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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서울황제
- 감독
- 선우완, 장선우
- 제작년도
- 1986
- 출연
- 한여송, 김수겸, 이승희, 신정아, 이봉규, 정승환, 이경훈, 이형석, 곽건, 최일, 조민화, 황치영, 추봉, 오수미, 안용남, 나한일, 강석란, 박상조, 김길호, 나기수, 국정환, 박재홍, 조항룡, 맹상훈, 김화란, 정은숙, 정성모, 이희성, 전유성, 이춘연, 임상호, 박광수, 조재홍, 이석구, 장효선, 김정훈, 신광필, 이덕신, 박예숙, 손전, 김형진, 김명곤, 이영호
수집자료
서울텍사스 서울공주
- 필름규격
- 35mm
- 필름종류
- ON
- 색채
- 컬러
서울텍사스 서울공주
- 필름규격
- 35mm
- 필름종류
- RP
- 색채
- 컬러
서울텍사스 서울공주
- 필름규격
- 35mm
- 필름종류
- RP
- 색채
- 컬러
서울연애 GV
- 매체규격
- DV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서울에서 잘나가는 女子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서울역
- 매체규격
- Blu-ray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서울공보 제143호 제작신고 및 검열신청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서울공보31호 상영 승인 요청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서울공보제30호 상영승인 요청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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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칼럼][내 마음대로 각색해보는 영미문학 프로젝트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혹시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부드럽게 묻는 미국인 교수의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가 강의실 연단에 서서 들어 보인 그 책을 「벙어리」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먼저 보았다. 열아홉 살, 진로상담을 하고 난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담임선생이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며 함께 건넨 선물이었다. 손때가 많이 타 있던 그 책은 살짝 접어놓거나 흐릿하게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었는데, 나는 시험 답안지라도 미리 전달받은 사람처럼 몰래 숨겨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중에 거의 통째로 괄호가 처져 있던 페이지들이 기억난다. 그것은, 청각장애가 있는 주인공 ‘존 싱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간 부분이다. 그동안 존 싱어가 편지로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빠르게 수화로 늘어놓으면, 친구는 다 이해한다는 듯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침대를 발로 쾅쾅 찬다. 그러다가 또 졸린 눈이 되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존 싱어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당황할 시간조차 아까운 존 싱어는 친구와 같은 병실을 쓰며 매일을 함께 보내는 환자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면회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던 그는 작별인사 대신에 조용히 주먹을 꽉 쥔다. 열아홉 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의 내 머릿속엔, 존 싱어의 그 ‘조용히 꽉 쥔 주먹’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의 비주얼이 너무 생생해서 그대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라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The Heart is a Lonely Hunter」이란 책을 소개하던 미국인 교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매번 속으로 대답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아홉 살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고 이름마저 확신을 할 수 없게 된, 당시의 미국인 중년 남자는 ‘현대 미국소설’이라는 소설강독 수업시간으로 처음 만난, 내 대학 시절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의 내 독서편력과 취향의 척추를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한 그가,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서 맥주 한잔하며 읽기에 좋습니다.”, “이 책은 커버에 손을 대고만 있어도 뜨거운 것 같습니다.” 식의, 마케팅용 한 줄 카피처럼 책에 대한 소개를 시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는 책 그 자체 보다 그의 소개말에 더 관심이 가고, 간혹 소름마저 돋는 것이다. “존 싱어의 꽉 쥔 주먹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이죠.” 언젠가 강의실 연단에 서게 되면 나도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카슨 매컬러스 Carson McCullers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카슨 매컬러스가 스물세 살일 때 쓴 장편 소설이다. 