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의 스타일기
- 감독
- 오쿠와키 마사하루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배정미, 이현주, 유동균, 박찬희, 홍승섭, 홍진욱, 송도영, 소연, 전숙경, 사성웅, 변현우, 이봉준, 이선, 유해무, 박지윤, 윤동기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햇살에 반짝이는 잔잔한 강물은 무심한 듯 아무 말이 없다. 아이들은 강가 옆 풀밭에서 천진하게 놀고 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맑은소리와 조용히 흐르는 강물 사이로 한가로운 여름날의 모습이 보인다. 평화롭고 잔잔한 풍경 뒤로 어린 소녀의 주검이 강물에 흘러 떠내려온다. 그 주검 옆으로 영화의 제목인 < 시 >( 이창동 , 2010)의 필체가 그려진다. 너무나 강렬한 <시>의 첫 장면이다. 소녀의 시체와 <시> 상극인 두 세계의 매치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어서 나오는 병원 씬. 의사는 미자에게 “그거 기분 나쁘네요?”라며 반문한다. 일상의 단어들이 종종 생각이 안 나고, 잘 잊어버린다는 말에 감독은 의사의 입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 앞으로 미자의 세계에 기분 나쁜 일 이 펼쳐질 수 있음을 예고한다. 시는 아름답다. 글자에서 주는 어감과 은유적 단어들이 주는 창조적 상징들은 아름다우면서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생각하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미자의 내면과 그녀가 처한 차가운 현실 세계를 교차해서 보여주며 과연 두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가? 이분법적으로만 구별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극중 김용탁 시인은 문화센터 수강생들에게’본다’ 에 중점을 두며 가르친다. 일상의 모든 것 들에게 마음을 주며 진심으로 대한적이 있냐고, 깊이 들여다 본적이 있냐고, 이제까지 본건 진짜로 본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지만 김용탁 시인이 말한 것처럼 자세히 보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지나칠 뿐이다. 시를 쓰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그 봐야 하는 대상은 현실의 세계인 있는 일상의 공간뿐이다. 미자는 쓸쓸한 강물, 떨어지는 살구, 들판에 핀 아름다운 꽃을 보며 시상을 떠올리지만 매일 하는 설거지 통에서는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시 낭송회에 갔다가 순수한 시를 읊는 자리에서 저질스런 농담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와 일상은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인식했다. 아름답고 순수한 것만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손자가 성폭행의 가해자지만 아무일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행동하고, 소녀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냥 밥을 먹고, 별일 없는 것처럼 친구와 몰려다니며 게임을 하고 똑같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미자는 괴로워한다. 소녀가 자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다리에 올라가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다.. 바람결에 모자가 강물에 떠내려가는걸 보고 소녀의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굵은 소나기. 시 노트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어쩌면 소녀의 눈물이 고스란히 미자에게 다가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서 소녀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쏟고, 깊숙이 들여다봤다. 다른 가해자의 부모나, 슈퍼의 동네 아줌마들이 거들떠 보지 않았던 소녀의 죽음을. 그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진짜로 보는 것, 진짜로 마음을 쏟고, 깊이 들여다 보는 것을 이미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수강생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이 시를 완성한다. 모두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말했지만 그 말을 시로 표현해 내지 못했다. 시는 시로써, 일상은 일상으로써 그렇게 그들은 시와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확증하며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은 깊숙이 들여다 보지 않았다.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지만 시를 쓰려는 그 마음을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과연 ‘시’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어렵고 이해하지 못할 은유들로 가득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일까? 미자가 그토록 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시’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아름다운 것과 인간의 추악함이 가득한 일상의 곳곳에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혜안의 열쇠일까? 평범한 우리들에게 시가 열리는 그 순간은 올 수 있을까? 미자 역을 맡은 윤정희는 60년대 3대 트로이카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외모에 다양한 연기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15년만에 출연을 결심했다던 그녀는 영화에서는 여타 60대 중반의 할머니와는 다른 톤의 연기를 보여준다. 일단 말투와 어감, 옷 입는 차림새, 생각하는 것, 시를 쓰는 것 등.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세대 또래와는 다른 모습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미자’라는 인물은 영화 속에서 독특하게 묘사되며 그 캐릭터에 잘 녹아든다. 