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에 관한 모든 것
- 감독
- 구스타프 도이치
- 제작년도
- 2013
- 출연
- 슈테파니 커밍, 크리스토프 바흐
<질투>(한형모, 1960) 촬영 현장, 한형모 감독의 뒷모습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감독 한형모 는 1950년대 한국 영화에서 대중성과 통속성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 유명 감독들 신상옥 , 이만희 , 김기영 , 유현목 같은 자기만의 고유한 주제의식이나 미학을 가진 작가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성 인물을 매개해 대중이 쉽게 매혹될 만한 선정적인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장르적 오락성을 중점에 두면서도, 결말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순치와 처벌의 서사를 통해 보수적인 도덕성을 거스르지 않는 통속 영화들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기에 한형모의 작가성에는 늘 매혹과 순응, 현대와 전통이라는 모순된 단어들이 함께 붙게 된다. 감독 데뷔작이자 최초의 반공영화인 < 성벽을 뚫고 >(1949)와 한국전쟁 중 제작된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 1부 1951, 2부 1952)을 제외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여성이 주인공인 멜로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이 다수를 차지한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던 만큼 그의 작가성으로 기술적 유려함, 다양한 장르를 결합시키는 능력(첩보+멜로, 로맨스+코미디, 멜로+뮤지컬 등)을 언급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 주인공에 대한 이중 의식이다. 전후 혼란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던 1950년대에 한형모 영화의 여성 주인공들은 얼핏 보면 당대 가장 진취적인 여성들의 샘플처럼 보인다. (좌) <운명의 손> 중 마가렛/정애 / (우) <여사장> 중 요안나 <자유부인> 중 오선영 첩보멜로물인 < 운명의 손 >(1954)의 주인공 마가렛/정애는 북한 간첩이자 ‘양공주’로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어느 쪽에도 포섭되길 거부하고 개인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 자유부인 >(1956)의 오선영은 교수 남편이 있지만 경제적 욕망과 결혼제도 바깥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후에도 스튜어디스인 < 순애보 >(1957)의 인순부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출판사 사장인 < 여사장 >(1959)의 요안나, 산부인과 의사인 < 남성 대 여성 >(1959)의 윤송희, 유도 유단자인 < 언니는 말괄량이 >(1961)의 안순애까지 여자 주인공들은 경제적 독립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만한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다. 세련되고 도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들의 생활 묘사에서 ('남성혐오'를 포함한) 성적 욕망의 적극적인 표현, 서구문화의 소비, 자본주의 상품에 대한 갈망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문직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혹은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개성은 당대 여성 관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형모의 영화는 일관되게 서사적으로 이들을 결국 순치시키고 처벌하며 가부장제 안으로 복귀시키는 결말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타락하거나 병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지며, 가부장의 그늘을 거부하는 경우 살인, 강간, 사기 등에 위협적으로 노출된다. 시대적으로 앞서간 여성 인물을 스크린에 가시화한 반면, 그만큼 처벌하고 순치시키는 과정도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려냈던 이중적 태도야말로 그의 작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적 여성의 매혹적 스펙터클은 길고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반면(사실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여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전시되는 영화적 순간들이기 때문에), 순치의 과정은 서사적 비약이라고 느껴질 만큼 짧고 급작스럽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매혹적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 동안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들은 사회의 성차별과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거나, 남편의 물리적 힘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갑작스럽게 현모양처로 돌변하고, 자신의 욕망을 모두 헛된 꿈, 허영으로 환원한다. 