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원 통합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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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정보
골드미스 예지원 토토캠프에 가다
- 제작년도
- 2009
결혼식 후에
- 감독
- 김윤철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신성우, 예지원, 배수빈, 김보경, 이해영, 서유정, 윤희석, 차수연, 고아성, 이도일, 김무열, 윤소정, 김다인, 이화선, 이건, 이혜인, 이준의, 이일섭, 정재진, 문성혁, 김루비, 판유걸, 공정환, 이정훈, 이혜미, 성운아, 박기은
예지원
- 참여 작품
- 피렌체 (2025), 영화 청년, 동호 (2024), 배니싱: 미제사건 (2021), 인트로덕션 (2020), 그녀의 비밀정원 (2019), 기방도령 (2019), 화장 (2014), 우리순이 (2013), 우리 선희 (2013), 고령화 가족 (2013), 설마 그럴리가 없어 (2012), 내가 고백을 하면 (2012),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2012), 초대 (2011), 더 킥 (2011), 달빛 길어올리기 (2010), 하하하 (2010), 결혼식 후에 (2009), 소년, 소년을 만나다 (2008), 당신이 잠든 사이에 (2008), 눈부신 날에 (2007), 죽어도 해피엔딩 (2007), 올드미스 다이어리 (2006), 귀여워 (2004),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003), 2424 (2002), 생활의 발견 (2002), 아나키스트 (2000), [뮤직비디오]남겨진 사랑 (1999), 1996 뽕 (1996)
수집자료
당신이 잠든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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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미스 예지원 토토캠프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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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난][영상]더뮤지컬어워즈 레드카펫_ 바다, 조승우, 차지연, 예지원, 리사, 홍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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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원 “액션배우라고 우쭐대다가 액션의 신 앞에서 혼쭐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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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킥' 예지원, "올해 부산영화제 주인공은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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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인터뷰] '더 킥' 예지원 "뒤후리기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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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월간스크린]귀여운 콩가루 가족: <귀여워>(김수현, 2004)
2004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김수현 | 각색: 김소정 김봉훈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김철주 | 미술: 박혜성 | 음악: 이병훈 CAST 순이: 예지원 | 963: 김석훈 | 뭐시기: 정재영 | 개코: 박선우 | 장수로: 장선우 | 막내: 박희순 사연은 이렇습니다. 박수무당인 장수로(장선우)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네들에게 씨를 퍼트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탄생합니다. 퀵서비스맨 963(김석훈), 레카차 드라이버 개코(박선우), 그리고 조폭인 뭐시기(정재영). 여기에 순이(예지원)이 가세하며 가족을 이룹니다. 순이는 길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우연히 개코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장수로는 젊은 순이에게 연정을 품죠. 이처럼 < 귀여워 >는 어느 콩가루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실외와 실내 모두 이뤄졌습니다. 실외는 2002년 11월, 실내는 2003년 1월이었는데요, 영화 개봉이 2004년 11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꽤 간격이 큽니다. 원래는 2003년 5월 개봉이었는데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죠. 공개된 장면은 뭐시기가 아버지 장수로를 찾아온 신입니다. 동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데요, 딱 봐도 건달기가 줄줄 흐릅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건달과 합숙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는데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조폭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뭐시기를 바라보는 장수로 역의 장선우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파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있죠. 사실 <귀여워>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 < 꽃잎 >(1996) < 나쁜 영화 >(1997) 연출부 출신인데요, 자신의 데뷔작에서 스승을 배우로 모셔온 셈이죠. 원래는 한진희 씨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지연되면서 무산되었고, 이때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가 ‘장선우 캐스팅’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역할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엔 난처해하던 장선우 감독은 농담처럼 “한번 망해보자”며 승락했다고 합니다. 뭐시기가 앉아 있는 평상 근처의 풍경입니다. 황학동 철거촌 주변 아파트죠.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철거는 서울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황학동 아파트는 60년대 후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부의 상징이었는데 10년도 못 가 철거가 거론됐어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인데요, 끊임없이 변화가 이뤄지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세우고 부수기만 반복할 뿐이죠.” <귀여워>는 지금은 사라진 폐허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서울에 대한 기록의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나쁜 영화> 연출부를 끝내고 일란성 세쌍둥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김수현 감독은, 장수로와 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가 쉽게 풀렸고 그 결과물은 <귀여워>가 됐습니다. 963의 퀵서비스나 개코의 레카차 운전사는 모두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직업이라고 하는데요,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야생적 느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기 예지원은 < 생활의 발견 >( 홍상수 , 2002) 이후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니게 된 배우였죠. 그녀에게 ‘순이’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안성맞춤 캐릭터였습니다.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촬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 실내 장면은 양수리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03년 1월에 개봉된 세트 촬영 현장입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둘째 개코가 발톱을 깎으면서 맞이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신다면… 맞습니다.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성 듀오 ‘미스터 투’의 멤버 박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의 동국대학교 영화과 후배인데요, 파격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로 데뷔해 신인답지 않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박선우는 영화음악을 맡기는 줄 알고 연락을 받자마자 김수현 감독에게 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기다리는 건 ‘개코’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날 963은 오토바이에 순이를 태우고 질주하다가 함께 집에 들어오는데요, 순이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는 장수로는, 아들에게 순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아들의 뒷통수를 갈깁니다. 