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숙자(有宿者)
- 감독
- 엄태화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엄태구, 민영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한국 영화평론가가 '한국'영화를 대하는 법) 이 원고를 청탁받은 날, 나는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열리는 대담에 참여했다. “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 기획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1990s 시네필 대담 part 2”라는 제목의 대담이었다. 하길종 의 < 화분 >(1972)의 상영 뒤, 1990년대 사설 시네마테크를 운영했던 시네필과 1990년대생 영화평론가 사이의 대화를 만들고자 했다. 준비해 간 질문 중 하나를 옮겨보자. “이번 기획전 상영작을 보고 있자면 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지금은 영화사의 ‘정전’으로 다뤄지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르코스프키, 고다르, 파스빈더, 앙겔로풀로스 뿐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나 그리너웨이, 오시마 나기사처럼 당시엔 일정 부분 ‘컬트’로서 소화되던 감독과 영화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영화역사의 만신전에 오른 이름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대담과 붙여서 상영된 하길종의 <화분>은 하나의 예외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략) 이번 기획전에 <화분>이 포함된 것은 90년대 시네필들이 단순히 영화 교과서에 수록된 정전들을 직접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영화를 (재)발굴 혹은 (재)발견하려 시도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획전의 라인업을 보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를 옮긴 질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파스빈더 등의 이름과 함께 하길종을 배열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상영작이 꼭 <화분>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저 자리에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을 놓았더라도, 이만희 의 < 휴일 >(1968)이나 김기영 의 < 하녀 >(1960)을 놓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어로 글을 쓰며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영화를 상대하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로서, 한국영화는 어딘가 이상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한국영화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따라붙든 간에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납득하는 것은 아마 이뤄지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영화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한국인이 만든 영화? 한국 자본이 투입된 영화?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에서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에게 해성( 유태오 )을 설명하며 “Korean”이라는 단어를 아홉 번 사용한다. 그의 대사 속 한국인은 “평범한 직업과 평범한 삶을 사는 어른이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한국계(Korea) 친구와는 다른 한국인(Korean) 친구인 한국인-한국인(Korean-Korean)이다. 이 대사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반발감 혹은 어색함이 한국영화를 대하는 나, 동료 평론가들, 그리고 온라인상의 무수한 글로써 존재하는 시네필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갖는 어떤 공통감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즈> 중 대담으로부터 일주일 뒤 한국영상자료원의 ‘ 한국영화 100선 ’ 발표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 171명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 69명이 참여한 이 리스트를 통해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순위가 공개된 10편의 영화 중 절반이 21세기 영화이며, 봉준호 , 박찬욱 , 이창동 이라는 세 명의 이름뿐인 이 리스트를 두고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리스트에 오른 100편의 영화를 전부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10편의 영화 를 적어서 보냈지만, 그 영화들이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은 한국의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며, 한국영화라는 전체는 그 파편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케이팝을 필두로 무분별하게 난발되고 있는 접두사 “K-”가 결국 그 모든 파편의 집합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평론가의 일상과 비평에 관한 생각을 터놓는 지면에서 갑자기 왜 한국영화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의 시네필들이 한국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단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극장에 걸리는 한국영화들을 해외 영화들만큼 열심히 챙겨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재현되는지, 그것은 항상 이야기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의 “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중에서도 한국영화 ” 발표 녹취록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 위에 2024년 버전의 ‘한국영화 100선’을 겹쳐 놓는다면, 한국영화는 마치 과거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뒤 봉준호와 박찬욱에 의해 부활한 것만 같다. 