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구름 가는 길
- 감독
- 반석
- 제작년도
- 1960
- 출연
- 모니카 유, 김영미, 반석, 이대엽, 주선태, 김승호, 나애심, 복혜숙, 한은진, 이향, 강계식, 양일민, 백송, 정철, 강화식, 박순봉, 손시향, 현미자, 정정성, 안초명, 나옥희, 노미자, 김수천, 조향, 박영태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인터뷰 영상으로 이동) * 위 이미지와 영상에 표기된 참여자의 직급과 부서는 인터뷰 일자 기준이며, 현재와 다를 수 있습니다. 국내 유일의 영상 아카이브 기관 한국영상자료원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영화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 보존, 서비스하는 영상 아카이빙 전문기관이다. 영상자료원은 자료의 수집 및 보존뿐 아니라 일반 시민이 영상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대민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다양한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영화관인 ‘ 시네마테크KOFA ’에서는 국내외 고전, 예술, 독립영화를 상영하고 있으며, ‘ 한국영화박물관 ’에서는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 영상도서관 ’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영화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다. 그 외 연구 및 발간 사업, 소외 지역 및 시설을 찾아가 영화를 상영하는 ‘ 찾아가는 영화관 ’ 사업, DB 구축 및 한국고전영화 VOD 등 다양한 온라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2024년 현재 상암본원은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5개 층을 운영하고 있으며(주차공간 제외) 지하 1층에 시네마테크KOFA 1, 2, 3관, 1층에 한국영화박물관과 교육실, 2층에 영상도서관, 3층에 수장고, 4층에 사무실이 위치해 있다. 공용공간을 합쳐 대략 3,000평(9,912.11㎡) 규모이다. 2024년 3월 현재 보유자료는 영화 22,449편, 시나리오, 스틸사진, 포스터 등 관련 자료 1,350,028건으로 방대한 한국영화·영상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아카이빙 기관이라 할 수 있다. 지하 1층 영화관 시네마테크KOFA 1관 내부 전경 한국영상자료원의 정원은 96명이며, 조직은 원장과 사무국장, 이사회, 감사 외에 8개의 팀이 있는데, 전략기획팀, 경영관리팀, 수집팀, 보존관리팀, 디지털복원팀, 학예연구팀, 정보자원팀, 프로그램팀이다. 이러한 팀들의 명칭만으로도 자료원 전체 역할과 임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본원은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igtal Media City, DMC) 내 위치하고 있다(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디지털미디어시티는 서울시 주관으로 2000년에 기본 계획을 수립해 2004년 본격적으로 조성 사업이 시행된 첨단 콘텐츠 생산 및 유통 단지다. 짧은 역사에 비해 빠르게 지상파 및 종편 방송사, 제작사 등 미디어 콘텐츠 분야의 주요 기업·기관 등이 입주하며 영상 제작·유통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요한 영상미디어 생산지로 성장하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자리한 서울경제진흥원 외에 정보통신산업진흥원에서 운영하는 누리꿈스퀘어와 문화방송(MBC) 등이 인접해 있다. 50주년을 맞이하다 한국영상자료원은 1974년 1월 18일 서울 중구 남산동 3가 34-5, 영화진흥공사 사옥 내에 ‘재단법인 한국필름보관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올해 50주년을 맞이한 셈이다. 냉전 경쟁이 심했던 박정희 정권기, 북한 국가영화문헌고가 국제영상자료원연맹(FIAF)에 가입하자 급하게 추진된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초기 한국영상자료원은 제대로 된 조직과 공간, 설비를 갖추지 못했고, 1970년대 내내 제한된 시설과 인력으로 최소한의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이브 기관과 진흥기관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FIAF가 정회원의 조건으로 공간과 조직의 독립을 요구하면서, 1980년대 중반에서야 영화진흥공사로부터 조직적으로 독립하였고, 그 결과 1985년에 FIAF 정회원에 가입할 수 있었다. 1990년 9월 15일 예술의전당으로 이전하며 독자적인 공간을 갖추게 되었고, 공간의 이동과 함께 1991년 9월 1일 ‘재단법인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서초동 예술의전당 시절 한국영상자료원 건물 입구 예술의전당 내 한국영상자료원의 공간은 대략 520평 남짓이었다. 총 520평의 한국필름보관소 공간이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필름 보관고, 영화 시사실, 영상 자료실, 보존 처리 공간, 사무실 등 남산동 영화진흥공사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자적인 공간 분할과 체제를 갖췄다. 이 공간을 바탕으로 한국필름보관소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됐다. 1994년 1월부터 영상자료 보존에 대한 국고지원이 시작되었고 1996년 7월부터 국내영화 필름 등의 제출제도가 시행되었으며, 2002년 6월 10일 영화진흥법 제24조의3에 법적인 설립 근거가 마련되어 현재의 형태인 ‘특수법인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안착했다. 2007년 5월 16일 현재 위치인 상암동 청사(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로 이전하였고, 그해 6월 1일 영상도서관을 개관했다. 