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17: 남자들의 17가지 성적 판타지
- 감독
- 송은주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최재환, 박경희
© 나비클럽 마스터플롯, 공통언어로서의 서사 『마스터플롯』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H. 포터 애벗(H. Porter Abbott)의 『서사학 강의(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Narrative)』(2002)에서 정식화한 마스터플롯(masterplot) 개념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플롯이란 사건의 배열과 연쇄를 결정하는 구성적 논리를 의미하지만, ‘플롯’이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이 개념을 서사 구성의 내적 논리 정도에 한정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마스터플롯은 작품과 병행하고 교차하며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큰 틀의 이야기 골격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때의 골격이 그저 작품 내적인 서사의 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서사학을 주된 이론적 도구로 삼아 소설에 대한 내재적 분석을 주로 해왔던 나에게 마스터플롯은 그 자체로 과잉 개념처럼 보였다. 일개 연구자의 주관적 접근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 실제 독자를 반영하는 수용자 이론에 대해서도 언제나 아득한 기분이 들었는데, 하물며 ‘대중’의 ‘마음’을 읽어내는 방식의 접근법이라니(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터플롯에 대하여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은, 이 개념이 가진 넓은 적용력과 포괄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 매력이 실제 집필로 이어진 데에는 뜻밖의 지면이 계기가 되었다. 전작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를 함께 만들었던 나비클럽에서 펴내는 《 계간 미스터리 》에 2025년 한 해 동안 마스터플롯에 관한 글을 연재하게 된 것이다. 학술 논문의 틀 안에서 몇 차례 다뤄온 개념이었지만, 계간지의 지면은 전혀 다른 요구를 해왔다. 각주와 선행 연구 뒤에 숨을 수 없는 자리, 개념을 처음 만나는 독자를 첫 문장부터 데리고 가야 하는 자리였다. 연재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 개념을 학술적으로 정확하게 쓰는 일 못지않게, 유연한 흐름 속에서 마스터플롯이 무엇이고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 더 어렵고 또 더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그 연재 글들과 기존의 연구들을 한 권의 흐름으로 다시 엮고 고쳐 쓴 결과물이다. 연재 당시의 원고는 2장‧3장‧5장‧7장에 배치되어 있으나, 추가적으로 전체적인 톤의 일관성과 구성의 명확성을 위해서 많은 내용을 고치거나 다시 썼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상 텍스트는 대부분 10년 이내의 작품들이면서도,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매체에서 대중적인 선호가 높았던 작품들이다. 물론 이러한 선별은 대단히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실천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최대한 대중의 수용과 시장의 흥행이라는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를 굳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결부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흔히 ‘걸작’이나 ‘명작’이라 불리는 정전화된 작품에 대한 접근과는 차별화되면서도, 대중적 작품에 대하여 으레 따라붙는 평가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태도이자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끌려간다면 대중성 기반의 작품을 살펴보기 어렵고, 반대로 흥행 수치만으로는 대중성을 판단하기 어렵기에 보정이 필요하다. 마스터플롯을 포괄적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마스터플롯의 사례 역시 무수히 많아진다. 따라서 이 책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의 ‘장르성’+‘로컬리티’에 기반한 마스터플롯으로 추려냄으로써, 흥행이라는 일차원적인 접근을 벗어나 개념화에 적합한 작품들을 추려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해졌다. <오징어 게임>(황동혁, 2021),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소토자키 하루오, 2020) © Netflix / ufotable, 워터홀콤퍼니㈜, ㈜NEW, 에스엠지홀딩스㈜ 피할 수 없는 조건 중에 하나는 소위 ‘천만 관객’ 영화들이다. 우리는 대중적 성공의 높은 지표처럼 여겨지는 천만 관객 영화에 대하여, 그 영화적 완성도를 믿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영화들의 특정한 감정적 과잉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멜로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여러 연구가 강조하듯이, 특정한 서사적 패턴이 구성해 내는 감정주의는 공동체적인 차원에서의 수용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적 사회와 로컬리티를 벗어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무엇이 한국에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흥행의 숫자로 번역되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나의 이론적인 틀은 로컬리티를 포괄하는 사회적 구조가 좀 더 패턴화된 감정적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구조가 그러한 사회적 구조와 병행하는 일련의 서사적 구조에서도 동형성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마스터플롯은 서사적 구조와 감정적 구조의 교차적 양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회적 구조를 일정 부분 암시한다. 따라서 마스터플롯은 작품 내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 내외를 오가는 상호적 개념에 가까워지는 셈이다. 마스터플롯과 비슷한 자리를 겨냥하는 다른 개념들도 있었다. 워치(James Wertsch)의 도식적 서사 템플릿(schematic narrative template)을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도식’이라는 말이 지워버리는 역동성이 아쉬워 플롯을 택했다.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사회극(social drama) 이론에서는 사회극과 무대극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구성하며 순환한다는 발상을, 웨인 부스의 규범(norm) 개념에서는 작가와 독자를 포함한 서사 참여자들이 도덕적 감수성을 주고받는 호혜적 매개라는 발상을 빌려 왔다. 