영화도 그들이 자진해서 죄를 고백하고 가부장제가 지정한 자리로 재귀한다는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그저 감독 자신의 혹은 기성 사회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아 영화를 확인할 수 없는 < 질투 >(1960)는 이와 같은 한형모의 작가성이 순도 높게 구현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현대성은 동성애이다. 동성애는 영화의 가장 선정적이고 호기심 갖게 하는 마케팅 포인트이자 결국은 교정되고 처벌받아야할 대상이다. 당시 신문광고에 실린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다. “이성애의 공포가 동성애로 변한 것은 세계적인 풍조일까?” -《동아일보》 1960. 5. 25. “동성연애서 엉크러지는 일대의 질투, 국제무대에 파문을 던질 최고 이색편!” -《경향신문》 1960. 5. 7. 두 번째 문구가 적혀있는 포스터가 196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도 실려 있다. 즉 동성애를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유행과 동시대성으로 연관시키며 선정적인 호기심을 부추긴다(유명한 여성 동성애 영화 두 편, 오드리 햅번과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 아이들의 시간 >(윌리엄 와일러, 1961)이 1961년 할리우드에서, 로미 슈나이더 주연의 < 제복의 처녀 >(게자 본 라드바닐, 1958)가 1958년 독일에서 개봉했다). 동성애는 이 영화의 세련된 차별점이다. <질투>는 한국영화사에서 영화제작과 개봉이 확인된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형모의 다른 여성 주인공들처럼 이 영화의 재순 역시 주장이 분명하고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여성이다. 한형모는 배우 문정숙에게서 톰보이 기질 혹은 여성의 남성성을 포착하며 <질투>와 <언니는 말괄량이>에 연이어 출연시킨다. 문정숙 이 맡은 재순과 안순애는 모두 부치 레즈비언 혹은 남성성을 드러내는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그 이유를 '남성혐오'에서 찾는다. 특히 <질투>의 재순은 한국전쟁 당시 강간을 당하고 병적으로 남성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대사 속에서 기술된다. 입양된 동생인 금이( 전계현 )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즉 동성애는 독자적 욕망일 수 없으며 필히 이성애의 대체제로만 가능하다. 여성 동성애는 '남성혐오'의 병적 증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재순이나 금이 등 여성 인물이 아닌, 집안의 가부장인 오빠 재수와 정신과 의사의 해석일 뿐이다. 오히려 금이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재순은 과거의 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재순은 그저 금이를 사랑할 뿐이며, 그것이 폭력적 집착일지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금이를 위할 선택을 할뿐이다. 금이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이성애 결혼과 남편에 순종하는 아내의 역할을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순은 여성에게 결혼이 왜 부정적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재순은 오빠의 아내인 남이( 김신재 )에게는 “난 여자가 남성의 노예가 돼서 하루 종일 그 봉사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라고 한다. 또한 금이의 약혼자 광호의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도 여자분이니까 그 점을 아실 겁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남성들한테 받아온 압박을 금이한테까지 당하게 할 순 없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며 여성들의 동의를 구한다. 놀랍게도 서사적으로 볼 때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광호의 어머니는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이라고 답한다. 적대관계에 있는 여성들의 동의마저도 얻어내며 여성들을 규합하는 재순의 말은 여성 관객들을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또 금이의 장래와 관련해 재순은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재수는 “훌륭한 가정부인이 돼”야한다고 대치한다. 재순은 성폭력 트라우마의 증상을 보이지 않으며 남성과의 만남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합리성에 근거해 이성애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정확하게 비판한다. <질투> 중 재순과 이금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재순은 친동생처럼 함께 자란 금이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으며 한 방을 쓰면서 육체적 관계도 가진 것으로 암시된다. 