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백남준 논문을 찾아서
- 감독
- 배윤호
- 제작년도
- 2017
‘~을(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남준 의 작업은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선보인 작업은 <머리를 위한 선>(1961)으로, 작곡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이 쓴 퍼포먼스 스코어 <구성 19 #10 밥 모리스에게 Composition 19 #10(to Bob Morris)>에서의 지시문 “선을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라”를 백남준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잉크를 머리에 묻혀 길이가 긴 종이에 선을 그리는 퍼포먼스였다. 이 외에도 사람 머리 조각을 쇠사슬로 매달고 신어볼 수 있게 만든 <걸음을 위한 선>(1961), 거름 체에 물건을 매달아 악기처럼 소리를 내 볼 수 있도록 한 <손을 위한 선>(1961), 슬리퍼, 양철 주전자, 열쇠, 나무 인형 등 잡다한 사물을 줄에 매달아 바람에 의해 서로 부딪히게 만들어 풍경처럼 소리를 내게 만든 <바람을 위한 선>(1963)과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물을 설치한 후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한 <코를 위한 선>(1963), 검은 TV 화면 가운데에 가늘고 긴 흰색 세로줄이 나타난 < TV를 위한 선 >(1963) 등등이 있다. 이 작업들이, 그리고 백남준이 선 사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뿐더러 그의 예술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리 유용한 접근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대부분의 작업이 전시되었던, TV를 처음으로 전시장 안에 들여옴으로써 백남준을 유명하게 만든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떠올려 보자. 이 전시의 독특함은 작업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었다. 전시의 제목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가 원했던 것은 ‘음악’을 ‘전시’하는 것이었던 듯한데, 관객은 전시장에 놓인 각종 작업을 직접 다루고 소리를 내 보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을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로 보여주고자 했던 인터미디어적 특성, 작업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과 자율적인 의미 생산에 대한 강조. 백남준은 1962년 갤러리스트 롤프 예를링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전시가 “회화나 조각이 아닌 ‘시간-예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이 그러하듯 시간을 통해서 가능한 미적 경험이었고 그리하여 전시장에서의 작품이란 관객의 시간과 상호적일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림 1: <흰색 회화>(1951) 앞에 앉아 있는 라우센버그 < 영화를 위한 선 >(1962-64)은 ‘비어 있는’ 필름의 프로젝션이다. 즉,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리더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빛으로 쏴 흰 화면을 만든다. 이 화면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필름에 난 스크래치나 묻어 있는 먼지 때문에 무언가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필름 프로젝션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형식과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 이 반영화(antifilm)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존 케이지는 이미지 없이 프로젝션 되는 <영화를 위한 선>을 보고 라우센버그의 <흰색 회화 White Painting>(1951)를 떠올렸다고 한다. 케이지가 라우센버그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4분 33초>(1952)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우센버그는 “캔버스는 절대로 비어있지 않다”라고 믿었고, 케이지는 “소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에 응답했다. 그림 없는 회화, 소리 없는 음악, 그리고 이미지가 없는 영화. 서로 상이한 매체지만 이들은 모두 비어있는 것이자 가득 찬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라우센버그가 시각의 영역에, 케이지가 소리의 영역에 있었다면, 유령과 같은 이미지가 물러난 백남준 의 화면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서사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물적 조건인 기계 장치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투명하다. 볼 것 없는 화면과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소리 앞에서 관객은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게 된다.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의 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지루함이 발생할 때 경계가 사라지는 일종의 미학적 순간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루함은 흥미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음악의 전시’ 서문에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니 해보라. 