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 감독
- 반루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제니 후, 능운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어릴 때부터 장애가 있는 혈육 또는 이웃들과 별 이질감이나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20대에는 몸이 불편한 학우들의 활동 보조도 해보았다. 30대 이후, 장기 입원을 하거나 중병을 앓는 가족의 간병도 해보았다. 돌이켜 보면 삐거덕거리고 비틀대고 휘청이는 다양한 몸들과의 여러 활동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활동들이 돌봄이란 단어로 일원화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의 활동 보조를 할 때도 돌봄이나 돌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보조였고, 치료를 받는 이의 간병인이었으며, 집이 필요한 고양이와 공간을 나눠 썼을 뿐이다. 모두 돌봄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돌봄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 영국의 한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부터 배리어프리 상영을 제안받았다. 우리의 영상이 시각장애인에게 어떻게 전달될지 궁금해 흔쾌히 허락했다. 상영일에 모니터를 가리고 사운드만 키운 채 영상을 청취했다. 영상의 사운드와 함께 누군가 장면 하나하나를 문장으로 읊어주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보아왔던 영상을 오직 사운드에 의존해 각 장면을 떠올리며 관람했다. 그때 함께 했던 시각장애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렇게 듣는 관람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시각장애인이라는 관객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야말로 우리 안의 장벽(barrier) 하나가 허물어진(free) 셈이다. 그때서야 ‘배리어프리’가 장애인들만이 아니라, 비장애인들에게도 새로운 감각을 열어주는 장치임을 알게 됐다. <복합 장애> 포스터 (사진: “ Multi-Handicapped ”, IMDb)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 복합 장애 >(1986)를 보는 내내 몇 년 전 배리어프리 상영회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의 해방감이 상기되었다. 물론 이 영화에는 감독이 의도한 인터뷰나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헬렌 켈러 학교란 곳에 재학 중인 감각 장애가 있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교육활동으로부터 발생한 다양한 신체 언어와 공간 소음이 전부다. 게다가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주고받는 고요한 수어 이미지와 그들의 신체가 외부 자극에 의한 감각을 다스리기 위해 내는 자기 자극음은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이다. 생각해보면 수어와 점자는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이 배우지 않아 모르는 언어인데, 복합 장애를 단순히 잘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몸의 어느 기관이나 감각의 결핍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외부 자극이 과도할 때 균형을 맞추기 위해 다소 괴성처럼 지르는 소리를 내거나(자기 자극음), 상대의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반향어) 등, 매우 적극적으로 신호를 내보낸다. 복합장애인들의 세계에서 비장애인들이 맞닥뜨리게 된 장벽(barrier)에 대해 감독은 굳이 해석해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교감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각자가 마주한 장벽을(barrier) 허무는(free) 것은 관객 본인의 몫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눈과 귀를 예민하게 열고 감독의 카메라 워킹을 따라가야 한다. 감독의 카메라는 복합장애인들의 교육 활동에 어떠한 서사도 부여하지 않는다. 가령 학생들이 수업을 받거나 선생님들이 커리큘럼을 고민하는 과정은 문학으로 치면 묘사와 대사로만 이뤄진 씬들이 교차편집되어 있을 뿐이다. 매일 매시간 학생들의 수업 내용이 달라지듯이 영화 또한 다양한 장애를 지닌 여러 학생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교육 활동의 나열만으로 그들의 하루를 보여준다. 수평적으로 연쇄되는 각 씬 사이에 영상적 빈칸은 없다. 다만 비순차적으로 병치된 씬들이 축적될 때마다 마치 문단 사이의 여백 같은 것들이 생성된다. 그 빈칸을 채우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감독의 발걸음을 쫓으며 머리 속에서 자꾸 생성되는 공란을 채워나가다 보면 비로소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람 중인 ‘나’의 눈과 귀가 어디에 붙들렸는지,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장애를 둘러싼 세간의 윤리와 편견에 앞서 일단 잘 모르던 세계를 영화로나마 경험하고 감각해 보는 게 우선이다. 