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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경남의 극장들(행좌, 보래관, 부산좌 등)
부산에는 1900년 이전부터 극장이 존재했다. 1900년대~1910년대에는 행좌, 송정좌, 변천좌, 부산좌, 동양좌(이후 대흑좌[大黑座]), 질자좌, 욱관, 보래관, 초량좌, 행관, 상생관 등 여러 곳에 극장이 난립하기도 했다. 1920년대 이후 활동사진관을 중심으로 극장이 정리, 재편되었다. 해방 전까지 존속하고 있던 극장을 중심으로 부산지역의 극장과 영화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① 행좌(幸座), 행관(幸館), 소화관(昭和館) 행좌(幸座)는 부산 남빈정에 있던 극장이다. 1903년 발행된 「부산항시가 및 부근 지도」에 송정좌(松井座)와 더불어 그 위치가 표기되어 부산 지역의 가장 오랜 극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1904년, 부산에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한 이 극장은 1910년대 들어 활동사진이 큰 인기를 끌면서 활동사진 전용관으로 신축되는데 그 이름을 행관(幸館)이라 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부산의 일본인 실력자 하사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였다. 1915년 12월 개관한 행관은 비슷한 시기 활동사진전용관으로 전환한 보래관이나 상생관에 밀려 고전했다. 하지만 1917년 하야가와연예부가 직영하고 이어 1919년부터 나가사키에 근거지를 둔 만카츠(萬活)에서 직영하면서 부산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만카츠 특파원으로 부산으로 건너왔다가 이후 행관을 운영하게 된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는 행관을 중심으로 일본의 중소프로덕션의 영화를 배급하면서 조선흥행계에 큰 주목받았다. 하지만 행관은 개관 15년 만인 1930년 11월 10일, 영화 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전소된다. 큰 피해를 입은 사쿠라바 후지오는 자본금 10만원의 주식회사 사쿠라바상사를 세우고 지상 3층 규모의 최신 영화관인 소화관(昭和館)을 지어 사업을 확장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쿠라바 후지오, 지배인은 사쿠라바 토시오(櫻庭敏雄)이며 1,0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직후 그 이름을 조선극장으로 바꾸었다. ② 부산좌(釜山座) 1907년 7월 15일 부평정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부산의 대표적 실력자인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를 중심으로 일본인 유지들이 만든 부산연극합명회사에서 설립했다. 개관 당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극장으로, 회전무대를 갖춘 최신의 설비를 갖추었으며 다양한 공연은 물론 활동사진도 상영되었다. 1923년 3월 22일 화재로 소실되어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③ 보래관(寶來館) 1914년 무렵 부산부 행정에 개관한 극장이다. 개관 초기에는 라쿠고(落語)와 같은 연희를 공연하는 요세(寄席)로 활용되었으며 흥행일수도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1월 운영자가 고노(小野)에서 호소미(細見)로 바뀌면서 연중무휴의 흥행을 천명했고, 그해 3월 경성의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텐카츠회사의 필름을 공급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사진관으로 이용되었다. 1916년 12월 27일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었고 오사카에 근거지를 둔 스기모토(杉木)상회가 직영하게 된다. 1924년 무렵에는 오카모토(岡本松造)가 운영자로 이름을 올렸다. 1930년 10월 8일에는 영화상영 도중 필름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37년 상생관과 함께 건물이 화재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신축을 명령받고 1938년 10월 다시 신축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이와사키 다케지(岩崎武二), 지배인은 이와사키 모모타로(岩崎桃二郞)이다. 객석수는 총 952석이었다. 해방 후 국제영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④ 변천좌(辨天座), 상생관(相生舘) 변천좌는 1912년 무렵 부산부 본정에 들어선 요세(寄席)이다. 1914년 무렵 좌주는 교야마(京山花丸)였다. 