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 감독
- 권나연
- 제작년도
- 2017
나르시시스트와 거울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서 성공한 부르주아 남성이 고향을 찾아 한 여인을 만난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 흔한 불륜 이야기이다. 영화 <안개>(김수용, 1967)는 여기에 시골 풍경에 의해 좀처럼 소실될 것 같지 않는 여인을 더하면서 불륜의 흔한 서사를 재정위한다. 하룻밤 연애로 끝내려는 여인과 사랑이라 우기다 결국 인사도 없이 떠나는 엔딩은 남자의 무책임을 강하게 환기한다. 그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영화에서 불륜의 서사는 밀애가 발각되어 타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여인 수난사가 부각된다. 따라서 영화가 끝나고 남는 것은 남거나 떠나간 여인에 대한 원망 또는 연민이 대부분일진대, <안개>는 남자의 무책임을 끝까지 붙들어 둔다. 플래시백과 내레이션, 그리고 주제가 ‘안개’의 무한 반복, 영화 <안개>의 특징이다. 김수용의 영화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1964)을 각색한 영화이다. 「무진기행」은 1960년대, 폐허의 현실에 대한 리얼리즘적 재현이나 윤리의식의 재정비 등이 문학성의 기준이 되었던 기존의 문단과는 이질적인 소설로 출현한다. 한국어에 대한 세련된 조탁과 사회문제나 윤리의식으로부터 한결 가벼워진 자아의 형상화 등으로 인해 감수성의 혁명 또는 그 기원으로서 「무진기행」이 자리매김 된다. 우리의 1960년은 사실 새로움에 대한 갈망 또는 신생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부터 출발한다. 1960년의 4.19는 새로움이나 신생의 정치적 기원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원천이 형성되는 장이기도 하다. 소설과 영화는 1960년에 형성된 새로움과 신생의 가능성을 서둘러 수용하려 했으며, 김승옥과 김수용이 그 앞자리에 서게 된다. 현실의 기표보다는 내면의 기의를 시청각적 이미지로 재현하는 데 몰두했던 김수용이 영화 <안개>를 통해 시적 영화라는 도약을 전유한 사실은 둘의 만남이 1960년대 ‘신생’이라는 문화적 원천의 실험과 실천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소설은 그 시절 소설에서는 꽤나 낯선 인물과 사건, 그리고 시공간적 배경의 결합을 보여주며, 영화는 이를 당시 영화로서는 가장 낯선 표상 장치를 통해 전달한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의 낯선, 그래서 문제적인 장면들을 살펴보는 일은 「무진기행」과 <안개>의 시대적 위상과 문화사적 의의를 동시에 규명하는 중요한 작업이 될는지 모른다. 일상의 균열과 주체의 소외 소설 「무진기행」으로부터 영화 <안개>로의 각색과정은 소설 속 핵심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대사는 물론, 서술된 문자 대부분이 영화에 기입됨으로써 '원작 그대로의 각색(the literal adaptation)'에 가까이 다가선다. 소설 「무진기행」과 영화 <안개>는 사실 서사의 구조가 정확히 일치한다. 서울을 떠나 무진에 도착하고, 다시 무진을 떠나기까지 소설의 주인공이 겪는 개별적인 사건은 영화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영화의 첫 장면이 무진행 버스에서 시작하는 소설과 달리 서울 사무실에서 시작하는 점만 제외하면 시간의 흐름 또한 대체로 동일성이 유지된다. 영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설의 첫 회상장면, 즉 무진행 버스에 오른 주인공이 무진으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의 주름을 펴 순차적인 시간 배열을 만들고 있을 뿐이다. 자아 또는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두 텍스트 사이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서울에서 성공한 부르주아 남성이 자신의 고향 무진에서 과거의 자아와 조우하고, 그와 인정투쟁을 벌이다 실패하고 결국 자기모멸감에 빠지는 과정, 자신에게 예정되어 있는 세계로부터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개인의 좌충우돌은 소설과 영화의 공유항이다. 그런데 유독 영화에서 주인공 윤기준을 문제적인 인물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영화의 첫 장면은 서사의 전개방향과 연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긴요하다. 영화 <안개>의 첫 장면은 자본주의화된 근대 도시 서울의 일상을 전면화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영화의 첫 신은 시간과 공간을 지시하는 별도의 기호 없이,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만으로 서울의 한낮이라는 시공간을 드러낸다.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의 간섭, 즉 기계 소음으로 구성되는 리듬은 자동차 경적 소리로 이어져 서울 한낮의 일상에 배어있는 리듬을 완성한다. 자동차 경적 소리야말로 사무실 안과 밖을 하나로 연결하여 도시의 일상을 전면화하는 표상 기호이다. 사무실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자동차 경적음, 주인공 기준의 동선을 따라 창밖 자동차 경적음이 포착되는 순간 서울의 한낮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화벨 소리, 타이핑 소리와 결재서류에 지쳐 글자가 벌레로 변하는 환시에 빠지는 주인공은 그래서 자본주의화된 근대 도시의 일상에 피로해진 주인공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영화적 장면에 다름 아니다. 얼핏 청각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재서류 역시, 전화벨 소리와 타이핑 소리가 매개하는 산물이라는 점에서 리듬이 주로 의존하는 청각의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리를 뜨고 창가로 가보지만 거기서 그가 맞닥뜨린 것은 한층 더 견고해진 리듬, 즉 도시의 일상이다. 이쯤 되면 영화의 주인공 윤기준에 대한 하나의 판단이 가능해진다. 근대 도시의 고유한 리듬 안에 있으면서, 또 그 내부의 그것과 불협하는 한 문제적 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간상의 주름을 펴는 영화 첫 신의 연출은 서울이라는 일상적 기호의 표현과 서울과 무진이 대비하거나 공모하는 세계라는 기의의 함축을 통해 깊이를 만들면서 넓이를 이동시키는 일종의 주름운동으로서 이 영화를 원작으로부터 도약하며 신생하게 한다. 리듬은 관계의 산물이다. 불협의 리듬이 생겼다는 것은 이 관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징후이다. 실제로 주인공 윤기준에게는 분명 관계의 이상이 발생했다. 제약회사 전무이사 승진 기회가 생겼으나 자기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 자리에서 본인은 정작 배제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불협 리듬은 주체로서 그의 불안으로부터 기인한다. 주체가 되지 못하는 그의 상태, 그렇다면 주인공 윤기준이 도시의 일상적 리듬과만 불협하는지, 즉 주체로서의 불안이 시공간적 고유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 기준은 시공간적 고유한 리듬에 너무 급하게 화하고 또 너무 빨리 불협한다. 무진에 간 윤기준은 마을 어귀부터 무진의 리듬에 몸을 내던진다. 소금기와 햇빛과 안개의 수면제 같은 리듬에 너무 빨리 화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언제 어디서든 주체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는 점이다. 이 상태라면 주체가 된다 한들 늘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주체가 되지 못하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다. 