처음에는 (아마) 흥미롭겠지만 나중에는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아마)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백남준이 보기에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구조화하는 주요한 시간 기반 매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지배하던 형식과 내용이 직조된 기존의 구조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 영화를 위한 선 >이 1960년대에 등장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60년대는 전반적인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적 실천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로버트 모리스는 1961년 <두 개의 기둥 Two Columns>을 만들어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이라고 폄하한 바로 그 전시장에서의 경험, 현상학적 미학을 강조한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알렸다. 루시 리파드는 개념 미술의 맥락에서 미적 오브제가 사라져가는 60년대의 경향을 가리켜 ‘비물질화’라는 용어를 그의 1973년 저서에서 사용한다. 1958년 1월, 이미 앨런 캐프로는 「아트뉴스」지에 ‘잭슨 폴록의 유산’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고 플럭서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지워 예술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다에 뿌리를 둔 플럭서스는 단순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DIY(Do-It-Yourself)’ 미학을 전파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에 존 케이지가 탐구한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영화의 영역에서 또한 대단한 에너지를 지닌 움직임이 있었다.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시네마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영화가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1962년 23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모여 뉴 아메리카 시네마 그룹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영화를 유통시키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조나스 메카스가 1964년 세운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는 당시 등장하던 영화와 비디오 예술 실천을 위한 중요한 장소였다. 이곳은 시각예술과 퍼포먼스가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곳이 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전시와 유통을 통해 주류 예술 밖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이곳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방식들이 실험되었다. 그림 2: 1965년 10월 28일자 「빌리지 보이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할 당시 백남준 의 여행용 비자를 위한 스폰서가 바로 메카스였다. 메카스는 플럭서스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키우나스와 잘 알고 지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처음으로 < 영화를 위한 선 >을 선보였던 것은 1964년 마키우나스가 초대해서 참여하게 된 플럭스홀(Fluxhall)에서의 6주간의 플럭서스 페스티벌(Fully Guaranteed 12 Fluxus Concerts)이었다. 백남준은 4월 25일 다섯 번째 콘서트(Concert No. 5)에서 <피아노를 위한 플럭서스 콘서트 Fluxus Concert for Piano>라는 제목의 작업과 함께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고, 5월 8일 여덟 번째 콘서트(Concert No. 8)에서는 <영화를 위한 선>을 단독으로 상영했다. 브루스 젠킨슨에 따르면, 이 행사에서 <영화를 위한 선>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더블베이스가 놓인 다락 공간의 전면에 위치한 가정용 영화 스크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크기로 상영되었다. 1965년 11월 2일에는 조나스 메카스가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만든 행사 ‘뉴 시네마 페스티벌Ⅰ’에서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다. 다케히사 고수기는 이 행사에서 백남준이 노출된 빈 필름과 노출되지 않은 빈 필름 두 가지 버전으로 스크리닝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라이브 퍼포먼스를 결합시켰다고 회고한다. 피터 무어가 촬영한 <영화를 위한 선>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바로 이 행사에서의 기록이다. 이 사진을 보면 백남준은 <영화를 위한 선>이 상영되는 스크린을 마주하고 서 있다. 한 해 전의 상영과는 달리 스크린의 크기가 훌쩍 커졌다. 