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전수전
- 감독
- 구임서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김규리, 강성진, 김유리, 진효진, 박인환, 안해숙, 명계남, 최흥일, 김유진, 김영임, 남병훈, 장가현, 허기호, 김민형, 서영석, 정지은, 장은경, 이진영, 김인자, 손민석, 오정민, 박찬임, 김종아, 이찬영, 조선묵, 서동수, 천정하, 김기광, 윤미림, 황의두, 이규연, 이한경, 전재완, 최수미, 박다래, 류덕환, 한선구, 김희진, 고은하, 안미애
생각해보자. 야구치 시노부가 우릴 실망시킨 적이 있었던가? 한국에서 < 산전수전 >(1999)으로 리메이크되면서 망가지긴 했지만, 첫 35mm 장편 < 비밀의 화원 >(1996)부터 야구치 시노부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의 감성을 지닌 감독이었다. 사실 < 아드레날린 드라이브 >(1999)가 조금 실망스럽긴 했지만(그래도 안도 마사노부가 있지 아니한가!) < 워터 보이즈 >(2001)는 극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영화였다. 이후 남학생들에게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시킨 감독은 < 스윙 걸즈 >(2004)에서 여학생 합주반을 만들며 유쾌 발랄하고 따뜻한 드라마를 선사한다. < 해피 플라이트 >(2008)에선 위기의 비행기 안에서마저 웃음을 만들어내더니, < 로봇 G >(2011)에선 조잡하면서도 기상천외한 특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 비밀의 화원 >(1996) < 워터 보이즈 >(2001) < 해피 플라이트 >(2008) < 로봇 G >(2011) 그리고 < 우드 잡 >(2014)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갈 곳은 재수학원밖에 없는 녀석이 산에서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역시 야구치 시노부스럽고, 여전히 소소한 재미로 가득 차 있으며, 의외로 깊이 있는 울림을 준다. 상황과 인물과 디테일을 흘러가듯 즐기며 볼 수 있는 휴머니즘 코미디. 인생에서 나무만 보는 사람들에게 숲을 보라고 조용히 타이르는 목소리. 바로 <우드 잡>이다. 이 영화는 시노부 감독의 장기인 ‘제로 투 히어로’(zero to hero) 패턴을 그대로 반영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던’(zero) 루저이며 오합지졸이던 청춘들이 의외의 상황에 부딪혀 갖가지 난관을 통과한 후에 ‘영웅’(hero)이 되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 ‘영웅’은 그 어감이 지닌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우뚝 서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영웅은, 드디어 스스로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신화학에서 언급되는 영웅 서사의 경로를 그대로 밟으며, 결국은 외톨이에서 벗어나 사회와 통합된다. < 우드 잡 >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히라노 유키(소메타니 쇼타)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흥청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우연히 산림 연수원 모집 전단지를 보고 끌린다. 평소에 이쪽 분야에 관심 있었느냐고? 그럴 리가… 태어나 나무 한 그루 심어 본 적 없는 유키를 유혹한 건 홍보 전단지의 여자 모델이었다. 그는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무작정 연수원으로 향한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이론을 빌자면,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은 셈. 그는 그곳에서 도망치려 하지만(소명의 거부) 결국 과정을 수료하고, 휴대전화 신호도 터지지 않는 가무사리 마을의 나카무라 임업에서 1년 동안 연수생으로 일한다. 산속의 삶은 힘들었지만 그는 마을 축제의 일원이 되면서 ‘산 사나이’로서 인정을 받는다(관문의 통과). 물론 시련과 굴욕은 이어졌다. 거머리에게 물려 사람들 앞에서 엉덩이를 노출하고, 살모사에게 물려 부은 귀가, 마치 부처상의 귀처럼 축 늘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보상이 있었다면, 전단지에 있던 그 모델이 바로 마을에 살고 있었던 것. 그녀의 이름은 이시이 나오키(나가사와 마사미). 단 홍보용 이미지처럼 조신하진 않다. 캠벨의 이론에 의하면 유키는 1년의 시간을 마치고 도시로 ‘귀환’해야 하며, 그의 곁엔 연인이 된 나오키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 우드 잡 >의 결말은 여기서 작은 반전을 만들어낸다. < 우드 잡 >은 야구치 시노부 감독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롱 숏의 웃음’이랄까? 억지스러운 개그 코드를 들이대기보다는, 한 발자국 물러선 카메라 안에서 인간이 하나의 풍경이 되어 웃음을 유발한다(아… 안타깝게도 이 영화의 유머 코드는 글로 설명하기엔 그 뉘앙스가 너무 강하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또 한 종류의 웃음이라면 은근한 섹스 코미디다. 