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말
- 감독
- 우경희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김나연, 김가은, 박수연
“그녀는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하여 한국의 어머니란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그러나 그녀가 표현하는 어머니는 시츄에이션에 따라 모두 다르다. 말하자면 누구보다 제대로 변신을 할 줄 아는 배우인 것이다.” -연출가 이해랑, 1967년“ 1) 2014년 연기자 황정순이 타계했을 때, 세상은 ‘한국영화의 영원한 어머니’가 떠난 것을 추모했다. 그녀는 1940년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연극, 라디오드라마, 영화, TV드라마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활동을 펼쳤다. 10대에 연기를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80세까지(2005년)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친 연기 인생을 단지 ‘어머니’ 전문 배우라는 한가지 인상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황정순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감성을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선사했다. 황정순은 1925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손윗 남매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만 남게 되었다. 홀로 된 어머니가 막내 외동딸은 오래 살길 바라며 위해준 덕분에 귀하게 자랐다. 학창시절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서 영화를 처음 본 것이 <타잔>이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스릴과 장관 그리고 특히 여자주인공 ‘제인’의 활동적인 모습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로부터 거주하던 인천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으로 영화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다. 영화 바람이 난 것이다.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빠 등에 업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미국 배우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를 흠모하기도 하고, 배우 문예봉이 연기하는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연기자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이듬해, 16세가 된 그녀는 연기자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해 동양극장 배우모집에 응시한다. <장화홍련전> 낭독 시험을 통과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연기자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무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엑스트라를 맡고, 마침내 대사 있는 단역으로는 처음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마디 있는 대사의 문장을 앞뒤로 바꿔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관객들로부터 얼뜨기라는 야유를 받으며 호된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눈물 바가지를 쏟으며 속상했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극단을 따라 전국 순회 및 중국 만주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동양극장에서 9년을 활동하는 동안 홍해성, 박진, 김영수, 나웅 등의 연출가들로부터 연기 지도를 받았다. 맡은 역할의 과거사와 현재, 미래까지 꿰뚫으며 충실하게 성격 분석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인물을 부각시켜 연기해야하는 대목과 극의 맥락이 되는 지점을 찾아 강조해야하는 점을 익혔다. 그리고 상업극단의 숨가쁜 일정에 맞춰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극을 완성하는 훈련을 했다. 2) 이러한 경험은 황정순이 연기 실력을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연극 <대지의 어머니>에서 비중 있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고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극중 대감의 하녀로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나이 19세에 해낸 어머니 역할이었다. 3) 황정순의 영화 데뷔작은 단역으로 출연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君と僕)>(허영, 1941)이다. 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한 그녀는 인물 사진 찍듯이 자꾸 카메라를 봐서 NG를 냈고, 결국엔 영화에 뒷통수만 출연하게 되었다. 그 뒤 몇 년간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고 한다.“ 4) 극단 지방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고,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성우로도 활동하면서 1947년 라디오드라마 <청춘행로>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한 <청춘행로(촌색시, 一名 며누리의 설음)>(장황연, 1949)에서 황정순은 첫 주연을 맡는다. 또한 같은 해에 영화 <파시>(최인규, 1949)와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출연하였다. (그림1) <청춘행로>(장황연, 1949)에서 주인공을 맡은 황정순 (그림2) <여성일기>(홍성기, 1949) 출연 당시 황정순(앞줄 오른쪽)과 배우 주증녀(앞줄 왼쪽) 1950년,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된 신협에서 활동하면서 국립극단 정기공연 첫 작품 <원술랑>과 2회 작품 <뇌우>에 출연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공연한 이 작품들은 각각 5만명, 7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고, 덕분에 황정순은 연극배우로서 성장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9.28 수복 이전까지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있다가 납북될 뻔한 위기를 겪고, 1951년 1.4 후퇴 당시 신협 단원들과 함께 국군을 따라 대구로 피난 갔다. 피난 시절, 신협은 군예대 소속으로 전선 위문 공연을 다녔고 여주인공은 황정순이 도맡았다. 낙하산 천으로 의상을 만들어 입고, 군용 트럭 여러대를 동원하여 트럭 헤드라이트를 켜서 무대를 밝혀 연극을 했다. ‘탱크부대’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공연에 열의를 쏟아부었고, 황정순의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환도 후에도 공연을 이어가며 연극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주목 받았으나 전후 50년대 중반부터는 연극이 침체되고 영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인이 카메라 앞에 서면 무대 예술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영화 연기로 활동 범위를 넓혀야했다. 그녀 역시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했고, 같은 해에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3)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4)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5)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왼쪽), 김동원(오른쪽) 황정순은 무대에서 쌓은 기량을 발휘하여 영화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사랑>(이강천, 1957)에서 불치병에 걸린 현모양처를 연기하여 1957년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인생차압>(유현목, 1958)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제2회(1959)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수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의 피고인 역으로 1959년 제1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연달아 수상하며‘무대의 프리마돈나’에서‘은막의 스타’로 자리잡는다. 