그는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면을 드나드는 간단한 행위를 수행했는데, 이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영화를 위한 선>에 대한 백남준 자기 자신의 관람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영화의 미니멀리즘적 경험인 것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백남준의 (시네마테크에서의) 저녁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라 몬테 영,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리 마르코폴로스, 잭 스미스, 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앤디 워홀의 예술처럼, 그의 예술은 천 년 동안 이어진 미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다른 고전적인 예술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분석되고 경험된다. (...) 빛이 이미지가 된 자리에 이미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림 3: 플럭스키트, 1965 그림 4: 플럭스키트 안의 <영화를 위한 선> 패키지 < 영화를 위한 선 >이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모호하다. 「플럭서스 Etc: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콜렉션」에 따르면 <영화를 위한 선>이 포함된 백남준 의 필름 스크리닝이 1962년 12월 파리의 학생과 예술가를 위한 미국인 센터(American Center for Student and Artists in Paris)에서 있었고, 마키우나스 또한 「필름 컬처」 1966년 겨울호에 <영화를 위한 선>의 제작연도를 ‘1962-1964’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은 제작년도를 표기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를 위한 선>의 필름은 이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이 작업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생필름을 프로젝션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작업의 요체는 필름일까? 백남준이 사용했던 바로 그 원본 필름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작업이 제공하는, 백남준이 고민했던 시간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작업일까? <영화를 위한 선>은 형식과 그것이 놓이는 맥락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무엇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1962년의 상영에 대해 케이지는 “1시간 길이의 이미지 없는 필름”으로 기억했으며, 메카스는 시네마테크에서 16mm필름으로 30여분 길이로 상영했다고 밝힌다, 여기에 더해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의 오브제와 인쇄물을 보급하고 유통시키기 위해 DIY 버전으로 만든 에디션 플럭스키트(Fluxkit, ‘A’ 카피와 ‘B’ 카피 모두 1965년 제작) 이후에는 <영화를 위한 선>이 주로 루핑으로 상영되었음을 상기해보면(이는 유통을 위해 작은 크기의 패키지로 제작된 탓에 필름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정해진 상영 방식은 없는 듯하다. 이 말은, <영화를 위한 선>의 물질적 상태가 정해진 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영화를 위한 선> 단 한 작품에 대한 연구를 통한 전시를 기획하고 이에 관련된 책 「Revisions: Zen for Film」을 펴낸 한나 횔링이 다루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영화를 위한 선>을 전시장에서 봤던 세 번의 경험을 떠올리는데, 한번은 필름 프로젝터로, 한번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프로젝션으로, 한번은 필름이 담긴 캔이 유물처럼 전시되어있는 경우였다. 그는 작품이 여러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러한 상태, 계속적으로 재물질화 되고 관객의 참여 또한 그 의미가 갱신되는 이러한 상태가 <영화를 위한 선>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점임을 얘기한다.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의 이벤트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영화의 문화와 이것을 유희적으로 즐기는 데 관심이 많았다. 플럭서스의 활동을 영화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 그의 노력 덕분에 플럭서스 그룹은 플럭스필름(Fluxfilm)라는 이름 아래 많은 필름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키우나스는 1962년부터 1970년 사이에 백남준 , 오노 요코, 벤 보티에, 폴 샤리츠 등 플럭서스 그룹에서 제작한 영화 37편을 모아 플럭서스 앤솔로지(Fluxus Anthology)를 편집했는데, 그 첫 번째(Fluxfilm No.1)가 바로 < 영화를 위한 선 >이다. 이 버전에서 <영화를 위한 선>의 러닝타임은 7분 58초이다.(플럭서스 앤솔로지의 전작은 모두 우부웹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www.ubu.com/film/fluxfilm.html). <영화를 위한 선>의 16mm 버전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아카이브 형태로 수장고에 보존 중이다.