약간은 비뚤어지고 냉소적이면서 내성적인 963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역할일 텐데요, 김석훈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가 매우 특이합니다. 철거촌에 있는 집인데. 집 안도 철거되어 있는 셈이죠. 좁은 세트 안에서 앵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 예지원의 매니저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용수 였습니다. <귀여워> 시나리오를 읽고 “혹시 예지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쓴 시나리오냐?”고 물을 정도로 적역이었다고 하네요. 배우 역시 순이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준비 과정부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배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재영은 < 킬러들의 수다 >( 장진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류승완 , 2002)로 조금씩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거친 마초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뭐시기”라는 말을 붙이는 뭐시기는 철거반을 이끄는 건달인데요, 정재영은 거의 완벽하게 역할을 해냅니다. 장수로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도 섬세한 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장선우의 연기에 대해 현장 스태프들은 “연기와 연기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는 묘한 느낌의 연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김수현 감독은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감독은 <귀여워>가 결국은 “네 남자가 순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영화”라며, 남자들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귀여워>라는 제목의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감독은 < 창피해 >(2011) < 우리 손자 베스트 >(2017) 등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남자들은 무엇인가 계속 이뤄내려고 하죠. 세상이든 자신이든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정작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반면에 순이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요. 그녀는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상대에 반응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죠. 남자들이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해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자연에 동조하며,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모델이 순이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칼럼]파리에 도착한 <매혹의 서울>
약간은 더위의 기미가 남아 있던 10월 중순의 서울,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12시간 지나 도착한 파리는 단번에 가을의 핵심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스며드는 서늘한 기운과 흩날리는 나무이파리에 먼 곳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파리의 도심으로 향한다. 한 여름 더위 속 씨름하며 준비했던 한국영화특별전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파리의 중심부 포럼 데 알Forum des Halles에서는 매일 한국 영화가 상영 중이다. ‘한-불 상호 교류의 해 130주년’을 맞아 영화부문에서 첫 번째로 진행되는 행사가 바로 ‘매혹의 서울’. 포럼 데 알의 지하에 위치한 예술영화전용극장 ‘포럼 데 지마주Forum des Images’에서 9월 15일부터 11월 1일까지 한달 반에 걸쳐 76편의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한국 영화 포스터, 영화를 보기 위해 줄지은 사람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마주하게 된 이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문득문득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의 20대에는 프랑스 영화가 있었다. < 줄 앤 짐 >을 보면서 자유를 꿈꿨고, 감기는 눈을 비비면서라도 < 네 멋대로 해라 >를 끝까지 보아냈다. 그렇게 그 영화들은 내 청춘의 자산이 되었고, 영화를 공부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이제 반대로 한국영화를 관람하는 파리 관객들의 진지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포럼 데 지마주 관객 세계화 혹은 전지구화라는 말은 거듭되어 이제 진부해지고, 파리의 중년 여성들도 ‘샤이니’를 아는 현재, 파리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수용하는 방식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우리 관객들이 웃었던 즈음에서 웃었고, 비슷하게 숨을 죽였고, 우리나라 영화제에서도 들었음직한 질문을 꺼내놓았다. 역시나 우리나라의 흥행작이었던 < 괴물 > < 국제시장 >에 많은 관객이 몰렸고, < 휴일 > < 청춘쌍곡선 >과 같은 고전영화에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 무산일기 > 같은 최근 영화에는 젊은 관객층의 비율이 한결 높아 보였다. 다수의 영화에서 “일상적 폭력의 수위가 높다”,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며 최근 한국영화의 표현적 특징을 짚어내기도 했다. 게스트로 초청된 배우 예지원 씨는 < 귀여워 > < 생활의 발견 > 상영에 참여해 관객들과 성심 성의껏 대화를 풀어나갔고, 샹송과 아리랑, 전통무용을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유머코드로 활용되는 그녀의 샹송은 프랑스관객에게는 자국문화에 대한 관심이었고, 한국의 대표 배우이자 예술인으로서 관객들과 정중한 시간을 만들었다. 상영이 끝나고 몇몇 프랑스 관객은 한국어로 질문을 하며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오랜 공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지원 하지만 여전히 한국이라는 비서구를 경이롭고 낯선 타자의 위치에 놓으려는 그림자도 엿보였다. 영화제 기간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화는 < 마돈나 > < 영도다리 >였다. 여성 육체에 대한 폭력을 통해 한국을 과잉된 폭력으로 물들어 있는 현실로 재현하는 이 영화들이 우리에게 관습의 정서적 한계를 묻는 독립영화적 감수성으로 다가온다면, 프랑스 관객과 평단은 이를 한국영화를 이해하는 진입의 문으로 여기는 듯했다. 과거 < 씨받이 >가 그랬던 것처럼, 여성에 대해 암묵적으로 용인된 성폭력이 비서구의 정체성을 이루고, 그 표현적 수위에서 한국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해이든, 오해이든 한 지역에 대한 깊은 관심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80편에 가까운 영화를 모아 상영하고 묻고 토론했다. 이 도시특별전은 포럼 데 지마주의 전통과도 관계가 깊은 것이었는데, 포럼 데 지마주가 위치한 포럼 데 알은 파리 1구로 오랜 중심지이자 흥망성쇠를 거쳐온 곳이었다. 서울로 치면 종로쯤 되는 이 지역은 활발한 시장이다가 한 때는 아무 것도 없는 공터이다가 현재는 거대한 규모의 리모델링중이었다. 포럼 데 지마주는 포럼 데 알에 대한 영상자료를 모으며 아카이브로 성장했고, 점점 범위를 넓혀 파리에 대한 자료는 어떤 차별 없이 모으고, 외국인 저널리스트가 관광객의 눈으로 기록한 영상까지 회수하면서 차근차근 자료를 축적해왔다. 그리고 이제 그 눈을 다른 도시로 돌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에 대한 충실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타자에 대한 관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행지에서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는 것, 낯선 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는 이중의 여행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멀리 날아간 파리에서 우리 영화를 보는 것, 그리고 우리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어딘가 도돌이표 같은 여정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세계를 보는 혹은 친숙한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시선의 여행을 끝마친 기분이다.