또한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愛情無限)>(전택이・도광계(屠光啓_홍콩측) 공동감독, 1958)에 출연하여 홍콩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림6)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순이(황정순)가 겨울밤 혼자 출산하는 장면 (그림7)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피고인 순이(황정순)가 변호인에게 진술하는 장면 (그림8)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전택이·도광계, 1958)의 한 장면,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녀가 애착을 갖는 출연작 <청춘극장>(홍성기, 1959)은 김래성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사랑을 그렸다.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여 관객 14만명을 동원 5) 하며 1959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제작사 선민영화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황정순, 김동원, 최무룡, 김지미, 장동휘 등의 연기자와 홍성기 감독이 ‘선민군단’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림9) <청춘극장>(홍성기, 1959) 포스터, 왼쪽에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림10) <청춘극장>(홍성기,1959) 출연진 및 제작진들과 함께, 왼쪽 4번째가 황정순 6) 이듬해 주연을 맡은 <귀거래>(이용민, 1960)에서는 월남한 전쟁 미망인을 연기했고,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에서는 1.4후퇴 때 헤어진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맡아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다. 한편 같은 해 출연한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는 배우 김승호와 부부 연기를 선보였고, 강대진 감독의 다음 작품 <마부>(1961)에서도 김승호와 커플 연기를, 또한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도 김승호와 부부로 출연하여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후로도 황정순은 김승호와 여러 차례 상대역으로 열연하면서 황정순·김승호 명콤비의 연기가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겹치기 출연으로 동시에 여러 작품을 소화해야했던 김승호와 황정순은 함께 역할에 대한 설정과 연결을 자세히 점검하고 연기 짜임새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림11)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오른쪽부터 배우 김혜정, 김진규 (사진 12)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 (사진 13) <마부>(강대진, 1961)에서 마부 춘삼(김승호)과 수원댁(황정순)의 극장 데이트 장면 삼십대 중반이었던 황정순은 <굴비>(김수용, 1963)에서도 김승호와 노부부를 연기했고, 그녀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표현력을 눈여겨 본 김수용 감독은 다음 작품 <혈맥>(1963)에도 황정순을 캐스팅하여 김승호와 연기 대결을 펼치게 했다. 김 감독은 두 배우가 극 중 싸우는 장면을 연기하던 현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육탄전을 벌인다. 땅 위를 구르면서 엎치락 뒤치락을 여러 차례, 배우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가 아니라 실기다. 카메라가 멎으면 서로 다시 한번 더 찍자고 한다.” 7) 황정순은 이 작품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강한 생존력을 보이는 월남민을 열연하여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7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림 14) <굴비>(김수용, 1963)에서 노부부를 연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그 뒤로 왼쪽부터 배우 김석훈, 조미령 (그림15) <혈맥>(김수용, 1963)에서 털보(김승호)와 다투는 복순 어머니(황정순) (그림1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황정순이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 황정순 영화 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다수의 출연작에 후시 녹음을 직접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겹치기 출연으로 바쁜 배우들 대신 성우들이 목소리를 녹음 했다. 그러나 황정순은 촬영장에서 한 연기에 본인의 음성을 입혀야만 자신이 추구했던 연기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으로 여기고 직접 녹음까지 마쳤다. 왜냐하면 가지각색의 생활 감정을 나타낼 때, 그녀만의 연기 호흡과 대사 톤은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용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가 고심한 극 중 대사나 감독의 연기 표현이 가끔 그녀 앞에서 말끔히 정리되는 것을 보는 때가 있다. 관념에 흐르기 쉬운 한국영화의 대사가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사실적인 일상 용어로 바뀐다.” 8) 는 것이다. 이처럼 맡은 배역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체적으로 소화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한층 호소력 짙은 연기로 다가왔다. (그림17)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에서 자식들을 보살펴달라고 고목에 기도하는 어머니(황정순) 또한 그녀는 언제나 배가 불룩이 나온 의상 가방을 들고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직접 의상 설정을 만들어서 입고 스스로 분장을 했다. <갯마을>(김수용, 1965)을 각색했던 극작가 신봉승은 촬영장에서 바닷가 촌부를 연기하는 황정순이 입은 빛바랜 베 치마에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낡은 치마를 어디서 구입했는지 묻자 그녀는 지난 밤, 집 마당에 새 치마를 펼쳐놓고 돌로 톡톡 찍어서 구멍을 낸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쓰듯 연기자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마땅히 뭔가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9) 평소 그녀는 맡은 배역에 대한 탐구가 풀리지 않으면 마치 숙제를 못 끝낸 기분이 들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집념과 헌신 덕분에 황정순이 펼치는 아내, 편모, 계모, 과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등의 ‘어머니’ 연기의 입체성과 고유성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자하고 정감있는 어머니인 한편 고난과 운명에 맞서 감정을 패배적으로 과잉하지 않고, 체념과 포용을 모두 담아낸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할 극 중 인물을 생생하게 체화했다. (사진 18)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아들을 바다에 잃은 어머니(황정순)는 혼자 된 며느리가 인습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길 바란다. 