이다 요키(이토 히데아키)는 연수원 시절부터 강인한 인상을 주었던 교관으로 유키는 그의 집에서 1년 동안 숙식을 된다. 요키와 아내 리다 미키(유카)의 지상 목표는 아이를 갖는 것. 미키는 체온 그래프를 만들어 ‘그날’을 정하고, 부부는 유키를 피해 도시의 모텔로 가 거사를 치르는데, 이 설정에서 잔잔한 웃음들이 만들어진다. 마을 축제도 의미심장하다. 남성 생식기를 상징하는 거목을 잘라, 여성 생식기 모양의 거대한 짚더미에 충돌시키는 의식이 치러지는데, 의도하지 않고 훈도시만을 입은 채 거목 위에 탄 유키는 얼떨결에 제주도 돌하르방 코처럼 생식의 아이콘이 되고, 마을 여성들은 그를 어루만진다. 자연의 스펙터클 하지만 < 우드 잡 >이 숲에서 펼쳐지는 웃음 한마당에 그친다면, 굳이 이렇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엔, 도시 관객들이라면 경이감을 가질 만한 자연의 스펙터클로 가득하다. 특히 나무가 넘어가는 장면의 파워풀한 느낌은 장엄함을 넘어 거룩하기까지 하며(마치 산신령이 나무를 허락해주는 듯하다), 산 위에서 드립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산 사람들의 모습엔 자연과 함께하는 노동의 삶이 지닌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요를 부르며 산에서 내려온다. “나무 하나 자르면 배부르게 먹고/소처럼 누워 코 골며 잔다/오늘도 늙는다. 오늘도 늙는다….” 어쩌면 우린 이런 삶을 희구해온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하면서도 건강하고,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누리는 삶. 이 대목은 가문의 이름을 걸고 임업사를 경영하는 나카무라 세이치(미츠이시 켄)의 말에서 더욱 울림을 준다. 그가 오늘 벤 나무는 100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100년 후의 후손을 위해 오늘도 산에 묘목을 심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한 일의 결과는 우리가 죽은 후에 나오는 거지.” 나무를 벤다는 것은 시간을 베는 것이며, 나무를 심는 것은 시간을 심는 것이다. 이것이 도시 루저 유키가 숲에서 배운 교훈이며, 눈앞의 것만 좇으며 살아가는 근시안적인 현대인들에게 이 영화가 전하는 힐링의 메시지다. 이것은 조화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무’와 ‘일’이 결합된 < 우드 잡 >이라는 제목처럼, 이 영화는 두 세계가 하나 된 모습들을 보여주며, 종종 자연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이미지들을 삽입하고 인물들은 그것을 바라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 자연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그렇게 순환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철학을 영화는 힘주지 않고 너무나 편하게 전달한다. < 우드 잡 >은 아직 세상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젊은 청년이 산속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1년 후 도시로 돌아간 그는, 자신이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야 할 세상이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결심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어느새 그에겐 용기가 생긴 것이다(‘유키’라는 이름은 한자로 ‘용기’(勇氣)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사족으로 원작자에 대해 소개한다면 나오키상 수상작가인 미우라 시온. 일본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 봤을, 그리고 한 권쯤은 읽어봤을 작가로 < 우드 잡 >은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을 영화화한 것이다. 주인공 유키가 산에서 보낸 1년을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로, 미우라 시온의 작품은 「마사 & 겐」 「배를 엮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 「천국 여행」 「흰 뱀이 잠든 섬」 「고구레빌라 연애 소동」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등 한국에서 10여 종이 출간되어 있다. <우드 잡> 외에도 여러 편이 영화화되었는데 첫 각색은 오오모리 스미오 감독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2009). 2011년엔 타츠시 오모리 감독에 의해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 집」이 영화화되었는데, 2013년엔 TV 시리즈로도 만들었다. 영화와 TV 시리즈 모두 에이타가 출연한다. 이시이 유야 감독의 < 행복한 사전 >(2013)은 한국에서도 개봉했던 작품으로, 「배를 엮다」를 각색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던 영화다.
