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 감독
- 맷 샤크먼
- 제작년도
- 2025
- 출연
- 페드로 파스칼, 바네사 커비, 조셉 퀸, 에본 모스-바크라크, 랄프 아이네슨, 줄리아 가너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을 처음 발견한 영화는 2013년작 < 흉악-어느 사형수의 고발The Devil's Path >이다. 연쇄살인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가 형무소에 찾아온 기자에게 비밀을 말한다. 드러나지 않은 범죄가 있고, 다른 범인도 있다는 것. 세상에는 수많은 범죄가 있고, 다양한 악인이 있다. 그중에는 정말 끔찍한, 사악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흉악한 인간과 범죄도 있다. <흉악>은 기자의 시선을 통해, 인간의 가장 어두운 바닥까지 파고 들어간다. 인간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질문하는 영화였다. 2017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을 보게 되었다. 45주년을 맞아 기획한 로망포르노 리부트 작품의 하나인 < 암고양이들Dawn of the felines >(2016)의 무대 인사였다. 로망포르노 리부트는 소노 시온과 시오타 아키히코 등 일선에서 활발하게 영화를 찍는 감독들에게 핑크영화 연출을 의뢰한 야심 찬 기획이었다. <암고양이들>은 이케부쿠로의 유흥 업소에서 일하는 미혼모, 주부 등 세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다. <암고양이들>은 다나카 노보루의 1972년작 로망포르노 < 암고양이들의 밤 Night of the felines >의 리메이크작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말부터 시작된 니카츠 로망포르노의 거장이라면 구마시로 다츠미가 해외에서 유명하지만, 일본 내에서는 < 실록 아베 사다A Woman Called Sada Abe >(1975)와 < 유부녀 집단폭행치사사건 Rape and death of a housewife >(1978)의 다나카 노보루도 상당히 지명도가 높다. 작년 로테르담 영화제에서는 다나카 노보루의 <암고양이들의 밤>과 시라이시 카즈야의 <암고양이들>을 이어서 상영했다. <암고양이들의 밤>은 격동의 시절인 1972년의 영화답게, 관능적이고 도발적인 여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여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관대한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흉악>을 워낙 좋아했던 터라 시라이시 카즈야가 핑크영화를 만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암고양이들>은 거리에서 떠도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건조하면서도 사회적인 이슈를 파고들며 잘 그려냈다. 이력을 찾아보니, 북해도 출신인 시라이시 카즈야는 핑크영화의 전설인 와카마츠 코지에게 사사했다고 나온다. 로망 포르노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된 시라이시 감독의 신작 < 아무것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Dare to stop us> (2018)는 와카마츠 코지 감독 사후 흔들렸던 와카마츠 프로(덕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영화다. <흉악>과 <암고양이들>의 시라이시 카즈야 감독은 반드시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하고 싶은 감독이었다. 작년, 누마타 마호카루의 소설을 각색한 < 이름 없는 새Birds without names >(2017)는 시기가 맞지 않아 포기했다. 올해는 < 고독한 늑대의 피The blood of wolves >(2018)와 < 써니를 찾아서Sunny / 32 >(2018), 2편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시라이시 감독의 초청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독한 늑대의 피>에 비하면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써니를 찾아서>는 인터넷 공간이 현실 이상의 리얼리티를 갖게 된 우리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B급 감성으로 포착한 흥미로운 영화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히로시마 인근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야쿠자 조직 간 항쟁을 그린 영화다. 히로시마, 라고 하면 후카사쿠 긴지의 < 의리없는 전쟁 Battles without honor and humanity >이 떠오른다. <의리 없는 전쟁> 시리즈의 무대가 바로 히로시마였다. 1973년 작인 <의리 없는 전쟁>은 일본 야쿠자물을 혁신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야쿠자물은 소위 ‘협객물’이라 불리기도 했다. 사회의 음지에 있지만, 정의와 의리를 지키는 아웃사이더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의리 없는 전쟁>은 협객으로서의 야쿠자를 전면 부정한다. 말로는 의리를 외치지만 야비한 술수와 음모를 꾸미고,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닌 듯 떠벌이지만 사실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야쿠자의 진짜 얼굴을 그린 것이다. 치사하고 악랄한 범죄자로서의 야쿠자를 실록-다큐멘터리 스타일로 그려낸 <의리 없는 전쟁>은 야쿠자물의 전형을 바꾸었고,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후카사쿠 긴지는 〈의리없는 전쟁〉 시리즈와 〈 의리의 무덤Graveyard of honor 〉(19775), 〈 도베르만 형사Detective Doberman 〉(1977), < 배틀 로얄Battle royale >(2000) 등의 걸작을 만들어내며 거장으로 평가받았다. 