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플럭서스 컬렉션에 포함된 이 필름은 현존하는 필름 중 유일한 극장용의 긴 버전이지만, 이는 더 이상 상영용으로 쓰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가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영화를 위한 선>의 이 버전을 대여하고자 하는 경우 미술관은 필름을 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크리닝의 개념만을 대여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화를 위한 선>을 빌리는 이는 프로젝터를 구비하기만 한다면, 길이를 마음대로 정하여 아무 16mm 빈 필름 리더를 상영에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뉴욕현대미술관의 정책은 원본 필름을 이 작업의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나 횔링은 밝히고 있다. 이는 분명 설치나 참여형 예술, 이벤트로서의 영화, 퍼포먼스 등 최근의 예술 실천뿐만 아니라 디지털 사본이 무한히 증식 가능한 당대의 매체적 조건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일 것이다. <영화를 위한 선>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메인 사진 설명: 피터 무어, <영화를 위한 선> 앞에 서 있는 백남준. 1965년 11월 2일
영화란 지진과 같은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크고 작은 요동을 일으키는 불가시적 힘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힘의 근원을 찾아 지각 밑을 답사하려는 무모한 시도는 필경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할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이런저런 관측과 경험을 통해 그 힘의 운용 원리를 간접적으로 추론하는 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보다 정교한 추론을 위해서는 이곳뿐 아니라 다른 곳의 요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며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이따금 여행을 떠나거나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언제부터인가 그 불가시적 힘의 효과가 지진계(seismograph)에 기록된 그래픽적 형상과 수치로 환원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상과 수치가 그 힘과 모종의 지표적 관계, 혹은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만, 곧바로 힘 자체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그것에 대한 유일한 기호표현이라 할 수도 없다. (예컨대 우리는 요동을 청각기호로 나타내는 지진계를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우리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와 그 변형들이 영화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영화적인(cinemat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역사 속에서, 지진계가 지진 자체와 동일시되거나 지진적인(seismic) 것의 특권적 기호표현을 산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식의 전도를 본다. 하지만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시청각적 지진계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고, 그런 까닭에 오늘날까지도 그것과 관련된 구성물들 상당수가 ‘영화적 인터페이스’를 위한 강력한 은유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가 영화라는 지진을 감지하기 위한 유일한 장치는 아니라는 점은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나 슈클라다노프스키 형제의 비오스코프 같은 사례들이 보여주듯)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이 장치의 사용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이들은 바야흐로 인위적인 요동을 가미해 그래프의 형상을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시네마토그래프의 특권에 일찌감치 의문을 품었던 이들 가운데 몇몇은, 돌이켜보면 놀랄 만큼 현명하게도, 섣불리 대안적인 장치에 눈을 돌리거나 지진과 유사한 인공적 요동을 일으키는 방법을 고안하기보다는 지진의 역량을 다시 살피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가령 1930년대의 르느와르는 지진계를 활성화된 지진대로 다시 가져다 놓고 인공적 요동과 본래의 지진이 함께 빚어내는 그래프의 형상을 관찰하는 일에 몰두했다. 시네마토그래프가 영화라는 지진과 맺고 있던 비인격적 자동주의(impersonal automatism)의 관계를 다시 살피려는 시도(앙드레 바쟁)가 나올 무렵, 지진은 이미 지진대를 넘어 확산되어 지각의 곳곳을 강타하고 있었다. 이른바 ‘모던 시네마’란 가공할 대지진의 충격파에 맞서 지진계가 오작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 빚어낸 매혹적인 그래프이다. 그런데 만일 대지진의 충격파가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의 임계값을 넘어선 것이라면 이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지진의 역량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오작동하는 지진계가 그려내는 혼란스러운 그래프 또한 지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가설이었다. 