이제까지 감독의 전작에 나왔던 배우들과는 다른 질감이다. 영화 속 에서의 모습과 실제 우리 주변에서도 그런 독특함이라면 충분히 공감할만한 연기를 2시간 내내 보여줬다. 그 특유의 말투에 이질감이나 이상한 부분은 느낄 수 없었다. 영화 속 캐릭터의 특이성이 잘 발현된 배우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 부분이 미자와 잘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에서 신애(전도연)을 통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이야기 했다. 그녀는 그 힘듦을 종교적인 구원으로 어떻게든 극복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교회 사람들과. 자신이 불행할거라 단정지으며 불쌍히 보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며 교회를 등진다. 그리고 ‘자살’이라는 행동으로 모든걸 끝내려 한다. <시>에서는 밀양과는 반대로 가해자 입장에서의 용서를 말한다. 그 용서와 속죄의 중심에는 아름다운 ‘시’가 있다. 두 영화 다 ‘용서’를 말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조금 다르다. 밀양은 마당에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 옆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비추며 끝을 맺는다. 마지막에 은은하게 내리쬐는 그 햇볕의 의미는 뭘까? 그래도 세상은 한줄기 희망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는 뜻일까? 아무런 설명 없이 빛으로 끝나는 이 장면은 깊은 여운을 준다. 그나마 이 빛이 조금이라도 세상 여러 곳곳에 비춰졌으면 하는 희망으로 보인다. <시>는 흐르는 강물위로 미자가 썼던 ‘시’만 나오고. 그녀는 자취를 감춘다. 긴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모습은 그녀의 자살을 의미하지만 영화 속에선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밀양의 희망과 달리 시는 속죄의 의미로 죽음을 택했다.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는지..감독의 선택에서 냉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을 보여준다. 시와 현실이 동일시 된다면 시의 완성으로 그녀는 존재해도 되지 않을까? 육체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져야 했을까? 영화의 마지막. 학교의 교실, 운동장, 과학실, 배드민턴을 쳤던 빌라 앞 마당, 마을버스의 정류장, 피해자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어귀, 소녀가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강물 위 다리, 그리고 희진의 미소 띈 얼굴이 보인다. 급격한 파도와 풍랑을 겪은 후 다시 일상의 모습들을 카메라는 천천히 훑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동네에서 삼삼오오 모여 놀거나 담소를 나눈다, 강물은 첫 장면처럼 변함없이 유유히 흐른다. 모든 게 그대로인 일상. 이 평온한 일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흘려 보낸 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미자가 손자를 스스로 경찰에 넘김으로써 영화적 소명을 다 했다. 만약 현실이라면 부모들은 사고를 친 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 위해 애쓸 것이다. 절대로 먼저 본인들 손으로 경찰에 넘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결코. 현실에서는 부모라면 할 수 없는 일이 영화 속에서 실현 되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현시키며 관객들을 일깨운다. 그렇다면 좋은 영화를 보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들을 본다고 해서 윤리적인 면죄부를 부여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영화들을 보며 과연 내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내 마음가짐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의 잔잔함 속에서 시와 현실의 세계. 나아가서 영화와 현실의 세계에 대한 간극은 좁혀지고 더 많은 공감과 이해로 우리들을 이끌어 줄 지 모르겠다. 그건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참 의외의 작품이다. 원작인 황순원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 「소나기」가 오랜 시간 교과서에 실렸던 만큼 그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안재훈 감독과 스튜디오 ‘연필로 명상하기’는 이 유명한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소설의 문장과 행간의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케 한다. 무엇보다 첫사랑의 원형과도 같은 소년 소녀의 서정이 어떤 형태였는지, 상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목격하는 기쁨을 준다. 도시에서 전학을 온 병약한 소녀와 무뚝뚝이 시골 소년이 개울가에서 마주친다. 둘은 몇 번을 마주치고도 인사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하다가 소나기가 내리던 어느 하루를 온전히 함께 보낸다. (소설을 읽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이 사실을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실감했다!) 산과 들을 쏘다니던 두 아이는 갑작스레 내린 소나기 때문에 서로에게 부쩍 가까워진다. 그날 이후 소년은 소녀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며칠 만에 핏기없는 얼굴로 개울가에 나타난 소녀는 곧 이사를 가게 됐다며 아쉬워한다. 설상가상, 소년은 어느 밤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뜻밖에도 며칠을 앓다가 변변한 약도 써보지 못한 소녀의 죽음을 알게 된다. 