의리없는 전쟁 <의리 없는 전쟁>의 영향을 받은 것은 영화 <고독한 늑대의 피>만이 아니다. 원작 소설부터 영향권에 있었다. 1968년생이며 기자로 일했던 유즈키 유코는 2008년 『임상 진리』를 발표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마흔 살이었다.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던 유즈키는 2015년 『고독한 늑대의 피』를 출간한다. 후카사쿠 긴지의 영화 〈의리없는 전쟁〉과 아사다 데쓰야의 소설 『마작방랑기』를 좋아했고, 이런 풍으로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 쓰고 싶었다던 꿈을 실현한 것이다. 치밀한 취재를 통해 『고독한 늑대의 피』는 21세기에 걸맞은 경찰, 야쿠자 소설의 걸작이 되었다. 여성인 유즈키 유코는 <의리 없는 전쟁>을 너무나 좋아하여 비슷한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 싶었고 『고독한 늑대의 피』를 썼다. 그러니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의리 없는 전쟁>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설의 구성도 〈의리없는 전쟁〉의 ‘실록’ 스타일을 연상시킨다. 각 장마다 누군가의 보고서가 등장하고, 지워진 문장들이 있다. 지워진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보고서를 지운 인물이 누구인지는 소설의 마지막에 드러난다. 지워진 상황들은 각 장마다 드러난다. 누가 무엇을 지운 것일까,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기는 한데, 소설을 읽다 보면 궁금해할 여유가 없다. 상황들이 너무나 긴박하고, 인물들이 강렬하다. “맞아, 난 미쳤어. 수사를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거야.”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잘 알고 있는 오가미형사의 미래가 궁금해서 마지막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게 된다. 영화 〈고독한 늑대의 피〉도 충실하게 실록 스타일을 따른다. 잔인한 폭력이 나오는 첫 장면이 지나고, 오프닝은 슬라이드 사진의 바랜 듯한 화면으로 바뀐다. 야쿠자 조직과 인물들에 대한 나레이션이 이어지면서 배우와 스태프의 이름이 세로로 박힌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폭력단 대책법이 나오기 전 1988년. 야쿠자와 결탁한 부패 형사인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질 형사가 된 것인지 모호한 오가미 형사가 주인공이다. 신입 형사인 히오카는 오가미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히로시마 인근의 구레하라시에서 벌어지는 야쿠자 항쟁을 막으려는 오가미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야쿠자물이지만 형사가 주인공이다. 형사물과 야쿠자물은 같은 류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범죄의 세계를 어떤 시점으로, 어떤 스타일로 그려지는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는 종이 한 장이다. 아니 동전의 양면일 수도 있다. 오가미 형사도 그렇다. 그가 악인인지, 선인인지 중반까지 종잡을 수가 없다. 범죄영화에 흔히 나오는, 악과 싸우다 결국 닮아가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형사가 악이 되어가는 이유는 잡아야 하는 악당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지 알아야 단서를 포착하고, 증거를 찾아낼 수 있으니까 닮아간다. 하지만 닮아가는 것만으로 인간이 변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얕다. 처음에는 히오카도 오가미가 야쿠자를 닮아 변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가미는 고독한 늑대다. 철저하게 무리를 지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늑대라는 짐승. 그렇기에 무리에서 밀려난 늑대는 더욱 강인해져야만 한다. 투철한 각오를 해야만 살아남는다. 오가미는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자신의 원칙을 세웠다. 무리의 규칙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야만 하는 규범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유는, 경찰도 야쿠자와 다를 게 없기 때문에. 야비하고 술수를 앞세우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짓밟는다. 오가미는 야쿠자만이 아니라 동료인 경찰과도 싸워야 한다. 자신의 영역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한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오가미라는 고독한 늑대의 일생을 히오카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매료될 수밖에 없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아웃트로의 처절한 싸움을 그려낸다. <고독한 늑대의 피>는 시종일관 에너지가 들끓는다. <흉악>을 보았을 때부터, 시라이시 카즈야의 영화는 늘 그랬다. 결코 관조하지 않고, 결코 무르지 않다. 강인하게, 고독한 늑대처럼 이 세상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싸우고 있다. 소설과는 다르게,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각색을 통해 만들어진 시라이시의 고유한 장면이다. 격렬한 클라이맥스를 보고 있으면 시라이시 카즈야의 영화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일본 영화의 현재를 보고 싶다면 반드시 봐야 할 영화가 <고독한 늑대의 피>다.