황정순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제9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인들은 황정순씨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연령으로 쳐도 어머니뻘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만 결코 그러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녀가 스크린 위에 새겨 놓은 어머니의 상은 거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배우가 악역마저 무난히 소화할 수 있으니, 그녀를 연기파의 일인자로 손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10) 고 평한 김수용 감독은 그녀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①인자한 어머니 ②쾌활하고 코믹한 중년부인 ③악의에 찬 변덕스러운 여인 ④육감적인 요부 등과 같이, 연기자 황정순에게는 “한계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연기 폭이 넓다는 점을 극찬했다. 11) 이렇듯 어머니 역할 외에도 그녀는 <유정>(김수용, 1966)의 사감, <월급봉투>(김수용, 1964)의 올드미스,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의 주모와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정력적인 아내 역할을 맡아 손색 없는 희극 연기를 선보였고, 스스로 “심각한 역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역을 좋아했다” 12) 고 밝혔다. (그림19)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 출연한 황정순과 박암 (그림20)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부부관계를 주도하는 아내를 코믹하게 연기한 황정순 (그림21)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백말띠 딸을 출산하길 바라는 말띠 신부들(가운데 황정순) 그런가하면, 배우 황정순을 떠올리면 주로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전통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흙>(권영순, 1960)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산부인과 의사 ‘닥터 현’으로 출연한다. 그녀는 주인공이 멘토로 따르며 의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올드 미스’를 자칭하며 비혼을 선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전문직 여성을 연기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공보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림 22) <흙>(권영순, 1960)에서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 닥터 현(황정순) 그리고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에서는 각각 양공주와 조폭 두목이라는 그늘진 정체를 숨기고, 자식을 위하느라 분투하는 모성의 복잡한 심성을 연기했다. 특히 주연을 맡은 <육체의 고백>은 연기자 황정순의 다면적인 매력을 접할 수 있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3)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 조직폭력배 두목을 연기한 황정순(하단 왼쪽) (그림 2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부산 텍사스 거리의‘프레지던트’라 불리는 마담(황정순) (그림 25)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매춘부들이 섬기는 “정의감 강하고 인정 많은 대통령 엄마”(오른쪽, 황정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세 딸들에게는 양장점 주인인 척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밀수까지 감행한다. (그림 26)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실명으로 출연한 황정순의 집에서 촬영한 장면, 방에 보이는 트로피도 실제로 황정순이 받은 상들이다. <팔도강산>(배석인, 1967)은 배우 김희갑과 황정순이 노부부로 출연하여 전국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황정순은 자녀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어머니를 연기하여, 근대화의 피로감 속에서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모성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크게 흥행하여 이후 <팔도강산(속)>(양종해, 1968),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돌아온 팔도강산>(정소영, 1976)까지 총 5편이 더 제작되었다. 황정순은 팔도강산 시리즈의 성공으로 국민 배우이자 ‘국민 어머니’로서 널리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었지만, 1970년대 KBS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까지 역할이 지속되면서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이후 어머니 역할로 배역이 고정되는 면도 있었다. 그녀는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 TV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로 가족 드라마에서 다정한 어머니나 할머니로 분하여 원숙한 연기를 펼치는 한편, 사극 <사모곡(思母曲)>(신봉승 작, 동양텔레비전)에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역을 맡아 실권을 갖춘 대비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 27) <장마>(유현목, 1979)에서 동란 중에 아들을 잃고 천둥 번개치는 하늘에 토로하는 어머니(황정순) (그림 28) <장남>(이두용, 1984), 고향집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서울의 장남 집에 온 어머니(황정순)가 딸과 통화하는 장면. 마치 다큐멘터리 속 인물을 보는 듯한 황정순의 생생한 자연스러움에 빠져들게 된다. 연출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보여준다. (그림 29) <장남>(이두용, 1984)에서 어머니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 1972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 황정순장학회를 설립하여 서울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984년에는 극단 신협 ‘황정순 연기생활 45주년 기념공연’ <안네의 일기>를 공연했다. 1988년에는 혜화동에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을 개관했고, 2005년에 뮤지컬 <팔도강산>에서 노부부의 어머니 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녀는 2007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을 수상하였는데, 주최하는 여성영화인모임은 “여성영화인의 큰 숙제 중 하나는 부침 많은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살아남는 것” 이라며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와 연극, TV를 넘나들며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준 그녀의 열정과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고 밝혔다. 13) 황정순은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찾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특별히 영역을 두어 벽을 쌓지 않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역을 소화하며 배우 인생을 사랑했다.“ 14) ‘카메라를 보는 배우’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여, 촬영 첫 날 반드시 현장에 모셔야 작품 운이 트인다는 ‘크랭크 인 배우’로 각광받았고, 60여년 동안 400편에 가까운 영화와 200여편의 연극, 수십편의 방송 드라마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이라고 여겼던 그녀의 혼신을 다 하는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떠올리면서, 이 뛰어난 예술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림 30)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 개관식(1988년)에서 황정순(왼쪽에서 두 번째) 15) “온 몸과 맘으로, 온 정성으로 연기에 취해 정신없이 지나온 젊은 시절, 그러나 시간은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가 되고 싶다.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 황정순 16) 1) 명사가 본 한국배우의 실루엣”, 《여원》, 1967년 3월, 225~226쪽. 2) 김남석,“배우로 보는 한국연극사|황정순 선생과 함께 1”,《(국립극장)미르》,2004년 3월호, 39쪽 참고. 3) 유민영,「무대와 영상에 표현된 한국의 전형적 모상/ 황정순」,『한국 인물연극사 1』,태학사, 2006, 687쪽 참고. 4) 나의 데뷰시절⑥ : 황정순”,《Screen》,1988년 12월1일, 251쪽. 5) 「작년도 방화의 수지결산서」,《국제영화》,국제영화사, 1960년 4월호, 81쪽. 6)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3쪽. 7) 김수용,「배우의 변신」,한유림 외,『위대한 여배우 황정순』,한국영화인복지재단, 2007, 138쪽. 8) 김수용,“한국배우론① : 황정순”,《신여성》 제1호, 1970년 4월, 272쪽. 9) 신봉승,「한국의 어머니 황정순 선생」,한유림 외, 위의 책, 132쪽. 10) 김수용, 앞의 글, 271쪽. 11) 김수용, 앞의 글, 270쪽. 12)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4쪽. 13) 강병진,“올 한해 영화계를 빛낸 여성들_2007 여성영화인축제서 공로상 수상한 배우 황정순 외”,《씨네21》, 2007.12.17. 14)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앞의 글, 82~84쪽 참고. 15) “〈그의 생활〉 만년 어머니 배우 황정순의 예술과 삶”,《오늘의 한국》통권72호, 1989년 1월, 77쪽. 16) 황정순,「다시 태어나도 여배우의 길을 가련다」, 한유림 외, 위의 책, 2007, 119쪽.