아, 임성민 ! 누군가 내게 한국영화계 최고의 미남배우가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고(故) 임성민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남궁원도 잘 생겼지만 임성민이 좀 더 섹시했다. 고교 육상선수 출신의 탄탄하고 매끈한 체격, 그야말로 훤칠한 조각미남의 대명사였던 그는 ‘변강쇠’ 이대근 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후반 토속에로 장르의 반대편에서 치명적인 도시 남자의 ‘지골로’(gigolo)스러운 매력을 뽐냈다. 물론 마흥식 , 이영하 처럼 비슷한 계열의 다른 배우들이 있었지만 역시 그가 가장 섹시했다. 마치 ‘한국의 미키 루크’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섹시함을 과시하며 < 달빛 멜로디 >(1984)에서는 안소영 , < 바람난 도시 >(1984)에서는 이미숙 , < 탄드라의 불 >(1984)에서는 오혜림 , < 무릎과 무릎 사이 >(1984)에서는 이보희 , 그리고 < 색깔있는 남자 >(1985)에서는 무려 오수미 , 오혜림 , 오경아 트리오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즈음, 요즘 한창 잘 나가는 TV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류수영 의 본명인 ‘어남선’처럼 뭔가 수산업을 연상시키는 ‘임관배’라는 본명을 내던진 것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달빛 멜로디 , 무릎과 무릎 사이 , 그리고 장사의 꿈 세월이 흘러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에서 최진실 에게 납치당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도 바로 그였다(당시 최진실의 지시로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무명의 신인배우가 바로 유오성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5년 8월 17일, 어린 딸을 하나 남겨둔 채 간경화 악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사의 찬미 >(1991)에서 윤심덕( 장미희 )과 사랑에 빠진 와세다대학 영문과 학생 김우진으로 출연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을 뽐내며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서서히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렇게 남자배우로서 한창 뻗어 나갈, 불과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한국형 하드보일드 장르가 안착한 지난 몇 년간 멋진 고참 형사나 보스로 출연한 그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본다. 공교롭게도 임성민 은 역시 세상을 뜬 장국영과 1956년생 동갑인데, 그보다 한 살 많은 1955년생 임달화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임성민이 살아있다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헛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황석영 원작, 신승수 감독 < 장사의 꿈 >(1985)은 ‘털보’ 임성민 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씨름 선수 차일봉(임성민)은 서울에 올라와 방황하던 중 돈을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선다. 당연히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다. “어이, 거기 털보! 덩치가 좋구먼. 나랑 같이 일하러 갑시다.” 하지만 공사판의 한 할아버지가 그의 육체가 부러운 듯 점잖은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는다. “힘이란 믿을 게 못 되지. 늙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힘은 별로 쓸모가 없을 거외다. 용이 뭍에 오르면 개미가 덤비는 법이지.” 그러자 일봉은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는 쌓아놓은 벽돌 탑을 단숨에 넘어트리며 장사의 희열에 젖는다. 고향에서는 황소를 독차지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전국 규모의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크게 명함을 내밀 수준이 못 되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더 큰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식의 B무비스러운 고속촬영 판타지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데, 아마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장사의 꿈>이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효과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 털보 임성민 이후 그는 불고기를 사주는 돈 많은 게이( 남포동 )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면서 도시의 삭막한 공기에 눈뜨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지는 에로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되는데, 그 촬영현장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헐벗은 애자( 금보라 )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바지가 부풀어 오른(-_-;) 일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로 된 ‘합’을 맞춰보기도 전에 애자의 기둥서방 마대수( 송경철 )는 애자를 데리고 누드캘린더를 촬영하는 곳으로 휭 떠나버린다. 그래도 일봉의 남다른 체격과 외모 때문인지 곧 두 사람은 음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 부기 나이트 >(1997)의 덕 디글러(마크 왈버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전까지 대머리 중년 남자배우와 뒹굴던 애자 역시 싱싱한 일봉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당연히 최고의 에로배우를 얻은 감독( 정진 ) 역시 신이 난다. 거리로 나간 고다르가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찍었던 똑같은 16밀리 볼렉스 카메라로 골방에서 에로영화를 찍고 있는 처지일지언정,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에로영화에 대해 진지한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별건가, 바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 그중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의 아름다움이 가장 아름답다. 사랑 앞에서는 어떤 가치도 무의미하다. 어서 옷을 벗고 그 폼 나는 육체를 아낌없이 뽐내고 자랑하라!” 