배우 최은희 의 이력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화려하다. 1943년 연극무대로 데뷔한 최은희는 1947년 < 새로운 맹서 >( 신경균 )로 스크린에 데뷔한 후 1950~196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부동의 ‘스타’였다. 따라서 박남옥 , 홍은원 에 이은 한국영화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라는 칭호는 배우 최은희의 화려한 명성을 장식하는 ‘특별한 이력’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라는 위치도 그러하거니와 홍은원 감독의 표현처럼 “「신필름」이라는 대 메이커에다 손발이 척척 맞는 스탶들을 거느리고 진행을 했”고 박남옥 감독이나 홍은원 감독의 “고통 같은 것은 느낄 필요도 없이 여유만만하게 작품을 탄생시켰” 1) 기에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감독 데뷔 당시에도 하락하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한 ‘선전효과’로 크레디트에 이름만 올린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과 비판이 따라붙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최은희는 ‘인기의 하락’과는 선을 긋되 자의보다는 신상옥 감독의 꾸준한 권유로 연출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연출 배경에 대해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때로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공부를 하기 위해 결심했다는 동기를 부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데뷔작인 < 민며느리 >(1965)를 시작으로 < 공주님의 짝사랑 >(1967), < 총각선생 >(1972)까지 ‘감독 최은희’보다는 ‘스타 최은희의 감독작’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최은희 자신은 활동 당시 특별한 감독의 변을 내놓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회고에서도 ‘ 신상옥 감독의 권유’가 가장 큰 동기였다고 재차 밝혔다. 2) “메가폰을 든 스타 최은희” 3) 에 대한 시선과 평가는 최은희 개인보다는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과 신필름 그리고 스타 최은희의 이미지’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속에서 감독 최은희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감독 최은희는 신필름의 위기와 변화 국면마다 등장했다. <민며느리>가 발표된 1965년 한국영화계는 200여 편에 가까운 제작편수, 청춘멜로드라마‧스릴러액션‧만주활극액션 등 다양한 장르 영화들의 인기,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으로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필름의 부족, 컬러영화와 와이드스크린의 도입 그리고 물가 상승에 따른 제작비 증가로 영화산업 내부에서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또한 배급‧상영 환경에 비해 과잉 생산되는 제작편수로 한국영화 내부의 경쟁은 더욱 더 치열해진데다 <007> 등 스파이 물을 중심으로 한 외국영화와의 경쟁력에서도 뒤처지는 형편이었다. < 성춘향 >(신상옥, 1961) 이후 승승장구하던 ‘대 메이커’ 신필름 조차 부채로 위기에 처한 것이 바로 1960년대 중반 한국영화계의 상황이었다. 신필름은 경영 위기에 처하자 홍콩과의 합작영화 제작, 문예영화 제작, 인기 드라마의 영화화 등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흥행을 위한 홍보 아이디어로 떠오른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최은희의 감독 데뷔였다. ‘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신필름의 시스템 하에서 안전한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신필름은 최은희의 스타 이미지를 활용할 수 있는 사극 장르 중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이서구 원작의 TV 연속극 <민며느리>를 데뷔작으로 선택했다. 순종적인 성품의 민며느리가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꼬마 신랑과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는 전작인 < 벙어리 삼룡 >(신상옥, 1964)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둔 최은희의 고전적인 이미지를 이어갈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며느리>는 ‘인기 드라마를 영화화해 추석에 개봉하는 최은희 감독‧주연의 신파 사극’의 모습을 갖추고 ‘최은희의 감독 데뷔’에 홍보 포커스를 맞췄다. 