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장애인의 역습
- 감독
- 박종필
- 제작년도
- 2009
한 달 전이었다. 겨우 한 달 전의 일이다. 마감 때문에 저녁을 못 먹고 늦게까지 일한 날이었다. 속이 쓰렸다.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전화한다며 짐짓 건조한 말투였지만 떨림이 가득했다. 음색만으로 겁이 났다. “일란이 많이 아파. 위암이래.” 용산참사를 다룬 < 두 개의 문 >, 그리고 후속작인 < 공동정범 >을 만든 김일란 감독의 소식이었다. 상황에 대한 설명이 계속됐지만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다. 화가 났다. 목구멍이 먹먹해지고 빈속이 뒤집어졌다. ‘왜?!’란 말만 되뇌었다. 어두운 길이 현실적이지 않게 캄캄했다. 그러다 문득 지난겨울이 떠올랐다. 촛불이 가득 찬 광화문 거리, 집회가 매주 이어지던 어느 주말이었다. 모여 있던 미디어 활동가와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이 집회 행진을 촬영하러 흩어졌다. 캔커피로 언 손을 녹이는 데 상황실을 맡고 있던 김일란 감독이 “한주도 안 쉬었어. 진짜 힘들다”라며 툭 진심을 꺼내 놨다. 웬만해선 힘들다는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그게 우리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을 나누지 못해 미안하기만 했다. 미디어 활동가들과 독립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서 주류 매체가 외면했던 거리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작년 겨울에도 늘 그랬던 것처럼 자기 ‘역할’을 다 하며 거리를 지켰다. 그 자리에 박종필 감독도 있었다. 김일란 감독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요일 오후였다. 전화가 왔다. 세월호 관련 다큐멘터리를 배급하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곤욕을 치룬 시네마달의 대표 김일권 피디였다. 세월호가 인양된 후부터 목포에 내려가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촬영 중이던 박종필 감독의 소식을 전했다. 7월 초부터 연락이 안 돼 다들 걱정하고 있던 박종필 감독을 만났단 말과 함께 그가 간암이라고 했다. 그리고 알고 있어야 할 사람들에게 전화 중인데 다른 이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박 감독이 원치 않는다고. 당부했다. 세월호 촬영 중에 아프면 사람들이 세월호 때문에 아픈 거라 할 테니 그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안 된다고. 병세로 변해가는 자신의 낯선 몸을 마주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염려하고 배려한다. 박종필 감독은 내겐 큰 선배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의 다큐멘터리 속 주인공은 유난히 멋졌다. 그런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샘났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주인공을 피사체로만 여기지 않고 그들과 삶을 나눴고 그로 인해 그의 주인공이 더 멋져 보일 수 있단 것은 나중에 알았다. 20년 동안 박종필 감독은 99년 <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실직 노숙자 >를 시작으로 무수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홈리스운동과 장애인이동권운동을 함께했다. 최근에는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활동과 퇴진행동 미디어팀에서 활동했다. 독립다큐멘터리만을 상영하는 영화제인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어려운 재정 상황에서도 같이 꾸렸다. 그는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원칙주의자여서 종종 주변을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원칙들에 선뜻 동의가 돼 구박하면서도 함께했다. 존재 자체가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박종필 감독 덕분에 덜 외로웠던 사람들이 내내 함께 했다. 다행히 가는 길 외롭지 않았다. 두 감독의 일은 대부분의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자신의 일처럼 충격을 줬다. 그들 대부분이 제작비와 생활비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만나면 건강검진은 하고 있는 지 묻게 된다. 하지만 건강검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란 걸 잘 안다. 7년 전 생활고에 생을 마감한 숲속 홍길동이라 불렸던 이상현 미디어 활동가가 있다. 이상현은 장기투쟁사업장을 누비며 외로운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회사의 폭력을 기록하고 경찰의 탄압을 기록했다. 그런 그가 생을 마감할 때는 단순히 생활고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 미래가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떠나고 그가 지켰던 투쟁사업장들이 나섰다. 그와 그의 카메라 덕분에 경찰에게 덜 맞았고 덜 외로웠다며 마음을 모았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주축이 돼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이하 현카)이란 지원제도를 만들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10년 넘게 비정규직 투쟁을 했다. 그 현장에도 이상현 영상 활동가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박종필 ’인 김천석 미디어 활동가도 있었다. ‘현카’는 제목 그대로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주기 위한 지원제도다. 