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 감독
- 홍용호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김민주, 박종현
© 나비클럽 마스터플롯, 공통언어로서의 서사 『마스터플롯』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H. 포터 애벗(H. Porter Abbott)의 『서사학 강의(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Narrative)』(2002)에서 정식화한 마스터플롯(masterplot) 개념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플롯이란 사건의 배열과 연쇄를 결정하는 구성적 논리를 의미하지만, ‘플롯’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이 개념을 서사 구성의 내적 논리 정도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마스터플롯은 작품과 병행하고 교차하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큰 틀의 이야기 골격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때의 골격이 그저 작품 내적인 서사의 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서사학을 주된 이론적 도구로 삼아 소설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주로 해왔던 나에게 마스터플롯은 그 자체로 과잉 개념처럼 보였다. 일개 연구자의 주관적 접근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실제 독자를 반영하는 수용자 이론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득한 기분이 들었는데, 하물며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방식의 접근법이라니(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플롯에 대하여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은, 이 개념이 가진 넓은 적용력과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매력이 실제 집필로 이어진 데에는 뜻밖의 지면이 계기가 되었다. 전작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를 함께 만들었던 나비클럽에서 펴내는 《 계간 미스터리 》에 2025년 한 해 동안 마스터플롯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학술 논문의 틀 안에서 몇 차례 다뤄온 개념이었지만, 계간지의 지면은 전혀 다른 요구를 해왔다. 각주와 선행 연구 뒤에 숨을 수 없는 자리, 개념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첫 문장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자리였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쓰는 일 못지않게, 유연한 흐름 속에서 마스터플롯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고 또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그 연재 글들과 기존의 연구들을 한 권의 흐름으로 다시 엮고 고쳐 쓴 결과물이다. 연재 당시의 원고는 2장‧3장‧5장‧7장에 배치되어 있으나, 추가적으로 전체적인 톤의 일관성과 구성의 명확성을 위해서 많은 내용을 고치거나 다시 썼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 텍스트는 대부분 10년 이내의 작품들이면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매체에서 대중적인 선호가 높았던 작품들이다. 물론 이러한 선별은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실천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대중의 수용과 시장의 흥행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를 굳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흔히 ‘걸작’이나 ‘명작’이라 불리는 정전화된 작품에 대한 접근과는 차별화되면서도, 대중적 작품에 대하여 으레 따라붙는 평가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태도이자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끌려간다면 대중성 기반의 작품을 살펴보기 어렵고, 반대로 흥행 수치만으로는 대중성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보정이 필요하다. 마스터플롯을 포괄적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마스터플롯의 사례 역시 무수히 많아진다. 따라서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장르성’+‘로컬리티’에 기반한 마스터플롯으로 추려냄으로써, 흥행이라는 일차원적인 접근을 벗어나 개념화에 적합한 작품들을 추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소토자키 하루오, 2020) © Netflix / ufotable, 워터홀콤퍼니㈜, ㈜NEW, 에스엠지홀딩스㈜ 피할 수 없는 조건 중에 하나는 소위 ‘천만 관객’ 영화들이다. 우리는 대중적 성공의 높은 지표처럼 여겨지는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하여, 그 영화적 완성도를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화들의 특정한 감정적 과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여러 연구가 강조하듯이, 특정한 서사적 패턴이 구성해 내는 감정주의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수용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적 사회와 로컬리티를 벗어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한국에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흥행의 숫자로 번역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나의 이론적인 틀은 로컬리티를 포괄하는 사회적 구조가 좀 더 패턴화된 감정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구조가 그러한 사회적 구조와 병행하는 일련의 서사적 구조에서도 동형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마스터플롯은 서사적 구조와 감정적 구조의 교차적 양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회적 구조를 일정 부분 암시한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은 작품 내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 내외를 오가는 상호적 개념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마스터플롯과 비슷한 자리를 겨냥하는 다른 개념들도 있었다. 