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의 반항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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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렁에서 건진 내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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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반항』결정유보 / 상항(桑港)국제영화제 출품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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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 『십대의 반항』 / 「씨네·펜」서 백인초대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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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화] 비교적 우수작 / 『십대의 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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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한 미모의 전형 조미령(하)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한국영화걸작선]십대의 반항
‘걸작’이라면 최소한 한 작가(또는 감독)의 작품계보에서 대표작 급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한국영화 걸작선’의 요구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할 때 김기영 감독의 < 십대의 반항 >(1959년)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 하녀 >(1960년)에 못지않은 야심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이 영화의 필름은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더욱 이 영화를 기록으로나마 선택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는 <십대의 반항>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대학 3학년 때 처음 발표한 영화평론이 르네 클레망 감독의 < 금지된 장난 >과 이 영화의 비교론이었기 때문이다. < 10대의 반항 >(1959)은 1950년 6, 25동란 때 파괴된 서울을 중심으로 소매치기와 절도를 생활 수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전후 부랑아들의 이야기이다. 피난 갔던 시민들이 서울로 돌아와 파괴된 집과 거리를 복구하는 가운데 졸지에 고아가 된 청소년들은 범죄의 세계로 빠진다. 길남( 황해남 분)은 어린 부하들에게 날치기와 좀도둑질을 시키며 살아가는 뒷골목 패거리의 우두머리다. 낮에는 소매치기를 하고 밤에는 창고나 가정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길남이 경찰의 단속에 결려 붙잡힌다. 같은 또래의 친구 억쇠(유춘수)는 길남을 구하기 위해 더 큰 조직의 왕초인 권가( 박노식 )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협박과 회유에 못 이겨 그의 부하가 되고 만다. 부랑아 수용소인 남북소년원에 갇힌 길남은 기회를 엿보다가 이곳에서 알게 된 남장 소녀 필녀와 간호 일을 돕던 어린 소년 근선( 안성기 )과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필녀는 길남을 좋아하는데도 알아주지 않자 적극적인 권가 곁으로 떠나고, 근선은 길남을 따라 좀도둑질을 시작한다. 권가의 강압에 못 이겨 부하가 된 억쇠는 길남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 도망가다가 아파트 옥상 계단에서 떨어져 죽고, 권가는 오히려 필녀의 손에 죽는다. 이런 가운데 길남은 식당집 딸 봉선( 엄앵란 )의 진심어린 충고를 받아들여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고, 근선을 전쟁 때 잃어버린 지식처럼 여기는 여자( 조미령 )의 집으로 데려간다. 성탄절 날, 멀리서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길남은 어디론가 발길을 돌린다. 오영진(吳泳鎭)이『사상계』지에 발표한 오리지널 시나리오「하늘은 나의 지붕」을 영화화한 < 십대의 반항 >(제4회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소년 특별연기상 수상)은 한 승객이 버스를 타다가 시계를 소매치기 당했다며 거품을 물고 떠들어대는 도심지대의 한 파출소 장면에서 시작돼 주인공인 길남이 근선을 가정의 품에 안기게 해준 뒤 얼어붙은 냇가를 뛰어 건너 멀리 떠오르는 소년원을 향해 걸어가는 라스트 신으로 마무리된다. 이 영화는 모두 여덟 개의 시퀀스로 되어 있다. 김덕진 의 카메라가 포착한 심도 있는 뒷골목의 묘사와 함께 인물구조도 효과적으로 짜여 있다. 부랑아 위에 군림하는 왕초와 대립적인 세력(권가)을 중심으로 거친 성품과는 달리 인정이 많은 소악마 길남 역의 황해남 , 왕초와 친구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의리를 잃지 않는 억쇠 역의 유춘수, 모정에 목마른 어린 마스코트 근선 역의 안성기 등 연출자의 인물 해석과 적절한 배역이 돋보인다. 또한 이 영화에는 이 시대 특유의 은어들이 많이 나온다. ‘짜부’(형사)며 ‘쎄리’(경찰관), 는 물론, ‘빵쟁이’(소매치기), ‘깔’(전지), ‘내쵸’(바보), ‘부시기’(담배), ‘따통’(아편), ‘작대기’(만년필), ‘지통난다’(통쾌하다) 따위가 그것이다. ''''''''''''''''''''''''''''''''전후 사회가 감당해야할 전쟁의 후유증과 치유''''''''''''''''''''''''''''''''라는 메시지를 제시한 김기영 의 리얼리즘은 궁극적으로 멜로 드라마적 해법과 만나지만 결코 무게감을 떨어트리지 않는다. < 십대의 반항 >은 < 곰 >( 조긍하 감독), < 구름은 흘러도 >( 유현목 감독) 등 총 1백11편이 제작된 1959년도 한국영화가운데서도 단연 빛나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한국영화걸작선]임자 없는 나룻배