이듬해인 2008년 5월 9일, 시네마테크KOFA와 한국영화박물관을 공식 개관했다. 별도 청사의 마련과 함께 한국영상자료원의 운영 역시 본격화된다. 2016년 5월 19일 영상자료 보존기술 향상과 이원 보존을 위해 파주보존센터를 개관하여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층 영상도서관 내부 영상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들 층별 구조를 중심으로 공간과 역할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하 1층은 시네마테크KOFA라 이름 붙은 3개의 극장(1관, 2관, 3관)이 있다. 각각 321석, 150석, 30-40석(가변적)의 좌석을 갖추고 있는데, 최근 3관에서는 상영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청소년 교육 프로그램 및 성인 강좌용으로 활용된다. 1관과 2관에서는 상영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영화의 예상 관객에 따라 1, 2관이 구분되어 운영된다. 대개 국내외 고전 및 예술영화, 독립영화 등이 상영된다. 1관과 2관을 합쳐 1일 2회 상영(오후 14~15시, 오후 18~19시)을 표준으로 하며, 경우에 따라 특별 편성되기도 한다. 무료로 운영되며,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이다. 1층 영화박물관 상설전시실 내부 1층에는 박물관과 교육실이 위치해 있다. 대략 300평 내외의 공간으로 상설기획 전시공간 755.12㎡(229평), 교육실 77.75㎡(24평), 수장고 및 로비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실은 기획전 공간과 상설전 공간으로 구분된다. 상설전은 한국영화사를 연대기로 볼 수 있는 “한국영화를 보다” 코너와, 초기영화의 역사를 체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초기영화로의 초대” 코너로 구성된다. 기획전시는 주로 한국영화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1년에 2회 내외로 진행된다. 매주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무이며, 운영시간은 10:30~19:00이다. 전시는 학예연구팀이 담당한다. 2층에는 영상도서관 등이 위치하고 있다. 영상도서관은 국내외 영화 관련 서적, DVD 및 블루레이, 음반 등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자체 변환 VOD, 시나리오, 검열서류 등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온라인으로 열람할 수 있다. 1인 감상석 31석, 2인석 6석, 다인실(6인실, 8인실 각 1)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그 외에도 영상자료원의 디지털 보존고 및 디지털 아카이빙실, 카탈로깅실, 전산실, 필름 검색실 등이 위치한다. 3층에는 수장고가 위치한다. 영화필름 보관실 5실이 위치하고 있다. 2007년 이전 당시 3층 전부와 4층의 일부가 필름 및 비필름 수장고로 활용되었으나, 2016년 파주보존센터 건립 이후 대부분의 자료는 파주로 이전하고 영화필름 보관실만 위치하고 있다. 상암에는 주로 복사본인 활용용 필름들이, 파주에는 원본(네거티브) 필름을 포함한 유일본 등 보존용 필름들이 보존되어, 같은 자료를 다른 곳에 보존하는 이원 보존 체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4층에는 사무실 및 회의실 등이 위치하고 있다. 3층 필름 보존실 내부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400 한국영상자료원 2. 설립일 : 1974년 1월 18일(재단법인 한국필름보관소) 3. 대표자 : 김홍준 4. 규모 : 연면적 9,912.11㎡ / 지하1층-지상4층 5. 공간 구성 1) 지하1층: 시네마테크KOFA 1, 2, 3관 및 매표소, 로비, 전시공간 - 1관 321석(일반석 317석, 장애인석 4석) / 2관 150석(일반석 148석, 장애인석 2석) - 3관 30-40석(교육장소로 이용 중) 2) 1층: 한국영화박물관 및 교육실 3) 2층: 영상도서관 및 수장고 외 - 영상도서관: 1인 감상석 31석, 2인석 6석, 다인실(6인), 다인실(8인) - 수장고(디지털 보존고) / 필름 검색실 / 디지털 아카이빙실 / D시네마 검수실 - 카탈로깅실 / 전산실 4) 3층: 수장고(필름 보존고 / 특수자료 보존실) 5) 4층: 사무국 6. 운영시간 1) 시네마테크KOFA: 화요일-토요일 첫 회 상영 1시간 전부터 마지막 회 종영 시각까지 2) 한국영화박물관: 화요일-토요일 10:30-19:00 / 영상도서관: 화요일-토요일 10:00-19:00 7. 입장료 : 없음 8. 조직 구성: 1사무국 2팀 9. 정원 : 96명 글/진행 : 김문경 사진 : 허 성 취재 일자 : 2023년 9월 18일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는 산업이자 예술이며, 오락이다. 그것은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상당한 자본과 기술, 사람들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특히 한 해에 200편을 넘는 영화가 만들어졌던, 그리하여 적어도 편수로만 놓고 따지자면 세계 5대 영화산업국에 들었다는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일선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만들었던 감독만큼이나 한 해에 20-30편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해 낸 제작자들 역시 영화산업에서 중요한 주체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토록 많은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던 것은 정부가 소수의 독과점 기업체를 메이저기업화하고자 만들어낸 대량생산 유도 정책 때문이었다. 