달빛 길어 올리기 Hanji
나는 < 달빛 길어 올리기 >가 나의 백한 번째 영화가 아니라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감독의 첫 번째 작품으로 불리고 싶습니다. 지난 백 편의 작품에서 도망쳐 새로운 느낌의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임권택 은 여러 자리에서 말했다. 두 번째 데뷔작. 다시 시작한다는 말. 영화사에는 두 번째 데뷔작의 역사가 있다. 이를테면 1950년, 로베르 브레송의 < 시골사제의 일기 >. 1978년, 고다르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인생)>. 1979년,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 카메라 광 >. 1996년, 후 샤오시엔의 < 남국재견 >. 이들은 물론 각자 서로 다른 이유에서 이 영화들을 자신의 두 번째 데뷔작이라고 불렀다. 나는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보면서 그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두 번째 시작한다는 말. 이제까지의 영화를 제로라고 선언하는 것. 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혹은 생겨난 것일까. 말하자면 결단. 그런데 어떤 결단? 서로 다른 판본의 대답. 그는 무엇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무엇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일까. 당신은 이 두 가지 질문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무언가 중단되어야만 했다. 두 개의 무엇. 나는 < 달빛 길어 올리기 > 앞에서 문득 멈추었다. 임권택은 무엇이 채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영화 안에서 중단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해야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중단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한 말. 그래서 백 편의 영화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표현. 도망치다. 왜 버린다고 말하지 않고 도망친다고 말한 것일까. 임권택은 완전히 포위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백 편의 영화라는 병풍. 나는 거슬러 올라가면서 셈하기 시작했다. (백 번째 영화) < 천년학 >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아흔아홉 번째 영화) < 하류인생 >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로부터 도망쳐야 한다. 나는 백 편의 영화 안에서 한 편씩, 한 편씩 차례로 그 안에서 도망쳐야 한다, 는 말을 생각해볼 것이다.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나면 두 번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뜻이다. n + 1. 언제나 이미 시작된 시작. 이때 도망치면서 (두 번째로 만든) 첫 번째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는 말은 말하자면 n - 1 이라고 불러볼 수는 없는 것일까. 거기서 멈추기. < 달빛 길어 올리기 >에서 무엇을 빼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에 대해서 모두들 무엇을 새로 더했는지를 셈하였다. 나는 반대로 그가 일백 편의 영화로부터 도망친 다음, 혹은 도망치기 위해서 시도한 뺄셈을 생각해보고 싶다. 하지만 이때 뺄셈을 시도하게 되면 우리는 다소 난처한 논제와 만나게 된다. 거기서 빼야 하는 것은 이제까지 우리들이 임권택 이라고 불러온 영화적인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것만을 우리는 뺄셈에서 셈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세계의 일부를 뺄 수 있는 그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계는 언제나 영화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셈을 시도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이제까지 만들어진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 가장 반(反) 임권택적인 영화가 된다는 사실이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이제까지 임권택이 만든 일백편의 영화와 싸우(기 시작하)는 (첫 번째) 영화이다. 혹은 외면하려는 영화이다. 이때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임권택 영화냐고 근본적으로 반문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나는 <달빛 길어 올리기>가 지나칠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어서 두렵게 느껴진다. 그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담은 영화.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임권택 영화 안의 내재적인 기호들 사이의 네트워크 안에서만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이 사실을 임권택이 모를 리가 없다. 임권택이라는 일백 칸의 방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 그 집을 등 뒤로 하고 다시 그 집의 주인이 ‘도망치듯이’ 떠나기로 결심을 했을 때, 누구보다 그 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그가 거기서 나가려고 할 때, 그 집 문을 걸어 잠그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임권택 그 자신일 것이다. 두 명의 임권택. 아니, 백 명의 임권택(들)과 한 명의 임권택.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임권택(들)과 거기서 도망치고 있는 임권택. 그런데 그 집에서 어느 문을 열어야 거기서 나갈 수 있을까. 그 문을 어떻게 열 수 있을까. 무거운 빗장들.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정말 문일까. 그런 다음 마침내 이 질문을 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문을 열고 문턱을 넘자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상한 시작. < 달빛 길어 올리기 >의 첫 장면은 “이 영화는 전주시에서 추진 중인 조선왕조실록 복본화(複本化)사업을 담당했던 공무원들의 실화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라는 자막이다. 두 가지 사실. 첫째, 이 사업은 전주시와 한국고전문화 연구원이 2008년에 시작해서 (영화가 이미 2011년 3월 17일 개봉을 끝난 다음인) 2012년 7월에 완료하였다. 이는 태종에서 명종까지 13대에 이르는 조선 전기 왕조실록을 제작 당시의 원본에 따라 재현한 것으로 806권 614책 5만 5130쪽에 이르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15억 원의 국고를 지원했으며 이 작업을 위해서 전주를 비롯하여 전국 24개 업체에서 공급된 전통 한지가 3만 8,000장이었다. (조선일보 2012년 8월 29일자 김창곤 기자)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이 사업의 진행 과정 중에 기획된 다음 전주영화제가 제작하였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영화 안의 대사에 따르면) 2008년 7월 15일이다. 