사진: “ 복합 장애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물론 이 영화를 통한 경험이 VR을 쓰고 여러 감각 장애를 체험해 보거나 복합장애인이 되어보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적어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시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온전하게 기능하는 자들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처럼, 그의 카메라와 녹음기기처럼 관람객들은 오직 두 눈과 귀에 의지해 복합장애인들의 하루를 지켜봐야만 한다. 영화에서는 때때로 이 부분이 충돌을 일으킨다. 이 충돌이 윤리적인 문제로 확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에 감각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들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와이즈먼의 다소 차갑고 거침없는 카메라 워킹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뇌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촌동생을 만날 때마다 그가 내는 괴성과 자해에 가까울 만큼 세게 몸을 치는 행위가 어릴 땐 좀 무서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소리와 급변하는 온도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른들은 우발적이라며 그를 제지하는데 급급했지만, 사람이 너무 많거나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 그의 몸은 더욱 크게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요동치는 감정이 그의 몸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감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아니면 평생 그를 무섭고 괴팍한 장애인으로만 여기며 기피했을 거다. 그를 마주할 때 교육받은 윤리의식과 사전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끊임없이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느리고, 광범위하며, 때때로 막막해 다소 시간이 걸릴 뿐이다. 헬렌 켈러 학교 학생들을 보며 사촌동생과의 소통의(혹은 소통불능의)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들의 배움은 깜깜한 눈, 적막한 귀, 무성의 입 중 2개 이상이 교집합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이상한 소리가 삐져나오는 몸으로는 수건 하나 접는 일조차 쉽지 않다. 비장애인들이 너무도 익숙하고 쉽게 해내는 모든 일들을 이들은 매우 느린 속도로 배우고 익히며 각자의 고비를 꾸역꾸역 넘어서야 그나마(학교와 선생님들의 교육이 지향하는) 사회화가 가능하다. 그 배움에 나이와 단계에 따라 자동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일관된 커리큘럼은 없다. 시계를 읽지 못하는 학생, 이름과 주소를 겨우 읽어내는 학생, 상대의 수어를 직접 만져야 대화가 되는 학생 등. 헬렌 켈러 학교라는 하나의 교육기관 안에서 작동되는 교육 과정은 온전히 학생들의 신체 상태에 맞춰 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수어로 대화가 가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혼자서 몸을 일으켜 밥을 먹는 것조차 쉽지 않다. 때문에 학생들 각자의 배움과 앎의 과정에 학년, 과목 등 시스템에서 정한 용어를 붙이기가 어려워 보인다. 어느 정도의 사회화와 점자, 수어 등 기본 언어도구를 익힌 뒤 그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직업을 구하기 위한 교육을 받지만 그마저도 쉬워 보이지 않는다. 복합 장애를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 후 사회 운동가가 되었던 기적의 헬렌 켈러는 영화 속 복합장애인들이 재학 중인 학교 기관으로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영화 속 선생님들은 수돗가에서 짐승처럼 날뛰던 7세의 헬렌 켈러를 헌신적으로 붙잡고 그녀의 손에 끝내 “WATER”란 글자를 새겨 무지를 깨우쳐준 설리번 선생처럼 할 수 없다. 그들은 헬렌 켈러 학교에 재직 중인 피고용인이다. 교육 제도와 학교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학생들이 받는 수업과 생활지도 또한 학교의 예산안과 지침 하에 시행된다. 그들이 소속된 교육기관의 목적은 헬렌 켈러의 기적이 아니다. 복합 장애 학생들은 학교에서 필요한 교육을 받고 장차 직업을 구해 사회인으로서 기능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교육 시스템의 고리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식사 후 휴식 시간이다. 휴게 공간의 티브이가 켜지고 아이들과 선생님들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쉰다. 교육의 공백 속에서 아이들은 몸을 뱅글뱅글 돌리거나 반복적 입소리를 내고, 목적 없이 뛰어다닌다. 신기한 건 앞이 잘 안보이고 몸의 제어가 힘든 상황에서도 부딪치지 않게 서로의 간극을 조율해 나가기도 한다. 