또한 재순의 문제가 “동성연애”냐고 재수가 묻자 금이는 긍정을 표하며, 금이의 옛 이웃 광호가 등장하며 단순한 S 언니-동생 사이에서 “동성연애”로 관계 혹은 욕망이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금이와 재수 사이에 이어지는 대사는 재순을 병리적 인물로 보고 있지만, 동시에 재순과 금이의 관계가 단순한 자매애나 여성적 친밀감을 넘어섰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재차 확인한다는 점에서 통쾌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금이는 “사랑은 역시 이성에게서 느끼는 애정만이 인생을 즐겁게” 한다며 재순과의 동성애 관계와 광호와의 이성애 관계를 비교적 대등하게 놓고 비교한다. 한형모가 견지하는 선정성과 현대성, 서구의 유행에 대한 호기심과 물신화, 그리고 언제든지 순치시킬 수 있다는 가부장제적 자신감은 동성애라는 욕망을 매우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재순의 (이해 불가능한) 동성애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곧장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재순의 사랑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혹은 그에 앞서 그의 논리에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재순의 질투와 집착은 지나치게 커지고 금이와 광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살해 시도까지 간다. 재순의 폭력성은 그의 남성성의 표현이 된다. 재수와 금이는 재순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약물치료를 통한 동성애전환치료를 받게 한다. 명목상으로는 성폭력 트라우마와 '남성혐오'를 고치는 것이라고 나오지만 결국은 동성애를 이성애로 교정하고 순치시키는 폭력이 된다. 재순의 사랑의 원인은 재순 스스로 말하듯 그저 사랑에 기인할 뿐이다. 그것이 파괴적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폭력적 교정은 매우 짧은 하나의 결말 장면으로 묘사된다. 시간을 건너뛰어 급하게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동성애전환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재순은 금이와 재수, 재순을 좋아하던 영기와 의사가 모인 앞에서 “꿈에서 깬 것 같다”라고 말한다. 공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 많고 논리적이던 재순의 저 응축된 한 마디 대사는 문자로만 표현되어 있지만 공허한 눈을 목격한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장면은 논리와 설득력이 부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며 아이러니한 연극이며 그로테스크한 악몽이다. 재순은 앞의 긴 시간이 꿈이라고 했지만, 실은 병원장면이야말로 허상이자 꿈처럼 느껴진다. 한형모가 반복적으로 결말에서 여성들을 처벌하고 순치시키며 가부장제와 강제된 이성애로의 자리로 보내려는 시도는 실은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이 결말의 보수적 안전함 속에서 주목하고 환호했던 것은 바로 ‘꿈’과 '병증'으로 취급된 동성애 욕망이기 때문이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최근 OTT 드라마 <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2021)와 JTBC의 <전체관람가+: 숏버스터>의 한 에피소드인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2022)와 제작자이자 연출자로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 말이야 바른 말이지 >(2022) 등으로 부쩍 바빠 보이지만, 윤성호 감독의 다산성은 동시대 그 어떤 크리에이터에 뒤지지 않는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단편영화로 시작한 그는 다큐멘터리와 실험성 가득 한 작품을 거쳐 장편영화를 경유한 후 웹드라마라는 형식을 개척하더니 지상파와 케이블과 OTT에 이르렀다. 20여 년 동안 20편의 단편과 3편의 장편과 15편의 드라마를 만든 숨가쁜 시간! 여기서 쉼터 같은 작품이 하나 있다면, 바로 < 도약선생 >(2011)이다. 이 자유분방한 영화는 놀랍게도(!) 문화체육관광부와 아리랑TV가 제공하는 공적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국의 도시를 알리기 위한 시리즈 중 한 편이었다. 윤성호 감독은 대구를 배경으로 <도약선생>을 만들었고, 윤태용 감독은 서울을 배경으로 < 서울 >을, 배창호 감독은 제주에서 < 여행 >을, 김성호 감독은 부산에서 < 그녀에게 >를, 전계수 감독은 춘천에서 < 뭘 또 그렇게까지 >를, 진광교 감독은 여수에서 < 려수 >를, 문승욱 감독은 인천에서 < 시티 오브 크레인 >을 연출했다. 65분이라는 애매한 러닝타임을 지닌, 스포츠 예능을 풍자하고 있는 건지 스포츠 영화를 조금 독특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이 영화는 20세기까진 한국영화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취향의 B 무비였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면서 만든 단편 < 졸업영화 >(2006)로 부산국제영화제 선재상을 수상하고 첫 장편 < 은하해방전선 >(2007)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던 윤성호 감독은 이후 단편으론 ‘두근두근’ 시리즈를, 웹드라마로는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2010)를 내놓으며 왕성한 30대를 보내고 있었다. 