거의 평생을 소아마비, 뇌졸중, 흉막염, 패혈성 질환, 유방암에 시달리며 휠체어에 앉아 지내다가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그는, 뭔가 심한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신체적 외양과 고독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작가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금씩 분리해 만들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결혼식의 멤버 The Member of the Wedding」의 주인공 프랭키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구인 소녀이고, 「슬픈 카페의 노래 The Ballad of the Sad Cafe」의 야비하고 인색한 카페 주인 아멜리아는 엄청나게 큰 키와 근육, 사팔뜨기 눈을 가진 주인공으로, 꼽추와 사랑에 빠진다. 「황금빛 눈동자에 비친 그림자 Reflections in a Golden Eye」라는 중편소설엔 자신이 혐오하는 아내를 밤마다 훔쳐보는 군인에게 도착적인 매력을 느끼는 성불구자 남편이 등장한다(67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무려 말론 브랜도가 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싱어’와, 그의 유일한 친구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는 둘 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 공통적으로, 뭔가 되게 암울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결국엔 다 비극을 맞이하면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암시를 시작부터 던져주는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이렇게 ‘내 마음대로 각색하기’ 같은 칼럼에서 시간과 지면을 들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적어도 내겐 이 책이 ‘술 한잔하고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다, 책 커버에 손만 대고 있어도 뜨거운 느낌을 주는, 진짜 러브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엔 말 못 하는 두 명의 청각장애인들 외에, 음악가가 되고 싶은 사춘기 소녀, 흑인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흑인 의사,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 그들이 모이는 카페의 주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서두에 언급한 ‘존 싱어’와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첫 번째 챕터의 오프닝 십여 페이지를 유난히 많이, 또 자주 생각한다. 이 짧은 챕터는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하나의 독립된, 아름다운 단편소설에 다름없다. 그래서 몇 년 전에 구한 오디오북 파일에서 이 오프닝 챕터만 따로 잘라내 핸드폰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듣는다. 총 열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오디오북을 읽은 사람은 체리 존스(Cherry Jones)라는 배우로, 영화 < 다우트 >의 원작인 연극무대에서 원장수녀로 나와 토니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베테랑이다. (영화버전에선 아시다시피 메릴 스트립이 그 역할을 연기했다) 미드 <24>의 팬이라면 위풍당당한 앨리슨 테일러 대통령으로 나왔던 그를 기억할 것이고.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마르고 가차 없는 체리 존스의 목소리가, ‘마을에 벙어리가 둘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함께 다녔다.’ 는 문장을 읽으며 시작하는 오프닝 챕터를 듣고 있노라면, (어쩌면) 이 책의 ‘존 싱어’라는 남자는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와중에도 그 목소리에 물기가 묻은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오프닝 챕터의 마지막 문단으로, ‘존 싱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며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비가 내려도,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 날에도, 그의 걸음은 주저하고 얼굴은 고요했다고, 매우 슬프거나 아주 현명한 사람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생각에 잠긴 듯한 평화로움’이 그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런 얼굴과 걸음으로 여전히 그렇게 마을의 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항상 조용히, 혼자서. 자, 그렇다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할 고독함’ 이라는 것이, 이 두 청각장애인 친구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오프닝 챕터를 ‘내 마음대로 각색한’ 버전의 테마가 될 것이다. 두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설정도 지금 당장 내게 꼭 필요한 도전이다. 