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
- 감독
- 김세인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정다은, 박수연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대개 기억들은 전체적인 상황보다는 순간의 감각들로 남겨진다. 가령 유년 시절의 계곡을 떠올릴 때면 언제, 누구와 왜 갔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상황은 떠올릴 수 없다. 다만 물에 빠졌던 순간 느꼈던 알싸한 코끝의 감각과 함께 어디선가 습한 풀냄새가 흘러오는 것이다. 혀에 닿았던 철봉의 비린 쇠 맛, 몸에 들러붙는 젖은 옷의 찜찜함, 불규칙적으로 창문을 두드리는 나뭇가지 소리, 아릿한 손끝... 그렇게 지나간 순간들은 몸 어딘가에 고이게 된다. 감각을 동반하지 않는 기억은 과연 남겨질 수 있을까. 적어도 나에게는 감각되지 않는 기억은 금방 휘발되어버리고 만다.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나에게 남겨진다. 결국 오래도록 나에게 맴도는 영화들은 기승전결에 따른 이야기의 전체 몸뚱이, 그로부터 얻은 교훈 같은 것이 아니다. 결국 남겨지는 건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들이다. 사진: " Lorna's silence ", Les Films du Fleuve 영화 < 로나의 침묵 >(장 피에르 다르덴, 뤼크 다르덴, 2008)을 본 날은 21살의 겨울이었다. 나는 지독한 시네필이었다거나 내 삶을 뒤흔든 영화를 만났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 없이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영화과 학부생이었다. 학기 중 내가 본 영화의 절대적인 수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방학을 맞이하여 전투적으로 매일 3편씩 영화를 보던 시기였다. 그저 방학 동안 최대한 영화를 많이 보는 것만이 목표였기 때문에 마음 한켠에는 항상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때문에 한편의 영화가 끝나면 곱씹을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바로 다음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데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을 본 후에는 쉽사리 다음 영화로 넘어갈 수 없었다. <로나의 침묵>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하다. 클로디의 죽음에 대해 침묵을 강요받던 로나는 파블로의 감시를 피해 숲으로 도망친다. 이윽고 오두막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 안에 숨어 들어간다. 어둡고 싸늘한 오두막에 주워 온 나뭇가지로 불을 피운 로나는 자신의 빈 배를 부여잡고 존재하지 않는 클로디의 아기를 향해 말을 걸며 잠에 든다. 영화가 끝나고 나 또한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을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 마지막 장면은 이상하게 허하고 서글픈 뱃속의 감각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클로디가 도와달라고 외치며 로나에게 매달리는 장면에서 클로디를 휘감았을 고독과 두려움의 통증, 자전거를 사고 힘차게 페달을 밟던 순간 마약으로 인해 마비되었거나 혹은 너무 날카로워졌던 클로디의 몸이 생의 활력으로 일깨워지는 감각. 이렇게 <로나의 침묵>의 장면들은 나에게 컷과 이미지가 아닌 몸 어딘가의 느낌으로 기억된다. 사진: " Lorna's Silence ", Rotten Tomatoes 이러한 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마찬가지로 내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감정과 상황에 맞닿아진 통증, 감각을 구체적으로 묘사할 때 영화가 더 깊게 관객에게 남겨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때문에 시나리오를 쓸 때면 당연히 전반적인 이야기의 흐름도 고심하지만 각 씬이 품고 있는 기운 혹은 인물의 몸에서 벌어지는 것들을 상상하는 데 주의를 더 기울이게 된다. 늦은 밤 어린 소녀가 부모의 싸우는 통화 소리를 엿들을 때 그녀가 딛고 서 있던 타일의 싸늘함, 발바닥을 조용히 적시는 시리도록 차가운 물. 비밀을 품고 마주한 두 여고생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불의 열기. 영원히 진실된 대화를 나누지 못할 것만 같던 모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녹은 아이스크림의 단 맛.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면 때로는 정말 실제로 나에게 벌어졌던 일들인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손끝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객들의 혀에, 피부에, 코끝에 남겨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 컨테이너 >(김세인, 2018), < 불놀이 >(김세인, 2018) 중 <로나의 침묵>이 오랫동안 나에게 남아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로나가 연속적인 변심과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약을 끊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클로디의 청을 외면하던 로나는 점차 클로디를 적극적으로 돕고 이내 몸으로 보듬어 주기까지 한다. 거래 현장에서 갑작스레 아기에 대한 질문을 꺼내놓고 심지어 아기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끝내 부정하며 끊임없이 아기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변심과 충동에 따른 행동들로 인해 로나는 사랑하던 애인과 이별하고 가게도 돈도 모두 잃게 된다. 급기야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진다. 영화의 초반 계산적으로만 행동하던 로나는 실속 없이 모든 것을 잃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대답 없는 빈 배뿐이다. 어쩌다 영화과에 입학하게 된 그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나 또한 줄곧 변심과 충동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다. 냉철하고 실속 있게 살아가고 싶은데 나 같은 유형의 사람에겐 그건 영영 오지 않을 세계다. 나이가 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닥쳐오는 상황들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일 줄 알았다. 나이가 들어도 모르겠는 건 모르겠고, 그중 제일 모르겠는 건 나 자신이다. 언제까지 나 자신에게 당황하며 살아가야 할까. 사랑하던 애인과 돈 계산을 한 뒤 이별하는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이외에 그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로나의 답답한 눈물이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었는데. 그저 빈 배를 움켜쥘 수밖에. 그리고 믿어볼 수밖에. 내 연민과 사랑이 불러온 결과가 결코 빈 배가 아니라고. 이 배는 비어있지 않다고.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둡고 싸늘한 방 안에서 한참 동안 빈 배를 부여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도 로나처럼 믿고 싶어서였다. 연민과 사랑으로 다소 유약하게 굴었던 나에게 남은 건 빈 배가 아니다. 여기 이 배 속에 무언가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중 김세인(영화감독) l 글을 쓰고 영화를 연출한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등 연출 .
