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
- 감독
- 송주아, 나화진, 김소형, 한보람, 김진주
- 제작년도
- 2011
*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2022 영화 글쓰기 키트: 영화 기자가 알려주는 리뷰 작성>의 과제 선정작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제목이고, 개인적으로 참 애정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 래를 보면서 <화양연화>의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이 오버랩될 때가 종종 있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결이 다른 영화인 것처럼, <화양연화> 역시 ‘불륜’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우아하면서도 진중한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남녀 주인공의 미묘한 엇갈림과 모호한 상황들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전해주며, 동시에 연기나 대사 외에도 색채와 영상미 등 진중한 스토리에 녹아든 화면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헤어질 결심>의 주제가인 정훈희의 노래 <안개>는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안개>의 주제가이기도 한 것처럼, 왕가위의 <화양연화> 역시 1930-40년대 중국 가수 주선의 히트곡 '화양적연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안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개(Fog)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하여 지표 가까이에 작은 물방울이 떠 있는 현상을 말한다. 구름과 안개는 떠 있는 위치가 다른 것으로, 하늘 높이 떠 있으면 구름이고, 지표 가까이 떠 있으면 안개이다. 구름일 때는 시야 속 경관을 아름답게 하지만, 안개일 때는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도 특이점일 것이다.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흘러나오는 정훈희의 노래도 그렇거니와, 사건도 감정도 인물 간의 관계도 무엇 하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애매하고 모호한 이 영화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아쉬운 흥행 스코어 속에서도 N차 관람하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서사구조는 심플한 데 비해 그것을 전달하는 장치들은 다양한 층위와 모호함을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기에, 각자 인상 깊거나 여운이 남는 (흔히 말하는 ‘꽂힌’) 부분에 대해 나름의 해석들을 자유롭게 내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예전 인터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평범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극한 상황에서 극단적인 행동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변태라서 그렇습니다.” 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던 이 한 문장은 살짝 유머 코드를 갖고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을 단적으로 표현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좀더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운 변태’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 것이다. 영화계에서 자타공인하는 영화광다운 해박한 지식과, 미장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열정은 박찬욱이 대한민국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에서 칸이 사랑하는 영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박찬욱 감독이 그리는 영화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다. 영화는 사실성에 기반을 두고 현실을 재현하지만,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작가로서의 해석과 재창조가 들어가야 한다. 박찬욱 감독 스스로 본인이 그리는 영화 속 세상이 아주 사실적인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아니라, 비유의 세계이다. 감독으로서 박찬욱이 중시하는 것은 어디를 선택해야 좋을지 모르 겠는 딜레마 상황이고,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기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어떤 도덕적인 성격이 개입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이야기한다. 관객들이 보았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으냐’라는, 윤리적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윤리적 질문이 난처할수록 영화는 재미있어진다고 생각한다는 그의 말은 영화감독 박찬욱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들 앞에 ‘배운 변태’라는 또다른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연결짓게 만든다. <헤어질 결심> 역시 ‘배운 변태’ 영화감독으로서의 박찬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요소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산과 바다로 대표되는 서래와 해준의 이야기이면서, 용의자인 서래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사 해준의 딜레마가 그려지고 있다. 거기에 해준과 서래 둘다 기혼자라는 점에서 (서래의 남편은 극이 시작되자마자 변사체로 등장하긴 하지만) 불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 리얼리티가 아닌 비유의 세계,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로서의 자아와, 아름답고 묘한 여자에게 이끌리는 남자로서의 욕망. 