등장인물이 항상 말이 많고 수다를 떨어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를 주로 쓰고 만드는 나로선, 러닝타임 내내 한마디의 말도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창작자들에 대한 매혹과 질시가 어쩔 수 없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친구를 향해 ‘존 싱어’가 버스 아래에서 미친 듯이 수화를 하며 마음속의 말을 내뱉던 그 순간, 친구는 아침에 싼 도시락이 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그를 보지 못한다. 책을 읽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선 보는 이들의 가슴이 으깨지거나 찢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존 싱어’는 도시락을 확인하고 마음이 편해진 친구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는데,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 친구는 ‘이미 저 멀리로 가 버린 듯한 눈빛’으로 ‘존 싱어’를 바라본다. 결국, 친구는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존 싱어’는 휘청대는 걸음과 자포자기와 체념이 섞인 평화로운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니게 된다. 조용히, 혼자서... 그리고, 디 엔드.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68) 포스터 이 책은 1968년도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진 적이 있다. 당시 ‘존 싱어’를 연기해 아카데미 후보지명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알란 아킨’이다. 그게 누구냐면, < 미스 리틀 선샤인 >의 그 괄괄한 할아버지. 나는 오로지 그를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어로인 ‘존 싱어’로만 기억하고 있어서,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손자에게 “젊었을 때 섹스를 많이 해야 해~” 라고 능글맞게 충고하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할아버지로 나온 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죽었던 ‘존 싱어’가 무덤에서 돌아와서 내는 것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 <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1968)의 알란 아킨 (위) < 미스 리틀 선샤인 >(2006)의 알란 아킨 (아래)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담임선생과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는 당시의 나는 뭔가 비밀이 많은 척하는 열아홉 살이다, 전날 있었던 진로상담에서 그에게 신방과에 진학해 방송국 피디가 되겠다고 적어냈지만, 사실은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놓았었다. “고개 들고 만두도 좀 먹으라”며 군만두 접시를 밀어주는 담임은 자기도 대학생일 때 소설을 몇 편 쓴 적이 있고 신문에 투고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큰 상도 한 번 탄 적이 있는데 시상식에 참석하러 서울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발을 동동 구르고 속으로 끅끅대며 고함을 쳤다고도 한다. 좋아서... 그러더니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지금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걸 하나 가져왔다며 손때가 많이 탄 책 한 권을 건넨다. 추상으로 그려진 사람 얼굴 그림이 있는, 칙칙한 색깔의 커버엔 「벙어리」란 제목이 보인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원제를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해주는 담임선생의 담당 과목은 ‘화학’이다. 열아홉 살, 그해 고3 수험생이 된 나는 학급일지를 작성하는 ‘서기’ 였고, 매일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교무실에 들러 담임선생의 사인 받는 일을 했다. 당시 담임선생은 중년의 나이도 훌쩍 넘겨 슬슬 노년으로 접어들던 시기의 남자였고,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엄격한 분위기의 사람이었지만, 학급일지의 사인을 해주며 내게 한 마디씩, 두 마디씩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매번 친절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 후로도 가끔씩 그로부터 손때가 탄 책을 몇 권 전달받았다. 어떤 책은 읽고 나중에 돌려달라는 것도 있었고, 그냥 가지라고 했던 책도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중에서 단 한 번도 책에 대한 감상이나 소회를 그가 내게 따로 물어보거나 내가 그에게 먼저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뭔가 신기하면서도 왠지 송구스런 기분을 들게 한다. 그가 그런 비밀스런 호의를 일부러 내게 건넬 이유가 없었다는 걸 굳이 떠올려보면, 그 후 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내게 최초로 선물한 「벙어리」란 책이 어떻게 내 안에서 살아남고 오랫동안 가지를 쳐서 < 장례식의 멤버 >라는 내 첫 번째 장편 영화의 무의식이 되었는지,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과 ‘존 싱어’ 사이에 놓여있는 브리지라고 해야 할까, 뉴욕 카페의 손님들이 ‘존 싱어’를 붙잡고 자기 얘기를 늘어놓듯, 영화 속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이 어떻게 그 아이에게 자기들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일지언정 편지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것은 사랑 이야기네요. 그동안 저도 조용히 주먹을 몇 번씩 꽉 쥐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 싱어처럼.” #1 펀 홈 #2 안녕, 내일 또 만나 #3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4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5 이모와의 여행, 그 외 몇몇