그러니까 전주시가 막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시작했을 때 시작한 다음 영화는 그 완성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끝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본화 사업의 성공 여부를 이 영화만 보고는 알 수가 없다. 종종 이 영화에 비판적인 글들은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전주시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 관한 정책홍보 영화라고 비평을 하지만 정작 이 영화는 그 사업에 별 관심이 없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함께 시작한 다음 그냥 중간에 끝나는 영화이다. 둘째, 첫 자막이 끝난 다음 첫 장면은 전주시청 강당 회의실에서 전주 시장이 새로운 업무를 맡은 직원들에게 인사발령 임용장을 나눠주는 데서 시작한다. 청소과에서 근무하던 7급 공무원 한필용 주사( 박중훈 )는 이날 한 스타일 한지과로 새로 배속된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내내 한필용을 따라 진행된다. 아니, 한필용이 등장하지 않는 씬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카메라로서의 한필용. 이야기의 동선으로서의 한필용. 이때 처음에는 이 첫 씬을 무심코 보았지만 이때 임용장을 나눠주기 위해 화면에 등장한 사람은 송하진 전주시장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권택은 종종 (주연이 아닌) 어떤 인물의 경우 전문적인 연기자를 사용하는 대신 거기에 걸 맞는 이들을 현장에 초대하여 이들에게 그 배역을 맡기곤 하였다. 이를테면 <태백산맥>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공산군 장교들을 연기하는 (그 영화 촬영 당시의) 영화담당 기자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자신이자 동시에 그 자신이 아니다. 그 대신 그 자신이 그를 연기한다. 이때 두 말의 차이를 생각해주기 바란다. 송하진 전주시장은 영화에 출연해서 그 자신이 항상 해 오는 업무를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이 행동은 그에게 익숙한 일의 일부이며, 그는 이 장면을 위해서 별다른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 달빛 길어 올리기 >에는 송하진 전주시장 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그 자신을 연기한다. 이 영화에는 세 종류의 연기자가 있다. 하나는 박중훈 , 강수연 , 예지원 , 안병경 처럼 전문적인 연기자들이 영화 속의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한다. 물론 그들은 전문적인 연기자들이다. 두 번째는 아버지 역으로 송길한 시나리오 작가, 한지 수집가로 김동호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한지제작소 사장으로 민병록 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전주시청 국장으로 장제국 동서대 총장처럼 임권택 의 지인들, 혹은 영화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이들이 자신과 서로 다른 배역을 맡아 연기를 한다. 그들이 아마추어의 연기자들이긴 하지만 종종 자신의 영화에서 그렇게 연기자를 선택하는 건 임권택에게 드문 일이 아니다. “만일 척 보고 믿을만한 얼굴이나 살아온 모양새가 나지만 연기가 안 되는 사람과 연기는 잘 하지만 도무지 그 일을 했을 것 같지 않은 겉모습을 지닌 연기자 둘 중 하나를 써야 한다면 그 역할이 단역이면 단연 전자지요. 왜냐하면 모양새가 안 나면 그걸 설득시키는데 한참 걸리는 거예요. 그게 영화인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세 번째 경우이다. 우선 기술적인 설명. 이 영화는 전문적인 연기자 박중훈에서 시작하지 않고 전주시장 송하진이 그날의 하루 일과가 진행 중인 생활의 시간 안에서 시작한다. 전주시장 송하진에게 그 일은 항상 하는 일의 일부이고, 그 장소는 그가 생활하는 업무 공간의 일부이다. 부디 아무 것도 더 하지도 말고 덜 하지도 말아 주세요. 그때 박중훈은 그 장소에 들어와서 그 일과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때 그 일과의 매카니즘 안에서 박중훈은 송하진과 연기해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박중훈의 쇼트는 송하진의 쇼트와 서로 마주 붙어야 한다. 자크 오몽의 지적. 위대한 연기자들을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순간은 나무 옆에 서 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연의 일부인 나무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나무와 경쟁해야하기 때문, 이라고 썼다. 이 첫 씬에서 임권택은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를 분리해서 찍은 다음 그 둘을 붙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둘이 하나의 프레임에 있는 경우는 없다. 프레임 안에서의 공존과 쇼트의 분리라는 문제. 이 방법은 < 달빛 길어 올리기 >에서 일관되게 몇 차례이고 상대를 바꿔가면서 반복되고 있다. 이때 나는 분리라는 문제를 생각하는 대신 두 개의 쇼트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했다. 임권택은 수없이 박중훈의 쇼트(라고 여기서 부른 연기자의 쇼트)를 찍어본 연출자이다. 그러나 송하진의 쇼트를 찍어 온 연출자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손쉽게 다큐멘터리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송하진이라는 실재. 박중훈이라는 드라마. 이때 이 분리에는 송하진이라는 실재 안으로 박중훈이라는 드라마가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견딜 수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송하진이라는 실재의 리얼리티를 포기할 수 없다는 어떤 구체적인 충실성에 대한 존중과도 같은 태도를 보게 된다. 이 장소에서 실재와 드라마 사이의 종합을 포기할지언정 그 둘의 어느 쪽도 다른 한쪽에 양보하거나 봉사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위한 어떤 위장도 없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 달빛 길어 올리기 >에는 실재와 드라마, 현실의 일부와 허구의 이야기,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야기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들, 그냥 간단하게 세계와 영화 그 둘 사이의 서로가 서로에 대한 침투를 시도하지만 임권택 은 여기서 둘 사이의 어느 쪽도 상처받기를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서 상처라는 말을 신중하게 사용했다. 현실이, 실재가, 세계가 상처 난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야기가, 연기가, 영화가 상처 난다는 말은 두 개의 연결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용서할 수 없는 미학적 흔적의 고통이 뒤따른다는 뜻이다. 이때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영화의 어떤 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일까. 종종 비평은 이 둘 사이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때로 이 둘 사이를 오갈 때 무언가를 위반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그것을 건드리면 안 된다는 약속이 있다. 물론 이때 여기서 그것, 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는 항상 미학적 전쟁터가 되었다. 대부분 우리들은 현실에서 시작해서 영화가 드라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아왔다. 