이때 허밍음 혹은 가스펠 같은 나지막한 한 선생님의 노래소리가 들린다. “One more river to go”로 시작되는 노래다. 가사는 ‘건너야 할 강’의 반복이다. 우선 ‘내’가 건너야 하고, ‘그녀’가 건너야 한다. 마치 선생님 자신과 그녀의 학생들을 위한 노래 같다. 선생님과 학생들의 느리고 더뎌 힘든 교육 활동이 일단락된 순간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노래가 또 있을까.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눈앞의 강이었던 배움 하나가 또 그렇게 실현된 셈이다. 영화는 헬렌 켈러 학교의 하루를 넘어 또 다른 하루인 주일로 넘어간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도 하에 교회에 간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아름다움이란 말이 오직 신으로 일원화된 곳에 놓여 있다. 아이들의 수어는 설교와 찬송가의 내용을 번역하는 수단이 되고 성경과 신에 대한 의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잘 말하지 못한다. 그들의 몸이 흔들리며 반향어를 내뱉어도 돌아오는 건 신을 향한 찬양과 성경구절뿐이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이어졌던 무수한 몸짓, 소리, 그들의 언어가 모두 무력화 되어버린 것 같다. 설교자는 아이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의 내용만 전달한다. 모든 것들이 교회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 같다. 무진형제(미디어 작가 그룹) l 무진형제는 3명으로 구성된 작가 그룹이다. 세간의 지배적인 가치와 믿음체계로 굳어져버린 것들을(眞) 의심하고 해체시켜(無) 동시대의 ‘인간-환경 시스템’을 재구성한다. <삼속(三俗)의 담(談)>, <궤적(櫃迹)-기술된 선인(善人)들> 등을 작업했다.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넷플릭스) 올 한 해 TV와 OTT를 통해 공개된 시리즈들을 필자의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부터, 스쳐 지나갔지만 돌이켜 볼 만한 문제작들까지 정리합니다. 며칠 전, 12.3 비상계엄 이후 1년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그 시간을 통과할 때는 미처 감각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 모두 참으로 위험한 시간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내란 사태를 수습하느라 사회 전체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상황 역시 불안정했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많은 이들이 ‘각자의 내란’을 견뎌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2025년의 시리즈에는 유난히 어려운 시절을 버티며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버틴 사람들의 이야기 올해 가장 많은 이들이 언급한 드라마는 < 폭싹 속았수다 >(김원석/넷플릭스)가 아닐까? <폭싹 속았수다>는 거친 바다를 온몸으로 견뎌낸 해녀, 광례( 염혜란 )에게서 시작한다. 광례와 딸 애순( 아이유 · 문소리 ), 손녀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진 모녀 3대는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파도에 맞선다.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 이 이야기에는 해녀 공동체의 연대, 애순과 관식( 박보검 )의 풋풋한 사랑, 그리고 모두의 생애를 지탱한 가족애가 가득 담겼다. <폭싹 속았수다> 속 인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과제를 감당하며 버텼다면, <태풍상사>(이나정, 김동휘/tvN)의 태풍( 이준호 )은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적 폭풍을 견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불어닥친 회사의 위기 앞에서 태풍은 직원들을 신뢰하며 열정적으로 회사를 지키고 살려낸다. <태풍상사>는 마치 ‘국난’을 극복하듯 회사를 되살리는 이야기인 동시에 “가장 평범한 곳부터” 도려내졌던 IMF 시대를 살아낸 보통 사람들의 얼굴도 놓치지 않는다. 태풍이 청년 사업가로 성장하던 IMF 시기, 낙수( 류승룡 )는 치열한 취업 전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탄탄대로를 걷던 그는 어느새 명예퇴직 대상자가 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조현탁/JTBC)는 사회의 중심축에서 밀려난 중년 세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포착한다. 사회적 ‘쓸모’가 사라졌다는 자각과 거듭되는 실패 앞에서 낙수는 모멸감과 상실감, 불안 속에서 흔들리며 우울과 공황을 겪는다. 이 시리즈는 중년의 위기를 유머와 애잔함으로 감싸며, 낙수가 가족의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 <폭싹 속았수다> 중 (사진: 한겨레 , PD저널 / © 넷플릭스) (하) <태풍상사>,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중 (사진: tvN , JTBC ) 여성들의 세계, 더 넓어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시리즈 너머, 여성을 생애사적·사회적 이야기로 확장한 시리즈도 눈에 띄었다. < 은중과 상연 >(조영민/넷플릭스)은 은중( 김고은 )과 상연( 박지현 ), 두 여성의 30년에 걸친 관계를 따라가며, 서로를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하고,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배신도 하는 등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를 밀도 있게 그린다. 