이때 제안 하나를 받는다. 아리랑 TV와 문화체육관광부가 공동으로 제공하는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시리즈는 각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의 특색을 살리는 프로젝트였다. 그의 도시는 순천. 윤성호 감독은 순천 송광사에 미국의 흑인 래퍼가 힐링 하러 온 이야기인 <소울>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때 갑자기 제작사에서 도시를 바꾸었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구에서 영화를 찍으면 제작 지원과 현물 협찬이 들어온다는 제안이었고, 윤성호 감독은 받아들인다. 처음 기획한 제목은 ‘육상소녀’였다. 의도는 진지했다. 육상을 빙자해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원래 들어오기로 한 제작비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그래서 장면들을 빼기 시작했고, 몇몇 장면들은 즉흥적인 예능처럼 찍었다. 엔딩에서 영화를 황급하게 닫는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고, 러닝타임은 한 시간을 조금 넘기는 65분이 되었다. 제목은 <도약선생>. 주인공은 윤성호의 페르소나인 박혁권, 당시 웹드라마로 인연을 맺은 걸그룹 밀크 출신의 박재영(본명 박희본), 그리고 처음 함께 작업하는 나수윤이었다. 우정 역의 이우정과 원식 역의 나수윤. 이우정은 윤성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으로 <은하해방전선>부터 시작해 총 10편의 윤성호 감독 작품에 배우로 출연했다. 2008년부터 단편을 만들기 시작했고 2020년엔 첫 장편 < 최선의 삶 >을 내놓았다. 나수윤은 <도약선생>에서 윤성호 감독과 처음 만나, 이후 여러 편의 웹드라마에서 함께 했다. 내용은 간단하다. 동성 친구인 우정(이우정)과 원식(나수윤). 남친이 생긴 우정은 대구에서 서울로 떠나게 되고, 원식은 매달린다. 우정은 원식에게 “뭔가를 보여 줘. 크고 높고 늠름한 걸”이라고 말하고, 원식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영록 코치(박혁권)에게 장대높이뛰기를 배운다. 여기에 재영(박재영)이 합류하고, 그들은 다양한 트레이닝을 통해 조금씩 도약한다. <도약선생>은 윤성호 감독의 단편과 웹드라마를 꾸준히 ‘복용’해온 관객에겐 익숙하지만, 그의 영화 문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꽤 난해한 도전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가 낯선 가장 큰 이유는 ‘생뚱맞음’이다. 이것은 윤성호 감독의 클리셰이자 유머 감각인데, 그 핵심은 ‘서사의 실험’이다. 파괴까지는 아니지만, 윤성호의 영화는 ‘일반적인’ 극영화의 구성과 사뭇 다르다. 느슨한 챕터 구성인 <도약선생>은 한 국면이 넘어갈 때마다, “원식, 불심검문에 걸리다” “코치님은 채식주의다”라는 식으로 쨍한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흥미로운 건, 내레이션의 화자가 한 명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다중 시점 서사는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론 관객이 서사에 몰입하는 걸 교란시킨다. 여러 명의 화자들은 때론 장면을 멈추고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영화라는 장치’를 드러내는 건 그의 필모그래피 중 전반부를 대표하는 방식이었다. (왼쪽 사진) 윤성호 감독의 작품엔 종종 동료 감독들이 카메오로 출연한다. 육상 체험장의 사회자는 최근 < 잔고 : 분노의 적자 >를 내놓은 한국 B 무비의 스페셜리스트 백승기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도약선생>은 배우 김종수의 초기작 중 한 편이다. 그는 대구스타디움 관리인으로 출연한다. 원래 썼던 시나리오가 어떤 완결성을 지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축약’된 <도약선생>에서 또 하나의 포인트는, 툭툭 끊기고 난데없으며 즉흥적인 톤이 주는 묘한 아우라다. 엔딩 크레디트에서 “실제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기록과 연습 방식과는 상이함”을 경고했듯, <도약선생>에서 전영록 코치(내내 가수 전영록의 잠자리 안경을 쓰고 나오는)의 트레이닝 방법은 독특하다. 기본적인 러닝에서 시작해 요가를 경유해 평행봉과 점핑을 거쳐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시 쓰기 수업까지 이어진다. 어떠한 계획도 없이 순전히 우발적으로 이어지는 듯한 이 과정을 장대높이뛰기를 위한 트레이닝 커리큘럼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의 서사 구조를 따르는 듯하면서 그 내용은 예능과 다름없는, 변칙적 서사 전개다. 재밌는 대목은 실제로 대구 육상 스타디움이 등장하는 부분이다. 잔디에 들어간 죄로 관리인(김종수)에게 야단을 맡는 전영록과 선수들 앞에 갑자기 전영록의 군대 후임이었던 김 병장이 등장하고, 여러 후임들이 합세한 갑작스런 술자리가 이어지며, 그들은 군대 시절을 회상하고, 갑자기 모두 일어나 소주병에 회오리를 일으키며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를 이야기한다.