의사-주체 상황이자 주체로서의 결핍이라는 그의 특이성은 영화에서 순환-선형적 시간성이라는 거대한 리듬으로서 무진과 만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 대상은 역시 박선생과 조한수이다. 영화는 윤기준과 박선생과의 만남을 으레 있는 반복적인 것으로 다루면서, 조한수와의 만남은 일회적인 것으로 서술한다. 박선생은 여전히 순수하기 이를 데 없으며, 조한수는 성공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투철하다. 영화에서 윤과 박, 윤과 조의 만남을 보여주는 태도 역시 뚜렷하게 구별된다. 조한수의 집에서 먼저 일어선 박선생을 윤기준이 배웅하는 장면은 안개 자욱한 밤 개천의 빈 배로 채워지는 대신, 조한수와의 만남은 다음 날 아침 그의 세무서에서이며, 한창 업무중인 직원들의 움직임들로 구성된다. 이렇게 박선생은 무진의 순환적 시공간성의 표상이라면, 조한수는 무진에 내재하는 선형적 시공간성의 표상이 된다. 윤기준이 이 둘과의 만남에서 조화를 이루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윤기준은 박선생과의 만남을 약속해 놓고서도 지키지 못하거나, 조한수와의 만남에서도 하인숙을 가운데 두고 불편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서울에서의 일상을 떠올리며 외면하기 때문이다. 윤기준에게 박선생이 그에게 내재하는 과거의 억압이라면, 조한수는 그에게 미완의 현재에 다름 아니다. 「무진기행」에는 존재하지 않고 <안개>에만 설정된 장면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조한수의 세무서를 찾은 윤기준이 그들의 업무를 관찰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이질적이어서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데, 앞서의 논의를 따르자면 무진이라는 순환적 시간성에 내재하는 선형적 시간성,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서울에 대한 모방이다. 세무서장 자리에 앉아있는 조한수에게 직원들이 결재를 받으러 오고, 전화벨이 울리자 직원이 대신 받아 조한수에게 바꿔준다. 조한수가 권위적인 태도로 전화응대를 하고 응답이 없자 전화를 끊는다. 다른 직원이 결재를 받으러 오다가 돌아가는 직원과 충돌을 하고 똑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이 익살스러운 미장센은 결국 그들의 행위가 서울에 대한 모방임을 보여주는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선형적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순환적 행위로 구성되고, 윤기준은 그 행위들로 구성된 풍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조롱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것으로부터의 소외라고 보는 편이 맞다. 왜냐하면 그 장면에 느닷없이 영화의 첫 장면, 전화벨이 울리고 타이핑 소리 요란한 서울의 일상, 즉 윤기준이 애초에 소외된 도시적 일상의 선형적 리듬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서울의 일상과 무진의 자연적 상태와 그에 내재하는 도시화된 일상 모두로부터 소외된 윤기준의 불안한 주체를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의사-유령(pseudo-specter)적 자아의 조우 <안개>의 윤기준은 서울의 일상이나 무진의 일상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된 인물로 존재한다. 데리다는 과거로부터 억압받은 기억 혹은 미완의 미래적 열망이 엉겨 붙어 현재를 떠도는 존재를 ‘유령(specter)’에 빗대었다. 윤기준은 과거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현재를 살아가지만, 미완의 현재로부터 이탈되어 과거의 억압이 현존하는 무진에 도착해 있다. 그리고 철저히 두 세계로부터 소외된, 말 그대로 유령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현재의 시간성으로부터 탈각되어 초현재적으로 현존하는 유령의 모습은 영화에서 플래시백으로 편집될 때에만 온전한 자기를 드러내는 장면을 통해 무수히 확인된다. 그런데 데리다의 이 유령은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존재함으로써 삶에 대한 성찰과 가르침을 실어오는 존재이나 윤기준에게 그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현재와 무진이라는 과거의 경계에 존재하면서 현재 자기 삶에 대한 성찰과 가르침을 구하기는커녕, 과거로부터의 구원도 현재의 주체적 삶도 불가능한 자기를 발견한다. 이러한 자기 발견이 주체로서의 불안을 각성케 하고, 주체적 삶에 대한 욕망을 스스로 불러일으켰다면 몰라도, 이 유령된 자아는 타자 지향적인 책임성과 정의를 표상하는 데리다의 유령 정반대편에 서게 된다. 이러한 형상은 결국 그가 잘못 맺은 대타자와의 관계로 인해 생긴 억압으로부터 비롯된다. <안개>는 윤기준의 이러한 형상을 현재의 자아와 과거의 자아가 분열된 채로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암시한다. 솔밭에서 하인숙을 만나 해안가를 걷는 동안 윤기준은 자기의 현재 삶을 과거의 자아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상상을 한다. 영화는 이 장면을 윤기준 역을 맡았던 신성일과 용모가 비슷한 배우를 등장시켜 함께 걷는 쇼트로 구성한다. 영화의 트릭을 배제하고, 트릭이라고 해봐야 같은 길을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는 정도로 최소화한 이 장면은 윤기준의 유령적 존재를 가시화하는 데 성공적이다. 동일한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만남은 그 자체로 유령적 상황을 암시하는 영화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밤에 만난 사람들’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영화적 장면에서 박선생과 함께 조한수의 집으로 가던 윤기준은 강물에 비친 과거의 그가 물에 빠지는 장면, 즉 과거 자아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런 과거 자아와의 만남이란 유령의 출현을 암시한다. 현재의 윤기준은 과거의 그에게 질문한다. “사실 나는 감상이나 연민으로써 세상을 향하고 서는 나이도 지난 것”이고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난 것을, 반드시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되었다고 생각한다”라는 소설의 문장을 질문으로 바꾸어 던지자, 과거의 그는 그저 침을 뱉고 만다. 이로서 이 인정투쟁은 잠정적 유보이거나 실패로 끝날 것으로 암시된다.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시작한 이 인정투쟁의 유보나 실패는 결국 그가 과거로부터도 현재로부터도 주체적 자립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이다. 이 과거 자아와 현재 자아의 분열이자 만남이라는 유령적 자아의 출현은 영화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위의 첫 번째 출현이 현재 자아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 출현은 과거 자아의 응답으로 시작한다. 서울로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전보를 받은 윤기준이 갈등에 휩싸이자, 과거 자아는 ‘협잡꾼’이라는 말로 침을 뱉었던 행위의 후반부를 이어간다. 