급기야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의 야외 로케이션도 감행하게 되는데, 쇠사슬을 두른 ‘타잔’ 임성민 이 쇠사슬을 끊고 하얀 천을 날리며 헐벗은 채 뛰어오는 ‘선녀’ 금보라 를 향해 달려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야성을 되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감독의 하나 마나 한 개소리가 이어지는데 어쨌건 북한산에서 이뤄진 ‘타잔과 선녀의 합궁’이라는 아찔하고 키치적인 동서양의 만남 앞에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순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인류학 입문 >(1966)이 살짝 떠올랐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타잔 임성민 , 선녀 금보라 임성민 도 그렇지만 ‘cute’와 ‘sexy’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금보라 의 매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사의 꿈 >에서 일봉이 과거 시골 읍내를 주름잡던 천하장사였다면 애자는 바닷가 마을의 해녀였다. 그래서 “애자 씨는 너무 차가워요”라는 일봉의 질문에 “어려서부터 해녀로 자라서 피가 차가운가 봐요”라는 나름 그럴듯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차가운 매력은 에로 연기가 서투른 일봉의 연기를 교정하는 데 있어서도 능수능란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라는 충고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에로영화들에서도 깨닫지 못한 최고의 ‘연기론’과 ‘형식미’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그 차가움 속에 서울로 올라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애자의 깊은 슬픔이 묻어나온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친절한 몽타주 역시 가슴을 후벼 판다. “서울은 캄캄한 어둠 속의 동굴과도 같다. 줄곧 어둠 속에서 살았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올 때는 친절하게도 그 건너편에서 시각장애인 두 명이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가고 있다. 암흑과도 같은 도시생활을 시각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B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EBS스러운 몽타주라고나 할까. 또한 서울을 헤매고 다녔다는 말에는 곧장 벌거벗은 채 새벽 명동거리를 질주하는 애자의 싱싱한 뒤태를 보여준다. 정말 충격적인 몽타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김수용 감독의 < 도시로 간 처녀 >(1981)를 비롯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 등으로 깜찍한 신인의 미모를 뽐냈던 그녀는 <장사의 꿈> 이후 < 금달래 >(1986), <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1988) 등에 출연했다.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고 난 다음부터가 문제다. 촬영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대수를 일봉이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 에로영화 촬영장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두 사람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우연히 만난 약장수 태산거사( 김인문 )과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펠리니의 < 길 >(1954)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애처롭고 정감이 넘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복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애자가 유산한 이후 1년 동안 떨어져 지내기로 한 것. 일봉은 남창으로, 애자는 그 문제의 기둥서방을 다시 만난다. 이때부터 영화에서 애자는 사라지고 일봉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뚜쟁이인 방배동 오여사( 김영애 )의 안내로 산속에서 (둘 만의 암호인) 초록색 물통을 든 여사님( 김애경 )을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 뒤부터 산에서도 하고, 호텔에서도 하고, 기차에서도 하고, 아이를 원하는 여자의 대리부 노릇도 한다. 수많은 여사님들에 둘러싸여 자라피도 마시며 승승장구하지만 이내 정력은 고갈되고 만다. 급기야 그는 함께 샤워를 하며 정사를 나누던 한 여사님으로부터 “이거 병신이잖아. 어쩌다 이따위를 보냈지”라는 씁쓸한 환불요구에 직면하는 신세가 된다. 병원의 의사로부터 “몸도 마음도 황폐해졌어요. 좀 쉬어야 합니다”라는 진단까지 받고 보니, 마치 그 모습이 혹독한 연예계 생활에 지쳐 간경화로 쓰러진 현실의 임성민 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아프다. 말하자면 < 장사의 꿈 >은 고 임성민의 레퀴엠처럼 느껴지는 슬픈 에로영화다. 나이트클럽에서 수많은 남자들의 담배 연기에 파묻혀 나체쇼를 하고 있는 애자와 일봉이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 또한 실로 충격적이다. 성인이 되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더랬다. 1980년대 에로영화에 대해 막연한 조소와 냉소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장사의 꿈>은 그야말로 감동의 명편이다. 마지막 장면 임성민 금보라 정진 김영애 감독: 신승수 각본: 신승수 개봉극장: 코리아, 동아 관람인원: 12,601(서울)명
정씨( 김진규 )와 노영달( 백일섭 )과 백화( 문숙 ). 하얀 눈 위에서 만난 세 사람은 서로 아웅다웅 하면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 삼포 가는 길 >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겐 인물들에 관한 영화였다. 소설 속 글로 표현된 내용들이 인물들의 구어체 대사로 표현되면서 생동감있는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때문에 더욱 리얼하게 느껴졌고, 시대의 아픔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상처가 가슴 깊게 각인된 영화였다. 특히 백화라는 인물은 보기 드물게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작부의 포스를 느끼게 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들에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화는 갓 스무살이지만 거친 풍파 속에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화류계 여자의 강한 풍모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혹 남자의 완력이 가해질라치면 익살스런 애교로 남자의 너털 웃음을 끌어내는 능숙함은 팜므파탈을 흉내내는 여느 캐릭터가 보여줄 수 없는 담백함을 표현한다. 