감정의 탐구라는 점에서 연기는 언제나 보다 더 알고 싶은 미지의 영역이다. 연기는 자기감정을 영민하게 쓸 줄 아는 배우가 상대 배우의 감정과 맞부딪히길 거듭하면서도 관객의 견고한 감정의 문까지 두드려야 하는 작업일 거라 짐작한다. 연기의 메커니즘과 감정의 메커니즘이 꽤 너른 교집합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가장 극적이고 압축적으로 감정을 쓰는 일인 만큼 배우의 이 작업은 상당한 감정노동이기도 하다.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안선경 감독의 < 나의 연기 워크샵 >은 이런 내 궁금증을 자극한 작품이었다. <나의 연기 워크샵>은 영화의 형식 자체가 영화 속 ‘연기 워크샵’의 커리큘럼과 부합한다. 영화는 총 4장으로 구성됐고 영화 속 워크샵을 따라 진행되며 각 장이 마무리되면 영화도 중간중간 일단락을 맺는 식이다. 영화 속 연기 워크샵에 참여한 이들은 또래인 헌(이관헌), 은(김강은), 준( 성호준 ), 경(서원경)과 이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미래(김소희)다. 이들은 한 달 동안 몸의 긴장을 푸는 연기의 기초 훈련에서부터 인물을 창조하고 장면을 만드는 연기 워크샵의 전 과정을 경험한다. <나의 연기 워크샵>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장벽이 지극히 낮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한 영화다. 영화의 출발부터가 그렇다. 2011년부터 영화연기 교실을 직접 운영해오고 있는 안선경 감독은 2014년 이 수업에 참석한 이관헌 배우를 보며 이번 영화의 모티프를 얻었다. 자기 속내를 도통 드러내지 않는 이 배우가 수업을 거듭하면서 아주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서 감독은 연기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영화적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감독의 전작인 < 파스카 >에 출연한 성호준을 제외하면 <나의 연기 워크샵> 속 워크샵에 참여한 이들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아마추어 배우들이다. 이들과 감독은 <나의 연기 워크샵> 이전부터 <나의 연기 워크샵> 속 워크샵을 이어왔고 그 연장선에서 ‘영화’ <나의 연기 워크샵>을 완성한 것이다. 성글게 짜인 연기 스타터들의 연기를 이어 붙여주고 영화의 중심을 잡아나가는 건 미래 역의 배우 김소희 다. 연출가 이윤택에 이어 연희단거리패를 이끄는 핵심 배우다. 미래가 전하는 연기에 대한 말들은 곧 배우 김소희의 연기론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한 예로 워크샵의 1장 ‘균형과 교감’에서 미래는 ‘교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교감이란 널 완전히 맡겨버리는 것이 아니야. 상대를 완전히 믿으면서도 네가 완전히 있어야 교감할 수 있어.” 2장 ‘긴장과 두려움’에서는 “연기의 시작은 자기에서부터일 수 있으나 결국 연기를 계속하게 하는 힘은 (그 사람의 연기를 보고 싶어 하는) 남들에게 있다”는 유의 말도 잊지 않는다. 미래의 이런 가이드는 연기의 세계를 먼저 체험한 선배로서 들려주는 그럴듯한 조언으로 머물지 않는다. 워크샵 참여자들이 연기뿐 아니라 각자가 처한 생활상의 난처함 앞에서 주춤할 때 슬쩍슬쩍 ‘이쪽으로’라고 손짓하듯 미래의 말들을 삽입해둔다. 미래가 헌에게 “연기는 궁극적으로 관객에게 살짝 감정을 들켜주는 일이야. 그런데 너는 들키지 않는 기술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헌의 연기뿐 아니라 헌이라는 사람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말이다. 영화의 3장에 이르면 헌, 은, 준, 경은 미래가 준 ‘현의 일기’를 받아들게 된다. 현이 마주한 최초의 폭력과 고통에 대한 글이다. 그 일기를 살폈을 헌, 은, 준, 경은 처음으로 다 함께 마주 앉아 밥을 해 먹고 둥글게 원을 그리고 또 한 번 앉아 각자의 과거 한때와 현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붙인다. 이후 이들은 그들이 이해한 현을 연기해 보인다. < 나의 연기 워크샵 >은 그런 면에서 ‘연기하기’의 체험적 학습을 옮겨둔 것이자 헌, 은, 준, 경 (혹은 이제 막 영화 연기를 시작하려는 영화 밖 네 배우들까지)의 감정 교육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난 7월 18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 김태용 감독 단편선’은 내게 그 의미가 매우 특별한 상영이었다. 영화 스태프로 일한 지난 10년의 결산 같은 느낌이었는데, 딱 반환점을 돈 것 같았다. (이대로 10년이나 더? 혹은 앞으로 10년밖에? 란 생각이 들어 시원섭섭한, 매우 복잡한 느낌이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의 음모로 과거를 잃은 사람이 하나씩 과거의 기억을 되찾는 것처럼 나는 지난 8년간 아무도 모르게 덮어둔 내 기억을, 뭐랄까 공증받은 느낌이었다. 그러한 결산의 맛은 작품의 완성도나 내용을 떠나 그 자체로 상당히 강하고 또 깊었다. 단순하게는 8년 만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작품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했고 감독님을 알게 된 이후 모든 단편 영화에 참여했다는 일종의 성취감 같은 것 때문이었으리라. 이를테면 그랜드 슬램 같은 것. 이미 며칠 전부터 그러리라 예상은 했지만 상영이 끝나고 꽤 오랜 시간 먹먹했다. 차은이를 떠올려서 그런 것인지 (난 항상 영화 속 차은이 엄마에게 “답답해”란 말을 할 때마다 울컥한다) 그날 처음으로 관객과 만난 < 그녀의 전설 >에 대한 복잡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관객과의 대화까지 마치고 나니 드디어 진짜, 한 막이 끝남을 느꼈다. 과연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에게 진심으로 즐거운 일인가? 가끔 이런 물음들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김태용 감독님과의 현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고 마무리하며 느끼는 감정들. 하나의 사이클을 돌면 그것이 어느덧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 있다. 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이 현장을 가장 오랫동안 기억할까. 비단 현장에서 욕지거리와 고함(때론 함성), 책임회피와 상처의 피드백이 없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만난 이 현장은 그 이전의 분위기와 무언가 달랐다. (물론 < 달리는 차은 >이 상업영화가 아닌 저예산 독립영화 형태로 제작되었고, 주제적으로도 인권영화란 특수성이 있음은 확실하다) 그건 굉장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인데, 감독님을 위시한 스태프를 함께 묶는 투명한 막 같은 게 있지 않았나 싶다. 유산균을 보호하기 위한 동글동글 캡슐 같은? 이 안에 들어가면 자외선도 차단되고 누군가 흉기를 찔러대도 튕겨 내버릴 것 같은 그런 막. 그것을 이루는 근간에 모두가 믿는 ‘영화’ 그 자체가 자리했던 것 같다. 우리가 만드는 한 프레임 한 프레임의 쇼트는 현실의 우리와 가상의 영화를 이어주는 작업이었다. 모든 스태프가 그것에 집중한다. 분리되지 않는 느낌. 현실과 이상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김태용 감독님과의 지난 작업들은 그러한 모습이었다. 정말 영화 같은 마법의 순간들이 따라왔다. 영화 제작의 즐거움, 허무함, 성취감, 나아가 인생의 덧없음, 희망, 우연과 필연의 관계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따라왔다.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러한 과정의 연속이구나, 다른 삶들과 삶들이 연결되는 그러한 느낌. 그리고 나에게 진심으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어두운 극장에서 바라보는 스크린 너머의 세상이 아닌 그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만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몇 년간의 단편 작업을 하며 아마도 셀 수 없이 많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회의를 했을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과거의 일들에 관한 것. 