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들맨
- 감독
- 조지 갈로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루크 윌슨, 지오바니 리비시, 가브리엘 매치, 제임스 칸, 켈시 그래머, 테리 크루즈, 로라 램지, 라데 쎄르베찌아
필자는 공공 복합문화기관에서 일하다 보니, 여러 문화 장르를 편견없이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타 장르에 비해 상당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종종 깨닫게 된다. 이러한 영화적 선입견은 사업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조짐이 보이더니, 규모와 예산을 확보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서면 으레 ‘이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할 일이다.’, ‘영상자료원이 하고 있지 않냐?’, ‘여기는 부산이 아니다.’ 등의 정책 논리와 결합된다. 어떻게든 한고비 넘기고 나면, ‘크게 벌이지 말고 재밌는 영화 몇 편 골라서 상영해라’, ‘정치적 내용을 피해라’, ‘관객은 많이 들어올 수 있겠냐’ 등의 직접적인 압력으로 구체화된다. 이쯤 되면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란 타 전시 주제와의 연계 상영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영화 상영과 같은 구색 맞추기 이벤트가 가장 안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미술 영역에서는 크고 작은 지역마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고, 저마다의 연구, 수집과 교육 행사 그리고 작품지원 프로그램까지 운영되고 있지만, 영화는 유독 공공의 영역보다는 멀티플렉스 형태의 민간 소비 영역에 과도하게 치우쳐져 있다. 국공립문화기관에서조차도 영화에 대한 공적 운영과 지원은 특정 기관의 역할로만 축소하면서 산업과 문화예술을 분리하는 이원적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곳에서 몇 년 동안 적응하며 일해오고 있는 필자가 제도적 문제를 지적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른 장르와 비교할 때 예술장르로서의 영화가 지닌 불균형과 그에 대한 선입견은 영화 관련 사업들을 추진할 때마다 늘 장벽이자 한계로 작용한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들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첫 번째는 한국의 예술운동 흐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영화들을 수집하고 기록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거의 기록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작은 전시나 상영의 형태로라도 기념하는 것이다. 본 고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고전’이라는 의미가 ‘오래되었음에도 시대를 관통하는 미학적 성취’를 내포하는 것이라면, 결국 필자에게 있어서 ‘고전’은 현재 나의 관심이 작동되게끔 하는 일종의 근원이자, 과거의 기록들을 갱신하고 확장해나감으로써 정전이 아닌, 언제나 재구축이 가능한 살아있는 계보들로 존재한다. 기록 이전의 기록 필자가 지금 직장에서 처음 맡은 일은 아시아 문화예술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집하는 작업이었다. 당시의 우리 팀은 아시아 문화에서 가장 큰 변곡점이 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예술 흐름을 주제별로 나누고 각 주제들 간의 관계 속에서 시각화할 수 있는 자원들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필자는 그 안에서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를 맡았고, 현재 미술 안에서 ‘무빙이미지’로 묶이는 두 영역이 아시아 각 지역에서 어떻게 출발하고 조우하게 되었는지를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과 자료들을 찾아 조사했다. 특히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예술 안에서 영화의 유산을 찾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한 작업이었다, 상업영화 제작방식과는 다른 개인작업 또는 문화운동의 일환 또는 콜렉티브 형태를 취하고 있는 실험영화는 하나의 자료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 자료에서 파생되는 정보들은 매우 다양했다. 실험영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크게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로 나누어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실험영화 자료들을 모으는 일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어렵고 더딘 작업이었다. 현재는 독립영화의 범주 안에서 실험영화, 실험다큐멘터리까지 다양한 비평작업들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영화 담론의 대부분은 상업영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실험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는 당위성을 부여했고, 수집 이후 보존과 전시로 이어지는 다른 아카이빙 프로젝트와 달리 배급 시스템 보급까지 계획하면서 실험영화 초창기인 70년대 전후와 그 이후의 작품들로 외연을 확장하고자 했다. 또한 그럼으로써 관련 작업을 하고자 하는 창작자와 이용자를 지속적으로 연결하는 공공 상영과 배급 모델을 구상했었다. 각 나라마다 고전영화 베스트 안에는 그 나라의 아방가르드(혹은 언더그라운드) 전통을 계승한 작품들이 섞여 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일본의 경우, 유럽의 아방가르드 영화부터 미국의 실험영화까지 그 맥을 같이 하며 그 안에서 1인 영화제작 시스템인 자주(自主)영화, 퍼포먼스, 음악 등과 결합한 인터미디어(Inter-media), 자국의 전통적인 언더그라운드, 비디오아트와 결합한 매체실험 등 다양한 분파들을 통해 하나의 일본 실험영화 지형도를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실험이든지 간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어렵다. 