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 감독
- 김정구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임근아, 조성제, 김일안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 시간을 달리는 소녀 > < 하나와 앨리스 > < 클래식 > < 건축학개론 >....익히 보아 온 그 무수한 첫사랑의 멜로들을 대입시키고, 떠올린다 해도 좋다. < 5월 1일 >은 너무도 명백히 그 혐의를 지울 수가 없는 영화다. 그리하여 지레짐작으로 이 영화를 그렇게/진부한/클리셰/덩어리 코너로 제쳐놓고 안 본다면 조금 손해다. 그러기엔 좀 아까운 구석이 많다. <5월 1일>을 제대로 보려면 그래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해야 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무수한 첫사랑 영화를 ‘제 맘대로’ 마구 가져와서 온전히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냈을까. <5월 1일>은 멋진 주연배우와 촬영, 음악,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교차 편집, 편지와 레코드라는 소품이라는 뻔한 요소가 기념할 만한 멜로의 장면으로 구현되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2세대에 걸친 사랑의 이야기라 헷갈리지 않도록 멜로가 향하는 화살표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 부분에서 1차 혼돈이 온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연주를 듣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 그리고 그 앞에 마찬가지 감상에 빠진 남자, 그리고 그 옆의 여자가 등장한다. 공연이 끝난 후 로비로 나온 여자는 남자를 알아보고 부르려 하지만, 예의 그 여자가 팔짱을 껴서 포기하고 돌아선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교복을 입은 소녀 둘과, 이들을 지켜보는 남학생이 있는 지상철 장면이 나온다. 싱그러운 여름, 짧은 교복 치마. 단짝 친구, 등하굣길에 늘 만나는 남학생. 벚꽃이 푸른 수목으로 바뀐 걸 제외하고는 모두 < 하나와 앨리스 >의 도입부와 꼭 같아 걸리지만,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공연 장면에 등장했던 남녀의 과거 속으로 온 것 같은 플래시백 장면처럼 연결되지만, 이 소녀는 공연장에서 눈물 흘리던 여자의 딸 바이(정여희)다. 하지만 영화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게 되는데, 현재의 중심축은 바이다. 그녀는 자꾸 관심을 보이고 쫓아오는 숫기 없지만 잘생긴 소년 예쫑수가 싫지 않은 눈치다. 바이의 단짝 친구의 생각은 좀 다르다. 실은 자신도 예쫑수에게 관심이 있으니, 바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예쫑수에게만 잔뜩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바이의 하루도 바쁘다. 친구랑 놀기도 바쁘고, 바람피운 아빠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 상담도 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중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던 엄마 왕레이(가정문)가 그만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다. 평탄했던 바이의 학창시절도 그렇게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엄마의 과거. 17살 소녀 왕레이(정여희)의 일상을 소환해 낸다. 교복 치마 길이는 딸 바이의 것보다 길어졌고, 발랄한 바이보다 수줍음도 많고 얌전한 소녀 왕레이. 그녀는 자꾸 못살게 구는 또래 남학생 린커밍(석지전)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 경쟁심이 센 린커밍은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도, 자전거 질주에서도 자꾸 자신을 앞지르는 왕레이를 향해 “다음엔 이기게 안 둬”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관심과 사랑을 그렇게 괴롭힘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연애. 린커밍과 왕레이가 펼치는 티격태격하고 풋풋한 과거를 회상하는 건 물론 식물인간이 된 왕레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그녀가 연주회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른이 된 린커밍(임현제)이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 과거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건축설계사가 된 린커밍은 그 사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지만 사랑을 믿지 못해 헤어졌으며, 친구와는 나날이 늘어가는 나이에 대한 상념을 늘어놓을 정도로 어른이 돼 버렸다.