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단춘
- 감독
- 권영순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윤인자, 김진규, 최봉, 김익환, 송돈상, 독우영, 구종석, 성소민, 김세라, 박성근, 이동훈, 양일민, 나소운, 윤왕국, 이원철, 최명수, 모정랑, 박혜림, 김문숙, 김혜영, 김보애, 김동례
<여명> 이후 ‘과부’ 전문 배우로 전환 이민자(李民子)는 이향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일본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안진상(安鎭相)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여명>(1948)을 통해서였다. 해방 후 <안중근사기(史記)>(이구영, 1946)로 한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후 34편째 제작된 작품이다. 뇌물을 받고 밀수를 묵인하려던 경찰관(이금룡 분)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이 사실을 자백, 밀수범을 일망타진케 한다는 밀수 근절용 계몽영화로, 이민자는 여기에서 어촌의 처녀 역을 맡았다. ‘이민자의 섬세한 표정은 앞날이 촉망된다’ (정용배, 「영화평 ‘여명(黎明)을 보고’」, 『자유신문』, 1949.3.25) 는 고무적인 평을 들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인천의 건설영화사 대표 최철(崔鐵)은 뒷날 배우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사진] 데뷔작 <여명>에서의 이민자 이민자는 2년 후 신상옥의 감독 데뷔작 <악야>(1952)에 여주인공 양공주 역으로 기용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될 뻔했으나 피난지 대구에서 촬영돼 부산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환도 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출발점으로 <미망인>(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전창근, 1956), <마인>(한형모, 1957), <유혹의 강>(유두연, 1958), <생명>(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행복의 조건>(이봉래, 1959) 등과 <과부>(조긍하, 1960), <내일의 태양>(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여인천하>(윤봉춘, 1962), <피리 불던 모녀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모녀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산호의 문>(엄심호, 1966), <슬픔은 파도를 넘어>(김효천, 1968) 등 모두 140여 편에 출연하게 된다. 절반 이상이 주연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감독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유정무정>(1959), <회정>(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정조>(1961), <여자의 일생>(1962), <형부와 새 언니>(1964) 등 9편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단골배우가 되었다. [사진]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한 이민자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에서는 사회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미망인의 삶을, <유혹의 강>에서는 납북된 남편을 잊지 못해 수절하는 여자의 고행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혼혈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차별의 비애를, <마인>에서는 복수를 위해 위장 결혼한 여성의 마성을, <모녀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극단 가수의 사연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연하의 청년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쏟는 30대 미망인의 열정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초혼에 과부가 된 큰딸(용숙)의 빗나간 배금주의적 면모를, <갯마을>에서는 풍랑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과부 해녀의 애욕을, 그리고 <산호의 문>에서는 가정교사와 도색행각에 빠진 과부의 회한을 특유의 농염한 몸매와 감정선으로 표출해냈다. 그 대부분이 박복한 미망인, 과부 캐릭터였다. [사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연출작 <미망인>에서의 이민자,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녀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배역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파도가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막냇동생과 같은 11세 연하의 지배인 하지송(신성일 분)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우 마담의 대사는 육감적인 그녀의 개성을 함축한 것으로,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진] 이민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현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학업마저 포기하고 들어선 배우의 길 이민자는 1929년 4월10일 서울에서 한의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용량(李容瑯)이다. 