실험은 기존 영화의 미학적 탈구로부터 시작한다.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전후의 맥락, 작품이 만들어진 시대적 맥락에서 비틀림이 시작된다. 예술에서의 실험은 이러한 맥락적 탐구가 필요하며, 그 안에 실험의 미학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학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파악해가면서 실험영화의 계보를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당시의 비틀린 영화, 비틀린 경향의 발견을 가져다준 영화, 즉 상업적 고전영화가 아닌, 마치 플럭서스처럼 커다란 한국실험예술운동의 맥락에서 출연한 영화적 실험은 어떤 것이었을까. 필자는 우선 한국에서 ‘실험영화’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를 기점으로 영화의 미학적 연구를 시도했던 동인회의 멤버와 자료들를 모으는 데서 출발했다. 구체적으로, 1960년대 ‘시네포엠’과 실험미술을 지칭하며 다양한 매체실험을 시도한 ‘제4집단’, 1970년대 ‘영상연구회’와 ‘카이두 클럽’, 독일과 프랑스문화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영화연구회’와 ‘씨네클럽’, 그리고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실험영화연구소(전신 ’뉴이미지그룹‘)’를 중심으로 활동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동인회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의 수집이 가장 중요했는데, 이는 대부분 개인소장이었고 필자의 소속기관은 개관 전이었기 때문에 감독들의 신뢰가 전적으로 필요했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카이두클럽의 한옥희 감독이 영화제 집행위원이었을 당시 프로그래머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임창재 감독의 연출부로 잠시나마 있었던 인연으로 한국 실험영화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두 감독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순조롭게 수집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이전에도 실험영화에 관심이 많았고, 관련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실제 실험영화의 고전과도 같은 작품들의 원본 필름을 직접 내 손으로 가지고 오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임창재 감독에게는 실험영화연구소에서 활동 당시 제작한 < 오그 >(1994), < 오버 미 >(1996)부터 < 눈물 >(1998), < 아쿠아 레퀴엠 >(1999)의 16mm 필름 원본과 콘티, 당시의 활동자료 그리고 이후의 디지털 작품들을 받았다. 특히 필자가 대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책 중 하나였던 <뉴미디어 영상미학>의 저자이자 실험영화연구소 대표였던 권병순(필명 권중운)의 사진 몇 장이 섞여 있던 활동자료를 보면서 한국영화사 기록에 여전히 담기지 못한 역사들이 너무 많고, 그 안에서 실험영화 기술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을 절감했다. 박사논문을 쓰는 동안 공동지도교수였던 최민 교수님이 “권병순이 지금 살아있다면 네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줬을거다”고 아쉬워했던 기억과 함께 아카이빙 작업에서 사진 몇 장, 메모 한 줄이 담긴 기록이 또 다른 기록으로 이어지는 즐거움이 공존했다. 임창재 감독에게 건네받은 자료들이 아카이빙 과정의 동기부여가 되었다면 한옥희 감독의 자료들은 아카이빙 이후의 동력과도 같았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받기 전까지 ‘카이두 클럽’의 작품을 본 것은, 한옥희 감독이 보여준 < 구멍 >(1973)의 디지털 파일과 초기 독립영화들을 담은 DVD ‘매혹의 기억, 독립영화 Vol.1 70-80년대’에 수록된 < 색동 >(1976) 두 편이었다. 감독님께 <구멍>을 포함한 < 중복 >(1974), < 2분 40초 >(1975), < 무제 77-A >(1977)의 16mm 필름 원본을 받았고 이듬해 디지털화 작업을 진행했다. 현재 필자에게 한국 고전영화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무제 77-A>라고 말할 것이다.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처럼 16mm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세상을 향해 장전할 태세를 갖춘 한 여성은 인파가 모여있는 시내 한복판에 자신을 기이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포착한다. 그리고 암실로 들어가 그 필름들을 몸에 휘감으며 행복해하는 듯 하지만 마지막엔 갈기갈기 오려버린다. 엔딩크래딧에 한옥희 감독이 직접 등장하며 가위를 들고 카메라를 향해 “컷!”을 외치는 짧고도 강렬한 순간은 최고의 마지막 장면이다. 왜 이 필름이 여태까지 감독의 방 안에 있었을까. 이 귀한 필름들을 통해 전해오는 울림은 이것을 또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가 무거운 과제로 동시에 다가왔다. 13개 주제의 아시아 예술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통해 동시대 예술담론을 생산해내는 플랫폼이 되고자 했던 우리팀의 포부는 안타깝게도 기관의 개관과 함께 수장이 바뀌면서 중단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실험영화와 비디오아트는 필름앤비디오 아카이브로 묶여 간헐적으로나마 현재까지 수집이 이어지고 있다. 한옥희(카이두 클럽)의 <무제 77-A> 스틸이미지 기록 이후의 기록 필자가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잠시 휴식기를 갖는 동안, 영화 프로그래밍 업무를 주로 맡게 되었다. 관객이 찾지 않는 프로그램만 기획한다는 잦은 지적으로 소심해졌을 당시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마이너한 것과 전투적인 것은 다르다”는 말을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말은 필자가 하고 싶지만 망설였던 몇 가지 기획을 실행할 동력을 실어주었다. 