이 책의 마스터플롯에 대한 논의 역시 이야기의 주제와 규범으로 대변되는 공통언어로서의 서사라는 위상을, 문학 이상의 다매체적 현실에서 발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스터플롯을 우리 시대의 공통언어로 발견하고 공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소극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한 조건들을 두루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마스터플롯은 단순한 창작자만의 창작물이 아니라, 다매체 환경에 노출된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형성되는 허구적-대화적 플랫폼이 된다. 이때 마지막으로 조정해야 했던 것이 허구성 개념이다. 장르로서의 픽션(fiction)과 수사적 양태로서의 허구성(fictionality)을 분리하면, 허구성은 허구 서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논픽션에도 존재한다. 이 책이 경계하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믿는 이들에게 음모론은 명백한 논픽션이므로, 그것은 허구성을 가진 논픽션이다. 이러한 허구 개념의 이중성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스터플롯은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다양한 서사 구성을 연결하는 중간적 위상을 획득한다. 이것은 마스터플롯 개념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공동체적 상상력을 수렴하는 공통언어의 문법에 다가가는 일이다. 수치의 강가에서 존엄을 수습하기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 마스터플롯 』 을 출간하고 나서, 2장에서 다루었던 명예와 존엄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많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이러한 마스터플롯에 명백하고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책에서 다루지 못했으나 정확하게 이 마스터플롯에 해당하는 장항준 감독의 < 왕과 사는 남자 >(2025)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를 느끼게 했다. 국내 상영 영화 중 역대 2위의 흥행 성적을 거둔 이 작품의 이야기는 사실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다. 1457년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된 어린 임금 이홍위( 박지훈 )와 그를 맞이하는 촌장 엄흥도( 유해진 )의 이야기. 이 영화를 두고 어김없이 감정적 과잉과 신파의 혐의가 거론되었지만, 앞서 말했듯이 흥행의 수치는 완성도의 지표가 아니라 공동체적 수용의 지표다. 물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얼마나 세련되었는가가 아니라, 1457년의 이야기가 2026년의 관객들과 어떤 공통언어로 접속했는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 공통언어의 문법은 명예와 존엄과 수치심의 논리로 풀이된다. 이 영화의 권력은 수치심의 기술자다. 수양대군의 권력은 조카를 죽이는 대신 강등한다. 왕을 상왕으로, 상왕을 노산군으로, 군을 서인의 처지로 끌어내리는 이 단계적 격하는 물리적 제거보다 정교한 통치술인데,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회수하는 것이야말로 찬탈한 권력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명회( 유지태 )는 이러한 통치술의 집행자다. 요컨대 이 영화의 악은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수치를 배분하는 권력이며, 이것은 오늘의 관객을 공통의 언어로 묶는 문법이다. 계유정난의 정치와 우리 시대 청년 세대가 직면한 현실 정치는 유사한 골격을 공유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치의 정치에 맞서는 마을의 논리가 처음에는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점이다. 유해진이 연기하는 엄흥도는 의인이 아니라 계산가로 등장한다. 이웃 마을이 유배 온 양반 덕에 번성한 것을 보고, 더 높은 신분의 유배자를 유치해 마을을 부흥시키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유배지 유치 경쟁이라니, 이것은 명예가 곧 경제인 세계, 명예 경제의 노골적인 희극이다. 폐위된 왕은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거지 취급을 받는다. 명예의 후광이 사라진 존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이 도입부가 있기에, 이후의 전개가 힘을 얻는다. 소년이 마을의 존경을 얻는 것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호랑이 앞에서 아이를 구했기 때문이고, 그가 마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진상품 덕분이 아니라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는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회수한 존엄을, 공동체가 국가 바깥의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것. 조정의 문서에서 그는 노산군이지만 광천골의 마당에서 그는 다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영화가 명예와 존엄의 관계에 대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결말부에 있다. 탈출 시도가 한명회의 함정으로 무너졌을 때, 소년은 엄흥도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거짓 연기를 펼쳐 그를 살리고 홀로 붙잡힌다. 명예의 문법으로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는 자신을 배신당한 자로, 상대를 배신자로 만듦으로써 상대의 목숨을 구한다. 명예를 버리는 방식으로만 지킬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그리고 저 유명한 마지막 장면. 소년은 활줄에 목을 맡기고, 문밖에서 그 줄을 당기는 것은 엄흥도다. 사약도 자객도 아닌 이 기이한 연출은 자살과 타살을 겹쳐놓음으로써 역사 기록의 모호함을 끌어안는 동시에, 이 영화 전체의 논리를 완성한다. 자신의 명예를 박탈한 수양의 손에는 죽지 않겠다는 것, 자기 죽음의 형식만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것은 존엄의 마지막 주권이다. 그리고 그 주권의 집행을 소년은 국가가 아니라 이웃에게, 자신을 거지 취급했다가 벗이 된 사내에게 맡긴다. 왕과 ‘사는’ 남자였던 엄흥도는 왕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는 남자가 됨으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 품은 동거의 의미를 끝까지 밀고 간다. 『 마스터플롯 』 2장에서 나는 미국의 자경단 서사가 개척민 신화 속에서 ‘애국자라는 명예’를 보상으로 받아온 것과 달리, 한국에는 서사적 보상으로서의 명예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다고 적었다. 국가가 보호하지 못하는 자리를 대신 감당한 이들은 보상은커녕 명예 회복조차 받지 못하기 일쑤라고. 엄흥도는 정확히 그 계보에 위치한다. 역사의 엄흥도는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하던 때에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하더라도 내가 달게 받겠다”라는 말과 함께 왕의 주검을 수습하고 사라졌으며, 그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수백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말하자면 한국형 마스터플롯에서 명예는 언제나 후불이며, 그 지불을 보증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역사가 언젠가 갚아줄 것이라는 서사적 후불제. 