다음은 그녀가 언급한 과거 회상기. “우리 집은 11대 선조가 충무공 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적으로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편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초등학교 때도 나는 쾌활하고 성미 급한 버릇 때문에 항상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적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학여중(경성 무학여자고등보통학교 : 필자)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같이 한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부모님 몰래 극장에서 현대극장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화려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극장을 찾아가서 책임자를 만났는데 의외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의 길을 선택한데는, 선천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민자. 「나의 데뷔 시절을 회상한다」 , 『스크린』, 1964년 9월호) 이용량이 학업을 중단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극장 연구부였다. 1944년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유치진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며 설립한 극단이다. 이민자라는 예명이 알려질 무렵 영화 <태양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출연하게 된다.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16세 때였다. 이 영화는 섬마을 초등학교 여교사(김신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제작(1944년 11월4일 명치좌 상영)된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해방 이듬해,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 지휘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숙질간이었다. 그는 조카를 단역으로 출연시키고 이민자를 발탁했다. 그녀는 잇따라 같은 해 6월 현대극장과 아랑이 통합해 만든 낙랑극회의 창단공연 <산적>(함세덕 작, 연출)에 황철, 이해랑 등과 함께 출연하고 2개월 후 <산홍(山紅)아, 너만 가고>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이민자는 이 무렵 7살 연상인 김진규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행복감 속에서 영화 <여명>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남편(김진규)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로 부각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1959년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남편이 영화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배우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처녀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고혹적인 관능미의 소유자 이민자는 1968년 은퇴 후, 5년 만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경영하며 재일 한국인과 재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으나 이혼 끝에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21년에 기생 강향난은 머리를 단발로 깎고 고학생의 무리에 뛰어들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단발하고 학생이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녀는 사회주의자로, 다시 여배우로 전신(轉身)을 거듭했다. 말하자면 그녀의 단발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을 향해 자신의 굳건한 의지를 선언하는 표식이었던 셈이다. 조선 ‘단발랑(斷髮娘)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강향난 이후에 가장 유명했던 단발랑은 역시 기생이었던 강명화였다. 대구 부호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연애 끝에, 결국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강명화는 유약하기만 한 연인을 무뢰배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삼단 같은 긴 머리카락을 스스로 끊었고 이 일화는 호사가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었다.(그녀의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는 1924년 < 비련의 곡 >과 1967년 < 강명화 >로 영화화되었다.)