종종 이 과정에서 한쪽은 다른 한 쪽을 위해 봉사하거나 혹은 일부를 잘라 내거나 때로는 변형을 가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쪽은 다른 한쪽에게 어떤 불순물이 되어서 과도한 잉여의 불연속성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임권택에게 많은 경우 그를 둘러싼 세계는 이야기의 풍경이었다. 종종 풍경은 텔레비전을 통해서나 혹은 미장센의 일부로 그 자리를 차지한 다음 슬그머니 이야기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런 다음 인물을 설명하거나 혹은 칭칭 동여매듯이 그의 운명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다음, 의 연쇄적 사용법. 그런 다음은 여기서 중단된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현실에서 시작해서 드라마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쇼트가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주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마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서로 마주하는 순간. 그 둘을 움직이는 서로 전혀 다른 운동의 기록.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주인공이 작동하는 방식의 이야기와 인물이 작동하는 방식의 세계 사이를 분리시킨 다음 그 둘을 마주보게 만들고 있다. 이때 이 착상의 잔상들이 이제 서로의 쇼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시스템을 건드리느냐는 질문이 되어 그 안에서 스스로 창조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하나의 차원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씬은 갑자기 이 영화를 원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자리에로 되돌려 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세 번째 씬. 늦은 밤. 귀가하는 한필용.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을 따라서 걸어오면 그 골목이 끝나는 자리에 집이 기다리고 있다. 뇌경색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 효경(예지원). 한필용의 등 뒤를 따라가면서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장면은 임권택의 모든 영화중에서도 특별하게 우아한 순간이다. 또한 필용과 효경이 이야기를 나누는 씬은 매우 간결하게 그 두 사람의 지난한 삶을 소개한다. 바람을 핀 필용 때문에 효경은 뇌경색으로 고생하게 되었고, 게다가 아내 효경이 한지 장인 집안사람이라 시댁으로부터 천대를 받았으며, 그 아내가 어려서 고향을 잃어버려서 간절하게 한번은 그곳에 가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쓰러진 아내. 되찾아야하는 고향. 이제 이 영화가 나아가야 할 운동의 방향은 이미 여기서 결정된 셈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임권택은 이 장면을 매우 고전적으로 연출하였다. 무엇보다도 박중훈과 예지원은 하나의 프레임 안에 대부분 공존하고 있으며, 그 두 사람의 쇼트는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롱 테이크로 멈춰 선 카메라 앞에서 두 사람의 동선이 딥 포커스 안에서 이어지거나 아니면 두 개의 쇼트 사이에 위 아래로 분리된 두 사람의 육체의 일부가 중첩된다. 여기서는 이미 앞서 본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가 분리된 것과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공간. 배우들의 연기. 그 안에 이야기 바깥의 실재는 그 방에 놓인 텔레비전 모니터 안에서 제한적으로 작동된다. 이때 임권택은 한편으로는 필용과 효경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방송물 <조선왕조실록 93년만의 귀환>을 보여준다. 이 방송 영상물의 쇼트가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독립적으로 우리에게 조선왕조실록의 역사에 관해서 알려주기 위해 등장하지만 그러나 이 씬 안에서 이 쇼트들은 부분집합이다. 왜냐하면 재빨리 필용의 시점 쇼트가 이 장면들을 씬 안으로 다시 봉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하진의 쇼트와 박중훈의 쇼트는 두 개의 모델이다. 그들은 각자 자명해보이지만 그러나 그 둘이 하나의 씬 안에 자리하는 순간 갑자기 세계와 이야기 둘 중 어느 쪽이 자명한 것인지 선택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롤랑 바르뜨라면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썼을 것이다. 세계와 영화 사이의 보이지 않는 틈새. 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용법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는 인물의 쇼트와 세계의 쇼트 두 가지 방법 사이를 따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다소 과도하게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집으로 들어가면 공존의 고전적인 운동에로 되돌아가고 세상 바깥으로 나오면 두 개의 분리된 쇼트들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세워진 위험한 범주들 사이의 마주침에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하고 싶다. 이 두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골목길. 여기에 한필용이 세계로부터 자기 집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달빛이 떨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는 장면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스테디캠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기나긴 쇼트. 이때 임권택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골목길을 걸어가는 장면 위에 송하진 전주시장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들려주는 (세계로부터의) 청각적 신호를 놓치지 않는다. 그의 등 뒤에 들러붙은 세계. 그런 다음 집 문 안으로 들어오자 그 청각적 신호는 중단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여기에 임권택 은 세 번째 차원을 더한다.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한지제작업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 그러니까 영화가 시작하고 22분의 지점, 이 자리에 카메라를 든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강수연)이 조수와 함께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등장. 지원이 나타나면서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두 편의 영화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가 한지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이 < 달빛 길어 올리기 >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영화 속의 영화. 