그전 작품을 만들 때 겪었던 에피소드들과 즐거움에 대한 것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끊임없이 삶은 이런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조감독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지난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어느 영화인, 어느 포지션이든 10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없이 많은 밥차를 만나고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고 무너질듯한 두 다리로 새벽을 지킨 시간들. 김태용 감독님과의 흥미로웠던 네 번의 영화 여행을 소개한다. 우리는 성장한다! < 달리는 차은 > “엄마, 나 답답해…” 아무도 없는 밤안개 낀 트랙을 한 소녀가 달린다. 점점 호흡이 차오른다. 눈물도 차오른다. 그건 억울함 같은 답답함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삶. 그것을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은 마냥 즐겁고 유쾌하지만은 않게 된다. 차은은 달리고 싶다. 나는 영화를 하고 싶다. 비수기는 늘 힘들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 2007년 여름. 연출부로 준비하던 장편 영화가 4개월 만에 중단되었다. 내가 받은 보수는 뻐카충(버스 카드 충전) 몇 번이 전부. 허망했다. 처음으로 ‘엎어진다’는 것을 맛보았는데 (이후로는 자주 그래서 무던해지긴 했지만) 정말 좌절감이 컸다. 사회의 한 개체로서 살아내야 하는 나의 또 다른 롤도 있는데 나의 욕심으로 너무 한쪽 코너로 몰리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지만 요즘 말로 ‘열정페이’였지 싶다. 2시간 동안 영화에 빠져 나를 잊듯, 영화 작업의 순간들은 그 이면의 현실적인 삶들을 감추어버린다. 반대로 영화 작업을 하고 있지 않으면 현실적인 문제들은 내가 팽개쳐 놓은 만큼 쌓여 무거운 채무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짐을 싸고 유난히도 더운 여름을 보냈다. 현실의 삶은 많이 더웠다. 아직 나는 (가족에게) 영화사로 출근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지만 사실은 하루 열다섯 시간을 두 가지 알바로 보내는 일종의 취업준비생, 일종의 영화 잉여였다. 그러다 엎친 데 덮친 격 야구를 하다 다쳐 수술하였고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렇게 청춘의 시간이 너무도 빨리, 아무렇지 않게 죽어가고 있을 무렵, 제안이 왔다. 장편 상업 영화 때 만난 현장 편집기사의 소개로 조감독을 만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연출부의 구성이 좀 특이했다. 조감독 두 명에 연출부 한 명 그리고 스크립터. 연출부 한 명은 나를 말하는 것이었고 다른 세 분은 모두 누님들이었다. 물론 직함과 성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은 인원으로 준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환경이 연출부의 모든 파트 업무를 해볼 수 있는 꽤 좋은 기회였다. 나는 ‘그 사람’을 몰랐다. 영화 제목을 들어 봤지만 보지는 못했다. 첫 만남의 기억은 특별한 게 없다. 당시에 < 가족의 탄생 >으로 여기저기서 상을 받느라 바빠 보였던 기억만 난다. 하루는 꽃을 엄청 많이 가져왔는데, ‘아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꽃을 받아봤지?’란 생각을 잠깐 했던 기억도 난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영화 제작의 가장 큰 부분은 ‘차은’을 찾는 것이었다. 다문화 가정 환경의 아이를 찾는 것과 실제 육상선수를 캐스팅하는 방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전라북도의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파악하고 직접 찾아다니며 캐스팅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결과적으로는 전국육상대회의 현장에서 감독님이 전수영 학생을 찾았다. 애타게 기다려 온 차은이를 육상대회 현장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정말 마법 같은 일이었다. 또한 이 영화 작업의 묘한 순간이 많았는데 차은의 동생 ‘동민’ 역을 맡은 나겸이의 캐스팅 또한 그러했다. 어떤 캐스팅 매니저의 소개로 온, 연기 경험이 전무했던 어린이였는데 간단히 줄거리를 얘기해주니 “우리 엄마도 필리핀에서 왔는데”라고 했던 것(극 중 엄마도 필리핀 사람이다). 이런 게 운명인가 싶었다. 그리고 TV 인간극장에 나오셨던 아르세니아 씨가 엄마 역을 하게 되었고 나머지 한자리! 차은, 동민의 아버지 역은 나겸이의 실제 아버지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비전문 배우 넷을 데리고 전북 부안으로 내려가게 된다. 차은은 준비할 게 많은 영화였다. 육상부도 등장해야 하고 큰 스타디움도 뛰어야 하고 여러 곳으로 로케이션 장소가 흩어져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한된 시간 안에 한 번도 연기 경험이 없는 배우들을 데리고 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다. 그런데 수영이는 우리의 걱정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술적인 것, 영화 연기라는 것에 무지했음에도 열두 살 아이는 있는 힘껏 자신의 감정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표현했다. 무리한 스케줄과 체력적 난이도가 상당했음에도 수영은 영화의 차은이가 되어가며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찍은 소스들을 가지고 편집실에 둘러앉았을 때 우리 모두는 정말 크게 웃었다. 어떻게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배우들의 서투름과 어색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많은 고민과 함께 현재의 버전이 나왔다. 감추기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의 살아있음을 살리는 방향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순간들이 생생하다. 영화의 촬영을 완성하는 편집의 위대한 힘을 느꼈다. 그해 인권영화 중 가장 긴 촬영 기간(12회차)과 후반 작업을 통해 영화는 결국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 달리는 차은 > 제작의 원동력은 서두에 말한 것과 같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알 수 없는 힘 같은 것이었다. 모두가 이 영화를 믿는 것처럼 보였다.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이 영화의 제작 순간순간을 사랑했다. 수영이가 차은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함께 했다. 3주간의 촬영이 끝났을 때, 어떤 전시 상황에도 출격이 가능한 하나의 소대가 지금 막 편성된 느낌을 받았다. 모항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 바다가 보이는 평상에서 우리는 한 아이의 다양한 눈빛을 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1cm씩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감독님과의 첫 번째 영화 여행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제작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알고 영화의 마법 같은 순간을 믿고 또 맛보는 그런 여행. 그리고 이 한 번의 여행은 나에게 영화 동지들이란 큰 선물 또한 선사했다. 덧붙임. 1. < 달리는 차은 >의 스태프를 결속시킨 건 숙소의 역할도 컸던 것 같다. 작은 산속에 숨겨진, 이상한 분위기의 숙소였는데, 아마 프랑소와 오종의 < 8명의 여인들 > 한국판을 만든다면 어울릴 법한 그런 장소였다. 하루는 숙소 스케줄 때문에 모든 스태프가 남녀로만 구분, 커다란 방에서 다 같이 잤는데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순간이다. 2. 늘 영화작업의 추억에는 어느 맛집이 포함되는데 변산 ‘털보네 짬뽕집’이 그렇다. 작년, 오랜만에 들린 그곳에는 짬뽕은 그대로 있었지만 말론 브란도를 닮은 털보 아저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잊고 지낸 시간 속에서 아저씨는 멀리 사라졌다. (몇 해 전 갑자기 돌아가시고 현재는 남은 가족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3. 차은 역의 수영이는 촬영 당시 육상을 시작한 지 2년 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다. 