그 둘 사이에서 안개에 싸인 듯 흐릿하고 모호한 상황에 처한 해준의 딜레마.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질곡동 살인사건의 결정적 단서가 되어준 서래의 말은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 ‘불륜’이라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윤리적 질문까지 얹어 놓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해준이 밤새 서래의 집 앞에서 망원경으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스마트 워치에 녹음하는 장면은 용의자 감시이면서 동시에 관심이 가는 이성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보다 많은 것을 알기를 원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해준은 저녁을 아이스크림으로 때우고, 길냥이들에게 밥을 주는 서래를 지켜본다. 해준에게 서래 집 앞의 잠복근무는 감시이면서 관심이고, 의심이면서 매혹이다. 해준의 수사과정은 점점 더 서래에게 이끌리게 되는 마음의 동요이고, 연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용의자 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후, 서래와 해준은 비 오는 날 산사에 간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시간들. 굳은 살이 박힌 서래의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해준을 보며 서래는 마음을 전한다. “처음부터 좋았습니다. 날 책임질 형사가 품위 있어서”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은 ‘경찰치고는? 한국인치고는? 남자치고는?’이라며 서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장난인 듯 아닌 듯 집요하게 물어본다. 서래 역시 장난스레 ‘현대인치고는’이라고 말하며 해준의 우산을 뺏어 들고 먼저 걸어간다. 혼자 남은 해준은 남은 핸드크림을 자신의 손에 마저 바른 후 서래를 쫓아간다. 그토록 달달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기도수의 살해 당일, 서래의 행적을 알게 된 해준이 서래를 찾아와 추궁하면서 파탄이 난다.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서래의 말에 해준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우리 일? 우리 일, 무슨 일이요?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해준이 인정한 것처럼 서래의 집 앞에서 해준이 했던 행동들은 비록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결국 사랑에 들뜬 보통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었다. “나에게 선물이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길냥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하던 서래의 중국어가 번역기의 무미건조한 남성의 목소리로 번역될 때 해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살인 용의자인 여자가 자신의 심장을 갖겠다는 말은 생명의 위협에 다름 아니다. 후에 서래가 ‘심장’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수정하긴 했지만, ‘심장’이든 ‘마음’이든 서래가 해준의 중요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음은 분명하다. 해준의 자아가 흔들릴 정도로 위험하고 소중한 무엇, ‘심장’ 또는 ‘마음’.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예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 붕괴됐어요.” 해준의 윤리적 질문은 기혼자로서 갖게 되는 불륜이라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해준의 윤리적 딜레마는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 사이에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헤어질 결심>의 장르는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형사물이 아닌 로맨스 영화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의 범행을 알게 된 후, 해준은 월요일 할머니의 폰을 바꿔주고 중요한 증거인 핸드폰을 서래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품위 있는, 자부심 있는 형사였던 해준이 서래를 위해 자신의 품위를, 자부심을 포기하고 범죄행위를 은닉하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종말이다. 해준의 사랑은 서래의 범행 은닉을 도와주는 순간 끝나버렸고, 해준이 자신을 위해 품위 있는 형사이기를 포기한 것을 안 순간 서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나를 좋아할 확률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사람의 감정은 ‘단일한’ 속도로 흐르는 것이 아니고, 감정의 크기가 같을 수도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긋나고 빗나가기 일쑤인 게 사랑이란 놈의 속성. 그렇기 때문에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서래는 해준의 자부심에 한 점 얼룩이 되었고, ‘붕괴되어버린’ 해준은 더 이상 서래에게 줄 ‘심장’이 없다. 서로에게 ‘꼿꼿하고’ ‘품위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두 사람. “당신 목소리요. 나한테 사랑한다고 하는.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어요.” 얘기하는 서래에게 해준은 말한다. “내가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어쩌면 해준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몰랐을까? 아니면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을까? 서래는 자신의 존재를 소멸함으로 해준의 ‘미결사건’이 되고자 한다. 