그러나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원의 다큐멘터리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지 제대로 전체를 보지 못한다. (게다가 이 다큐멘터리 촬영 장면들은 별다른 사건 없이 그로부터 45분후, 그러니까 1시간 10분 정도가 되었을 때, 아직 영화가 40분이 더 남아있는 데도, “촬영 쫑이에요”라며 지원이 필용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물론 그런 다음에 다시 만나기는 하지만...) 임권택은 그녀가 만들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끌어들여 과도하게 어떤 미학적인 게임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지원이 등장하면서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그녀의 다큐멘터리와 함께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작업에 매달린 전주시청 공무원과 그 사업에 관련된 사업자들 사이의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이 영화를 갑자기 여기서부터 방향을 틀어서 한지 이야기로 옮겨간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처음 시작과 마지막 끝이 이상할 정도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이다. 한 가지 더. 의미심장하게도 그 자리에 모두가 목청을 높이며 서로 사업을 따내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진정한 한지 장인은 구석에 앉아 술에 취해 졸고 있지만, 그렇게 슬그머니, 이 장면에서 처음 등장한다. < 달빛 길어 올리기 >의 유일한 장인. 오직 그만이 천년을 견딜 수 있는 한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는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현실 속의 환상. 그런 인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혹은 적어도 (이 영화의 자막에 따르면) “공무원들의 실화를 토대로 한 이야기” 바깥에 있는 인물이다. 실재 안의 증후. 그러나 그런 인물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실망스러운 실재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동시에 등장한 두 인물. 그 둘은 서로 반대 반향에서 나타나서 이 자리에서 마치 교차하듯이 동시에 공존한다. 이때 지원은 영화와 세계 사이에서 영화 쪽을 향해서 우리에게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난 영화의 자리를 계속해서 일깨워주고 있다. 그녀는 영화와 세계 사이의 공백을 채워주기는커녕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거리를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 전시하고 있다. 반대로 이 한지 장인은 천년을 가는 종이라는 한지에 대해 품고 있는 내밀한 의심을 역설적으로 긍정하는 표상이다. 세계 속의 조건과 관계로부터 초월적 인물이라는 설정. 그 안에서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것의 긍정. 사실상 < 달빛 길어 올리기 >가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 관한 영화라면 이 한지 장인은 매우 불합리한 잉여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으로부터 한지에로 전회하면서 갑자기 이야기는 한지에 대한 존재론적 보증과 함께 세계와 이야기 사이의 부조화 사이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교환가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다소 서둘러 이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을 먼저 생각해보자.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산속 깊은 월곡 마을 폭포를 마주보며 한밤중에 보름달 아래서 한지를 뜰 때 그들 중 누구도 이 종이로 조선왕조실록을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 사업이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차라리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시키자면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이 진행 중에 (그것도 거의 초기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영화는 이 세 명을 놓고 한필용이 이들 사이를 오가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이때 이 영화는 무언가 자꾸 이야기 바깥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자꾸만 중단된다. 그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계. 그저 놓여진 세계. 아무 것도 더 이상 손 써볼 수 없고, 거기서 어떤 것도 손대서는 안 되는 세계. 사실의 집합. 존재의 현상들. 그 사이에 선 영화라는 기록의 매체. 그러나 임권택 은 눈앞에 있는 존재들과 현상의 특징들을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세계를 담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사태를 단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 달빛 길어 올리기 >에는 어떤 곤궁에 처한 입장 같은 것이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이상한 것은 영화 전체에서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매번 새로운 씬과 만날 때마다 그것을 느껴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시적이기는 하지만 세계 속에서 존재론적으로 허약해보이고, 세계는 자명해보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에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인물들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거리감을 끝내 좁히지 않으면서 서로가 서로의 유기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한 대의 카메라처럼 한필용은 계속해서 이야기와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그들 사이의 동선이 되려고 한다. < 달빛 길어 올리기 >는 그 안에서 거의 기복을 느껴볼 수 없는 영화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내내 대부분의 모든 것들이 그냥 거기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서서 자기의 반경을 넘어서지 않는 정도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이제까지 자기가 해온 삶에 대한 반복. 그 반복 안의 일상. 종종 그 삶을 전시하고 있는 듯한 인물들. 그런 다음 그 상태를 영화가 살짝 건드려보는 방법을 취한다. 지원은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선생님에게 한지란 무엇인가요. 작은 반응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씬들의 연속. 여기에는 어떤 결정적 행동이나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혹은 그 무언가를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영화와 세계 사이의 거리.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필용은 한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한지에 다가가기 위해서 그는 한지에 관한 정보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 다음 그 세계를 돌아다닌다. 