(이건 또 변명이 불가능할 만큼 너무 < 건축학개론 >과 닮았다.) 어쨌든 식물인간이 된 여자와 무료하고 허한 중년의 남자를 과거 햇빛 찬란했던 첫사랑의 한때로 착지시켜줄 ‘교통수단’은 여자의 딸 바이다. 엄마의 컴퓨터를 정리하던 소녀는 ‘보내지 않은 이메일’ 함에서 (연주회에서 그녀가 린커밍을 만난 후 쓴) 메일을 발견하고, 엄마 대신 그걸 전달하기로 한다. 마치 자신이 엄마인 냥.(엄마의 사랑을 구제해 주려는 노력은 < 시간을 달리는 소녀 >나 < 클래식 >마저도 연상케 하니, 원 이거 참...) 5월 1일이 < 러브 어페어 >에서처럼 사고를 당한 날이라거나, 혹은 만나기로, 또 헤어진 날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대신 이 날짜는 이들 사랑의 복선이 되는 비지스의 곡 ‘First of May''''에 해답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키보다 컸었고, 다른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하는 동안 우리는 사랑에 빠져 있었’던 그 둘 사이의 사랑을 설명해주는 것 같은 가사를 가진 비지스의 곡은 1990년대 초, 타이베이라는 배경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리고 린커밍과 왕레이 사이에서 오가는 레코드판으로 전달되거나, 또 전달되지 않는다.(< 러브 레터 >와 < 건축학개론 >의 사이 어디쯤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같은 설정) 어른이 된 린커밍은 갑자기 떠오른 왕레이를 향해 “5월의 공기는 그때와 같아. 사람은 다시 그 자리에 갈 수 있지만, 그때로 다시 갈 수는 없다”라고 읊조리며,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하며 뛰어놀던 농구장에 가서 농구를 하고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다. 린커밍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그때 갑자기 잊고 지냈던 과거와 도킹을 시도한다. < 5월 1일 >은 플래시백이 무수히 등장할 뿐 실제 과거로 들어가는 일은 없으니, 명백히 판타지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신없이 오가는 과거와 현재를 마치 하나의 시간대처럼 이어줄 여러 장치들을 고민해 내고 적용시킨다. 린커밍과 왕레이, 그리고 딸 바이가 전개하는 사랑의 기억과 공유는, 각각의 내레이션과 편지를 읽는 동안 오버랩 되는 음성 등으로 효과적으로 전개된다. 이 복잡한 오감 때문인지, 왕레이와 바이를 연기하는 1인 2역의 배우 때문인지, 관객은 이 과정에서 현재 시점의 17살 소녀 바이와 엄마 왕레이의 17살 시절이 오롯이 겹쳐지는 ‘판타지’에 빠져든다. 세대는 변했지만, 사랑 때문에 감정이 ‘접질러지는’ 지점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 수가 없다. 린커밍과 왕레이가 비극적 사건에 휘말리고 그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엔 바이가 친구와의 삼각관계로 예쫑수를 오해하고 힘들어한다. 십 대의 첫사랑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미숙하고 낯설고 새롭다. 그래서 풋풋하고 좋기도 하지만, 또 그래서 두렵기도 하며, 실패할 경우 방어벽도 너무 낮은 위험한 도전일지니. 그렇게 조심스러운 접근 탓에 첫사랑의 신화는 스크린으로는 도저히 깨지지 않을 무한한 소재다. 자국 대만에서 보자면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 < 나의 소녀 시대 > 등 대만표 청춘물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영화로,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아시아의 성공적인 첫사랑 소재의 영화를 모두 짜깁기한다. 그럼에도 뮤직비디오를 연출해 온 주격태 감독의 영상만큼은 그 중 독보적이다. 뭔가 일일연속극 같은 조악함이 엿보이는 시작 부분의 피아노 연주회 장면만 잘 넘기면 된다. 지상철 밖으로 우거진 푸른 초록, 교복을 입은 소녀들의 발랄한 움직임이 시작부터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아, 이때부터는 절대 정지 버튼을 누르기 힘들다. 도심이지만 초록이 유독 많은 타이베이의 정경과 십대들의 어우러짐은 눈에 담아둘 만큼 아름답다. 막 폭우가 걷히고 난 후, 물웅덩이를 따라 걷던 린커밍이 왕레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던 순간, 혹은 소년들이 레코드판을 훔쳐내 커버를 벗겨 옥상에 올라가 모두 하늘로 날려버리는 장면은 특히 압도적이다. 90년대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더 오래전 과거처럼 보이는 낯선 90년대가 선사하는 정서도 독특하다. 왕레이의 소녀 시절과 딸 바이 1인 2역을 소화한 배우 정여희는 아마 이 영화를 보면 모두가 사랑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다. (좀 문제적 장면일 수도 있지만) 어른이 된 린커밍이 그래서 순간 바이를 왕레이로 착각하는 장면에서처럼 말이다.