과거의 작품들이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기술되면 ‘고전’이라 불리게 된다. 아주 멀지 않은 과거더라도 가치 있는 작품은 모던 클래식, 즉 ‘현대 고전’이 되기도 한다. 2019년 한국영화100주년에 앞서 여기저기서 이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었고 필자도 조그맣게나마 이에 동참하고 싶었다.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한국영화는 세기의 걸작을 배출하고, 국내영화의 높은 관객점유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 안에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검열 내지는 삭제당해야만 했던 작품들을 나열해보고 싶었고, 어찌보면 이 작품들이야말로 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고전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한국영화사에 도전적 작품으로 살아남은 혹은 사라진 영화들을 소환하여 100주년을 기념하는 <한국 나쁜영화 100년>을 기획해보고자 했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에 타협한 영화들을 그 시대의 ‘착한’ 영화들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불러모으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야말로 ‘나쁜’ 영화들이다. 모은영, 신은실 평론가가 함께 기획하고 인디포럼과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광주독립영화관과 광주극장이 협력한 이 행사는 나름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행사에 초대된 감독들도 ‘나쁜’ 영화 감독들로 소개되는 역설적 상황을 기꺼이 만끽했다. 특히 100주년 기념 모든 행사를 고사하면서도 유일하게 이 행사에는 얼굴을 비친 장선우 감독의 깜짝 등장은 영화제의 화룡점정이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나쁜영화 한두 편을 고른다는 것은 너무 힘들었고, 고심 끝에 < 서울예수 >(1986), < 나쁜영화 >(1997), 그리고 < 거짓말 >(2000) 세 편을 선정하였다. 개막작 역시 매우 중요했는데, 우리다운 행사에 포문을 열어줄 수 상징적인 작품이 필요했고, 신은실 평론가는 < 상계동 올림픽 >(1988)을 제안했다. 이는 지금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기록되어 있는 사실들을 재조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미 기록된 것들에 빈틈을 메꾸고 정보들을 두텁게 만드는 작업은 필자가 보람을 느끼는 일 중의 하나다. 아카이빙 작업에 전적으로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상영이나 전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취득하는 정보와 자료들이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의 30주년을 기념한 <내가 뉴스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전시를 위해 필요했던 그동안의 노뉴단의 영상들과 비디오 표지들, 그리고 얄라셩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유운성 평론가와 기획한 <여럿 그리고 하나-얄라셩에서 서울영화집단까지>를 준비하면서 만나볼 수 있었던 김홍준, 박광수, 문원립 감독의 구술자료부터 당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활동자료들은 한국영화사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안적 영화문화의 중요한 기록들이다. 비록 더디긴 하지만 이 자료들은 현재 정리작업 중이며, 완성될 즈음에는 출판물을 비롯하여 풍성한 기념행사와 함께 한국 독립영화 연구에 지속적인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 노동자뉴스제작단 30주년 기념전시 포스터 이미지 , <우> 얄라셩 40주년 기념 온라인 전시 메인페이지 이미지 수집된 작품과 자료들을 정리하는 후속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의미있는 소식들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다. 한옥희 감독의 필름들을 디지털화한 후 해외영화제와 미술관 등에 조금씩 소개하면서 국내외 평론가, 연구자, 큐레이터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오버하우젠국제단편영화제 ‘아카이브’ 섹션에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초청되었고, 당시에 아시아 실험영화의 고전들을 소개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필자는 한국 작품으로 김구림의 <24분의 1초의 의미>와 한옥희의 <구멍>을 대표작으로 선정하여 상영했다. 이미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김구림 작가의 작품도 주목을 받았지만, 해외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한옥희와 카이두 클럽의 이름은 작품 공개와 함께 관심이 집중됐다. 이후 같은 해 토론토국제영화제 ‘파장’ 섹션에 또 다른 작품 <2분 40초>가 초청되었고. 캐나다 영화잡지 ‘시네마스코프’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이후 싱가포르 내셔널 갤러리, 바르샤바현대미술관, 독일 HKW 등의 주요한 미술관과 영화제를 넘나들며 한국영화 회고전, 세계여성예술가 특별전 등에 대표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다. 해외의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 자료들의 요청이 늘어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약 5년 사이에 일어난 이와 같은 변화는 카이두 클럽의 활동과 한옥희 감독의 작품이 가지는 미학적 가치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봉준호, 박찬욱이 이룬 성과의 동력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의 영화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계보와 동력을 찾고 있다. 개인들마다 ‘고전’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결국 필자에게 있어 고전이란 ‘고전적’ 관습을 탈피하고자 했던 선구적 작업이다. 