워치(James Wertsch)의 도식적 서사 템플릿(schematic narrative template)을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도식’이라는 말이 지워버리는 역동성이 아쉬워 플롯을 택했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사회극(social drama) 이론에서는 사회극과 무대극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구성하며 순환한다는 발상을, 웨인 부스의 규범(norm) 개념에서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서사 참여자들이 도덕적 감수성을 주고받는 호혜적 매개라는 발상을 빌려 왔다. 이 책의 마스터플롯에 대한 논의 역시 이야기의 주제와 규범으로 대변되는 공통언어로서의 서사라는 위상을, 문학 이상의 다매체적 현실에서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스터플롯을 우리 시대의 공통언어로 발견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스터플롯은 단순한 창작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다매체 환경에 노출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형성되는 허구적-대화적 플랫폼이 된다. 이때 마지막으로 조정해야 했던 것이 허구성 개념이다. 장르로서의 픽션(fiction)과 수사적 양태로서의 허구성(fictionality)을 분리하면, 허구성은 허구 서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픽션에도 존재한다. 이 책이 경계하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믿는 이들에게 음모론은 명백한 논픽션이므로, 그것은 허구성을 가진 논픽션이다. 이러한 허구 개념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스터플롯은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다양한 서사 구성을 연결하는 중간적 위상을 획득한다. 이것은 마스터플롯 개념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동체적 상상력을 수렴하는 공통언어의 문법에 다가가는 일이다. 수치의 강가에서 존엄을 수습하기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 마스터플롯 』 을 출간하고 나서, 2장에서 다루었던 명예와 존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많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이러한 마스터플롯에 명백하고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책에서 다루지 못했으나 정확하게 이 마스터플롯에 해당하는 장항준 감독의 < 왕과 사는 남자 >(2025)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했다. 국내 상영 영화 중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1457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임금 이홍위( 박지훈 )와 그를 맞이하는 촌장 엄흥도( 유해진 )의 이야기. 이 영화를 두고 어김없이 감정적 과잉과 신파의 혐의가 거론되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흥행의 수치는 완성도의 지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용의 지표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세련되었는가가 아니라, 1457년의 이야기가 2026년의 관객들과 어떤 공통언어로 접속했는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공통언어의 문법은 명예와 존엄과 수치심의 논리로 풀이된다. 이 영화의 권력은 수치심의 기술자다. 수양대군의 권력은 조카를 죽이는 대신 강등한다. 왕을 상왕으로, 상왕을 노산군으로, 군을 서인의 처지로 끌어내리는 이 단계적 격하는 물리적 제거보다 정교한 통치술인데,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회수하는 것이야말로 찬탈한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명회( 유지태 )는 이러한 통치술의 집행자다. 요컨대 이 영화의 악은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수치를 배분하는 권력이며, 이것은 오늘의 관객을 공통의 언어로 묶는 문법이다. 계유정난의 정치와 우리 시대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 정치는 유사한 골격을 공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치의 정치에 맞서는 마을의 논리가 처음에는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엄흥도는 의인이 아니라 계산가로 등장한다. 이웃 마을이 유배 온 양반 덕에 번성한 것을 보고, 더 높은 신분의 유배자를 유치해 마을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유배지 유치 경쟁이라니, 이것은 명예가 곧 경제인 세계, 명예 경제의 노골적인 희극이다. 폐위된 왕은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거지 취급을 받는다. 명예의 후광이 사라진 존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이 도입부가 있기에, 이후의 전개가 힘을 얻는다. 소년이 마을의 존경을 얻는 것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 앞에서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고, 그가 마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진상품 덕분이 아니라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회수한 존엄을, 공동체가 국가 바깥의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것. 