개봉 직전 재 검열 소동 일으킨 항일 표현 - 이규환 감독의 < 임자 없는 나룻배 >- 세상에 실체(필름)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명화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 아리랑 >(1926)을 비롯한 < 임자 없는 나룻배 >(1932), 해방 후의 < 십대의 반항 >(1959, 김기영 감독)과 < 젊은 표정 >(1960, 이성구 감독), < 잉여인간 >(1964, 유현목 감독), < 만추 >(1966, 이만희 감독)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그 가운데서도 이규환 감독의 < 임자 없는 나룻배 >(유신柳新키네마주식회사 제작)는 나운규 의 < 아리랑 >(1926)과 더불어 해방 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불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영화는 1932년 9월 18일부터 4일간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칫 첫 상영이 무산될 뻔했다. 그때는 낮 흥행 없이 밤 상영만 일곱 시에 있었는데, 이미 여섯 시 쯤 되자 극장은 설자리가 없을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들떠 있는 이규환 감독에게 극장 직원이 “검열계에서 급히 필름을 갖고 오라”는 말을 전했다. 상영시간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광화문 조선총독부 도서과 검열계로 달려간 그에게 검열주임은 그날 배달된 석간신문을 내던지며 ‘임자 없는 나룻배’란 조선민족을 암시한 것이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 신문에 실린 < 임자 없는 나룻배 >의 시사 평 가운데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준 영화”라는 대목이 그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 감독은 어렵게 문제가 되는 마지막 필름 한통만 다시 보이기로 타협하고 주인공 춘삼이 철로를 때려 부스는 장면 1백50여자를 잘라내는 것으로 재검열의 곤욕을 치렀다. 그가 서둘러 극장으로 달려왔을 때는 개봉시간이 40여분이나 지난 뒤였다. ( 이규환 의「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 중앙일보, 1979, 12, 18 1980, 3, 8) 그렇다면 ‘항일표현’으로 의심받은 < 임자 없는 나룻배 >는 어떤 영화일까. 농부인 정춘삼( 나운규 분)은 가뭄과 수해 등 겹치는 재난으로 살 길이 막연해지자 아내( 김연실 분)와 더불어 서울로 올라와 인력거꾼이 된다. 하루는 춘삼이 집에 돌아오니 만삭(滿朔)이 된 아내가 난산을 겪고 있다. 병원비가 없어 남의 집 돈을 훔쳤다가 뒤쫓아 온 순사에게 잡히고 아내는 길거리에서 아이를 낳는 처지가 된다. 그 뒤 형기를 마치고 나온 춘삼은 자동차 운전수와 동거생활을 하는 아내로부터 어린애를 빼앗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동안 딸( 문예봉 분)은 아버지의 뱃사공 일을 도울 만큼 다 자란 처녀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이들 부녀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그들이 사는 강가 한 가운데에 철교가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손님들이 내는 배 삯으로 생활을 해왔던 것인데, 이제 그 수입의 기반마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춘삼은 딸에게 욕심을 품고 괴롭히는 공사장의 감독( 임운학 분)을 보다 못해 도끼로 찍어 죽이고, 달려오는 기차에 치어 죽음을 맞는다. 아울러 그가 집에서 달려 나올 때 방바닥에 넘어뜨린 석유등잔이 불길로 번지면서 잠을 자고 있던 딸 애연(愛蓮)마저 삼키고 만다. 이 영화는 관객과 언론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 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치 단순한 스토리로 그만치 성공한 것은 감독, 촬영, 연기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운규 가 주연하는 춘삼이란 한 개 농부 노동자의 슬픈 이야기를 우리는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조선 민족이라는 한 민족의 이야기로 볼 때 비로소 그 감격이 커지는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일을 빼앗기고 아내를 빼앗기고 또다시 생명의 줄과 딸을 빼앗기고야 말 운명에 처해 있으면서도 거기 대항할 아무런 복안도 없이 오직 신명께 기도나 올리고 있는 춘삼이 그것은 곧 조선 민족의 한 전형이다. (중략) 조선인으로는 한 번 보지 않으면 안 될 사진이다. (허심,「유신 키네마 2회작 ‘ 임자 없는 나룻배 ’ 시사평」동아일보, 1932, 9, 14.) ―「 임자 없는 나룻배 」! 여러 가지 조선 영화에서 가장 시적 표현인 제목이다. (중략)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으로 일관하여 있다. 농촌 생활에 파경을 당한 자의 막연한 상경은 늘 이러한 비극을 지어내기 쉬운 것이다. 생계를 잃어버린 농군들의 도시 진출, 거기에는 항상 빈곤과 도회적 유혹이 쫓아다닌다. 이 빈곤과 유혹 사이에 끼여 싸우는 자, 또 이러한 비극을 빚어내는 자, 어찌 춘삼의 아내뿐이랴. (중략) 나는 이 작품을 가리켜 조선의 현실을 잘 표현한 온건한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송악산인(宋岳山人), 매일신보, 1932년 9월 14~15일) 한마디로 < 임자 없는 나룻배 >는 민족적 비애의 정서를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탁월한 영화였다. < 아리랑 >과 함께 이 영화의 필름을 찾게 되는 그런 날이 언제쯤 찾아올까, 평생에 꿈같은 이런 희망을 가져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