이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그 문법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보상 없이 존엄을 수습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보상 없는 감당에 익숙한 공동체가 반응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허구성의 논점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해 두자. 관객은 단종과 엄흥도가 역사임을 알고, 그들의 우정이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알면서도 운다. 같은 ‘역사의 빈칸 채우기’라도 음모론과 사극을 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 신호의 유무다. 음모론이 허구를 논픽션으로 위장해 공동체를 닫힌 확신으로 몰아넣는다면, 이 영화의 허구성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존엄의 가능성을 공동체의 상상 속에 열어 놓는다. 마스터플롯이 허구이자 논픽션으로서의 중간적 위상을 가진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1457년의 강가에서 수습된 것은 한 소년의 주검이지만, 2026년의 극장에서 수습되고 있는 것은 수치의 시대를 건너는 공동체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다. 그 수습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언어이고, 그것을 읽고 다시 쓰는 일이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작업이다. © ㈜온다웍스,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쇼박스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박인성(문학평론가) |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 영화, 드라마, 웹소설, 만화, 게임, 인터넷 밈까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의 서사를 읽어내는 비평을 쓴다. 저서로 『이것은 유해한 장르다』(2024), 『마스터플롯』(2026)이 있고, 피터 브룩스의 『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2017)를 번역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호프 >(나홍진, 2026)는 우리가 알던 비평의 한계를 절감하게 했다. 비평 글 각각의 탁월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비평의 작동 방식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을 특정한 장에 끌어당기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것은 제도적 패배다. <호프>는 제2의 < 디 워 >(심형래, 2007)가 아니었다. 영화를 즐겨 보는 이들 사이에선 <디 워> 정도의 화제가 된 것만 같았고, <호프>를 두고 수많은 말이 오고 갔음을 누구나 느꼈다. 하지만 <호프> 주위엔 논객이라 할 만한 매개가 없었다. 2007년의 <디 워> 사태는 진중권 평론가를 비롯한 일련의 기성 평론가 진영과 포털 사이트에 모인 대중의 갈등 양상으로 번졌었다. 양극단에 다중 다수의 논객이 생겼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할리우드를 향한 사대주의 등 여러 사회적 담론이 부풀었다. <호프>엔 말만 있고 뼈가 없었다. 상술한 논객, 달리 말해 중심 지대가 된 논지가 부재했다. 이것은 <호프> 스스로가 원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수의 공식 석상에서 밝혔듯 나홍진 감독은 앞만 보고 즐기는 영화를 택했다. 장재현 감독이 < 파묘 >(2024) 개봉쯤 밝혔던 태도와도 비슷하다. 극장 엔터테이닝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는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의 대중영화 감독들은 다 같이 ‘보기만 해도 재밌는’ 영화를 꿈꿨다. <호프>도 그렇듯 보인다. 1980년대를 가리키는 다소간의 이미지가 영화에 내포되었기는 하나 이것은 기호가 되지 않는 기표에 가까웠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상영 이후 《씨네21》 김소미 기자가 설명한 것처럼, [1] <호프>는 작중 ‘서브 텍스트’를 최대한 장난스럽게 소거해 가는 영화였다. <호프> 개봉 이후 영화를 지지하는 이들이든 반대하는 이들이든, 1980년대라는 맥거핀에 관해선 딱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야기하지 않았다”기보단 그러질 “못했다.” 다시, <디 워>의 사례처럼 어떠한 담론의 실재라도 만들었냐의 차원에서 비평은 <호프>를 이기지 못했다. 전술했듯이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매체와 창구, 플랫폼이 <호프>로 휩싸이긴 했다. 말 그대로 휩싸였다. 그저 분위기에 휩싸인 듯 보였다. 매체부터. 《씨네21》은 <호프>의 작가, 장르, 서사 등에 관해 비평했다. 이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의 얄 사다트 평론가,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의 글을 실었다. 글 하나하나의 가치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며, <호프>라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선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호프>에 대해 생산됐던 말들이 순환적으로 돌고 도는 허무의 궤에 빠졌단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좋은 비평일지라도 대중들의 거친 찬동이나 거센 반발을 그러모으진 못했다. 비평이 꼭 대중과 영합해야만 한다는 고루함의 태도는 아니다. 다만 적어도 <호프>에 대해서는, 한여름의 텐트폴 영화에 있어서는 제 몫을 했어야 만족스러웠을 듯하다. 대신 <호프>를 두고는 비평적 담론에 대한 논의보단 평론가 개인의 인격과 이력에 대한 대중의 비난이 잇따르기까지 했다. 국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이동진 평론가의 말조차 그랬다. [2] <디 워> 마지막의 ‘아리랑’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다시 말하지만, 개별 비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큰 사태다. 질량 없는 부피, 맥락 없는 요소, 총체 없는 부분. 얄 사다트 평론가는 “미국에서 흔히 쓰는 ‘larger than life’라는 표현은, 어쩌면 위대한 블록버스터가 불러일으키는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인지도 모른다.” [3] 라며 <호프>를 상찬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한국에서 <호프>를 두고 발생한 일련의 현상에 빗대어진다. 니콜라스 레이가 <실물보다 큰> 그림자를 보여줬듯이 <호프>에 대한 비평은 그것의 실재보다 큰 음영으로만 존재했다. <호프>에 대한 말은 흐릿했고, <호프>에 대한 말들에 반응하는 말들이 더 뚜렷했다. 아무런 생각도 안 해야 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듀나 평론가의 말처럼 “<호프>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영화가 아무 생각을 안 할 때” [4] 이기 때문이다. <호프>는 그 내부의 원리에 천착할수록 힘을 잃는 덩어리다. 이 작품이 어느 IPTV를 통해 수입된 이름 모를 감독의 영화였다면 많아야 수백 명 정도가 기억하는 B급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호프>는 한국 영화산업의 중심에 있는 700억 원(추정)짜리 대작이다. ‘컬트’가 될 수 없다. 세상에 수백억 원을 들여 수백만 명이 봤으며 북미와 유럽에 배급된 컬트영화란 성립하지 않는다. 