이러한 가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과격한 방식으로 지진계의 ‘다른’ 사용법을 한꺼번에 제시한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프랑스의 레트리스트(Lettrist)들이었다. 이지도르 이주의 < 타액과 영원에 관한 논고 Traité de bave et d’éternité >(1951) 및 기 드보르의 <사드를 위한 울부짖음 Hurlements en faveur de Sade>(1952) 등과 더불어 레트리즘 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모리스 르메트르의 <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1951)를 우리 리스트의 첫머리에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요하는(unquiet) 영화의 형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레트리즘은 누벨바그와 더불어 “실험영화의 두 커다란 라이벌 분파”(니콜 브레네즈)라고까지 여겨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일찌감치 영화의 전당에 그만의 자리를 잡은 후자와는 달리 오래도록 망각 속에 파묻혀 있다 비교적 최근에야 다시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지진계는 오직 그것의 오작동을 통해서만 영화라는 지진의 역량을 더듬을 수 있다는 과격한 주장이 제기된 이후, 이를 전적으로 수긍하거나 반신반의하거나 거부한 여러 작가들이 자기만의 길을 따라 흔들리는 대지 위를 방랑했지만, 이들이 영토와 영토를 가로지르는 방랑의 과정에서 산출된 기기묘묘한 그래프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공식적인 영화사(史)의 가장자리나 여백에 묻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실험영화’나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다분히 부적절한 명명으로 인해 오해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매 작품이 그 자체로 온전히 하나의 창조여야 할 예술에서 실험이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는 타르코프스키 식의 비판은, 그저 특정한 종을 명명하는 이름을 그 종의 속성과 동일시해 버리는 오류에 입각해 있다. 즉, 바다표범이란 바다에 서식하는 표범이라고 간주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적절한 명명을 바로잡기보다는 실제 그 이름이 사용되는 맥락에 적절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 이름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이라는 제목의 본 코너는 한국의 영화애호가들에게 그러한 맥락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017년 1월부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의 본 코너를 통해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편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각각의 영화를 둘러싼 영화사적 정황, 영화집단 그리고 사조와 경향에 대한 가이드를 3주 간격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그러니 여기서 당장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의 역사를 무리하게 요약하려 들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선정 과정과 기준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밝혀두어야 할 듯싶다. 본 리스트는 서울국제실험영화제 프로그래머 이행준,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교수 오준호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3인이 각각 20편씩을 추천한 후에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35편으로 압축해 얻은 것이다. 우리는 초기 아방가르드, 즉 무성영화 시기의 추상영화, 절대영화, 다다와 초현실주의영화를 비롯해 1940년대에 마야 데런과 케네스 앵거 등의 작가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싹튼 미국 아방가르드 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했다. 루이스 부뉴엘의 < 안달루시아의 개 >(1929)나 데런의 < 오후의 올가미 >(1943) 등은 이제는 예술영화의 정전이 되어 세계영화사 강의에서도 흔히 다루어지곤 한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늘날의 실험영화, 보다 폭넓게는 영화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과 공연 등 여러 예술영역들을 가로지르며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오디오비주얼 실천들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 할 수 있는 역사적 작업들에 주목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과 영국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실험영화의 구조적(structural)이고 물질적(material)인 전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레트리즘 운동을 비롯해 이후의 확장영화(expanded cinema) 실천을 가로지르는 퍼포먼스적 측면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점은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 (35편 가운데 22편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작품들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아시아 및 한국의 선구적인 작가들에 대해서도 다루고자 했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여전히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통해 접하기 쉽지 않은 것들도 꽤 있고 영화관에서의 관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있기 때문에, 추후 한국영상자료원과의 논의를 거쳐 비정기적으로 상영 프로그램을 꾸려 관객들에게 소개할 계획도 있다. ※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35선 리스트 (리뷰 연재는 본 리스트의 순서를 따라 이루어질 예정임) 영화가 벌써 시작되었나? Le film est déjà commencé? 