조정의 문서에서 그는 노산군이지만 광천골의 마당에서 그는 다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예와 존엄의 관계에 대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결말부에 있다. 탈출 시도가 한명회의 함정으로 무너졌을 때, 소년은 엄흥도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거짓 연기를 펼쳐 그를 살리고 홀로 붙잡힌다. 명예의 문법으로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당한 자로, 상대를 배신자로 만듦으로써 상대의 목숨을 구한다. 명예를 버리는 방식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그리고 저 유명한 마지막 장면. 소년은 활줄에 목을 맡기고, 문밖에서 그 줄을 당기는 것은 엄흥도다. 사약도 자객도 아닌 이 기이한 연출은 자살과 타살을 겹쳐놓음으로써 역사 기록의 모호함을 끌어안는 동시에, 이 영화 전체의 논리를 완성한다. 자신의 명예를 박탈한 수양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는 것, 자기 죽음의 형식만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은 존엄의 마지막 주권이다. 그리고 그 주권의 집행을 소년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을 거지 취급했다가 벗이 된 사내에게 맡긴다. 왕과 ‘사는’ 남자였던 엄흥도는 왕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는 남자가 됨으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 품은 동거의 의미를 끝까지 밀고 간다. 『 마스터플롯 』 2장에서 나는 미국의 자경단 서사가 개척민 신화 속에서 ‘애국자라는 명예’를 보상으로 받아온 것과 달리, 한국에는 서사적 보상으로서의 명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고 적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는 자리를 대신 감당한 이들은 보상은커녕 명예 회복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라고. 엄흥도는 정확히 그 계보에 위치한다. 역사의 엄흥도는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하던 때에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라는 말과 함께 왕의 주검을 수습하고 사라졌으며,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형 마스터플롯에서 명예는 언제나 후불이며, 그 지불을 보증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역사가 언젠가 갚아줄 것이라는 서사적 후불제. 이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그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보상 없이 존엄을 수습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보상 없는 감당에 익숙한 공동체가 반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논점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 두자. 관객은 단종과 엄흥도가 역사임을 알고, 그들의 우정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알면서도 운다. 같은 ‘역사의 빈칸 채우기’라도 음모론과 사극을 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 신호의 유무다. 음모론이 허구를 논픽션으로 위장해 공동체를 닫힌 확신으로 몰아넣는다면, 이 영화의 허구성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존엄의 가능성을 공동체의 상상 속에 열어 놓는다. 마스터플롯이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중간적 위상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1457년의 강가에서 수습된 것은 한 소년의 주검이지만, 2026년의 극장에서 수습되고 있는 것은 수치의 시대를 건너는 공동체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다. 그 수습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언어이고, 그것을 읽고 다시 쓰는 일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작업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박인성(문학평론가) |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 영화, 드라마, 웹소설, 만화, 게임, 인터넷 밈까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서사를 읽어내는 비평을 쓴다. 저서로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 『마스터플롯』(2026)이 있고, 피터 브룩스의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2017)를 번역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호프 >(나홍진, 2026)는 우리가 알던 비평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비평 글 각각의 탁월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작동 방식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을 특정한 장에 끌어당기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제도적 패배다. <호프>는 제2의 < 디 워 >(심형래, 2007)가 아니었다. 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 사이에선 <디 워> 정도의 화제가 된 것만 같았고, <호프>를 두고 수많은 말이 오고 갔음을 누구나 느꼈다. 하지만 <호프> 주위엔 논객이라 할 만한 매개가 없었다. 2007년의 <디 워> 사태는 진중권 평론가를 비롯한 일련의 기성 평론가 진영과 포털 사이트에 모인 대중의 갈등 양상으로 번졌었다. 양극단에 다중 다수의 논객이 생겼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할리우드를 향한 사대주의 등 여러 사회적 담론이 부풀었다. <호프>엔 말만 있고 뼈가 없었다. 