한지라는 기호. 그를 둘러싼 수 없는 정보들. 반복적인 설명. 그때 임권택 이 발견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상한 대답. 그는 달빛을 바라본 다음 밤하늘에 휘영청 뜬 보름달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두 번째 밤 장면. 서울에서 막 사업을 승인받고 집에 돌아온 필용은 기분이 좋아서 아내를 마루에 나와 앉힌 다음 한 가득 물을 담은 세수 대야를 들고 오면서 “달 따왔다”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아내의 발을 씻겨주면서 고등학교 시절 불국사 수학여행을 갔을 때 효경이 써서 필용에게 건네준 이규보의 시를 낭송한다. “산속에 사는 스님, 달빛이 너무 탐나 물을 길러 갔다가 달도 함께 담았네, 절에 돌아와서야 응당 깨달았네, 물을 비우면 달빛도 사라진다는 것을” 이 영화 속의 네 명의 등장인물, 필용과 효경, 지원, 그리고 한지 장인의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달빛에 민감하다는 점이다. 달빛에 관한 시를 읽은 다음 그걸 건네 준 효경. 이 시를 읽고 “뽕 간 다음” 임신한 그녀와 결혼한 필용. 둘이 함께 차를 타고 갈 때 “달빛도 좋은 데 불을 끄죠”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필용이 아니라 지원이다. 그리고 달빛 아래서만 천년 가는 종이를 뜰 수 있다고 배우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한지 장인. 그 네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달빛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다. 달은 저 하늘에 뜬 것이며, 달빛은 세계의 구석구석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들만이 그것을 바라보고 그런 다음 느껴본다. 그 말뜻은 달빛은 세계가 아니라 이야기의 구석구석만을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가장 신기한 것은 필용을 매개로 한 효경과 지원 사이의 공명 현상이다. 이규보의 시를 쓴 사람은,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 효경이다. 필용은 지금 그걸 다시 효경 앞에서 낭송한다. 그러나 그 시로부터 영감을 얻어서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제목을 ‘달빛 길어 올리기’로 정한 사람은 지원이다. 지원은 그 시를 낭송할 때 (영화 안에서조차) 아직 알지도 못한 사람이다. 정확하게는 이 시를 낭송한 씬 바로 다음에 지원과 한지 장인이 등장하는 씬과 우리는 만난다. 그래서 이야기 속의 이 두 사람은 이 시가 불러낸 등장인물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것이 이 두 인물에게 이상하게도 시적인 감흥을 감돌게 만든다.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단어는 월곡(月谷)이다. 나는 이 지명이 전라북도 전주에 실존하는 마을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영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이름인지를 알지 못한다. (실제로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에 월곡리가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필용의 말에 따르면 “대구 어딘가에 있다고 하는데 거기는 아닌 것 같고”라고 효경에게 말한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아내의 잃어버린 고향 월곡을 찾아다녔고 이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지명이 이 영화를 자석처럼 이끄는 것은 이 이름이 ‘달빛이 떨어지는 계곡’이라는 뜻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이 장소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아내 효경의 개인적인 기억의 지명이었을 뿐이었다. 필용은 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의 고향을 찾기 위해 돌아다닌(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고향을 찾으러 다니는 장면이 나오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월곡은 이야기의 외곽에 자리한 호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규보의 시를 낭송한 다음 이야기 안으로 두 인물을 불러내고, 그런 다음 느린 속도로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서 한지에로 전회하면서 갑자기 월곡은 이 모든 인물들을 한 자리로 모으는 그 어떤 매개의 공간으로 조금씩 좌표를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이 장소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니라 오로지 한지의 세계 내 존재의 보증을 온당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필요해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소를 성립시키기 위해서 세계를 버리고 오로지 영화 내의 이야기의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 현존재의 세계라는 현상을 버려야만 들어올 수 있는 잃어버린 고향. 말하자면 종종 마술처럼 작동하는 그 어떤 비밀이 담겨있는 말. 자기가 태어난 곳, 장인이었던 효경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살았던 곳. 아주 오래 전 한지 장인에게 종이 뜨는 법을 가르쳤던 사람이 효경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그 장소에 이르러서야 듣게 된다. 월곡은 <달빛 길어 올리기>가 세계라는 현상과 이야기라는 구조 사이에서 끈질기게 두 개의 씬을 오가면서 반복적으로 겪는 불안 속에서의 영화적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갑자기 물러나는 장소처럼 보인다. 하여튼 일상적 흐름 바깥으로 나와야만 구할 수 있는 대답. 진정한 한지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나요. 그건 지금 세계 안에서 불가능하답니다. 왜냐하면 천년을 가는 한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헛된 것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버리고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거에요. 필용과 지원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한다. 네, 맞아요, 그것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나요. 과거의 유산 속에 있습니다. 그저 남겨진 것만 남았을 뿐입니다. 동어반복. 필용은 그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다. 지원은 여기서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실패했음을 느낀다. 다시 우리는 정신적인 대답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때 임권택은 자신이 쫓아낸 것을 여기서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정보의 세계. 존재의 표면들. 세계는 한지에 대한 질문 앞에서 자기의 수행적 차원이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거기엔 (천년을 가는) 한지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바깥으로 나올 필요를 느끼게 된다. 필요라는 요청. 