활동사진의 인기가 비등하면서 변천좌는 활동사진관으로 개축을 꾀한다. 1916년 11월 1일 활동사진관 개업을 하면서 이름을 상생관으로 바꾸었다. 개관 초기 닛카츠영화를 상영하던 상생관은 1922년부터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 쇼치쿠와 공동경영을 시작하며 쇼치쿠 만선(滿鮮) 봉절장이 되었다. 이에 맞춰 당시 관주인 아라이(新井幸吉)는 극장 개축을 추진하여 2개월의 공사 끝에 1925년 11월 15일 새롭게 개관하게 된다. 1933년 11월 무렵 상생관의 관주는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이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 역시 미쯔오 미네지로오(滿生峯次郞), 지배인은 미쯔오 타다오(滿生忠雄)이었다. 좌석수는 총 805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사진] 변천좌에서 이름을 바꾼 상생관 ⑤ 국제관(國際館) 부산부 안본정(岸本町)에 위치했던 영화관이다. 1920년 8월 22일 자본금 20만원, 불입금 13만원의 주식회사 국제관에서 설립했다. 대표는 기노시타 모도지로(木下元次郞)이다. 설립 당시 부산지역의 가장 호화로운 극장이었기에 영화상영 외에도 연극장으로 활용되었으며 부산에서 조선영화가 주로 상영되던 곳이다. 1929년 2월 27일 발생한 화재로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⑥ 유락관(遊樂館) 부산부 좌천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자본금 15만원, 불입금 37,500원 규모로, 부산흥산주식회사가 1921년 12월 11일 세웠다. 대표는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였다. 1932년 1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되지 못했다. ⑦ 태평관(太平館) 부산부 행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으로 1922년 설립되었다. 1923년 부산좌가 소실된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연극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37년 11월 20일 개축되었으나 1943년 11월 19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재건되지 못했다. [사진] 부산 태평관 사진 ⑧ 수좌(壽座) 부산부 목도(牧之島, 지금의 영도)에 있던 극장이다. 1924년 목도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극장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3월 6일 덴도(田頭孝一)를 조합장으로 하는 수좌경영조합이 설립했다. 1926년 행관을 경영하던 사쿠라바 후지오(櫻庭藤夫)가 임대하여 제2행관(第二幸館)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1932년 다시 수좌라는 이름으로 복귀 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토미가(富賀四郞)이며 객석은 총 341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중앙극장(中央劇場), 대생좌(大生座) 부산부 초량정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1929년 오이케 츄스케(大池忠助)와 가나모리 신기치(金森新吉)가 출원하여 1만 4천3백여원의 공사비를 들여 2층 규모로 만들었다. 같은 해 7월 2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다. 중앙극장은 당대 유명 사기꾼인 호리가와(堀川辰吉郎)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1934년 경매에 붙여졌으며 상생관 흥행주 미쯔오(滿生峯次郞)가 낙찰 받아 이름을 대생좌(大生座)로 바꾸었다. 이 사건은 원 중앙극장 소유주 가나모리가 소유권 이전 말소 소송에서 승소하며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대생좌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일본인 극장이던 이곳에서는 1939년 5월 극연좌가 공연한 적이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기시타(杉下末次郞)이며 총 498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⑩ 부산극장(釜山劇場) 부산부 서정(西町) 1정목에 있던 극장이다. 1934년 11월 5일 개관했다. 가부키를 공연할 수 있는 대극장으로 건축되었다. 