그리고 무수한 ‘비천한’ 영화들이 누락되어 사라진다. 나는 이 ‘비천한’ 영화들, 함연선의 발표에서 등장한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곽재용, 2004)와 < 달마야 놀자 >(박철관, 2001)를 포함한 일련의 조폭 코미디를 포함해, < 마파도 >(추창민, 2005), < 중천 >(조동오, 2006), < 고사: 피의 중간고사 >(창, 2008)처럼 지금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을 영화들이 나의 ‘비천한’ 한국영화의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이 영화들이 얼마나 비천하고 구리며 지루하건 간에, 이 영화들은 한국을 담아내는 것으로서 보였다. 한국영화라는 하나의 장르 속에서, 한국은 영화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불쾌함을 자아내는 것일지라도. 지금의 한국영화들은 그것의 반대로 향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개봉한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 밀수 >(류승완, 2023)는 극 중 등장하는 지도상 군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한다. 소재만 바뀐 같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 모가디슈 >(류승완, 2021), < 교섭 >(임순례, 2020), < 비공식작전 >(김성훈, 2022)은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을 찾아내려는 기묘한 시도를 선보인다. 이들 영화에서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이라는 각기 다른 중동 국가는 한국에서 폐기된 것처럼 느껴지는 ‘야만성’을 간직한 곳으로서, 한국과 대비되는 야만의 땅으로서 묘사될 뿐이다. 아예 지구 바깥으로 향하는 < 더 문 >(김용화, 2023)이나 국가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래를 그리는 < 정이 >(연상호, 2022)와 같은 영화들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영화가 묶여있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가까워보인다. <중천>, <모가디슈> 중 <경마장 가는 길>, <괴물> 중 ‘한국영화 100선’의 리스트를 작성하며, 나는 두 편의 영화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한국영화가 한국을 찍는 방법,” "충무로가 한국을 영화적 장소로 대했던 마지막 순간." 전자는 장선우 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이고, 후자는 봉준호의 < 괴물 >(2006)이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며 우리는 90년대 서울의 풍경을, 붉은 십자가로 가득한 야경과 무너지기 이전의 삼풍백화점과 사람으로 가득해 “산책이 노동이 된” 길거리를 목격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여의도 한강공원의 풍경을, 합동분향소와 한강의 매점을, 일상의 풍경이 순식간에 장르적 장소로 변화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장소가 해외 로케이션으로, 그린스크린으로 옮겨감에 따라 사라진 풍경들, 길을 걷고 뛰는 사람들. 물론 지금의 영화들에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여름날 >(오정석, 2019)의 거제도, <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2021)의 서울, < 아워 바디 >(한가람, 2018)의 한강공원, < 썬더버드 >(이재원, 2021)의 정선과 같은, 여전히 사람들이 걷고 대화하며 싸우고 도망치고 뒤따를 수 있는 영화적 풍경으로서의 한국은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충무로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반복해서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기에 한국영화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셔널 시네마의 기획을 재차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을 담아내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예시일지도 모르지만, 엄태화 의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이것은 마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과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에서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 이전의 서울을 아주 짧게만 보여준다. KBS의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제작진이 참여한,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짧게 보여주는 푸티지 영상은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마치 밭이 갈리듯 땅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도큐먼트’로서의 아파트 이미지와 CGI로 그려진 아파트 숲의 연결은, 비록 그것이 완전한 폐허를 그려낼 뿐인 그린스크린 촬영의 결과물일지라도 연속성을 지닌다. 아주 짧게만 등장하는, 민성( 박서준 )이 대지진을 목격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곳은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약수역 사이의 도로로, 실제 도로의 건물들을 스캐닝하여 제작되었으며, 저 멀리서 장충체육관의 건물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려내는 세상은 모두 세트와 그린스크린 촬영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로케이션 촬영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이 그러한 것처럼 1990년대 초 종로의 길거리와 서초동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괴물>이 그러한 것처럼 2000년대 중반의 한강공원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실제의 지리적 공간을 끌어와 장르적 장소로 재가공한다. 물이 말라버린 한강 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호대교, 금호동의 황궁아파트에서 한강을 건너 마주한 압구정의 백화점, 아파트에서 도망친 민성과 명화( 박보영 )의 뒤로 보이는 구 서울역과 그들이 도착한 명동성당. 