그를 추출했던 서울의 도시적 일상으로 회귀할 시점이 되고 무진에서 자신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려고 하자, 과거 자아는 무진에서 그의 행적을 과거 자아의 시점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하인숙과의 첫 만남과 그녀를 배웅하는 밤길에서 그녀를 응시하는 음흉하고 욕정에 휩싸인 시선과 해안가의 하숙집 주인에게 집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을 차례로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은 영화에서 한 번 등장했던 쇼트와 이질적이거나, 새로 삽입된 쇼트라서 영화의 서사 자체를 부정 내지는 교란하는 것인지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현재의 윤기준은 무진에서의 삶을 하나의 사실로 만들고, 그에 진실성을 부여함으로써 개인적 신념과 사회적 합의를 구축하려 하지만, 과거의 윤기준은 오히려 이것은 물론 이와 연관된 여타의 허위의식마저 들추어냄으로써 현재의 그를 보다 비판적으로 논쟁되고 성찰될 수 있도록 한다. 어쨌든 이 장면은 유령된 자아의 첫 출현에서 유보되었던 인정투쟁에서의 패배를 확증한다. 이 인정투쟁의 실패는 곧 무진으로부터의 소외이며, 과거의 억압으로부터도 미완의 현재로부터도 추출당한 윤기준의 실체를 폭로한다. 데리다의 유령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타자 지향적인 책임성을 표상한다고 했을 때, 이 실패한 유령은 무책임의 세계로 축소된다. 편지를 쓰고 찢는 행위는 오히려 한층 더 완고하게 자신의 현재를 강화하는 윤기준의 위장적 사과를 봉쇄한다. 무진을 떠나는 윤기준 위로 보이스오버되는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이라는 소설 문장은 현재와 과거, 그리고 그 둘이 공존하는 무진이라는 거대한 세계로부터의 패배에 대한 자기모멸감을 여실히 표출한다. 과거의 억압과 미완의 현재가 엉겨 붙어 현재를 떠도는 윤기준의 의사-유령(pseudo-specter)적 존재는 결국 책임, 즉 약속이나 사과 등의 수행적 언어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약속이나 사과 등 수행적 언어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행위의 수행 여부 및 그 효과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윤기준에게는 장인과 부인이라는 대타자의 존재로 인해 하인숙을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말한 내용이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조건과 진실성의 결여, 그리고 둘 사이에 언어와 행위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관계가 파편적이라는 점에서 윤기준의 자기모멸감만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이다. 인정이란 주체가 자기 형성을 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자 매개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과거 자아로부터 인정투쟁에 실패한 이 의사-유령적 자아야말로 윤리적 인식과 삶이 실현 불가능한 주체로서의 불안에 대한 확증이다. 문체의 번역과 검열 소설 「무진기행」이 발표되고 곧바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비평가들의 극찬과 함께 새로운 소설 독자들을 불러들이자, 이를 계기로 또 다른 실험이 감행된다. 이어령, 황혜미 등이 김승옥을 부추겨 시나리오 각색 작업까지 마치고 함께 김수용을 찾아간다. 문예영화에 대한 관심과 감각적인 영상언어에 대한 탐색을 막 시작할 무렵의 김수용은 선뜻 내키지는 않으나 영화 연출을 결심한다. 김수용의 회고에 따르면 김승옥은 김포의 외딴 갯마을에 차린 로케이션 촬영장에서 거의 함께 생활했다 한다. 소설이 영화로, 자신의 문장들이 쇼트라는 시청각적 이미지들의 결합으로 재탄생되는 순간 그가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신생의 진정성 아니었을까. 자기의 문장들이 자기로부터 빠져나와 도약하는 동안, 김승옥은 더 이상 원작 소설가의 지위를 고집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이때 김승옥은 김수용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인다. 엑스트라로 출현하게 된 것. 소설이 시작하는 장면,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영화 속 장면에 넋을 잃고 있을 그 순간, 윤기준의 뒷자리에 앉은 밀짚모자 쓴 청년이 눈에 띤다. 승객들 대부분 나이가 지긋하고 왜소한 체형인데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역할들만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때, 시선을 좌우로 교차하고, 손으로 턱을 괴기도 하다가, 급기야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담배 하나를 피워 물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 청년, 그가 바로 김승옥이다. 김수용의 회고에 의하면 김승옥의 엑스트라 출현은 계산된 것이라기보다 매우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우연한 계기로부터 의미를 발견하거나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기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이 우연성이 작품 바깥에서 원작 소설가의 지위를 버리는 일과 겹침으로써, 원작으로부터의 도약을 통한 신생을 오히려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만드는 데 공모할 가능성은 눈여겨 볼만하다. 무명의 버스 승객으로서 김승옥은 소설에서 영화로의 각색에 대한 비판적 응시의 주체를 포기하고 영화 안에 흡수됨으로써, 그저 관조적 관찰자를 자처하는 선언과도 같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행위는 사실 소설의 문체와 영화의 편집이 유발하는 효과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주어가 뒤로 물러나는 것, 영화에서 주인공의 클로즈업 쇼트가 대부분 롱 쇼트 다음에 위치함으로써 주체로서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것 사이의 유사성은 역설적이게도 원작으로부터 영화의 해방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문예영화가 더 이상 원작 그대로의, 또는 원작에 충실한 각색, 또는 원작의 문학성에 기댄 영화 너머 새로운 세계에 도달할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아닐까. 영화 <안개>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기존 문예영화에 내재하는 간극이나 적대 등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의 지양 방법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영화 <안개>에 대한 당대의 평들이 대체로 긍정적이거나, 이때 긍정적인 평들 사이에서도 플래시백과 내레이션, 그리고 주제가 ‘안개’의 반복이 무진의 억압과 정체, 그리고 서울이라는 미완의 기획이 공모하는 성급한 근대화와 그로부터 소외된 주체의 불안을 가시화하는 시적 영상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즉 영화의 새로움과 완성도에 대한 호평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김승옥과 김수용, 소설 「무진기행」과 영화 <안개>의 만남이 우연적이라기보다 신생의 문화적 원천에 대한 실험과 실천으로서 필연적인 만남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십몇 년 전의 일이다. 싸이월드 방명록에 내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한 줄 글이 올라온다. 그 누군가는 십 대 초중반 시절의 내 정신을 지배했던 이웃집 형이다. 고3 수험생이 되어 그만둘 때까지 한때 나의 수학 과외 선생이었던 그는, 매년 새로 배정되는 우리 반 담임에 관해 꼭 필요한 논평을 해주던 졸업생 선배였고, 일요일 새벽이면 오락실 셔터문을 두드려 가장 먼저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 앞에 나란히 앉던 친구이기도 했다. 