정씨( 김진규 )와 노영달( 백일섭 )과 백화( 문숙 ). 하얀 눈 위에서 만난 세 사람은 서로 아웅다웅 하면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 삼포 가는 길 >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겐 인물들에 관한 영화였다. 소설 속 글로 표현된 내용들이 인물들의 구어체 대사로 표현되면서 생동감있는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때문에 더욱 리얼하게 느껴졌고, 시대의 아픔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상처가 가슴 깊게 각인된 영화였다. 특히 백화라는 인물은 보기 드물게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작부의 포스를 느끼게 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들에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화는 갓 스무살이지만 거친 풍파 속에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화류계 여자의 강한 풍모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혹 남자의 완력이 가해질라치면 익살스런 애교로 남자의 너털 웃음을 끌어내는 능숙함은 팜므파탈을 흉내내는 여느 캐릭터가 보여줄 수 없는 담백함을 표현한다. 백화를 연기한 문숙 의 연기 또한 두말할 필요없이 발군이라 할만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이만희 감독과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 그렇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독과 연기자가 서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작품에 얼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녀가 내뱉는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요?''''''''''''''''라는 말에는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이 묻어나며, 개인의 힘으로 어쩔 도리없는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무소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정씨의 표정 역시 선함과 동시에 묵직함과 단호함을 품은 얼굴이다. 상대의 말투와 표정 만으로 살아온 과정을 짚어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백화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장면에서는 백화 스스로도 그를 아버지라 여길 정도이며, 실제 아버지라고 느낄만한 풍모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거칠게 살아온 뜨내기 노동자이지만 남의 장례식장에서 태연하게 울어제낄 만큼 넉살좋은 뻔뻔함과 과거에 잘나갔다고 허풍을 떠는 영달 역시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와 간여림을 갖고 있다. 백화와의 하룻밤 후 살림을 차리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 백화를 떠나보내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나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인한 노동자이지만 남자로서는 용기없는 모습은 그를 다중적 캐릭터로 만든다. 이렇게 뜨내기 세 인물이 커다란 사건없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영화에선 이렇게 존재 자체에서 절실함이 묻어있는 캐릭터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매우 아쉽다. 물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원작의 힘에 빚진 부분이 있겠지만, < 삼포 가는 길 >은 문학적 인물을 영화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연기 이외에도 < 삼포 가는 길 >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광활한 눈밭을 걸어가는 세 인물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잡아낸 장면에서는 갈 곳 없는 뜨내기 군상들의 고립감이 드러난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이 머물 곳은 그 넓은 벌판에 아무 곳도 없다. 백화와 헤어졌다가 흉가에서 다시 만난 세 인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는 장면에서는 훈훈함과 온화함. 갈등과 화해 속에 드러나는 상처와 고독이 보여진다. 백화와 영달이 싸울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쥐불놀이 불빛의 은은함은 절대 꺼질 것 같지 않은 민초들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한적한 산골이지만 마을 곳곳은 이미 공사중인 장소가 많다. 1970년대 불어닥치기 시작한 개발의 광풍이 영화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영달이 바위산을 뚫는 공사현장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장면이다. 1970년대 경제개발의 가운데는 이런 뜨내기들의 강인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위산 위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실루엣은 잠깐이지만 노동의 숭고함과 노동자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달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플레쉬 백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상대가 듣는 내용과 반대되는 영달의 회상이 겹쳐지면서 영달의 상황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또한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도 세련되고 현란한데, 음악으로 감정을 이어가다가도 문득 사운드를 무음으로 처리하면서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울림을 크게 만든다. 사운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물의 상황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손쉽게 드러내는 방법도 당시로는 흔치 않은 기법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의 후반작업 중에 간경변으로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병원에서도 편집실을 오가면서 영화의 완성을 위해 애썼다고 한다. 영화는 그가 명을 달리하고 한달 후에 극장에서 개봉했다. 때문에 다소 미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이 있다. 백화는 살림을 차리길 바라고, 영달은 빈털터리인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기차역 장면은 정지화면처럼 촬영됐다. 기다리는 백화의 얼굴. 기차표를 전해주는 정씨와 영달의 손. 멈춘 정씨의 얼굴. 울먹이는 노영달. 하지만 영화 속 장면은 멈추지 않고 어색한 테이크로 잡혀있다. 결정적 장면들이 정지화면으로 잡혔다면 영화의 울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최근 복원된 엔딩 버전에서 정씨가 탄 버스가 남해대교를 건넌다. 백화가 기차역에서 다방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만희 감독의 디렉터스 컷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세 명의 주연배우들이 펼치는 연기의 향연에 있다. 삶의 흔적을 느끼게 만드는 구어체의 대사와 인물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생성시킨다. 눈밭을 걷거나 누워있는 세 인물을 잡은 롱 샷들은 설원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 인물을 단단히 묶어주는 기능을 한다. 넓은 벌판에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작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허허롭게 담아낸다. 눈길 여행을 통해 뭉쳤던 세 인물은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의 여행은 강한 삶의 의지를 간직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것이었다.