보통 사람에게 짙은 안개는 이포를 떠나게 만드는 이유지만, 서래에게는 이포로 오게 만든, 단 하나의 이유였다. 죽은 까마귀를 묻기 위해 흙을 파내던 청록색 양동이로 바닷가 모래를 퍼내는 서래.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킨다. “벽에 내 사진 붙여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나직하면서도 다정하게 속삭이는 서래의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의 고백이 아니다. 서래의 실종 이후 해준이 겪을 상실감을 상상하면 오히려 저주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이포의 바다는 무심하게도 해변의 모래알들로 서래가 누워있는 구덩이를 메운다. 강한 파도에 쌓여있던 모래 더미들이 쓸려나가고, 해준이 달려올 무렵에는 그곳에 서래가 있었다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해준은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너무 좋아서 자꾸 들었다는 그 언젠가의 서래처럼.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오르는 강렬한 석양.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거칠게 넘실거리는 만조의 파도. 그 안에서 ‘마침내’ 해준도 자신이 이미 서래에게 사랑을 고백했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서래가 예전 해준의 말대로 핸드폰을 바다에 버렸을 것임을 감지한다. 충격과 슬픔에 일그러지는 해준의 얼굴. 이제 해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시간도 없다.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풀렸던 신발끈을 다시 고쳐매고, 손전등을 켠 채 서래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로 들어간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거칠게 밀려드는 파도에 몇 번씩이나 쓰러지면서도 해준은 바다로 들어간다. 서래가 있을 그 바다로. 빛을 잃어가는 하늘빛도, 보는 관객의 마음도 먹먹하다. 사랑이란,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개 속을 헤매이는 것, ‘붕괴’될 것을 알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거센 파도를 맞으며 바다로 나아가는 그런 것. 안개는 미혹(迷惑)과 비슷하다. 무엇에 홀린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정확하게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안개는 인간의 욕망, 사랑과도 비슷하다. 혼돈과 모호함 속에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상실의 아픔도 내포한다.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 아니듯,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 오히려 사랑의 감정을 소멸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트였을 때 그 때 보이는 풍경이 늘 아름답지는 않는 것처럼, 흐릿하게 눈을 가리던 것이 사라졌을 때 드러나는 진실의 모습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양연화>에서 주모운이 결국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앙코르와트에 가만히 속삭이며 봉인해 버리는 것처럼, <헤어질 결심>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미결사건’으로 남고자 스스로를 바닷가 모래 구멍 안에 감추어 버린다. 안개 속을 헤매이듯 모호하고 흐릿한 감정의 편린 속에서도 누 군가는 사랑을 보고 이야기하고 냄새 맡는다. 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봉인될 수 밖에 없는 감정일지라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어요?’라고 반문할 정도로 기억조차 못한다고 해도. 흐릿해도, ‘마침내’ 선명하게. 그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스톱모션이라는 미학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이론에 의하면, 이 예술 장르에 적합한 미학의 뿌리는 색채론과 표현주의, 그리고 비선형적 공간구성 등 상당 부분 모더니즘적 전통에 기대어 있다. 물론 필름(film)이라는 뉴미디어의 등장과 소비가 가능하게 된 시점이 모더니즘의 공간이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당연히 그 시대적 모멘텀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초기의 애니메이션이 상당 부분 실험적 영화의 틀 내부, 그리고 모더니즘 회화 작가들의 활동에 의해서 유지된 점도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색채, 움직임, 추상화(abstract), 분절적 공간 구성 등은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미학적 지표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전통적인 애니메이션(orthodox animation)에서는. 하지만 이러한 이론적 접근, 또는 적용이 미묘하게 어긋나는 양식이 있는데,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세트를 제작하고, 퍼펫을 만들어 그것들을 실재하는 공간에 배치한 다음, 이들의 포즈를 사진이라는 기계적 특성을 이용해 기록한다는 점에서 실사영화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괴테의 색채론 보다는 데카르트의 광학이론이, 캐릭터와 공간의 비선형적 분절보다는 선형적이고 비분절적인 공간 구성이 우선한다. 무엇보다도 스톱모션은 가상의 빛으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광원으로 공간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작품 제작의 공간은 오히려 실사영화의 세트촬영을 축소한 형태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결과물은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과 실사영화의 특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각자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나갈 때에도 실사영화의 한 꼭지(마치 최근의 디지털 영화의 그것처럼 영화 속 FX 효과의 하나로서 합성)로 최근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스톱모션 이미지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공유하며 두 영역 사이의 다양한 이미지들과 쉽게 병치되거나 합성될 수 있다. 