그중에서도 상연을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결핍과 외로움이 빚어낸 인물로 끝까지 이해하려는 시선이나, 성소수자인 상학( 김건우 )의 죽음과 안락사를 선택한 상연의 죽음을 “내가 있어도 되는 세상”을 갖지 못한 존재들의 죽음으로 연결하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미지의 서울>(박신우, 남건/tvN)은 일란성 쌍둥이, 미지와 미래( 박보영 )의 ‘삶 교환’을 중심으로 청년 세대의 불안과 고립, 직장 내 괴롭힘, 비정규직 차별, 장애와 성소수자 문제를 복합적으로 짚는다. ‘마론제과’ 무기계약직 여성들의 이야기 <달까지 가자>(오다영, 정훈/MBC)와 아파트에서 발생한 사건을 추적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살롱 드 홈즈>(민진기, 정현남/ENA)는 가족의 확장된 형태로서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를 보여준다. < 피라미드 게임 >(박소연/TVING)과 < 선의의 경쟁 >(김태희/U+TV)은 여고 내 계급과 폭력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미지의 서울>, <폭싹 속았수다>, <견우와 선녀>(김용완, 정우식/tvN), <첫, 사랑을 위하여>(유제원, 함승훈/tvN) 등 모녀 관계를 통해 여성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현대극뿐 아니라 시대극 역시 여성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옥씨부인전>(진혁/JTBC)은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 양반 마님이 되어 ‘변호사’로 활약한 구덕이( 임지연 )를 중심으로 계급, 여성 차별, 성소수자, 아동·약자 착취 문제 등을 녹여내 ‘조선판 인권 선언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 애마 >(이해영/넷플릭스)는 1980년대 충무로를 배경으로, 에로 영화 전성기의 포문을 연 영화 < 애마부인 >(정인엽, 1982) 촬영기를 극중극 형태로 재현하며 ‘남성적 응시’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를 메타 비평적으로 풀어낸다. 여성의 성적 욕망을 부정하던 1980년대 시골 마을에서 성인용품 판매를 하게 된 여성들의 이야기인 <정숙한 세일즈>(조웅, 김미진/JTBC)와 1990년대 버스 안내양들의 우정을 담은 <백번의 추억>(김상호/JTBC)은 그간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역사를 복원해,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의 문제, 노동과 우정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상) <은중과 상연>, <미지의 서울> 중 (사진: MBC /© 넷플릭스, tvN ) (하) <애마>, <백번의 추억> 중 (사진: 넷플릭스 , JTBC )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한계 이렇게 여성들의 이야기가 다양하고 폭넓게 등장했음에도 ‘가족’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폭싹 속았수다>를 여성 서사로도 볼 수 있지만, 결국 부모 세대와 가족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또한 낙수의 아내 하진( 명세빈 )이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하지만, 시리즈는 결국 “김부장 이야기”, 즉 가장을 이해하고 북돋우며 가족애로 회복에 이르는 데 집중했다. <태풍상사>도 마찬가지다. IMF로 일자리를 잃거나 불안정한 노동에 배치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이런 이야기는 로맨스 서사에 묻히고 만다. 이런 한계에도 이 시리즈들은 ‘보편성’을 가진 좋은 이야기로 회자됐다. K-드라마의 보편성이란 여전히 ‘아버지’ 중심의 가족 서사라는 게 재확인된 셈이다. 이런 특징은 결국 세대, 노동, 차별 등 사회 구조적 문제로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른바, ‘여성 서사’라 불리는 드라마에서도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가족 다양성, 가족 너머의 서사를 온전히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흐름을 어떻게 봐야 할까?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서 영화평론가 손희정이 IMF 이후 영화의 여성 재현에 관해 지적했듯, IMF 이후 또 다른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는 지금, 이런 흐름은 가족이라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켜 ‘위기의 시대’를 손쉽게 통과하려는 징후가 아닐까.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태풍상사> 중 (사진: JTBC , tvN )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족과 연대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도 있었다. 