한 살 차이도 괜히 주눅 들곤 하는 어린 시절에 한 번도 같은 건물로 등하교해본 적 없는 세 살 터울의 사이였지만, 우리는 5층짜리 아담한 아파트의 아랫집 윗집에 사는 이웃이었고, 엄마들끼리도 친했으므로 어렵거나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형이 없었고 그가 외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형제처럼 지냈다. 형은 야구를 좋아해서 집에 야구장비가 많았다. 그와 취미를 공유하는데 내 운동신경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형은 인내심이 많았고 나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 말해,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나 숨은 재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현재,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형과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 시간에 내가 단순히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만 쓴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캐치볼이 건전한 취미라고 한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그 형의 위험한 습관이었다. 높고 폭이 좁은 담장이나 담벼락, 펜스나 철봉을 발견하면 굳이 그 위를 억지로 기어올라 아슬아슬 걸어보곤 했다.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아이인 나는 그를 따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생각은 1도 없었지만, 위험천만하게 땅으로 착지하며 별일 아닌 척하던 형은 내게 절대로 자기를 따라 하지 마라고만 했다. 그것만 제외하면, 형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 운동도 다 잘하고, (일부러 져주지 않으면) 스트리트 파이터에 관한 한, 동네 레전드급이었기 때문에 십 대 초중반의 내 정신을 지배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존재였다.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당시 내가 되고 싶어 하던 유의 아이였고, 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는 얘기다. “너 칼라 보노프 알아?” 어느 날 저녁, 과외 수업 도중에 형이 묻는다. 나는 그게 뭐냐고 질문으로 대답하고, 그는 가방에서 AIWA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며 침착하게 설명해준다. “칼라 보노프는 사람이고, 가수야.” 곧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낀 우리는 잔잔한 기타 반주와 함께, 영롱한 목소리의 여자가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는다. 마치 영어 듣기 평가할 때처럼의 집중력이라, “배 먹어라” 하면서 들어온 엄마가 책상 위에 배 두 쪽을 깎아놓은 접시를 놓고 가도 우리는 이어폰을 빼지 않는다. 당시의 내 귀엔,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를 붙여놓은 것처럼 들리는 그 곡은 ‘The Water is Wide’라는 제목의 노래다. 지금부터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윌리엄 맥스웰 윌리엄 맥스웰은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약 40년간 「뉴요커」 매거진의 편집장이었고, 「안녕, 내일 또 만나」는 그가 일흔두 살이 되던 1980년에 출간된 책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 함께 논 적이 있던 친구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비극을 대체로 담담하고 아주 사려 깊게 전달하는 이야기지만, 그 아래로 짙게 드리워진 노작가의 회한 섞인 어조는 이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메타픽션’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더 구슬프게 들린다. 맥스웰 본인인 내레이터 ‘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예민한 소년이다. 그러던 중에 잠시 평범한 며칠 동안을 함께 놀았던 친구 ‘클레터스’는 ‘나’가 겪은 것과는 다른 이유로, 그 또한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서 두 아이가 겪은 일에 (독자들이 꼭 기억할 만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어느 겨울 새벽, 조용한 마을 농장을 울리는 한 발의 총소리로 시작한다. 죽은 사람은 ‘로이드 윌슨’이라는 삼십 대 남자, 총을 쏜 사람은 친구였던 ‘클레런스 스미스’라는 사십 대 남자였는데, 이들은 서로 이웃에 살던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깊은 우애와 끝없는 권태를 함께 나누던 이들 가족 사이에 언제부턴가 비밀스러운 불륜이 있었고, 우애와 권태는 폭력과 살인으로 변질되어 결국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레이터인 ‘나’와 함께 놀던 친구 ‘클레터스’는 살인자 클레런스 스미스의 아들이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파토 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두 소년도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카고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두 소년은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나’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그를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 후 평생 자신의 그런 행동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에 대한 윌리엄 맥스웰의 고백이 담긴, 책의 두 번째 챕터 첫 문단을 옮겨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작농의 피살 사건을 50년도 넘게 기억하는 건 첫째, 살인자가 내가 아는 이의 아버지였고, 둘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는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사건을 아마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상록이란 이름을 이 글에 붙여도 된다면) 이 회상록은 그때 내 잘못을 우회적으로 사과하려는 헛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로, 책의 마지막 문단을 옮겨 적어 그의 ‘헛된 시도’가 어떤 질문과 대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그냥 생략하기로 한다. 윌리엄 맥스웰이 이 오랜 이야기의 육중한 문을 어떻게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닫고 있는지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구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읽은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은, 윌리엄 맥스웰이 지난 수십 년간 이야기를 읽고 편집하고 만들어 오면서 해온, 자신의 작가적 고민을, 오래전 고등학교 복도에서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렸던 그 친구에게 보내는 회한 어린 사과문의 형태로 고스란히 담아낸,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앨리스 먼로’ 같은 대작가가,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기가 썼던 모든 글들을 윌리엄 맥스웰이 해냈던 방식대로 완성하겠다는 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이쯤에서,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았던 ‘The Water is Wide’를 한 번 더 리플레이 시켜놓고 이웃집 그 형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그 일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그 형은 재수생이던 어느 가을날 밤에 일어난다. 