후에 언급할 김강민 감독의 < 38-39°C >은 이러한 스톱모션 이미지의 특성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들의 환영적 병치 또는 환상적 리얼리즘 목욕탕을 찾은 한 중년의 남성이 (아마도 아버지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기억하게 되는 백일몽의 이야기를 담은 < 38-39°C >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며, 종이를 이용해 인형을 만든 페이퍼 퍼펫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물론 작품에 사용되는 퍼펫은 쇼트의 특성과 카메라의 앵글에 맞춰 각각 별도로 제작되었는데, 캐릭터들은 평면의 색면이면서 동시에 카툰적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작품의 세트는 모두 정교하고 깊이감 넘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크게 목욕탕 입구와 내부로 나뉜다. 입구는 평면적인 배경을 애니메이션의 레이어와 같이 배치하고 입체적 소품들을 병치하여 독특한 느낌을 환기시킨다. 이에 비해 두 번째 주요 공간인 욕실 내부는 상당히 입체적이고 빛과 그림자에 의해 구분되어 상당히 실사 영화적이다. 세트에 상당한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며, 오랜 기간 노하우를 통해 완성된 스타일처럼 보인다. 예의 언급처럼 스톱모션 이미지의 이중적 의미에서 보이는 공간들은 비단 세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작품의 쇼트구성도 마찬가지인데, 욕실 내부를 그린 두 번째 시퀀스 초반 역시 상당히 실사 영화적이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쇼트들 사이로 녹아들어 있는 공간의 인서트들은 이 작품의 독특한 이미지만큼이나 신선하면서도 우아하다. 특히 목욕탕 내부에 스며든 수증기와 빛의 궤적을 더듬는 장면들은 연출자가 가지고 있는 실제 빛과 광선에 대한 이해와 재능을 놀랍도록 실감하게 만든다. 다시 작품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목욕탕에 찾아온 남성의 이야기이다. 공중목욕탕의 ‘남탕’ 하면 흔히 떠오르는 키워드는 보통 ‘문신남’, ‘때’, ‘아버지’, ’바나나우유’ 정도가 되는데, 이 작품도 오래되고 홀로 남겨진 듯한 공중목욕탕의 이미지 속에서 중년이 된 남성을 통해 ‘아버지’를 소환한다. 작품의 두 번째 시퀀스인 백일몽 장면은 이러한 아버지를 호명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작품의 초반과 후반에 언급되는 팽이는 시간과 엮인 과거로의 상징적 배치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에서 과거의 한 장소를 소환하는 과정이다. 감독은 과거의 이미지(등이 붉게 타오른 아버지)를 소환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물질적인 필름이미지를 동시에 불러들인다. 영화관에서 셀룰로이드 필름이 타들어 가는 듯한 이미지부터 필름 스트립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속도감 있는 색면들의 병치까지 다양한 이미지를 자유롭게 충돌시키고 있다. 마치 렌 라이(Len Lye)의 작업처럼 보이는 느닷없는 이미지들은 스톱모션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프로젝션처럼 보이는 배경 이미지들과 함께 병치되면서 물질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감독의 이러한 이미지 병치는 스톱모션 이미지라는 이중적 양식에 절묘하게 들어맞으면서도 동시에 표현주의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만들며 스스로의 작가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감독은 작품 속에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상당히 다양한 방법을 접목하고 있는 듯한데, 투명한 유리를 카메라 앞에 두고 소프트렌즈 효과를 만들기도 하며, 미디어 파사드와 같은 프로젝션 기술을 사용하는가 하면, 후반 과정을 통해 작은 이미지의 변형을 주기도 한다. 가장 원형적인 빛의 이미지와 그것에 대한 이해력, 세트와 캐릭터에 주어진 색채와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자유로운 이미지들의 인서트와 텔롭(작품의 이미지 위에 얹히는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가 가진 작품의 색을 풍부하게 만들어 나간다. 말하자면 그의 작품은 복제와 움직임이 아니라 다양한 이미지들의 병치를 통해 완성하는 동시대적인 이미지인 ‘합성’이미지에 가깝다. 또는 스톱모션이라는 사실적인 세트에 느닷없이 ‘낯설게’ 접근해 들어오는 캐릭터와 이미지들은 결국 이 작품을 환상적 리얼리즘에 가깝게 만들어 버렸다. 스톱모션이라는 경계 사실 스톱모션은 가장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제작기법이다. 말하자면 초기 실사영화의 기법 연구 과정에서 등장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CG와 디지털 이미지의 등장으로 인해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스톱모션은 많은 부분에서 아직까지도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면서 그 나름의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때로는 실사 영화적 기법으로부터 때로는 전통적 애니메이션 기법, 그리고 디지털 기술합성에 이르기까지 최근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테크놀로지와 전통적 ‘손(手)’의 기법을 여전히 주요한 가치로 삼으면서 말이다. 물론 김강민 감독의 본 작품도 이러한 경계 이상에 위치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향연 또는 병치는 지면상 언급하지 못한 다른 다양한 미학적 성과들과 함께 스톱모션이라는 이미지의 또 다른 경계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의 후속작이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38-39°C > 전편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rRS1yhIhEHQ < 38-39°C > 메이킹 영상: https://vimeo.com/26085766 차기작 < 사슴꽃 > 트레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MfX9BE8BTB8
