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련
- 감독
- 앙리 베르누이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장 가뱅, 프랑소와 아르누, 피에르 몬디, 이베트 에티에반트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명치좌는 1936년 10월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가 명치정에 세운 최신식 영화관으로 해방 후 시공관으로 사용되었다. 명치좌가 자리한 곳은 조선철도호텔(현 조선호텔)에서 조지아백화점(롯데영플라자)을 지나 명동성당과 중앙관(중앙극장)으로 이어지는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 한 가운데 있었다. 명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인데 그 초입에는 1909년 설립된 낭화관이라는 작은 극장이, 명치좌에서 명동성당 방향으로는 1922년에 들어선 활동사진전용관 중앙관이 있었고, 명치좌에서 본정 방향으로는 1915년 설립된 닛카츠 영화의 개봉관인 희락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명치좌를 세운 인물은 명치정 마루빌딩(丸ビル)의 경영자 이시바시 료스케였다. 원적이 나가사키현(長崎縣)인 그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카페와 마루빌딩을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1935년 5월 마루빌딩의 한 모퉁이 부지 100평을 14만 5천원에 매수한 후 이곳에 영화관 설립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쇼치쿠 영화의 경성 흥행권을 획득하기로 하고 만주 관동군의 실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石橋一郞)를 통해 도쿄영화계에 접근했다. 동생 이시바시 이치로는 고바야시 도쿠지로(小林德次郞)를 통해 쇼치쿠의 중역들과 쇼치쿠 흥행권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였고, 쇼치쿠의 기도 시로우(城戶四郞) 소장, 시노야마(篠山) 차장, 이노우에(井上) 오사카지점장, 시라이 신타로(白井信太郞) 상담역 등을 움직여 이시바시 료스케가 쇼치쿠 흥행권을 얻을 수 있게 힘썼다. 기존 쇼치쿠 흥행권을 가지고 있던 송죽좌의 도쿠나가 구마이치로는 쇼치쿠 측에 부율 조정을 제의한 상태에서 미쓰코시 뒤편에 극장 신축을 추진하고 있었다. 부율 조정을 요구한 도쿠나가의 행동에 불쾌함을 가지고 있던 쇼치쿠의 중역들은 미쓰코시 뒤편 보다는 명치정 한가운데 극장을 설립하는 편이 경쟁회사인 닛카츠의 영화를 상영하는 희락관을 견제하기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이시바시 료스케와 계약을 체결하기로 한다. 결국 1935년 7월 13일 도쿠나가가 쇼치쿠 상영권을 포기하자, 이시바시 료스케는 7월 23일 도쿄로 건너가 28일 쇼치쿠 영화에 대한 선만봉절 계약을 체결했다. 이시바시는 아직 극장을 설립하기 전이라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쇼치쿠영화를 낭화관에서 상영하기로 한다. 이로써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낭화관이 1935년 9월부터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극장을 신축하기 위해 용산 개성좌의 흥행권을 인수받아 설립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성좌가 자리했던 용산 지역이 아닌 본정서 관내에 영화관 설립을 신청하였기에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본정서에서는 경성의 영화관을 쇄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명치좌의 신축을 허가해 주었다. 명치좌는 대지 505평에 건평 856평, 총공사비 536,000원을 들여 지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 영화극장이었다. 다마타(玉田)건축사무소의 설계와 미키(三木)합명회사의 청부로 1935년 11월 공사에 착수, 1936년 10월에 낙성을 보게 된다. [자료] 명치좌 개관 광고(《경성일보》, 1936.10.07) 1936년 10월 7일 개관한 명치좌의 개관 프로그램은 쇼치쿠 오후나(大船)촬영소에서 제작한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 주연의 <여성 대 남성>(女性 對 男性)과 쇼치쿠 교토촬영소에서 제작한 하야시 죠지로(林長二郞) 주연의 <춤추는 명군>(踊る明君)이었다. 개관 이후 명치좌는 경성의 조선인, 일본인 관객 모두를 휩쓸었다. 1940년 신년 3일간 관객 집계를 보면 명치좌가 1만 6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2위인 희락관의 9천 8백명과는 큰 차이로 관객수를 압도했다. 명치좌가 약진하면서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주도하게 된 이시바시 료스케는 전통적으로 서양영화를 즐겨 보는 조선인 관객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 일환으로 1939년에는 박정현이 운영하던 단성사의 운영권을 인수하여 명치좌 체인 안에 넣었다. 1907년 개관 이후 조선인의 손으로만 운영되었던 단성사가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운영되는 것은 조선 흥행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시바시 료스케에 의해 인수된 단성사는 명치좌의 2번관으로 전락하여 이름도 대륙극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기억해야할 부분은 명치좌와 같은 대형 토키영화관이 들어서고 남촌의 대형 영화관에 조선인 관객들이 몰리면서, 지역과 언어에 의해 구분되던 종래의 극장문화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바시 료스케가 단성사를 인수 한 후 명치좌는 단성사가 이름을 바꾼 대륙극장과 더불어 조선영화를 다수 개봉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명치좌를 통해 개봉된 주요 조선영화만도 1939년 <애련송>, <국경>, <새출발>, 1940년 <수업료>, 1941년 <반도의 봄>, <그대와 나> 등이 있었다. [자료] 명치좌에서 개봉된 최인규 연출의 <국경>(《매일신보》, 1939.05.19) 개관 이후 조선의 영화흥행계를 좌우했던 명치좌는 8·15해방 후 적산극장으로 미군정의 관리를 받게 된다. 