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그것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단발은 이후 한량과 사랑에 빠졌던 여러 기생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단발머리가 그저 여성들이 선택하는 여러 머리모양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던 1960년대에도, 자신의 실존을 단발머리를 통해 표현했던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영화 < 단발머리 >( 김수동 감독, 1967)의 유선하( 김혜정 분), 유미하( 남정임 분) 사촌자매가 그들이다. 뒤늦게 도착한 1960년대의 ‘단발랑’들 또한 세상의 인습적 시선에 기꺼이 싸움을 걸고, 자신의 의지와 욕망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선배들과 닮았다. 잡지사 취재기자인 미하는 처음부터 단발머리로 등장한다. 일에도 사랑에도 적극적이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거침이 없는 그녀에게 단발머리는 활동적인 커리어우먼의 상징과도 같다. 그녀는 세상에 나가 남성들과 겨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단발랑의 후예지만, 또한 맹랑하고 도발적이며, 도시의 향락문화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는 점에서는 1950년대 아프레걸의 후예이기도 하다. 그녀는 유부남이고 사촌언니의 애인인 취재부장 박무영( 신영균 분)과, 자신을 길들이려고 하는 동료기자 지철우( 이순재 분) 사이에서 감정적인 줄타기를 하지만, 현명하게도 유부남에 대한 동경은 첫사랑의 추억으로 돌려버리고 지철우를 선택한다. 그녀는 세상과 불화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영악한 단발랑이다. 그녀의 번민은 가볍고 세상은 그녀를 거부하지 않는다. 남자랑 댄스홀에서 차차차를 추다가 외박을 해도, 사촌언니와 사랑의 도피를 택한 박무영이 자신의 첫사랑이었음을 그에게 밝히는 순간에도 그녀는 당당하다. 외박은 했어도 남자와 동침은 하지 않고, 첫사랑 남자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릴 줄 아는 그녀는, 세상이 허용할 수 있는 단발랑의 도발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따라서 강명화가 걸었던 단발랑의 비극적 운명은 틀어올린 머리모양에 한복을 입고 조신한 아내/어머니로 살아왔던 선하의 몫이다. 그녀는 첫사랑 무영과 재회한 후 은밀한 만남을 지속하다가 그 현장을 남편에게 들키고 만다. 머리를 깎아 집안에 가둬두겠다는 남편이 아무렇게나 잘라버린 머리카락을 스스로 단발로 다듬고 난 후에 그녀는 한복을 벗어던지고 양장으로 바꿔입는다. 남편의 말마따나 ‘전축과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갖춘 집에서 “남자한테 얻어먹는” “제일 편한” 여자 팔자를 내던지고, 그녀는 무영과 함께 섬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난다. 그녀를 찾아온 남편과, 돈을 구하러 서울로 갔다가 마음을 바꿔먹고 돌아온 애인이 함께 그녀를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자,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이 개자식들아, 난 뭐냐? 난 너희들의 장난감밖에 안되니? 주고받고, 맘대로 농락해버리고.... 여자도 너희하고 같애. 나도 내 맘대로 살 수 있어” 그녀의 분노는 오히려, 바로 직전까지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었던, 자신이 정말로 갖고 싶은 세상 단 하나의 것이라고 믿었던 애인 박무영에게로 향한다. 남편이 들고온 칼로 무영을 찌르고나서 그녀는 자살한다. 칼에 찔린 무영이 아내와 미하가 지키고 있는 병실에서 의식을 회복하는 마지막 장면은 대중영화가 취할 법한 타협적인 결말이지만, 선하의 마지막 일갈은 그러한 결말을 덮어버릴 만큼 강렬하다. 여성의 단발이라는 오래된 문화적 클리셰를 불러온 것에서도 드러나지만, 이 영화는 식민지시대 이래 지속되어온 대중문화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시대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잡지사와 잡지에 연재되는 소설과 비평적 폄하에도 불구하고 저잣거리 저학력층에게 오랫동안 애독되곤 했던 딱지본 소설은 각각 잡지사 취재부장이자 인기 소설가인 박무영과 시장통에서 라사점(양복점)을 운영하는 고루한 현실주의자 남편의 세계를 상징한다. 선하는 집에 돌아오면 주판을 놓으며 돈계산을 하거나 “늙은이 같이” 딱지본 소설 <옥단춘>을 소리내어 읽는 남편의 고루한 세계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낭만적인 도시 젊은이들의 직업세계로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녀의 욕망은 잡지 연재소설과 딱지본 소설이라는 위계화된 문화적 지형도를 통해 정확하게 형상화된다. 그런 점에서 < 단발머리 >는 < 미몽 >(1936)에서 < 자유부인 >(1956)과 < 애마부인 >(1980)과 < 정사 >(1998)와 < 해피엔드 >(1999)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사에서 끝없이 반복되어왔던 ‘바람난 유부녀’ 이야기의 계보 안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여성들이 선택을 놓고 갈등하는 남성들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문화적 위계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발랑에서 잡지 소설과 딱지본 소설, 바람난 유부녀 이야기까지 <단발머리>는 말하자면, 식민지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온 문화적 자산들의 역사를 훑어가는 영화인 것이다.