존재론적인 모순. <호프>는 작아야 하지만, 너무 커졌다. 역도 성립한다. 더 커야 하지만, 너무 작아져 버렸다. 모순은 더해진다. <호프>는 칸 경쟁부문에 진출하여 국내 평자들에게 모종의 비평적 요구를 선보인 ‘작가주의적’ 작품으로 소비됐다. 한국영화의 정체성을 하나의 토큰처럼 사용한 유럽 영화계의 전략이었을까. 여하간 결과적으로, 대중에게 나홍진은 봉준호 , 박찬욱 이후 한국영화를 견인할 것만 같은 인물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에 <호프>를 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매체와 평단의 방기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말해도 문제, 말하지 않아도 문제. 하지만 마땅한 방법론 따위 없는 듯한 절벽. 필자는 이에 관해서 ‘한국식 작가주의의 패배’라는 요지의 단상을 남겼다. [5] 영화보다 큰 곳이 아니라 감독의 세계관에 들어가 비평하던, 즉 봉준호, 박찬욱, 홍상수 의 영화를 작가 개인의 것으로 탐색하던 2000~2020년대의 작가주의 비평으론 <호프>에 대적할 수 없단 것이다. <호프>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패배의 운명, 허무의 감각을 타고났다.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호프>의 내적 가치는 딱히 없다. 이 가치 없음의 가치에 관해 구구절절한 글을 쓴 적도 있다. [6] <호프>에 부여된 비평의 질료란 영화 바깥에서 발견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그 어떤 틀로도 규정되지 않는 아웃라이어이기에, 장르적으로도 영화사적으로도 작가주의적으로도 큰 가치가 없는 부수이기에, 한국영화가 꾸준히 배태해 온 다성적 모방의 성취에 극도로 기대고 있기에, 대신 내부적으로는 자체적 맥락을 일절 가미하지 않았기에 유의미” [7] 하다. 간단히 말해 <호프>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영화 매체의 테두리를 오고 가는 원심력의 원리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작품과 작가를 탐하기보단, 비평이 생성되고 유통되는 제도의 지형도를 더 면밀히 살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비평 제도와 비평적 틀은 ‘바깥’을 이야기하는 힘을 잃어왔다. 구심력을 택해왔다. 임재철 평론가는 1999년 《필름 컬처》 1호의 권두에서 이 사태를 예견했다. “현재 한국의 영화 비평은 글쓰기가 응당 가져야 할 제도와의 긴장감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있다. 비평 자체가 마치 자신이 제도의 일부분인 것처럼 -심지어 아무런 대중적 영향력이 없는 경우에도- 착각하는 경우도 왕왕 목격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비평의 자족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영화 창작 주체 그리고 나아가서는 영화 제도의 구성원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하지만 그것이 생산적인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소통은 위상의 차이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거칠게 볼 때 한국식 작가주의란 감독들을 신봉하고, 그들의 미시 세계를 해제해야 한다는 1990년대 전후 국내의 시네필리아적 계보에서 연장했다. 그런데 <호프>에서 나홍진의 작가성 같은 것은 이 거대한 콘텐츠 놀음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었고, <호프> 비평에 제대로 맞물릴 수 없었다. 비평은 작품과 제도, 그 어느 곳과도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이가 문제의식을 느꼈다.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일종의 갈증 같은 것을 느낀 듯하다. 『호프 끝장』 [8] 이라는 제목으로 8월 31일 출판 예정인 하나의 평론 선집은 이에 관한 리액션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 책의 소재는 <호프>를 둘러싼 모든 긍정과 부정의 반응이며, 이 책은 반응을 생산하는 모든 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다.”라는 책 소개 글이 단서다. 이야기를 더 나누자는 제스처이며, 유의미한 시도인 듯하다. 다만 이러한 기획조차 <호프>의 허무를 완연히 이기긴 힘들 것이라 슬그머니 비관해 본다. 아직 책의 내용을 상세히 읽진 못했지만, 기획 배경과 사전 공개된 한 꼭지의 다음 내용에 미루어 보았을 때 그렇다. “그렇기에 <호프>는 신정원 과 < 차우 >를 다시 불러내며 ‘한국의 시네필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다.” [9] 두 가지의 의문이 드리운다. 첫째, 『호프 끝장』이 택한 책의 물성은 <호프>란 허무를 모종의 틀에 가두기 위한 방책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호프>의 범석( 황정민 )과 주민들이 외계 종족을 보고 느낀 공포의 감정과 유사한 반응일 테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제야 <호프> 안쪽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 글 역시 <호프>의 허무를 이기지 못한 사례의 하나란 이야기다) 정체 모를 언어가 눈과 귀를 파고들 때, 우리의 본능은 자연스레 공포를 느낀다. 도망가거나 공격한다. 『호프 끝장』은 후자인 듯하다. ‘끝장’이라는 제약의 언어를 통해 <호프>를 둘러싼 말들의 확산을 한 주머니에 가두려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낯선 괴물을 포박하여 감금하듯이 비평가들은 이것에 대한 ‘끝장’을 원하는 듯 보인다. 손아귀에 넣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호프>의 크기는 웬만한 주머니의 용적량을 넘어섰다. 둘째, 왜 한국의 ‘시네필’들이 <차우>로 단결해야 하는 것일까. 궁금증의 시작은 꽤 개인적이다. 필자 역시 저 부름에 사전적으로 응답한 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7월 6일 <호프>의 언론배급시사회 직후 필자는 개인 SNS에 <호프>의 뚜렷한 레퍼런스가 <차우>임을 언급했다. [10]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겪었던 세대에게, <차우>와 신정원 감독은 현재 우리가 잃어버린 충무로의 자기반영적 패스티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호프>는 이런저런 장르적 요철을 뿌리 삼아 발진한 대중영화이기에 <차우>의 호명엔 어느 정도 당위성이 생긴다. 틀린 말이란 의도가 아니다. <호프>와 <차우>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 © ㈜영화사 수작, 빅하우스(주)벤티지홀딩스 (사진: Daum ) 여기서 짚고 싶은 점은 <호프>가 <차우>의 적자라든지 하는 비평적 주제의 옳고 그름이 아니다. “<차우>를 아는 이라면 대개 그랬을 것”이라 말하는 필자의 태도야말로 이 속 간지러운 의문의 원흉이다. 김신 평론가는 KMDb의 ‘비평, 안녕하십니까’에서 동시대 한국 시네필들의 폐쇄성 또는 군집성을 지적한 적 있다. “다수의 시네필 집단은 종종 영화와 비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몇 가지 디지털 채널을 일종의 단일 신경망처럼 공유하는 초개체 생물 군집처럼 보일 때” [11] 가 있다는 것이다. 적확하다. <호프>에 대한 <차우>의 연상은 어느 순간부터 동시대 평자들에게 하나의 집단적 기억으로 각인됐다. ‘시네필들의 단결’은 이미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끈끈하다. 그럼에도 재차 집합 구호를 외치는 일은, 지금의 ‘시네필 단결’이 대중적으로 유효한 테제를 남기지 못한 채 사그라들었다는 허무감의 역설적 발로일 것이다. <호프>와 <차우>의 비교 논지는 작금 시네필리아적 행위의 특질을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다. 