조선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화관이다 보니 이를 불하받아 운영하려고 손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중 미군정의 인맥을 가진 김동성이 적산 관리인이 되어 국제극장이란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이 영화관이 조선영화흥행계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보니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극장을 공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과거 서울시민들의 각종 행사와 공연이 펼쳐지던 부민관을 해방 후 미군이 사용하면서, 시민회관이 없었던 서울시는 국제극장을 인수하여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시민회관으로 사용하게 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터가 된 서울을 대신해 부산이 임시 수도였다. 1954년 서울로 환도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소실된 국가기관을 대신할 건물을 물색할 때 국립극장으로 활용되던 과거 부민관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게 되자 국립극장은 시공관을 활용하도록 했다. 국립극장이 시공관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회관이라는 본래의 기능과 옮겨온 국립극장이 더불어 살아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새롭게 시민회관을 신축하고 과거 시공관을 오롯이 국립극장으로만 이용하기로 정리하면서 해결된다. 이를 위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남회관이라는 이름의 시민회관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건물은 4.19이후 완공되었는데 우남회관이란 이름 대신 시민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게 된다. 시공관이 시민회관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이전까지 시공관 건물은 명동예술회관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극장으로 활용된다. 명동예술회관은 본래 영화관 건물이라 연극 공연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1961년 연극공연에 걸맞게 대대적인 개보수가 이루어진 후 명동예술회관은 1962년 3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국립극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명칭도 명동국립극장으로 불리게 된다. 1973년 10월 17일 남산 국립극장이 개관되면서 10여 년간 국립극장으로 역할해온 명동예술회관은 대한투자금융(현 대한종합금융)에 매각되어 금융업체 건물로 사용된다. 이후 이 건물은 경매에 붙여져 낙찰가에 따라서는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다행이 문화관광부가 2002년 명동 국립극장을 복원하기로 결정, 2004년 400억원에 건물과 땅을 사들여 건물을 공연장에 맞게 다시 수리하여 2009년 ‘명동예술극장’으로 재개관하게 된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명동국립극장 당시의 모습(국가기록원) [ 자료 ] 《 매일신보 》 , 1939.08.20. 명치정 환락가에 대화 ( 大火 ), 작야 ( 昨夜 ), 전반소 ( 全半燒 ) 십사호 ( 十四戶 ), 손해 삼만원 십구 일 오후 십 시 십 분쯤 부내 명치정 ( 明治町 ) 이정목 오십사번지 전중심길 ( 田中甚吉 ) 의 목제 이층집에서 불이 나서 불길은 삽시간에 그 집을 다 태우고 옆집으로 올마부터 강본 ( 岡本 ), 지전 ( 池田 ), 최 ( 崔 ) 의 집과 편산 ( 片山 ) 려관 석광 ( 石光 ) 『 아파 - 트 』 추강어망 ( 秋岡魚網 ) 점의 창고 , 명치좌 『 ᄲᅩ - 이 』 방 등 팔호를 전소시키고 불길은 다시 그칠 줄을 모르고 좌등 ( 佐藤 ) 빙수점 , 추강어망점 , 북곡 ( 北谷 ) 양산점 , 연희 ( 延禧 ) 식당 등 육호를 반소시킨 후에 소방대와 부근 가정방화조합원들의 필사적인 활동에 의하여 열시 사십분쯤 진화하엿다 . 손해는 약 삼만원 가량이라고 하는데 불탄 집들은 통틀어서 집주인인 명치좌에서 일만 오천원의 보험에 들엇고 가장 집물은 제각기 보험에 든 사람도 안든 사람도 잇슴으로 자세치 안타 . 화재원인은 목하 본정서에서 조사 중인데 불난 곳이 환락가 ( 歡樂街 ) 의 중심지엿음으로 부근 일대는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구경꾼으로 일대 혼잡을 이루웟다 . 그런데 불난 바로 엽힌 명치좌에서는 마침 영화가 끝나기 바로 전이었는데 손님들은 불난 것을 몰낫기 ᄯᅢ문에 다행히 큰일은 업섯스나 불을 ᄭᅳ든 경성소방조 소방원 관춘웅 ( 關春雄 )( 三二 ) 은 전치 ○ 주일가량의 타박상을 입엇다 . [ 자료 ] 《 동아일보 》 , 1940.02.09. 구경열 ( 熱 ) 은 40 도 이상 , 정원초과와 위생 , 풍기 상 나뻐 , 입장요금까지 통제 요사히 본정서 ( 本町署 ) 관내에 잇는 영화극장으로 명치좌 ( 明治座 ) 를 비롯하여 기타 극장에서는 일반의 관극열 ( 觀劇熱 ) 이 고조됨을 기화로 하여 부당한 고급 요금을 증수함은 물론 정원 ( 定員 ) 이상의 사람을 입장시켜 소위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초만원을 일우어 관극 목적을 다 할 수 없음은 물논 위생 상 또는 풍기 상 조치 못한 점이 만허 경기도 경찰부 보안게에서는 그대로 방임할 수 없다 하여 미구에 입장요금의 통제는 물논 정원 이상의 입장을 엄금할 방침이라 한다 . 특히 요사히 비와 눈이 오지 안허 각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야 총후 물자 확보정책에 반하는 사실이 속출하는 현상에 비추어 보아 무리한 관객 수용과 입장자 초과가 화재발생의 위험성도 잇는 만큼 방화의 필요와 기타 재해 , 풍기 , 위생 각 점을 생각해서 단호한 방침을 세우기로 확정하엿다 한다 . 