모리스 르메트르 Maurice Lemaitre / 1951년 / 프랑스 요정의 빛 Nymphlight 조셉 코넬 Joseph Cornell / 1957년 / 미국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 렌 라이 Len Lye / 1958~1979 / 미국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 피터 쿠벨카 Peter Kubelka / 1960년 / 오스트리아 천상과 지상의 마법 Heaven and Earth Magic 해리 스미스 Harry Smith / 1962년 / 미국 노트북 Notebook 마리 멘켄 Marie Menken / 1940~1962년 / 미국 영화를 위한 선 Zen for Film 백남준 Nam June Paik / 1964년 / 미국 순열 Permutations 존 휘트니 John Whitney / 1966년 / 미국 찢어진 오른쪽 눈을 위하여 For the Damaged Right Eye 마츠모토 도시오 Matsumoto Toshio / 1968년 / 일본 생필름 Rohfilm 비르기트 하인 Birgit Hein & 빌헬름 하인 Wilhelm Hein / 1968년 / 독일 손 Hand 유현목 Yoo Hyun Mok / 1967년 / 한국 톰, 톰, 피리꾼의 아들 Tom, Tom, the Piper’s Son 켄 제이콥스 Ken Jacobs / 1969년 / 미국 24분의 1초의 의미 The Meaning of 1/24' 김구림 Kim Ku-lim / 1969년 / 한국 한글 Korean Alphabet 김인태 Kim In Tae / 1967년 / 캐나다 도색영화 Blue Movie 앤디 워홀 Andy Warhol / 1969년 / 미국 월든 Walden 조나스 메카스 Jonas Mekas / 1969년 / 미국 초른의 보조정리 Zorns Lemma 홀리스 프램튼 Hollis Frampton / 1970년 / 미국 자신의 눈으로 보는 행위 The Act of Seeing with One’s Own Eyes 스탠 브래키지 Stan Brakhage / 1971년 / 미국 퀵 빌리 Quick Billy 브루스 베일리 Bruce Baillie / 1971년 / 미국 중심구역 La Region Centrale 마이클 스노우 Michale Snow / 1971년 / 캐나다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 안소니 맥콜 Anthony McCall / 1973년 / 영국 룸 필름 Room Film 피터 기달 Peter Gidal / 1973년 / 영국 거울을 든 사람 Man with Mirror 가이 셔윈 Guy Sherwin / 1976년 / 영국 드림랜드로 향하는 5분 10초 Take the 5:10 to Dreamland 브루스 코너 Bruce Conner / 1976년 / 미국 원 웨이 부기 우기 / 27년 후 One Way Boogie Woogie / 27 Years Later 제임스 베닝 James Benning / 1977년/2005년 / 미국 천사 L’ange 파트릭 보카노프스키 Patrick Bokanowski / 1982년 / 프랑스 ABCD 록스리 Roxlee / 1985년 / 필리핀 화염 속의 도시 City in Flames 슈멜츠다힌 Schmelzdahin (요헨 뮐러 Jochen Muller, 요헨 렘페르트 Jochen Lempert, 위르겐 레블레 Jurgen Reble) / 1984년 / 독일 극지에서 적도까지 From the Pole to the Equator 안젤라 리치 루키 Angela Ricci Lucchi & 예르반트 지아니키안 Yervant Gianikian / 1986년 / 이탈리아 30 X 30 장 페이리 Zhang Peili / 1988년 / 중국 미디어 매지카 Media Magica 베르너 네케스 Werner Nekes / 1986년 / 독일 외부공간 Outer Space 피터 체르카스키 Peter Tscherkassky / 1999년 / 오스트리아 더블 타이드 Double Tide 샤론 록하르트 Sharon Lockhart / 2009년 / 미국 데카지아 Decasia 빌 모리슨 Bill Morrison / 2002년 / 미국 안더스, 몰루시아 Differently, Molousia 니콜라 레 Nicholas Rey / 2012년 / 프랑스
1960년대 중반, 미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 스탠 밴더빅은 ‘확장영화’(expanded cinema)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구상한 확장영화란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 비디오테이프 등 당대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시청각 장치들을 통합한 ‘비(非)음성적이고 국제적인 그림-언어’로 다분히 테크노-유토피아적인 전망에서 비롯된 개념이었다. 더불어 그는 자료들을 기록, 저장, 위성으로 전송 및 수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양상들을 담은 수천 개의 이미지들을 내부 벽면에 동시에 영사할 수 있는 반구(半球)형의 건축물을 고안하고 이를 ‘무비-드롬’(movie-drome)이라 불렀다. 밴더빅의 확장영화 개념은 오늘날로 치면 멀티미디어와 인터넷의 결합을 건축적 공간에 옮겨놓은 것으로, 그의 ‘인터미디어’(intermedia)적 지향은 진 영블러드가 1970년에 출간한 저서 「확장영화 Expanded Cinema」에서 보다 체계화되었다. 