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
- 감독
- 안승혁
- 제작년도
- 2015
- 출연
- 한지원, 이동용, 이성욱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신상옥 의 < 꿈 >(1955)을 동시대 세계영화의 자장 안에서 본다면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빈번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그리 많지 않은 대화 장면이 없다면 거의 무성영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신상옥 자신이 리메이크한 1967년 판 색채 영화 < 꿈 >과 비교해 봐도 서사는 단출한 상태를 넘어 앙상하고 사건을 추동하는 인물의 내적 동력은 거의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각본이 훨씬 정교하고 인물의 관계도도 풍부한 색채판 <꿈>에 비해 이 무성영화 비슷한 흑백영화 오리지널이 더 재미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광수의 소설에 기초한 소재지만 이 영화는 서사의 기본 얼개를 여러 이유로 자세하게 축조하는 걸 포기한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에서 시작했을 영화산업의 물적 토대가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도제식 조감독을 했다고 하나 데뷔작 < 악야 > 이후 세 번째로 장편영화를 연출한 신상옥의 얕은 연출 경험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 비슷한 책 「난, 영화였다」에서 신상옥은 “영화는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꿈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내 의식의 내부에는 탐미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쓰면서 이 영화가 문학의 영화화를 통해 나름의 영상미를 탐구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탐미적인 영상미’의 수준에 오리지널 판 <꿈>이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지만, 기술적 열악함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낭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기묘한 정기가 서려 있어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초기 신상옥 영화의 파트너였던 배우 황남 (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 꿈 >에서 주연을 맡았던 안성기 와 외모가 비슷한)이 연기하는 승려 조신이 지체 높은 태수의 딸 달례( 최은희 )를 보고 한눈에 반해 파계하는 초반 설정에서 영화는 훌쩍 서사적으로 비약해 그 두 사람이 절에서 멀리 도피해 달아나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쫓는 쪽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 쫓기는 그 두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하다. 화면은 이들의 반쪽짜리 추격전을 10여 분 가량 담아내는데 쫓는 자들과의 대비가 화면에 구현되지 않는데도 장중하고 긴박한 음악이 깔리며 그들은 스스로 위기감을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아난다. 조신(안성기와 외모가 비슷한...황남) 여기서 시간에 대한 공간의 절대적 우세가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조신과 달례의 욕망의 장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조형공간이 그 자체로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안티 서사에 가까운 틀을 세우는 결과가 만들어짐으로써 영화를 현대적 기운으로 채우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앞서 말한 무성 영화적 외양의 활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서사를 미니멀하게 축조하는 대신 극적 사건의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를 지속적으로 전경화함으로써 주인공들의 탈주 욕망을 품는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조신의 경쟁자인 평목 스님이 등장해 조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급작스럽게 처리하는 중반부의 성급한 극적 리듬이나 달례의 정혼자인 모레아손 화랑 일행이 후반부에 등장해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일 때에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인위적으로 극적 구성을 꾸미는 걸 감추지 못하는 허술한 완성도를 보완할 만큼, 이 영화만의 특이한 기운이다. 모든 욕망의 대상 달례(최은희)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은 달례를 연기한 배우 최은희의 존재감이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조신을 연모하는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기꺼이 그를 따라 신분을 버린 사랑의 도주를 감행하며 조신의 곁에서 평범한 아내로 그를 보필하면서 아름다운 존재 그 상태로 남아 있다. 조신과의 도주 중간에 조신이 너구리굴에 불을 내어 너구리들을 쫓아내고 그 굴에서 쉬려 할 때 달례는 굴에서 도망쳐 나온 새끼 너구리들을 보며 “아유, 가엾어라.”라고 탄식한다. 달례에게 흑심을 품은 평목을 조신이 죽인 것을 알았을 때도 달례는 그런 조신을 책망한다. 결정적으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조신이 느닷없이 난폭하게 굴 때조차도 그런 조신을 품어준다. 요컨대 달례는 범접할 수 없고 웅장하며 심술궂은 자연이 아니라 언제나 어머니처럼 생육 번성이 가능한 자연과 비슷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욕망을 받는 대상이다. 