본정서 좌등 보안주임 담 ( 本町署 佐藤 保安主任 談 )= 극장에서 입장요금을 올리는 것은 이제부터 절대로 허가하지 안흘 방침이다 . 영화렬이 팽창한 것을 기화로 해서 입장료를 함부로 올리는 것은 업자들로서 반성해야 될 점이다 . 정원 이상의 입장에 대하여서도 풍기 , 재해방지 등 필요에서 도경찰부의 지시가 잇는대로 단호히 통제할 방침이다 . 운운 [ 자료 ] 《 매일신보 》 1941.07.25. 명치좌 기구 확충 , 송죽 ·SY 계 제휴강화 시국 하 영화의 사명이 점차 중대하여서 기 ( 其 ) 사회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여 오고 있는 이ᄯᅢ 시내 명치좌에서는 이에 상반 ( 相伴 ) 한 기구 확충과 내용 강화를 꾀하여 종래는 단지 송죽의 봉절관인 관계엿든 것을 다시 확대하야 긴밀한 제휴 강화의 계약을 맷고 금후는 종전의 배가한 비약을 ᄭᅬ하리라고 한다 . 이리하여 금후 명치좌에서는 전 ( 全 ) 송죽계의 『 애트랙슌 』 은 물론 S·Y 계의 양화 상영도 일층 확장하기로 되어 그 약진은 자못 주목된다 . 松竹○ 의 책임자는 神戶 松竹座 지배인 大矢 ○ 信 씨로 결정되어 근간 부임하기로 되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1.10.15. 『 반도의 봄 』 내월 ( 來月 ) 명치좌 봉절 명보영화의 이색편 . 신인 이병일 감독 작품 『 반도의 봄 』 은 그간 봉절권 획득의 문제로 봉절관이 결정되지 못하고 잇든바 송죽과 타협되여 내월 중순경 경성 명치좌에서 상영키로 되엇는데 송죽계로 전국 봉절하게 되리라고 한다 .( 사진은 그 한 장면 )
1960년대 청춘영화의 성공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 ‘황금기’, ‘르네상스’ 등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하면서 한국영화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꼽힌다. 멜로·괴기·희극·액션·역사·청춘·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시도는 한국영화사에서 도드라지는 그 시대만의 기획이었고,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마자 이루어진 영화계의 법적·제도적 장치의 정비는 (국가적 제도 안에 영화를 위치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지라도) 영화매체의 대중적·산업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1963-1967년 약 5년간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는 바로 이 두 가지, 영화의 다양성과 영화의 산업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국산영화’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이질적인 공간의 활용과 화려한 의상, 이를 메운 서구적 생활양식은 새로운 영화 문법의 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관객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1960년대의 한 가운데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960년대의 청춘영화는 몇 가지의 도드라지는 특징으로 설명된다. 먼저 그 내용에 있어, 청춘영화는 공통적으로 가난한 청년과 부잣집 여대생의 사랑을 그린다. 이때 부잣집 여대생의 지위는 매우 매력적인 미장센으로 스크린에 가시화되어 영상미를 높이면서도, 두 남녀의 만남이 좌절되는 중심적인 이유로 작용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또한 신성일·엄앵란이라는 두 배우는 청춘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이콘이다. 배우의 팬덤이 형성되고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사회적 관심을 받았던 것은 유래 없는 일이었다. 영화 속 신성일 · 엄앵란의 데이트 코스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고, 그들의 패션 역시 많은 이들의 따라해야 할 스타일이 되었다. 스타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두 배우의 탄생은 청춘영화의 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에 청춘영화의 대부분은 아카데미 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특정 극장에 가면 특정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은 영화에 따른 관객의 세대를 나누었고, ‘고무신 관객’으로 폄하되던 관객들과는 전혀 다른 젊은 관객들이 아카데미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이와 같이 한국영화의 외적 팽창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면면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청춘영화의 특징은 이 영화들이 표절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영화평론가들은 물론이고, 당시 대학가에서 심포지움이 열릴 만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안이었다. 1) 영화의 인기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던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특히 일본영화를 모방한 경우가 많았고, ‘해적판’이라는 이름으로까지 불릴 지경에 이르렀다. 청춘영화들은 당시 갓 제정된 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는 영화들이었는데, 1962년 제정된 영화법(1962.1.20.)과 1963년 1차 개정된 영화법(1963.3.12.)