김병규 영화평론가는 동시대 시네필리아들이 20세기(한국이라면 2010년대 이전까지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기억에 짓눌려 비명을 지른다고 썼다. “어쩌면 동시대 영화는 더 이상 유효한 효과를 일으키지 못하고 눌어붙은 세계를 다시 조형하는 시네필리아의 작업이 된 것” [12] 이다. 요즈음 대개의 시네필리아는 과거의 유산을 파먹는 일에 흥미를 느낀다. <호프>를 보며 한국 장르영화의 계보를 따지거나 <차우>를 떠올린다. 이럴수록 작품 내부를 향한 비평에 더해, 그 작동 방식과 환경까지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투보다 전쟁. <호프>에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주민들을 모을게요 『호프 끝장』은 <호프>를 끝장내지 못할 것이다. “비평계 공론장이 점차 고립된 상황, 그리고 그게 고립된 원인이 비평계 내부에 있다고 말하며 또 다른 고립이 생성되는 상황의 원인을 몇몇 평자들의 책임”(김신) [13] 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환경 변화가 수반됐다. 여기서 그 변화와 일일이 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힘도 없다. 작금의 상황에 놓인 그 어떤 비평적 주체도 <호프>를 둘러싼 제도의 불명확성을 다잡진 못한다. 좁디좁은 비평계란 ‘군체’가 700억 원짜리 <호프>를 이기지는 못한다. 마찬가지로 <호프>는 약 59조 원짜리 X(2022년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금액)를 이기지 못한다. <디 워> 사태를 재연할 역량은 소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다수가 다수의 말을 쏟아 내는 쪽이 훨씬 큰 경제력을 생산한다. 이 시장 논리의 당연함은 거의 장르적일 정도로 세계에 고착됐다. 어쩌면 “호프 끝장”이란 제목은 이 한계를 미리 알고 선제적으로 자조한 결과물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일단 주민들을 모아 대응하겠다는 성애( 정호연 )의 말처럼, 할 일은 해야겠다는 종류의 동력이었을까. 마음이 이상하다고 요령부득 뇌까리기만 하는 범석처럼 무력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덧붙여 필자 나름의 극복 방식도 제언해 보고 싶다. <호프>에 대한 비평의 (뒤늦은) 승리 방식이란 두 가지로 고려된다. 첫째, <호프>의 자결을 기다린다. 상업영화의 자결이란 개봉 상영의 끝, 그로 인한 대중들의 무관심이다. <호프>는 거대 외화들의 공습 시점에 맞춰 이미 피를 흘리는 중이다. 둘째, 시간의 흐름이다. < 환송대 >(1962)에 관한 크리스 마커 자신의 말,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를 변주하자면 “시간은 <호프>에 대한 비평의 유일한 승리”일 것이다. 하나로 뭉치지 않은 채 맥락 없이 흐트러져버린 비평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위해선 훨씬 더 긴 시대의 틈이 필요하다. 쓰고 보니 두 방식 모두 ‘하릴없는 기다림’의 다른 말이다. 범석이 왜 무력해졌는지 잘 알겠다. <호프>에 대한 말들을 모으고, 그것들의 쓸모없어짐을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성애처럼 낙관으로 억지 부리듯이, 의도적으로 최대한 많은 문장을 모으려 했다. 결론적으론 이 글 역시 무수한 실패의 종이 쪼가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호프>의 안쪽처럼 난삽한 구성이 되더라도 일부러 그러려 했다. 여하간 그 과정에서 《씨네21》, 《필름 컬처》와 같은 오래된 영화 전문지부터, 《쿨투라》라는 문화지, 독립출판물, X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 블로그, KMDb 영화글 등의 여러 창구를 통과했다. 지금 영화에 관해 (필자처럼 나름 고관여로) 말하고 쓰는 이들의 경로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은 곳에 모일 테다. 하여 이런 상상도 해본다. ‘성애가 주민들을 한곳에 모은다면, 외계인들은 외려 더 손쉽게 인간들을 절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란 무서움.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사족 끝으로 정직하게, 이 글의 원료는 필자의 사적 회한이자, 자의식 과잉의 내적 독백이었다. 설령 아무도 듣지 않았더라도, 왜 <호프>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하지 못했을까. 빙빙 돌려 그 허무의 가치를 어떻게든 격상하려 한 것일까. ‘<호프>에 관해’ 무언가 말할 수 있겠다는 지각은, ‘<호프>를’ 말할 수 있겠단 사실과 같지 않은데 말이다. 정치에 대한 영화와 정치적 영화를 갈랐던 고다르의 말처럼, 저 둘은 엄연히 다르다. 태초부터 <호프>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씨네21》 지면에 별점 4개를 주었다는 일의 책임감이었을까.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작가적 기호(記號)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개인의 기호(嗜好)로 유희할 순 없는 것일까. (사실 그러기는 싫다)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 [14] 이 팽배한 이 시대에, 모든 비평은 에세이가 될 수밖에 없을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여 이 글처럼 우리는 계속 영화에 ‘관한’ 무언가에 더 크게 반응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모든 물음은 마베이요의 빛나는 심장처럼 아무 의미 없는 허세에 가까울까. 어쨌거나 한 명의 관객이자 평자로서는 <호프>의 허무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체, <호프>를 두고 무슨 말이 남았나? 아니, 애초에 왜 말했나? *** [1] “ [특집] 백주 스릴러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 칸 경쟁부문 <호프> 첫 시사 리뷰 ”, 《씨네21》 1558호, 2026. 5. 29. [2] “ 이 세상은 아직 ”.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개인 블로그에 <호프> 별점에 대한 일종의 후기를 남겼다. 2026. 7. 20. [3] “ [기획] 가속이 향하는 곳, 얄 사다트 평론가가 본 <호프> ”, 《씨네21》 1568호, 2026. 8. 6. [4] “ [특집] <호프>의 외계인은 왜 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 외계인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장르 읽기 ”, 《씨네21》 1566호, 2026. 7. 24. [5] “ 사회는 영화보다 크다. 네 가지 관점으로 보는 2026년➊ 한국식 작가주의의 한계를 마주한 2026년 ”, 《씨네21》 1570호, 2026. 8. 21. [6] “ [영화] 〈호프〉는 한국영화이기에 유의미하다. ” 《쿨투라》 2026년 8월호, 2026. 7. 29. [7] 4)와 동일. [8] 『호프 끝장』 알라딘 북펀드 웹페이지 . [9] 『호프 끝장』의 출판사 ‘디깅룸’의 X(구 트위터) 게시글 . [10] https://www.instagram.com/p/Dacd6WLj8aH/?igsh=M285cnVvcmZ5cXF1 [11] 김신. “ 사진적 이미지에서 확률론적 이미지로: 2020년대 전후 시네필 커뮤니티와 영화 속 대화에 관한 단상 ”, 2024. 11. 21. [12] “ [비평] 우리 모두 곤경에 처해 있다, 김병규 평론가의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 《씨네21》 1540호, 2026. 1. 21. [13] 10과 동일. [14] 이광호. “ 1인칭 사이 1인칭: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1992) ”, 2024. 5. 21. 이우빈(영화기자) l 《씨네21》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관에 가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본 1997년생. 최근엔 저널리즘 비평이 대체 무엇인지 열심히 고민 중.