상술한 논객, 달리 말해 중심 지대가 된 논지가 부재했다. 이것은 <호프> 스스로가 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수의 공식 석상에서 밝혔듯 나홍진 감독은 앞만 보고 즐기는 영화를 택했다. 장재현 감독이 < 파묘 >(2024) 개봉쯤 밝혔던 태도와도 비슷하다. 극장 엔터테이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대중영화 감독들은 다 같이 ‘보기만 해도 재밌는’ 영화를 꿈꿨다. <호프>도 그렇듯 보인다. 1980년대를 가리키는 다소간의 이미지가 영화에 내포되었기는 하나 이것은 기호가 되지 않는 기표에 가까웠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 이후 《씨네21》 김소미 기자가 설명한 것처럼, [1] <호프>는 작중 ‘서브 텍스트’를 최대한 장난스럽게 소거해 가는 영화였다. <호프> 개봉 이후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이든 반대하는 이들이든, 1980년대라는 맥거핀에 관해선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하지 않았다”기보단 그러질 “못했다.” 다시, <디 워>의 사례처럼 어떠한 담론의 실재라도 만들었냐의 차원에서 비평은 <호프>를 이기지 못했다. 전술했듯이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매체와 창구, 플랫폼이 <호프>로 휩싸이긴 했다. 말 그대로 휩싸였다. 그저 분위기에 휩싸인 듯 보였다. 매체부터. 《씨네21》은 <호프>의 작가, 장르, 서사 등에 관해 비평했다. 이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얄 사다트 평론가,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의 글을 실었다. 글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며, <호프>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호프>에 대해 생산됐던 말들이 순환적으로 돌고 도는 허무의 궤에 빠졌단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좋은 비평일지라도 대중들의 거친 찬동이나 거센 반발을 그러모으진 못했다. 비평이 꼭 대중과 영합해야만 한다는 고루함의 태도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호프>에 대해서는, 한여름의 텐트폴 영화에 있어서는 제 몫을 했어야 만족스러웠을 듯하다. 대신 <호프>를 두고는 비평적 담론에 대한 논의보단 평론가 개인의 인격과 이력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잇따르기까지 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동진 평론가의 말조차 그랬다. [2] <디 워> 마지막의 ‘아리랑’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개별 비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큰 사태다. 질량 없는 부피, 맥락 없는 요소, 총체 없는 부분. 얄 사다트 평론가는 “미국에서 흔히 쓰는 ‘larger than life’라는 표현은, 어쩌면 위대한 블록버스터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3] 라며 <호프>를 상찬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한국에서 <호프>를 두고 발생한 일련의 현상에 빗대어진다. 니콜라스 레이가 <실물보다 큰> 그림자를 보여줬듯이 <호프>에 대한 비평은 그것의 실재보다 큰 음영으로만 존재했다. <호프>에 대한 말은 흐릿했고, <호프>에 대한 말들에 반응하는 말들이 더 뚜렷했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해야 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듀나 평론가의 말처럼 “<호프>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영화가 아무 생각을 안 할 때” [4] 이기 때문이다. <호프>는 그 내부의 원리에 천착할수록 힘을 잃는 덩어리다. 이 작품이 어느 IPTV를 통해 수입된 이름 모를 감독의 영화였다면 많아야 수백 명 정도가 기억하는 B급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프>는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에 있는 700억 원(추정)짜리 대작이다. ‘컬트’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수백억 원을 들여 수백만 명이 봤으며 북미와 유럽에 배급된 컬트영화란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모순. <호프>는 작아야 하지만, 너무 커졌다. 역도 성립한다. 더 커야 하지만, 너무 작아져 버렸다. 모순은 더해진다. <호프>는 칸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국내 평자들에게 모종의 비평적 요구를 선보인 ‘작가주의적’ 작품으로 소비됐다.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하나의 토큰처럼 사용한 유럽 영화계의 전략이었을까. 여하간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나홍진은 봉준호 , 박찬욱 이후 한국영화를 견인할 것만 같은 인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 <호프>를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매체와 평단의 방기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말해도 문제, 말하지 않아도 문제. 하지만 마땅한 방법론 따위 없는 듯한 절벽. 필자는 이에 관해서 ‘한국식 작가주의의 패배’라는 요지의 단상을 남겼다. [5] 영화보다 큰 곳이 아니라 감독의 세계관에 들어가 비평하던, 즉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의 영화를 작가 개인의 것으로 탐색하던 2000~2020년대의 작가주의 비평으론 <호프>에 대적할 수 없단 것이다. <호프>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패배의 운명, 허무의 감각을 타고났다.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호프>의 내적 가치는 딱히 없다. 이 가치 없음의 가치에 관해 구구절절한 글을 쓴 적도 있다. [6] <호프>에 부여된 비평의 질료란 영화 바깥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그 어떤 틀로도 규정되지 않는 아웃라이어이기에, 장르적으로도 영화사적으로도 작가주의적으로도 큰 가치가 없는 부수이기에, 한국영화가 꾸준히 배태해 온 다성적 모방의 성취에 극도로 기대고 있기에, 대신 내부적으로는 자체적 맥락을 일절 가미하지 않았기에 유의미” [7] 하다. 