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는 고삐 풀린 서사 전개는, 갑작스레 장대높이뛰기가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바꾸는 스포츠라는 대사가 등장함으로써 의외의 방식으로 봉합된다. (왼쪽 사진) “수평의 운동 에너지를 수직의 위치 에너지로!” 장대높이뛰기를 요약하는 이 영화의 모토다. 소주병을 잡고 있는 사람은 < 장례식의 멤버 >(2009)를 연출한 백승빈 감독이다. (오른쪽 사진) 얼굴에 붕대를 감고 연을 날리고 있는 전영록. 그의 모습 위로 노래 ‘도약은 패턴’이 흐른다. 이처럼 <도약선생>은 마치 아나키스트처럼 ‘영화적 서사’라는 것을 뒤흔들고, 그러면서도 정말 신기하게도 소정의 기승전결을 갖추며 전진한다. 그리고 영화는 갑작스레 “우연히도 결전의 날”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절정에 다다르고, 갑작스런 이사를 하는 우정 앞에, 원식 역시 갑작스레 대미를 장식한다. “애정의 대미를 장식하고 싶은 건지, 대미를 장식하고 싶어서 애정을 길어올리는 건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쩌면 영화 전체의 전반적인 주객 전도 상황을 요약하는 듯하며, 역시 갑작스레 전영록이 지니고 있던 치명적 문제가 폭로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샹송 톤의 주제가 ‘도약은 패턴’이 흐르면서 영화를 닫는다. 여기서 윤성호 감독이 직접 쓴 가사는 음미할 만하다. “도약, 슬픈 믿음의 도약/약도, 약도를 들고 도착/도착, 제 시간에 도착/아아 그러나 나는 성도착/애착, 가쁜 착오들의 고착”으로 시작되는 가사는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이렇게 마무리된다. “패턴, 자기만의 패턴/아니 어쩌면 자기 기만의 패턴/유턴, 너를 목격하고 유턴/아니 어쩌면 너에게로 돌아가는 P턴/그렇게 나는 아직 인턴, 너에게 훌쩍/뛰었다 착지하는 나는 영원한 인턴/랜턴, 너는 나를 비추는 랜턴/윈스턴, 피아노는 역시 조지 윈스턴/볼턴, 이청용이 있는 볼턴/워싱턴, 오바마가 사는 워싱턴.” 한국영화의 삽입곡 중, 이토록 중독성 있는 라임을 만나 본 적이 있는가! 격조 있는 대미다.
자신의 제작사(Argosy)에서 만든 가장 개인적인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던 < 도망자 >(1947)의 흥행 실패로 큰 빚을 떠안게 되자(12회 참조), 존 포드는 서부극으로 돌아와 < 아파치 요새 Fort Apache >(1948)를 만든다. 포드는 자신의 전후 서부극을 돈벌이용(potboiler)이라고 스스로 폄하했지만, 그중에서 < 황색 리본의 여인 She Wore a Yellow Ribbon >(1949)에 대해선 종종 자부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파치 요새>에 대한 자평은 엇갈린다. “돈벌이 목적에는 잘 맞았지. 하지만 날조된 이야기야.”(1950년, 린지 앤더슨과의 인터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야. 거기엔 액션도 있고 유머도 있고,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첫 작품이지.”(1965년, 에릭 르게브와의 인터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존 포드의 변덕스럽고 짓궂은 자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후자의 발언에서 ‘내 인디언 형제들’, 그리고 그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말은 흥미롭게 들린다. 이 말은 < 아파치 요새 >의 어떤 면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아파치 요새>를 오래전에 보고 개인적으로 받은 첫 충격은 이 영화가 포드 자신의 < 수색자 >(1956)를 포함한 후대의 소위 수정주의 서부극들보다 더 수정주의적이며, 서부극의 만사(輓詞)로 알려진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1962)보다 더 급진적인 탈신화와 서사를 이미 1948년에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반복건대, 서부극의 진화론 그리고 수정주의 서부극이라는 개념은 이런 영화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물론 포드의 말이 흥미로운 건 그 때문만은 아니다. 줄거리는 이렇다. 오웬 써스데이 중령(헨리 폰다)은 아파치 요새 신임 부대장에 임명된다. 딸 필라델피아(셜리 템플)와 함께 요새에 도착한 이 성마른 인물은 외딴 서부로 밀려난 것에 대한 불만과 승진 및 동부 귀환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는다. 요새에는 백전노장 요크 대위(존 웨인), 써스데이의 육사 동기생 콜링우드 대위,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특무 상사 오로키(워드 본드)를 비롯한 노련한 하사관들이 있다. 마침 아파치 족이 보호구역을 넘어 멕시코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요크 대위는 평화적으로 그들을 복귀시키려 하지만, 써스데이는 보호구역 탈출을 핑계 삼아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써스데이와 그의 부대는 몰살당한다. < 젊은 날의 링컨 >(1939) < 분노의 포도 >(1940) < 황야의 결투 >(1946) < 도망자 >(1946)을 보고 헨리 폰다라는 배우에게 매혹된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허공을 휘젓는듯한 긴 팔과 다리, 느린 걸음으로 등장해 어느 순간 프레임을 우아하게 장악하던 이 배우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여기선 전혀 볼 수 없다. 