몇 달 전 같은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에 살던 지난 5년을 끝으로, 우리 가족은 버스로 2코스가량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천천히 걸어가도 이십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곳인 데다 그 전에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는 평수와 구조의 아파트인데, 왜 굳이 이사까지 간 건지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날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와서 “엄마, 라면!”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마침, 온 집안을 벨 소리로 흔들어대는 전화를 신속하게 받아낸 엄마는 잠시 뒤, 내 방문을 벌컥 열어 라면은 네가 끓여 먹으라며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 밤에 어디 가는 거냐고 묻는다. “502호 아줌마 죽었단다.” 502호 아줌마라면... 그 형의 엄만데. 막 벗었던 교복 바지를 다시 추켜올린 나는, 라면은 됐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어딜 따라 오냐고 막 소리치는 엄마를 기필코 따라나선 나는 그 어둑한 밤길을 미친 듯이 함께 달린다. 엄마의 입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리고 나서부터는 심장이 쿵쾅거려 뛰는 게 겁이 나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 세게 꽉 잡으면서 저 멀리, 텔레비전 뉴스에서 많이 본 것 같은,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자동차 불빛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잘 들리게 되는 누군가의 괴성 소리, 그것은... 형의 목소리다. 아파트 주차장을 둘러싼 구경꾼들과 각층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수십 명의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은, 그 형이 누군가의 차 위에 올라가서 괴성을 지르며 야구 배트로 차를 내려치고 있는 장면이다. 창문이 박살 나고 지붕이 내려앉던 그 커다랗고 까맣고 비싸 보이는 차의 소유주는 502호 아저씨, 그러니까 그 형의 아버지다. 지금 형은 타오르고 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놀란 엄마는 이웃집 아줌마들에게 달려가 숨어버리지만 나는 구경꾼들 사이에 꼼짝 못 하고 서 있기만 한다. 미리 도착해 있는 경찰들도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형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보고만 있다. 그러다 곧 형이 미끌, 한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소리가 터진다. 바닥으로 쿵, 떨어진 형이 이내 구겨진 자세가 되자 순식간에 달려간 경찰들이 그를 제압한다. 그것도 내가 처음 본 모습이다. 높은 곳에서 형이 떨어진 것 말이다. 형은 이내 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연신 쌍욕을 내뱉는다. 누군가를 죽일 거라는 말이 내 귀에 꽂힌다. 형이 경찰들에 끌려가며 차에 태워지는 모습을 나는 점점 뒤로 물러가면서 끝까지 쳐다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나는 이제 뒤 돌아 걸어간다. 무섭고 타오르는 것은 절대로 못 본 사람처럼 조용히 걸어서, 집으로. 가로등 불빛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어두운 갓길로만 걸어서, 형을 태운 경찰차가 지나가더라도 어둠 속의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갓길로만 걸어서 집으로 간다. 다음 날 아침에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남편의 오랜 불륜 사실을 알고 난 502호 아줌마가 그날 저녁에 화장실에서 목을 맸으며, 그 모습을 학원에서 돌아온 형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엄마에게 물으니, 엄마는 네가 뭘 어떻게 하긴 하냐는 듯 의뭉스런 얼굴이 되었다. 502호 아저씨에 대한 내 기억은 마주칠 때마다 내게 용돈 하라고 만 원씩이나 주는 고마운 분이었는데 이제 고마움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바뀌었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곧 트라우마로 바뀔 참이었다. 그해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학교를 다녔고, 대학입시성적에 만족하지 못했던 형은 재수생의 길을 선택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이 왜 걸어서 이십 분 거리의 똑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사를 가게 되면서 형과 내가 드물게 마주치는 일은 더 드물어 졌고,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초, 중학교와는 달리, 형이 다니지 않았던 학교여서 담임선생에 대해 형이 내게 해줄 논평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조금씩 별말 없이 멀어지고 있었고, 엄마는 사람 사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한 번씩 들리는 얘기로 형은 그해에 대학에 가지 않았고, 바로 군대에 갔다고 했다. 나도 몇 년 뒤에 대학에 가고 얼마 뒤에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형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 내 싸이월드 방명록에 그 형의 이름이 한 줄 글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 며칠 동안이나 답글을 달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형의 이름을 본 순간, 언젠가 불길에 활활 타오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내 몸짓이 생각났다.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은 ‘내가 아는 백승빈 ?’ 이라고만 물었지만, 사실은 그 뒤에 ‘경찰차 안에서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는데, 갓길에서 모른 척 고개 숙이고 걷던 그 백승빈 맞아?’ 를 생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죄책감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그때 형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경찰차 앞을 가로막고 창문을 두드리며 형을 울부짖었어야 했나? 그러다 다치니까 차 지붕에서 그만 내려오라는 얘기 정도나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갓길의 어둠 속에 숨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확인해본 방명록엔 형의 글이 삭제되어 있었고, 나는 그가 며칠 전 글을 남겼을 때 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혹시 내가 아는 백승빈 ?’ 뒤에 생략되었던 말은 (‘너 칼라 보노프 기억하냐?’) 정도였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참 얄궂기도 하지. 