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에 우는 바람
- 감독
- 전수일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이충인, 박철, 김옥자, 조재현, 김명조, 김명곤, 최정운, 최헌곤, 김남화, 박성수, 유순철, 조학자, 조영진, 권남욱, 이재용, 박성진, 김성순, 김명곤 외, 최헌곤, 박태룡, 추율석, 문정임, 윤순심, 김남화, 조은하, 전용선, 김상오, 박해도, 하봉순, 정선영, 김성남, 정태현, 김복희, 하재영
예나 지금이나 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고민하는 주제가 있다. ‘우리는 왜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영화 만든다고 누가 떡 하나 던져주는 것도 아닌데 왜 영화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일까’. 이러한 고민은 다시 한 번 영화라는 형식을 빌려 무수한 형태로 표현되곤 한다. 임대형 감독의 첫 장편 독립 극영화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 역시 자신만의 영화를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여타 영화들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주인공도 물론 영화를 깊게 사랑하고 있지만 그의 영화 제작은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그 자신에 있어 영화란 일종의 종착지를 의미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충청남도 금산의 한 시골 마을에서 이발사로 일하는 중년 남성 모금산( 기주봉 )의 삶은 지극히 단조롭다. 매일 아침 일어나 이발소에 출근해 사람들의 머리를 깎고, 수영을 하고, 치킨집에서 맥주 한잔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들어가 강냉이를 우적우적 씹으며 TV를 보다 잔다. ‘금산’에 거주하는 ‘모(某) 씨’를 뜻하는 주인공의 이름만큼이나 이렇다 할 감흥도, 자극도 없는 삶이 꾸준히 반복된다. 하지만 이 삶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반복조차도 할 수 없게 될 위기에 놓인다. 조금 몸이 좋지 않아 찾아간 보건소에서 영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삶의 마지막에 놓인 모금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일탈을 시도한다. 수영장에서 길게 잠수도 해보고, 수영장에서 마주친 젊은 여성 자영( 전여빈 )과 진솔한 대화도 나눠본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는 서울에 살며 영화과에 다니고 있는 자신의 아들 모스데반( 오정환 )과 여자 친구 예원( 고원희 )을 부른다. 한때 소망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던 꿈인 ‘영화배우’가 되어 자신만의 영화를 찍고 풍진 세상에서 떠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고향에 내려온 모스데반은 어딘가 모금산과 서먹해 보이며 아버지의 영화 제작 프로젝트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이 와중에서 예원이 간신히 부자 사이를 중재하며 좌충우돌 영화 촬영이 시작된다. 과연 영화 제작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그리고 온갖 사건 사고 끝에 완성된 영화는 이 세 명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가. 문득 영화를 보면서 매년 가을경에 열리는 서울노인영화제가 생각났다. 노인과 노년의 삶을 소재로 한 청년-중장년 감독의 영화는 물론, 노인 자신이 직접 만든 영화도 골고루 상영하는 영화제다 보니 자연스레 전자와 후자의 영화가 비교될 수밖에 없다. 노인들이 만든 영화는 전문적으로 영화 교육을 받고 만든 것이 아니다 보니 상당히 투박하기 그지없다. 촌스러운 특수효과, 이러지리 툭툭 튀는 사운드, 어딘가 많이 본 것 같은 서사. 그에 비하면 청년-중장년 감독의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세련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인들이 만든 영화가 더욱 흥미롭다는 생각을 할 수밖엔 없었다. 많은 부분들이 어색할지라도 이들이 만든 영화는 삶의 황혼기에 영화에 대한 애정을 담아 자신이 그간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을 진솔하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 역시 그렇다. 모금산은 단조로운 자신의 삶만큼이나 지독하게 과거에 갇혀 있는 인물이다. 그가 아는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같은 오래된 배우들 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가 찍고 싶은 영화는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무성 영화이다. 영화의 극 중 극이자 모금산이 배우의 꿈을 이룬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가 만약 영화제에 출품되었더라면 예심을 통과하기도 무척 버거웠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모금산은 영화를 찍으면서 자신이 갇혀있던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과 조우한다. 삶의 종착지라 여겼던 영화 촬영은 예원의 적극적인 노력과 모스데반의 행보를 통해 점차 모금산 자신이 그간 직시하기를 꺼려했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제작된 영화는 질박해도 소소한 웃음을 낳는다. 그리고 다시, 영화를 만든 세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와 서로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이들에게 있어 영화 제작은 곧 사람을, 그리고 자신들이 놓여 있는 사회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구가 된 것이다. 비록 영화에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아무리 모금산의 삶이 철저히 과거에 놓여있던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군더더기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꽤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는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 전후를 제시하며 영화를 만드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치 서울노인영화제에 상영되었던 노인들의 작품들처럼 말이다.