연극전용극장이었지만 가끔씩 영화도 상영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영화관으로 활용되었다. [사진] 부산부 서정 1정목에 위치했던 부산극장 ⑪ 대화극장(大和劇場) 부산부 수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42년 건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이조(西條貞利), 지배인은 고야마(小山秀一)이며 객석은 총 55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⑫ 환서좌(丸西座), 앵관(櫻館) 1910년대 이전부터 마산에 있던 극장으로 각종 연예물과 활동사진이 상연되었다. 1925년 당시 지배인이던 무라카미(村上竹次郞)가 천여원의 비용을 들여 내부와 외부를 수리했다. 1932년 자본금 2만원, 불입금 2만원의 마산연예주식회사가 영화관 신축을 위해 매수하여 1933년 5월 마산 경정 3정목에 앵관이라는 극장을 짓게 된다. 영업은 오오츠카(大塚寅吉)가 맡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스미타(住田春三)이며 객석 수는 79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⑬ 도좌(都座), 마산좌(馬山座), 마산극장(馬山劇場) 마산부 도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0년대 설립된 극장으로 보인다. 1918년 활동사진상설관으로 개수되었다. 1922년 무렵까지 영화 상영내역이 확인된다. 이후 마산좌(馬山座)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산좌는 1932년 개축하면서 그 이름을 마산극장으로 바꾸었다. 혼다(本田槌五郞)가 건립하였다. 1941년 극장 일부를 수리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⑭ 수좌(壽座), 공락관(共樂館) 수좌는 구마산 지역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1915년 구마산 지역민들이 극장설립을 추진하였으며 1916년 3천원 예산으로 극장을 세우기 위해 주식을 발행하여 조선인 70여명, 일본인 43명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1917년 10월 구마산 지역의 수정에 극장을 설립하고 이름을 수좌라 지었다. 1917년 10월 20일 개관했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함께 사용하던 극장이었다. 하지만 1932년 9월 마산경찰서에서는 장내의 협착, 설비의 부패 등을 이유로 휴관을 명령하고 새로운 극장의 신축 출원을 받았다. 그 결과 마산극장 주인인 혼다(本田槌五郞)가 출원한 극장 설립안이 인가 받아 1935년 구마산 석정 64번지에 공락관이라는 영화관이 만들어진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혼다(本田槌五郞), 지배인은 혼다(本田宗弘)이었다. 4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⑮ 봉래좌(蓬萊座) 통영읍 대정정에 있던 극장이다. 1914년 쓰야마(陶山美賀藏)를 중심으로 주식을 발행하여 설립했다. 1931년에는 하시모토(橋本米吉)가 운영하며 영화관으로 활용했다. 1938년 이후 낙후한 상태로 폐쇄되었던 봉래좌는 1939년 신축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하시모토(橋本公博)이며 50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통영좌(統營座) 통영읍 길야정에 있었던 활동사진 상설관이다. 언제 설립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27년 다케타(竹田應吉)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으며 1936년 주주간의 분규로 문을 닫았다. 1937년 봉래좌의 운영자 하시모토가 운영을 맡으며 정상화 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무라카미(村上善藏)이며 480석 규모의 극장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영좌(榮座) 경남 진주의 매립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14년 6월 24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고야나기(小柳藤介) 등 진주의 유지들이었다. 개관 1년 후 경남지역의 유력자인 하자마(迫間房太郞)의 땅에 타구치(谷口秀楠)가 부산 행좌를 이전하여 극장을 새로 짓게 되자 활동을 멈췄다. 1917년 해체되었다. ⑱ 진주좌(晋州座), 진주극장(晋州劇場), 동보영화극장(晋州東寶映畵劇場) 1922년 진주부 영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좌조합에서 설립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진주의 유일한 흥행장이었다. 1936년 2월 서종숙(徐宗淑)이 인수하여 낙후한 극장을 최신의 영화관으로 개축했다. 1940년 동보영화사의 직영으로 바뀌어 이름도 진주동보영화극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941년 10월 동보측이 손을 떼면서 서종숙 단독으로 극장을 경영하게 된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서종숙(창씨명 平山宗淑)이며 60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⑲ 삼포관(三浦館) 진주부 금정에 있던 극장이다. 