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이의 두가지 시선
- 감독
- 장석우
- 제작년도
- 2015
셀린 시아마의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2019)은 두 여인의 짧은 기간 동안의 사랑과 그 기억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화실에서 초상화 수업을 하던 마리안느가 ‘치맛단에 불이 붙은 한 여인’을 묘사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이 환기시키는 추억을 회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리안느는 정혼자에게 보낼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청탁받고 외딴 섬에 도착한다. 레즈비언 로맨스로서, 이야기의 중심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 있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동성애적 관계의 서사적 진전은 더디게 진행되고 지연된다. 이전에 초상화 모델이 되기를 거부했던 엘로이즈와 ‘산책 친구’로 가장하여 몰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과 서로를 향한 관심이 서서히 차곡차곡 화면을 채워가지만, 영화는 하녀 소피를 포함한 세 여자의 유대내지는 연대적 관계 묘사에 집중한다. 애당초 여자들만 있는 공간이었지만,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운 후, ‘집’은 다른 공간으로 전환된다. 그 곳은 신분도 계급도 ‘아버지’도 없는 해방의 공간이 된다. ‘아가씨’, ‘화가’, ‘하녀’는 서로에게 살가운 친구가 된다. 하녀는 수를 놓고 아가씨는 음식을 장만한다. 하녀는 앉아 있고 아가씨는 서서 가사 노동을 한다. 셋이서 나란히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장만할 때, 삼각대형으로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할 때, 바닷가로 산책을 나갈 때, 잘 짜인 화면 구도와 카메라 움직임은 그들의 수평성을 강조한다. 이 해방의 공간에서 흥미로운 장면은 세 여자가 함께 책을 읽는 부분이다. 셋은 오르페우스신화를 읽고 있다. 이야기의 절정 부분, 에우리디케가 하데스의 세계, 지하의 세계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장면에서, 세 여성은 각자의 해석과 의견을 제시한다. 예컨대, 소피는 지상의 입구에 도달하기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어긴 오르페우스의 행동에 분노한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운명에 순응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오르페우스를 불러 뒤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그녀의 의지로 지하세계로 돌아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해석은 영화의 의미화 층위에서 그녀가 마리안느와의 관계에서 행할 선택에 반향하며, 이후 마리안느의 그림으로 재차 반영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진정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여성관객성’에 대한 영화의 자기반영적 성찰로서 가지는 울림 때문이다. 텍스트에 저항하고, 결을 거슬러가며 독해하고, 행간을 채우고, 의미를 전유하는 과정은, 압도적으로 가부장적인 텍스트들에 둘러싸여 있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분노, 지성을 이용하여 쾌락을 만들어 가는 여성관객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또한 “결국 서사적 해결은 이야기를 만든 자의 선택”이라는 말을 통해, 스토리텔링 장치의 남성중심적 위치와 그 이데올로기적 지지대를 소환한다. 이러한 세 사람의 유대는 소피의 임신중절 과정을 함께 히는 것으로 확장된다. 원치 않은 임신에, 세 여성은 여성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지는 민간요법에 대한 지혜를 모아 시행하지만 실패한다. 영화의 표제가 된 미술 작품이 탄생하는 밤의 해변 장면은 고혹적이고도 아름답다. 밤에 여성들이 해변에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하는 장면은 신비로운 비의적 아우라에 쌓여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여성들은 그녀들만의 비밀스런 정보를 알음알음 교환하고 고통을 나누는 듯하다. 셀린 시아마는 여성들의 모임의 비의적 하모니 속에 관객들을 참여시킨다. 그리고 바로 그곳, 여성들만의 비밀의 세계에서 엘로이즈의 치마에 불이 붙는다. 즉 그녀의 욕망이 타오른다. 소파시술 장면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놀라움을 주는 것으로서 여성 이슈에 대한 시아마의 깊은 탐구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지금이나 두 세기 전이나 여성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며 아이를 유산한다. 