백화를 연기한 문숙 의 연기 또한 두말할 필요없이 발군이라 할만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이만희 감독과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 그렇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독과 연기자가 서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작품에 얼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녀가 내뱉는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요?''''''''''''''''라는 말에는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이 묻어나며, 개인의 힘으로 어쩔 도리없는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무소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정씨의 표정 역시 선함과 동시에 묵직함과 단호함을 품은 얼굴이다. 상대의 말투와 표정 만으로 살아온 과정을 짚어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백화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장면에서는 백화 스스로도 그를 아버지라 여길 정도이며, 실제 아버지라고 느낄만한 풍모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거칠게 살아온 뜨내기 노동자이지만 남의 장례식장에서 태연하게 울어제낄 만큼 넉살좋은 뻔뻔함과 과거에 잘나갔다고 허풍을 떠는 영달 역시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와 간여림을 갖고 있다. 백화와의 하룻밤 후 살림을 차리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 백화를 떠나보내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나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인한 노동자이지만 남자로서는 용기없는 모습은 그를 다중적 캐릭터로 만든다. 이렇게 뜨내기 세 인물이 커다란 사건없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영화에선 이렇게 존재 자체에서 절실함이 묻어있는 캐릭터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매우 아쉽다. 물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원작의 힘에 빚진 부분이 있겠지만, < 삼포 가는 길 >은 문학적 인물을 영화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연기 이외에도 < 삼포 가는 길 >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광활한 눈밭을 걸어가는 세 인물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잡아낸 장면에서는 갈 곳 없는 뜨내기 군상들의 고립감이 드러난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이 머물 곳은 그 넓은 벌판에 아무 곳도 없다. 백화와 헤어졌다가 흉가에서 다시 만난 세 인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는 장면에서는 훈훈함과 온화함. 갈등과 화해 속에 드러나는 상처와 고독이 보여진다. 백화와 영달이 싸울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쥐불놀이 불빛의 은은함은 절대 꺼질 것 같지 않은 민초들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한적한 산골이지만 마을 곳곳은 이미 공사중인 장소가 많다. 1970년대 불어닥치기 시작한 개발의 광풍이 영화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영달이 바위산을 뚫는 공사현장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장면이다. 1970년대 경제개발의 가운데는 이런 뜨내기들의 강인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위산 위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실루엣은 잠깐이지만 노동의 숭고함과 노동자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달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플레쉬 백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상대가 듣는 내용과 반대되는 영달의 회상이 겹쳐지면서 영달의 상황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또한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도 세련되고 현란한데, 음악으로 감정을 이어가다가도 문득 사운드를 무음으로 처리하면서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울림을 크게 만든다. 사운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물의 상황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손쉽게 드러내는 방법도 당시로는 흔치 않은 기법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의 후반작업 중에 간경변으로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병원에서도 편집실을 오가면서 영화의 완성을 위해 애썼다고 한다. 영화는 그가 명을 달리하고 한달 후에 극장에서 개봉했다. 때문에 다소 미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이 있다. 백화는 살림을 차리길 바라고, 영달은 빈털터리인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기차역 장면은 정지화면처럼 촬영됐다. 기다리는 백화의 얼굴. 기차표를 전해주는 정씨와 영달의 손. 멈춘 정씨의 얼굴. 울먹이는 노영달. 하지만 영화 속 장면은 멈추지 않고 어색한 테이크로 잡혀있다. 결정적 장면들이 정지화면으로 잡혔다면 영화의 울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최근 복원된 엔딩 버전에서 정씨가 탄 버스가 남해대교를 건넌다. 백화가 기차역에서 다방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만희 감독의 디렉터스 컷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세 명의 주연배우들이 펼치는 연기의 향연에 있다. 삶의 흔적을 느끼게 만드는 구어체의 대사와 인물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생성시킨다. 눈밭을 걷거나 누워있는 세 인물을 잡은 롱 샷들은 설원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 인물을 단단히 묶어주는 기능을 한다. 넓은 벌판에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작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허허롭게 담아낸다. 눈길 여행을 통해 뭉쳤던 세 인물은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의 여행은 강한 삶의 의지를 간직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