그 무언가에게 해야 할 상징적 위임. 세계 속의 누구도 그 위임장을 받을 생각이 없다. 이때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는 것은 세계와 이야기 사이의 절대적인 분리이다. 그 사이에 생겨난 틈새. 월곡은 정확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런 다음 영화는 월곡으로 들어온다. 이때 당신은 이 영화가 다시 월곡에서 나가는 장면이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 전체는 두 가지 모두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이 영화 전체의 에필로그로 읽는 방법이다. 사실상 이 장면은 어떤 목표를 가지지 않은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의 행위는 이 영화 전체의 이야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1시간 38분 지점에서, 필용과 한지 장인, 그리고 그의 아들과, 금둔사 주지스님이 ‘사라진’ 월곡 마을 깊은 계곡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갈 때 화면 가득히 가로 질러 걸려있는 ‘출입금지’라는 플랫카드는, 물론 여기가 사람들의 손이 잘 미치지 않게 잘 보존된 장소라는 정보의 기능을 하지만, 오히려 더 나아가 세계로부터 떨어져나간, 현재의 시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불가능의 장소에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출입금지’의 영화적 표지판의 신호를 잘 알고 있다. 가장 유명한 예. 오손 웰즈의 < 시민 케인 >의 첫 장면. 혹은 타르코프스키의 <스토커>. 그들은 여기서 세계로부터의 어떤 간섭도 없이 ‘천년을 가는’ 한지를 만들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런 다음 이 자리에 필용은 차례로 초대한다. 처음에는 아내 효경을, 그런 다음 한지에 대한 다큐멘터리 < 달빛 길어 올리기 >를 만든 지원을 부른다. 지원은 카메라를 들고 이 장소를 찾아온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는 모두 끝났고, 이미 시사를 마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녀는 “선을 본다”면서 시사를 마치고 필용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전주를 떠났고, 그런 다음 그녀는 영화에서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찍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일까. 물론 가장 따분한 대답은 보충 촬영을 위해서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이 장면 전체는 세계 안에서 마주친 그 모든 한지에 대한 불만족에 대한 대답처럼 진행된다. 필용은 끊임없이 한지 장인에게 질문한다. “정말 여기서 천년가는 종이를 뜰 수 있을까요?” 한지 장인은 대답한다. “여기가 선녀님들이 내려와서 춤을 추었다는 전설의 폭포 계곡이여,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도원경이나 마찬가지여, 이런 데서 천년 종이를 뜨지 어디 가서 천년 종이를 떠”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도원경. 불가능한 장소. 말하자면 환상의 공간. 그냥 단 한 마디로 월곡. 효경은 여기서 잃어버린 자기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가 한지를 만들던 모습을 재현하는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지원은 진정한 한지를 만드는 장인의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자리에 온다. (세계 안의) 불만족에 대한 (이야기의) 만족스러운 대답. 이때 이 장면 전체를 읽는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이 장면을 모두 하나의 꿈으로 읽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꿈이 도피가 아니라 욕망의 실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좀 더 시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꿈을 유지하기 위해서 꿈 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내부라는 잉여를 보호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세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여기서 화면 가득히 보여주는, ‘출입금지’는 얼마나 적절한 보호막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 달빛 길어 올리기 >의 마지막 장면을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다음 이야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과도하게 초월적인 정신에 몰두함으로써 사로잡히게 된 지나치게 시적인 대답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장면은 어쩌면 세계 바깥에서 실현된 저승의 이야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낮에 그들은 잠들고 밤에만 일어나서 그들은 천년을 가는 종이를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잠들어버린 낮의 시간. 깨어난 밤의 시간. 여기에는 과거의 시간에서만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슬픔이 감돈다. 지나가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 그 시간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때 어쩔 수 없이 이 장면에서 바로크적인 슬픔을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상실한 것은 무엇일까. 거기서 느껴보는 멜랑꼴리.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이 어떤 행동도 완료되지 않은 것이지만(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 장의 종이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그냥 거기서 영화가 끝난다) 그들의 행위가 완수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행위가 충만했음을 알게 된다. 밤은 끝나지 않았고, 또 끝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떨어지는 보름달 달빛을 보면서 효경은 이렇게 말한다. 천천히 한 글자씩, 한 문장씩,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소리 내어 읽으면서 당신께서도 음미하시길. “달빛은 아무리 바라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아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는 친근한 빛으로 조용히 어둠을 밝혀요. 그 고요하고 은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질긴 한지의 품성이 달빛과 너무 닮았어요.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담담하고 조용해졌을 때 한지와 같은 달빛은 한가득 길어 올려질 거예요. 달빛은 길어 올린다고 해서 길어 올려지는 게 아니에요. 달빛은 그대로 두고 마음으로 그 빛을 보듬을 때 비로소 한가득 길어 올려지는 거예요” (계속) 2010년 118분 칼라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전주영화제 각본 임권택 각색 송길한 , 김미영 촬영 김훈광 음악 김수철 미술 주병도 편집 박순덕 박중훈 필용 예지원 효경 강수연 지원 안병경 덕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