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리 - 리덕스
- 감독
- 박준범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태인호, 김준영, 김우석, 윤가람, 정수연, 송교빈, 강혜란, 김현, 박동민, 박상규, 박세현, 안현준, 노현범, 박준범, 경성대학교 연극영화학부 열린 연극제팀원들, 공유현, 조왕섭, 손승유, 장시연, 박성일, 서경만, 제은화, 김유진(남), 김유진(여)
< 도다리-리덕스 >(2011)를 만든 박준범 의 세 번째 단편인 < ..에, 묻다 >는 짧은 러닝타임, 한 마디만 등장하는 대사,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단편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16mm 흑백 필름의 질감은 이 영화의 담백한 서사, 배우의 섬세한 연기와 어우러지면서 정서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에 사용된 말줄임표와 쉼표는 이 영화의 미니멀한 형식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어조에 담긴 무드를 포함하는 역할을 한다. 한 남자가 버스에 타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잠에 빠져들면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곧이어 잠에서 깨어 급하게 내리는 여자 때문에 남자의 옷소매에서 단추가 떨어진다. 남자가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주머니에서 초코볼을 꺼내 먹고 남자는 집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초코볼을 산다.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던 어느 날, 그는 우두커니 앉아서 초코볼을 먹는다. 이 단순한 이야기 안에서 사건은 남자의 단추가 떨어진 것과 그 이후 만나지 못한 여자의 흔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진 단추를 다시 발견하고 의자 깊숙이 밀어 넣는 것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시의 밤 풍경을 바라보는 편안한 남자의 표정, 밖으로 꺼낼 것까지 없다는 듯 수줍게 감정을 숨긴 남자의 미소, 버스 종점에 내린 남자가 주머니에서 초코볼을 꺼내 먹을 때의 얼굴에서 엷은 감정이 언뜻 내비친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툭 던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파동처럼 이야기의 표면 위에서 나아가지 못한 감정들이 주변부로 확장된다. 마지막 씬은 늘 앉던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음악조차 듣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텅 빈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놓인 카메라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 떨어진 단추를 근접해서 바라볼 때 고여 있던 감정이 현재는 지나가버린 감정의 상태로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떨어진 단추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남자가 버스 한구석에 묻어버린 감정에 대한 기록이자 밤의 풍경에 대한 스케치다. 박준범 은 남자의 얼굴과 걸음걸이, 그가 행하는 사소한 제스처에 집중할 뿐, 여자와 남자 사이에 생길법한 감정의 교류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색 음영이 엷게 스며든 도시의 공간과 밤이라는 시간이 빚어내는 감정의 조화는 배우 태인호의 연기로 인해 더욱 섬세하게 표현되고 정밀하게 세공된다. 그의 미세한 표정변화는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입한 여자와의 첫 대면, 그녀의 어깨에 머리가 닿았을 때의 놀라움, 여자의 손이 그의 다리로 툭 떨어질 때의 긴장,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의 반가움으로 변주된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감정, 머뭇거리면서 잠정적인 상태에 머물 뿐인 스쳐 가는 현재를 포착하기 위해 박준범 은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바라보는 유동적인 도시의 풍경과 살짝 움직였을 뿐인 감정의 상태를 불러들인다. 바로 그때, 이 영화가 깊이 묻어둔 것과 관객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비로소 조우한다.
1. 먼저 고백부터 해야겠다.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부닥치는 문제는 얼마나 어려운 형편에서 제작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자면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되기도 하지만, 간혹 반사 신경과 맞먹는 자기암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곁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함께 읽어보고 의견을 나누는 과정을 거치고 실제 촬영을 해야 하는 기간,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한두 번씩 영화를 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친한 감독의 경우뿐 아니라 얼굴만 알고 지내는 감독의 영화를 만날 때도 비슷한 감정이 생겨난다. 한 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도착하기까지의 노고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 매해 부산독립영화협회에서 부산독립영화에 대한 비평집을 만들면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각 영화에 대한 지지만이 해답일까, 라는 점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가 최초의 비평문을 만나게 되는 셈이라서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조금 더 따끔한 질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더욱 자세한 분석을 통해 이 영화가 놓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한 편의 영화가 생산되기 이전부터의 시간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영화가 성취한 지점에만 우리의 눈이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하곤 하지만 결과는 해마다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 작년은 『인디크리틱』 이 10년을 맞은 해였기 때문에 전 편집장과 감독, 필자들이 모여서 대담을 가졌다. 영화가 바뀌고 달라지는 것에 비해 우리의 글은 나아지고 있는가. 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일종의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나의 고민과 유사한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부산’과 ‘독립영화’, ‘비평’을 나란히 놓고 생각할 때의 잠정적인 결론은 최선을 다해 영화를 보고 서로 용기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비평에 대한 최초의 독자이자 영화를 제작한 감독과 그 영화에 대한 고마움을 되돌려줄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두 번째 고백이다. 2. 부산의 독립영화가 지나온 시간과 현재 진행 중인 길을 짚어볼 때 확실히 염정석, 전수일, 조성봉으로 대표되던 흐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알려진 이들을 제외하고 현재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몇몇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디지털 포맷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 최용석 , 박준범 , 장희철 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김지곤 , 오민욱 의 영화는 현재 부산에서 가장 단단한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다. 영화제에 상영되거나 극장에서 개봉했다는 결실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 젊은 감독들은 자신만의 관심사와 테마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접근하고 표현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와 그들의 영화가 던지는 질문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될까에 대해 고민한다. 최용석 의 <그와 동행>(2004), < 제외될 수 없는 >(2007), < 이방인들 >(2012)은 부재로 인한 고통과 상실, 슬픔이 애도로 이어지거나 실패하는 과정 그 자체를 다룬다. < 도다리 >(2007)에서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었던 박준범 은 작년에 < 디렉터스 컷 >을 완성했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영화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다. < 미스 진은 예쁘다 >(2013)를 통해 소박한 공동체의 복구를 염원했던 장희철 도 새로운 작품인 < 눈이라도 내렸으면 >을 올해 1월에 촬영을 끝내고 현재 후반 작업 중이다. 장희철이 꿈꾸고 함께 하기를 제안하는 만남을 통한 사람됨의 회복이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기대된다. 김지곤 은 < 할매 > 연작을 통해 산복도로라는 장소와 할머니 개인의 삶, 사적인 기억과 공적으로 진행되는 개발에 대해 세심하게 관찰하고 조심스럽게 사회적 배우의 삶을 들여다본다. 현재는 전직 악사라는 신선하고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 악사들 >의 믹싱 작업중이다. 부산에서 가장 과감하게 형식적인 실험을 하고 있는 오민욱 은 < 상 >(2012), < 재 >(2013)를 통해 ‘부산학’적인 실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하야리야 부대 자리에 시민 공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된 주변부의 장소를 통해 시간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현재 <초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부산독립영화의 지도가 이젠 꽤나 풍성해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편집실과 사무실 책상에서 작업하고 있을 새로운 시선, 새로운 태도로서의 영화를 기다리기 때문에 해마다 11월이면 설렘만큼의 고민으로 만들어진 책이 고맙다는 사실이 세 번째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