2000년대 초반은 여러모로 참 재미있는 시기였다. 세계 종말도 Y2K도 없었다. (있었어도 나 같은 서민은 모를 정도로 능력자분들이 잘 처리해 주셨다.) 그렇게 맞이한 밀레니엄에서 사람들은 뭔가 해방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2000년 이후의 삶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과는 다른 문화현상들이 나타났고, 이전부터 근근이 이어지던 서브컬쳐들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영화계에서도 그런 모습은 다르지 않았는데 과격한 상상력과 놀라운 실행력이 결합된 재미난 작품들도 많았다. 그런 경향의 일부였던 < 씨어터 >와 <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 < 엄마의 사랑은 끝이 없어라 >를 본 코너에서 소개하기도 했었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이들 젊은이들의 재기가 꽃피우던 시기에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려 고독하게 16mm 카메라를 다찌마리로 수놓았던 어느 노감독의 마지막 영화에 대한 것이다. 2003년 8월 21일 주간지 ‘일요 서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퀵서비스 배달원의 애환을 그린 영화 < 퀵맨 >이 최근 극장에서 개봉 돼 화제다.” 이 문장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 퀵맨 >은 퀵서비스맨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 직업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둘째, 개봉됐다는 언급은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KMDb에는 개봉 날짜 및 관람객 수 표기란이 아예 비어있고 네이버 영화에는 2002년 개봉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위의 기사는 2003년 기사... 도시 전설이 보통 이런 식으로 탄생하곤 한다. 게다가 ‘화제’였는지도 불분명하다. 정말 <퀵맨>은 화제였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화제’는 일반 관객이 아니라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 영화는 1967년 < 새벽길 >로 영화인생을 시작해 1996년 < 알바트로스 > (그렇다 차인표 , 이휘재 의 국방부 퀘스트였던 그 영화다.)까지 쉼 없이 달리던 그가, 6년의 공백 끝에 발표한 영화기 때문이다. 이혁수 라는 이름은 뭐랄까. 임권택 도 남기남 도 아니지만 상당한 다작에(KMDb 등록 감독작이 51편이다) 나름대로 인정받는 흥행작, 장르의 걸작도 필모에 몇 편 포함되어있는 (그 중 42번째 영화이고 86년에 연출한 < 여곡성 >은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한국 공포영화의 클래식이다.) 감독이다. 그는 결코 거장도, 연타석 안타의 흥행 마술사도 아니었지만 영화인으로서 오랜 시간 갈고닦은 연출력을 통해 장르 영화의 구조를 튼실하게 구축할 줄 아는 감독이었던 것 같다. 그의 필모에는 권격 영화, 호러 영화, 사회 고발, 코미디 등 여러 장르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액션영화 연출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 한 때는 흥행사로 불리기도 했다. ‘삐용삐용 B무비’의 다른 필진인 주성철 기자가 소개했던 < 애권 >에 언급되었던 ‘웃겨서 죽여버리는 권법’이 등장하는 < 소권 >이 이혁수 감독의 작품이며 이 작품은 장르 팬들의 애정을 받는 영화다. < 퀵맨 >은 그런 이혁수 감독이 2000년대에 들어 연출한 유일한 영화다. 영화가 제작된 2002년 당시는 디지털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고(한국 디지털 에로영화의 춘추전국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다. 클릭 엔터테인먼트와 봉만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 한국 영화계에 ‘새로움’이라는 화두가 실제로 눈에 펼쳐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그러나 이혁수 감독은 <퀵맨>을 16mm 필름으로 찍고, 등장인물은 퀵서비스 기사와 사악한 기업의 부사장이지만 영화의 골격은 무협영화를 그대로 따라가는 권격 영화로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 놀라운 반전까지. 