몇 년 전, 아동 일시 보호소에 여러 날 머문 적이 있었다. 아동 일시 보호소는 부모로부터 버려지거나 맡겨진 아이들이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간 지내다 부모가 찾아오지 않을 경우 고아원이나 입양기관으로 인계되는 곳이다. 그 곳에서의 첫날, 한 젊은 남자와 그의 손을 잡고 온 6살짜리 여자 아이를 보았다. 담당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남자는, 아이에게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데리러 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다. 나중에 직원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그가 아이의 아빠였고 다시 아이를 찾으러 오겠다는 기약 같은 건 남기지 않았다고 했다. 무슨 사정인지 알 순 없었으나, 어쨌건 아이는 아빠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아이는 하루 종일 아빠를 기다렸다. 날이 저물고, 저녁식사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아빠가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아이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선생님들이 아이를 달래보았지만 쉽게 그쳐질 울음이 아니었다. 그 날 밤. 복도를 걷다 우연히 보게 된 그 아이의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다. 자정이 넘은 시각의 커다란 방 안. 잠든 여러 아이들 사이에 홀로 일어나 앉은 아이는 방 안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울고 있지도 않았고, 그 어느 곳에도 시선을 두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멍한 눈빛을 한 채 미동 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그 때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분명,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아빠의 말이 아이에겐 더 잔인하고 가혹한 희망의 끈이 될 것이었다. 영화 < 나무 없는 산 >를 보며 유독 마음이 아팠던 건, 그 때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진’과 ‘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자매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엄마에 의해 고모 집에 맡겨진다. 아빠를 찾아 다시 오겠다는 엄마는, 어린 자매에게 돼지 저금통 하나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고모 말 잘 듣고 있으면, 고모가 동전 하나씩 줄 거야. 여기다가 동전을 넣고, 동전이 가득차면 엄마 그 때 올게, 알았지?” 그 약속을 신앙처럼 간직한 아이들은, 동전을 모으며 엄마와 다시 만나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아이들의 그리움은 커져가지만, 결국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버림받았음을 즉각적으로 알게 되는 상황에 놓이는 것과,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오랜 시간 천천히 깨닫게 되는 것. 어느 쪽이 아이들에게 덜 잔인한 일이었을까. 자꾸만 가늘어져 결국엔 끊어질 것 같은 엄마라는 끈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아이들의 몸짓은 그래서 더욱 아프다.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점은, 아이들의 연기에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아이들의 얼굴은 관객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 않는 대신, 먹먹한 감정들이 조금씩 마음 안에 쌓이도록 만든다. 그 표정들과 그것을 포착해내는 카메라는 어느 순간 경이롭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영화의 또 다른 빛나는 점은, 보통의 영화들이라면 지나칠 법한 여백의 순간들을 포착해내는 세밀한 시선에 있다. 유리문에 기대 눈물 흘리던 진의 뒤통수에 서려있던 하얀 수증기.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동그란 눈동자와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들은 이 영화의 보석과도 같은 장면들이다. 자매를 버리고 떠났던 엄마는 결국 돌아오지 않지만, 영화는 결코 비극적 신파로 끝을 맺지 않는다. 아이들은 도시에서 지방 소도시로, 그리고 결국엔 조부모가 사는 시골로 떠밀리듯 보내지지만, 그 공간의 이동과 더불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시골에서의 생활이 나오는 후반부는 마치 자연의 생명력을 이어 받은 아이들이 점차 회복되어 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아이들은 조금씩 자연을 닮아간다. 스스로의 힘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그 바탕 위에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자연의 모습처럼, 아이들도 그렇게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바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무 없는 산 >을 보노라면, 일시 아동 보호소에서 봤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한 밤 중 홀로 깨어나 멍한 눈빛으로 어둠을 응시하던 아이.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을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을 들녘을 걸으며 노래를 부르던 영화 속 진과 빈의 씩씩한 모습을 애써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