[테마연재]③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혹시 읽어본 사람이 있는지 부드럽게 묻는 미국인 교수의 질문에 손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가 강의실 연단에 서서 들어 보인 그 책을 「벙어리」라는 제목의 번역본으로 먼저 보았다. 열아홉 살, 진로상담을 하고 난 다음 날 저녁 시간에 담임선생이 나를 중국집으로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며 함께 건넨 선물이었다. 손때가 많이 타 있던 그 책은 살짝 접어놓거나 흐릿하게 밑줄이 그어진 페이지를 곳곳에 숨겨놓고 있었는데, 나는 시험 답안지라도 미리 전달받은 사람처럼 몰래 숨겨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중에 거의 통째로 괄호가 처져 있던 페이지들이 기억난다. 그것은, 청각장애가 있는 주인공 ‘존 싱어’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간 부분이다. 그동안 존 싱어가 편지로 다 전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빠르게 수화로 늘어놓으면, 친구는 다 이해한다는 듯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침대를 발로 쾅쾅 찬다. 그러다가 또 졸린 눈이 되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면서 존 싱어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마음속에 쌓아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당황할 시간조차 아까운 존 싱어는 친구와 같은 병실을 쓰며 매일을 함께 보내는 환자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면회시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던 그는 작별인사 대신에 조용히 주먹을 꽉 쥔다. 열아홉 살,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의 내 머릿속엔, 존 싱어의 그 ‘조용히 꽉 쥔 주먹’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의 비주얼이 너무 생생해서 그대로 그려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라고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The Heart is a Lonely Hunter」이란 책을 소개하던 미국인 교수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매번 속으로 대답한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열아홉 살 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고 이름마저 확신을 할 수 없게 된, 당시의 미국인 중년 남자는 ‘현대 미국소설’이라는 소설강독 수업시간으로 처음 만난, 내 대학 시절 영문과 교수였다. 지금의 내 독서편력과 취향의 척추를 만들어준 사람이기도 한 그가,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서 맥주 한잔하며 읽기에 좋습니다.”, “이 책은 커버에 손을 대고만 있어도 뜨거운 것 같습니다.” 식의, 마케팅용 한 줄 카피처럼 책에 대한 소개를 시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그러니까 나는 책 그 자체 보다 그의 소개말에 더 관심이 가고, 간혹 소름마저 돋는 것이다. “존 싱어의 꽉 쥔 주먹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인 것이죠.” 언젠가 강의실 연단에 서게 되면 나도 그렇게 얘기할 것이다. 카슨 매컬러스 Carson McCullers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은 카슨 매컬러스가 스물세 살일 때 쓴 장편 소설이다. 거의 평생을 소아마비, 뇌졸중, 흉막염, 패혈성 질환, 유방암에 시달리며 휠체어에 앉아 지내다가 쉰 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그는, 뭔가 심한 벌을 받고 있는 듯한 신체적 외양과 고독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 작가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그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조금씩 분리해 만들어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결혼식의 멤버 The Member of the Wedding」의 주인공 프랭키는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구인 소녀이고, 「슬픈 카페의 노래 The Ballad of the Sad Cafe」의 야비하고 인색한 카페 주인 아멜리아는 엄청나게 큰 키와 근육, 사팔뜨기 눈을 가진 주인공으로, 꼽추와 사랑에 빠진다. 「황금빛 눈동자에 비친 그림자 Reflections in a Golden Eye」라는 중편소설엔 자신이 혐오하는 아내를 밤마다 훔쳐보는 군인에게 도착적인 매력을 느끼는 성불구자 남편이 등장한다(67년에 만들어진 영화 버전에선 무려 말론 브랜도가 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의 주인공이자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존 싱어’와, 그의 유일한 친구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는 둘 다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들. 