모델인 승희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뛰어난 미모 덕에 급상승 중이다. 그러나 업체 관계자들과의 술자리, 에이전시의 무리한 요구에 염증이 난 승희는 일을 그만두고 본인의 전공을 살려 미술학원 강사로 돌아간다. 한편, 코리아유통의 오 회장은 ‘코브라’라고 불리는 암살자에게 살해 당한다. 그는 사망 전 유언 동영상을 남겨 자신이 어릴 때 버렸던 유일한 혈육 ‘오승희’를 찾아 자신의 전 재산을 상속해 주기를 당부한다. 이 유언을 본 고문 변호사 문 변호사와 부사장 태욱은 ‘오승희’의 사진 한 장을 그 가지고 그녀를 추적한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다르다. 문 변호사는 오 회장의 유언을 받들기 위해 그녀를 찾지만, 태욱은 그녀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오 회장을 ‘코브라’에게 사주해 살해한 것이 태욱이기 때문이다. 회장을 살해하고 기업을 통째로 먹으려던 태욱에게 몰랐던 승희의 존재가 매우 성가신 것이었다. 태욱은 기어코 승희를 찾아내고야 만다. 위기에 빠진 승희는 우연히 만난 퀵서비스 기사 성민의 도움을 받게 되고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적어놓은 줄거리만 보면, 적당한 액션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이런 식의 이야기기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를 주무르는 자의 ‘감각’과 추구하는 ‘방향’이 영화의 모양을 결정한다.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 퀵맨 >을 어디에서든 검색한다면 많은 정보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몇 안 되는 포스팅에서 이 영화가 ‘괴작’이라고 불리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어느 시대에나 통할 법할 이야기를 현재시제의 상황으로 변형시킨 뒤, 감독 본인이 가장 잘했던 시절의 연출을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암살의 실행자 ‘코브라’와의 결전이 아니다. (진짜로 멋지게 찍힌) 성민 최후의 결투는, 영화 내내 이태리제 소파에 앉아 암살자에게 지시를 내리던 부사장 태욱과 이루어진다. 이것은 마치 한 명씩 적들을 격파하며 올라가는 옛 무협영화의 공식이다. 게다가 성민이 위기에 빠지자 수많은 오토바이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등장해 벌이는 깡패와 퀵서비스맨의 패싸움 장면은 마치 위험에 처한 사형을 구출하기 위해 단체로 출동한 ‘퀵서비스 문파’의 형제들을 보는 듯하다. 그렇듯, 이 영화는 진지하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진지함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혁수 감독의 장기인 다찌마리 액션 장면을 떼어놓고 본다면 대사 하나하나, 상황 두 개 세 개가 황당하다. 이런 장면이 있다. 성민과 승희의 이야기가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정말 아무런 두서가 없이) 호스트바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처음 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한 여자 손님이 선수(호스트바 남성 접대부를 지칭하는 말)가 마음에 안 든다며 꼬장을 부린다. 그러자 마담이 오늘 처음 온 친구라며 장발의 청년을 소개하고 이 둘은 잠자리까지 가게 된다. 둘의 욕정이 무르익고 있는 상황에(여기까지 한 5분 걸린다) 갑자기 성민이 등장한다. 다짜고짜 신참 선수를 때리기 시작하는 성민. 장면이 바뀌어 한강둔치로 예측되는 곳에서 성민은 계속 구타하며 말한다. '달수야 임마! 사내놈이 할 짓이 없어서 고추장사를 해!? 내가 널 친동생같이 생각하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러자 달수는 말한다. '형 그럼 어떻게 해! 취직도 안 되고 돈은 필요하고... 훌쩍훌쩍' '그래도 어떻게 고추 장사를 하느냔 말이야! 나는 널 이제 안 볼 거야!' 아무 말 없는 달수. 돌아가는 성민. 그러자 달수는 성민의 뒷모습에 대고 말한다. '형... 내가 잘못했어. 이제 고추 장사 안 할게.' 그러자 성민은 환하게 웃으며 달수에게 다가가 말한다. '그래. 잘 생각했어. 정정당당하게 돈을 벌어야지. 앞으로는 형과 함께 퀵서비스를 하는 거야! 하하하' 그리고 달수는 퀵맨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소개에 할애된 시간이 무색하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한다. 이런 장면도 재미있지만, 여주인공 승희의 사정은 감탄이 나올 정도라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모델 오승희는 코리아유통의 인물들이 찾던 승희가 아니었다. 