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성
- 제작년도
- 1971
겉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마음속에 정해둔 나만의 애니메이션 장르가 있다. 제작기법이나 국적과는 상관없는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 구분이랄까. 그중에 하나가 ‘용감한’이라는 장르다. 나만의 ‘용감한 애니메이션’으로 꼽아둔 작품 중 하나가 < 내 이름은 꾸제트 >다. 주인공인 아홉 살 소년 꾸제트는 알콜 중독인 엄마가 마셔버린 맥주 캔들을 주워다가 다락방에서 피라미드를 쌓으며 노는 아이다. 집 나간 아빠가 그리워서 아빠를 망토 걸친 슈퍼히어로로 그려 넣은 연을 날리기도 한다. 연의 뒷면에는 엄마가 알려준 대로, 아빠와 함께 있다는 어린 닭(영계)도 그려놓았다. 혼자인 엄마는 그날도 술에 취해서 다락방에 있던 꾸제트를 혼내러 올라오다가, 꾸제트가 무서워서 닫아버린 다락문에 부딪혀서 세상을 뜬다. 엄마마저 잃어버렸지만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는 꾸제트는 경찰 아저씨 레이몽의 도움으로 보육원에 간다. 그리고 저마다의 이유로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그곳의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꾸제트가 엄마 머리 위에서 다락방 문을 닫고 한참 있다가 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애니메이션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사고지만 살인의 순간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이라니. (최근 청각장애를 지닌 소녀가 수화가 아닌 구음을 내서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모습을 용감하게 담았던 애니메이션 < 목소리의 형태 >에 버금가는 충격이다.) 잠시 후 꾸제트가 벽에 기대어 앉자 연이 창밖에서 날아 들어와 꾸제트 앞에 떨어진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연만큼 마음도 추락하는 느낌을 연출한 애니메이션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그 용감한 장면에 디테일이 깃들어 있다. 히어로 아빠가 웃고 있는 노란색 연을 꼬옥 끌어안는 꾸제트의 모습, 그때 꾸제트가 기댄 벽에 가득 그려진 무심한 듯 간절한 낙서가 그렇다. 결코 캐릭터와 이야기를 소홀히 다루지 않으려는 정성이 엿보인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무척 어울린다. 캐릭터는 물론이요,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배경 세트까지 오롯이 그 질감과 수작업의 공로가 들여다보이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어쩌면 쉽게 하기 힘든 이야기를 끝끝내 해내려는 의지를 담기에 참 좋은 그릇이다. 여기에 캐릭터 인형의 손에 들린 작은 책가방, 책상 위의 앙증맞은 크레파스, 다락방에 널브러진 미니 사이즈의 책들이 더해져서 꾸제트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장면 장면이 그런 아름다움으로 빚어져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경찰인 레이몽 아저씨가 꾸제트를 차에 태워 보육원으로 가는 순간이다. 꾸제트가 창밖으로 날린 연이 푸른 하늘로 더 높이 올라가도록 사이렌을 울리며 액셀을 밟아주는 레이몽 아저씨와 해맑게 웃는 꾸제트의 표정이 정갈하고 사랑스럽게 표현된다. 연을 함께 날려주는 어른이 이 세상에 한 명쯤 존재한다는 것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질 파리의 동명 동화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내 이름은 꾸제트>는 이처럼 결코 밝지 않은 이야기를 알록달록한 화면에 담았다. 파란 머리, 빨간 코, 무표정한 얼굴을 지닌 꾸제트를 중심으로, 당근색 머리의 보육원 대장 시몽, 부끄러울 때면 노란색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려버리는 알리스, 꾸제트가 반한 갈색 머리의 당찬 소녀 까미유 등 아이들 각자의 사연도 아프기는 마찬가지. 그런데 아이들은 온몸으로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사랑받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이 아이들의 성장담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정성스런 손길 속에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행복을 찾아간다. 화려한 몸개그, 헛소동, CG의 세례 없이도 그게 가능하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찬찬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세밀한 질감은 이 아이들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주고 싶거나 두 팔로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증폭시킨다. ‘어쩌다 어른’이 된 이들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함께 연을 날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다.