간단히 말해 <호프>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영화 매체의 테두리를 오고 가는 원심력의 원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작품과 작가를 탐하기보단, 비평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제도의 지형도를 더 면밀히 살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 제도와 비평적 틀은 ‘바깥’을 이야기하는 힘을 잃어왔다. 구심력을 택해왔다. 임재철 평론가는 1999년 《필름 컬처》 1호의 권두에서 이 사태를 예견했다. “현재 한국의 영화 비평은 글쓰기가 응당 가져야 할 제도와의 긴장감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다. 비평 자체가 마치 자신이 제도의 일부분인 것처럼 -심지어 아무런 대중적 영향력이 없는 경우에도-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목격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비평의 자족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영화 창작 주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영화 제도의 구성원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산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소통은 위상의 차이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거칠게 볼 때 한국식 작가주의란 감독들을 신봉하고, 그들의 미시 세계를 해제해야 한다는 1990년대 전후 국내의 시네필리아적 계보에서 연장했다. 그런데 <호프>에서 나홍진의 작가성 같은 것은 이 거대한 콘텐츠 놀음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었고, <호프> 비평에 제대로 맞물릴 수 없었다. 비평은 작품과 제도, 그 어느 곳과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이가 문제의식을 느꼈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을 느낀 듯하다. 『호프 끝장』 [8] 이라는 제목으로 8월 31일 출판 예정인 하나의 평론 선집은 이에 관한 리액션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책의 소재는 <호프>를 둘러싼 모든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며, 이 책은 반응을 생산하는 모든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다.”라는 책 소개 글이 단서다. 이야기를 더 나누자는 제스처이며, 유의미한 시도인 듯하다. 다만 이러한 기획조차 <호프>의 허무를 완연히 이기긴 힘들 것이라 슬그머니 비관해 본다. 아직 책의 내용을 상세히 읽진 못했지만, 기획 배경과 사전 공개된 한 꼭지의 다음 내용에 미루어 보았을 때 그렇다. “그렇기에 <호프>는 신정원 과 < 차우 >를 다시 불러내며 ‘한국의 시네필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9] 두 가지의 의문이 드리운다. 첫째, 『호프 끝장』이 택한 책의 물성은 <호프>란 허무를 모종의 틀에 가두기 위한 방책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호프>의 범석( 황정민 )과 주민들이 외계 종족을 보고 느낀 공포의 감정과 유사한 반응일 테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제야 <호프> 안쪽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글 역시 <호프>의 허무를 이기지 못한 사례의 하나란 이야기다) 정체 모를 언어가 눈과 귀를 파고들 때, 우리의 본능은 자연스레 공포를 느낀다. 도망가거나 공격한다. 『호프 끝장』은 후자인 듯하다. ‘끝장’이라는 제약의 언어를 통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의 확산을 한 주머니에 가두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낯선 괴물을 포박하여 감금하듯이 비평가들은 이것에 대한 ‘끝장’을 원하는 듯 보인다. 손아귀에 넣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호프>의 크기는 웬만한 주머니의 용적량을 넘어섰다. 둘째, 왜 한국의 ‘시네필’들이 <차우>로 단결해야 하는 것일까. 궁금증의 시작은 꽤 개인적이다. 필자 역시 저 부름에 사전적으로 응답한 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7월 6일 <호프>의 언론배급시사회 직후 필자는 개인 SNS에 <호프>의 뚜렷한 레퍼런스가 <차우>임을 언급했다. [10]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겪었던 세대에게, <차우>와 신정원 감독은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충무로의 자기반영적 패스티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호프>는 이런저런 장르적 요철을 뿌리 삼아 발진한 대중영화이기에 <차우>의 호명엔 어느 정도 당위성이 생긴다. 틀린 말이란 의도가 아니다. <호프>와 <차우>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 ㈜영화사 수작, 빅하우스(주)벤티지홀딩스 (사진: Daum ) 여기서 짚고 싶은 점은 <호프>가 <차우>의 적자라든지 하는 비평적 주제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라 말하는 필자의 태도야말로 이 속 간지러운 의문의 원흉이다. 김신 평론가는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동시대 한국 시네필들의 폐쇄성 또는 군집성을 지적한 적 있다.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 [11] 가 있다는 것이다. 적확하다. <호프>에 대한 <차우>의 연상은 어느 순간부터 동시대 평자들에게 하나의 집단적 기억으로 각인됐다. ‘시네필들의 단결’은 이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끈끈하다. 