물론 이 이미지들은 (서울역 정도를 제외하면) 명시적인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서울의 지리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공간들이 드러날 뿐이다. 당장 비슷한 (그리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처음엔 알려졌었던) < 황야 >(허명행, 2023)를 떠올려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작동하는 지리학이 보다 구체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지난 몇 년 간 재개발 이슈가 존재해온 금호동의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황궁아파트의 생김새 자체가 익숙한 이미지로서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 60년 동안 아파트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장소였다. *주1 아파트는 성공의 트로피이자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중산층 거주 형태의 기본형이자 일상의 장소였고, 종종 비밀스럽고 두려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르적 장소였다. 영화 속 아파트의 모습, 아파트가 그려지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그려내는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아파트-아포칼립스라 부를 수 있을법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래된 아파트와 신축 아파트가 바로 옆에 붙어 공존하는 서울의 특수성을, 실제의 지리학 위에 펼쳐냄으로써 ‘한국’이라는 맥락을 획득한다. 나는 이 영화가 대단한 걸작이거나 수작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를 너무 단순하게만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다만 < 해운대 >(윤제균, 2009)나 < 곤지암 >(정범식, 2018)에서 실제의 지역을 분리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또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상의 지명을 내세우고선 실제의 지도 위를 가리킨다거나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영화들과 달리, 어쨌거나 한국을 영화적 토양으로 삼아보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춘 아파트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한국영화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는데도 ‘한국의 영화평론가’라는 이름표로 활동하고 있는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재차 질문하는 글이다. “K-”라는 접두사가 붙은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비천한 영화들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국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주1. 『아카이브 프리즘』 vol. 13, 한 국영상자료원, 60~82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
뒤늦게 < 잉투기 >를 보았다. 우리 극장,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한 적이 있는 이 영화를, 호평을 익히 들었음에도 개봉 당시엔 보지 못했다. 최근 < 택시 운전사 >에 짧게 등장하는 배우 엄태구 의 존재가 참 강렬해서,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이 배우가 어디서 나왔더라, 기억을 더듬다 검색을 해보니 < 밀정 >에도 나왔고 <잉투기>에도 나왔다. 그렇게 확인해 보고서야 <잉투기>의 감독이 엄태구의 형이자 < 가려진 시간 >을 연출한 엄태화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 잉투기 >를 고른 데엔 배우만이 아니라, 최근 SNS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뜨거웠던 몇몇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 BJ가 자신의 방송에서 여성 BJ 한 명을 겨냥해 살인 예고를 한 뒤 그중 한 명은 실제로 그 피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중계했다. 범칙금 5만 원으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참담했던 건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이 사건 자체가 드러내는 순도 높은 여성 혐오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역사적으로도 유구했고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지목된 여성 BJ는 게임 내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여성 게임 유저들에 대한 광범위한 비하와 멸시를 ‘미러링’해서 유명해진 이였다. 두 번째, 누군가를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예고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려는 듯한 시도가 일종의 ‘놀이’ 형태로 수행된다는 점이었다. 놀이는 고의를 감추는 포장일 수도 있고 소위 ‘뻥카’ 내지 연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뻥카에 연기라고 해서 심각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형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미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그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데에 익숙하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한국에 안착해 높은 인기를 누린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다. SNS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명인들이 아닌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방송 형태로 송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취미처럼 시작해 아예 직업으로 삼기도 하고,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한다. 