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함
- 감독
- 송인정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안진희, 유민자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솔직히 내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건 내 돈과 시간, 자원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영화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개봉작을 부지런히 보러 다녀야 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고전 영화도 꾸준히 찾아봐야 하며 영화 관련 이론이나 최근 담론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한 달에 청탁 받은 원고를 써서 받는 돈이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드는 돈보다 더 많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 열리는 시사회에 가지 못해 일반 관객과 똑같이 직접 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하며 OTT 콘텐츠 구독료와 영화 관련 서적, 강의에도 돈을 쓴다. 나는 궁금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한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거나 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학생이었다. 나처럼 영화와 관련 없는 본업을 갖고서 퇴근 후나 주말에 짬을 내어 활동을 이어가는 평론가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영화를 보고 글을 쓰나? 비정규직 회사원과 프리랜서 생활을 번갈아 전전하며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30대 여자인 내게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의 평론을 볼 때마다 나와 시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 중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것들이 많고, 반면 주목받지 못한 영화 중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저평가 받고 그대로 묻힌 건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과도 기존의 평론가들과도 시선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짚고, 내가 영화 안에서 다르게 포착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영화의 뛰어남을 형식 중심으로만 얘기할 때의 거북함도 있다. 한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한 훌륭한 형식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드러나 있는 노골적인 혐오나 비윤리성을 아예 못 본척하고 언급하지 않는 비평들이 불편했다.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평을 한다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쩔 때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형식과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온전히 대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가 그 생경함으로 인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던 타자의 시선에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은 기존 영화의 역사와 문법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는 지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 중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캄보디아계 프랑스 이민 2세대인 데이비 추 감독의 < 리턴 투 서울 >(2022) 이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에 의해 갓난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성 ‘프레디’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겪는 혼란들을 불균질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부모 세대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외국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입양되어 외국인 부모 밑에서 평생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감각은 그 어떤 한국인과도, 프랑스인과도, 또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와도 다르고, 프레디의 부모 찾기 여정은 < 라이스보이 슬립스 >(앤소니 심, 2022)의 경우처럼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한국의 친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동현(이든 황)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 입양아, 한국계 프랑스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소수자성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감각의 특수함이 긴 시간 안에서 파편적으로 묘사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작품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영화 중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영화들이 많다. 작년에는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이 그랬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보통 그런 영화는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도 낳아야 한다’라는 당위성 안에서 아이 낳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색채로 꾸미거나 또는 아이를 지울 수 없거나 결국 낳게 되어서 불행에 휩싸이는 여성의 삶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그런 이분법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고 어떤 비난에 취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낸 결말에 힘이 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 절해고도 >(김미영, 2021)에서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과 감각을 마주했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 묘사가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에 영향받는 등장인물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간과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거리감도 범상치 않았다. 계절감을 갖는 자연을 풍부하게 담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인 윤철( 박종환 )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자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한다. 