그럼에도 재차 집합 구호를 외치는 일은, 지금의 ‘시네필 단결’이 대중적으로 유효한 테제를 남기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는 허무감의 역설적 발로일 것이다. <호프>와 <차우>의 비교 논지는 작금 시네필리아적 행위의 특질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동시대 시네필리아들이 20세기(한국이라면 2010년대 이전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기억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고 썼다. “어쩌면 동시대 영화는 더 이상 유효한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눌어붙은 세계를 다시 조형하는 시네필리아의 작업이 된 것” [12] 이다. 요즈음 대개의 시네필리아는 과거의 유산을 파먹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호프>를 보며 한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따지거나 <차우>를 떠올린다. 이럴수록 작품 내부를 향한 비평에 더해, 그 작동 방식과 환경까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보다 전쟁. <호프>에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주민들을 모을게요 『호프 끝장』은 <호프>를 끝장내지 못할 것이다.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김신) [13] 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환경 변화가 수반됐다. 여기서 그 변화와 일일이 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힘도 없다. 작금의 상황에 놓인 그 어떤 비평적 주체도 <호프>를 둘러싼 제도의 불명확성을 다잡진 못한다. 좁디좁은 비평계란 ‘군체’가 700억 원짜리 <호프>를 이기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호프>는 약 59조 원짜리 X(2022년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금액)를 이기지 못한다. <디 워> 사태를 재연할 역량은 소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수가 다수의 말을 쏟아 내는 쪽이 훨씬 큰 경제력을 생산한다. 이 시장 논리의 당연함은 거의 장르적일 정도로 세계에 고착됐다. 어쩌면 “호프 끝장”이란 제목은 이 한계를 미리 알고 선제적으로 자조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일단 주민들을 모아 대응하겠다는 성애( 정호연 )의 말처럼, 할 일은 해야겠다는 종류의 동력이었을까. 마음이 이상하다고 요령부득 뇌까리기만 하는 범석처럼 무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덧붙여 필자 나름의 극복 방식도 제언해 보고 싶다. <호프>에 대한 비평의 (뒤늦은) 승리 방식이란 두 가지로 고려된다. 첫째, <호프>의 자결을 기다린다. 상업영화의 자결이란 개봉 상영의 끝, 그로 인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다. <호프>는 거대 외화들의 공습 시점에 맞춰 이미 피를 흘리는 중이다. 둘째, 시간의 흐름이다. < 환송대 >(1962)에 관한 크리스 마커 자신의 말,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를 변주하자면 “시간은 <호프>에 대한 비평의 유일한 승리”일 것이다. 하나로 뭉치지 않은 채 맥락 없이 흐트러져버린 비평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위해선 훨씬 더 긴 시대의 틈이 필요하다. 쓰고 보니 두 방식 모두 ‘하릴없는 기다림’의 다른 말이다. 범석이 왜 무력해졌는지 잘 알겠다. <호프>에 대한 말들을 모으고, 그것들의 쓸모없어짐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성애처럼 낙관으로 억지 부리듯이, 의도적으로 최대한 많은 문장을 모으려 했다. 결론적으론 이 글 역시 무수한 실패의 종이 쪼가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호프>의 안쪽처럼 난삽한 구성이 되더라도 일부러 그러려 했다. 여하간 그 과정에서 《씨네21》, 《필름 컬처》와 같은 오래된 영화 전문지부터, 《쿨투라》라는 문화지, 독립출판물, X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 블로그, KMDb 영화글 등의 여러 창구를 통과했다. 지금 영화에 관해 (필자처럼 나름 고관여로) 말하고 쓰는 이들의 경로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은 곳에 모일 테다. 하여 이런 상상도 해본다. ‘성애가 주민들을 한곳에 모은다면, 외계인들은 외려 더 손쉽게 인간들을 절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란 무서움.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사족 끝으로 정직하게, 이 글의 원료는 필자의 사적 회한이자, 자의식 과잉의 내적 독백이었다. 설령 아무도 듣지 않았더라도, 왜 <호프>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하지 못했을까. 빙빙 돌려 그 허무의 가치를 어떻게든 격상하려 한 것일까. ‘<호프>에 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겠다는 지각은, ‘<호프>를’ 말할 수 있겠단 사실과 같지 않은데 말이다. 정치에 대한 영화와 정치적 영화를 갈랐던 고다르의 말처럼, 저 둘은 엄연히 다르다. 태초부터 <호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씨네21》 지면에 별점 4개를 주었다는 일의 책임감이었을까.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작가적 기호(記號)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개인의 기호(嗜好)로 유희할 순 없는 것일까. (사실 그러기는 싫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 [14] 이 팽배한 이 시대에, 모든 비평은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여 이 글처럼 우리는 계속 영화에 ‘관한’ 무언가에 더 크게 반응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모든 물음은 마베이요의 빛나는 심장처럼 아무 의미 없는 허세에 가까울까. 어쨌거나 한 명의 관객이자 평자로서는 <호프>의 허무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체, <호프>를 두고 무슨 말이 남았나? 아니, 애초에 왜 말했나? *** [1] “ [특집] 백주 스릴러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 칸 경쟁부문 <호프> 첫 시사 리뷰 ”, 《씨네21》 1558호, 2026. 5. 29. [2] “ 이 세상은 아직 ”.