탈북자가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 무산일기 > 역시 탈북자 전승철의 비루한 일상을 전시하며 시작한다. 요란하지 않게 덤덤히 그의 일상을 좇는 카메라의 시선은 무언수행에 가까운 승철의 수동적 태도와 맞물리면서 남한사회에서 탈북자가 차지하는 위치를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영화는 불과 10분을 채 넘기지 않은 시점에서 승철의 욕망 또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숙영을 훔쳐보는 승철의 관음증적 시선은 탈북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무관한 개인의 욕망, 소심한 남자의 짝사랑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클리셰다. 상투적 묘사로 인해 승철의 욕망은 명징하게 전달되는데, 흥미로운 점은 탈북자로 위치 지어진 승철의 일상을 좇는 시선과 보편적 개인으로서의 승철의 내재된 욕망을 좇는 시선의 양식이 똑같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철의 행적을 집요히 좇는 카메라는 그가 처한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를 자아낸다. 서글프다 못해 비참한 탈북자의 일상과 숙영을 향한 오롯한 승철의 욕망은 정비례 수준으로 내러티브를 교차한다. 영화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에 찍힌 ‘125’라는 낙인 때문에 사소한 일자리조차 얻지 못하는 승철의 소수자적 모습과 짝사랑하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변신을 꿈꾸며 양복점을 기웃거리는 보편적 모습을 동등한 위치에서 전시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이라는 이분법적 체계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던 승철의 행적은 숙영의 노래방에 취직하면서부터 그 경계가 허물어진다. 탈북자의 비루한 삶과는 일말의 공통점이 없을 것 같던 숙영의 이미지(교회 성가대, 참한 외모, 나긋한 말투)는 승철의 타자화된 시선이 개입된 허상임이 노래방에서 낱낱이 밝혀진다. 승철이 자신과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챈 숙영은 자신이 노래방에서 일하는 것을 교회에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성스런 공간인 교회에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편집증적으로 노력하는 숙영의 행동은, 탈북자의 고단함과 숙영을 향한 낭만을 부단히 구별하려는 승철의 모습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렇게 고결함을 지키려는 노력은 세속적 공간인 노래방에서 항상 무화된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던 숙영은 가장 속물적인 방식으로 노래방 영업에 충실하고, 승철은 그런 숙영의 모순된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상정해놓은 편리한 이분법이 무너짐을 느낀다. 특히 승철이 도우미들과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은 ‘성/속’, ‘꿈/현실’을 철저히 구분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위인지를 극명히 드러낸다. 교회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찬송가’를 처음으로 승철에게 가르쳐 준 존재가 ‘도우미’라는 사실과 그 모습을 본 숙영이 ‘도우미’와 ‘찬송가’를 함께 입에 담는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역정을 내는 순간이 연이어 연출되면서, 더 이상 이분법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지고 체득해야 할 모순만이 남게 된다. 숙영의 모순된 행동을 보며 거울처럼 내면의 분열증을 겪던 승철은 결국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게 된다. 고향인 북한 무산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고백은,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던 지옥에서 승철이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트라우마는 북한에서의 외모, 습관,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던 승철의 모습으로 표면화됐다. 육체는 남한에 있지만, 정신은 여전히 무산에 있는 것이다. 승철이 가장 숨기고 싶던 치부이자 분열증의 근원을 털어놓자, 역설적으로 꿈의 대상이던 숙영이 처음으로 승철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계기가 된다. 교회에서의 고백을 통해 모순적 존재임을 공인받은 승철은 숙영과의 관계 재개와 성가대 진입이라는 보상을 받는다. 그들에게 모순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자각의 문제였던 것이다. 지옥 같았던 북한에서의 트라우마는 극복이 아닌 모순의 인정을 통해 임시로 봉합된다. 그렇게 승철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채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른다. 처음으로 어엿한 남한사회의 일원으로 공인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것들을 얻은 승철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정돈된 외모와 소속집단에서의 지위를 전시하는 장면은 오히려 탈북자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던 살풍경보다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비극적 파국의 복선처럼 느껴지던 스산함은 남한사회에서 승철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백구의 죽음으로 연결된다. 