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전투
- 감독
- 황철민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천정표, 최창집, 김경제, 이재철, 김봉겸, 조만희, 조주현, 김성창, 변의수, 방의천, 이춘식, 주교종, 김장환
여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있다. 이제 그녀들은 예순,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깊게 주름진 얼굴에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꾸민다. 그리고 무대에 오른다. 그 곁에는 여전히 박수 치고 환호해 주는 팬들이 있다. 영화 < 왕자가 된 소녀들 >은 1950년대 여성국극에 평생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은 배우와 팬들의 이야기다. 임춘앵, 조금앵, 이옥천, 김진진 … <옥중화>, <햇님달님>, <공주궁의 비밀>, < 무영탑 >. 역사의 뒤안길에서 조용히 잊혀간 이들의 이름을, 그리고 여성국극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국극은 195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공연이었다. 남장여자들이 펼치는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에 공연장은 수많은 열성 팬들로 가득 들어찼고 배우들은 오로지 여성국극에 매료되어 에너지 넘치는 공연을 펼쳐 보였다. 그 시절, 이들은 지금의 아이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환호를 받은 스타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국극이 당대의 사회상과는 다른 독창적인 트렌드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에피소드들, 팬들의 요청으로 가상결혼식을 올리고, 학업도 결혼도 잊은 채 전국을 누비고, 동성애자들끼리 하와이에 이민을 가는 등 전성기 때의 여성국극은 그 안에 함의된 다양한 가치와 이념을 드러낸다. 그것은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문화에서 형성된 것으로 사회의 기존 보수적 가치와 대립하고,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그 옛날에도 동성애 문화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한 시대를 호령했던 여성국극도 60년대 들어 쇠퇴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다른 전통문화와는 다르게 보존되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서서히 잊혀 갔다. 영화는 여성국극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며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잊혀지는 것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녀들은 왕자를 기다리는 소녀가 아닌 스스로 왕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주체적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충족시켰고, 당대 문화적 아이콘으로 남을 수 있었다. 작년 8월, 최고의 미남배우로 여성국극의 최고 스타였던 배우 조금앵 씨가 별세했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그녀들의 열정을, 그리고 여성국극의 과거와 현재를 기억해주길 바란다. 여전히 그녀들의 삶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1925년 진도군 출생인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세무 공무원 부친을 따라 전남 지역 일대를 옮겨 다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시 목포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 세계를 접하게 된다. 식민지 말기 당대 명필(名筆)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이 박종민의 외가(外家) 인척(姻戚)이었기 때문에 목포극장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목포극장 직원들과의 인연은 1950년대 후반 시작된 박종민의 순업(巡業)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전남 화포(靴布) 배급조합 서기, 한국전쟁 와중 진도읍에 전력을 제공하는 전업(電業)회사 운영 그리고 휴전 이후 진도군 벽파진에서 염전(鹽田)을 운영하는 등 지역 내 사업가로 경험을 쌓았다. 지역 사정에 훤한 박종민은 1950년대 중반 목포극장 영사기사가 진도군에서 순업을 시작하자 그들의 편의를 봐주다가 직접 흥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전라도 지역 연예계 흥행사들이 모이는 광주시 호남동 태평극장 옆 ‘일등여관’에 들리면서 인맥도 쌓았다. 박종민은 영화 상영 이외에 창(唱)을 선호하는 지역민의 특성에 맞춰 진도에 ‘소리꾼’을 불러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영화 흥행으로 본격적인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은 국산영화 작품수가 늘어나고 필름 간접 배급 체계 정착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 초반 진도군을 떠난 박종민은 한양영화사라는 상호를 걸고 전남 곡성군 곡성읍을 시작으로 전국 순업의 길에 올랐다. 그가 곡성에서 영화를 상영한 곳은 논밭이나 마을 공터가 아닌 흥미롭게도 곡성문화원 건물이었다. 곡성문화원을 임대하여 당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마찬가지로 이틀에 한 번꼴로 35mm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으니 자연스레 손님을 많이 끌 수 있었다. 곡성읍은 1965년에 들어서야 단층짜리 중앙극장이 상설극장으로 개관했기 때문에 박종민의 한양영화사 활동을 대적할 경쟁자도 없었다. 곡성읍 다음으로 박종민이 찾은 곳은 충남 천안시 성환면(현 성환읍) 성환문화원이었다. 1958년 이미 천안시 천안극장이 개관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천안극장은 천안시 동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천안시 서북쪽 지역인 성환면 주민들은 극장을 쉬이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양영화사의 주야 2회 정기 상영과 화질과 크기에서 앞섰던 35mm 영화는 이전까지 성환면에 간헐적으로 들렀던 16mm 노후한 영사기 소지 순업과 비할 바 아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박종민은 곡성과 성환 지역에서 각각 1년 동안만 흥행을 올리고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다. 상설극장의 등장과 관객 숫자의 감소라기보다 지역 청년과 상이군인 단체의 ‘텃세’ 때문이었다. 한양영화사의 흥행을 지켜보던 지역 청년들이 문화원 건물에서 직접 흥행하겠다고 나서면서 연고(緣故)가 없는 ‘타지(他地) 사람’ 박종민은 계속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박종민은 문자 그대로 며칠만 머무는 방랑의 순업 길에 오른다. 