영블러드의 관심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같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가능성을 실험한 휘트니 형제나 백남준 같은 예술가들에게 향해 있었다. 영화적 제도 일반(제작, 배급, 상영, 관람)에 대해 의문을 품고 영화장치를 구성하는 요소들(필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및 영화관이라는 환경)의 구조와 물질성 자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1970년대 영국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말콤 르 그라이스, 윌리엄 라반, 아나벨 니콜슨 등 ‘Filmaktion’ 그룹과 런던영화작가조합(London Filmmakers’ Co-Operative)의 작가들)은 그러한 요소들의 관습적 결합을 교란하거나 해체하고 또 재정의하는 고도로 형식적이고 구조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확장영화를 다시 정의했다. 확장영화 실천에서 퍼포먼스가 필수적인 것은 아님에도 멀티스크린과 더불어 가장 두드러진 기법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이들의 작업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시기 영국 확장영화의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인 말콤 르 그라이스의 <호러필름 1번 Horror Film No.1>(1971)을 감상해 보기로 하자. [영상 1] <호러필름 1번 Horror Film No.1>(말콤 르 그라이스, 1971) 2010년 11월 11일 호주 브리즈번의 현대미술협회 공연 기록영상 역사적으로 볼 때 영화적 실천이 멀티스크린이나 퍼포먼스와 결합된 것은 이보다 훨씬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00년 경 라울 그리무앙-상송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10대의 동기화된 영사기로 360도 스크린에 투사하고 이를 열기구에 올라타 관람하게끔 하는 ‘시네오라마’(Cinéorama)라는 장치를 고안했고, 1927년 아벨 강스는 < 나폴레옹 Napoleon >에서 나란히 놓인 3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영사하는 대형화면 포맷을 실험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글루모프의 일기 Glumov’s Diary>(1923)와 르네 클레르의 <막간 Entr’acte>(1924)은 무대 공연 도중 상영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1960~70년대 영미권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일련의 확장영화적 실천에 몰두하기 전, 1950년대 초에 등장한 프랑스의 레트리스트들(이시도르 이주, 모리스 르메트르, 질 J. 울망 등)이 보다 과격한 퍼포먼스를 구상했다는 점도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울망은 <반개념 L’ anticoncept>(1952) 상영 시 기상관측용 기구를 스크린으로 활용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그것을 만지거나 올라타거나 심지어 자르고 지나가도록 했는데, 이는 영화관 매니저와 스태프, 그리고 실제의 배우 등이 벌이는 라이브 퍼포먼스(주로 관객으로 가장해 소동을 벌이는 것)와 영화상영의 결합을 구상하고 이를 통해 보는 행위와 보이는 대상의 분리를 폐지하고자 했던 르메트르의 ‘종합영화’(syncinéma)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전통적 영화개념에 도전하는 확장영화 실천과 퍼포먼스의 도입이 1960~70년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관심사로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이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당대 아방가르드 영화 전반과 관련된 것으로, 특정한 예술적 매체의 속성을 그 매체 자체를 통해 탐구하고 비판한다는 모더니즘의 방법론에 입각해, 영화라는 매체를 이루는 구성요소와 기본 조건들(르 그라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질적 조건들’)을 영화 자체를 통해 탐구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이러한 탐구와 비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몇몇 작가들은 영화라는 장치가 결코 자명하지 않은 것임을 폭로하는 해체적 실천(필름, 영사기, 스크린의 조합을 기존의 방식과 달리하는 상영이나 퍼포먼스)이나, 특정한 영화적 구성요소의 물성(物性)에 대한 ‘외과의학적’ 집착(필름의 감광유제 층이나 영사기에서 방사되는 빛 자체에 대한 탐구)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더불어 ‘과정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더니스트적 개념 또한 영화작가들이 퍼포먼스적 요소를 작업에 도입하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확장영화 가운데 하나인 안소니 맥콜의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1973)에서 관람객에게 볼거리로 제공되는 것은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영사기에서 방출된 빛이 전시공간에 조각 같은 형상을 생성해내는 과정이다. [영상 2] <원뿔을 그리는 선 Line Describing a Cone>(안소니 맥콜, 1973) 2011년 25FPS 국제실험영화제 공연 기록영상 다른 하나는 영화 이외의 오디오비주얼 매체, 특히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과 1960년대 중반에 출시된 소니 포타팩과 같은 비디오카메라로 인해 필름, 프로젝션, 영화관,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는 영화장치가 필연적이기보다는 