그러던 중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인 지나( 이연 )가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스님이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윤철은 그가 갖지 못했던 재능을 갖고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딸을 지켜보며 변화한다. 속세에 있을 때 서로 가시 돋친 날카로운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부녀는 딸이 행자가 되고 난 후 예우를 하고 존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딸의 삶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면서 윤철 자신도 변화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핸드헬드에 롱테이크로 찍혀 불안감을 자아내지만 지나가 도맹 행자가 되고 난 뒤의 후반부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고정샷으로 차분히 지켜본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한때 관계가 틀어졌던 애인과의 관계 또한 변한다. 윤철은 암이 재발해 죽어가는 전 연인을 바라는 바 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고 또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스피스로 가는 선택 또한 존중해 준다. <절해고도>를 만든 김미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십여 년 동안 연출부로 활동했다. 이번 작품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과 일했던 강창호 미술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이다. < 안개마을 >(임권택, 1982)을 레퍼런스로 해서 자연 안에서 인물이 하나의 요소로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같은 불교영화에서 다뤘던 주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여성을 타자화했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인물을 주체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주체와 그를 현혹하는 타자의 이분법을 벗어나면 영화의 정서와 스토리의 방향성, 미학 등도 다 함께 바뀌게 된다. 한국 영화의 거장 아래에서 받은 영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선에서 이뤄진 이 전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의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김미영, 2021) 중 한 편의 영화엔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담겨있다. 무엇을 담을 것이고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간과 빛으로 그 장면을 구성할 것인가? 이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더해 살아온 삶과 사유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거기엔 단순히 영화의 역사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과하는 삶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감각도 필요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삶을 삶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화를 비슷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영화에 대한 비슷한 평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감상들은 그것이 전문적인 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서 오는 삶의 감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의견은 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넓히고,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등단한 후에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는 내 삶과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에 취미로 영화 비평을 쓰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평론을 쓰고 있다. 주류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의 흥행이나 홍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탁이 들어와도 본업에 치여 마감을 어기기 일쑤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서는 에둘러서라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영화평론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자격을 여러모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등단한 후 뻔뻔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이런 자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박예지(영화평론가) l 소수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쓴다. 2022 영화의 전당 영화평론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 영화비평 구독 메일링 서비스 <씨네픽션> 운영.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하길종 의 < 바보들의 행진 >(1975)은 영화가 겪어야 했던 검열과 수난의 역사가 많이 언급되는 작품이다. 각본 단계에서부터 극장에 걸리기까지 5차례에 걸친 사전검열에 의해 이야기가 마구잡이로 난도질 되었으며, 다섯 곳 장면 삭제, 네 곳 장면 길이 단축, 세 개 대사 삭제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바보들의 행진>의 현재 남아있는 네거티브 필름의 분량은 102분. 검열을 받기 위해 제출할 당시의 공식적인 러닝타임 117분에서 무려 15분이 잘려나간 것이다. 이에 감독은 심의를 통과한 직후, 삭제된 필름을 다시 붙여 원래의 판본을 국도극장에 걸었지만 이 또한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걸려들었다. 여파는 여기서 그치지 않아 송창식의 ‘왜 불러’와 영철의 테마곡인 ‘고래사냥’은 공연예술윤리위원회에 의해 금지곡 판정을 받고 음원 판매도 금지당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서울 관객만 잡아 15만에 달하는, 당시 기준에서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감독 본인은 자신의 대표작으로 < 수절 >(1973)을 꼽았지만) 하길종 의 대표작으로 한국 영화사에 남게 되었다. 각본과 기록을 통해 더듬어 원형을 유추해볼 따름이지만, 남아있는 판본만으로도 < 바보들의 행진 >은 걸작이다. 