그는 충남과 충북 그리고 경기도 일대를 떠돌며 흥행을 계속해갔는데, 그의 이동 경로(route)를 보면 순업이 1960년대 영화 상영의 전국화를 달성하는데 톡톡히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박종민은 성환면을 떠난 이래, 천안시 입장면과 예산군 삽교읍과 덕산면 그리고 충남 당진군과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일대를 거쳤다. 또한 경기도 남쪽의 평택군(현 평택시)과 화성군(현 화성시), 동쪽의 양평군 용문면과 이천시 장호원, 그리고 북쪽의 남양주시 덕소리를 지나 연천군 군부대 마을까지 두루 거쳤다. 영화가 상영되면 가설극장이 열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8km 이내 부락민이 밤길을 걸어 몰려들었다. 박종민은 건강상의 이유와 진도군에 남아있던 가족의 요청으로 1970년대 후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진도군 일대를 돌며 순업을 일삼았다. 박종민에게 순회 흥행은 때로 낭만이었고, 때로 남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동영사 일은 ‘건달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건달은 해방 전후 등장하여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한 ‘놀고먹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는 말이었다. 박종민의 표현대로, 건달은 “다방면으로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다방면으로 주먹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연애도 잘하고. 말하자믄 다방면으로 능숙한 사람들”이 건달이었고, 건달이 되어야만 영화 흥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내린 건달이라는 말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순업을 하며 평생을 보낸 흥행사의 애환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은 반공과 지연(地緣)의 질서가 작동하는 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흥행 보장을 위해 다양한 술수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 글: 위경혜
어느 여름날 올림픽 공원에 세 명의 젊은이가 모인다. 요아킴, LA, 허벌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세 사람은 각자가 부담하는 돈을 모아 함께 자동차 여행을 하고, 돈이 떨어지면 자살하는 `자살 여행`을 위해 모인 것이다. 핸드폰 배터리를 분리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린 일행은 이번 여행의 주제곡인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며 여행을 시작한다. 각자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해 이동하며, 돈은 한사람씩 돌아가며 지출하는 `자살 여행`이 첫번째 당도한 곳은 어느 소도시. 요아킴의 목적지인 이 곳에서 요아킴은 방향을 상실하고 거리를 헤매게 한다. 마침내 목적지로 보이는 곳에 도착한 요아킴은 아파트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하루가 지난다. 그곳을 떠난 여행은 이번엔 목적지 없이 밤새 달린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아침을 맞은 세 사람, 그들이 당도한 곳은 방조제가 있는 바다다. 여행을 떠나 처음 만난 바다는 아름답게만 보인다. 하지만 허벌레가 요아킴과 LA를 버려둔채 자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자 바다는 악몽이 된다. 노숙을 하였기에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른 이들에게 바다는 갈증과 짜증을 줄 뿐이다. 허벌레를 찾아헤매던 그들은 어느 갯벌에서 춤을 추고 있는 허벌레를 발견한다. 허벌레를 찾은 두 사람은 춤추는 허벌레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허벌레가 춤추는 갯벌은 생명이 말라가는 죽음의 갯벌. 죽음을 위해 떠난 이들과 말라버린 갯벌에게 허벌레의 춤은 처연한 위로처럼 보인다. 어느새 그들에게 남은 돈은 고작 5천원. 이들의 여행도 막바지에 이른다.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자동차를 달리기로 한 그들이 당도한 곳은 또 다른 소도시. 그곳에서 그들은 촛불을 켜고 함께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마을을 만난다. 이제 그곳에서 죽음을 준비해야하는 세 사람. 하지만, 그들은 자살 대신 삶을 선택한다. < 우리, 쫑내자 >는 어느 여름, `자살 여행`을 떠난 세 남녀가 목적한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세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 왜 자살을 하려하는지 따위 물어보지 않은 채 여행을 시작한다. 서로에게 무관심했던 그들은 길 위를 배회하며 겪는 갈등 속에서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죽음을 맞은 자연을 경유한 후, 함께 살아가고자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마침내 죽지 말아야할 이유를 만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이들이 찾아간 곳은 옥천과 새만금, 그리고 평택. 공교롭게도 이 세 지역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어깨를 걸고 함께 투쟁하던 곳들이다. 죽음을 만나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이들이 만난 것은 상실과 죽음이 아니었다. 홀로 있을 때는 외롭고 죽음이 가까이 온 것처럼 느껴졌지만, 서로 어울려 살아가려고 하는 삶의 의지를 만나면서 이들은 바뀌어 간다. 그들이 `쫑` 낸 것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여정`이었다. 세사람은 `자살` 대신 `삶`을 선택하며 `전쟁터 같은 삶`이만 어울려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황철민 감독의 < 우리 쫑내자! >는 감독의 전작 < 그녀의 핸드폰 >(2001)과 마친가지로 감독이 직접 촬영하며 최소한 스탭들이 배우들과 함께 이동하며 촬영한 로드무비이다. 전작과 다른 점이라면 스태프의 수가 늘었으며, 스태프를 위한 별도의 자동차가 있다는 것 정도. 영화는 연기자들이 이동하는 자동차와 조촐한 수의 스탭이 따라가는 자동차, 이렇게 두 대의 자동차로 실제 여행하며 간결하게 촬영되었다. 배우들과 제작진은 언론 권력에 맞선 언론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옥천`과 방파제 건설을 둘러싸고 갯벌과 자연, 사람을 지키려고 싸운 `새만금`,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며 평화롭게 함께 살고자 했던 `평택 대추리`를 여행하며,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을 담았다. 영화가 촬영된 2006년에서 5년이나 지난 지금, 그곳은 이미 다르게 변하였지만 영화를 통해서 다시 만나는 그곳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영화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질 것을 이야기하는 한 편,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 곳들의 풍경을 영화 안에 오롯이 남겨낸다. 이 영화가 가진 또 하나의 미덕은 바로 카메라가 잡아낸 그곳들의 모습이다.