은 제작사의 의무조건을 강화하고 영화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모든 과정을 공보부 장관의 사무로 정착시키는 데에 주력하면서 영화제작의 관리에 힘썼을 뿐 표절문제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사이 발생한 청춘영화의 표절문제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 혹은 그것을 그대로 즐기는 관객과 함께 이를 묵인하는 공보부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청춘영화의 흥행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집단이나 단체까지도 비슷비슷한 내러티브 안에 포함시키는 등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제목과 상관없는 영화의 내용은 특정단체의 공분을 사기도 했으며, 비슷비슷한 내용과 설정들은 약 4-5년 만에 청춘영화가 사라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청춘영화의 문제점들은 청춘영화의 대표격으로 언급되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과 <학사주점>(박종호, 1964)의 당시 영화 심의서류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다. 또한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는 1960년대 초반, 영화법이 만들어진 후의 검열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과정을 좇는 데에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절화’된 각색-<맨발의 청춘> 현재까지도 <맨발의 청춘>을 언급하는 많은 글들이 이 작품의 흥행과 성과, 특별한 시도 등에 대해 쉽게 상찬하지 못하는 것은 이 작품이 ‘표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단편소설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을 바바 마사루(馬場當)가 각색하여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이 1963년 발표한 <진흙투성이의 순정 泥だらけの純情>과 거의 유사하며 구체적으로는 카메라의 앵글이나 소품의 설정까지도 거의 같다고 알려져 있다. <맨발의 청춘>에서만 볼 수 있는 조두수가 요안나와 그의 지인을 만난 식사자리에서 서양식 식사법을 알지 못해 폭소를 유발하는 장면이나, 요안나와 조두수의 정사(情死) 후 상반되는 규모로 치러지는 장례식 장면과 같이 계층적 차이를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장면 등이 일본 영화와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지적되지만, 2)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성공적인 작품이 표절작이었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표절은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맨발의 청춘>에 대한 평가는 의아함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사실 개봉 즈음부터 <맨발의 청춘>은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각색한 작품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맨발의 청춘>을 소개하는 한 기사에서는 “원전은 바다건너 작가 馬場當의 '멜로드라마' <진흙투성이의 純情> 번안의 사전승인을 받았다” 3) 는 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 다른 날의 기사에서는 “일본 馬場當의 이름을 뚜껑에 박은 깡패와 명문 딸의 눈물바다 속의 애련을 그린 <맨발의 청춘>” 4) 이라는 소개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5년 <맨발의 청춘>은 당시 문제가 되던 표절 작품의 한 예로 거론되는 등, 5) 1960년대 일본영화를 표절한 대표작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영화 <맨발의 청춘> 내에서 이 작품이 일본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1) 각색자동의서 영화 <맨발의 청춘>이 상영허가를 받기 위해 제출한 서류 중 하나인 이 각색자동의서에는 1964년(소화39년),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화에 관한 전권을 극동흥업주식회사 대표 차태진에게 위임하고 제작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각색자 바바 마사루의 서명과 도장이 찍혀 있다. 이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던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영화 각색자에게 받은 동의서로 <맨발의 청춘>이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영화 <맨발의 청춘>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명시하고 있는 각본의 담당은 서윤성(徐允成)이며, 각색에 동의를 해주었던 바바 마사루의 이름이나 원작이 된 <진흙투성이의 순정>의 제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림 2) 영화제작신고서, 공연권취득증명서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먼저 영화제작신고서에서 <맨발의 청춘>의 원래 제목은 <죽어도 보고싶어>였다는 점과 원작자가 서윤성으로 적혀 있다가 후에 바바 마사루로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그런데 그 다음 서류인 공연권취득증명서에는 서윤성이 이 각색 작품을 ‘본인 저작물’로 명시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으며, 앞서 말했듯이 영화의 크레디트에서도 서윤성은 이 영화의 각본가로 명시된다. 