정부의 탄압과 대중의 호응, 저주와 찬사를 오가는 이 양가적인 반응은 이 작품이 청춘드라마의 표면을 넘어 시대의 정곡을 관통하는 비판의식을 담고 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지식인 감독 하길종의 예민한 감수성은 그렇게 당대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영화에 투영하며 활로를 찾지 못한 청춘들의 답답한 심경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풍속사적 관점에서 보는 70년대의 한국 일차적으로 < 바보들의 행진 >은 그 당시의 풍속을 조명하는 미시사적 자료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밤 12시가 넘으면 통행금지에 걸려 돌아다니지 못하고, 경찰만으로는 부족한 치안력을 보조하던 방범대원들이 통금 위반자를 적발해 파출소에 넘기는가 하면, 막 성년이 된 20세에 바로 군대로 징병 되기 위해 징병검사관의 눈앞에 거의 발가벗겨진 채 서야 했고, 미풍양속을 지킨다는 명목 하에 경찰이 자를 들고 일정길이 이상의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행동, 거취의 자유도 제약되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침해가 일상적으로 치러지고 그걸 묵묵히 감수해내야 했던 억압의 시대. 이 작품에서 하길종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보’란 무기력하게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스스로 ‘바보-되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청춘의 모습을 잘 함축하는 표현인 것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는 1970년대라는 시대의 생경함. < 바보들의 행진 >은 병태, 영철, 영자 등 대학생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당시 청춘들이 처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을 조명한다. 그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생맥주와 통기타, 청바지로 상징되는 청춘 문화의 기풍이 그나마 숨 쉴 틈을 열어주었고, 당시로선 충격적이었던 여성의 흡연이 자유와 반항, 파격을 추구하던 신여성의 아비투스(habitus)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군사적 근대화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회의 기저에서는 은연중에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경기 응원 간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실을 나가는 장면은, 본래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수업을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신체 길들이기 - 파시즘적 상황과 산업전사의 탄생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저작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적 인간의 탄생에 대한 계몽주의적 환상을 깨부순다.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합리적 이성, 주체적 개인을 키워내는 관념적 계몽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이란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신체를 길들이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수동적 인간형을 찍어내고자 한 유물론적 과정의 산물이 근대적 인간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의 기계화, 규율과 감시의 시선, 그리고 처벌을 통해 일정한 패턴의 행동양식을 강제하고 몸에 각인시킴으로써 국가 권력의 필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표준적 신체를 만들어내고자 한 것이 산업혁명 이래 20세기 서구의 근대화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개발도상국에선 군사주의-전체주의적인 성격을 동반하면서 더욱 강압적인 형태로 발현되었다. < 바보들의 행진 >은 징병 신체검사를 받는 대학생들의 행렬을 비추는 걸로 막을 연다. 징병검사관 앞에 발가벗겨지고 일사불란하게 구보하는 학생들의 모습. 체제에 적응하기 적합한 신체‘인가-아닌가’(합격/불합격)의 여부를 선별하는 일종의 입사식.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전통 없이 근대화를 경험한 국가의 군국주의적 사회상이 단적으로 드러낸다. 1930년대 독일과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에게 군대식 훈육을 강요하고 획일적으로 주입한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은 1970년대 한국에 고스란히 계승된 것이다. 군대가 아닌 민간에서도 ‘감시와 처벌’의 시선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위협하는 경찰, 캠퍼스 안에서 담배를 태운다며 학생의 뺨을 때리는 교수 등. 시위가 없더라도 경찰과 공안조직의 존재가 촘촘히 짜인 그물처럼 곳곳에 퍼져 개인의 신체를 ‘관리’하고 있고, 그런 갖가지 교정을 거쳐 ‘철이 든’ 한국인은 ‘군국주의-자본주의’ 시스템의 요구에 맞춰 군대(‘반공투사’)와 산업현장(‘산업전사’)을 떠받치는 부속이 되었다. 일사불란하게 작동하는 기계적인 신체의 생산. 이러한 군사적 훈육 과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반사회분자로 몰려 탄압과 재사회화의 대상이 되었다. < 바보들의 행진 >에서 징병검사에 불합격하고 철학과 출신으로 장래가 불투명했던 몽상가 영철의 자살은 한국적 근대화가 지닌 획일적 성격, 미세한 탈주와 일탈의 여지조차 빈틈없이 봉쇄하고 포획하려는 권력의 욕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극 중 영자가 빗대듯 ‘동물원 우리의 사슴’과 같았던 70년대의 청춘들. <바보들의 행진>은 통제의 손길이 잦았던 시대를 산 억눌린 청춘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동시에, (‘군관민일체(軍官民一體)’라는 표현처럼) 국가와 민간이 하나 되어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신체에서부터 파괴하고 명령에 복종하는 기계적 신체로 재구성하고자 했던, 군국주의의 맥락에서 산업화를 달성하려 했던 한국적 근대화의 특질을 고발하는 메타 텍스트가 된다.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UCLA에 입학해 영화를 전공한 유학파 출신이었다. 재학 시절 만든 단편 < 병사의 제전 >(1969)으로 MGM이 미국 전체 영화학과 학생 4명에게만 주는 메이어그랜드상을 받았으며,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된 상황이었음에도 귀국(이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귀국을 만류했다는 설이 있다)하여 38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7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가적 행보는 매번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검열로 훼손되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 수절 >의 경우 20분이나 잘려나갔고 < 바보들의 행진 >의 삭제장면들은 반체제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사유로 당국에 필름을 압수당한 뒤 불태워져 복구가 불가능하다. 인간성을 검열하는 체제를 비판한 영화 또한 검열의 손길에 짓밟히는, 이 지독한 비극적 아이러니. 권력은 자의적인 잣대로 영화를 검열하고 훼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로 시간을 봉인한 채 살아남아 역사를 증언하는 것으로 당대에 복수한다. <바보들의 행진>은 지금도 여전히, 10월 유신체제 시절 한국의 사회상에 대한 생생한 영화적 증언으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