수집된 자료들은 정리를 마치고 나면 완성된 기록으로 남는 것이 아닌 수시로 살을 붙여가면서 어느 순간 자료들끼리 자연스러운 지형도가 그려지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미술사 안에서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다양한 자료수집과 비평, 전시들을 통해 정전화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비대중적인 것을 대중화하고, 비제도적인 것들을 제도화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술의 스펙트럼을 넓혀주고 있다. 영화도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전환해가면서 혼종 장르로 변모해가고 있다. 어느 때보다 미술과의 접점이 가까운 이때, 좀 더 다양한 실험적, 운동적 영화의 역사들이 경계를 넘어 상호 접합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필자 역시 한국 실험영화와 실험미술 운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또 다른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가고자 한다.
2014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이 되면 한해를 돌아보며 평가보고서를 쓰기에 여념이 없어진다. 1년 동안 관객은 몇 명이나 왔는지, 총 매출은 얼마인지, 수입과 지출은 어떻게 쓰였는지. 그리고 올 한해 사업을 마무리하며 각 팀별로 평가보고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체평가회의를 한다. 마지막으로 더 나은 내년을 위해 또다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게 된다. 2014년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좋아질 것을 기대하며, 그리고 독립영화를 위해 더 많은 도움이 되고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1년 동안 고민의 결과를 사업계획서 안에 녹여낸다. 그러다 문득, 2012년 인디스페이스를 재개관을 준비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직 극장은 잡히지도 않았고,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녀 봐도 마땅한 공간 하나 없었지만 발기인대회를 하고 후원의 밤을 하는 등 분주히 재개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7년 인디스페이스가 첫 개관했을 때의 벅찬 감동과 2009년 휴관했을 때의 아쉬웠던 기억들이 겹쳐지면서 정말이지 열심히 준비했다. 지나친 낙관은 하지 않았지만, 초반 근심 섞인 우려는 아마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5월에 정식 개관을 했고, 그런 걱정의 마음을 누군가는 알아주었는지 개관 두 달째인 7월에 개봉한 < 두 개의 문 >이 연일 매진사례를 기록하며 광화문으로 옮겨간 인디스페이스를 알렸고, 어려운 재정난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정치적 소재나 사회적 이슈의 민감한 영화들이 나름 인디스페이스에서 큰 히트를 치며, (긍정의 의미든 부정의 의미든) 인디스페이스라는 공간도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2013년을 지나 2014년, 햇수로 3년을 지나온 지금, 인디스페이스는 어떨까. 최근 인디스페이스는 개관 7주년(11월 8일은 인디스페이스의 개관일)을 맞아 소박한 기획전과 함께 한 차례의 토론회를 가졌다. ‘지역 영화관의 새로운 도전-지역 독립예술영화관을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을 토론하다’가 그 주제였다. 우리와 같은 시기에 개관한 강릉의 신영극장, 그리고 한창 개관을 준비 중인 대구의 오오극장의 사례발표와 함께 오랜 시간 지역에서 예술영화전용관을 운영하고 있는 대전아트시네마, 서울 유일의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그리고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을 준비하려고 하는 부산독립영화협회와 울산미디어연대가 패널로 참여하여 오랜만에 지역의 극장 활동가들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날 토론회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자리였다. 영진위의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사업의 재공모 심사결과’로 대전아트시네마를 비롯한 지역의 대표적 예술영화전용관 대거 탈락하며 충격을 안겨주었고 그에 대한 고민과 한숨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대구는 오오극장의 설립을 가시화하고 있었으며 부산과 울산, 그리고 청주 지역은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의 필요와 요구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다루고 있는 < 다이빙벨 >이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에서는 끝내 상영되지 못하였다. 인디플러스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직영하고, 인디스페이스를 운영하고 있는 (사)독립영화전용관확대를위한시민모임이 프로그램 및 홍보를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는 제1독립영화전용관이다. 이 영화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독립영화 인정 심사에서 ‘독립영화’로 인정하였고, 4만 명 이상의 관객이 본 영화이다. 불허의 이유는 ‘해당 영화가 다룬 사건의 진상이 여전히 규명 중이며, 공적기금으로 운영되는 극장의 특성상 상영 이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작품의 상영은 힘들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공적기금으로 운영되는 극장임에도 개봉은 물론 타 단체가 신청한 대관까지 불허하였다. 여전히 독립영화에 검열은 존재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인디플러스는 온전히 제 역할을 해나갈 수 있을까? 2014년을 준비하면서 인디스페이스는 안정적인 독립영화의 개봉 상영, 그리고 극장-배급사-감독들의 간의 교류 확대, 지역 독립영화관 네트워크 확대 등을 목표로 사업의 계획을 세웠다.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하면 다른 극장보다는 관객들이 더 많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 독립영화 감독/배급사들이 편하게 인디스페이스의 문을 두드리고, 함께 고민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 서울뿐 아니라 지역의 독립/예술영화전용관 네트워크를 통해 관객개발과 홍보를 함께하고, 그러면서 서로가 더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 사업계획서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유효한 그 계획들과 함께 2015년에는 우리에게 어떤 계획들이 필요할까. 다시 머리를 맞대어 함께 고민해야겠다.