이는 당시 ‘저작’에 대한 개념이 명확치 않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맨발의 청춘>보다 한 해 앞서 개봉했던 <청춘교실>(김수용, 1963)과 <가정교사>(김기덕, 1963)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청춘교실>은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대학생들의 일상과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보여주면서 청춘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영화의 영화제작신고과정은 정확히 <맨발의 청춘>의 그것과 반대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영화의 신고서류에서 이 작품의 각색자인 이시철을 원작자로, 공연권취득증명서에서도 <청춘교실>의 시나리오를 동일인의 저작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청춘교실>의 오프닝 크레디트에서는 “石坂洋次郞의 ‘あいつと私’에서”라고 명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이시자카 요지로의 소설 『그녀석과 나』라는 작품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표시한다. 영화의 제작신고서류에서는 원작자의 동의서나 승인서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에 부기했던 것이다. 같은 해 개봉한 청춘영화 <가정교사>는 <맨발의 청춘>과 유사한 경우인데, 서류상 이 작품의 원작인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 陽のあたる坂道』의 영화화에 대한 원작자의 승인서가 포함되어 있지만,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아예 원작자를 표기하는 난이 비어 있다. 7) 이러한 사례들은 영화 신고의 과정 중에도 혹은 그것을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도 원작과 그것의 각색이라는 점을 명시하는 명확한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서류에서 명시하고 있는 원작자의 규정 역시 불분명하다. <맨발의 청춘>은 『진흙투성이의 순정』이라는 소설의 원작자가 아닌 영화의 각색자 8) 에게, <가정교사>는 <햇빛 쏟아지는 언덕길>의 영화의 각색자가 아닌 소설의 원작자 9) 에게 각각의 영화화에 대한 승인을 받고 있으며, 서류의 명칭 역시 ‘각색자동의서’, ‘승인서’ 등으로 체계적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정확한 양식을 지니지 않았던 이 동의서들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맨발의 청춘>이나 <청춘교실>, <가정교사> 등은 서류상으로든, 관객에게 보이는 오프닝 크레디트든 한 번은 이 작품의 원작자를 밝히는 것으로 각색영화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긴 셈이며, 이는 당연히 후에 표절로 번지거나 그럴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작품들에 적용되었던 1차 개정영화법과 그 시행령, 시행규칙들은 제작사의 등록절차를 강화하여 영화의 외적인 성장을 꾀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을 뿐, 저작물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영화제작신고 시 공식적으로 원작자의 동의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합작영화를 제작할 때에만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이 작품들처럼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 관객들에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리는 것은 제작자의 소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 물론 이는 제작사의 몫으로 남길만한 사안이 아니며 법적 정비가 절실한 부분이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서 저작권법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57년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시행령은 2년이 지난 후에야 제정되었을 만큼 11) 저작권에 대한 관심은 미비했다. 본 법령에서 저작물은 ‘문서, 연술, 회화, 조각, 공예, 건축, 지도, 도형, 모형, 사진, 악곡, 악보, 연주, 가창, 무보, 각본, 연출, 음반, 녹음필림, 영화와 기타학문 또는 예술의 범위에 속하는 일체의 물건’으로 규정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번안이나 번역물, 각색물의 경우 어떤 식으로 원작에 대한 권리를 얻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항목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표절이 문화계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작권법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고, 약 30년이 지난 1986년 12월 31일에야 처음으로 개정이 되었으니 그 사이의 저작권을 둘러싼 혼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여기에 저작권법을 관장하고 있던 부서가 문교부였다는 점도 12) 영화계에서 쉽게 표절문제가 불거진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영화의 검열사무를 맡아보던 부서는 문교부였지만, 영화와 연극의 검열사무는 1961년 10월 공보부로 이관된다. 13) 즉 영화의 상영허가를 내주는 부서와 저작권을 관리하는 부서는 명백히 구분되어 있었고, 각각의 업무는 그리 긴밀한 협조를 맺지 못한 채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던 영화들이 한국에서 영화화 되는 데에 큰 장애가 없었고, 제작사들 역시 이에 대해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다만 당시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의 질타를 받았을 뿐, 공식적으로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림 3) 극영화 <죽어도 보고싶어> 제작신고 접수 통고 이처럼 1960년대 중반 유행하던 청춘영화가 표절과 각색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영화 자체에서는 특별히 문제가 될 내용이 없었다. 