<해피엔드> / © ㈜명필름 *** 현재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기획 전시 ‘ 제목전(展) – 텍스트, 타이포그래피, 무빙 이미지 ’ 가 진행 중이다. 1919년 < 의리적 구토 >로 시작해 2025년 개봉작까지 8,400여 편의 한국영화를 다루는 이번 전시는 100년이 넘는 한국영화 역사를 ‘영화 제목’의 관점으로 살핀다. 제목은 관객에게 한 편의 영화를 가장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문장(혹은 단어)이지만, 이를 통시적으로 관통해 보면 제목 하나하나에 당대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화 제목은 한 편의 영화를 설명하는 도구인 동시에 영화가 태어난 시대의 정서를 품고 있는 문장이다. KMDb는 이번 전시와 연계해 두 편의 글을 공유한다. 1970~90년대 ‘저항’의 움직임 을 다룬 문주화 영화평론가에 이어, 이윤종 영화 연구자가 1980년대 한국영화계에 발생한 ‘에로티시즘’ 영화의 붐을 제목에서 읽어낸다. *** 한국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이 최초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등 유럽 모더니즘 감독들과 전후의 일본 신세대 감독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실험적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각적 에로티시즘을 부각하기 시작한 것이 50년대 중반부터인 것을 고려하면, 한국영화는 물질적 제작 여건이 상당히 열악했던 50년대부터 세계영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갔던 셈이다. 영화의 제목에서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부터이지만, 에로티시즘의 조류는 50년대 중반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 신으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지는 영화적 에로티시즘의 역사를 살펴보며 제목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살펴보자. 에로티시즘, 세계영화의 문법 앞서 언급했던 1950년대에 등장한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 신은 윤인자 가 주연을 맡았던 < 운명의 손 >(한형모, 1954)의 한 장면이다. < 쉬리 >(강제규, 1999)와 유사한 내용의 스파이 스릴러물인 <운명의 손>에서 그녀는 북한군 첩보원 역을 맡아 남한의 방첩대원과 사랑에 빠져 그와의 비극적 결전 장면에서 아주 짧은 입맞춤을 나눈다. 공교롭게도 윤인자는 한국영화 최초의 욕조 신에도 등장하게 되는데, 이광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에서 그녀는 성악가를 지망하는 고학생으로서 온천장에 여행을 가서 욕조 안에서 수건으로 가슴을 가리고 앉아 있는 장면을 촬영한다. <운명의 손>의 키스 신은 뽀뽀에 가까운 데다 다소 성(聖)스러운 느낌마저 들어 에로틱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이를 선정적으로 생각하는 관객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며, <그 여자의 일생>의 어깨 노출 장면은 당대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연출이었던 만큼 윤인자는 50년대 최고의 섹시 배우로 등극하게 되었다. <운명의 손> 중 한국영화 최초 키스 신 60년대에는 도덕적 엄격함을 강조한 군부 정권의 강력한 검열로 인해 에로티시즘의 표현이 불가능했을 것 같지만, 세계영화의 조류를 따르려는 한국영화계의 강렬한 몸부림으로 인한 것인지, 뒷모습이지만 여성의 누드 장면이 최초로 등장해 감독이 검찰에 기소되고 벌금형이 부과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현목 감독의 1965년작 < 춘몽 >이 그것으로 일본의 실험적 핑크영화인 <백일몽>(다케치 테쓰지, 1964)의 대본을 번안해 일본적인 화면을 유럽 모더니즘, 특히 독일 표현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가 결합된 무대로 변형해 연출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서사보다는 영상 실험을 중시한 <춘몽>에는 여주인공이 제목처럼 ‘봄의 꿈’을 표현한 추상화와 같은 텅 빈 백화점에서 누드로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장면이 뒷모습으로 카메라에 잡히는데, 여배우는 실상 살색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60년대에 상당히 많아서 문예영화의 다수가 지금의 기대치로는 매우 수위가 낮은 정사 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승옥 소설가의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하는 < 안개 >(김수용, 1967), 오영수와 차범석의 동명소설을 각각 원작으로 하는 < 갯마을 >(김수용, 1965)과 < 산불 >(김수용, 1967), 이어령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 장군의 수염 >(이성구, 1968) 등을 들 수 있다. 정진우 감독의 청춘영화인 < 초우 >(1966)와 < 초연 >(1966)도 유사한 흐름 속에 있었으나, <춘몽>에 이어 검열의 레이더망을 피하지 못한 비운의 영화는 < 벽속의 여자 >(박종호, 1969)였다. D. H. 로렌스의 영국 모더니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연상시키는 서사의 <벽속의 여자>는 성 불구인 남자친구와 혈기왕성한 다른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젊은 여성( 문희 )의 방황을 내세워 박종호 감독이 외설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는 불운을 맞이하기도 했다. <춘몽>, <벽속의 여자> / © 세기상사(주) 70년대에 접어들면 < 해변의 정사 >(신봉승, 1970, 필름 소실), < 속 벽속의 여자 >(박종호, 1970), < 그날밤 생긴 일 >(이영우, 1971), < 벽속의 남자 >(박종호, 1972), < 몸 전체로 사랑을 >(홍파, 1973) 등의 영화 제목이 눈에 띈다. 60년대의 마지막 해에 감독이 불구속 기소되긴 했으나 제법 괜찮은 흥행을 거둔 <벽속의 여자>의 속편과 더불어 유사한 제목의 남성 버전 영화가 제작되고, 다른 영화들도 이 영화처럼 삼각관계를 앞세운 연애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의 영화적 에로티시즘은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집약된다. 첫째, 작가주의 감독인 김기영 감독과 하명중 감독이 에로티시즘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을 70년대에 꾸준히 만든 것이 하나이다. 김기영 감독은 1960년작 < 하녀 >에 이어 < 화녀 >(1971), < 충녀 >(1972), < 육체의 약속 >(1975), < 이어도 >(1977),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 수녀 >(1979), < 느미 >(1980)에 이르는 ‘여자’ 시리즈를 통해 여성의 성적 욕망을 사회적 욕망과 엮어서 펼쳐냈다. 하길종 은 미국 유학 후 화려하게 데뷔한 만큼 여러 논란(표절이 아님에도 이탈리아 영화 표절론 및 동성애 묘사 논란 등)에 휩싸이기도 했던 < 화분 >(1972)에 이어 < 수절 >(1973)과 < 한네의 승천 >(1977)에서도 다소 높은 수위의 정사 장면을 선보이는 시도를 했다. <육체의 약속>, <한네의 승천> / © ㈜동아수출공사, 동국대학교 둘째,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가난과 외압에 의해 성매매업에 종사하게 되는 젊은 여성들의 고난과 불운을 다루는 ‘호스티스 영화’의 등장이다.