진주의 실업가 미우라(三浦仁八)가 1936년 7월 4일 건립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요시(三吉範夫)이며 객석수는 515석이었다. 해방 후 이름을 동명극장(東明劇場)으로 바꾸었다. ⑳ 진해좌(鎭海座), 묘락좌(妙樂座) 진해좌는 진해읍 국천정(菊川町)에 있던 극장으로 1915년 이전에 설립되었다. 1930년 3월 진해 창고에서 영화상영 중 발생한 화재로 소학생 백여명이 소사한 사건이 발생하자 낙후한 시설의 진해좌는 영업 중지 상태가 되었다. 진해좌의 소유주 데즈카(手塚松一)는 극장을 신축하기로 하고 1만원의 경비로 활동사진관을 건설하게 된다. 새롭게 건설된 활동사진관의 이름은 묘락좌(妙樂座)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데즈카이며 42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이후까지 존속했다. 21. 밀양극장(密陽劇場) 밀양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11월 16일 가나모리(金森新吉)가 밀양역 앞에 설립했다. 1929년 밀양 성내에 조일극장(朝日劇場)이 설립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22. 조일극장(朝日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극장이다. 밀양성내동지회에서 세웠으며 1929년 2월 4일 개관했다. 1939년 3월 밀양의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1939년 12월 당시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조일극장 옆에 밀양영화극장을 설립하면서 문을 닫은 듯 보인다. 23. 밀양영화극장(密陽映畫劇場) 밀양 성내에 건축된 영화관이다. 1939년 12월 밀양 조일극장의 흥행주 미즈카미(水上至海)가 세웠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미즈카미(水上至海)이며 2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4. 삼천포극장(三千浦劇場) 삼천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39년 사천군 육군기념일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 1939년 이전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가와(白川晃)이며, 275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5. 구포극장(龜浦劇場) 구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43년 필름손실방지와 사고방지를 위해 전국의 영사기를 조사했을 당시 한 대의 영사기로 영사하여 배급정지처분을 받았다. 당시 흥행주는 하라구치(原口淸見)였다. 293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6. 김해극장(金海劇場) 김해읍 대화정에 있던 극장이다. 1929년 김무일(金武日)과 배봉을(裵鳳乙)이 약 8천원의 공사비로 제작하였다. 건평 51평 2층 규모로 9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케시(武伺吉恒)이며 46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옛 창고를 연상하는 낙후된 시설이었다. 27. 거창좌(居昌座) 거창읍에 있었으며 언제, 누가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전상길(全相吉, 창씨명 酒井相吉)이다. 그는 양조장 등을 거느린 거창지역의 대표적인 실업인이었다. 지배인은 타마야마(玉山榮秀)이며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28. 울산극장(蔚山劇場) 울산읍 성남동에 있던 극장이다. 1920년대 만들어진 낡은 극장이 울산 역전에 있었는데, 당지 유지들인 김재문 외 5인의 발기로 1936년 현대식 건물로 신축이 추진되었다. 군에서는 1만 5천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극장을 공회당의 성격으로 활용하려 했다. 1937년 9월 1일 낙성했으며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시라이(白井叶), 지배인은 니시가와(西川康南)였다. 객석은 70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29. 사천극장(泗川劇塲), 국민좌(國民座) 경상남도 사천읍 내에 있는 극장으로 고바야시(小林齊吉)가 1만원의 예산으로 지었다. 1938년 9월 12일 개관했으며 외관은 2층 양옥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939년 방공영화상영회 등이 열렸다. 1940년대 이름을 국민좌(國民座)로 바꾼 듯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달오(창씨명 金村達五)이며 객석은 300석이었다. * [사진](상단) 부산부 행정에 위치했던 보래관 [자료] 《매일신보》, 1930.03.01. 