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개인 블로그에 <호프> 별점에 대한 일종의 후기를 남겼다. 2026. 7. 20. [3] “ [기획] 가속이 향하는 곳, 얄 사다트 평론가가 본 <호프> ”, 《씨네21》 1568호, 2026. 8. 6. [4] “ [특집] <호프>의 외계인은 왜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 외계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장르 읽기 ”, 《씨네21》 1566호, 2026. 7. 24. [5] “ 사회는 영화보다 크다. 네 가지 관점으로 보는 2026년➊ 한국식 작가주의의 한계를 마주한 2026년 ”, 《씨네21》 1570호, 2026. 8. 21. [6] “ [영화]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유의미하다. ” 《쿨투라》 2026년 8월호, 2026. 7. 29. [7] 4)와 동일. [8] 『호프 끝장』 알라딘 북펀드 웹페이지 . [9] 『호프 끝장』의 출판사 ‘디깅룸’의 X(구 트위터) 게시글 . [10] https://www.instagram.com/p/Dacd6WLj8aH/?igsh=M285cnVvcmZ5cXF1 [11] 김신. “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2020년대 전후 시네필 커뮤니티와 영화 속 대화에 관한 단상 ”, 2024. 11. 21. [12] “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 《씨네21》 1540호, 2026. 1. 21. [13] 10과 동일. [14] 이광호. “ 1인칭 사이 1인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 2024. 5. 21. 이우빈(영화기자) l 《씨네21》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관에 가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 1997년생. 최근엔 저널리즘 비평이 대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 중.
헤이리시네마 외관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예술마을 속 영화관 헤이리 예술마을의 모든 건물은 공간의 60% 이상을 문화시설로 채워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다. 화가 김민숙이 창립한 ‘커피공장 103’ 역시 이 원칙을 지켜야 했고, 이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활동하던 아들 장현상 이 건물 3층에 ‘ 헤이리시네마 ’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극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평소 영화를 통해 인연을 맺어온 KU시네마테크 한경훈 대표의 조력이 든든한 보탬이 되었으며, 독립·예술영화 시장이 비교적 활기를 띠던 2016년 전후의 시기적 상황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소규모 영화관이 동료 영화인들에게 든든한 활동 기반이 되길 바랐던 장현상 감독의 바람대로, 현재 헤이리시네마는 상설 독립·예술영화전용관으로서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장현상 대표는 헤이리예술마을이라는 입지적 특성을 고려하여 예술영화 중심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대표 본인이 독립영화 감독인 만큼 프로그램 역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편성되고 있다. 또한 예술마을 내 도자기 공방과 협업하여 체험형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쿠킹 클래스 공간과 연계해 음식 관련 영화 상영 및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멤버십 가입자에게 제공되는 굿즈 역시 마을 내 공방과 협업하여 제작된다. 예술마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예술 활동을 지지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획들은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1층 카페 ‘커피공장 103’ 내부 전경 헤이리시네마의 공간과 시설 헤이리예술마을은 하나의 대규모 단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개의 입구를 통해 공원처럼 진입할 수 있다. 그중 6번 게이트를 통해 들어서면 ‘커피공장 103’ 건물에 위치한 헤이리시네마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건물 1층과 2층에는 카페, 그리고 카페와 연계된 작은 갤러리가 있으며, 엘리베이터 또는 중앙 계단을 통해 3층의 영화관으로 이동할 수 있다. 매표소 앞 복도에는 영화 관련 서적과 자료가 비치되어 있어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열람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개봉작 및 개봉 예정작의 홍보물도 벽과 테이블을 채우고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라운지 공간이 이어지는데, 이는 카페와 연계되어 커피와 베이커리를 함께 즐길 수 있는 휴게 공간으로 운영된다. 창밖으로는 헤이리예술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관객들이 상영 전 여유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다. 상영관은 총 30석 규모로 소규모이지만 관람 환경에 적합한 구조를 갖추기 위해 설계되었다. 좌석은 일반적인 극장 의자가 아니라 소파, 암체어, 좌식 의자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슬로프 구조와 좌석 높이의 차이를 통해 시야 확보를 고려하고 있다. 각 좌석에는 사이드 테이블이 설치되어 관람의 편의성과 아늑한 분위기를 동시에 제공한다. 상영 설비는 BARCO사의 DP2K 영사기와 고반사율 및 균일도를 갖춘 하크네스 스크린, 5.1채널 음향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어 소규모 상영관이지만 기본적인 상영 환경은 충분히 갖추고 있다. 