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인 < 별들의 고향 >(1974)에 이어 김호선 감독의 < 영자의 전성시대 >(1975)가 젊은 호스티스의 방황과 좌절을 그리며 침체를 겪던 70년대 충무로에 촉촉한 단비와도 같은 대흥행으로 가뭄을 해소시키자 대다수의 감독들이 호스티스물 제작에 뛰어들었다. 홍파 감독의 <몸 전체로 사랑을>도 여자친구와 호스티스 사이에서 갈등하던 남자를 그리고 있고 하길종 감독도 < 속 별들의 고향 >(1978)을 연출했던 것을 감안하면, 호스티스 영화의 시작은 이미 1973년부터 예고되어 상업영화와 작가주의 영화의 경계마저 허물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신중현의 동명 히트곡을 소재로 만들어진 뮤지컬 호스티스 영화 < 미인 >(이형표, 1975)을 포함하여, < 여자들만 사는 거리 >(김호선, 1976), < 나는 77번 아가씨 >(박호태, 1978), < 미스양의 모험 >(김응천, 1978), < O양의 아파트 >(변장호, 1978), < 꽃순이를 아시나요 >(정인엽, 1979), < 가시를 삼킨 장미 >(정진우, 1979), < 속 O양의 아파트 >(변장호, 1979), < 아침에 퇴근하는 여자 >(박용준, 1979), < 죽음보다 깊은 잠 >(김호선, 1979)등이 70년대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에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 호스티스 영화의 제목들은 여성의 노동과 욕망을 비유와 은유를 거쳐 우회하지 않고 매우 직접적으로 서술한다. <영자의 전성시대>, <미인>, <꽃순이를 아시나요> / © ㈜태흥영화, 김미연 한국적인 ‘에로’가 꽃피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 에로티시즘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호스티스에서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로 확대되며 다양한 장르물 속에서 에로티시즘이 구현되기 시작한다. 이 같은 에로방화 [1] 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1982년 초에 개봉한 정인엽 감독의 < 애마부인 >으로, 이 영화의 제목은 7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흥행에 성공한 프랑스 영화이자 작품성 있는 에로물로 유명한 < 엠마뉴엘 Ⅰ >(쥐스트 자캥, 1974)을 연상시키기 위해 지어졌다는 것은 매우 유명하다. 다만 ‘말을 사랑하는 부인’이라는 애초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부에서 문제삼은, ‘애마’의 어감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말 마(馬)’ 자가 삼베를 뜻하는 ‘마(麻)’로 바뀌었다는 슬픈 비화 또한 항상 영화를 따라다닌다.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애마부인>은 중산층 가정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남편이 커리어에만 너무 매진하여 아내와 가정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시대를 앞서간 포스트모던한 주제의 영화다. <애마부인>의 등장 이전부터 < 아낌없이 바쳤는데 >(박호태, 1980), < 화려한 경험 >(이상구, 1980),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정진우, 1981), < 색깔있는 여자 >(김성수, 1981),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정진우, 1981), < 육체의 문 >(이기환, 1981), < 피막 >(이두용, 1981)등의 영화에서 멜로드라마, 시대극, 스릴러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급과 삶의 방식을 지닌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애마부인> / © 최재용 에로방화는 크게 현대극과 사극으로 나눌 수 있는데, 현대극은 <애마부인>을 포함하여 < 사랑의 노예 >(고영남, 1982), < 반노 >(이영실, 1982), < 자유처녀 >(김기영, 1982), < 나비품에서 울었다 >(임권택, 1983), <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 >(정지영, 1983), < 김마리라는 부인 >(정인엽, 1983), < 엑스(X) >(하명중, 1983), < 오마담의 외출 >(김수형, 1983), < 적도의 꽃 >(배창호, 1983), < 무릎과 무릎 사이 >(이장호, 1984), < 깊고 푸른 밤 >(배창호, 1985), < 색깔있는 남자 >(김성수, 1985), < 달빛 멜로디 >(이황림, 1984), < 밤의 열기 속으로 >(장길수, 1985), < 육식동물 >(김기영, 1985), < 장사의 꿈 >(신승수, 1985), < 여왕벌 >(이원세, 1985), < 달빛 사냥꾼 >(신승수, 1986), < 두 여자의 집 >(곽지균, 1987), < 레테의 연가 >(장길수, 1987), < 안개기둥 >(박철수, 1986), < 매춘 >(유진선, 1988), < 성공시대 >(장선우, 1988), < 성야 >(신승수, 1988), < 아메리카 아메리카 >(장길수, 1988), < 그후로도 오랫동안 >(곽지균, 1989), <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송영수, 1989), < 불의 나라 >(장길수, 1989), < 서울무지개 >(김호선, 1989), < 추억의 이름으로 >(유영진, 1989), < 물의 나라 >(유영진, 1990) 등이 당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이들 현대극은 급속하게 산업화된 한국 사회에서 이전과 달라진 입지를 가진 여성들이 변화된 연애와 결혼, 생계와 직업 세계에서 갈등을 겪으며 한국적 근대화의 빛과 어둠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극은 <피막>을 포함하여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두용, 1984), < 땡볕 >(하명중, 1984), < 내시 >(이두용, 1986), < 변강쇠 >(엄종선, 1986), < 뽕 >(이두용, 1985), < 태 >(하명중, 1986), < 씨받이 >(임권택, 1986), < 사노 >(엄종선, 1987), < 감자 >(변장호, 1987), < 사방지 >(송경식, 1988), < 아다다 >(임권택, 1987), < 업 >(이두용, 1988)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 대다수가 칸, 베를린, 베니스는 물론이고 아시아태평양 영화제나 북미권 영화제에 초청되거나 수상하며 영화사상 거의 최초로 한국영화를 세계 무대에서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에로사극은 전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양반 가부장제에 빗대어 80년대의 신군부 독재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한다는 특징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상) <무릎과 무릎 사이>, <그후로도 오랫동안> / © ㈜태흥영화 (사진: 양기주) (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뽕> / © 정지훈, ㈜태흥영화 (사진: 양기주) 보다 여성적인 관점에서 1990년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미 80년대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에로티시즘과 페미니즘의 결합이 세 가지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첫째, 에로티시즘을 차용하면서도 80년대보다 더 강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제하에서 겪는 억압과 고통, 저항 등을 그리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김유진, 1990), < 물위를 걷는 여자 >(박철수, 1990), < 