원작의 이름값과 신필름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한다면 영화의 제작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인기 드라마 원작과 감독 최은희에 중심을 두는 대신 주‧조연 배우진은 상대역인 아역 장원배 외에 황정순 , 한은진 , 박노식 , 김희갑 , 서영춘 으로 최소화하고 단역배우들은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해 제작규모를 줄였다. 결과적으로 톱스타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큰 화제가 되어 <민며느리>는 1965년 추석 대목 프로 12편(한국영화 6편, 외국영화 6편)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기대한 ‘선전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아 흥행에서는 평균 수준인 5만 여명을 동원하며 현상 유지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최은희의 감독 데뷔는 간판스타 최은희의 건재를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기획에 도전하는 신필름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단 한 번의 외유로 끝날 줄 알았던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1967년 <공주님의 짝사랑>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 연출작 역시 신필름이 직면한 새로운 위기 상황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했다. 신필름은 1966년 안양촬영소를 인수하며 명실상부한 메이저 스튜디오의 모습을 갖췄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거대한 스튜디오의 운영과 영화법에 따른 제작쿼터 달성은 메이저 영화사인 신필름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필름이 제작 편수를 늘리기 위해 설립한 자회사인 안양필름이 <공주님의 짝사랑>의 제작을 맡았다. 신필름은 새롭게 출발한 촬영소와 영화사 그리고 신필름 연기실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공주님의 짝사랑>을 제작하며 다시 한 번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를 활용했다. 따라서 <공주님의 짝사랑>은 <민며느리>에 이어 ‘신필름의 건재와 새로운 출발’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작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며느리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공주님의 짝사랑> 역시 사극 영화였지만 데뷔작인 <민며느리>와는 차별화된 지점을 보여주었다. 제목 그대로 짝사랑에 빠진 공주님이 적극적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과정을 소동극으로 <공주님의 짝사랑>은 온전히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에 기대었던 <민며느리>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 번째는 선택과 집중을 들 수 있다. 신필름은 사극 장르 안에서 신파보다는 로맨틱코미디를 채택하고 주연배우에도 떠오르는 스타였던 남정임을 캐스팅해 보다 젊은 관객을 흥행 타깃으로 삼았다. 최은희는 배우의 역할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감독의 역할만 맡았다. 두 번째 변화는 제작규모에 있었다. 궁중사극이라는 배경을 활용한 다양한 로케이션과 스튜디오 촬영, 화려한 의상과 소품, 신필름 연기실 연구생들을 활용한 군중 신 등에서 <민며느리>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스케일이 드러났다. <공주님의 짝사랑>과 <민며느리>를 비교하면 2년 사이 규모가 성장한 신필름의 제작 시스템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화려한 의상과 소품이 돋보이는 다양한 군중 신들에서는 한홍 합작영화 < 달기 >( 최인현 ‧악풍, 1964)와 < 대폭군 >( 임원식 , 1966)의 한국 촬영을 계기로 대형 사극영화의 제작 노하우가 쌓였다는 것을 증명했다. 영화의 규모와는 별개로 <공주님의 짝사랑>의 홍보는 여전히 ‘스타 최은희’에 포커스를 맞췄다. 하지만 <민며느리>가 감독 못지않게 주연배우인 최은희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공주님의 짝사랑>은 주연을 맡은 신예 남정임 , 김광수 와 발랄하고 이색적인 러브 스토리를 강조하며 젊은 관객에게 어필했다. 대신 최은희라는 브랜드는 ‘제2회 작품’을 발표한 전문 감독으로 자리했다. ‘감독 최은희’는 남정임 외에도 한은진 , 조미령 , 전계현 , 강미애 등의 스타진과 함께 이 영화를 ‘여성영화’로 홍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신필름은 개봉 전 ‘여류인사 초청 시사회’ 4) 를 개최해 <공주님의 짝사랑>이 여성 감독과 여성 배우 중심으로 제작된 영화라는 것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스타 최은희의 브랜드를 유지하는 동시에 젊고 새로운 이미지를 내세워 관객층을 확산하려던 신필름의 기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총각선생 촬영 중인 최은희 감독 신필름이 내리막길에 있던 1972년 최은희는 세 번째 작품 < 총각선생 >을 연출했다. 