본 제작신고접수 서류에서 지적하고 있는 두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친다는 이유였고, 이는 이 영화가 당시 민감했던 반공이나 국기 문란 등의 거대담론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작 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흥행이 보장되었던 청춘영화는 <맨발의 청춘>의 성공 이후 비슷비슷한 작품들의 제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당대 통용되던 용어의 의미와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영화들과 1960년대 영화 심의의 절차-<학사주점> <맨발의 청춘>과 같은 해에 제작, 개봉한 영화 <학사주점>은 가난한 대학생 경일이 부잣집 여대생 수미를 만나 신분상승을 꿈꾸지만, 자신이 하숙하던 수예점의 혜림과의 관계가 발각되면서 좌절되고 결국 경일이 투신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마무리된다. 김길헌(본명 김최연)의 창작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맨발의 청춘>에 비한다면 매우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영화의 심의 과정에서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제목이었던 ‘학사주점’은 1960년대 초부터 대학생들이 운영하던 주점을 가리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던 단어였는데, 엘리트들의 소통공간이었던 학사주점이 영화 <학사주점>에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비춰졌다. 당시 직접적으로 이 영화를 둘러싼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의 불만은 후일담으로 남아 있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영화법 초기, 즉 1차 개정영화법의 적용을 받고 있던 <학사주점>의 심의서류를 통해 당시의 영화제작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덧붙여 실제의 ‘학사주점’과 영화 <학사주점>이 어떠한 관련도 없다면 이 제목은 당시 젊은 관객층, 그 중에서도 대학생을 겨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한 부작용과 그에 대해 당시 ‘학사주점’ 운영진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림 4) 영화제작신고서 이 서류에서 먼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본 영화제작신고서가 ‘사단법인 한국영화업자협회’를 경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학사주점>의 신고 약 한 달 전에 작성되었던 [그림 2]의 <맨발의 청춘> 영화제작신고서에서는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의 경유 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는 그 사이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가 ‘한국영화업자협회(이하 업자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본 서류에서 경유한 일자(1964.2.29.)가 공보부에 본 서류가 접수된 일자(1964.5.18.)보다 약 3개월이나 앞선 것으로 볼 때, 업자협회를 경유하는 것은 영화제작의 신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절차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유의 과정은 법령이나 시행령 등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당시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허가 받고자 했는지는 명확히 알기 힘들지만, 14) 1963년의 영협(한국영화인협회)과 제협의 마찰은 이 경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준다. 1963년, 영협은 제협처럼 영화제작을 위해 영협도 역시 경유하도록 해달라고 관계당국에 건의하고자 한다. 15) 당시 제협은 영화제작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영화배우들의 쇼 출연을 제한했는데, 제협이 영협에 속해있던 당대 톱스타들 김승호, 신영균, 최무룡, 김지미 등을 쇼 출현을 이유로 영화 출연을 정지시키면서 영협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 영협은 제협이 영화계의 상황을 고려치 않고 횡포를 부리고 있다며 맞섰지만, 제협은 앞으로 6개월간 위 4명의 스타를 출연시킨 영화는 공보부의 상영허가 검열을 받기 위해 제협이 경유시켜주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16) 이 과정을 보았을 때, 제협은 영화제작을 위한 공보부의 신고 전 단계에서 영화제작내역이나 배우의 섭외 등을 미리 살펴보고 적합지 않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아예 공보부로의 접수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내용 자체에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한 인적 구성을 걸러내고 제작에 필요한 신고절차 자체를 차단할 수 있었던 경유는 사실상 사전 검열단계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영협에게도 그 권한을 달라고 요청한 부분인데, 이는 영협이 제협의 경유를 사전 검열 단계로 인식했다기보다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생각한 정도에 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5) 극영화 <학사주점> 제작신고 수리 통보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청춘영화에서 수정을 요구받았던 부분들은 차후 제작사와 큰 마찰을 일으킬 내용들은 아니었다. 