그래서 그날 나는 아마 울었던 것 같다.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이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만 대충 붙인 것만 같았는데, 언젠가부터 내게 이 노래는 분노와 포효, 비탄과 오열을 예쁘게 숨기는 듯한 가사와 담담한 척하는 목소리에 꾹꾹 눌러 담아낸 아픈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서 듣지는 않는다. 그 형도 생각나고, 이젠 세상에 없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달려갔던 그 밤길도 생각나고, 뭐... 그렇다. 윌리엄 맥스웰은 나이 든 노인이 되어 오래 전 자신이 모른 척하고 지나쳤던 친구에게 소설의 형태로 아름다운 사과문을 남겼다. 죽기 전까지 수십 년 간, 나보코프, 업다이크, 샐린저, 치버, 오코너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읽고 쓰고 만들게 했던 그의 작가적 고민이 고스란히 마지막 장편소설 「안녕, 내일 또 만나」에 들어있다. ‘서로 상반된 감정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우리는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꾼이 나서서 상황을 재배치하는 것일 터이다. 어쨌든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Too many conflicting emotional interests are involved for life ever to be wholly acceptable, and possibly it is the work of the storyteller to rearrange things so that they conform to this end. In any case, in talking about the past we lie with every breath we draw.’ 이 책을 내 마음대로 각색해 지금까지 보여준 영화의 주인공은 그 형이었다. 지난 시절에 관한 내 기억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재배치한 것도 있고, 상상에 가까운 짐작도 있다. 하지만, 형의 AIWA 워크맨을 통해 ‘칼라 보노프’를 같이 듣던 장면은 가짜일 수 없고, 차 지붕 위에서 활활 타오르다 떨어져 땅바닥에 구겨진 채 울부짖던 그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내 기억 속의 화신으로 남을 것이다. 형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그와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이 글 도입부의 내 마음을 형이 짐작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윌리엄 맥스웰의 방식을 감히 한 번 흉내 내며 이런 글을 써보았다. 내가 각색한 이 영화 안에서 형은, 언젠가 높은 곳에서 쿵, 하고 한 번 떨어졌지만 어떻게 해서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 지금처럼 잘살게 되었는지를 기필코 보여주는, 당차고 아름다운 주인공일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라면 분명히 내게 다시 연락할 것이다. 그래서 별 말 없이 캐치볼을 하게 되는 거지. 그때 깔리는 사운드트랙이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라면 좀 이상한가?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십몇 년 전의 일이다. 싸이월드 방명록에 내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한 줄 글이 올라온다. 그 누군가는 십 대 초중반 시절의 내 정신을 지배했던 이웃집 형이다. 고3 수험생이 되어 그만둘 때까지 한때 나의 수학 과외 선생이었던 그는, 매년 새로 배정되는 우리 반 담임에 관해 꼭 필요한 논평을 해주던 졸업생 선배였고, 일요일 새벽이면 오락실 셔터문을 두드려 가장 먼저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기 앞에 나란히 앉던 친구이기도 했다. 한 살 차이도 괜히 주눅 들곤 하는 어린 시절에 한 번도 같은 건물로 등하교해본 적 없는 세 살 터울의 사이였지만, 우리는 5층짜리 아담한 아파트의 아랫집 윗집에 사는 이웃이었고, 엄마들끼리도 친했으므로 어렵거나 어색하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형이 없었고 그가 외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형제처럼 지냈다. 형은 야구를 좋아해서 집에 야구장비가 많았다. 그와 취미를 공유하는데 내 운동신경이 형편없다는 사실은 그다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형은 인내심이 많았고 나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정확히 말해,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 단순히 공을 주고받는 행위에 어떤 우주적 의미나 숨은 재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 현재,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형과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그 시간에 내가 단순히 흥미를 잃지 않으려고 애만 쓴 것은 아닌 게 확실하다. 캐치볼이 건전한 취미라고 한다면,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은 그 형의 위험한 습관이었다. 높고 폭이 좁은 담장이나 담벼락, 펜스나 철봉을 발견하면 굳이 그 위를 억지로 기어올라 아슬아슬 걸어보곤 했다.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아이인 나는 그를 따라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생각은 1도 없었지만, 위험천만하게 땅으로 착지하며 별일 아닌 척하던 형은 내게 절대로 자기를 따라 하지 마라고만 했다. 그것만 제외하면, 형은 공부 잘하는 모범생에, 운동도 다 잘하고, (일부러 져주지 않으면) 스트리트 파이터에 관한 한, 동네 레전드급이었기 때문에 십 대 초중반의 내 정신을 지배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존재였다. 오늘 이 글에서 소개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 속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당시 내가 되고 싶어 하던 유의 아이였고, 나는 어떻게든 노력해 닮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는 얘기다. “너 칼라 보노프 알아?” 어느 날 저녁, 과외 수업 도중에 형이 묻는다. 나는 그게 뭐냐고 질문으로 대답하고, 그는 가방에서 AIWA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내며 침착하게 설명해준다. “칼라 보노프는 사람이고, 가수야.” 곧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낀 우리는 잔잔한 기타 반주와 함께, 영롱한 목소리의 여자가 나지막이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듣는다. 마치 영어 듣기 평가할 때처럼의 집중력이라, “배 먹어라” 하면서 들어온 엄마가 책상 위에 배 두 쪽을 깎아놓은 접시를 놓고 가도 우리는 이어폰을 빼지 않는다. 당시의 내 귀엔,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를 붙여놓은 것처럼 들리는 그 곡은 ‘The Water is Wide’라는 제목의 노래다. 지금부터 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깔아놓고, 윌리엄 맥스웰의 「안녕, 내일 또 만나 So Long, See You Tomorrow」라는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윌리엄 맥스웰 윌리엄 맥스웰은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약 40년간 「뉴요커」 매거진의 편집장이었고, 「안녕, 내일 또 만나」는 그가 일흔두 살이 되던 1980년에 출간된 책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 함께 논 적이 있던 친구와 그의 가족을 둘러싼 비극을 대체로 담담하고 아주 사려 깊게 전달하는 이야기지만, 그 아래로 짙게 드리워진 노작가의 회한 섞인 어조는 이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한, ‘자전적 메타픽션’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더 구슬프게 들린다. 