중앙극장 신축낙성(洛城), 근일 개관할 터 【부산】 작년 오월 일일 고(故) 대지충조(大池忠助)씨와 밀양 금삼신길(金森新吉)씨가 출원한 부산 초량정 중앙극장은 동년 십일월 이십일일 경비 일만 사천삼백삼십사원으로 공사에 착수하여 신축 중이든 바 일전에 준공되었음으로 당국의 검사가 맛치는데로 근간 개관하리라더라. [자료] 《매일신보》, 1937.07.10. 신축 울산극장, 삼십일경 준공 【울산】 신축 중의 울산극장은 삼십일경 준공케 되야 당일 성대한 낙성식이 잇스리라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41.03.23. 방어진(方魚津)극장 전소(全燒) 【부산지사전화】 이십이일 오전 일시경 경남 방어진읍(方魚津邑) 방어진극장으로부터 불이 일어나 목조 극장 한 채를 전소하고 동 이시 반에 진화되었다. 손해는 5만원이고 원인은 전날 밤 객석에서 사용한 화롯불 건사를 잘못하야 화로로부터 이러난 것으로 판명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3.22. 김해에 극장, 불원간(不遠間) 준공(竣工) 경남 김해군에는 아즉 극장설비가 무(無)하야 매양 차종(此種)의 집회가 유(有)한 시(時)는 곤란을 만히 당하야 옴으로 이에 향의(向意)한 당지 청부업자 배봉을(裵鳳乙)군은 읍내 서문통에다 극장 신축을 벌서 수월 전부터 착수하야 공사에 착착 진행하얏슴으로 금후 일주간이면 준공하야 도당국의 검사(檢査)를 경(經)한 후 일반 사용에 제공하겟다하며 건평은 오십일평임으로 이층 합하면 약 구백명의 수용을 행(行)할지며 총공비(總工費)는 팔천원을 요(要)하얏다더라. 【김해】 [자료] 《동아일보》, 1935.08.19. 구(舊)마산에 극장 【마산】 문제 중에 잇든 구마산의 극장 신축의 건에 대하야 오래전부터 부민의 관심을 끌어오든 바 요지음 와서 부내 도정(都町) 팔번지 본전퇴오랑(本田槌五郞)씨에게 극장 신축 인가가 낫다고 한다. 장소는 석정(石町) 육십사번지 전(前) 마산구락부(俱樂部) 폐터라는 바 건평 백이십평에 방화식 대용(防火式 代用) 콩크리트 이층 총공비 지료 합하여 일만 오천원이라 하며 내부는 역시 일본식으로 다다미를 깔고 이층에는 긱연실(喫煙室)까지 설치하리라는데 공사는 오는 이십일에 착수하여 십일월 하순경에 준공하리라고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7.09.07. 울산극장 준공 【울산】 약진하는 울산으로 우금 극장 한 개가 없엇음을 한탄한 당지 유지로 극장조합을 조직하야 금춘 이래 구역전(舊驛前)에다 총공비 이만여원으로 공사에 착수 진행중에 잇던 바 드디어 금번 준공되어 지난 1일 신극장 내에서 관민 다수를 초대하야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는 바 신설된 극장은 내외관 설비가 완전하야 『토-키』 발성기게 등도 대도시 일류 극장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하며 외관에 잇어서도 명랑한 맛이 잇는 모던 건물이라고 한다. (사진은 울산극장) [자료] 《동아일보》, 1937.06.30. 의령(宜寧) 공회당 착공 【의령】 경남 의녕에서는 일정한 공중의 집회장소와 또는 극장 등속이 없음을 일반이 항상 유감으로 생각하고 오든 중 작년 가을부터 임(林) 의녕군수의 주선 하에 유지 이명후, 이태희, 이종덕(李明厚, 李泰羲, 李鍾德) 삼씨의 의연금이 모집되어 공사비 오천원으로 의녕 신시장통에 의령공회당을 건축케 되어 멀지 안흔 시일에 준공이 되리라는데 해 공회당이 준공되면 의녕 발전에 한층 더 이채를 증가하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0.02.05. 밀양성내(城內) 소화(小火) 【밀양】 밀양군 성내 조일극장(密陽郡 城內 朝日劇場) 압 밀양은행 소유 가옥에 잇는 박경모(朴景某)씨의 소실 장씨(張氏)의 부억에서 지난 초이일 오후 열시경에 불이 나서 집 처마위로 타올라가는 것을 그 이웃에서 풍물을 치고 놀든 사십여명이 달려들어 즉시 진화시키엇다는데 그 원인을 듯건대 어린 아이를 시키어 군불을 ᄯᅢ다가 그와 가티 실화된 것이라 한다.
개항장에 들어선 최초의 극장
우리나라에서 처음 극장이 만들어진 시기는 18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에 살던 일본인들이 위안과 집회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극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인부좌(仁富座)라 지었다. 1892년 인부좌에서 이루어진 자선연예회 공연이 당시 인천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 《조선신보》에 게재되었다. 자선연예회와 관련한 이 신문기사는 조선에 설립된 극장에 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랜 기록이다. 