본 서류에서는 영화법 시행세칙 제1조 2의 규정에 의거하여 17) 몇 부분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구는 당시 가장 큰 주의사항으로 명시되었던 국헌의 문란,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 민주주의 정신에의 위배, 적국에 대한 긍정이나 법적 존엄성을 훼손하는 등의 요소 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 주가 되었고, 서구식 생활상의 과시와 같은 장면들의 나열이 주가 되었던 <학사주점>은 큰 무리 없이 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학사주점>은 두 군데의 삭제 또는 수정지시를 받았는데, 시나리오를 살펴보면 먼저 첫 번째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술집에서 남녀가 함께 술을 먹고 있는 특별한 대사조차 없는 장면이다. 두 번째 장면은 이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 경일이가 죽은 후, 젊다는 것이 그 자체로 고독하고 괴로운 일이며, 경일이 죽었다 해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우울한 내레이션 부분이다. 이러한 장면은 공서양속을 해치고 청년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지적되었고, 심의대본에서는 깨끗이 삭제되어 있다. 18) <학사주점>에서 오히려 중점에 두고 있던 판잣집에 사는 경일의 극심한 가난이나, 그 상황을 묘사하는 대사, 계층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 (그림 6) 문화영화수속필증 위의 서류를 보면 심의를 거친 영화가 상영이 되기 위해서는 본편 영화 외에 반드시 ‘문화영화’ 혹은 ‘뉴우스영화’를 함께 상영해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항은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부터 포함된 것으로 20) 영화검열사무가 문교부에서 보도와 선전업무를 담당하던 공보부로 이동하게 된 이유를 명확하게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와 함께 상영되는 몇 편의 짧은 문화영화와 뉴우스영화들은 <자립경제>, <새로운 아이디어> 등과 같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국가관을 홍보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극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의 필름을 반드시 복사·신청하여 해당 영화가 극영화 상영 과정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자연히 관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이 영화들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던 영화 <학사주점>은 당시 실제 학사주점을 운영했던 이들에게 꽤나 불편한 영화로 비춰지고 있었다. 학사주점은 4.19혁명에 직접 참가했던 대학생들이 젊은이들과 함께 이야기할 장소를 만들고자 개업한 곳이었으며 몇 번의 부침을 겪으면서도 꽤 긴 시간 이어지면서 당시 명사들과 교류하고 설전을 벌이며 토론을 하던 공간이었다. 일본의 대학생 관광객이나 신문기자 등이 들러 설전을 벌이고 《요미우리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던 학사주점은 대학생들의 아젠다를 생산하던 다분히 엘리트적인 공간이었던 것이다. 21) 이러한 고유명사로서의 학사주점은 영화 <학사주점>으로 넘어오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띠는 공간으로 변해 버린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살폈을 때 이 영화의 제목이 <학사주점>일 필요는 없다. 학사주점은 영화의 주된 공간이 아니며, 단지 주인공 경일에게 부잣집 딸 수미를 유혹해 한몫 잡으라고 부추기는 대학생 친구들이 있는 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이 대학생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요행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당시 통용되던 학사주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학사주점의 운영진이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준비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학사주점의 운영진들의 회의를 살펴보면 <학사주점>,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등에서 등장하는 학사주점의 분위기나 인물들이 자신들의 학사주점에 대한 인식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오도 단속반을 운영하고 싶다는 의지까지를 피력한다. 그리고 당시 남의 간판을 빌려다 만든 이 영화에 대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도 하려고 소장(訴狀)까지 썼다가, 6.3계엄령으로 그만두었다는 말에서 22)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 영화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청춘영화는 1967년을 기준으로 급격하게 쇠퇴하고 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표절작이라는 비판과 함께 끊임없이 양산되는 비슷비슷한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이 더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제작사들은 편의에 따라 원작을 관객에게 알리거나 감추었고, 이것에 대해 큰 문제가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흥행된 작품과 내용도 배우도 유사하게, 배경도 분위기도 비슷하게 제작되었던 청춘영화에 싫증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으며 관객의 외면은 한 장르의 소멸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춘영화가 발랄한 분위기를 영화내부로 끌어들여오고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주었다는 점, 영화의 산업을 확대하는 데에 기여를 했다는 점 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1) 영화예술의 연구를 목적으로 한 서울대문리대의 ‘대학시네마 클럽’에서는 <한국영화를 고발한다>는 심포지움을 열고, 최근 인기있는 영화들의 표절에 대해 논의하였다. 