현재는 제주대학교 육상부 2학년으로 2014년 전국체전 육상 여자부 계주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동민 역의 나겸이는 인천의 한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4. < 달리는 차은 > 때의 스태프 중 촬영, 녹음, 연출, 제작 파트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김태용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제주에서 만난 < 그녀의 연기 > “갈까부다 갈까분디 내 님을 따라서~ 갈까부다” 구성진 판소리 소리가 흘러나오는 병실. 이제는 그저 가느다란 실처럼 미미하게 하나의 호흡만 남겨둔 아버지가 누워있다. 철수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영희를 데려온다. 판소리 노래를 선물하는 영희. 그녀의 연기는 무엇 때문이고 우리의 영화는 어떤 연기를 원했는가? 아름다움! 그것은 아름다움 아니었을까? 사람만이 가진 아름다움. 제주의 어느 후미진 주택가 골목. 거나하게 취한 무리들이 강강술래를 돈다. 조금 전에는 식당에서 판소리 한 자락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여 추운 겨울날 강강수월래를 한다. 2011년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되는 겨울밤. 아마 달도 거의 들어 차 있었던 것 같다. 홍콩영화제에서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이 단편은 그에 대한 대답. ‘Beautiful 2012’의 김태용 감독 편, 한국어 제목은 ‘그녀의 연기’. 영문 제목은 ‘You are more than beautiful’ 이었다. 합체하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넘어선 연기’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판소리가 관건이었다. 현재 뮤지컬 ‘아리랑’으로 유명한 국립 창극단 배우 이소연 씨가 속성으로 공효진 배우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공효진 배우의 뛰어난 감각과 노력으로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가 2주일 만에 완성되었다. 공블리라는 애칭처럼 공효진 배우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영희 역할을 연기했다. 그야말로 그녀의 연기! 그 연기가 철수와 아버지를 이어주고 관객과 그들을 이어주었다. 철수 캐릭터를 만드는 데는 실제 제주에 사는 나의 오랜 군대 친구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말을 돌보고 여자를 멀리하는 철수 같은 친구였는데 지금은 아이 낳고 잘살고 있다. 철수와 영희도 그 이후에 다시 만났을까?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을까? 그리고 어머님 제사상에 수박도 올렸을지 궁금하다. 프로젝트 초반, 아름다움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제주의 아름다움과 어떤 관계의, 사람의 아름다움을 담기로 이야기를 좁혔다. 감독님이 던진 가족이란 화두, 특히 서먹한 부자지간의 갈등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해소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버지와 아들. 언제나 어렵고 어색한 느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철수도 아버지께 직접 얘기하기 힘들었으리라. 어떠한 말이든. 영화 < 만추 >에서처럼 상황극의 활용이 주효했다. 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또 다른 연기. 실제와 환상의 모호한 경계. 그것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한 순간들을 표현한다. 그렇게 그녀의 연기를 통해 철수는 아버지와 소통하게 된다. 드디어 얘기하기 힘들었던 말들이 쏟아진다. 우리는 어쩌면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삶이란 영화 한 편 안에서 진심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 연기가 거짓이냐 진실이냐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때론 진실이 때론 거짓이 내가 꿈꾸는 아름다움을 위해 상황에 따라 골고루 쓰인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감독님의 조감독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입에 잘 붙지는 않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뭐랄까 감독이란 단어를 포함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대부분 나를 소개할 때 그냥 연출팀으로 불리길 원한다. 감독을 돕는다는 뜻 이상의 의미를 생각했던 것 같다. 조감독은 감독이 불의의 문제로 부재할 때 그 사람의 역할까지도 대신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중압감과 전체 조직 그림을 그리고 스케줄을 책임지고 소통의 제1 창구라는 중요한 임무의 매력을 비로소 체감했다. 제주는 정말 아름답지만 촬영을 하기에 정말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특히 겨울의 제주는 무섭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광은 놀라웠다. 바로 어제 확인한 장소가 날씨 탓으로 완전히 다른 곳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예상치 못한 고지대의 폭설과 기온 급강하는 촬영에 상당히 어려움을 주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용이했던 부분도 있다. 병원이나 목장, 해안도로, 국숫집 등의 로케이션은 그야말로 한산함 그 자체였다. 별다른 통제 없이 원활하게 진행됐다. 제주는 보조출연자들을 섭외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몇몇 업체가 있지만 보조출연 배우들은 대부분 연기경험이 없다. 하루종일 병실에 누워있는 촬영은 보조출연 어르신들에게는 ‘생지옥’ 같았으리라. 처음 한두 시간이야 누워서 진짜로 잠을 자면 그만이지만 원하지 않을 때 누워 있는 것은 좀도 쑤시고 참 곤욕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철수 역의 배우 박희순 이 아버지 역의 출연자에게 촬영 말미에 한 “오늘 촬영이 어땠냐”는 질문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는 답변이 잊히질 않는다. 덧붙임. 1. 이번 영화 여행에서 건진 또 하나의 수확은 배우 공효진을 통해 알게 된 ‘오는정김밥’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주에 가면 늘 먹는 음식 중 하나가 되었다. 2.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영화 작업이 아니면 절대 가보지 않았을 곳을 간다는 것이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돌며 많은 이야기와 계획을 세웠다. 그러한 영감들이 현재 작업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것들은 신기하게도 우연으로 시작해 필연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또다시 성장한다 < 피크닉 > 천하장사쏘세지를 넣고 케첩을쫙~ 도시락 김으로 돌돌 말아 착착 썰면 소풍 준비 끝! 동생을 버리러 절로 향하는 꼬마가 있다. 그래! 우리 집의 문제아 동생, 동민이를 버리면 엄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질 거야. 3D 안경과 스크린 사이의 마법 같은 공간 속에서 꼬마의 모험 세계가 펼쳐진다. 거짓말처럼 나로호가 발사되어 우주로 향하던 날, 꼬마 수민이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던가? 새로운 도전이었다. 잠시 며칠간 다녀오는 피크닉 이 아니라 원양어선과 같은 오랜 시간의 여행이었다. 큰 예산의 장편을 준비하다 만난 프로젝트였는데 결과적으로 1년 남짓한 시간을 이 단편 영화를 만드는 데 보냈다. 2013년 여름 KAFA에서 진행된 3D 교육에 참석했던 게 프로젝트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일주일간의 기본적인 3D 교육을 받고 작업에 착수했는데 사실 난 3D 영화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 SF, 액션 장르의 영화들이 많았고 시각 피로도가 많이 쌓였던 경험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육 중 보았던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통해 3D의 매력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스크린의 x와 y축(가로와 세로) 거기에 덧붙여 z축(깊이)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3D라는 형식과 드라마라는 장르의 결합, 미학적인 접근, 두 대의 카메라 운용,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스테레오 그라퍼(입체팀), 거기에 몇 가지 큰 CG 작업까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교육을 담당했던 KAFA 팀이 카메라 운용과 입체를 담당해주었고 CG를 담당한 덱스터 워크숍 팀이 전반적으로 이를 함께 했다. 