이 회사들은 대개 20개 남짓으로 한정되어 있었는데 그 중 신필름, 세기상사, 합동영화사, 태창영화사, 연방영화사, 극동영화사 등이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던 소위 메이저 제작사에 속한다. 이 영화사들에는 대개 회사를 창립하고 굳건하게 운영했던 굴지의 제작자들이 대표로 있기 마련인데 연방영화사의 주동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주동진 은 1927년 2월 20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양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한국시청각 연구원 연출과장을 지냈으며, 한양대학교에 영화과가 신설되자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62년 한양대학교의 모체인 한양재단이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관여하며 한양영화사의 전무로 재직했다. 당시 전무후무한 5억원이라는 자본금으로 설립된 한양영화사는 <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 < 아편전쟁 >, < 손오공 > 등 대작을 중심으로, < 혈맥 >, < 굴비 > 등을 제작한 굴지의 영화사였다. 1963년 한양영화사로부터 독립한 주동진 은 동서의 돈을 빌어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를 제작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대명제작을 한 것으로 현재 KMDb에는 동원영화사의 작품으로, 주동진은 기획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후 다시 대명으로 제작한 < 아빠 안녕 >이 크게 히트하면서 그는 연방영화사를 설립하게 된다. 1965년 연방영화사 설립한 해 그는 기대치 않은 흥행작을 통해 영화계의 행운아로 등극한다. 바로 김기풍 감독의 < 여자가 더 좋아 >였다. 서영춘 이 주연한 이 슬랩스틱 코메디 영화는 불과 8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저예산영화였으나 서울에서만 18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 그 해 흥행랭킹 2위에 오르는 빅히트를 기록하여 연방영화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나아가 1966년에는 이광수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유정 >이 관객수 30만명이 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 성춘향 > 이후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짧은 시간 내에 한국영화 제작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유정>의 신인 여배우로 픽업된 여배우 이민자에게 극 중 이름을 따 남정임 이라는 예칭을 붙여준 것도 주동진 이었다고 한다. 여세를 몰아 그는 1967년에는 한국영화업자협회의 회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주동진은 중소영화사들을 규합하여 일시적이나마 당대의 거물 제작자인 신상옥을 회장에서 퇴임시킴으로써 한국영화 제작계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했다(이후 신상옥 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회사들을 규합하여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를 구축하여 영화 제작계를 반분하고 이후 새로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회장으로 복귀함으로써 이 ‘쿠데타’는 종국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간다). 전성기의 연방영화사는 모회사가 없는 개인 회사로 출발한 영화사 중에서 신필름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영화사 중의 하나였다. KMDb 기준에 따르면 주동진 이 연방영화사의 이름으로 제작한 영화가 거의 150편에 이른다. 또한 그는 1970년 < 사랑하는 마리아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노출과 섹스신으로 당시 영화계의 화제가 되었으며, 1970년 흥행 랭킹 1위에 오르기도 했다. 1976년 그는 부사장이던 최춘지 에게 사업을 물려준 후 갑작스럽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택했다. 이민을 택한 원인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한양영화사 시절부터 그와 함께 했던 양춘 은 그의 형 때문이라 증언한 바 있다. 양춘에 따르면 주동진 의 큰 형 주동인은 1953년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장과 1964년 조선작가동맹 상무위원을 역임한 북한 영화계의 거물이었다. 당시 정보기관들은 그의 형 때문에 주동진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였고, 주동진은 이러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이민을 택했다는 것이다. 미국으로 이주 후 시네마 엠파이어라는 영화의 수출입사를 운영하였다. 1990년에는 남북영화제를 개최하는데 집행위원장의 역을 맡았고, 1996년에는 북한과의 합작영화를 추진하기도 하는 등 남북한의 영화 교류에 힘을 쓰기도 했다. 뉴욕에서 거주 중 2003년 작고했다. 주동진 은 한국영화의 전성기이자 정부에 의해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가 유지되었던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제작자였다. 