공통적으로, 뭔가 되게 암울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결국엔 다 비극을 맞이하면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암시를 시작부터 던져주는 이야기들이지만, 지금 이렇게 ‘내 마음대로 각색하기’ 같은 칼럼에서 시간과 지면을 들여 그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적어도 내겐 이 책이 ‘술 한잔하고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다, 책 커버에 손만 대고 있어도 뜨거운 느낌을 주는, 진짜 러브 스토리’ 이기 때문이다. 이 책엔 말 못 하는 두 명의 청각장애인들 외에, 음악가가 되고 싶은 사춘기 소녀, 흑인 인권운동에 삶을 바치는 흑인 의사,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노동자, 그들이 모이는 카페의 주인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서두에 언급한 ‘존 싱어’와 ‘스피로스 안토나풀로스’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첫 번째 챕터의 오프닝 십여 페이지를 유난히 많이, 또 자주 생각한다. 이 짧은 챕터는 그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보아도 하나의 독립된, 아름다운 단편소설에 다름없다. 그래서 몇 년 전에 구한 오디오북 파일에서 이 오프닝 챕터만 따로 잘라내 핸드폰에 넣고 다니면서 자주 듣는다. 총 열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이 오디오북을 읽은 사람은 체리 존스(Cherry Jones)라는 배우로, 영화 <다우트>의 원작인 연극무대에서 원장수녀로 나와 토니상을 수상한 브로드웨이의 베테랑이다. (영화버전에선 아시다시피 메릴 스트립이 그 역할을 연기했다) 미드 <24>의 팬이라면 위풍당당한 앨리슨 테일러 대통령으로 나왔던 그를 기억할 것이고. 낙엽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마르고 가차 없는 체리 존스의 목소리가, ‘마을에 벙어리가 둘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함께 다녔다.’ 는 문장을 읽으며 시작하는 오프닝 챕터를 듣고 있노라면, (어쩌면) 이 책의 ‘존 싱어’라는 남자는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외롭고 고독하기 짝이 없는 주인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와중에도 그 목소리에 물기가 묻은 것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오프닝 챕터의 마지막 문단으로, ‘존 싱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다리를 질질 끌며 홀로 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도, 차가운 비가 내려도,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오는 날에도, 그의 걸음은 주저하고 얼굴은 고요했다고, 매우 슬프거나 아주 현명한 사람의 얼굴에서나 볼 수 있는 ‘생각에 잠긴 듯한 평화로움’이 그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그런 얼굴과 걸음으로 여전히 그렇게 마을의 거리를 혼자서 돌아다녔다고, 항상 조용히, 혼자서. 자, 그렇다면, ‘일방적인 사랑의 대가는 가늠조차 하지 못할 고독함’ 이라는 것이, 이 두 청각장애인 친구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오프닝 챕터를 ‘내 마음대로 각색한’ 버전의 테마가 될 것이다. 두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설정도 지금 당장 내게 꼭 필요한 도전이다. 등장인물이 항상 말이 많고 수다를 떨어야 안심이 되고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를 주로 쓰고 만드는 나로선, 러닝타임 내내 한마디의 말도 없이 관객을 웃기고 울리는 창작자들에 대한 매혹과 질시가 어쩔 수 없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신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탄 친구를 향해 ‘존 싱어’가 버스 아래에서 미친 듯이 수화를 하며 마음속의 말을 내뱉던 그 순간, 친구는 아침에 싼 도시락이 잘 있는지 확인하느라 바빠서 그를 보지 못한다. 책을 읽을 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도 이 부분에선 보는 이들의 가슴이 으깨지거나 찢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존 싱어’는 도시락을 확인하고 마음이 편해진 친구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치는데,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그 친구는 ‘이미 저 멀리로 가 버린 듯한 눈빛’으로 ‘존 싱어’를 바라본다. 결국, 친구는 그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존 싱어’는 휘청대는 걸음과 자포자기와 체념이 섞인 평화로운 얼굴로, 마을을 돌아다니게 된다. 조용히, 혼자서... 그리고, 디 엔드.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68) 포스터 이 책은 1968년도에 영화로 한 번 만들어진 적이 있다. 당시 ‘존 싱어’를 연기해 아카데미 후보지명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알란 아킨’이다. 그게 누구냐면, <미스 리틀 선샤인>의 그 괄괄한 할아버지. 나는 오로지 그를 비극적 멜로드라마의 히어로인 ‘존 싱어’로만 기억하고 있어서,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손자에게 “젊었을 때 섹스를 많이 해야 해~” 라고 능글맞게 충고하던 <미스 리틀 선샤인>의 할아버지로 나온 그를 처음 봤을 때 조금 충격을 받았다. 