달례는 모레아손의 부서진 욕망의 대상이며 평목의 욕망을 받았고 심지어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다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불한당의 습격을 받는다. 조신은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달례로부터 욕망의 화답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을 쫓아온 모레아손에게 죽임을 당한다. 모레아손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과 삶이 인접한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조신의 욕망과 좌절은 당시 신상옥이 처해 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게 한다. 신상옥은 선배 영화인 김학성 촬영감독의 부인인 최은희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신상옥이 최은희를 주연시켜 만든 두 번째 영화 < 코리아 >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후반 작업을 거부해 곤란을 겪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꿈>에는 욕망에 따른 과보를 치른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투사된 흔적으로서의 달뜬, 동시에 매혹적인 기운이 서투르지만 맹렬한 영화적 활기로 팽배해 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신상옥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서슴없이 영화적 자양분으로 삼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최은희는 신상옥이 연출한 그 화면 속에서 남자들의 그 비루하고 염치없는 욕망을 당당하게 취사 선택해 스스로 자족하며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꿈>(신상옥, 1955) 영화보러가기 →
안산에서 일하는 4인의 이주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불법 체류자이다. 한국에 온 지 15년, 귀화해 법적인 한국인이 된 토너씨, 본명은 오사마 빈 $^#$^% 이지만 $^#$^%부분을 사람들이 못 알아들어 그냥 ‘오사마 빈 라덴’으로 퉁치는 오사마, 눈앞에서 친구가 단속원에게 잡혀간 걸 본 후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콴쓰, 그리고 버마의 혁명 전사였으나 한국에선 외국인 노동자일 뿐인 정치범 모모. 이들은 월드컵의 열기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친해진 성호의 호출로 서울에 가게 된다. 2001년 말에 입대해 2004년 1월까지 군 생활을 했던 필자는 2002 한일 월드컵을 군에서 맞았다. 그래서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물론 4강둥이들이 무지하게 생겼다는 건 안다.) 평소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축구 경기 시간마다 근무를 바꿔주곤 했던 나는 그때 근무가 참 편했었다는 기억이 난다. 모두가 축구를 보고 있어서, 뭘 하든 관심이 없었다. 음악을 듣고, 담배도 피우고.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있어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하나 된 마음’이었다. 축구를 보거나 듣고 있지 않아도 한국이 골을 넣은 것은 아주 쉽게, 아니 알기 싫어도 알 수 있었다. 사단 전체가 함성 소리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산꼭대기에 서서 그 소리를 혼자 듣고 있으려니, 문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양반들, 평소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양반들인데... 서울에 올라온 4명의 이주노동자들은 월드컵 열기가 한창인 호프집에서 (비유가 아닌 진짜) 좀비들을 맞닥뜨린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한국 팀을 응원하던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한국 팀이 한골 먹은 상황에서 제 딴엔 응원한다고 ‘대~한~민!국!’을 외친 오사마에게 집단 쫑코를 주던 평범하디 평범한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모두 좀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난감 총과 은단으로 좀비를 퇴치하며 도망가는 그들은 인기척 없는 광화문에 이르러 더 이상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는다. < 불한당들 >은 월드컵, 좀비, 이주노동자라는 소재를 잘 엮어 유쾌하게 전체주의를 조롱한다. 영화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낄낄거리며 다시 보았다. 대단히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사회를 유쾌하게 풍자한 부분들이 여전히 유효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원래 템포보다 느리게 재생되어 괴기스러운 소리가 된 군가에 발맞추어 산으로 향하는 좀비들. 섬뜩하다. 2007년 제작된 영화인데, 어째 영화를 보고나니 웃음기를 거두게 된다. ‘군가’에 발맞추어 ‘산’으로 가는 ‘좀비’들... 아. 우리는 언제나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하게 될까. 구분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 꾸준히 노력하는 한은 쉽지 않으려나. 장훈 감독의 < 불한당들 >은 감독 본인의 장르적 취향과 당시의 한국 사회에 대해 느꼈던 점들을 결합해 만든 소동극이다. 30분 동안 키득대다 보면 어째 개운하지만은 않은 뒷맛을 남긴다. 20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야기의 생명력이 살아있을 만큼, 단편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멋지게 해낸 작품이다. 물론 영화를 잘 만든 건지 세상이 이상해진 건지 확실하지는 않다는 것이 쓰면서도 찝찝한 부분이긴 한데, 하여간 현재의 이야기로도 손색이 전혀 없으니 일단은 잘 만든 것으로 정리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