약 세 달간의 프리와 8회차 촬영 그리고 약 5개월의 후반 작업을 통해 2014년 5월,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에서 < 신촌 좀비 만화 >(유령-너를봤어- 피크닉 )의 타이틀로 첫선을 보이게 된다. 장편 상업 영화와 비슷한 기간과 인력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예의 단편 작업과는 그 스케일 자체가 좀 달랐던 것 같다. 조감독으로 준비해야 하는 항목들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넘나들며 백업을 할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어서 연출부 각자가 맡은 분야를 스스로 준비하고 책임져야 하는 업무의 정확한 분업화가 필요했다. 촬영 때 CG 컷을 진행하며 프리비주얼 - 테크비주얼 작업의 중요성과 현장에서의 CG팀과의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도 깨달았다. 프리부터 포스트까지 하나의 파이프 라인으로 구성된 CG 담당 연출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연출부의 경력 주안점을 어디에 두는 것이 좋은가’란 고민 또한 하게 되었다. (CG 업체 출신일 수도 있고 CG 담당을 많이 한 연출부일 수도 있고 미술팀 혹은 애니메이션 경력의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고민은 다음 프로젝트에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된다. 이야기는 민예지 작가(< 달리는 차은 >)와 둘이 시작했다. 짧지만 강력한 그리고 3D, CG 크리쳐 등 테스트 목적의 사안들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필요했다. 첫 회의 중 나온 서번트 증후군 아이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그렇게 시나리오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윤곽이 나오고 감독님과의 각색 작업을 거쳐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프리 작업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미술팀, CG팀, 연출팀이 고민한 판타지 세계에 대한 합의였다. 꽤 긴 시간, 많은 콘셉트 아트의 결과물이 버려졌다. 각자의 다른 관념과 이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 테크닉적인 부분의 실현 가능성 등이 이슈였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새와 주인공 수민( 김수안 )이 빙판 위에 마주 보고 서 있던 그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채택되지 않았으나 그 이미지의 강렬함이 인상적이었다.) 누가 과연 사람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을 쉽게 그릴 수 있겠는가? (대부분 우리가 보아온 몇몇 영화 속 이미지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혼은 과연 어떠한 움직임을 보일 지에 대한 상상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3D 효과의 장점 또한 살려야 하니 인물 움직임의 방향성이나 그에 따른 촬영방식 등 고민이 많이 필요했다. CG를 위한 배우의 바디 스캔부터 와이어 촬영. VFX, 음악과 사운드 이펙트까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요소들이 결합되어 영혼 분리 장면이 완성되었다. 수민 역의 배우를 찾기 위해 200명가량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번 역시 쉽게 나타나 주지 않았다. 그러다 기존의 배역 연령을 수정하면서까지 한 아이를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 배우가 김수안 이었다. 이제는 관객 대부분이 그 얼굴을 한 번쯤은 보았고 또 기억할 만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배우다. < 숨바꼭질 > < 차이나타운 > (현재는 < 부산행 > 촬영 중이다) 에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수안이는 연기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당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 우주로 날아간 로켓처럼 신비롭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촬영 내내 우리는 그녀의 놀라운 집중력, 이해력, 체력, 자연스러움, 센스 등을 보고 감탄했다. 내 기억으로는 수안이 때문에 NG가 났던 경우는 없었을 정도로 완벽했다. 심지어 여섯 살 동민 역의 지성이를 가르쳤다. “그렇게 연기하려면 하지마. 넌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김우형 촬영감독님과는 세 번째 작업이었다. 오랜 팬으로서 그분과 작업하는 것은 어떠한 특혜 같은 느낌이다. 대부분은 눈빛으로 말씀하신다. 난 그 무언의 감정과 커뮤니케이션이 좋다. 여담이지만 몇 해 전, 팬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김태용 감독님과 김우형 촬영감독님에게 서로를 언급했는데 요지는 두 분이 함께 작업하는 영화를 언젠가 꼭 봤으면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물론 두 분은 그전부터 지인 관계였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만추 >의 작업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울컥하기까지 했다. 작은 소원 하나가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그랬으니 < 피크닉 >의 작업은 얼마나 더 했을까.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작업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했고 그만큼 부담감도 컸던 기억이 난다. 덧붙임. 1. 고흥은 참 먼 곳이다. 요즘 어떠한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대부분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은 없을 텐데 이곳은 거의 여섯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고즈넉한 금탑사, 외나로도의 풍광은 자연 그대로 운치를 가졌으며 촬영 여건으로도 매우 좋았던 기억. 지리적 위치 때문에 11월 중순까지 단풍이 머무는 곳이었고 멋진 비자나무가 가득한 숲이 있고 한가로운 포구가 있었다. 나로호의 이름은 나로도에서 온 것이며 이곳이 발사 장소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전국에서 인구 분포가 가장 적은 곳이기 때문이란다. (추진체의 낙하 등 여러 이유에서 사람이 없는 곳이 당연히 유리해 보인다) 2. 이곳의 명물은 사실 따로 있었다. 나로호, 우주인 이런 것이 아니라 뜨끈한 달걀 후라이가 올라간 ‘우주반점’의 짜장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그 해 먹은 음식들 중 이 짜장면을 최고라 여겼다. 그건 옆에서 함께 한 수안이 때문이었는지, 백반으로 지겨워진 식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먹어 본 역대급 짜장면이었다. (우리팀은 요즘도 우스갯소리로 고흥 가서 짜장면이나 먹고 오자고 한다. 물론 쉽지 않다.) 3. 학교 놀이터 장면에 등장하는 우주인은 우리가 묵던 숙소 로비에 있던 조형물이었다. 이 호텔에 러시아 우주과학자 등 많은 연구인이 머물렀다고 한다. 로비에는 그들의 선물인 마트료시카 인형도 전시되어 있다. 촬영 중 묵어 본 이색 숙소 중 하나. 다시 또 제주에서 만난 < 그녀의 전설 > “유진아~ 엄마는 이제 산으로 간다” 바다의 인어, 해녀 엄마가 어느 날 사라졌다. 바다가 지겨웠던 걸까? 엄마는 곰으로 나타나 산으로 들어갔다. 신화와 설화의 천국 제주. 그 제주에서 또 하나의 전설로 남은 한 해녀 이야기. 우리는 언젠가부터 해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환상의 무대 제주 그리고 강인한 여성 해녀. 과연 우리는 한 해녀의 죽음을 어떠한 형식의 장례로 치룰지 고민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한바탕 춤과 노래가 펼쳐진다. UHD, 제주 날씨, 수중 신, 뮤지컬, SFX, VFX, 아역 배우 컨트롤 그야말로 종합선물 세트가 그 뒤를 따른다. 지난 피크닉의 작업이 3D와 VFX에 대한 여행이었다면 이번 그녀의 전설은 SFX 특수효과에 관련한 것이었다. 실종된 해녀가 곰이 되어 돌아온다는 설정. 예산과 한정된 작업 기간, 무엇보다 배우들끼리의(곰과 타 배우들) 보다 긴밀한 교감(인터렉션)이 필요한 드라마였기 때문에 우리는 SFX로 접근하였다. CG 크리쳐를 만드는 작업이 아닌 쉽게 말해 진짜 같은 곰(탈)을 만들어 필요한 부분을 후반에서 CG로 덧입히는 작업의 방식을 택했다. 애니메트릭스는 십여 개의 얼굴 뼈대를 심고 이를 리모트 컨트롤로 작동시키는 원리다. 