그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은 나름 ‘유명인사’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놀이’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적정한 놀이의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예고를 받고 찾아가는 이들과 그를 ‘응원’한 이들에게는 장난이자 놀이일지 몰라도, 살인 예고의 대상이 된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로 오인됐던 다른 여성들에게도 이 과정이 ‘그냥 좀 무서운 놀이’에 불과했을까.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뿐 아니라 이 사건을 접한 무수한 불특정 여성들에게는? 당하는 사람은 폭력인데 하는 사람은 연기이고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장난이며, 나아가 당하는 이들에게도 놀이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이런 사건들의 폭력성. 이 유희성을 핑계로 현실 세계의 법은 가해자에게 고작 범칙금 5만 원을 부과할 뿐이고, 가해자와 방조자들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아예 느끼지 못하거나 스스로 지운다. 그러면서도 피해자 당사자와 이를 지켜본 다수의 불특정한 이들에게는 매우 효과적으로 공포와 위협을 전달한다. 게다가 끔찍한 사건은 그만큼 악랄한 악의와 고의를 가진 악당의 손만이 아니라, 장난과 놀이의 과정 한순간에 사고처럼 벌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한강에서의 투신을 놀이처럼 기획하고 예고해 당일 이를 중계하기도 했던 이가 정말로 시신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 잉투기 >는 이미 4년 전,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꽤나 생생하게 다루었다. 주인공인 칡콩팥( 엄태구 )은 중고 노트북을 팔러 간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이는 ‘현피(온라인에서 싸우던 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 진 것으로 인터넷 생중계된다. 현실 세계의 어법으로 하자면 그는 불시에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그는 허풍을 떨다가 현피에서 지고 이를 통해 허풍이 까발려진 ‘찌질이’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도리어 수치심을 느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심지어 피해자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을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피에서 져서 쪽팔린 패배자’로 규정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때린 이를 찾는 데에 골몰한다. 이 과정에서 그를 알아보고 접근해 ‘복수’를 부추기는 영자( 류혜영 )는 고등학생이자, ‘먹방’을 진행하는 BJ이기도 하다. 칡콩팥은 자신을 때린 이를 만나면 쑤셔버리겠다며 식칼을 챙겨 한 달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닌다. 게다가 친구에게 이 장면을 찍어서 방송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무기를 준비해 사람을 찌르고자 하는 고의가, 그에게는 ‘살인 행위’가 아니라 방송으로 증명해야 하는 ‘현피 2라운드’이다. 영자는 어느 순간 칡콩팥에게 외친다. “너한테나 심각하지, 남들은 네가 벌벌 떨면서 복수하겠다고 설치는 거 다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렇다.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는 것도,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칡콩팥이나 영자나 그들이 상정한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콘텐츠’이다. 아마 개봉 당시였다면 나는 이런 장면들을 그저 인물들의 허풍이라고, 혹은 위악적인 영화적 설정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기고 말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접한 뒤에 본 이런 장면들을 재미로 넘길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끔찍했다. 아무리 폭력이 난무해도 픽션이 재미있고 이를 죄책감 없이 향유하는 건 우선 전제가 가상과 현실의 분명한 경계선 때문 아닌가? 또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거나 이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재미 아닌가? 그런데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행위들에 대한 다중의 합의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모호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길을 잃는 듯한 느낌이다. < 잉투기 >는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는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익숙하게 둘러싸고 있는 놀이 문화를 섣불리 훈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옹호하지만도 않는다. 대신 이들의 행보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따라붙는다. 칡콩팥과 영자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놀이 문화 속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하거나, 그럼에도 그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지우며 가상의 캐릭터를 현실로 끌어와 버리거나 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이 인물들에 품고 있는 애정이 분명 느껴지는데, 이 애정은 참으로 이상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영화의 이러한 균형 감각과 냉정한 애정이야말로 <잉투기>를 처절한 성장 영화로 만들어내는 힘인 듯하다. 한심하다면 한심하달 수 있고 감정 이입도 잘 안 되는 이 인물들이 더없이 짠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것도. 그들의 행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러한 증명은 비로소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실패한 순간’에 이뤄진다. 자신의 찌질한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청춘 영화들에서도 바로 이것이 주인공들이 성장의 관문을 통과하는 힘이었다. 다만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이 순간이 완성되는 것이, 이 영화가 포착한 이 시대의 특징일 것이다.