가려지고, 기록되지 않고, 재현되지 않은 여성의 역사에 대한 시아마의 소명 의식은, 집에서 엘로이즈가 소파시술 장면을 재연하고 마리안느에게 그리라고 할 때, 자기반영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선 그 자체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질문한다. 여자가 여자를 그린다면, 여자가 여자를 응시한다면, 어떤 변화가 생성될까. 셀린 시아마가 한 인터뷰에 밝혔듯이, 1770년대 당시 여성 화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마리안느처럼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하였다. 여성 화가들에게 초상화는 배타적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한에서 허용되었다. 역사적으로 초상화는 남성 화가의 전유물이었다. 초상화에는 초상화가의 시선이 구조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고, ‘결혼을 위한 초상화’라는 분명한 목적은, 보는 자(화가와 관객)의 위치를 남성으로 못 박는다. 이 때 포즈를 잡는 여성은, 남성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을 바라본다. 정혼자의 마음에 들만큼 예쁘게, 정혼자의 성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에로틱하게, 몸을 비틀고 ‘적당히’ 노출하도록 요구받는다. 남성 화가는 바라보고 행위하고, 여성 대상은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본다. 그녀는 남성의 응시를 내면화함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포즈’란 시선이 오고가고 부딪히는 과정이며 포즈를 체화하는 몸은 시선의 전쟁터이다. 엘로이즈가 이전 화가에게 포즈를 거부했던 것, 그리고 화가가 엘로이즈의 얼굴을 그리지 못하고 뭉개놓았던 것이 엘로이즈가 남성 화가의 일방향적 응시에 저항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가는 자신의 응시의 좌절과 그 분노감을 그림의 구조 속에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작업은 응시를 주고받음의 상호작용과정으로 전화시킨다. 마리안느의 시선 뿐 아니라, 엘로이즈의 시선이 카메라와 대사를 통해 명료화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응시를 통해 서로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과 버릇, 그리고 사랑의 기미를 포착한다. 이때 셀린 시아마가 전경화하고 있는 것은 시각문화예술 전반에서의 시선의 문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시선의 구조화를 둘러싼 영화 장치의 젠더 관계를 질문하고 드러내고 새롭게 구조화하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바라보고, 사랑의 눈으로 응시하고, 상호적으로 주고받는 과정은, 엘로이즈의 몸에 마리안느의 얼굴이 겹쳐지는 누드화로 인장된다. 이는 서구의 회화 역사에서 보기 방식의 양식화를 통해 남성 관객 위치를 새겨 넣는 지배적 형식으로서의 누드화를 레즈비언의 에로틱한 시선으로 일순간에 전복시키는 순간이다. 귀족 가문의 거실에 엘로이즈의 초상화가 놓일 것이라면, 그 누드화는 공적 초상화 밑면의 ‘네가 이미지’, 즉 음화(陰畫)이자 레즈비언 음화(淫畫)인 것이다. 시각화와 관련하여,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비전은, 초상화같이 포착된 결혼식 드레스를 입은 엘로이즈의 이미지이다. 그 비전은 모순적 상황과 내적 갈등이 깊어지는 순간들에 마리안느에게 출몰한다. 검은 어둠을 배경삼아 정면에 시선을 둔 채 서있는, 엘로이즈의 전신을 담은 그 ‘초상’은 흡사 유령 같다. 깊은 어둠이 엘로이즈의 형상을 허공에 매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비전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의 실제 안으로 봉합됨으로써 일종의 플래시포워드로 재위치화 되는데, 이 이미지 역시 결혼 초상화의 밑면에 자리한 네거티브 이미지이다. 이 유령 신부의 이미지는 여성들의 생기, 여성들의 성애적 관계의 죽음으로서의 결혼의 의미를 드러낸다.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결혼 제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는 유령으로서의 삶이다. 꽤나 긴 길이의, 내레이션이 동반된 에필로그는 십중팔구 진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에필로그는 떨리는 화표면의 진동을 통해 보기 드물게 감동적인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 낸다. 두 사람의 이별 후 다른 화가의 시선과 손으로 그려졌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며 관객들은 그 시각화의 과정을 예측하게 된다. 엘로이즈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어떻게 재현되기를 원하였으며, 초상화가와 어떤 시선의 협상을 하였는지를. 아울러 그것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한 측면을 강력한 힘으로 증언하는데, 이성애 실천 가운데 말소 되지 않는 동성애적 욕망의 존재이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전달된다. 비발디의 음악을 매개로 한 엘로이즈의 얼굴 클로즈업은 기억의 한 챕터에 넣어두었던 여성 성애의 주이상스의 현현이다.