존 포드는 헨리 폰다의 특별한 자질을 < 아파치 요새 >에선 정반대의 방식으로 사용했다. 전작들에서 헨리 폰다는 망설이듯 프레임에 진입한다. 그는 어떤 프레임에서도 앤의 묘비 앞에서 중얼거리던 젊은 링컨의 자문, 혹은 폐허가 된 자신의 성당을 다시 찾은 떠돌이 신부의 자문을 멈추지 않는 것 같았다. ‘여기에 내 의지로 온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끈 것일까?’ 의지와 운명의 영원한 내적 교전. 그의 낮은 음성과 느린 동작에는 혹독한 교전의 흔적이 새겨져 있어 침묵조차 치열했다. < 아파치 요새 >의 써스데이 중령은 전적으로 의지의 인간이다. 자신의 권위와 지위 외엔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이 과도하게 각 잡힌 군인은 포드 영화에선 보기 드문 범속한 속인이다. 그는 아무래도 포드의 영화 세상에 잘못 찾아온 손님 같다. 누구도(물론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군사령부를 제외하고) 그를 초대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한 걸음으로 진입해 엄격한 말투로 프레임 내부의 모두에게 명령한다. 그의 등장은 프레임을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는 침묵에 빠지고 술자리는 어색해지며 무도회는 중단되고 저녁 식탁은 엉망이 된다. 그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곳에 체념의 몸짓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오던 헨리 폰다는 이제 그를 전혀 원치 않는 곳에 난입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존재가 된 것이다. #1 #2 #3 이것이 중요한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존 포드는 그렇게 보이도록 찍었다. 두 시간여의 러닝타임 중 반 이상은 요새 내부의 일상을 담고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을 맞는 가족, 평화로운 저녁 식사, 젊은 남녀의 로맨스, 무도회, 신병훈련... 요약된 줄거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을 사소한 사건과 표정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 아파치 요새 >는 미군과 아파치의 충돌을 그린 서부극이라기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의 풍속도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헨리 폰다의 경직된 몸짓과 강압적 말투는 이 풍속도의 오점으로 드러난다. 써스데이 중령의 죄는 무엇인가. 협상이 필요한 상황에서 전쟁을 벌여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몰살시킨 것이다. 그에겐 그만큼 중대한 죄가 또 있다. 공동체를 부인한 것이다. 아파치 요새라는 공동체가 지닌 고유한 규칙과 지혜, 생기와 소란의 활동을 부정하고 억압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지휘관으로서의 전술적 오류와 공동체 수장으로서의 인간적 결함 사이엔 논리적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 아파치 요새 >에서 그 오류와 결함은 한몸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자는 다른 공동체의 능력과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써스데이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은 존 포드의 세상, 그러니까 소란과 도취, 왈츠와 세레나데의 난장이다. 결국 세속의 질서가 개입해 중단되지만, 어쩌면 중단의 운명으로 인해 덧없는 난장의 순간이 더욱 반짝이는 공동체다. 써스데이가 요새 공동체를 부인했을 때, 아파치 공동체를 오인한 전술가로서의 실패도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건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역시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포드가 이 영화를 ‘날조된 이야기’라고 말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리틀 빅혼 전투’ 혹은 ‘커스터의 옥쇄(Custer’s Last Stand)’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1876년 6월, 커스터 장군이 이끌던 제7기병대가 인디언 수족에게 패배해 미군 268명이 몰살당한 전투)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존 포드는 인명과 지명을 전부 바꾸면서 실제 사건과는 사실상 절연했다. 이것이 ‘날조’가 뜻하는 바다. 포드의 관심사는 실제 전투라는 사건이 아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다수의 비서부극도 포함해 포드 서부극의 숨은 주제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영웅이 없는 거의 유일한 포드 서부극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문제가 전경화된다. 요크 대위는 영웅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그의 자질은 공동체의 몰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써스데이는 요새 공동체의 오점이며 공동체를 몰락시키는 반영웅이다. 