2011년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 소중한 날의 꿈 >, < 마당을 나온 암탉 >, < 돼지의 왕 >의 잇따른 개봉과 애니메이션 최초로 200만 관객 돌파,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소식 등 그동안 메말라있던 애니메이션계에 단비와 같은 소식들로 가득했던 한 해였다. 그리고 봄바람결이었는지, 저예산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지원제도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독립단편을 꾸준히 만들어왔던 감독들의 기대도 높았다. 그러나 2012년 콘텐츠진흥원과 영화진흥위원회 사업계획에는 저예산 극장용 장편 사업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지난해 개봉했던 장편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작품이 아니다. 신화니 스타니 영웅이니 애니메이션의 시대가 오기를 바라는 많은 이들이 바래마지않는 것이겠지만, 아쉽게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은 우연히 좋은 작품이 나오기란 쉽지 않은 엄청난 끈기와 많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혹자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좋은 작품은 창조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엉덩이에서 나온다’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에 걸친 꾸준한 작업이 애니메이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즉 신화니, 스타니, 영웅이니 하는 것은 어느 날 벼락을 맞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히 자신의 작업세계를 만들어온 이들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홍길동도 어느 날 갑자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게 된 것이 아니다. 고된 수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요즘에 한류니 뭐니 하는 아이돌 스타들도 어릴 때부터 오랜 연습생 시절은 필수처럼 되어 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다르겠는가. 지난해 화제가 되었던 3편의 작품 역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작품이 아니다. 각 작품의 감독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작업들을 해왔다. < 돼지의 왕 >의 연상호 감독은 단편과 중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경험이 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장편을 제작하였고 영화계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 소중한 날의 꿈 >을 만든 안재훈 감독 역시 단편, 중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고, 이외에도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면서 11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꾸준한 작업을 통해 장편을 완성하였고,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관객 200만을 돌파한 < 마당을 나온 암탉 > 역시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끈을 놓지 않고 고민해왔던 스튜디오 오돌또기의 작품이다. 즉, 어떤 작품도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과 독자적인 기획력을 가진 감독과 스튜디오가 만들어낸 결실이라는 점이다. 필자는 이들 작품이 신화가 되거나 전설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늘상 일어나는 일을 신화라고 부르지 않는다. 필자는 이들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들이 제작되어 관객들을 만나고, 평가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작품이 필요하다. 물론, 좋은 작품도 있겠지만, 때로는 비판을 받거나, 잊혀지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애니메이션에 대한 어떠한 담론도, 그에 따른 관심도 그리고 계속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자하는 이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예산 장편은 한국의 현실에서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대를 여는 중요한 도전이고, 실험이다. 또한, 독립단편의 제작경험과 기획 창작력을 가지고 있는 독립작가 또는 스튜디오의 장편 제작의 길을 여는 밑받침이기도 하다. 그동안 정부는 단편 제작지원을 통해 한국에 애니메이션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밑바탕을 만들어왔다. 이제, 이러한 뿌리를 바탕으로 다양하게 뻗어나가고 있는 줄기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지원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튼튼한 뿌리와 줄기가 피어내는 꽃이 바로 한국 애니메이션의 밝은 미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