신일룡 , 나오미 가 주연한 이 영화는 최은희가 감독한 첫 번째 현대물이었으며, 제작도 신필름이 아닌 새한필름이 맡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홍보는 ‘스타 최은희의 제3회 감독작’에 맞춰졌다. 한 가지 덧붙여진 점이 있다면 앞 선 두 편의 영화에서 신필름 연기실의 연구생들을 동원했던 것처럼 <총각선생> 역시 최은희가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안양영화예술고등학교의 학생들을 총출연시키며 감독 최은희 뿐만이 아니라 연기를 지도하는 ‘교육자 최은희’의 이미지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총각선생>은 2만 여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실패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관계가 파국을 맞고, 그들의 납북사건이 일어나며 남한에서 최은희의 감독 이력은 끝을 맺었다. 그리고 1984년 북한에서 발표한 <약속>까지, 최은희의 감독작은 총 4편으로 마무리되었다. 감독 최은희라는 브랜드가 비록 신필름이라는 시스템과 기획에서 탄생되었고, 최은희 자신조차 연출 배경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긴 했지만 제작 상황과 작품의 캐릭터를 통해서 최은희 개인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감독 데뷔를 앞둔 당시 최은희는 배우로서 여러 가지 편견과 한계에 직면해 있었다. ‘선전효과, 내리막길에 들어선 인기, 나이’ 등이 ‘감독 전향’의 이유로 제기되었다.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으로 시작된 청춘영화의 붐과 고은아 , 남정임, 문희 등 대형급 신인 배우들의 등장은 한국영화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신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우 최은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새롭게 대두된 젊은 관객들에게 최은희는 여전히 ‘성춘향’을 상징하는 대 배우였을지는 몰라도 유행을 주도하는 청춘스타는 아니었다. 신필름에도 최은희라는 스타 브랜드가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대중에게 고착된 지고지순한 여인상으로서 최은희의 이미지는 단점이 되기도 했다. 최은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연기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없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녀는 “천편일률적으로 남편에 순종하고 어떠한 고생도 감수하는 주체성이 없는 단순한 도덕적인 여인”을 벗어나 “극한 상황에 처한 적나라한 여성의 역할” 5) 을 꿈꿨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감독이라는 길은 어쩌면 연기에 대한 갈망을 풀어낼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화를 통해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배우이자 감독 최은희의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민며느리>의 경우 비록 순종적인 민며느리라는 캐릭터의 한계가 있지만 세밀한 설정과 연기를 통해 마냥 수동적이지만은 않은 역할을 만들어냈다. 황정순과 한은진의 캐릭터에도 적극적인 여성상을 녹여냄으로써 신파영화의 어머니상에 변주를 주었다. <공주님의 짝사랑>의 경우 궁중법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쩌면 배우 최은희가 꿈꾸던 또 다른 자아를 표출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성과의 대등한 관계를 위해 스스로 공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영화의 결말은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나마 최은희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주체성 있는 적극적인 여성” 6) 을 구현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1) 홍은원, 「한국의 여류영화감독들-한국은 여류영화감독의 선진국」, 『영화』, 1981년 1월호, 영화진흥공사. 2)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강의」, 2000년 3월 24일. 3)「메가폰을 든 최은희」, 『주부생활』, 1965년 10월호, 학원사. 4) 『경향신문』 , 1967년 7월 19일자 5면. 5) 「나의 순정파 연기는 모든 여인상의 모태」, 『주부생활』, 1966년 1월호, 학원사. 6) 위의 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