그의 뒤에 국가의 명령이 도사리고 있다. 다른 한편에 아파치 공동체가 있고 그곳엔 탐욕스러운 상인인 미첨이라는 반영웅이 있다. 그의 뒤에도 국가의 위탁이 받쳐주고 있으며 아파치에게 저질 위스키를 팔아 그들을 병들게 한다. 아파치 요새가 주 무대라고 해도 여기엔 두 공동체와 각 공동체를 파열시키는 두 반영웅이 있는 셈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다. < 아파치 요새 >의 주인공은 두 공동체다. 이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파치와의 협상을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요크 대위가 추장 코치스에게 예의를 갖출 때이다.(#4) 코치스는 요크는 서로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국가의 명령과 위탁이라는 완장을 두른 써스데이와 미첨은 두 공동체의 존중과 신뢰를 파괴한다. <아파치 요새>는 그렇게 몰락해가는 공동체를 위한 만가이다. “내 인디언 형제들이 영웅으로 등장한다”는 존 포드의 말은 아마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4 에필로그는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뒤 부대장 요크와 기자들의 대화를 담고 있다. 써스데이의 대형 초상화를 보며 기자가 묻는다. “위대한 분이었겠죠? 위대한 군인이었고요. 아이들한테는 영웅이 됐어요.” 요크가 대답한다. “그래요.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죠. 부대를 승리를 이끌었고요.” 이어지는 대화. “그런데 같이 죽은 사람들은 누구죠? 써스데이는 기억하는 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혀졌군요.” “잊혀지지 않았어요. 저기 그대로 살아있어요... 얼굴과 이름은 달라져도 그들은 지금이나 50년 뒤에나 여전히 이 요새의 훌륭한 대원들로 남을 거요. 써스데이가 해냈죠.” 이 대목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보도합니다”를 고스란히 상기시킨다. 하지만 < 아파치 요새 > 쪽이 훨씬 신랄하고 비관적이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는 이미 사건이 해결되었고, 다만 해결의 영웅이 누구인가가 문제였다. 그러나 <아파치 요새>에서는 국가 권력의 대리자들로 인해 사건 해결이 실패했고 공동체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그럼에도 지금 이곳은 조작을 통해서라도 영웅의 전설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영웅적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서글프게도 지금 그 조작의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다. 존 포드의 ‘날조’는 정확히 그 조작을 겨냥하며, 그리하여 잊혀진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한 저녁 식사 장면이다. < 아파치 요새 >의 단란한 시간들은 모두 써스데이에 의해 중단되지만 이 장면만은 예외다. 콜링우드의 집에 요크, 오로키 상사의 아들이자 신참 소위 마이클, 그리고 마이클과 사랑에 빠진 필라델피아가 모였다. 이때 문밖에서 세레나데가 들려온다. “제네비브, 그대에게 세상을 드리죠....” 영창 신세를 지고 있는 그러나 부대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퀸캐넌을 닥터 윌킨스가 빼내 노래를 시키고 있다. 아름다운 노래가 끝나자 닥터는 위스키 한 병을 주머니에 꽂아주며 퀸캐넌을 영창으로 돌려보낸다. 노래와 춤이 없는 존 포드의 영화를 이젠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 장면은 그 예외성과 넘치는 유머로 인해 유독 깊은 정감을 남긴다. #5 #6 또 다른 장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오로키 상사의 집에 그의 아들이 마이클이 소위 계급장을 달고 4년 만에 돌아오는 장면이다. 성경을 읽고 있던 오로키 상사가 문을 열고 등장한 아들을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성경으로 눈을 다시 돌린 뒤 일어나서 아들과 포옹한다. 그리고 잠시 돌아서 눈물을 훔친 뒤에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여보, 아들이 왔어”라고 말한다. #7 #8 #9 #10 #11 #12 #13 이 장면이 왜 그토록 감동적인지에 대해선 잘 설명하진 못하겠다. 다만 오로키가 아들을 보고 바로 일어나지 않고 다시 성경을 보는 그 짧고 단순한 행위에 기쁨과 감사의 어떤 표현보다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애로운 마음이 그렇게 짧은 지체와 작은 동작에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장면을 보기 전까진 상상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태그 갤러거도 이 장면을 < 조용한 사나이 >에서 존 웨인이 모린 오하라에게 들꽃을 건네주는 장면과 함께 포드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았다.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선사한 오로키도 콜링우드 부부도 그리고 다정했던 주정뱅이 하사관들은 이제 곧 사라질 것이며 그들의 소란스러운 공동체도 몰락할 것이다. < 아파치 요새 >는 아름답지만 더없이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