턱의 상하 움직임, 입술 근육, 눈두덩이 근육, 눈의 깜빡임, 귀의 움직임 등이 두 대의 컨트롤러로 작동되었다. 그리고 특별한, 예로 의인화된 곰의 과장된 표정을 원했던 샷들은 후반에서 CG 얼굴로 갈아 끼우기도 했다. 즉 곰은 그 곰 슈트 자체로 진짜 곰처럼 보여야 했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의인화된 곰이기도 해야 했다. 접근에 따라 다양한 쇼트플랜이 요구되었다. 약 두 달간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곰 슈트가 만들어졌다. 곰의 움직임을 연기할 배우의 3D 바디 스캐닝 작업부터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곰의 근육과 털, 그리고 기술과 노하우의 집약체인 곰의 헤드까지 거의 하루도 쉬지 못하고 SFX팀의 작업이 이어졌다. 움직임은 동물의 동작에 관한 연구를 한 무용수 출신의 (< 피크닉 >의 만화 속 공주 - 이초희 배우의 움직임을 담당하기도 했던) 김재리 선생님이 담당하였고 실제 곰 안에서 움직이는 배우 역시 현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김기범 무용가가 맡아주었다. 인체의 비율 때문에(엎드리면 뒷다리가 너무 길다. 굽히면 다리의 너비가 넓어지고, 거기에 앞다리부터 뒷다리의 길이, 허리 부분이 인간이 훨씬 짧다) 어쩔 수 없이 실제 곰과 차이가 나기도 했지만 촬영 때 앵글의 선택, 동작의 방향을 활용해 최대한 이를 보완하려 노력했다. 실제 촬영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배우가 곰 슈트를 입고 십 분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메카닉이 들어간 헤드의 무게와 모터소리 때문에 배우는 거의 패닉 상태였다. 거기에 화창한 봄날의 기온은 거의 호흡 곤란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중간중간 산소통을 통해 배우의 상태를 관리했지만 전신 털 옷을 두르고 무겁고 빡빡한 헤드를 쓰고 연기를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우의 시야 확보는 외부 털에 심어진 초소형 카메라에서 보내는 영상을 특수 안경으로 확인하는 방식. 4족 보행이냐 2족 보행이냐에 따라 카메라의 위치가 달라지므로 이 역시 세팅 시간이 필요했다. (움직임 때문에 손과 발도 2족과 4족의 형태가 달랐다.) 디렉션과 상대 배우의 대사 등은 인이어 시스템으로 해결되었다. 이러한 곰의 상태는 촬영 시간을 압박했다.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든 작업이었다. 거기에 오락가락하는 날씨(계속 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컨트롤이 되지 않는 아역배우, 뮤지컬 팀의 안무 합 등 현장에서 많은 기다림의 요인들이 진행을 더디게 만들었다. 이번 작품에도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만남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은희 선생님을 만난 것이었다. 예의 다른 작업처럼 이번 역시 캐스팅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엄마 역(목소리 연기)을 맡아 주실 분이 쉽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 우선 제주 방언이 필수고 해녀 분들의 이야기라 실제 해녀 분들을 여러분 만났지만 늘 연기력에 대한 부분이 발목을 잡았다. 연기력을 고려해 제주 내 극단의 배우 분들도 만났고 성우, 제주 출신 배우들까지 알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소득이 없던 차, 제주 씨네마테크의 오주연 대표님 아이디어로 제주 출신이신 은희 선생님을 섭외하기에 이르렀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셨던 ‘꽃 반지 끼고’ ‘사랑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곰의 목소리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곰의 몸이 만나 ‘그녀’가 완성되었다. UHD라는 콘텐츠의 포맷은 제주와 잘 어울렸다. 자연, 스펙터클한 풍광을 담기에 좋은 고해상도의UHD는 그중에서도 제주의 아름다운 심해를 훑고 다닐 때 그 느낌이 배가 되었다. 수중촬영 역시 그 과정이 녹록하지 않았다. 우선 날씨에 민감한 작업이고 물 때와 해녀 분들의 컨디션에 따라 섭외, 촬영이 가능한 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약 1주일간의 촬영이 별도의 유닛으로 진행되었다. 영화 현장은 늘 변수들이 발생하고 조감독은 이를 제작팀과 상의하여 다음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뒤로 막힌 스케줄과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하나의 빠른 판단은 많은 것을 바꾼다. 시원하게 퍼부으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비는 오락가락 내렸다. 대기 시간은 그저 소비되는 것. 차라리 휴식이라도 제대로 하면 좋으련만. 결국 스케줄은 다시 꼬이게 되었지만 먼저 쳐낼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 바로 진행 수정에 들어간다. 스텝들이 이동하는 사이에 새롭게 장소를 섭외하고 다른 신을 찍었다. 그렇게 선방하고 다시 퍼즐 맞추듯 스케줄을 수정하니 어느덧 일주일간의 촬영이 끝이 났다. 그녀는 해녀들에 둘러싸여 먼 길을 떠났다. 음 우리 엄마가 곰이 되어 산으로 간다고 하면 그래도 살아있음에 기쁠까? 아니면 이 헤어짐도 죽음과 같아 슬플까?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결국 부재하는 것이지만 본인이 희망하는 곳으로 갔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덜 슬픈 것도 같다. 이번 영화도 나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던졌다. 외적으로는 조감독의 역할에 대한 재고였고 내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영화적 표현에 관한 것이었다. 아울러 정말 많은 요소들이 배치해 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준비하여 하나씩 해결해 나갈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덧붙임. 1. 유진( 최강희 )의 아들 민호 역의 호영이는 헌팅지에서 만난 아이였다. 집 후보지였는데 그날 잠시 놀러 온 그 집 손자였던 것. 그 짧은 인연이 캐스팅에까지 이르렀다. 2. 제주 월정리의 ‘고래가 될’ 까페는 몇 년 전부터 즐겨 찾던 곳이었는데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이곳이 은희 선생님의 자제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세상이 참 좁기도 하고 인연이란 것이 참 놀랍기도 했다. 선생님 덕분에 이곳에서 맛있는 회식 시간을 가졌다. 3. 얼마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그녀의 전설이 다시금 관객과 만났다. 혹시 놓치신 분들은 10월 중순 제주영화제에서 만나시길 희망한다. 네 번의 영화 여행을 돌아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대부분 그 시간이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돌이켜 보는 과거는 늘 긍정적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아마도 기쁨의 순간들이 핵심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겠지) 어떤 날은 개인사로 감정이 격해져 있었던 날도 있었을 테고 어떤 날은 마냥 이 사람들이 좋아 기분이 좋았던 날도 있었던 것 같고 어떤 날은 이 시간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다. 여행은 결국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처럼 이 영화 여행도 끝은 있을 것이다. 언제가 마지막일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나의 포지션이 무엇이든 난 이 일련의 의미 있는 단편 작업을 지지할 것이다.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영화 스태프라는 직업은 그 고민을 주 업무로 하는 직업이다. 얼마나 재미있고 행운인 직업인가. (때에 따라 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그림을 함께 그리느냐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조감독은 하나의 트레일을 만드는데 가이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스케줄을 확인하고 목표한 길을 가기 위해 제반 사항들을 점검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감독이 트레일을 개척할 때 그것을 가장 먼저 목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네 번의 트레일은 소중한 인연들과 만든 아름다운 길이었다. 그 안에서 열정을 보았고 내 열정을 나누었다. 앞으로 10년 뒤에도 그런 길을 닦는 데 함께하고 싶다. 오늘 밤도 영화를 만들며 살 것인가? 영화처럼 살 것인가? 고민하다 잠이 든다. 내게 영화는 아직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