여느 지원제도와는 달리 활동에 지원해주는 제도다. 지원의 성과로 영화가 나오지 않아도 된다. 생활비로 써도 되는 지원금이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후원금으로 일 년에 한번 지원한다.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의 현물지원도 있지만 한 팀이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은 많아야 200만원이 전부다. 지원금으로 밀린 월세를 낸 감독도 있고 새롭게 들어가는 작업의 장비를 장만한 감독도 있다. 적은 지원금이지만 그들에게는 작업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로 활동을 계속하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올해는 6팀에게 지원을 했다. 개인의 마음이 모인 후원금이라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지원해야 할 곳은 많고 지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매번 드는 생각은 개인의 선의로만 우리의 삶이 유지돼야 할까 하는 질문이다. 우리도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시스템 속의 존재들이다. 하지만 시스템은 너무 멀고 혹은 우릴 외면한다. 가까운 사람들의 아픔이 내게로 온전히 전해지면서 버거웠지만 또한 무뎌져서 흐릿했던 지난 십 년의 시간이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미 임계점을 넘어선 상황을 그저 버티고만 있었다. 가장 가까운 시스템은 영화진흥위원회다. 언젠가부터 영화를 문화가 아닌 상품으로만 여기는 영화진흥위원회는 독립영화를 골방의 몇몇을 위한 영화로 치부했다. 독립영화제작지원사업의 명칭을 교묘히 변경하며 독립영화의 자리를 협소하게 만들고 관련 인프라를 파괴해 관객을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방향의 변화를 분석한 「무엇을 위한 진흥인가? 영화진흥사업의 목적과 비전 그리고 흐름」(김지현, 독립영화 정책연대, 중앙대학교 전임연구원)를 보면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동안 어떤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산업과 영상문화의 조화로운 발전’을 한국영화진흥종합계획의 비전으로 삼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구를 찾아볼 수 없다. 최근 세부사업을 보면 ‘투자자본 안정화/투자출자사업’이란 사업에 전체 예산의 30%를 사용하고 있다. 문화는 빠지고 오직 산업으로서 영화가 있는 것이다. 정작 창작자들을 위한 지원은 8.6%가 전부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독립다큐멘터리의 공공성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다. 독립다큐멘터리가 이 사회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독립다큐멘터리에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그것을 진흥해야 하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산업만을 중심에 놓고 사업을 펼치고 있는 현실에서 또 다른 오독을 만들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새롭게 제정된 <문화기본법>을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제4조(국민의 권리)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없이 문화 표현과 활동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자유롭게 문화를 창조하고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문화를 향유할 권리(이하 ‘문화권’이라 한다)를 가진다.” 독립영화를 한다는 것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공공제로서 독립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아주 보편적인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권리를 행하면서도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더 이상 억압받지 않아야 한다. 아프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작업하고 싶다. P.S. 태준식 감독의 칼럼 ‘또 다른 박종필들’(한겨레 시론 8월 1일 치)와 김동령 감독의 칼럼 ‘또 다른 박종필들 2’(한겨레 칼럼 8월 7일 치)에 이어서 제목을 ‘또 다른 박종필들 3’으로 쓴다. + 상단 사진은 오마이뉴스 기사의 사진을 활용하였습니다. ⓒ 최윤석
너무 오래 했어.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물러난 후 누군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말에 내가 답하는 말이다. 그렇다. 너무 오래 했다. 오래 하고 있다는 생각도 오래전부터 했었다. 한 영화제에서 집행위원장을 15년이나 했다. 외국의 어느 영화제를 보면 누군가 프로그래머를 15년 넘게 하고 있다거나 20년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존경스러운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한국의 국제영화제들에서 선배들이 자의가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의 부당한 압력이나 애매모호한 이유로 타의에 의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볼 때 나는 꼭 스스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스스로 물러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개인적인 영광일 뿐이다. 