맥스웰 본인인 내레이터 ‘나’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면서 새로 재편되는 과정을 겪고 있는 예민한 소년이다. 그러던 중에 잠시 평범한 며칠 동안을 함께 놀았던 친구 ‘클레터스’는 ‘나’가 겪은 것과는 다른 이유로, 그 또한 자신의 세계가 송두리째 뒤바뀌는 사건을 겪게 된다. 여기서 두 아이가 겪은 일에 (독자들이 꼭 기억할 만한)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어느 겨울 새벽, 조용한 마을 농장을 울리는 한 발의 총소리로 시작한다. 죽은 사람은 ‘로이드 윌슨’이라는 삼십 대 남자, 총을 쏜 사람은 친구였던 ‘클레런스 스미스’라는 사십 대 남자였는데, 이들은 서로 이웃에 살던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깊은 우애와 끝없는 권태를 함께 나누던 이들 가족 사이에 언제부턴가 비밀스러운 불륜이 있었고, 우애와 권태는 폭력과 살인으로 변질되어 결국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린 것이다. 여기서 내레이터인 ‘나’와 함께 놀던 친구 ‘클레터스’는 살인자 클레런스 스미스의 아들이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파토 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바람에 두 소년도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뒤, 시카고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두 소년은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마주친다. 하지만 ‘나’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그를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그 후 평생 자신의 그런 행동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에 대한 윌리엄 맥스웰의 고백이 담긴, 책의 두 번째 챕터 첫 문단을 옮겨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작농의 피살 사건을 50년도 넘게 기억하는 건 첫째, 살인자가 내가 아는 이의 아버지였고, 둘째,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는 나중에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 사건을 아마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상록이란 이름을 이 글에 붙여도 된다면) 이 회상록은 그때 내 잘못을 우회적으로 사과하려는 헛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로, 책의 마지막 문단을 옮겨 적어 그의 ‘헛된 시도’가 어떤 질문과 대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는지를 얘기하고 싶지만, 혹시라도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그냥 생략하기로 한다. 윌리엄 맥스웰이 이 오랜 이야기의 육중한 문을 어떻게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닫고 있는지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혼자서 구경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읽은 「안녕, 내일 또 만나」라는 책은, 윌리엄 맥스웰이 지난 수십 년간 이야기를 읽고 편집하고 만들어 오면서 해온, 자신의 작가적 고민을, 오래전 고등학교 복도에서 모른 척하고 지나가 버렸던 그 친구에게 보내는 회한 어린 사과문의 형태로 고스란히 담아낸,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앨리스 먼로’ 같은 대작가가, 자신이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자기가 썼던 모든 글들을 윌리엄 맥스웰이 해냈던 방식대로 완성하겠다는 말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이쯤에서, 배경음악으로 깔아놓았던 ‘The Water is Wide’를 한 번 더 리플레이 시켜놓고 이웃집 그 형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그 일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그 형은 재수생이던 어느 가을날 밤에 일어난다. 몇 달 전 같은 아파트의 윗집 아랫집에 살던 지난 5년을 끝으로, 우리 가족은 버스로 2코스가량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천천히 걸어가도 이십 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곳인 데다 그 전에 살던 곳과 별반 다르지 않는 평수와 구조의 아파트인데, 왜 굳이 이사까지 간 건지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날 나는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으로 와서 “엄마, 라면!”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마침, 온 집안을 벨 소리로 흔들어대는 전화를 신속하게 받아낸 엄마는 잠시 뒤, 내 방문을 벌컥 열어 라면은 네가 끓여 먹으라며 급하게 나갈 준비를 한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 밤에 어디 가는 거냐고 묻는다. “502호 아줌마 죽었단다.” 502호 아줌마라면... 그 형의 엄만데. 막 벗었던 교복 바지를 다시 추켜올린 나는, 라면은 됐고 엄마를 따라가겠다고 한다. 어딜 따라 오냐고 막 소리치는 엄마를 기필코 따라나선 나는 그 어둑한 밤길을 미친 듯이 함께 달린다. 엄마의 입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리고 나서부터는 심장이 쿵쾅거려 뛰는 게 겁이 나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 세게 꽉 잡으면서 저 멀리, 텔레비전 뉴스에서 많이 본 것 같은,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자동차 불빛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진다. 그와 동시에, 점점 더 잘 들리게 되는 누군가의 괴성 소리, 그것은... 형의 목소리다. 아파트 주차장을 둘러싼 구경꾼들과 각층의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수십 명의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은, 그 형이 누군가의 차 위에 올라가서 괴성을 지르며 야구 배트로 차를 내려치고 있는 장면이다. 창문이 박살 나고 지붕이 내려앉던 그 커다랗고 까맣고 비싸 보이는 차의 소유주는 502호 아저씨, 그러니까 그 형의 아버지다. 지금 형은 타오르고 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불길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다. 놀란 엄마는 이웃집 아줌마들에게 달려가 숨어버리지만 나는 구경꾼들 사이에 꼼짝 못 하고 서 있기만 한다. 미리 도착해 있는 경찰들도 들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형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보고만 있다. 그러다 곧 형이 미끌, 한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소리가 터진다. 바닥으로 쿵, 떨어진 형이 이내 구겨진 자세가 되자 순식간에 달려간 경찰들이 그를 제압한다. 그것도 내가 처음 본 모습이다. 높은 곳에서 형이 떨어진 것 말이다. 