소년 부모님의 대화로 끝나는 소설 「소나기」의 엔딩은 이렇게 충격적이면서도 시적인 여운을 남기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그 여운을 소중히 다루면서 소나기처럼 스쳐 간 그 시절의 어떤 마음을 더해 그렸다는 점에서 놀랍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 억새풀밭 사이에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이 엔딩을 장식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문장에 지혜로운 상상을 더한 셈이다. 황순원 원작의 표현처럼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던’ 소녀 때문에 가슴 떨렸던 기억을 어렴풋이 간직한 소년. 그래서 소녀를 떠올리면 드는 감정에 제대로 이름 붙여볼 겨를도 없었던 소년의 마음이 억새풀을 스치는 바람을 따라 스크린에 번진다. 엔딩만이 아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애니메이션 < 소나기 >는 그렇게 아직 설익은 소년 소녀의 마음을 담는다.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소년에게 “이 바보!”하고 조약돌을 던지는 소녀의 모습이 보이고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릴 때, 그 시절의 어떤 감정은 아주 선명하게 다가온다. 사랑스럽게 흘러가는 개울물 소리, 부드럽게 흔들리는 들꽃, 학교 종이 선명하게 울리는 운동장과 교실에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그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년과 소녀는 주인공인데도 크게 그려지지 않는다. 어떨 땐 풍경에 묻혀 있다. 소년과 소녀의 모습보다 하늘의 구름, 다양한 꽃과 나무, 개울물의 반짝임이 훨씬 자주, 훨씬 디테일하게 등장한다고 느껴질 정도다. 누군가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도전적인 연출은 애니메이터로서 안재훈 감독이 추구해온 지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소나기>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지만 실은 이 땅에 태어나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어린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지녔다. 익히 알려진 이야기에 대한 부담을 안고 만든 이 작품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순간 스쳐 가는 소중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안재훈 감독은 이전에도 한국 근대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다. < 메밀꽃(필 무렵- 이효석), 운수 좋은 날(현진건), 그리고 봄봄(김유정) >이 그 시작이었다. ‘시즌 2’에 해당하는 < 소나기 >는 여름의 끝자락에 개봉해서 기대만큼 많은 관객과 마주하진 못했다. 국내 극장 환경에서 <소나기>의 개봉은 여러모로 도전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다양한 공동체 상영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의 정성만큼은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한다.
“마술하고 초능력 정도는 구분 할 수 있거든. 너나 꼬시려고 그러는 거니?” 한 소녀를 사랑하는 소년이 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소녀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소년은 어설픈 마술로 소녀의 마음을 사려 하지만, 정작 소녀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왕따인 소녀와 친하게 지냈다가는 자신 역시 반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할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소년의 외면 속에 소녀는 또 다시 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소년은 이것을 바라만 볼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성폭행을 당한 소녀가 소년에게 전화를 건다. “나 몸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울먹이는 소녀에게 소년은 “병원이라도 가보는 게...”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갈 수 없는 소년이 두려운 것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존재감 없는 투명인간처럼 살아 왔던 소년에게는 또 다시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소녀는 그렇게 소년에게서 사라진다. 소년은 소녀의 빈자리를 느끼며 자신의 잘 못을 깨달아가게 되고, 마침내 소녀가 다시 학교에 나타난다. 그리고 피의 복수가 시작된다. ‘ 사실은 있잖아 나한테 초능력이 있어 .’는 한국 중학생들의 잔인한 성장기를 다룬 영화다. 어른들의 무관심 혹은 외면 속에서 그들만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그들만의 세상은 어른들이 상상하는 놀이터 같은 그러저러한 세상이 아니다. 폭력과 성폭력이 난무하고, 철저히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잔인한 무법의 세상이다. 나는 밤길에 중, 고생들의 눈길을 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잃을 게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뉴스를 통해 한 여자아이를 집단 성폭행 했다는 중학생들의 이야기는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어디서 저런 무모함이...” 이들에게는 이런 행위는 은밀하고 더러운 것이 아니다. 그들의 세상 안에서는 서로 공유하고 즐기는 문화가 되어버렸다. 이 영화를 만든 송광호 감독은 공공연히 벌어지는 초, 중, 고 청소년의 성범죄 이야기들을 접하고, 이 영화를 만들기 결심했다고 한다. 아이들 장난처럼 치부 해 버리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그림자 뒤에는 상처를 받고 아파하며 울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영화는 이러한 무거운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무겁지 않다. 잔잔한 음악과 그림처럼 펼쳐지는 배경은 한편의 애니메이션 같다. 건조한 듯 흘러가는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 힘이 더해져 마침내 클라이맥스에서는 시원하게 터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