1. 시대물에서 괴기물까지 50편 연출 권영순 은 1956년 시대물인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했다. 그는 1981년 < 사향마곡 >이란 영화까지 25년간 50편을 연출했다. 한국적인 영화제작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특정 장르를 고집할 수 없기도 하지만 권영순은 통속시대물로 감독 데뷔해서 코미디물, 액션물, 검객물, 반공물, 문예물, 괴기물, 멜로물 등 다양한 장르를 체험하고 선도했다. 그만큼 그는 영화감독으로서 행동 구역이 넓고 시각이 트였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영순은 왜 시대물로 감독 데뷔를 했는가? 나는 시대상을 통해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었다. 1956년은 한국영화사적으로 성장기였다. 1953년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포성이 멈췄다. 사회가 안정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도 차츰 제작 열기를 더 해갔고 1954년부터 57년까지를 성장기로 부른다. 이 기간 4년 동안 총 100편의 한국영화가 제작되었는데 1956년에 30편이 개봉되었다. 1956년 개봉된 한국영화 30편 둥 절반이 역사물과 통속시대극이었다. 전창근 의 < 단종애사 >와 < 마의 태자 >, 윤봉춘 이 < 처녀별 >과 < 논개 >, 이규환 의 < 심청전 >, 김소동 의 <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 정창화 의 < 장화홍련전 >, 김기영 의 < 봉선화 >, 안종화 의 < 천추의 한 >과 < 사도세자 >,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 홍일명 의 < 벼락감투 >, 신현호 의 < 숙영낭자전 > 등 13편과 권영순 의 데뷔작 < 옥단춘 >을 합쳐 14편에 달했다. 1956년은 정부가 서울로 환도했지만 전흔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어 멜로물과 청춘물이 자리매김하기 전 관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로는 역사물과 통속시대물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권영순 도 1956년 < 옥단춘 >으로 감독 데뷔한 것은 이런 영화 흥행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옥단춘>은 온갖 유혹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히 절개를 지킨 평양기생 옥단춘의 생애를 그렸는데 윤인자 가 타이틀 롤을 맡았고 김진규 , 최봉 이 공연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7년 권영순 은 김광주 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물 < 나는 너를 싫어한다 >와 라이트 코미디인 < 오해마세요 > 두 편을 감독했지만 흥행적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1958년 연출한 코미디물 < 오부자 >가 흥행에 대성공을 함으로써 일약 유명감독으로 단숨에 가치를 올렸다. 영화 <오부자>는 화목하게 살아가는 오부자(五父子) 가정의 아들 4형제가 합동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내용의 코미디물로 출연도 이종철 , 김희갑 , 구봉서 , 양훈 등 코미디언들 일색이었다. 이 영화는 1958년 4월 19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흥행바람을 일으키더니 그 여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제작자 권철휘 는 큰 돈을 거머쥐었고 감독 권영순도 스타덤에 올랐다. < 오부자 >를 감독한 1958년부터 1965년까지는 권영순 으로서는 감독 절정기였다. 감독 활동은 1981년까지 했지만 1958년부터 1965년 가지 이 기간 동안 권영순은 < 흙 > < 표류도 > 같은 문예물에 도전했고 대륙활극 < 정복자 >로 흥행의 줏가를 높였으며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 에서는 당대의 톱스타 김진규 . 김지미 . 김승호 . 박노식 등을 총출연 시켰으며 흥행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간 동안이야 말로 권영순 의 연출 감각은 최고 궝영순은 영출자로서 상승 곡선을 그었으며 다양항 장르를 체험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2, 폭 넓은 연출세계- 다양한 장르 섭렵 권영순 감독은 세 번째 작품 < 오부자 >가 흥행에 성공 했지만 코미디물이란 한 장르에 집작하지 않고 다양한 장르 섭렵에 들어간다. 그 당시 한국영화 게작계 풍토나 감독 자신의 안전 항해를 위하여 계속해서 몇 작품 코미디물을 연출할만한데 권영순은 안주정착하지 않고 재빨리 방향을 바꾼다. 네 번재 작품으로 멜로물 < 한 많은 청춘 >을 감독한다. 이 영화는 소매치기와 그의 도움을 받는 여대생과의 순정 연애를 담았는데 황해. 김미선이 주연했고 안성기 의 아역배우 데뷔작이기도하다. 이때부터 권영순 감독은 거침없는 다양한 장르 섭렵에 돌진한다.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권영순 만큼 여러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도 드물다. 