죽었던 ‘존 싱어’가 무덤에서 돌아와서 내는 것처럼 허스키한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1968)의 알란 아킨 (위),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의 알란 아킨 (아래) “이것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시 돌아간 그곳은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담임선생과 마주 앉아 짜장면을 먹고 있는 당시의 나는 뭔가 비밀이 많은 척하는 열아홉 살이다, 전날 있었던 진로상담에서 그에게 신방과에 진학해 방송국 피디가 되겠다고 적어냈지만, 사실은 작가가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얘기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털어놓았었다. “고개 들고 만두도 좀 먹으라”며 군만두 접시를 밀어주는 담임은 자기도 대학생일 때 소설을 몇 편 쓴 적이 있고 신문에 투고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큰 상도 한 번 탄 적이 있는데 시상식에 참석하러 서울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내내 발을 동동 구르고 속으로 끅끅대며 고함을 쳤다고도 한다. 좋아서... 그러더니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지금 내가 읽으면 좋을 만한 걸 하나 가져왔다며 손때가 많이 탄 책 한 권을 건넨다. 추상으로 그려진 사람 얼굴 그림이 있는, 칙칙한 색깔의 커버엔 「벙어리」란 제목이 보인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는 원제를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해주는 담임선생의 담당 과목은 ‘화학’이다. 열아홉 살, 그해 고3 수험생이 된 나는 학급일지를 작성하는 ‘서기’ 였고, 매일 정규수업시간이 끝나면 교무실에 들러 담임선생의 사인 받는 일을 했다. 당시 담임선생은 중년의 나이도 훌쩍 넘겨 슬슬 노년으로 접어들던 시기의 남자였고, 빈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엄격한 분위기의 사람이었지만, 학급일지의 사인을 해주며 내게 한 마디씩, 두 마디씩 건네던 그의 목소리는 매번 친절하고 따뜻했다. 나는 그 후로도 가끔씩 그로부터 손때가 탄 책을 몇 권 전달받았다. 어떤 책은 읽고 나중에 돌려달라는 것도 있었고, 그냥 가지라고 했던 책도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중에서 단 한 번도 책에 대한 감상이나 소회를 그가 내게 따로 물어보거나 내가 그에게 먼저 얘기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뭔가 신기하면서도 왠지 송구스런 기분을 들게 한다. 그가 그런 비밀스런 호의를 일부러 내게 건넬 이유가 없었다는 걸 굳이 떠올려보면, 그 후 근 이십 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그가 내게 최초로 선물한 「벙어리」란 책이 어떻게 내 안에서 살아남고 오랫동안 가지를 쳐서 <장례식의 멤버>라는 내 첫 번째 장편 영화의 무의식이 되었는지,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과 ‘존 싱어’ 사이에 놓여있는 브리지라고 해야 할까, 뉴욕 카페의 손님들이 ‘존 싱어’를 붙잡고 자기 얘기를 늘어놓듯, 영화 속 소년을 둘러싼 가족들이 어떻게 그 아이에게 자기들의 외로움을 토로하고 있는지, 에 대해서 다소 두서없는 이야기일지언정 편지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그렇다면 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것은 사랑 이야기네요. 그동안 저도 조용히 주먹을 몇 번씩 꽉 쥐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존 싱어처럼.”
폭풍의 아이들, 1권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작년 영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는 파리가 아니며, 런던이 아니며, 뉴욕이 아니며, 동경이 아니다. 서울에서 영화를 보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우리들은 언제나 한발 늦게 그 영화를 보아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이다. 더 곤란한 건 그렇게 볼 수 있는 영화들조차 서울 시내에서 그 영화를 보려면 그 시간에 맞춰 한참을 떨어진 극장에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영화를 하루에 단 한 번 밤 12시 40분에 상영할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새벽 2시 반에 극장 문을 나선 다음 한적한 거리에서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망연자실하게 두리번거릴 때는 약간 처량해지기까지 한다. 시네필은 보헤미안들이 아니다. 아직 올해가 끝난 건 아니지만 지난 열 달간 본 영화 중 지금 내 두뇌의 스크린에서 가장 맹렬하게 상영되고 있는 영화는 유셴수의 < 인조공간 >이다. 도시의 명멸하는 이미지들. 이미지들의 반복되는 기호. 기호 안에 자리 잡은 시간. 시간 안에서 활동하는 모호한 세계, 세계라는 수수께끼의 이미지. 그 이미지 안에 이따금 바람이 불 때 갑자기 이미지에 구멍을 만들어내고 세계가 침입한다는 기묘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세계의 기기묘묘한 질서를 영화는 붙잡을 수 있을까. 어쩌면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와 요리스 이벤스의 <비>의 중간 어디쯤에 자리 잡고 있을 이 영화는 수없이 본 이미지들을 불현듯 새롭게 반짝거리게 만든다. 여기에는 영화가 원래 갖고 있었을 힘을 잡아당기면서(attraction) 그 자리에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우리들이 처한 이 신기한 영화‘歷’사의 자리.