김영빈 의 < 나에게 오라 > 하면 떠오르는 것은, 최민수 가 연기하는 정석이라는 전라도 시골 지역의 전설적인 깡패가 도박판에서 상대 패거리들의 습격을 받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영화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그 장면은 <테러리스트>로 충무로 액션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김영빈 감독의 토착적인 데 뿌리를 둔 액션 아이디어가 박력있게 만개하는 장면이었다. 요컨대, 나는 그렇게 좁은 한국식 가옥 방안 공간에서 거두절미하고 몇 개의 커트로 붙여버린 사내들의 싸움을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한 순간의 방심때문에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 치명적 내상을 초래하는, 겉모습만 으스대는 사내의 허망한 최후를 목격하게 해 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 나에게 오라 >가 액션영화인 것도, 최민수 가 연기한 정석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도 아니다. 최민수는 특별 출연에 가까웠다. 그가 연기하는 정석은 박상민 이 연기하는 주인공 춘근이 흠모하는 인물이다. 춘근은 일자무식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못 했고 깡패로 한 번 먹고 살겠다고 작정한 놈이다. 서울에 올라갔다가 별 볼일 없이 귀향한 이 무지랭이 청년은 변변히 잘 거처도 없이 시골 역전 근처를 떠돈다. 시장 근처에서 대충 노숙하며 일어난 그가 1970년대 당시 시골 아침에 울려 퍼지던 새마을 노래에 맞춰 ‘새벽 X 이 꼴렸네. 너도 나도 일어나 XXX를 칩시다”란 육두문자로 개사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늘 하루 무슨 일을 저지를까 궁리중일 때 이 영화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초 코드로 청춘을 통과하는 이들의 마음 속 바닥을 보여줄 것임을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춘근과 달리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윤호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몰래 고향에 내려온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는 청춘기의 심장을 자학으로 채우려 한다. 그는 춘근의 졸개를 자처하며 마초 어른 흉내를 내는 춘근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이 어리석은 두 꼬마 마초들을 감싸는 것은 그들만큼 어리석고 무지막지한 시대의 기운이다. 영화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끼어든다.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고향후배들 앞에서 출정 선언 비슷한 걸 하는 춘근의 어느 선배는 서울에 갔다가 별 볼 일 없이 돌아온 후 시골 아낙네들에게 미국 포르노를 영사기로 틀어주며 그래도 예술은 살아있다고 자기기만의 환상을 놓지 않는다. 정석의 에피소드는 더 통렬하다. 춘근과 윤호의 우상인 정석은 그래봤자 삼류 깡패 주제에 주색을 즐기면서 난을 치는 풍류객 놀이에 빠져 있다. 그러나 시골 마을에까지 스며든 정치권력의 세력판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신흥세력에게 린치당하고 꼬마 건달들의 우상 자리에서도 퇴각당한다. 마초들의 퇴행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동들의 극단이 유신 시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공기와 적절하게 부응하는 것은 김영빈 감독 또래 세대의 경험적인 성찰이 배어있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의 지독한 남성중심적 환상이 관철되는 여성의 대상화는 송기원의 원작 소설에도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의 정서를 편벽되게 만드는 결정적 흠집으로 남는다. 남성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어머니이자 창부인 이상향으로서의 여성상을 이 영화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그리워하며 스크린에 현실인 것처럼 구현시킨다. 여자의 자궁 속에서 끝장을 보려는 듯 달려들었다가 결국 그녀들을 파멸시키며 비겁하게 도망치는 남자들을 향해 영화 속의 여성들은 끝내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남성적 환상에로의 퇴행이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 해도 불우한 당대의 시대적 공기를 남성 캐릭터들의 면면과 시골 공간에 배어나게 한 김영빈의 연출력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경력이 짧게 끝난 것을 아쉽게 여기게 한다. 영화 클라이맥스에 펼쳐지는 시골 들판에서의 불놀이 장면은 무엇을, 누구를 겨냥하고 싸워야 할지 조차도 몰랐던 무지한 남성마초들의 모험담의 종착지로 부족할 게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지한 아이들은 불나방처럼 날개짓하다가 헛되게 자기 자신들을 망친다. 어떤 삶이 그들에게 바람직한 형태로 남아있었을까. 그들은 답을 몰랐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같은 관객은 그랬다.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 것은 사필귀정일 수도 있으나 이 영화가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