그는 기업적인 배경, 혹은 자산, 심지어 영화업의 특별한 기반도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영화계의 중심에 진입했던 특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달변가이자 비상한 수완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며, 당대 영화계의 브레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공은 단순히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는 없다. 박정희 정권기 정부의 인위적인 메이저 기업화 정책, 즉 일단 진입하면 특혜를 누릴 수 있는 독과점 시장이라는 상황이 개인의 능력과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 글: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장) KMDb 정보 주동진 추천 VOD < 불나비 >(1965) | < 시발점 >(1969)
아마도 독립영화의 테두리 안에 있을 어떤 영화들을 수년동안 해오면서 영화를 만드는 일외에 하나의 직업이 더 생긴 것 같다. 영화 만드는 것을 가르치는 일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언뜻 위험해보이기도 하지만 또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기에 영화만들기를 가르친다는 것 또한 용기를 내어 해볼만한 일이기도 했다. 수년 동안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재밌는 일도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수강생들이다. 말 안 듣는 중학생부터 말은 정말 잘 들으시는데 결국 아무 말도 듣지 않으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취미로 여행이나 손주들의 영상을 담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에게 핸디캠과 무비메이커로 간단한 편집을 가르치는 일부터 (끝나면 선생인 나는 다시 손주가 되어 어르신들이 사주신 순대국을 얻어먹었다) 특히나 애정이 있었던 미디액트의 짧고 굵은 단편영화 만들기까지 (일주일동안 영화 만드는 법을 배우는 수강생들에게는 초인적인 노력을 바라는 워크숍이다.) 다양한 형식의 워크숍에서 다양한 수강생들을 만났다. 산골에서 만난 중학교 학생은 벌써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영화판에서 청춘을 소비하며 나를 원망하는 이도 있겠다. 뭐 대단한 거 있는 것처럼 꼬드긴 것들은 가끔 미안하게 생각한다. 나또한 그러한 워크숍에서 느꼈던 설렘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이 곳에서 방황하고 있다. 나 또한 완성시키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면서 이러한 워크숍들을 진행하게 된 것은 나의 설렘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부터는 모기업에서 후원하는 “휴대폰과 디카로 영화 만들기”라는 뭔가 사기성이 농후해 보이는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휴대폰과 디카로 영화를 만든다니.. 기본적인 영화의 메카니즘도 설명할 수 없는, 아주 기본적인 반석도 깔아놓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들라고 한다니... 영혼을 담아야 할 신성한 영화라는 그릇을 모독하는 일이다. 영화는 세부의 힘이다. 세부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완성시키며 그 영화에 의미가 생긴다. 이런 단발의 워크숍에서 만드는 단편영화는 그러한 세부의 힘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작에 엉망징창이 되기 십상이다. 분명 대부분의 실패작이 만들어진다. 이들이 영화를 하게 된다면 세월이 지나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영화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수강생들에게는 분명 의미 있는 실패작이 된다. 설렘을 가지고 영화에 첫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질문들은 여러 가지 답들을 들을 테고 거기에 욕구를 느낀 누군가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되면서 영화를 배워갈 테니까.. 메카니즘에 현혹 되 기술적인 질문들을 늘어놓기 전에 운이 좋다면 자신의 내면에서 첫 질문을 하게 될 테니까..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첫 번째 질문이 중요하다. 그곳에서 그 다음 질문들이 결정되니까 말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찾은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내면의 질문을 뒤늦게 찾았다. 수강생들 또한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설렘을 찾기는 쉽지만 첫번째 질문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설렘이든 첫 질문이든 그들의 첫 경험을 옆에서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 열정으로 만드는 영화작업과 더불어 그들의 첫 경험을 보는 일 또한 나에게는 큰 의미로 자리 잡았다. 취미, 위로, 자위, 진로의 선택,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프레임 안에 담기는 움직이는 세상을 보고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나에게는 영화를 만드는 것 이상 세상을 배우고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일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