엄태화 , 엄태구 형제의 < 잉투기 >를 보는 내내, 엉뚱하게도 미국영화 < 브릭 >이 떠올랐다. 이제는 스타 배우이자 감독이 된 조셉 고든 레빗이 고등학교 내 살인과 마약과 범죄를 해결하는 ‘고딩’을 연기했던 <브릭>은 그해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며 로저 에버트에게 “고전 미스터리 탐정물의 자세를 현대적인 캘리포니아의 한 고등학교로 완벽하게 바꾸어놓았다”는 인상적인 평을 받은 바 있다. 뜬금없이, 2008년 개봉한 청춘 필름누아르 영화의 기억을 길어 올린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 브릭 >은 저예산에 20일이란 짧은 촬영 기간 동안 젊은 배우들을 데리고 신인 감독(이후 조셉 고든 레빗과 < 루퍼 >를 함께 만든 라이언 존슨)의 아이디어와 연출력, 그리고 7년을 준비했다는 시나리오로 승부해 ‘작품’을 만들어낸 케이스다. 개인적으로 <브릭>이 뇌리에 각인된 이후 종종 리얼리즘과 작가주의에 과하게 경도되는 우리 독립영화들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 이같이 (단순비교는 힘들지만) 저예산임에도 장르성을 경유하는 동시에 단단한 이야기와 캐릭터, 개성을 갖춘 튀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바람과 근심을 지녀왔었다. 그러기를 수년째, 드디어 < 잉투기 >가 왔다. ‘잉여’ 담론이 흥했던 2013년을 관통한 <잉투기>에서 < 브릭 >의 그 활력과 생동감을 맛본 것은 실로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영자로 대변되는 파닥파닥 살아 숨 쉬는 캐릭터, 피해자인 칡콩팥 ‘태식’이 미스터리한 가해자 ‘젖존슨’의 실체를 파악해 나가는 내러티브 구조, 10대부터 30대까지라면 꽤나 널리 공감할 ‘갤러리’, ‘현피’, ‘먹방’ 등 인터넷 ‘루저’ 문화에 관한 생생한 묘사, 그리고 태식과 희준으로 대변되는 하릴없이 부유하지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청춘’들에 대한 복잡미묘한 시선까지. 특히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지질할 수밖에 없는 ‘잉여’들을 극의 중심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로 (20대들의 박탈감이나 ‘일베’의 일면을 연상시키는)동시대성을 획득하는 한편 위로와 관조, 냉소를 넘나드는 거리 두기에도 성공한다는 점에서, 엄태화 감독의 연출력은 장편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 브릭 >이 필름누아르 안에 청춘과 성장 기운을 녹여내는 기성품으로서의 활력이 도드라진다면, < 잉투기 >는 성장영화의 내러티브를 지속적으로 비틀면서도 탈주까지는 시도하지 않는 묘한 활력을 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 전형적이고 획일적인 장르성은 거부하지만 동시대 영화관객들과의 친밀도는 계속 높여나갈 수 있을 만큼의 영화적인 전형성과 보편성은 획득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자의 반 타의 반 방임과 자학과 인정욕구를 넘나드는 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는 공력이 실로 놀라웠다. 엄태화 감독은 레퍼런스로 < 400번의 구타 >와 < 허공에의 질주 >, <바보들의 행진> 등을 꼽았다고 한다. < 잉투기 >의 요소요소를 되새기게 하는 리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잉투기>에는 분명 저 작품들 모두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젊은이의 고민들이 201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의 얼굴에 가로 새겨져 있다. 데뷔작에서 확인시켜 준 동시대성과 활력이라면, 엄태화 감독은 청춘의 이야기를 넘어 어떤 장르든 제식대로 요리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부디, 묵직한 듯 싱싱하고 반골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차기작으로 이내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