서울독립영화제가 나름 내실을 기하면서 안정적으로 열릴 수 있게 기여했고, 독립영화의 위치를 어느 정도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지만, 오랜 기간을 있으면서 독립영화의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고 새로운 창작자들의 작품과 그들의 목소리에 얼마만큼 귀 기울였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그것은 내 몫이 아니라 영화제를 새롭게 꾸려갈 다음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했고, 변화와 발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창작자와 관객의 매개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독립영화계에 신선한 활력과 자극을 불어넣는 영화제의 순기능을 잘했는지도 스스로 평가하기 어렵다. 또한 공적 지원에 의존해야 하는 태생적인 구조 속에서 스텝들의 안정적인 고용상태와 적절한 활동비를 확보하는데도 큰 어려움들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사실 중간에 독립영화의 위기가 없었다면 내가 그만둘 수 있는 시기는 더 빨랐을 것이고, 서울독립영화제와 독립영화는 물론 나 역시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MB정부 들어서면서 혹독한 감사를 받고 영화제를 비롯한 많은 지원들이 부당하게 중단되고, 노골적인 탄압이 공공연해지면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 외부의 개입으로 인해 지금 이것만이라도 지켜내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독립영화가 정권 수뇌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존재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지만, 그 이유 때문에 지원 대상에서 탄압의 대상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상황은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무력감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그저 버티기만 했던 부끄러운 시기. 그런 시기는 오래도록 계속되어 왔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기쁘고 환호할 일도 많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쌓여있다. 15년이 지나는 동안 많은 일들을 했지만, 더 많은 할 일을 두고 나온 느낌이다. 그렇기에 그닥 즐겁지도 않고 홀가분하지도 않고 무언가 어정쩡한 상황에서 2017년을 보내고 있다. 돌아보면 독립영화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목표로 했던 것으로 하나하나 이뤄가는 재미와 성취감이 있었다. 영화제를 통해 수많은 감독과 배우들을 만났고, 독립영화전용관이 만들어지는 것도 보았고, 독립영화들이 힘겹지만 기쁘게 수많은 관객들과 조우하는 것도 목격할 수 있었다. 삶과 투쟁의 현장에 함께 있지 못했지만, 영화를 통해 그것을 접하고 분노하며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함께 했던 나를 포함한 동료들이 지금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얼마 전 동료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훔치기만 했던 나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삶과 투쟁의 현장을 지키면서 묵묵히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나는 자리에만 죽치고 앉아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많은 것을 이루고 지켜봐 왔다고 생각한 내가 해낸 것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영화와 관련된 영화제들, 사랑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초라하고 이게 다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누구 말대로 나는 그것을 진정으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좋아한 나르시시스트는 아니었는지. 슬픔과 우울함, 반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반성으로 그쳐서도 안 될 테고, 무기력과 우울에서는 빠르게 벗어서 무언가라도 해야 한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미 준비된 집행위원장과 스태프들이 있으니 똥차도 없어진 마당에 훨훨 잘될 것이라 믿는다. 독립영화 역시 쌓여왔던 적폐를 걷어내고 이전 정부 이전에 행해졌던 정책들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면서 창작자들의 창작권 보호와 독과점 문제 해결, 독립영화의 배급 유통 환경을 개선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지키면서도 관객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울독립영화제는 내게 활동의 무대였고 활력소 자체였지만, 스트레스 가득한 직장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가 창궐하는 시대에 큰 역할을 부여받고, 젊음의 패기만을 안은 채 기대와 주목을 받으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그때의 시기가 대견하다고 생각한다. 힘들었지만 많이 행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다. 과거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후배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독립영화 창작의 무대에서 독립영화가 상영되는 공간에서 여러 정책이 생산되고 실행되는 공간에서 독립영화인의 정체성과 명예를 가지고 활동할 것으로 스스로 다짐해본다. 끝으로 차마 SNS에서도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 박종필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평안하기를. 미안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