통속시대물로 데뷔해서 코미디물, 멜러물, 문예물, 반공물, 앳션물, 검객물, 역사물에서 말년의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권영순 만큼 다양한 영화 쟝르를 소화한 감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연출시야가 넓고 감각이 빠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의 연출 작품을 장르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통속시대물 : < 옥단추 >(56) < 옥난 공주와 활빈당 >(60) < 가야금 >(64) * 코미디물 : < 오부자 >(58) < 오해 마세요 >(57) < 8통8반 여반장 >(64) * 멜러물 : < 나는 너를 싫어한다 >(57) < 한 많은 청춘 >(58)<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59) < 가는 봄 오는 봄 >(59) < 양지를 찾아서 >(59) < 장미의 곡 >(60) < 그리운 얼굴 >(60) < 정과 정 사이에 >(72) < 모정 >(72) <축배> < 산녀 >(73) < 불꺼진 창 >(76) * 역사물 :< 진시 황제와 만리장성 >(62) < 에밀레종 >(68) * 반공물 : < 국회 푸락치 >(74) * 문예물 : < 흙 >(60) < 표류도 >(60) *액션물 : < 목숨을 걸고 >(62) < 남아 일생 >(65) < 무적자 >(66) < 의리에 산다 >(70) < 6인의 난폭자 >(70) * 검객물 : < 비호 >(69) < 쌍용검 >(69) < 무정검 >(69) < 백면검귀 >(69) < 유정검화 >(70) < 복수의 마검 >(70) < 다섯개의 단검 >(71) * 괴기물 : < 대지옥 >(72) < 반수반인 >(75) < 용사왕 >(76) < 사향마곡 >(81) 권영순 이 연출한 50편의 작품을 살펴보면 기본이고, 반공물에, 액션물, 검객물에다 특히 이광수 원작소설 < 흙 >과 박경리 원작소설 < 표류도 > 2편의 문예물이 눈에 띈다. 그리고 권영순 감독은 말련에 괴기물에 심취하여 여기에 매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고 한 때는 다작 감독이기도 했다. 1960년과 1969년에는 한 해에 5편의 영화를 감독하기도 했다 한해에 최고로 10편의 영화를 연출한 한국 감독이 있기도 하지만 한 해에 5편 연출도 대단한 다작으로 봐야 한다. 권영순 감독의 다작과 1970년 전후해서 낮은 제작비의 검객영화를 빠른 기일 내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빠른 작업 속도가 큰 몫을 했다. 권영순 감독의 현장 작업속도는 영화계에서 최고로 꼽는 기능인이었다. 그가 빨리 작업을 진행한 날은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할 정도였다고 그의 조감독들은 증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3, 현장의 고집 센 기능주의자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고집 센 독재자였다. 그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업 진행속도가 빠른 만큼 감각이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그만큼 두뇌의 순발력과 회전이 팍팍 돌아가 촬영 현장은 <레디 고>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그대신 권영순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스탭들의 조언을 철저히 외면하고 배격하는 고집 센 독재자였다고 한다. 그는 조감독이나 촬영기자, 조명 기자의 조언을 일체 듣지 않고 자지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고 한다.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많은 권영순 감독이었지만 신통하리만큼 현장 촬영에는 한 치의 착오도 없었다고 당시의 조감독들은 증언했다. 그이 현장 고집은 유명해서 조감독이 조언하면 ''너가 감독되면 그렇게 하라''고 일축했다. 하기야 이런 고집과 뚝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하루 주야 120커트를 촬영했겠는가? 따라서 제작자들에게 권영순 감독의 인기는 최고였다. 촬영 속도가 빠른 만큼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제작비가 절감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촬영현장에서 진행속도가 빨라도 배우들의 연기지도는 권 감독ㅇ 몸소 시연을 해보일 만큼 적극적인 연출을 했다. 특히 액션물에서 격투 신은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지도를 했다고 한다. 이런 현장에서 열정이 촬영이 끝나면 엄습하는 허탈감을 떨치지 못한 탓인지 촬영장 밖에서는 술을 말술로 마셨다고 한다. 촬영장 안에서는 뜨거운 열정의 고집센 독재자였고 일상에서는 술을 사랑해 말술을 사양하지 않은 권영순 감독은 1992년 5월 23일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1923년 출생이니 69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여운이 남은 아쉬운 죽음이었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본명은 권영계(權寧桂). 일본대학 문학부 졸업. 유족으로는 부인과 스튜디어스 출신 외동딸이 남아 있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3년 3월 9일 경북 안동 출생 1992년 5월 23일 사망 1956년 < 옥단춘 >데뷔 <작품명> 1956 옥단춘 1957 나는 너를 싫어한다 / 오해마세요 1958 오부자 / 한많은 청춘 1959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 가는 봄 오는 봄 / 양지를 찾아서 1960 흙 / 표류도 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1965 모녀봉 1966 무적자 1968 풍운의 임난야화 1969 무정검 / 백면검귀 1970 유정검화 / 의리에 산다 / 복수마검 / 육인의 난폭자 1971 다섯개의 단검 1972 정과 정 사이에 / 모정 / 대지옥 1973 산녀 /축배 1974 국회프락치 1975 인사여무 / 태백산맥 1976 불꺼진 창 1988 칠삭동이의 설중매 등 5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