형은 이내 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로 울부짖으며 연신 쌍욕을 내뱉는다. 누군가를 죽일 거라는 말이 내 귀에 꽂힌다. 형이 경찰들에 끌려가며 차에 태워지는 모습을 나는 점점 뒤로 물러가면서 끝까지 쳐다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나는 이제 뒤 돌아 걸어간다. 무섭고 타오르는 것은 절대로 못 본 사람처럼 조용히 걸어서, 집으로. 가로등 불빛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어두운 갓길로만 걸어서, 형을 태운 경찰차가 지나가더라도 어둠 속의 나를 발견하지 못하게 갓길로만 걸어서 집으로 간다. 다음 날 아침에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남편의 오랜 불륜 사실을 알고 난 502호 아줌마가 그날 저녁에 화장실에서 목을 맸으며, 그 모습을 학원에서 돌아온 형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엄마에게 물으니, 엄마는 네가 뭘 어떻게 하긴 하냐는 듯 의뭉스런 얼굴이 되었다. 502호 아저씨에 대한 내 기억은 마주칠 때마다 내게 용돈 하라고 만 원씩이나 주는 고마운 분이었는데 이제 고마움은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바뀌었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곧 트라우마로 바뀔 참이었다. 그해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며 학교를 다녔고, 대학입시성적에 만족하지 못했던 형은 재수생의 길을 선택해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가족이 왜 걸어서 이십 분 거리의 똑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간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사를 가게 되면서 형과 내가 드물게 마주치는 일은 더 드물어 졌고,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초, 중학교와는 달리, 형이 다니지 않았던 학교여서 담임선생에 대해 형이 내게 해줄 논평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조금씩 별말 없이 멀어지고 있었고, 엄마는 사람 사이란 게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한 번씩 들리는 얘기로 형은 그해에 대학에 가지 않았고, 바로 군대에 갔다고 했다. 나도 몇 년 뒤에 대학에 가고 얼마 뒤에 군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그 형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복학을 하고,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혹시 내가 아는 그 백승빈?’ 내 싸이월드 방명록에 그 형의 이름이 한 줄 글을 남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 며칠 동안이나 답글을 달지 않았다.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형의 이름을 본 순간, 언젠가 불길에 활활 타오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던 내 몸짓이 생각났다.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은 ‘내가 아는 백승빈?’ 이라고만 물었지만, 사실은 그 뒤에 ‘경찰차 안에서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는데, 갓길에서 모른 척 고개 숙이고 걷던 그 백승빈 맞아?’ 를 생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런 걸 두고 죄책감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내가 그때 형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경찰차 앞을 가로막고 창문을 두드리며 형을 울부짖었어야 했나? 그러다 다치니까 차 지붕에서 그만 내려오라는 얘기 정도나 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갓길의 어둠 속에 숨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에 확인해본 방명록엔 형의 글이 삭제되어 있었고, 나는 그가 며칠 전 글을 남겼을 때 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순간, ‘혹시 내가 아는 백승빈?’ 뒤에 생략되었던 말은 (‘너 칼라 보노프 기억하냐?’) 정도였을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들었다. 참 얄궂기도 하지. 그래서 그날 나는 아마 울었던 것 같다.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곡이 엠씨스퀘어 숙면 모드에 가사만 대충 붙인 것만 같았는데, 언젠가부터 내게 이 노래는 분노와 포효, 비탄과 오열을 예쁘게 숨기는 듯한 가사와 담담한 척하는 목소리에 꾹꾹 눌러 담아낸 아픈 이야기로 들린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서 듣지는 않는다. 그 형도 생각나고, 이젠 세상에 없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달려갔던 그 밤길도 생각나고, 뭐... 그렇다. 윌리엄 맥스웰은 나이 든 노인이 되어 오래 전 자신이 모른 척하고 지나쳤던 친구에게 소설의 형태로 아름다운 사과문을 남겼다. 죽기 전까지 수십 년 간, 나보코프, 업다이크, 샐린저, 치버, 오코너 같은 위대한 작가들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읽고 쓰고 만들게 했던 그의 작가적 고민이 고스란히 마지막 장편소설 「안녕, 내일 또 만나」에 들어있다. ‘서로 상반된 감정이 너무 많이 얽혀 있어 우리는 삶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꾼이 나서서 상황을 재배치하는 것일 터이다. 어쨌든 과거에 관한 한 우리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Too many conflicting emotional interests are involved for life ever to be wholly acceptable, and possibly it is the work of the storyteller to rearrange things so that they conform to this end. In any case, in talking about the past we lie with every breath we draw.’ 이 책을 내 마음대로 각색해 지금까지 보여준 영화의 주인공은 그 형이었다. 지난 시절에 관한 내 기억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재배치한 것도 있고, 상상에 가까운 짐작도 있다. 하지만, 형의 AIWA 워크맨을 통해 ‘칼라 보노프’를 같이 듣던 장면은 가짜일 수 없고, 차 지붕 위에서 활활 타오르다 떨어져 땅바닥에 구겨진 채 울부짖던 그의 모습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내 기억 속의 화신으로 남을 것이다. 형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는 인생을 살고 있기를 바란다. 당장에라도 이 외딴 섬 같은 작업실을 뛰쳐나가 미친 듯 노를 저어 그와 캐치볼을 하러 가고 싶다는 이 글 도입부의 내 마음을 형이 짐작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윌리엄 맥스웰의 방식을 감히 한 번 흉내 내며 이런 글을 써보았다. 내가 각색한 이 영화 안에서 형은, 언젠가 높은 곳에서 쿵, 하고 한 번 떨어졌지만 어떻게 해서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 지금처럼 잘살게 되었는지를 기필코 보여주는, 당차고 아름다운 주인공일 것이다. 그런 주인공이라면 분명히 내게 다시 연락할 것이다. 그래서 별 말 없이 캐치볼을 하게 되는 거지. 그때 깔리는 사운드트랙이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라면 좀 이상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