헤이리시네마 휴게 공간 전경 헤이리시네마의 사람들 헤이리시네마 운영진은 총 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현상 대표 외에 영사 및 프로그램 담당 1인, 홍보 및 운영 담당 1인이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인원은 소수이지만 각자의 역할을 유동적으로 조정하며 협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초기 설립 단계에서부터 최소 인원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구조이기 때문에 현재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관객층은 다른 독립·예술영화관과 비교했을 때 중·장년층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파주라는 지역적 특성과 더불어 교통 접근성이 높지 않은 점 때문에, 자발적으로 방문하는 관객이 중심이 된다. 특히 평일에는 문화예술 향유 여유가 있는 중·장년층이 주를 이루며, 주말에는 보다 다양한 연령층이 방문한다. 시네필 중심이라기보다는 예술, 미술, 여행 등 문화 전반에 관심을 가진 관객층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성은 예술을 주제로 한 영화 편성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헤이리시네마 운영자 장현상 감독 헤이리시네마 프로그램 운영 상영 회차는 일반적으로 하루 5회이며, 러닝타임이 긴 작품의 경우 4회로 조정되기도 한다. 외국영화와 한국영화의 비중은 약 8:2 수준이며, 경기인디시네마 프로그램과 연계한 한국영화 상영도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프로그램 편성은 전담 매니저가 맡지만, 상영 여부나 편성 구성에 대한 중요한 결정은 운영진 전체의 논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현장 발권 외에도 디트릭스(Dtryx) 온라인 예매 시스템을 통해 예매가 가능하다. 관람료는 주중 9천 원, 주말 1만 원이며, 파주시민·헤이리예술마을 주민·청소년에게는 각각 할인 혜택이 제공된다. 경로 우대 할인은 일괄 6천 원으로 적용된다. 회원제에 따른 회원 모집은 연말에 진행되며, 약 5만 원의 패키지 가격에 초대권 8장, 영화 할인권, 커피 할인권, 굿즈 등이 포함된다. 통상 약 300명 규모의 패키지가 2개월 내에 매진된다. 특징은 제공되는 관람권이 멤버십 패스가 아니라 초대권 형태라는 점이며, 한 명의 회원이 여러 명과 함께 관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예술마을이라는 공간의 사회적 성격과도 연결된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관객 참여형 편성이 있다. 상영작 아웃라인이 공개되면 관객이 온라인 설문을 통해 원하는 상영 시간을 요청할 수 있으며, 실제 편성 과정에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영된다. 매표소 전경 첫 상영작과 흥행작 개관 상영작은 대표인 장현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 사돈의 팔촌 >(2015)이었다. 초기 상영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술적·운영상의 문제를 점검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상영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개관 초기에 누수와 소음 문제가 발견되었고, 이를 개선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후 상영작으로는 박찬욱 감독의 < 아가씨 >(2016)가 이어졌다. 개관 이후 가장 큰 흥행작으로는 에이슬링 월쉬 감독의 < 내 사랑 >(2016)이 꼽힌다. 모드 루이스의 삶을 다룬 이 작품은 관객 반응이 매우 좋아, 특정일을 ‘<내 사랑> 데이’로 지정해 하루 종일 단일 작품을 상영했음에도 전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이는 해당 영화가 주요 관객층의 취향과 잘 맞아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외에도 어린이 영화 교실, 중년 여성 대상 영화 제작 수업, GV 및 마스터 클래스 등이 운영되어 왔다. 특히 2025년에는 이해영 , 이원석 감독 등 상업영화 감독뿐 아니라 마이크 피기스 감독을 초청하여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하기도 했다. 영화감독이 운영하는 영화관 영화관 운영이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장현상 대표는 그보다 기쁨이 더 크다고 말한다. 소규모 극장이기 때문에 운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고, 프로그램 구성의 자유도가 높아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경기 북부에서 유일한 상설 예술영화관이라는 점에서 관객과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큰 보람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과 영화관 운영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극장 운영을 통해 알게 된 ‘흥행 영화의 기준’이 창작자로서의 판단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며, 각각의 역할은 별개의 영역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시네필 중심 극장, 창작자 중심 공간 등 다양한 방향성을 실험했으며 워크숍과 클래스, 상영 연계 프로그램 등을 운영해 왔다. 그러나 현재는 관객의 수요를 중심으로 운영하는 방향이 보다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재는 예술영화, 특히 예술 또는 예술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양성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운영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상영관 내부(객석 방향) 공간 및 운영 개요 1) 위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93-119, 커피공장 103 카페 3층 2) 설립일 : 2016년 3) 대표 : 장현상 4) 극장 구성 : 1개관 30석, 좌식 소파, 암체어와 사이드테이블 등으로 좌석 구성 5)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첫 상영 10:30, 마지막 상영 오후 7시 안팎, 상영 작품에 따라 유동적 6) 입장료 및 할인 정책 (현장 발권 및 디트릭스를 통한 온라인 예매 가능) - 평일 9,000원, 주말 10,000원 - 헤이리예술마을 주민 2,000원 할인, 파주시민/청소년 1,000원 할인, 경로 주중·주말 무관 6,000원 7) 조직 구성 : 장현상 대표 외 프로그램 1인, 홍보·운영 1인, 총 3인이 운영 취재 일자: 2025년 11월 27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