인부좌에서 열린 자선연예회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892년 4월 5일 인천과 부산을 오가던 일본상선 이즈모마루(出雲丸)가 전라남도 소안도 인근에서 침몰해 5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부산에서 공연을 마치고 인천으로 들어와 인부좌에서 공연을 준비하던 자그라 소이치(ジヤグラー操一)는 이즈모마루 침몰 사건이 일어나자 사상자 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인천에서 조난자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자선연예회를 개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선연예회를 개최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다. 자그라의 생각에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새로 지어진 인부좌에서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참고로 이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를 주최한 자그라 조이치는 본명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필자 주: 아다치 하치사부로를 ‘安達八三郞’이외에 ‘安達初三郎’로 쓰기도 한다.]이며 “자그라”라는 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저글링으로 유명한 마술사였다. 자선연예회는 1892년 5월 28일 오후 2시 반 시작되었다. 오후 4시 경에는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 안을 메워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3~400명의 관객들이 극장에 입장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인천에 살던 많은 일본인들이 자선연예회에 관객으로 참여했으며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무대에 서기까지 했다. 프로그램 중에는 자그라 조이치의 마술뿐만 아니라 무용, 조루리(淨瑠璃), 수용(手踊) 및 연극 등 다채로운 볼거리들이 흥미를 돋았다. 이 자선연예회가 개최된 인부좌는 인천 일본영사관 뒤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선회 당일 극장 안팎의 모습을 살펴보면, 극장 밖에는 나뭇잎으로 장식한 문을 만들고 그곳에 일본 국기를 비롯하여 자수로 ‘자선회’라 적힌 큰 현판을 걸었으며, 조선신보사로부터 기증받은 ‘자선연회’라고 쓰인 큰 깃발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조이치가 디자인하여 만든 목조 ‘자선회비(慈善會碑)’를 두었고, 좌측에는 인부좌의 극장주로부터 기부받은 목조비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또한 극장 안 한 쪽을 각국의 국기와 신호기들로 장식했으며, 밤이 되면 극장 밖에 산(山) 자 형태로 높게 홍등을 켰다. 이후 인부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건, 인부좌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1890년대부터 조선에서 극장이 만들어져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들 극장은 일본 거류민들 문화의 일종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조선의 관객들에게 전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1895년 정치국(丁致國)이 인천에 만들었다는 조선인 연극장 협률사(協律舍)[필자 주: 1902년 황실에서 설립한 희대(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이다.]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인천협률사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은 고일(高逸)이 쓴 『인천석금(仁川昔今)』(경기문화사, 1955)이다. 고일은 정치국이 인천 용동에 창고 같은 벽돌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극장 협률사라고 기록했다. 최성연(崔聖淵) 역시 『개항과 양관 역정』(경기문화사, 1959)에서 인천의 부호 정치국이 운영하던 협률사를 애관(愛館)의 전신으로 추정하면서 청일전쟁 중 지은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했다고 전했다. 이러한 기록은 인부좌가 들어선 인천에 조선인 연극장도 문을 열고 영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쉽게도 신문이나 잡지처럼 시기를 명확히 밝혀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지 않아 인천 협률사의 존재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위의 기록들은 19세기말 개항장에 조선인 극장이 들어섰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 증거로서 의미가 있다. 