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흥미로운 이름(중의 한 명)은 라브 디아즈이다. 처음 본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였다. 10시간 43분에 이른 이 영화를 본 다음 좀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이 시간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방법을 밀고 나아갔다. (내가 본) 두 번째 영화 < 엘칸토에서의 죽음 >은 다시 한 번 9시간 동안 계속 된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 고통스러운 고백의 여정이 이어진다. 그러고 나서 < 멜랑콜리아 >를 보았다. 7시간 30분이라는 상영시간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내가 라브 디아즈를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 첫 회의 심사위원으로 기꺼이 마닐라에서 서울까지 먼 초청에 응했다. 라브 디아즈는 쾌활하고 자기 의견을 말하는데 망설임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때 그에게 물어보았다. “당신의 영화가 그렇게 긴 상영시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은 없나요?”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것 따위는 걱정할 겨를이 없어요. 나는 영화를 볼 때 닥쳐올 시간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영화를 볼 거라고 믿습니다. 그 믿음에 대답하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러 올 것입니다” 영화에서 닥쳐올 시간, 이라는 말. 나는 영화의 시간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다. 그런 의미에서 라브 디아즈는 내게 영화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그런 다음 그는 계속해서 걸작을 찍었다. < 북쪽, 역사의 끝 >은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이지만(이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4시간 10분이다) 이 영화는 라브 디아즈가 새로운 경지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로카르노에서 (이 이상한 제목을 <아프리오리>로 번역한다고 유운성 씨가 내게 일러주었다)로 작품상인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 대신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라브 디아즈가 현재 진행 중인 < 폭풍의 아이들, 제1권 >을 볼 수 있었다. (이하 <폭풍의 아이들>) 라브 디아즈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같은 제목 아래 세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게 될 예정이라고 했다. 더 좋은 일은 이 영화 상영을 마치고 난 다음 라브 디아즈와 관객과의 대화를 내가 진행하게 되었다. <폭풍의 아이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사건은 2013년 11월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욜란다 ‘이후’의 풍경이다. 뉴스에 따르면 욜란다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태풍이었다고 한다. 라브 디아즈의 설명에 따르면 매년 필리핀은 평균 28개의 태풍을 맞이하고 그중 몇 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다고 한다. 하지만 욜란다는 이제까지의 태풍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찾아왔다. 재해가 지나가면서 6,293명이 사망했고, 1,061명이 실종됐고, 28,689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며, 1,140,332채의 건물이 부서졌고, 1,300만 그루의 나무가 뽑히거나 부러졌다. 라브 디아즈도 태풍이 지나가는 동안에는 규모가 너무 심각해서 미처 촬영을 시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통이 두절되어서 이동할 수 없었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밤중에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칠흑 같은 밤. 아마도 그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엔 별다른 설명도 없이 그렇게 비가 내리는 장면이 전부이다. 아니, 그 말은 정확하지 않다. 여기엔 비가 내리는 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저 멀리 도시의 불빛이 어른거리고 그 화면을 지워버릴 것처럼 그렇게 비가 내린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오면 강가로 수없이 많은 재해의 흔적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흘러내려 간다. 이미 도심은 물에 잠겼고, 사람들은 거의 무릎까지 물이 차오른 도로 위로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으면서 힘겹게 이동하고,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삶의 리듬이 다시 시작한다.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가 멈춘 곳은 다리 위에서 강물 위로 쏜살같이 흘러내려 가는 재해의 흔적들을 건지는 아이들이다. 거기서 이제는 주인을 알 수 없게 된 물건들이 흘러내려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무언가 쓸 만한 것이 있을까, 그렇게 지켜보며 안간힘을 써서 건지는 중이다. 