단셩사를 여러 천원의 거 으로 사드린 후 본 목뎍 바와 갓치 세샹에 모범뎍 활동사진을 영 야써 일반 관람에 졔공 기로 작뎡 얏던 결과 그 뒤 모든 범 ○ 과 계획이 쥰비되야 슈만의 거 과 슈삭의 공졍으로 오날 단샹사 신츅 얏도다 이 젼혀 영리를 위 야 금거히 쥰비 것이 안이오 다만 활동사진의 영 다 쇼문이 퍼지 이를 라 경향의 활가 졔씨의 갈망이 졀졍에 다을 외라 겸 야 녯것을 양 고 것을 요구 것이 현 됴 ( 現代思潮 ) 임으로 본 관주가 미리 이를 닷고 급셩 공 로 이에 쥰공을 맛치엿슴니다 본관은 본 쥬지가 타관에 비 야 현져히 다른 뎜이 잇 바 즉 만흔 돈으로써 참신긔발 됴흔 사진을 가져다가 아모죠록 일반의 호평 즁에셔 영업도 발뎐코져 주지임으로 디 유명 활동사진쥬식회사 몃 곳과 임의 특약을 고 수만원의 보증금을 붓치엿스니 이를 보더라도 가히 본관의 로심초 을 아실 일이라 그 안이라 활동사진에 야 본 관주 항샹 유감히 각 바 갑 만코 용 죠흔 진을 영 때에 변 의 셜명이 불충분 야 일반 관람 시는 니의 불만족과 불평의 셩이 남을 라 역시 진의 가치도 업셔지 일이 잇셔셔 본 관주의 삼슉고 『 熟考 』 로 활동게의 호평잇고 갈 밧 ... 안이 구변으로 뎨일류되 셔상호 『 徐相昊 』 군을 특이 초빙 야 변 쥬임으로 뎡 고 텬연 표졍과 그럴듯 익살 잘부리 변 와 희로 락을 긔묘 게 아 변 합 오륙인이 잇셔 일 밤 무 우에셔 일거일동에 셜명은 참으로 본 관주의 랑 안이오 장 보아가시 로 평판이 잇 오리다 겨울밤은 졈졈 길고 눈이 나와셔 에 가득이 싸인 실상 젹막 기 이 없슬 별별 겨울에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본관에 오시고 보면 란로 몸을 듯하게 야 주고 셜 갓흔 하얀 포장에 참 쳐음보 긔긔괴괴 진이 다 빗치일 적마다 여긔가 졍말 락쳔디인가보다 감샹이 유연히 발 실 터이요 야반에 소견거리 이 우에 더 업슬 줄로 각 니다 敬具 本館 映寫 中 은 年中 晴雨 를 不計 고 開演 기로 酌定 이온바 特 히 日曜日 及 祭日 에 晝夜 映寫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