우연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필름은 자기테이프로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며, 프로젝션은 디스플레이로 대체될 수도 있는 것이며, 영화관 또한 통상의 연극적 건축의 형태를 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60~70년대 영미권의 아방가르드 영화작가들이 텔레비전과 비디오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당대의 ‘뉴미디어’가 그들로 하여금 영화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을 지닌 독자적 매체라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앞서 언급한 해체적 혹은 ‘외과의학적’ 방향의 작업을 자극했으리라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한국에 확장영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4년에 개최된 제1회 서울실험영화페스티벌(현재는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을 통해서다. 말콤 르 그라이스, 윌리엄 라반, 질 이덜리, 리스 로즈, 안소니 맥콜, 크리스 웰스비 등의 1960~70년대 작업들이 소개되었는데, 멀티스크린을 활용하거나 상영 환경을 독특하게 구성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작품들, 그리고 영화제의 초청으로 방한했던 르 그라이스의 열정적인 강의는 나로 하여금 영화라는 불안정한 대상에 대해 다시 숙고하게끔 만들었다.) 영화적 퍼포먼스 작업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문화예술 기획자 및 창작자들의 네트워크인 ‘무잔향’(無殘響)이 기획해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실험영상 및 실험음악 공연을 통해서다. 이제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필름 퍼포먼스인 가이 셔윈의 <거울을 든 남자 Man With Mirror>(1976)와 여러 대의 영사기, 거울, 필터 및 전자음향을 활용해 극도로 사이키델릭한 환경을 창출해내는 프랑스 그룹 메탐킨(Metamkine, 1987년에 결성)의 <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 >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었다. [영상 3] <간섭의 셀룰로이드 Cellule d’intervention>(메탐킨 그룹) 2011년 8월 28일 독일 함부르크 공연 기록영상 영상매체를 활용한 공연이나 전시는 이제 한국에서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지만, 1960~70년대 영미권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정립된 확장영화와 필름 퍼포먼스 실천을 명확히 의식하면서 이의 현재적 의의를 타진하는 한국 작가들은 한 손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정도다. 필름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형, 파운드푸티지의 활용, 멀티스크린 영사를 실험하면서 홍철기, 이옥경 등의 즉흥음악가들과 협업하고 있는 이행준(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프로그래머)과 안무가 나연우와의 협업으로 <대화 Conversation>(2013)를 연출하는 한편 다른 작가들의 ‘댄스 필름’들을 기획하기도 한 이장욱(핸드메이드 필름 랩 스페이스 셀 대표)이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이들이 내놓은 작업 가운데 이행준 의 <필름 워크 Film Walk>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2011년 문래예술공장에서 초연된 이후 국내외 곳곳에서 공연되어 온 <필름 워크>는 영사기에 걸린 16mm 필름의 한쪽 끝을 작가가 손으로 잡고 길게 이어 뽑으면서 공연 장소에서 이리저리 거니는 간단한 퍼포먼스다. 이 퍼포먼스의 기술적 원리는 간단하다. 영사기의 옵티컬 사운드헤드에 필름의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퍼포레이션(perforation: 필름 가장자리에 규칙적인 간격으로 뚫린 구멍)이 물리게끔 해서 퍼포레이션 자체가 일종의 광학 사운드트랙으로 기능하게 한 것이다. 여기서 영사기를 ‘디제잉’(DJing)하는 공연자인 이행준은 배우이자, 감독이며, (아무 것도 영사하지 않는) 영사기사이고, 동시에 후반작업실의 기술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상 4] <필름 워크 Film Walk>( 이행준 , 2011) 2014년 2월 22일 프랑스 낭트 공연 기록영상 (즉흥연주: 홍철기) 이상 (너무) 간략하게 확장영화와 필름 퍼포먼스에 대해 개괄해 보았다. 이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이러한 반(反. anti-)영화적 혹은 반(半. semi-)영화적 실천들은 미술, 공연, 음악 등의 영역에서 적잖이 수용되고 있다. 그것이 현재적 체험의 강렬함을 더하고자 수행성(performativity)을 강조하는 오늘날 예술의 욕망 때문인지, 어느덧 예스러운 풍미를 띠게 된 장치에 그들의 의고(擬古) 취향과 페티시즘이 향한 탓인지, 기록된 것의 재생에서 즉흥적인 것의 작의(作意) 없는 생성으로 향하는 길의 동반자를 얻은 기쁨 때문인지, 혹은 그 반대로 부분적이나마 일시적인 것을 극복케 하는 기계장치의 힘을 필요로 해서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이러한 실천에 무관심하고 배타적인 것은 정작 영화계라는 점이다. 객석 한복판에 수동으로 작동되는 영사기를 두고 <벽 허물기 Demolition d’un mur>(1896)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한 편의 짧은 필름을 정방향과 역방향으로 차례로 돌려 관객을 놀라게 했던 뤼미에르 형제는 어떤 영화적 실천의 기원적 형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