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괴물
- 감독
- 박혜미
- 제작년도
- 2012
< 버블 패밀리 >는 도시 개발의 붐을 타고 ‘중산층’ 대열에 합류했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거품처럼 사라진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국 사회의 부동산 문제를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 아니라, 화려했던 시절부터 ‘거품’이 사라진 현재까지 한 가족의 풍경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부동산 붐과 경제 호황의 흐름을 타며 전성기를 누리다가 1997년 IMF와 함께 호황의 절정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된 감독의 부모는 15년째 허름한 연립에서 ‘올림픽 아파트’ 시절로 돌아갈 날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던 감독은 강남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 여전히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남처럼 살고 있는 가족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찾으려는 감독은 가족이 가장 행복했던 1988년으로 돌아가 부모의 삶과 자신의 유년 시절을 불러오고, 부모가 선택했던 삶이 한국 사회의 커다란 흐름과 도시의 개발이라는 구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을 마주한다. < 버블 패밀리 >는 중산층에서 갑작스레 내리막길을 걷게 된 가족 구성원의 갈등과 고충, 혹은 가족 개개인의 내면에 남겨진 상처와 기억으로 들어가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부동산 개발과 도시의 변화라는 큰 틀 안에 놓인 부모의 삶을 정렬시킨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울산을 중화학공업 도시로 개발하고, 당시 화학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평범한 주부였던 엄마는 아파트값이 몇 배나 오르는 기적적인 경험을 하며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다. 88년 올림픽 개최와 서울 개발 속에서 잠실은 코리안 드림의 메카가 되고, 중소건설사를 차려 집을 설계하고 파는 일을 했던 부모는 1년에 몇 십 억을 버는 성공과 부를 누린다. 하지만 90년대 부암동 고급 빌라를 지으려던 아버지는 정부의 규제 강화로 전 재산을 잃고 사업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 포레스트 검프 >의 주인공처럼, <버블 패밀리>의 부모는 한국 사회의 부동사 투기와 호황, 재개발의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과 함께하며 삶의 변곡점을 지나는 것이다. 하지만 < 버블 패밀리 >는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수혜자였다가, 일순간 규제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부모의 욕망과 선택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는다. 대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빠의 사업은 강한 자들에 의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자본 친화적 경제 구조가 강화되고, 대규모 건설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중소 건설사를 운영하던 아빠는 사업을 중단했어야 할 것이다. 경제의 흐름 속에서 게임의 룰을 쥐고 있던 것은 결국 더 많이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부동산에 집착하는 부모를 이해하려는 감독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와 부모의 삶이 다르지 않으며, 우리의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면 나의 길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부모님이 선택한 부동산이라는 해법은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해법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지는 게임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 가족은 다시 재결합해 함께 살게 되고, 가족사진을 찍고, 외식도 하고, 일출을 보며 새해 소망을 빌어보기도 한다. 1997년 이후 멈춰진 홈비디오 대신 이제는 딸이 엄마의 손에 카메라를 쥐여준다. 이 모든 것들은 이사나 학자금 대출 등 가족의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감독의 의지와 선택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본 우리가 바라게 되는 것은, 이 ‘버블 패밀리’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엄마가 몰래 사 둔) 감독의 명의로 된 땅값이 올라, 그녀가 학자금 대출을 갚고, 아버지의 빚도 갚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소유의 땅을 보면서 이상하게 내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감독을, 나의 부모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감독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게임의 룰,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고 균열을 내지 않는 한, 현실은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돌파구 역시 쉬이 찾아지지 않을 것 같다.
정권 퇴진으로 이어진 촛불 시민 혁명과 함께,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87년 민주화 항쟁이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2017년 우리는 30년 전 그때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우리는 그때보다 한 걸음 더 민주주의에 다가가고 있는 것일까. 본격적인 대선 운동이 한창인 요즘, 여러 가지 질문들이 머리를 맴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당일, 서울 구로구청에서 벌어진 부정투표함 밀반출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시작된 농성을 담은 < 돌 속에 갇힌 말 -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농성사건 >(이하 ‘돌 속에 갇힌 말’)이 떠오른 것은, 87년과 2017년, 30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한 질문들 때문일 것이다. < 돌 속에 갇힌 말 >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당일, 서울 구로구청에서 벌어진 부정투표함 밀반출 사건과 그에 항의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투쟁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영화는 87년 12월의 농성 이후, 오랫동안 입을 열지 못했던, 말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카메라 앞에 세운다. ‘그 사건’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사람들은 말을 꺼내지 못한다. 영화의 말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영화는 “개인의 힘으로 파헤칠 수 없는 의혹과 국가가 책임지지 못한 폭력의 후유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개인의 힘으로 파헤칠 수 없는 의혹이기에, 국가가 규명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은 폭력이기에 영화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부정선거의 실체, 강제 폭력 진압 규명, 당시 농성 참가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등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는 그들의 머뭇거림과 기억들 속에서 그동안 묻혀있던 말을 끄집어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한다. 의혹으로만 남은 과거는 몇 가지의 결로 구성된다. 하나는 87년 12월 16일 오전 11시 30분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밀반출 항의농성이 시작되던 기점으로부터 기자회견, 농성 대책위 구성, 철야농성, 그리고 18일 오전 6시가 넘어 무자비한 경찰의 폭력 진압이 이루어졌던 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을 학생과 노동자, 주민들의 입을 빌려 복기하는 것이다. 당시에 촬영된 비디오 화면과 뉴스, 신문기사, 그리고 사람들의 증언은 긴장감 있게 그 사건의 실체로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또 하나 영화가 파고드는 것은 부정선거에 대한 의혹 그 자체이다. 투표용지 조작 가능성과 경찰의 강제 폭력 진압 등의 국가 폭력으로 인한 참여자들의 희생, 부정선거의 증거물인 투표함의 행방까지 17년이 지난 2004년까지 ‘그 사건’을 둘러싼 의혹은 단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영화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사건’의 실체에 다가서려고 하지만, 투표함의 행방은 묘연하고, 사람들의 증언과 기억은 조금씩 어긋난다. 