수탉 >(신승수, 1990), < 우묵배미의 사랑 >(장선우, 1990),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장길수, 1989), < 경마장 가는 길 >(장선우, 1991),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이석기, 1991), <서울, 에비타>(박철수, 1991), < 아그네스를 위하여 >(유영진, 1991), < 은마는 오지 않는다 >(장길수, 1991), < 그대안의 블루 >(이현승, 1992), < 개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 < 네온속으로 노을지다 >(이현승, 1995),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오병철, 1995),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1996), < 산부인과 >(박철수, 1997), < 올가미 >(김성홍, 1997), <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강우석, 1998), < 처녀들의 저녁식사 >(임상수, 1998), < 송어 >(박종원, 1999) 등의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둘째, 에로티시즘이 로맨티시즘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로맨틱코미디의 조류가 형성되며 미성년자 관람불가 로코물이 당대에 큰 흥행을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 결혼이야기 >(김의석, 1992), < 미스터 맘마 >(강우석, 1992), < 가슴달린 남자 >(신승수, 1993), < 그 여자, 그 남자 >(김의석, 1993), < 사랑하고 싶은 여자 & 결혼하고 싶은 여자 >(유동훈, 1993), < 마누라 죽이기 >(강우석, 1994), < 닥터봉 >(이광훈, 1995), < 고스트 맘마 >(한지승, 1995), < 코르셋 >(정병각, 1996), < 넘버 3 >(송능한, 1997), < 미스터 콘돔 >(양윤호, 1997)등이다. 코미디는 아니지만 < 접속 >(장윤현, 1997)과 < 정사 >(이재용, 1998)도 에로물과 로맨스물의 경계를 흩뜨려 놓은 작품들로 당대에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들이다. 마지막으로, 대중영화임에도 포르노에 근접한 에로티시즘을 표방한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90년대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80년대 <애마부인>의 대흥행 이후 <애마> 시리즈로 나온 영화들을 포함하여 <매춘> 시리즈 및 과일 이름을 딴 < 산딸기 >(김수형, 1982), <뽕>, < 빨간 앵두 >(박호태, 1982) 시리즈가 90년대에도 꾸준히 만들어진다. 80년대에 맨 처음 흥행에 성공했던 이들 영화의 1편은 대중영화의 선에서 만들어졌고 한국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작품들이었으나, 90년대까지 이어지는 후속 시리즈들은 소프트포르노에 가까운 성애물로 변질된다. 그리고 80년대 에로방화와는 에로티시즘의 수위가 다른 본격 성인용 대중영화들이 개봉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거나 흥행에 크게 성공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 < 성애의 침묵 >(정인엽, 1992),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양병간, 1993), < 아담이 눈뜰때 >(김호선, 1993), < 너에게 나를 보낸다 >(장선우, 1994), <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오일환, 1996), < 모텔 선인장 >(박기용, 1997), < 쁘아종 >(박재호, 1997), < 창(노는계집 창) >(임권택, 1997), < 물위의 하룻밤 >(강정수, 1998), < 실락원 >(장길수, 1998), < 죽이는 이야기 >(여균동, 1997),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노랑머리 >(김유민, 1999), < 거짓말 >(장선우, 1999)등이 있다. <성애의 침묵>에는 <엠마뉴엘> 시리즈로 유명한 네덜란드 여배우 실비아 크리스텔이 출연했고,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아담이 눈뜰 때>, <거짓말>은 외설론에 휩싸였던 장정일의 소설 [2] 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해피엔드>와 <거짓말>은 이전의 한국영화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시대의 여성 캐릭터와 정사 장면을 선보여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많은 논란을 얻기도, 매우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해피엔드>, <거짓말> / © ㈜명필름, 신씨네 한국영화 속의 에로티시즘은 남성 관객의 눈요기를 위한,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치중했다는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여성을 시각화하고 부각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며 점차 여성영화로 진화했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5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 속에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억압하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의 성적·사회적 욕망을 억누르는 피해자로 그려지던 여성들은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로 접어들며 <해피엔드>와 <거짓말>에 이르러서는 여성 해방에서 더 나아가 개인적 쾌락을 위해 사회적 일탈도 마다하지 않는 새로운 욕망의 주체로 변모되기 시작한다.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영화에서 에로티시즘은 거의 완전히 소멸되기 시작하여 2020년대에는 로맨스와 멜로드라마마저도 찾기 어려운 실정이 되었다. 로맨스와 멜로드라마가 부재하다는 것은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성의 연애와 결혼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면 여성이 영화 속에 등장할 자리조차 없다는 2020년대 중반의 현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 [1] ‘에로방화’는 비디오 출시 전용의 소프트포르노 영화인 에로비디오와 이 시대 35mm 극장 개봉용 영화를 구분하기 위해 필자가 만들어낸 표현이다. ‘에로’라는 단어 때문에 편견이 생기기 쉽지만, 당대에는 에로라는 표현이 항상 사용되던 것이고, 80년대까지 한국영화를 ‘방화(邦畵)’라 불렀기 때문에 이 역사적 용어를 소환해 당대에 극장에서 개봉한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대중영화를 ‘에로방화’라 지칭하기로 한다. [2] 앞선 3편의 영화는 장정일의 동명소설을, 영화 <거짓말>은 그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1996)를 원작으로 한다. 이윤종(영화 연구자) l 1980년대 한국 에로영화 연구에 이어 1980년대 이후 한국 스릴러 장르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로 활동. 저서로 『에로방화의 은밀한 매력: 198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진보적 양면성』(영화진흥위원회, 2024), 논문으로 「젠더와 계급 갈등 위에 교차된 인종화: <버닝>의 벤 캐릭터에 대한 재고찰」(아시아영화연구, 2023) 및 「한국영화의 은자적 코스모폴리타니즘: 배창호의 <적도의 꽃>을 중심으로」(2024)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