가족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폭력, 사회가 방치하고 묵인해온 구조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그 ‘사이코패스’들은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올해 시리즈의 또 다른 흐름은 < 하이퍼나이프 >(김정현/디즈니+)의 소시오패스 의사 세옥( 박은빈 )을 비롯해 사이코패스 성향의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단지 반사회적 인물로 등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 그 재현을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 질문했는가에 있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변영주/SBS)의 연쇄살인범 이신( 고현정 ), < 친애하는 X >(이응복, 박소현/tvN)의 사이코패스 아진( 김유정 ), < 당신이 죽였다 >(이정림/넷플릭스)에서 남편을 살해하는 희수( 이유미 )와 그의 친구 은수( 전소니 ), < 자백의 대가 >(이정효/넷플릭스)의 모은(김고은) 등 폭력을 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반사회적 여성들을 통해 아동 학대, 가정폭력, 성폭력을 묵인하는 가부장제와 권력의 문제를 드러낸다. 이 시리즈들은 반사회적 선택이 개인의 선택이나 비정상적 일탈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산물임을 보여줬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품은 초반의 기세와는 달리, 후반부에는 장르적 쾌감이나 개인에 대한 처벌로 귀결되며 구조 비판의 힘을 잃었다. 그 결과 폭력은 사회의 문제로 제시되지만, 변화의 책임은 다시 개인의 파멸이나 응징으로 환원된다. 2010년대 이후 빈번하게 등장한 ‘사적 복수’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자백의 대가> 중 (사진: SBS , 넷플릭스 ) 결국,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2025년 시리즈를 회고하다가 ‘돌봄’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폭싹 속았수다>의 해녀 공동체가 서로를 살피고, <태풍상사>의 태풍이 직원들을 신뢰하며 회사를 지켜내고,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에서 가족이 함께 위기의 시간을 견디고, < 다 이루어질지니 >(안길호/넷플릭스)에서 마을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인 가영( 배수지 )을 사랑으로 키워내는 것. <미지의 서울>에서 미래가 딸기 농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신을 추스르고, <첫, 사랑을 위하여>에서 골수암에 걸린 효리(최윤지)가 꽃 농사를 짓는 보현(김민규)을 만나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고, <폭군의 셰프>(장태유/tvN)에서 지영( 윤아 )이 음식으로 사람을 살리고, <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혜영, 최하나/TVING)에서 이미 죽어 저승사자가 된 람우( 공명 )가 생기를 잃고 사는 첫사랑 희완( 김민하 )를 살리고, <견우와 선녀>에서 곧 죽을 운명에 처한 견우( 추영우 )를 무당인 성아( 조이현 )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리는 것. 이 모든 장면의 공통점은 어떤 대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이야기라는 점 아닐까? 그래서인지 올해 시리즈에는 유난히 식물을 키우는 설정이 자주 등장했다. 식물을 정성껏 가꿀 뿐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서로의 곁을 지켰다. 올해 시리즈는 ‘죽이는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살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연대라는 이름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가족주의라는 안전한 이데올로기에 기대고, 그것을 넘어서려 애쓰면서 2025년 시리즈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돌봄과 버티기만으로는 구조를 바꿀 수 없다. 가족 간의 사랑을 앞세우고, 개인의 파멸로 끝나는 응징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상상력의 시계를 좁게 한다. <애마>에서 희란( 이하늬 )과 주애( 방효린 )가 “각자의 링” 위에서 싸우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세계로 나아갔듯, 지금 우리에게는 낡은 세계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앞당기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미지의 서울> 중 (사진: tvN ) 오수경(드라마평론가) l 인간과 사회에 관심이 많아 문학을 전공했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으며, 드라마를 들여다본다. 여러 매체에 칼럼 기고. 『을들의 당나귀 귀 』(2019) 공동 집필, 『드라마의 말들 』(2022) 집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