폭력 진압의 과정에서 사망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소문은 ‘사망설’에 그칠 뿐이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부정선거의 증거로 여겨졌던 서울 ‘구로구청 투표함’은 29년이 지난 2016년 7월에야 한국정치학회 주관으로 개표 및 계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 돌 속에 갇힌 말 >이 17년 전의 ‘그 사건’을 입체적으로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현재로 데려오는 것은 감독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담은 소리 없는 내레이션이다. 구로구청 안에서 농성을 사수하기 위해 있었던 사람들, 그래서 강제 진압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었던 사람들과 이미 현장을 빠져나갔던 대책위, ‘역사에 대한 예의’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분노와 비판적인 시선은 그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새겨진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절망, 운동에 대한 회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트라우마, 동지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등의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있다.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그래서 대림역(구로구청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감독 자신의 소회는 ‘객관적인고 공적인 역사’에 균열을 내면서도 기록되고 공식화된 역사와 그렇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들, 묻혀버린 목소리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희망하는 현재, 5월 대선을 앞두고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성찰하고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은 없을까, 혹여 촛불의 승리와 힘에 취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 걸까, 우리는 정말 ‘변화’할 수 있을까, 세상은 정말 달라지는 것일까라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커질수록, ‘공(식)적인 역사’ 혹은 주류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혹은 듣지 못한 말,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던 말, 말이 되지 못한 채 ‘돌 속에 갇힌 말’에 주목하는 일, 그것들이 한데 모여 역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이 많은 날들이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담은 < 그림자들의 섬 >에는 오랜 시간을 버텨온, 자신의 신념, 이상, 혹은 의리, 관계 등의 이유로 ‘뭔가’를 놓지 않고 버텨온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신념’이나 ‘믿음’보다는 먹고 사는 것의 문제, 실리가 더 중요해진 요즘, 사는 것에 지칠 때마다 묻고 싶어진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냥 놓아버리면 안 되는지. 그들의 얼굴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들이 버티어냈을 시간들, 견뎌냈을 아픔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들이 온전히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섬세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 ‘희망버스’와 ‘김진숙 지도위원’ 외에는 한진중공업에 별다른 정보가 없던 사람들에게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역사, 투쟁의 역사, 그리고 노동자들이 싸워온 시간들의 기록을 압축적으로 보여줄 교과서 같은 영화이다. 김정근 감독의 전작인 < 버스를 타라 >가 희망버스 자체를 집중적으로 기록했다면, < 그림자들의 섬 >의 80년대부터 이어져 온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 대한 투쟁의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버스를 타라>의 프리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영화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조그마한 사진관의 무대 위로 불러 모은다. 80년대 입사한 이제는 나이가 지긋한 중년부터 2000년대 입사한 젊은 노동자들까지 영화는 지극히 평범한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기억과 꿈, 아픔과 상처, 일상과 기적의 순간들을 끄집어낸다.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의 용접공이 된다는 꿈에 부풀어있었던 입사 시절부터, 대기업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너무나 열악했던 노동 조건, 옆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후회되고 아팠던 순간들, 민주노조의 설립과정과 투쟁이 확산되었던 승리의 경험 등. 이 영화는 오랜 기간 민주노조를 만드는데 함께 하고,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위해 같은 곳을 지켜온 평범하지만 단단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영화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퍼즐처럼 맞춰지는 30년 한진중공업의 역사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평범하지만 다양한 시민들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던 ‘희망버스’와 300일이 넘어서야 고공 크레인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김진숙 지도위원, 그리고 회사와의 합의로 이 영화가, 그리고 한진중공업 사태가 마무리되면 좋았겠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림자들의 섬 >이 < 버스를 타라 >의 프리퀄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의 러닝타임으로 보자면, 이 부분은 영화의 거의 후반부에 해당하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는 ‘현재’는 굉장히 무겁고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외면하고 싶은 현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 정권에 들어서면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회사는 복수노조를 설립한다. 설 자리를 잃은 민주노조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끈을 놓지 않는다. “원망하는 건, 지원하는 건 쉬워요. 미워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기다리는 게 힘들지.”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 한 마디는 쉽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2009년 1월 19일 서울시 용산 재개발 보상대책에 반발하던 철거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중 화재로 사상자가 발생한 ‘용산참사’는 올해 1월 7주기를 맞았다. 2009년 5월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구조조정에 맞서 이루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과 복직투쟁은 지금도 해고자 전원 복직을 위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비극에 대한 진상규명도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사는 게 바빠서, 기억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현재에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부당한 처우와 잘못된 환경 속에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바쁜 이유 역시, 그 불안정한 삶의 모서리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을 알 수 없는 그 삶의 모서리를 지키느라 남의 일에는 도통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망각을 거스르는 기억의 투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2014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2016년 8월 25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시간이 꽤 지나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영화를 보면서 그 시간의 경과를 느끼기는 어렵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만은 아닐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동참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