《동아일보》, 1964.11.14. 2) 이우석, 「1960년대 청춘영화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중앙대 석사학위 논문, 2003, 7쪽. 3) 《조선일보》, 1964.3.10. 4) 《조선일보》, 1964.6.7. 5) 《경향신문》, 1965.7.10. 6) 이후 제명변경신청을 거쳐 영화의 제목은 <죽어도 보고 싶어>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변경된다. 7) 이 작품은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원작자를 명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1960년대의 일본영화 표절작품을 나열할 때, <가정교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 역시 영화 내에 원작자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을 확률이 크다. 8) <맨발의 청춘>이 참고한 작품은 1958년 발표된 후지와라 신지(藤原審爾)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바바 마사루(馬場當) 각색·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으로 1963년에 영화화 된 <泥だらけの純情>이다. 이 작품은 1977년에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9) <가정교사>가 참고한 작품은 1957년 신문에 연재된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동명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이케다 이치로(池田一朗) 각색·다사카 도모타카(田坂具隆) 감독으로 1958년에 영화화된 <陽のあたる坂道>이다. 이 작품은 1967년, 1975년에 각각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진다. (일본영화데이터베이스 http://www.jmdb.ne.jp 참조) 10) 공교롭게도 원작자의 명시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맨발의 청춘>, <가정교사>는 모두 극동흥업주식회사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 제작사에 따라 원작 표시 여부가 결정되었을 확률이 있다. 참고로 영화 자체에만 원작을 표시했던 <청춘교실>의 제작사는 한양영화공사이다. 11) 저작권법은 1957년 1월 28일, 1935년 7월 8일 조선총독부칙령으로 반포되었던 ‘저작권법의시행에관한건’을 폐기시키며 제정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시행령은 법령이 제정된 지 2년이 넘은 1959년 4월 22일이 되어서야 제정되었는데, 이 시행령에서도 저작권을 위반했을 때의 제재 등은 찾아보기 힘들다. 12) 저작권 시행령에 의하면 저작권법을 조사 심의하는 기관으로 저작권 심의위원회를 두는데 이 위원회의 모든 사항은 문교부장관의 자문에 따른다. 13) 《경향신문》, 1961.10.2. 14) 1967년 4월 1일 부터는 업자협회에 각본심의위원회를 두어 자체적으로 각본을 심의하고 공보부에 영화제작신고를 하게 한다. 그러나 1964년경에는 경유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심의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15) 《경향신문》, 1963.2.15. 16) 《경향신문》, 1963.2.14. 17) 영화법시행규칙 1조 2의 내용은 “공보부장관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수리한 신고내용에 제5조에 해당하는 사실이 있거나 기타 부당하다고 인정되는 사유가 있는 때에는 이에 대한 시정을 그 신고자에게 요청할 수 있다”이다. 이때 제5조의 내용은 국기문란을 포함한 사회적 혼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18) 물론 거대담론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이 장면들의 삭제가 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사회적으로 크게 비화되지 않았을 뿐, 영화의 완성도를 떨어뜨릴 가능성은 농후하기 때문이다. 19) 이는 1970년대의 영화검열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에는 가난이나 개발이 미비한 장소 등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0) 1962년 제정된 영화법 2조 5항에서는 문화영화의 정의를 내리고 있으며(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제11조에서는 문화영화의 동시상영을 의무화하고 있다(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이후 1963년의 1차 개정영화법에서는 문화영화에 2조 6항에 뉴우스영화를 포함시키고(이 법에서 "뉴우스영화"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부면의 시사를 신속·정확하게 보도하기 위하여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역시 극영화 상영 시에는 뉴스영화와 문화영화의 상영을 의무화 했다(제11조 공연자가 극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 21) 유근호, 『60년대 학사주점 이야기-4.19세대의 시대증언』, 나남, 2011 참조. 22) 위의 책, 14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