청일전쟁 이후 인천에는 인부좌가 사라지고 인천좌라는 다른 이름의 극장이 들어섰다. 인천좌가 들어선 시기는 1897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인천부사(仁川府史)』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 거류민을 위해 화도(花道)[필자 주: 일본식 극장에 존재하던 무대와 연결된 장소로 주로 배우의 등·퇴장에 이용된다. 주요 배우의 연기가 펼쳐지기도 한다. ]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일본영사관 서측인 중정(仲町) 1정목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것이 1897년 산수정(山手町) 2정목으로 이전, 후에 인천좌(仁川座)라 불렸다고 한다. 물론 객석의 숫자 등 기재상 세부적인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은 인부좌가 자리를 옮긴 후 이름을 인천좌로 바꿨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인천부사』에 실린 기록을 더 살피면, 인천좌에서는 만자이(漫才), 고단(講談), 가쿄쿠(歌曲) 등 일본 전통 연희물을 상연했으며 인천가부키좌 건립 후에 충남 대전으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인부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서 극장 설립은 개항장의 일본인 거류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지방의 극장사(劇場史) 연구가 현재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부산, 인천 등 개항장에 언제 어떻게 극장이 만들어졌는지 그 전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몇몇 연구들이 부산, 인천 등 개항장의 일본인 극장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사진2. 인천가부키좌 앞에서 단원들의 모습 (『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러일전쟁 직후인 1905년 인천 빈정(濱町)에 부지 300평, 건평 160평 규모의 2층 건물이 들어서서 이름을 가부키좌(歌舞技座)라 불렀다. 이름처럼 전형적인 가부키 전용극장이었으며 입장정원도 999명이나 되는 대형극장이었다. 이 건물은 재인천일본인상업회의소회두(在仁川日本人商業會議所會頭) 가라이 에이타로(加來榮太郞)가 세웠는데 건축비 1만 4천원, 도구 및 의상비 6천원으로 총 2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15년 당시 인천가부키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신파극이 총 흥행일수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그 밖에 구극 상연, 활동사진 상영, 각종 연예회 등이 열렸다. 사진3. 부산좌의 외관(『부산요람(釜山要覽)』, 부산상업회의소, 1912) 1903년 당시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행좌(幸座)와 송정좌(松井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행좌는 일본인 거류 1세대인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가 1903년 이전에 남빈정(南濱町) 끝자락(지금의 중구 광복동)에 세워 운영한 극장이었다. 하자마 후사타로는 1880년 이오이(五百井)상점 부산지점에 부임한 후 무역과 부동산업으로 큰 부를 쌓고, 거류민단 의원을 역임하는 등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상공인으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행좌의 주요 프로그램은 일본연극, 일본씨름, 마술, 비파, 조루리 등과 활동사진이었다. 1915년 행좌는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재건축되면서 행관(幸館)으로 이름을 바꿨다. 행좌 부근에 있던 송정좌는, 개항 직후 부산으로 건너온 마쓰이 고지로(松井幸次郞)가 세운 극장이다. 1903년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11년경에 폐관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에는 부귀좌(富貴座, 1905~?), 부산좌(釜山座, 1907~1923), 동양좌(東洋座, 1912?~?), 변천좌(辨天座, 1912~1916), 질자좌(蛭子座, 1912~1918), 욱관(旭館, 1912~1916) 등이 세워졌다. 1897년 개항된 목포에는, 1904년 지금의 복만동에 목포좌(木浦座)가 생겨났으나 운영되지는 못했고 1908년 문을 닫았다. 목포좌가 없어진 1908년 상락동에 상반좌(常盤座)가 문을 열었다. 