간혹 극영화 감독들을 만나면 반복해서 듣는 소리가 있다. “제가 어떻게 다큐를 하겠어요?”, “다큐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 생각해요. 저는 절대 못 해요”, “죽기 전에 꼭 인생의 다큐 한 편 만들 거예요” 등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인 경험이라 일반화하기에 다소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다큐멘터리 영화 혹은 다큐 제작에 대한 커다란 사회적 의미 그리고 제작에 임하는 작가윤리를 의식하는 듯하다. 마치 다큐를 만드는 사람은 거짓말도 못 할 것 같은 사람, 사회적 정의로 가득 차 있거나 이를 위해 기록 대상과 함께할 수 있다는 신념과 성실함이 필요조건인 것처럼 생각되는 듯도 하다 이런 대화는 “항상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이야기로 끝이 나곤 하는데, 그리고 나면 “나는 다큐하기에 괜찮은 사람인가? 이건 뭐지?”, 자문하게 된다. 그리고 매번 ‘하, 그렇지 않은데’, 하며 부끄러워진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다. 타 예술 장르와 다르게 다큐멘터리에는 왜 이런 정치적 올바름, 역사의 정의와 진보에 대한 작가의 신념, 피사체에 대한 시선이나 태도 등 도덕 혹은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그리고 작업, 작가 윤리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을 해 본다. 2017년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상영된 김성은 감독의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위의 고민에 어떤 답들을 제시하는 영화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에 대한 기록이다. 감독은 연출 의도에서 “방문자에서 연대자로 그리고 이주민으로 변해온 내 시선이 반영된 영상을 기록하려 했고 그것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라고 말한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저항의 시간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렇게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강정마을 주민들과 이 투쟁에 함께하는 활동가들의 삶과 기억들을 성찰, 기록해내고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다른 한 축으로는 제주 4.3사건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땅 인민들에 대한 국가폭력의 역사-늘 그렇듯이 어느 투쟁지역에서나 국가권력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의 논리를 폭력적으로 관철시킨다-를 기술해낸다. 매번 절망과 희망 없음을 확인하면서도 또 함께 일어나 서로 의지하며 일상의 평범한 권리를 위해 현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이에 감독은 “어떤 폭력이나 각자 가지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깨려고 할 때,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지만 이걸 이겨나가는 힘 하나하나, 한순간 한순간이 바로 평화다”,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을 지켜냈다. 그들은 정당했다”, 라고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도 없는 시간, 역사 속에서 잊힐, 하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간,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복원해야 할,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스물다섯번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많이 아팠을 시간과 사람과 자연을 위로하고 보듬어 안으며 한판 위령굿을 보내는 듯도 하다. 현장이다. 이와 같은 감독의 성찰과 깊은 사유는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우게 되는, 대상들의 구체적인 삶의 역사와 그 언어에 기인할 것이다. 제작, 작가윤리라 함은 정형화된 특정 의식 혹은 갖춰진 어떤 시선이나 태도라기보다는 현장에서 경험하게 될 세계의 윤리, 그리고 그 충돌에서 생겨날 긴장이자 진동일 것이다. 현장에서 함께 하는 다양한 삶의 이해들이 감독의 질문이 되고, 이러한 감독의 질문들을 통해 영화적 진실을 함께 찾아가는 그 긴 여정 어딘가에 기록의 의미가 위치할 것이다. 영화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그래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어떤 특정 유형의 사람들만 다큐를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계를 대면할 작은 용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안을 수 있다면, 끊임없이 나를 분열시키고 되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다큐멘터리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 스물다섯번째 시간 >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생명과 평화에 대해, 그리고 함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영화적 시간을 거치고 나서 나와 우리 이웃의 부조리함을 내 안으로 인지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손을 내밀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생겼다. 큰 성취가 있는 영화이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저건 분명히 감독 자신의 경험일 거야’라고 생각되는 작품이 가끔 있다. 영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할 때 다른 관객들도 감독에게 직접 겪은 일이냐는 질문을 많이 던진다. 아마도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알기 어려운 어떤 디테일이 그 영화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감독이 겪은 일로 만든 작품을 찾아내기란 더 쉬운데, 감독과 주인공 캐릭터가 똑같이 생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 똑같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바로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이구나’ 생각이 든다. 이건 거의 명함 수준이다. 여기 주인공 캐릭터와 감독이 똑같이 생긴 또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한다.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작인 < 어둠의 저편 >이다. 영화는 어두운 병실 안에서 생명 유지 장치의 반복되는 ‘삐삐’ 소리로 시작된다. 신경을 거스르는 소리에 주인공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말기 암에 걸린 누나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주인공은 급기야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기억, 아버지의 죽음이다. 흑백으로 된 아트웍은 병원과 죽음이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 색을 가진 것은 유일하게 삶에 대한 의지가 담긴 누나의 분홍색 페디큐어뿐이다. 이 작품을 보면, 바로 이것이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가족의 죽음을 작품으로 만들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어느 정도 솔직하게 만들면 좋은 것일까? 나는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솔직함에 큰 충격을 받았다. < 어둠의 저편 >은 누나와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감독은 작품의 첫 상영에서 가족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가족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영화를 만들 때부터 꼭 가족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가족끼리 누나를 잃은 슬픔을 한 번도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치유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감독이 가족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작품이다. 김창수 감독은 꽤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해왔다. 장편애니메이션 < 천년여우 여우비 >(2006), < 마법 천자문 >(2010), <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2015) 등의 핵심 스태프로 참여했다. 20년 동안 업계에서 일하고 이제 자신의 첫 연출 작품을 만든 것이다. 나는 영화감독이 다른 예술 분야를 하는 것에 비해 좋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어 시작해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바이올린, 피겨 스케이팅, 화가, 가수 등은 사실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뭔가를 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만은 삶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얼마든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게다가 이러한 첫 작품이라면, 다음 작품이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다. 올해 만들어진 신작이니 2016년에는 여러 영화제를 통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을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관객이라면, 놓치지 말고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