아내가 어린 아들을 씻기고 있고, 남편은 그 옆 싱크대에서 오줌을 눈다. 아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남편을 타박해도 그는 태연하다. 오줌을 다 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 남편은, 방금 씻고 온 아들을 꼭 껴안고 누운 채 TV를 본다. 어찌 보면 조금은 엉뚱하고 정겨워 보이기까지 한 일상의 풍경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영화의 이 장면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이름은 박일래고, 아내의 이름은 한유림이다. 부부는 어느 지방 변두리, 존재감 없는 작은 구멍가게를 꾸리며 살고 있다. 생계는 빠듯한데 돈 나올 구멍은 보이지 않고, 어렵게 찾아간 친정에서는 문전박대다. 부부는 친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기려고도 해봤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어린 아들은 게임에 빠져 있다. 하루 종일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들을 데리러 온 한유림이 체념조로 “재밌냐”고 묻자,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다. 모니터를 향해 욕을 뱉는다. “씨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아이의 욕을 들으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뒤, 기어코 사건이 터진다. 가게를 판 돈으로 택배 트럭을 사려던 박일래가 사기를 당해 돈을 통째로 잃고 돌아온 저녁. 그는 밥상 위에 농약을 올려놓으며 아내에게 말한다. “가자.” 박일래는 아내와 아들을 죽인 뒤 자신의 목숨도 끊으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 홀로 깨어난다. 힘들게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곧이어 흘러나오는 김두수의 읊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 오른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 같던 ‘가족의 이야기’가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해 비상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홀로 된 박일래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흘렀는지 박일래는 긴 머리의 부랑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자꾸만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친다. 꾸역꾸역 살아가기 위해 흘러든 농촌 마을에서 마주친 농약병. 지쳐 잠이 든 폐가에서 만났을 죽은 아내와 아들의 유령들. 손자와 며느리를 죽인 박일래를 찾아온 그의 아버지가 극약을 컵에 따르며 내뱉는 “가자.”라는 한 마디. 자신이 가족을 향해 내뱉었던 “가자” 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은 박일래는 죽기를 거부한다. 그런 자신에게 칼을 쑤셔 넣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박일래는 또다시 달아난다. 그러나 그 종착역은 죽음이다. 스스로의 죽음. 박일래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조차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방황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살아도 살지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겁의 삶. 영화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박일래의 여정을 통해 고통의 굴레 속에 놓인 인간 존재를 그리고 있다. (‘존재’라는 단어만큼 막연하고 뭉뚱그려진 말은 없겠지만) 황량한 갯벌 위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인간의 ‘존재’라는 것에 대해 온몸으로 절절히 느껴지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고통스럽게 슬프고, 고통스럽게 아픈 터널의 끝,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박일래의 마지막 절규는 외롭고 연약한 존재의 서러운 울음으로 들린다. 그 울음 섞인 절규를 비집고 들어오는 김두수의 읊조림. “이제 안녕을 고하라. 바람이 저녁강을 스친다...” 김두수의 노래 ‘저녁강’이 박일래의 오열과 겹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영화의 엔딩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 벌거숭이 >를 통해 배어 나오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암울함과 슬픈 느낌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 어떤 현실적 배경이나 이유로도 단정 지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태생적인 비극.. 비애.. 하지만, 난 아직 이 정도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어지러운 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