하지만 라브 디아즈는 이 아이들에게 말을 걸 생각이 추호도 없다. 그의 카메라는 말을 걸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아이들은 자기 일에 바빠서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다.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온 것일까, 그리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닥쳐올까. 닥쳐올 시간. 그걸 바라보는 영화의 시간. 라브 디아즈의 카메라는 그 시간의 사이 안으로 들어간다. 오늘날의 영화에서 지아장커, 아핏차퐁 위라세타쿨, 차이밍량에 이어 라브 디아즈가 앙드레 바쟁의 계보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사진적 이미지의 존재론. 거기 영화가 있어야 한다. 이 절대적인 호소. 그 안에 놓여진 시간. 거기 버티고 있는 세상.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21세기 아시아 영화들이 디지털을 선택하면서 일제히 바쟁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라브 디아즈는 마치 그 강물에 떠밀리듯 바다까지 흘러온다. 그리고 거기서 태풍에 밀려온 거대한 선박이 마을을 덮친 다음 그냥 거기 괴물처럼 놓여있는 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태풍은 지나갔지만 그 흔적이 남겨놓은 삶은 피폐하기 짝이 없다. 거의 쓰러져가는 집들. 그렇다고 해서 라브 디아즈가 그들의 사연에 귀 기울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주 가끔 그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그들이 라브 디아즈에게 말하기도 하지만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는 것이 그의 목표는 아니다.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서, 혹은 가끔 지나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서, 살아남은 자들을 바라본다. 여기서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 는 도착이다. 그게 아니라면 영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때 이 영화는 손으로 들고 찍은 쇼트와 고정시켜 놓고 찍은 쇼트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두 종류의 촬영이라는 노동 사이를 오간다. 대부분의 촬영은 라브 디아즈 혼자서 소니 알파 NEX 알파 3로 진행했다. 작고 기동성이 있으며 동시에 노출에 대한 보정력도 뛰어나지만 결정적으로 장시간 촬영의 경우 배터리 충전이라는 문제와 부딪치게 되는 이 카메라를 들고 다큐멘터리를 혼자서 찍는 것은 좀 특별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다. 전적으로 운에 맡긴 장면들. 게다가 단 한 장면도 예외 없이 야외장면이고 여기는 거의 전력 공급이 중단된 어촌 마을이다. 말하자면 충전이라는 절대적인 요구와 그 불가능성.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라브 디아즈가 카메라에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고스란히 존중하고 싶다는 결정이다. 점점 영화에서 카메라는 하나의 결정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무엇이 닥쳐올까. 죽음은 우리의 소재가 아니다. 거기 카메라가 있을 때 몸은 시간을 위해 살아낼 것이다. 거기서 우리의 사건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영화. 그걸 선택할 때 그건 그 카메라에게 주어진 생명을 받아들이겠다는 하나의 태도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한다. 라브 디아즈는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내내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저 거기에 자신은 단지 카메라를 가져갔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거기에 카메라를 가지고 갔을 때 누구나 그렇게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걸 알겠다. 그렇게 욜란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살아남은 아이들을 영화가 바라볼 때 그건 하나의 선언이다. 어떤 선언?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살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들은 신 나게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노래) ‘Let it go’를 부른다. 소년은 담담하게 지난 태풍이 오던 날 밤에 아버지가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아무 원망도 담지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본다. 라브 디아즈는 이 소년을 한참을 바라본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신들을 덮친 괴물 같은 배에 아이들이 기어 올라가 마치 휴가를 즐기기라도 하듯이 다이빙을 하기 위해 뛰어내린다. 이 순간은 그저 아이들의 여름방학처럼 보일 만큼 아름답게 찍혔다. 운동하는 이미지의 슬로우 모션. 삶의 슬로우 모션. 라브 디아즈는 그렇게 지금 생명을 찍는 중이다. 나는 어서 빨리 라브 디아즈의 다음 영화가 보고 싶다. 그는 우리가 이 힘겨운 세기를 함께 건너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이름(중의 한 명)이다. 올해가 막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