상반좌는 1914년 138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증축되었으며, 1929년 9월 30일 폐관되었다. 1899년 개항된 마산에서는, 마산 최초의 극장 희락좌(喜樂座)가 1906년 늦은 여름 경정(京町)의 고이즈미 시게조(小泉繁藏) 오복점 뒤편에 만들어졌다. 희락좌는 건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07년 2월 1일 실화로 소실되었다. 이 직후인 1907년 늦은 봄, 신마산의 유정(柳町)에 환서좌(丸西座)가 세워졌다. 환서좌는 가부키 극장으로 회전 무대를 갖췄고 5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경영자는 나카무라 초(中村肇)였다. 가부키, 나니와부시를 비롯한 일본 전통 연희물이 상연됐으며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그 외 원산, 군산 등의 개항장에도 1910년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극장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극장이 있었는지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의 극장이 일본의 극장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극장의 구조, 흥행방식, 용어 등이 일본식이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23~33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 사진1(글 상단). 《조선신보》에 실린 인부좌 관련 기사(《朝鮮新報》 1892년 6월 5일자.) [자료] 「자선연예회 - 인천 개항 이래의 구경거리」(《조선신보》 1892년 6월 5일자), 발췌 번역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하는 의연금을 구하기 위해 아다치 하치사부로(安達八三郞=자그라 소이치)가 발기, 오타니 마사나리(大谷正誠) 씨가 위원장, 고리 긴자부로(郡金三郞), 미쿠라 마사히로(三倉正寬), 모토하시 세이지로(本橋淸二郞), 이와다 가에몬(岩田嘉右衛門), 아사오카 도시키치(淺岡利吉), 스이쓰 세이조(水津淸三) 제씨가 위원, 노세 다쓰고로(能勢辰五郞), 니시와키 초타로(西脇長太郞), 사다케 진소(佐竹甚三), 헤이세이 데쓰사부로(平生欽三郞), 무코야마 시게히라(向山茂平), 우에다 호사쿠(上田豊作), 구마모토 에이치로(隈本榮一郞) 제씨가 찬성자가 되고, 기타 여러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다하여 5월 28일 오후 2시 반부터 야마노테(山手)[필자 주: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만국공원이 있는 언덕 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천 송학동으로 불리는 산수정(山手町)과 꼭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지역의 신극장 인부좌에서 ‘이즈모마루 침몰 의연 자선연예회’가 열렸다. 자선회가 열린 것은 인천 개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상류 사회의 사람들이 많이 주선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 자선회는 인천 거류민들과 아주 관계가 깊은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유족을 위로한다는 면에서 개회 수일 전부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당일 방문한 사람들은 무려 800여 명에 달하며, 회장이 꽉 차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4시경 이후로는 회장을 찾아와 허무하게 출입구에서 거절당해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3~4백 명은 될 것이다. 회장 문밖에는 상록수로 커다란 녹문을 만들어 국기를 매달고, 또 털실 세공으로 ‘자선회’라고 적은 큰 액자를 걸었으며, 본사가 기증한 ‘자선연예회’라고 크게 쓴 대형 기도 매달아 세웠다. 입구의 우측에는 자그라 소이치가 디자인한 자선회비(慈善會碑, 목조)를, 좌측에는 극장주가 기부한 길이가 1조(一丈)[필자 주: 약 3m이다.]에 가까운 목조비에 ‘이즈모마루 침몰 조난자 위혼비’라고 크게 적어 세웠다. 장내 한 쪽에는 각국의 국기 혹은 신호기로 찬란하게 장식하여 넋을 빼앗았다. 밤이 되면 회장 밖에 山 자 모양으로 높게 홍등을 켜서 특별한 미관을 더했다. 만사에 주의하여 꼼꼼하게 이리저리 장식하고 배치를 완전하게 한 데는 주선한 유지들 모두의 연일의 노고가 담겨있다. 이 자선회의 특색이라면 2층과 아래층 두 곳에 귀부인 따님들이 음식물 매점을 열어서 자선바자회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연예는 오후 3시경부터 시작했는데, 십 수 가지의 연예가 있었다. 이중에서 가장 관람객들의 갈채를 받았던 것을 들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