백구의 죽음을 멍하니 바라보는 승철의 뒷모습은 그 자체로 무산의 현현이다. 임시 봉합된 트라우마는 재발하고 오히려 무산의 지옥도는 더 선명하게 그려진다. 승철이 백구의 죽음을 그냥 지나치는 순간, < 무산일기 >는 끝난다. 하지만 새로운 지옥으로 가는 승철의 ‘서울일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1980년대 이른바 ‘에로영화’의 전성기, 오직 힘 하나 뿐인 강한 남자의 대명사가 이대근 이었다면 서구 에로영화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남자는 바로 짙은 눈썹의 마흥식 이었다. 임성민 이나 이영하 처럼 종종 대종상도 수상하는 주류영화계의 미남자는 아니었지만, 일단 에로영화에 출연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고 ‘고개 숙인 남자’로서의 연기력 또한 뛰어났다. 임성민과는 < 탄드라의 불 >(1984), 이영하와는 < 여자가 두 번 화장할 때 >(1984)에 함께 출연한 적 있다. 아무튼 그들과 비교해 감독이나 선배들로부터 ‘마군’이라 불렸던 그는 그 성 때문인지 어딘가 ‘마성’의 매력을 지닌 배우처럼 다가왔다. 1988년 88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동아일보>에서 ‘국산영화 포르노화 너무 한다’는 제목으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규제가 완화된 기회를 틈타 국산영화의 성적 표현이 대담하다못해 포르노영화에 가깝게 되어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 맞춰 연기자들 중에서도 에로물을 전담하는 배우들까지 생겨나고 있다”며 이대근 과 함께 에로영화를 ‘전담’하는 단골 배우로 지목된 이가 바로 마흥식 이었다. 실제로 1987년 임권택 감독의 < 씨받이 >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강수연 )을 수상하고 이규형 감독의 <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가 놀라운 흥행성적을 기록하면서 한창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기운이 숨쉬던 때 마흥식은 이대근, 강수연에 이어 당시 세 번째로 작품 편수가 많은 한국영화계의 대표 남자배우였다. 그해 < 풍녀 >(1987), < 웅담부인 >(1987) 등 총 5편에 출연해 신성일 , 나영희 , 이보희 보다 많은 작품 편수를 자랑했다. 마흥식 의 시작은 TV 탤런트였다. 194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TBC TV 7기생 탤런트로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는 1969년 MBC TV가 개국하자마자 이적했고, 연달아 주인공을 맡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김자옥 과 함께 드라마 <얼굴>(1974)의 주인공을 맡는 등 당시 최불암 , 김자옥, 김영애 , 조경환 , 박원숙 , 김용건 등과 함께 MBC TV를 대표하는 젊은 탤런트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마성의 매력 때문인지 1977년에는 여자관계가 복잡해 이런저런 이유로 구속까지 됐다가 피해자와의 합의로 풀려나는 일도 겪었고, 방송윤리위원회는 그런 이유로 1년간 출연 정지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심지어 그런 바람둥이 혹은 호색한 이미지 때문인지 드라마 <꽃사슴>(1977)에 극중 김윤경 의 약혼자 역으로 출연할 때는 ‘극중이지만 그녀를 행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요지의 팬들의 극성스런 전화에 시달리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 영화에 뜻을 둔 마흥식 은 이영실 감독의 < 반노 >(1982)에 출연하게 되는데, 어쩌면 이 영화가 그의 이후 이미지와 운명을 결정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재만 원작의 소설 <반노>는 1969년 ‘음란문서제조’ 혐의로 기소돼 1975년이 되서야 무죄확정판결을 받았고 너무나 오랜 기간 험난한 영화화 과정을 거쳤다. 진두(마흥식)와 홍아( 원미경 )의 동물적인 성생활을 대담하게 묘사한 <반노>는 아마도 한국영화계에서 ‘예술과 외설’ 논란에 휩싸였던 첫 번째 작품이라 할 것이다. 당시 이영실 감독은 마흥식에 대해 “맡겨진 배역의 이미지에 보다 접근하기 위해 보름 이상 굶어가며 연기에 몰두했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렇게 < 반노 >를 시작으로 마흥식 은 본격적인 에로배우의 길을 걷게 되는데 < 반노2 >(1984)는 물론 < 산딸기2 >(1984), < 훔친 사과가 맛있다 >(1984), < 탄드라의 불 >(1984), < 길고 깊은 입맞춤 >(1985), < 물레방아 >(1986), < 옹기골 뽕녀 >(1987), < 야누스의 불꽃 여자 >(1987), < 매춘 >(1988) 등 제목만으로도 그 필모그래피는 현대물과 사극을 가리지 않고 에로영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대근 에게 < 변강쇠 > 시리즈가 있다면 그에게는 선우일란 과 함께 했던 < 산딸기 > 시리즈가 있었다. 고개 숙인 남자로 나오건 호색한으로 나오건 당시 에로영화를 기획하는 영화사들은 일단 그의 스케줄부터 확인하는 게 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는 당시 3D 입체영화를 표방했던 < 공포의 축제 >(1986)도 있다. 그로도 채워지지 않는 배우로서의 허기는 종종 연극 무대로도 옮아갔는데 추송웅과 함께 <도둑들의 무도회>, 윤소정과 함께 <올페> 무대에 오르는 등 단순히 에로배우로만 바라보기에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였다. 그렇게 그는 줄곧 이미지 변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가 원하던 한국영화의 봄날은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영화배우로서는 이두용 감독의 < 애 >(1999)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겼다. / 글: 주성철 (씨네21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