진짜 승희는 그녀의 이모부인 박 선생(레전드 박동룡 선생님께서 맡아주셨다.)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었던 것이다. 결국 문 변호사는 그녀를 찾아내고 한국으로 입국을 시키면서 태욱은 멘탈이 붕괴된다. 그렇다면 자신이 쫓고 있던 오승희는 누구란 말인가? 물론 이 배역은 전혜윤 배우의 1인 2역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던 관객은 이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영화 시작할 때 오승희를 찾기 위해 들고 있던 사진에는 얼굴에 점이 하나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모델 오승희에게는 점이 없다! 이 점을 영화 초반엔 극 중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관객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는지 태욱의 부하 중 하나가 “사진엔 점이 있는데 이 여자는 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태욱은 “요즘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점 하나 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대충 넘어가는 장면이 잠깐 나오긴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처리 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아유유...’ 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몸이 조금 오그라든다. 결국 진짜 승희가 등장하는 후반부에 가서는 지금이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내의 유혹>적 리얼리즘’이 이미 시도되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만다.(‘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 막장의 세계에서도 이 진리는 통한다.) 그러니까 전직 모델 오승희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에 엮여 온갖 고초를 다 겪게 되었던 것이다. 불쌍한 사람. 그래도 성민이라는 듬직한 사랑을 만났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인연이란 것은 꼭 그런 고생은 안 해도 만날 수 있는 것일 텐데 여하간 불쌍하다는 생각 외에는 그녀에겐 아무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닮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어... 이런저런 산만한 부분들이 있지만, 액션에 관해서는 절대로 웃기거나 하지 않다. 오히려 격투 씬 때문에 앞서 말한 황당함들 조차 잊을 수 있을 정도라면 조금 오바스러운 이야기일까? 특히 공장에서 펼쳐지는 내분으로 인한 코브라와 깡패들의 일대 다수 싸움, 마지막 개천에서 부사장 태욱과 성민의 결전은 왕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시원한 다찌마리였다. 이혁수 감독님은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시고 본인의 내공을 풀어낸 연출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 ‘액션 영화’라는 말은 있지만 ‘권법’이나 ‘권격’ 이라는 말은 거의 사장된 듯 싶다. 정말, 정말 마지막 권격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 퀵맨 >은 그 만듦새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노감독의 작별인사로는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정의를 위해 세상을 등지는 쾌남의 시대는 없다. 세계는 그런 사람을 (예전에도 그렇긴 했지만 지금은 더더욱) 완전한 멍청이로 보이게 재구성되었다. 영화 속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의의 주먹은 현실에서 더욱 더 멀어져 만화 속에서 스크린으로 이주한 캐릭터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것이 된 것 같다. 나는 이혁수 감독의 <퀵맨>을 보면서 다시 이런 영화가 나올 수 있고 관객들이 좋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의는 단순하고, 영웅은 원래 바보다. PS : 영화의 주연인 윤세웅 (KMDb에는 ‘윤호’로 기재)씨는 배우 ‘ 윤양하 ’ 씨의 아들이라고 한다. 영화는 많지 않은 수의 출연을 했지만 현재까지 성우로 맹활약 중이다. 전혜윤 윤호 송금식 감독: 이혁수 각본: 윤석훈 , 안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